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32)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3구간 (왜관→대구 강정보) ① 왜관→ 육신사
2020년 10월 30일 (금요일) [독보 33km]▶ 백파
[1] * [왜관]→ 호국의 다리→ 왜관나루터비→ 제2왜관교→ 동정천→ 직선의 제방 길→ 금산교→ 금무봉전투의 현장→ 직선의 제방 길→ (낙산초/ 칠곡왜관2산업단지)→ (여기는 6.25전쟁 낙동강 전선)→ 직선의 제방 길→ [하빈고개 지하차도]
[2] * [달성 삼가헌]→ [낙빈서원]→ (고개)→ * [묘골마을] 충효당→ 도곡재→ [육신사]→ 충의사→ [하빈고개 지하차도]
[3] * [하빈 지하차도]→ 낙동강 강안, 직선의 바이크로드→ [하목정]→ 성주대교→ 하빈 강변야구장→ 하빈생태공원→ 문산정수사업소→ 영벽정→ 매곡취수장→ [강정고령보]→ 오세창 교수(낙동강사랑회 회원) 환영→ 강정보 대구식당 환영만찬→ (택시)→ 대실역(대구 지하철 2호선)→ 성서산업단지역→ T,O,P 호텔
* [성주군 용암면 동락리] ← 서쪽에서 백천 합류(백미산에서 발원, 성주 경유)
* [성주군 용암면 동락리] ← 서쪽에서 신천 합류(거산에서 발원, 용암면 경유)
[1] 왜관 (09:00)→ [삼가헌]→ [육신사]
오늘은 낙동강 종주 제13구간, 왜관에서 대구의 강정-고령보까지 가는 여정이다. 왜관 시내의 M7호텔에서 아침을 맞았다. 왜관에는 가톨릭의 베네딕도수도원이 있고 그에 따른 순심중·고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 왜관(倭館)은 이름 그대로 조선 시대에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만든 곳이다. 관사와 숙소, 교역장 등을 지어 일본인들이 머무르게 했으며, 외교 관계 변화에 따라 설치와 폐쇄가 반복되었다.
왜관(倭館)
조선은 초기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일본인의 왕래와 무역을 정식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경상도의 여러 항구에서 함부로 상업 활동을 하며 말썽을 일으키자, 제3대 임금인 태종은 왜관(倭館)을 세우고 일본인들의 활동 범위를 제한했다. 즉 일본 상인들은 왜관 안에서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함부로 한반도를 드나들거나 돌아다니는 것을 막고, 일본 상품이 조선의 시장에 밀려들지 못하도록 하며, 국가의 기밀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제4대 임금인 세종은 남해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쓰시마(대마도) 정벌을 명령했는데, 이때 왜관을 모두 폐쇄해 버렸다. 그러나 일본이 계속 교역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자 부산포(부산)와 염포(울산), 제포(진해) 등 세 곳에 왜관을 다시 설치했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일본과의 관계가 나빠져 부산포를 제외한 다른 왜관은 모두 문을 닫았고, 임진왜란 후에는 부산포 왜관마저 폐쇄했다. 그러나 일본과 외교관계가 회복되면서 부산 초량 지방에 다시 왜관이 설치되어 강화도 조약 전까지 일본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곳은 낙동강을 따라 올라와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왜관이었다.
오늘의 종주 여정(1) ; 왜관교→ 하빈고개→ 육신사
어제, 구미에서 왜관까지의 긴 여정, 그 피로가 남아 있지만, 간 밤 깊은 잠을 잔 덕분에 원기를 많이 회복했다. 아침은 쾌청하고 공기는 맑았다. 오늘 종주 거리만 26km인데 거기에 유서 깊은 유적지를 탐방하는 거리를 더하면 30km가 훨씬 넘는 거리를 걸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걷고 있는, 왜관의 작오산을 중심으로 하여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는 물길은 처절한 6.25전장이었다. …오늘은 6.25 당시 적의 공격으로 시작된 왜관전투의 현장. 왜관에서 3km 아래에 있는 금무봉전투의 현장을 지나게 된다.
오늘의 종주 구간에는 꼭 탐방해야 할 중요한 두 포인트가 있다. 첫째는 대구 달성군 하빈에 있는 육신사(六臣祠)이고, 다음은 역시 하빈의 낙동강가에 있는 하목정(霞鶩亭)이다. 육신사(六臣祠)는 수양대군의 왕권 탈취에 반발하여 단종복위를 추진하다가 목숨을 다한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을 모시는 사당이다. 그리고 하목정은 임진·정유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낙포 이종문이 세운 아름다운 정자이다.
오전 9시, 왜관의 '호국의 다리' 앞에서 오늘 종주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신선했다. 호수처럼 고요하고 맑은 강물은 나그네의 가슴을 환하게 열어준다. 왜관 ‘호국의 다리’는 원래 낙동강 철교였다. 완강하게 밀고 내려온 인민군의 도하를 방어하기 위해 작전상 폭파를 했던 다리이다. 지금은 고요한 강물 위에 깔끔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전쟁과 평화, 한 때는 아비규환의 전장이었다가 어느 때는 호젓한 낭만이 흐르는 서정의 강이다. 지금의 풍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장! 지금의 평화는 뜨거운 피의 대가(代價)라는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숙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밝은 가을햇살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발걸음이 가볍다. 내가 걷는 바이크로드는 물이 차오른 강안을 따라 이어진다. 길의 왼쪽에는 잔디가 깔린 너른 둔치의 수변공원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 코스를 조성해 놓았다. 왼쪽의 제방 길 너머는 칠곡군의 중심인 왜관읍이다. 간간이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강가에 버드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남으로 쫙 뻗어가는 길, 강변의 나무와 어울린 낙동강의 풍경이 아름답다. 공기는 좀 서늘하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따뜻하다. 조금 내려오면 강안의 습지가 보이기도 한다. 바이크로드는 직선(直線)의 주로이다. 가차 없이 내달리는 라이딩코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안에 줄지어 서 있는 버드나무가 있어 운치 있는 풍경이다. 강 건너 편 산야에도 계절이 깊어지고 있다. 가을색이 짙어지는 낙동강이다.
왜관나루터비(碑)
한참을 내려오니 수변공원 너른 잔디밭에 자연석 빗돌이 서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왜관나루터’를 표지한 빗돌이다. 하단의 초석에 해설이 있다. …
‘이곳은 예로부터 낙동강 유역에서 가장 번성했던 나루터 중의 하나였다. 일제 강점이 시작되던 1905년 단선철로가 개통되고 1939년 복선화되면서 단선철교가 인도교로 이용되기 전까지는 낙동강 수역이 물류수송의 중요한 통로였다. 소금을 비롯한 수산물, 성냥, 비누 등은 물론이고, 일본 개화 상품까지 실은 배가 부산에서 올라와 이곳 나루터에서 하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을 거슬러 올라 구미의 인동, 상주의 낙동, 안동 등에서 교역되기도 하였다. 1960대까지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가 마주보고 있는 강정나루와 왜관나루를 오가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이곳을 선창가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 나루터의 흔적만 조금 남아있어 곧 소실될 처지인지라 역사의 현장을 후세에 알리고자 주민의 염원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 2013년 12월 3일 / 칠곡군’
왜관나루터 비(碑)를 보고 나서, 지금은 고요히 머물고 있는 낙동강을 바라본다. 역사는 그렇게 강물 속에 잠겨 있었다. 흐르는 것은 강물만 아니라 세월(歲月)이었다. 강물은 변함없이 흐르지만 세월은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숨결을 품고 있다. 그것을 역사라고 한다. 역사에는 하늘이 주재하는 세월 속에는 변화무쌍한 인간의 삶과 깊은 애환이 담겨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한 때를 영원토록 간직하고자 하는 사진도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랜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속에 변함없이 살아 있는 숭고한 사랑이나 신앙심, 충절 등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 자신의 목숨을 다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낙동강 길목에 떠질듯이 빨갛게 익은 열매가 곱다!
오전 9시 34분, 콘크리트 다리 아래를 지났다. ‘제2왜관교’이다. 서쪽의 성주(읍)에서 낙동강 서안을 따라 약목-덕포대교로 이어지는 33번 국도에서 왜관으로 넘어오는 4번 국도와 연결되는 교량이다. 다리를 지나고 나서 바이크로드는 67번 국도와 나란히 가는 제방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무테크 다리를 건넌다. ‘동정천’은 동쪽의 자봉산 세븐밸리CC-매원지(池)에서 내려와 왜관읍을 통과하여 낙동강에 유입되는 작은 하천이다. 다리를 건너 조금 내려가니 오른쪽으로 넓은 초원에 왜관파크골프장이 있다. 주말이 아니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파크골프를 즐기는 사람은 없었다.
길의 왼쪽에는 왜관읍에서부터 줄곧 제방을 따라 내려온 67번 국도가 이어진다. 다니는 차가 뜸한 도로에 씽씽 달리는 차소리가 요란하다. 낙동강은 너른 둔치를 사이에 두고 저만큼 멀어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 길은 말 그대로 한 일(一)자, 아득하게 뻗어가고 있다. 길의 가장자리에는 계절의 바람을 타고 말라버린 가을 풀들만 무성하다. 작은 하천의 금산교를 지났다.
금산천은 금무봉에서 발원하여 칠곡왜관일반산업단지를 경유하여 흘러내려오는 작은 개천이다. 그렇다. 이곳이 낙동강전선의 왜관전투가 시작된 금무봉전투의 현장이다. 길목에 빛바랜 안내판이 있다. 이것이 없었다면 그 처절한 격전지를 그냥 지나칠 뻔했다. 왜관 호국의 다리에서 3km 내려온 지점이다. … 그날 밤 인민군은 캄캄한 밤중에 저 낙동강을 도하하였고 이를 방어하던 미 제1기병사단 제7연대는 가차 없이 적을 향해 포격했다. 그 전투의 현장이다.
금무봉(錦舞峰) 전투
금무봉(268고지) 일대의 낙동강 지역은 미 1기병사단 7연대 장병들이 낙동강을 건너 4번 도로를 따라 대구방면으로 공격해오는 북한군 3사단 주력부대를 상대로 하여 용감히 싸워 적군을 격퇴한 전투의 현장이다.
1950년 8월 9일 북한군 3사단(김영호 소장) 예하 2개 연대가 야음(夜陰, 3:00)을 틈타, 왜관교 남쪽 3㎞ 지점, 성주의 노촌에서 총을 머리에 받쳐 들고 낙동강 도하작전을 개시하였다. 미 1기병사단 5연대는 도하 중인 북한군을 집중 포격하였다. 적의 부대는 거의 궤멸되었으나 도하(渡河)에 성공한 북한군 1개 대대가 금무봉(錦舞峰)을 선점하고, 아군의 후방 지휘소와 주병참선인 4번 도로와 경부선 철도에 포격을 가해 왔다. 금무봉은 부산-서울-신의주를 거쳐서 만주에 이르는 경부선 복선 철도가 이 산의 북쪽 기슭을 지나고 있고, 그리고 아군의 주 보급로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고지였다.
이에 8월 10일, 미 7기병연대 1대대와 전차 1개 소대가 금무봉(錦舞峰)을 점령한 북한군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적 4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금무봉 정상을 탈환했다. ... 그리하여 미군은 왜관을 거쳐 대구방면으로 진격하려는 적의 기도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북한군을 낙동강 전선에 고착(固着)시킴으로써 저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였으며, 우리 국군과 유엔군 등 아군이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고 반격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낙동강 전선을 사수(死守)함으로써 ... 6.25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전선] ☞ 금무봉(錦舞峰)전투와 낙동강 왜관전투
낙동강 동안(東岸)의 왜관(倭館)은 서울 남동쪽 300km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미(美) 제1기병사단의 책임 방어선은 왜관 동북쪽 작오산(鵲烏山, 303고지)에서부터 낙동강을 따라 대구 서남쪽 20km 지점인 달성군(達城郡) 현풍면(玄風面) 북쪽까지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미국 육군 탄생과 동시에 창설된 사단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으나 전통에 빛나는 ‘기병사단’의 호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왜관(倭館)지구 전투는 8월3일 미 제1기병사단(게이 少將)이 왜관읍 주민들에게 疏開令(소개령 : 적의 포화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대형의 거리나 간격을 좁히는 것)을 내리고,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왜관의 철교를 폭파함으로써 개시되었다. 이날 8월 3일에는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 위의 모든 다리가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낙동강전투는 근 45일 동안 양측 병사들의 시체가 산야를 뒤덮고 핏물이 강을 붉게 물들이며 9월 중순까지 지속되었다. 참으로 처절한 전투였다. 당시의 낙동강은 피의 장송곡(葬送曲)이었다.
¶ [금무봉 전투]▶ 미 제1사단의 왜관(마산 북방 90km) 정면에서는 8월 9일 새벽, 북한군 제3사단의 1개 연대가 기습 도하를 성공해 어둠을 틈타 2km를 침투하여, 금무봉(錦舞峰)에 올라갔다. 금무봉은 그 서쪽으로 낙동강 본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경부선과 4번 국도를 감제할 수 있는 268고지이다.
그로부터 30분 후, 그 남쪽에서 적(敵) 제3사단 주력의 도하가 시작되면 미 제1기병사단은 조명탄을 올리고 탄막(彈幕) 사격을 퍼부어 이를 격퇴했다. 후속부대를 차단했다고 판단했던 미 제1사단장 게이(Gay) 소장은 9일 아침, 예비인 제7기병연대 제1대대에 M24 경전차 4대를 배속, 금무봉 탈환을 명했다. 그러나 숲으로 가려져 북한군을 발견하지 못했고, 더구나 더위 때문에 일사병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형편이어서 공격은 진전되지 못했다.
다음날 10일 아침, 사단은 공군기에 의한 폭격과 지상의 포격으로 금무봉을 화력(火力)으로 제압하고, 금무봉의 뒤쪽에 전차대를 우회시켜 배후로부터 사격을 가했다. 이와 더불어 정면으로부터도 돌격해 금무봉을 탈환하고, 추격으로 전환하여 적(敵) 인민군 제3사단을 궤멸시켰다
¶ [B-29의 융단폭격]▶ 금무봉 탈환 이후 8월 16일, 적군에게 대대적인 폭격이 감행된 날이었다. 이날 왜관 낙동강 건너편 대안, 지금의 약목면 일대에는 인민군 4만 명이 집결하여, 대규모 도하작전을 감행하기 직전이었다. 적이 도하(渡河)에 성공하면 왜관이 곧 함락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왜관이 함락되면 임시수도가 있는 지척의 대구가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그러자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일본에 있는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공중 폭격을 요청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B-29 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불과 26분 동안 왜관 서북방 67㎢의 지역 약목면 일대에 퍼부은 폭탄은 960t. 낙동강을 건너려고 한데 모여 있던 인민군 4만 명 가운데 적어도 3만 명이 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른바 ‘융단폭격(絨緞爆擊)’이었다. 낙동강전투에서 가장 처참했던 전투였다. 왜관에서 낙동강 건너에 위치한 약목(若木)은 융단폭격의 현장이다. 그때의 융단폭격으로 약목 일대는 10년간 풀도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약목면 바로 위쪽이 지금의 구미공단이다. 구미는 금오산(977m)과 낙동강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적의 주력은 이미 낙동강을 건너 아군 측(국군 제1사단·미 제1기병사단)과 맞붙은 낙동강 동안(東岸)으로 넘어온 후였다. 그 해의 여름의 심한 가뭄으로 낙동강 수위가 낮아져, 도하(渡河)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대적인 공중폭격이 북한군에 가한 심리적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융단폭격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적(敵)은 전진기지에 준비해 두었던 예비 병력과 야포, 그리고 탄약과 장비를 비롯한 군수품을 대거 잃었다. 전투를 장기간 치를 여력을 상실하였다.
왜관읍 북쪽으로 3.4km 지점에 위치한 작오산은 낙동강 방어전 당시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의 방어선이 교차하는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이었다. 작오산 지역은 바로 낙동강 강안의 왜관-영산-마산에 이르는 미군의 방어선인 X선(90km)과 왜관-다부동-영천-포항에 이르는 한국군의 방어선인 Y선(90km)이 서로 만나는 꼭짓점이었다. 당연히 언어가 서로 잘 통하지 않는 한미 양군(兩軍)이 접한 왜관 작오산 303고지는 꼭짓점에서 만났던 만큼 공조와 소통의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컸다. 따라서 이 지점이 북한군이 노리는 아킬레스건(腱)이었다.
미 제1기병사단은 이 303고지에 제8기병연대 제2대대장 해럴즈 존슨 중령을 배치했다. 존슨 중령은 나중에 미 육군참모총장(1964~68)까지 올랐던 제1급 군인이었지만,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 바탄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3년간 인천(仁川)에 있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이런 이유들도 해서 존슨 중령은 상당한 지한파(知韓派)였다.
그래서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의 방어지역에 미군 1개 소대가 들어오고, 대신에 미 제1기병사단 방어지역에 한국군 1개 소대가 들어가는 방식의 교차배치를 실시함으로써 연합작전의 난점을 극복했다. 작오산에 올라가면 동북쪽 7km에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의 좌(左) 일선이었던 숲데미산(519m)이 보인다. 숲데미산은 한자로는 수암산(水岩山)이라고 쓰는데, 대구 북부의 필공산(八空山)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이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전투를 벌였던 곳이었다. 왜관전투에 관한 모든 내용은 작오산 기슭에는 ‘왜관전적기념관’에 잘 정리‧전시되어 있다.
신나는 어린이 축구경기, 가을 햇살이 벌이는 축제
오전 10 30분, 금산교를 지나 이어지는 직선의 길을 걷는다. 얼마가지 않아 대중가요가 확성기에 들려오고, 길의 오른쪽에 일군의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강변의 체육공원에 이르렀다. 초록의 인조잔디구장에 어린이축구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여러 팀이 참가하여 경기를 벌이는 중이었다. 원색의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신나게 축구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막을 즐비하게 쳐져 있는 운동장 주변에는 학부형과 가족들이 모여 응원을 하고 있었다. 길의 좌측 건물 앞 광장에 노래공연이 하고 있어 대중가요 노래 소리가 신나게 흘러나온다. 처참했던 6.25전쟁의 상황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화사한 축제의 풍경이다
다시 직선(直線)의 길이 이어진다. 길과 낙동강 사이는 넓은 둔치가 있어 강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길의 좌우로 가을의 마른 풀들과 억새꽃이 눈부시게 피어 있다.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있는 억새는 한낮의 햇살을 받아 그 정취가 보기에 아주 좋았다.
오른쪽 길목에 ‘↑낙동강하구둑 222km ↓안동댐 163km’이라고 쓴 이정표가 있다. 67번 강변도로, 길 건너편에 낙산초등학교와 칠곡왜관제2산업단지가 있는 지점을 지났다. 길목마다 비슷한 가을 풍경을 지닌 길은 여전히 길게 이어진다. 그렇게 아주 한참을 내려오니 강물이 길 아래 강안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울창한 대숲길목을 지나 높은 둑방의 직선로에 접어들었다.
왼쪽의 강변도로보다 높은 둑방의 길, 낙동강은 얼마간의 둔치를 사이에 두고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참으로 길고 긴 제방의 바이크로드였다. 풍경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뻗어가는 길, 달성군 하빈고개까지는 이 직선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한다. 하늘이 맑고 공기 또한 청정하며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가을햇살이 따뜻하여 쾌적하기 이를 데 없다.
낙동강 전선(戰線)
그런데 사실 내가 지나는 이 평화로운 길목은 6·25때 낙동강 전선(戰線)이라는 사실이다. 임시수도 대구와 그리고 부산을 방어하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왜관 작오산에서부터 낙동강을 따라 창녕-함안-마산에 이르기까지의 낙동강 전선인데, 당시 이 전선은 미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왜관의 작오산에서부터 이곳 낙동강(洛東江) 동안(東岸)을 따라 달성-강정-현풍 까지는 미 제1기병사단이 방어하고 있고, 창녕 영산은 미 제24사단이, 그 아래 함안은 미 2사단, 마산은 미 25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제도는 국군 해병대 제1대대가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저 왜관의 작오산에서 유학산-다부동-영천-포항에 이르는 전선은 국군이 담당하였다. 거기가 적군과 우리 국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는 다부동전투 지역, 영천전투지역이다.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1950년 8~9월의 전세를 보면, 여기 낙동강 건너, 서쪽의 성주에는 적(인민군) 제3사단, 10사단이 장악하고 있으면서 호시탐탐 낙동강을 도하하여 임시수도인 대구(大邱)를 침공·점령하려고 하고, 저 8월 9일에 있었던 금무봉전투는 바로 적 3사단이 도하하는 것을 미 제1기병사단 제7연대가 한밤 중에 도하하는 적 인민군 제3사단을 쳐부수었는데, 적의 일부가 도하하여 이곳 왜관의 금무봉을 점령한 것을 하루 만에 탈환한 전과를 올린 전투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내가 걷고 있는 이 낙동강 강안이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다.
전쟁의 참화(慘禍)
인류의 역사가 수많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우여곡절로 점철되어 왔지만, 우리가 겪은 동족상잔의 6.25전쟁이야말로 너무나 처참했다. 이 전선을 지키기 위해서 피아(彼我)를 막론하고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죽어갔는지 모른다. 죄없는 민간인들의 죽음은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사진이나 기록으로 남은 당시의 상황을 보면 참으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전쟁은 잔인하고 참혹하다.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되는 몸서리쳐지는, 그야말로 악몽(惡夢)이다. 이렇게 똑같은 지역, 똑같은 공간이지만, 70년 전에는 죽음의 전장이었고 지금은 평화롭게 가을 햇살을 누리고 있으니, 그 격세지감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6·25 당시 이 낙동강 전선에서 피를 흘린 우리 국군은 물론, 우방국 미국의 용사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UN군으로 참전한 16개국의 모든 전사들에게도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덕분에 우리는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낙동강 풍경
아, 제방 길 좌우의 시공이 거리낌 없이 틔어 있고 호수처럼 고요한 낙동강 주위의 풍경이 신선한 기운을 더해 준다. 참으로 평화로운 길목이다. 하늘에 감사를 올리며 흐르는 강물에 마음을 실어서 걷는다. 내 오늘 평화스러운 낙동강을 걸으면서 내 마음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육신사(六臣祠)를 찾아 가는 길
그런데 지금 나는, 육신사(六臣祠)를 찾아가는 길이다. 오늘의 종주 제1포인트인 육신사는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동에 있는 조선시대 사육신(死六臣)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다. 사육신의 묘(墓)는 서울 노량진에 있는데, 육신사는 그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하빈에 사육신의 혼백이 계신다. ... 아, 사육신이 누구인가?
사육신(死六臣)
사육신(死六臣)은 세종대왕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면서, 세종의 신임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 찬탈에 반기를 들고 단종 복위(端宗復位)의 거사를 도모하다가, 처형을 당한 분들이다. ‘사육신’에 대한 규정은, 원래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쓴 「육신전(六臣轉)」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실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한 사람들은 모두 70여 명이다. 집안 일가까지 포함하면 수백 명이다. 이 중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주요 인물 6인을 사육신이라 했다. 정조 때인 1791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을 선정한 「장릉배식록」을 편정할 때, 아래와 같은 인물을 수록하였다.
• 사육신(死六臣) :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 육종영(六宗領) : 6명의 종친. 즉, 수양대군(세조)의 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과 태조의 이복 동생인 의화대군의 손자로 계유정난 당시 피살당한 판중추원사 이양.
• 사의척(四義戚) : 4명의 의로운 외척(外戚). 단종의 장인인 여량 부원군 송현수, 현덕 왕후의 남동생으로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 경혜공주의 남편으로 단종의 매부인 영양위 정종, 단종의 후궁인 숙의 권씨의 아버지 권완 (권자신과 같은 안동 권씨)
• 삼대신[三重臣] : 세 명의 재상.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제거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 양운검(兩雲劒) : 복위 계획 당시 세조의 좌우에서 운검을 맡을 예정이었던 성승, 박쟁. (사실 유응부도 포함되므로 실은 삼운검(三雲劒)이다)
☆… 이 중 사육신(死六臣)은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이를 반대하며, 단종의 복위를 추진하다 실패하여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조선 초기의 여섯 명 충신(忠臣)을 말한다.
단종복위 거사 도모와 실패
¶ 수양대군이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하여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 3공을 숙청하고 권력을 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집현전 학사들이 비장한 뜻을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王位)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明)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별운검(別雲劍)을 맡게 됨을 기회로 세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 남효은이 쓴 소설 「육신전」에는 한명회가 이를 막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세조가 친히 운검을 취소시켰고, 성삼문이 이에 없앨 수 없다고 반대하나 신숙주가 찬성하여 취소되었다고 한다. 이 때 윤영손이 노하여 신숙주를 죽이려 했으나 성삼문 등이 말리고 거사를 연기하였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礩) 등은 뒷일이 두려워 장인 정창손을 통해 세조에게 단종복위 계획의 전모를 밀고(密告)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친히 문초하였다.
일단 문초 과정에서의 연루자의 언급 순서는 김질(金礩)의 입에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가 언급되고, 먼저 끌려온 성삼문에 의해서 박팽년과 유성원, 박쟁이 추가된다(음력 6월 2일). 여기에 공조참의 이휘가 스스로 관련되었으나 미리 말을 하지 못했다고 자백하러 오면서 박중림과 권자신이 추가된다. 이후 박팽년을 문초하면서 김문기, 성승, 송석동, 윤영손, 박팽년의 아버지가 추가된다. 그리고 국문 이후 발언을 보면 최득지, 최치지, 박기년, 박득년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며칠 후(음력 6월 7일) 성삼문과 권자신의 입에서 단종의 연루 사실이 나온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망한 인물로 허조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사육신과 연결되었다는 이유로 머릿수가 늘어나서 결국 70여 명이 되었다.
사육신에 대한 심문과 사형, 그리고 그 후일담
사육신(死六臣)에 대한 심문 과정은 실록에 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오늘날에 전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남효온(南孝溫)의 『추강집(秋江集)』에 실린 「육신전(六臣轉)」에 근거한다.
성삼문·이개·하위지·김문기·박중림·성승·유응부·박쟁·권자신·윤영손·송석동·이휘·석을중·아기지·불덕은 작형(灼刑, 불에 달군 인두로 살을 지져 태우는 형벌)을 당한 후,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던 가운데 거열형(車裂刑, 사지를 사방에 밧줄로 묶고 그것을 수레에 연결하여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하였다. 거열형은 능지처사(凌遲處死)라고도 한다. 박팽년은 고문 중에 사망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부인과 함께 자기 집 사당에서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팽년과 유성원의 시신 또한 거열형을 당했다.
¶ [노량진 사육신 묘] — 거열형을 당한 이들은 3일간 효수(梟首)되었는데, 어두운 새벽을 틈타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이들의 시신(屍身)을 수습, 한강 건너 노량진에 이들의 묘(墓)를 만들게 된다. 이 묘가 사육신묘(死六臣墓)의 시초가 된다.
또한 사육신의 가문들은 모두 참화를 입어 친자식은 모조리 교형(絞刑, 목졸아 죽이는 형벌)을 하고, 모친과 딸, 처첩, 조손, 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의 노비, 이중에서 나이 16세 미만은 외부에 보수라고 하여 보증인이 신분을 보증하는 조건으로 방면하였다가 나이가 되면 위리안치하게 하였다. 나중에 연결된 이들의 친자로 15세 미만의 경우도 보수하였다가 관노가 된다. 이때 관련된 부녀들의 상당수는 대신들의 노비로 넘어갔고, 그들의 전지의 상당수 역시 대신들에게 넘어간다. 이외에도 이미 결혼한 부녀의 경우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아, 이미 시집가 있던 딸들은 화를 면했다. 이 때문에 황보인이나 박팽년의 외손들은 성종대가 되면 고위관직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직계 후손이 살아남은 것은 박팽년과 하위지뿐으로 박팽년은 손자 박일산, 하위지는 살아남은 조카 중 한 명인 하원이 하위지의 양자로 입적해 대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직계를 제외한 친족들은 10여 년을 노비로 살아가다가 세조가 승하하기 이틀 전에야 사면을 받아 원래 신분을 회복했다. 직계를 제외한다면 여기에 성삼문의 사촌들과 유성원의 조카 몇 명 정도가 더 살아남았지만 이들 중에서는 하위지 집안처럼 양자로 입적한 사람이 없었다. … 백팽년의 손자 박일산(朴一珊)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로 천운으로, 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다.
호수처럼 너른 낙동강 저 멀리 성주대교가 아득히 보인다. 강안의 풍경이 참으로 고지넉하다. 하늘에는 맑은 햇살이 쏟아지는강변 길, 낙동강 물길은 여전히 평화로운데, 역사를 되짚어보는 마음은 뜨겁기 한이 없다. 지금 내가 찾아가는 육신사는 사육신의 피끓는 충절을 기리는 곳이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으로 간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