팔공산의 두 번째 큰 별체는 도덕산군이다. 이 별체를 본체와 연결해 주는 혈(穴)에
대왕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왕건과 관련된 전설 때문이라고 인접 당정마을 한
어르신이 전했다. 왕건이 파군재로 전쟁하러 가거나 패해서 돌아갈 때 이 재를
지나갔다는 것.
그러나 대왕재에서는 그 남쪽의 도덕산(660m)을 오르기가 쉽잖다.
워낙이 깎아지른 절벽이 앞을 가로막기 때문.
반면 산군의 서편에 있는 송림사 부근에서는 자동차로도 산 정상 가까이까지
접근할 수 있다.
거기에 '도덕암'이 있어 진입로가 마련된 덕분.
도덕산 정상은 아직 표석 하나 얻지 못해 헬기장으로 표지를 삼아야 할 형편이고,
밀생하는 나무들에 가려져 전망도 매우 좋잖았다.
전망이 트이는 곳은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다소 내려 선 도덕암 자리.
그곳에서는 서편으로 펼쳐지는 동명저수지 등이 훤하게 살펴졌다.
도덕산군은 동편의 지묘천과 서편의 팔거천, 남편의 금호강으로 외연을 삼는다.
대왕재가 분수령인 북편의 경우, 서쪽으로는 구덕천이 흘러 팔거천에 합류하고
동쪽으로는 송정천이 흘러 지묘천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외연이 드러난 후 산군은 도덕산에서 서남향, 동남향, 정남향 등 3개의
큰 줄기를 내 그 안으로 2개의 큰골을 만든다.
서남향 줄기와 정남향 줄기 사이에 도남동 골이 있고, 정남향 줄기와 동남향 줄기
사이에는 도덕 마을 골짜기가 있다.
동남향 줄기의 동편은 지묘천골, 서남향 줄기의 서편은 팔거천이다.
도덕산에서 서남향으로 뻗어 내리는 줄기는 대구-경북의 경계선 줄기이기도 하다.
한참 달리다 두 갈래 져 그 안으로 대구 동호동 서리골을 품는다.
동호동 끝에서부터 무려 2.3km나 파고 오르는 골짜기. 골에서는 몇몇 농가가
오이 하우스 농사를 하고 벌을 기르는 듯 했고,
골 초입쯤의 서리못은 꼭 산정호수 같았다.
이 줄기 동편의 도남동 골도 대구에 평생을 사는 사람이라도 한번 접하기 쉽잖을
또 하나의 별천지라고 해야 적절할 터.
칠곡3지구에서 산 쪽으로 붙어 들어가는 골의 초입에 국우동 마을들이 나타나고
이어 도남동과 도남지 못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덕산에서 동남향으로 흐르는 줄기는 동화천변 서원연경 마을을
동그랗게 둘러싸며 주행을 마친다.
지난 4월8일 이 마을에서 출발해 줄기를 거꾸로 올랐더니,
곳곳에 할미꽃이고 온 산에 진달래꽃이었다.
서원 마을 뒤 봉우리는 280m봉. 바로 이웃해 있는 297m봉으로 건너가자
그 서면의 '발코니형 전망대'가 속을 시원스럽게 했다.
이어 잠시 내려서는 듯 하다가는 다시 솟곤 하면서 363m봉, 350m봉, 368m봉을
건너 다니는 기분이 쏠쏠했다.
하지만 드디어 내려선 300m대의 재, 도덕동 골 안도덕 마을과 지묘천변 매골을
잇는 듯한 이 재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 앞으로 절벽 같은 산세가 버티고 선 것.
무려 220m 높이를 순식간에 쏘아 올리는 경사를 겨우겨우 올랐더니,
평평한 헬기장이 답사객의 쉼터로 기다리고 있었다. 봉우리 높이 518.2m.
이 봉우리를 그 서편의 안도덕 마을 어르신들은 '칼등'이라 불렀다.
봉우리 동편 기슭의 상리 마을 어르신은 그 중 일부를 칼등으로 불러 왔다고 했다.
전체를 부르던 명칭은 없었다고.
여러 상황을 종합한다면, 518m봉의 유력한 전래 명칭으로는 일단 '칼등'을
비정해 놔도 큰 무리가 없을 듯 했다.
이렇게 무리해 가면서라도 전래 명칭을 비정해 둬야 하는 이유는,
국가 공식 지도가 이 봉우리 이름을 엉터리로 표기하고 있는 탓이다.
지도는 이 봉우리와 지묘천 건너 거저산군에 있는 507m봉 둘을 꼭같이
'응해산'이라 표기해 놓고 있었다.
단지 차이를 둔 것은 이 봉우리엔 한자로 '鷹蟹山'이라 써 둔 것뿐.
이상한 구분 방법이었다.
하지만 일대 어르신들은 누구 없이 거저산군의 봉우리만을 응해산,
응게산이라고 지목했다.
칼등을 지나서 산줄기는 다시 350여m 높이로 낮아졌다가 660m의 도덕산으로
치솟지만, 그 구간은 경사가 완만해 걸을 만했다.
서원연경 마을에서 칼등까지는 2시간, 칼등에서 도덕산까지는 1시간 정도면
도달할 수 있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maeil.com%2Fpalmount%2Fimage%2F20050509_01.jpg)
서변동 환성정 모습. 정자의 주인이었다는 태암(苔巖) 이주(李 )는 임란 때
창의해 초유사 김성일의 소모관(召募官)으로 활동했다. 해안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칠곡에서 큰 승리를 거뒀을 뿐 아니라 전라도 장수에까지
진출해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공적에도 불구하고 전후 벼슬을
거부하고 대구향교를 보수하는 등 후학 양성에 온 힘을 쏟은 선비라고 했다.
이 동남향 줄기의 서편에 있는 도덕동 골에는 안도덕, 바깥도덕, 태봉, 들연경 등
'연경동' 마을들이 분포했다.
그 중에서도 연경지 못 안 골 끝 마을 안도덕은 또 하나의 숨겨진 땅.
반면 그 골의 동화천변 들연경 마을 일대는 옛날 광활한 백사장이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지금 찻길로 이용되는 둑을 쌓고서야 백사장이 논밭으로 변했다는 것.
하지만 그 논밭도 멀잖아 다시 아파트촌으로 바뀔 모양이었다.
일대 50여만평이 아파트지구로 지정됐다는 것.
대구의 허파 같은 역할을 해 오던 이곳이 아파트 숲이 될 것이라는 소식은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도 남았다.
작년 말 그 발표가 있은 후 그곳 사람들도 "큰일났다"며 뒤숭숭해져 있었다.
곧바로 일부 형제간 이웃 간에 재산 분쟁이 시작된 것도 그 큰 일 중 하나라고 했다.
이러한 도덕동 골과 앞서 살핀 도남동 골을 양옆으로 거느리는 것은
도덕산군의 정남향 복판 줄기. 국우터널, 함지산 등을 거쳐 팔달교 들머리에
이르기까지 가장 길게 흐르고 권역도 가장 넓은 산줄기이다.
660m 높이의 도덕산을 출발한 이 줄기는 얼마 안 가 230m대의 재로 추락했다가
368m봉으로 솟아오르니, 이 구간이 줄기 중 가장 요동 심한 편이다.
그 후엔 큰 변란 없이 300수십m 높이를 유지하다 국우동 솟골 위에서부터는
200m대로 더 얌전해진다.
국우터널 통과 구간의 고도는 겨우 165m에 불과할 정도.
도덕산에서 국우터널에 이르는 이 구간의 동편으로는 도덕동 골짜기,
서편으로는 도남동 골짜기가 포진해 대칭하고 있다. 특히 368m봉 부분에서는
서쪽 도남지와 동쪽 연경지라는 두 개의 저수지까지 같은 위도로 대칭했다.
그러나 터널 구간을 넘어 더 남진하면 동서간 대칭이 달라진다.
줄기의 동편에는 서변동 택지가 개발됐고 서편에는 칠곡택지가 분포한 것.
덕분에 이 구간에는 등산객이 폭증해 산능선의 풍경도 엄청나게 변했다.
높이가 200m대로 더 낮아지는 것과 함께 실핏줄 같이 퍼져 흐르는 능선들이
닳고닳은 등산로에 의해 굵은 정맥 핏줄 같이 선명해지는 것.
서변동 뒤(서편) 273m봉에서 봐도 그렇고, 칠곡 뒤(동편) 함지산에서 봐도
그 능선들은 그렇게 뚜렷할 수가 없다.
이들 등산로군의 '중심가'는 '조야재'(160m) 부분인 듯 했다.
평일에도 도심을 연상시킬 정도로 붐비고 커피 노점까지 들어서 있는 곳.
도남동쪽 사람들이 소를 몰고 내당동 우시장에 가거나 시내 학교에 다닐 때
넘어 다녔다는 재가 이렇게 변해 있는 것이다.
서변동은 아파트단지로 변하긴 했어도 여전히 인천(仁川) 이씨(李氏)라는
큰 가문의 수백년 세거지임을 알리는 선명한 징표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성북초등학교 앞에 있는 정각들과 '환성정'(喚惺亭) 등이 그것.
이씨네는 천안 등지에 살다가 1500년쯤 대구권으로 진입해 파동을 거쳐
이곳으로 입향했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했던 태암(苔巖) 이주(李 ) 이후 번성했다고
종친회 관계자가 알려 줬다.
단아한 '환성정'은 태암의 정자였다고 현장에 설명돼 있었다.
이런 분들을 모시기 위해 1781년 그곳에 '서계서원'(西溪書院)을 세웠었으나
훼철령으로 1868년 뜯긴 것을 애석해 하는 사적비가 환성정 앞에 서 있고,
'효열각' '창렬각' '정려각' 등은 그 후대인 영조 순조 철종 때의 이씨네 효부
열부들을 기리고 있었다.
이런 많은 사연들을 품어 안은 도덕산군 복판 줄기의 꽃은 역시
함지산(285m)일 터이다.
아주 옛날부터 성(城)을 운용했고 한국전 때는 팔공산의 소야재가 뚫릴 경우
마지막으로 진을 치려 했을 정도의 대구 길목 요충지.
군사(軍事)를 모르는 기자의 눈으로도 그곳에서는 대구시내와 칠곡 길목이
한 눈에 살펴졌다.
문제는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280m대의 두 봉우리 중 어느 것이 함지산인 지
분간할 수 없다는 것.
서봉에는 헬기장이 있고 동봉에는 산불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그나마 분별 표지가
돼 줄 뿐.
옛 산성이 있던 것은 서쪽 봉우리인데도 2만5천분의 1 지형도는 동봉을 함지산이라
지목해 놨다.
"인생은 하얀 뭉개구름 같으니, 마음을 태평양 같이 넓게 하라".
조야재 두 장승이 합창하는 잠언으로 그 혼란을 묻어 둬 버릴까?
함지산 덩어리의 남쪽 금호강가 기슭에는 노곡동 조야동 같은 마을들이 깃들었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maeil.com%2Fpalmount%2Fimage%2F20050509_02.jpg)
함지산에서 본 도덕산군 능선의 등산로. 아파트촌 밀집 이후 등산객 폭증으로 능선 위의 등산로가 반질반질 닳아 정맥 핏줄 같이 뚜렷해져 있다.
첫댓글 대단히 세밀한 지도다. 이러니 어떻게 미국과 전쟁을 해서 이길수가 있겠는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