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없는 섬의 고장 진도(珍島)
소리와 멋이 어우러진 곳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오지로 한번 들면 쉽사리 떠나기 힘들다던 왼딴 섬 진도. 이 곳이 섬 아닌 육지로 우리 곁에 다가선 것은 지난 1981년 4월 진도대교가 완성되면서부터다. 진도는 글자 그대로 보배로운 섬이다. 한쪽에서는 씻김굿이, 저편에서는 다시래기가 펼쳐진다. 마을마다 문화재가 산재하고, 밭매는 아낙도 고기잡이 하는 남정네도 구성진 소리 한가락쯤은 쉬이 뽑아낸다. 뭍과 단절된 지형적인 조건은 오늘날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섬이 된 이유이며, 삼별초 항쟁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어진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진도만의 문화가 오늘날까지 잘 이어져 오고 있다. 진도는 만가· 다시래기· 씻김굿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민속의 보고이고, 진도아리랑· 남도들노래 등이 곳곳에 들리는 소리의 고장이며, 서화(書畵)의 굵은 맥을 이어온 본산지로서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보배로운 땅이다. 이런 진도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밤낮을 묵어가면서 이 곳에 발 딛고 사는 이들과 잔을 기울이고 진한 감정을 나누며 하나가 될 때나마 가능할 지도 모른다.
보배로운 섬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 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진도는 옥주(沃州), 인진도(因珍島) 등으로 불렸다. 이는 물과 토양이 깨끗하고 비옥해 살기에 안성맞춤인 섬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남서쪽 바다에 위치한 진도는 동북쪽으로는 해남에 닿아있고 남서쪽으로는 나주의 조그마한 섬들이 이웃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곧바로 제주가 바라다 보이고 서남쪽으로는 큰 바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다도해 국립해상공원’에 속해 있어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흔히‘예향’, ‘민속의 보고’라는 말로 불릴 만큼 독특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가장 큰 섬인 진도를 비롯해서 23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진도는 자연경관 자체가‘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진도에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것은 삼한의 멸망 무렵에 항로가 비로소 개통되면서부터라고 전한다. 육지생활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조금씩 들어와 거주하게 되었으며 그 후 숨겨졌던 이 지방이 알려 지면서 때로는 무안현에 소속되거나 혹은 나주에 부속되기도 하였다.
유배객들의 발자취
진도는 또한 언제나 유배객들의 섬이 되어 왔다. 한 번 들어서면 쉽사리 떠나기 어려웠던 외딴 섬 진도. 지금이야 진도대교를 통해 언제라도 진도 땅을 밟을 수 있지만 옛적의 진도는 그야말로 바다로 칭칭 둘러싸인 숨겨진 섬이었던 것이다. 고려 인종 이래 수많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들이 밟아간 문화적 발자취들이 진도 문화에 적잖이 영향을 미친것도 사실이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왕실을 둘러싸고 반란이나 당파싸움이 피바람을 몰고 올적마다 힘이 부친 왕족이나 양반은 진도 땅으로 귀양 보내졌다. 그런데 진도 땅에 귀양을 왔던 이는 거의 모두가 풍류깨나 앎직한 왕족이나 양반들로서 그들은 지난 날의 영화와 허탈함을 잊으려고 제 처지를 노래에 담거나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렸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문화적 성향들이 진도땅에 고스란히 전해져 오늘날의 진도의 민속과 예술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진도만이 지니고 있는 풍요로움과 진도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 정서들이 함께 어우러졌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진도에 유배 온 이들의 시름을 달래주고 마음의 안정을 도왔던 것은 바로 다름아닌 진도의 고유한 노랫가락과 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배경을 지닌 진도 문화는 한반도의 서남쪽에 치우쳐 있는 섬답지 않게 수준 높은 문화를 일구어 왔던 것이다.
진도대교
진도대교가 놓이게 되면서 진도는 섬아닌 섬이 되었다. 1984년 준공한 진도대교는 길이 486m, 해면에서 상판까지 높이가 20m, 주탑의 높이 96m로 꽤 크고 높은 다리이다. 진도대교를 자세히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의 주탑은 빨간색으로 선명하고 주탑과 상판 사이에 68개의 쇠줄이 늘어져 있으며 특히 낙조와 야경이 무척 아름답다. 다리 아래는 바로 울돌목. 바다라기 보다는 홍수 진 강물로 보이며 물길이 소용돌이 쳤다가 솟아오르면서 세차게 흘러 내려 그 소리가 해협을 뒤흔들어 20리 밖까지도 들린다고 한다. 이는 해협의 폭이 좁은데다가 해구가 깊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흐르는 물살이 이에 부딪쳤다가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울돌목은 하루 몇 차례 밀물과 썰물이 한길 넘게 턱이 지고 거품이 일며 용솟음치는 특수한 형세로 세계적으로 유사한 곳을 찾아 볼 수 없는 천혜의 해협이다. 그래서 목포에서 제주도나 완도쪽으로 가는 대형 훼리호들도 지름길인 이곳을 지나려면 썰물 때를 기다려 지나갈 정도로 물살이 거세다. 실제로 울돌목 해협은 초속 6m의 거센 조류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물속에 교각을 세울 수 없어 양쪽 해안에 강철 철탑을 세우고 강철케이블로 다리를 묶어 만들었다. 울돌목은 또한 이충무공의 명량대첩지로 유명한데, 몹시나 사나운 수세를 해전에 이용한 역사적 사실이 실감난다. 당시 4백 여척의 왜선들에게 손쓸 방도도 없이 참패를 안겨준 큰 요인이 되었다.
용장산성
배중손이 이끌던 삼별초가 몽고에 무릎을 꿇은 고려 조정에 반발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여몽연합군에게 패해 제주도로 퇴각하기까지 원종 11년(1270) 8월부터 9개월 동안 항몽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고려 고종 18년(1231)부터 침략해 오던 몽골과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의 전쟁을 벌였으나, 원종 11년(1270) 고려가 몽골에 항복을 하였다. 몽골에 대한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던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候溫)을 왕으로 삼아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에 궁궐과 성을 쌓고 몽골과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용장성이다. 이들이 진도로 온 것은 해전에 약한 몽고군과 맞서 싸우기에 적합했으며 섬이 크고 땅이 기름져서 오래 버티더라도 자급자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이며, 성지는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성내의 용장사지 및 행궁지가 보존되고 있다. 성의 길이는 군내면의 용장리, 세등리, 고군면의 도평리, 벽파리, 오류리를 잇는 산등성을 따라 총 12.75km이며 높이는 4m내외이다.
〈삼별초와 대몽항쟁〉 별초란 정규군이 아니라 결사대·선봉대·별동대에 해당하는 특수부대이다. 원래는 상황에 따라 임시적이고 기동적으로 편성되었고 양반으로 구성된 양반별초나 노예와 잡류로 구성된 노군잡류별초 등 종류가 다양했으며, 중앙과 지방에서 모두 편성되었다. 그 가운데 삼별초는 야별초에서 갈라진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묶어서 말한다. 최우가 집권하고 있을 때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최우는 싸움 잘하는 용맹한 사람을 모아 야별초를 만들고 상비군 구실을 하게 했다. 야별초는 애초에 최우의 사병으로서 조직되었으나 야간 순찰과 단속 등 경찰의 임무를 맡아 공적인 군대에 준하는 활동을 했다. 최씨정권 말기에 이르면 야별초가 점차 확대되어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고 여기에 몽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신의군이 더해져서 삼별초가 구성된다. 이들은 전국에 걸쳐 상시적으로 활동하며 도둑이나 반역죄인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는 등 경찰의 임무를 했고, 군사적으로는 몽고와의 싸움에서 정부군을 제치고 가장 큰 활약을 했다. 몽고와 고려가 강화를 하면 몽고의 간섭으로 인해 최씨정권이 무력해질 것은 뻔했으니, 삼별초는 최씨정권이 몽고에 대항할 무력적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구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배중손(裵仲孫) 몽골의 침입으로 나라 전체가 위태롭고 굴욕적이었던 시대를 살았던 배중손은 고려의 무신으로 삼별초의 장군이었다. 강화도로 서울을 옮겨 몽골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고려 조정은 1270년(원종11) 몽골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어 개경으로 돌아온 원종은 삼별초에게 강화도에서 철수하여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몽골과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임금의 명령을 거부하자 원종은 삼별초에게 강제 해산 명령을 내렸다. 삼별초의 해산 명령은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의 지휘관에게는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에 배중손은 자신이 이끌던 삼별초군과 노영희의 야별초를 묶어 강화도에서 몽골에 대항하는 삼별초의 난을 일으켰다. 배중손은 몽골에 항복한 원종을 왕으로 모실수 없다며, 왕족인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받들었다. 배중손은 육지와의 교통로를 막고 관리들과 귀족, 병사들이 섬을 빠져나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섬 안에 있는 몽골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배중손 등 삼별초의 지도부는 새 정부를 세운 지 3일 만에 병선 1,000여 척에 강화도에 있던 백성들과 재물을 모두 싣고 강화도를 떠났다. 그것은 해전에 약한 몽골군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이었다. 일행은 서해안 요지를 정복하며 남쪽으로 내려가 진도에 진을 치고 궁궐을 세웠다. 이어 서해의 여러 섬과 나주, 전주에까지 나아가 관군을 물리치고 해상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 뒤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과 혼도가 이끄는 몽골의 연합군을 여러 차례 물리쳐 주위에 큰 위세를 떨쳤다. 1271년 배중손은 새로 홍다구가 이끌고 온 몽골군과 김방경, 혼도가 이끄는 연합군이 합세한 대규모 공격에 맞서 격전을 벌였으나 끝내 진도는 함락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삼별초 새 정부의 왕인 승화후 온은 홍다구 손에 죽었고, 배중손은 용감히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여기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삼별초군은 다시 탐라(제주도)로 들어갔다. 탐라에 진을 친 삼별초군은 김통정을 중심으로 2년 동안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1273년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게 완전히 진압당했다.
<온 왕릉> 삼별초에 의해 왕에 오른 승화후 온의 무덤이라고 전해온다. 용장산으로부터 삼십리쯤 떨어진 의신면 침계리의 왕무덤재로 불리는 곳에 있다. 이 고개는 제주로 가는 금갑포(의신면)로 통하는 고갯길이기도하다. 이곳 골짜기 마을이름은 속칭 '빗기내'라 하다가 한자표기 때 '사천(斜川)'이라 했는내 사실은 '핏기내' '피내(혈천)'의 뜻이며 삼별초군이 삼십리 밖의 용장산성에서 쫓겨 이곳에 이르러 추격군과 격전을 벌였기 때문으로 전한다. 이곳 골짜기를 '논수골' 또는 '다근투골'이라고도 부르는데 '다근투골'이란 여몽연합군 대장이었던 "홍다구가 다투던 곳"이란 뜻이라 한다. 그의 무덤이라고 전해오는 봉분이 이 고갯마루에 남아서 여러 기의 분묘들 틈에 섞여 있다.
벽파진
벽파진은 진도의 동북쪽 끝, 고군면 벽파리 바닷가의 나루터이다. 이곳은 명랑해협의 길목이며 오랫동안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고려시대에 삼별초 군사들도 이곳으로 상륙했고, 근래에도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해남에서 오는 버스가 배에 실려서 바다를 건너와 이곳으로 올라왔다. 백제 신라 시대에는 일본에서부터 우리 나라와 서해를 거쳐 중국까지 이어지는 고대 해로의 일부로써 더욱 중요한 곳이었다. 물론, 지금도 항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근처에 염전도 있다. 벽파진 바로 뒤에 봉긋한 언덕바지에는 이 충무공 전첩비가 옛 격전장인 명랑해협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1956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런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이더니라"고 시작되는 이은상이 지은 비문이 있다.
토요민속공연
토요민속여행은 진도군이 보유한 씻김굿과 강강술래, 다시래기, 만가 등으로 구성된 진도에 와야만 볼 수 있는 여러 내용으로 엮인 공연이다. 1994년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2시간 동안 상설 공연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진도를 찾는 많은 이들에게 공연을 베풀고 있다. 웬만한 도시에서도 꾸리기 어려운 예술단을 군 단위에서 운영하는 것도 놀랍고, 지치지 않고 오래도록 공연을 펼치는 공연자들의 마음 또한 진도사람만이 가진 매력이자 힘이다. 이런 일은 진도 안에 그야말로 진도사람 아니면 흉내도 못 낼 소리와 예술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구성지면서도 힘찬 진도들노래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린 씻김굿의 해원성, 강강술래의 환희, 진도아리랑의 유려함 등을 통해 진도가 품고있는 다양한 모습들을 한껏 느껴볼 수 있다.
진도 씻김굿
세상에 남아 살아가는 이의 애닲은 사연과 저승길을 밟아간 사람의 아쉬움 등 진도사람들의 모든 이야기에는 춤과 노래가 함께 한다. 이승에서 풀지 못한 서러운 원한을 풀어주고 평안한 세계로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이 씻김굿이다. 즉, 죽은 사람이 생전에 풀지 못했던 소망이나 원망 등 한이 될 것들을 씻어주는 것이다. 특히 진도의 씻김굿은 춤과 노래와 음악이 어우러진 진도 문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씻김굿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굿의 내용이 다르다. 초상이 났을 때 시체 옆에서 직접하는 곽머리씻김굿과 죽은 지 1년 되는 날 밤에 하는 소상씻김굿, 죽은 지 2년 되는 날 밤에 하는 대상씻김굿, 집안에 병자가 있거나 좋지 않은 일들이 자주 일어날 때 벌이는 날받이씻김굿, 임시로 무덤을 만든 후 묘를 만들 때 하는 초분이장 때 하는 씻김굿, 집안의 경사에 대해 조상의 은혜를 기리며 하는 영화씻김굿,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넋건지기굿, 총각이나 처녀로 죽은 사람들끼리 혼인을 시켜주는 저승혼사굿 등이 있다. 씻김굿은 세습무당인 당골이 주재하며 한밤중에 시작해서 밤을 꼬박 새고 새벽까지 계속된다. 씻김굿의 순서는 큰 마루에 제상을 차린 후 조상께 굿하는 것을 알리는 안당에서 시작되어,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들이는 초가망석, 천연두신을 모시는 손님굿, 산 사람의 길복을 돌보는 제석신을 불러 모시는 제석굿, 조상굿을 한 후 죽은 사람의 넋을 풀어 주고 씻어 주는 고풀이, 영돈말이, 이슬털이를 한다. 그 후 씻김이 제대로 되었음을 확인하는 넋올리기, 죽은 사람이 극락에 닿을 때까지 모든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라는 희설, 저승 가는 길을 닦는 길닦음을 하고, 당골이 대문간에 상을 차리고 징을 치며 굿에 온 조상과 여러 신을 배웅하며 풀어 먹이는 종천을 마지막으로 씻김굿은 끝이 난다. 밤새 이어진 씻김굿이 끝나고 새벽이 올 때 '씻겨진' 것은 죽은 이의 넋만이 아니다. 애절한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고, 중간중간 쉴 참에는 육자배기와 아리랑, 유행가까지 신나게 질러 넣고, 고풀이 대목에서는 자기 삶의 매듭과 옹이도 풀어 버리며 굿을 지켜보는 가운데 산 사람들의 마음도 어느 결에 후련히 씻기어 있다. 씻김굿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들을 만나게 하여 서로를 씻게 함으로써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대로 산 사람은 산 사람대로 제자리를 찾아 두루 평안하게 하는 의식인 셈이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도 아리랑
진도 사람 치고 그림이나 글씨 못하는 사람 없고 목청 트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들 한다. 아리랑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아리랑으로 아리랑의 대표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메기고 받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빠른 템포로 노래하여 흥겨운 느낌을 준다. 일반적으로 중모리장단으로 부르나 때에 따라서는 느린 박자인 진양조나 중모리보다 약간 빠른 중중모리로 부를 수도 있다. 진도 아리랑은 정선 아리랑이 지니고 있는 슬픈 정서와 달리 육자배기 가락에 판소리의 구성진 목청이 어우러진 진도지방 특유의 맛을 지니고 있다. 혼자 부를 때에는 유장하고 슬픈 노래가 되어 신세타령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노래판에서 여럿이 부를 때에는 빠르고 흥겨운 노래로 신명을 일으키고 일체감을 느끼게도 한다. 진도의 매김소리는 판소리꾼 같은 전문 기능인의 기교가 아니어도 보통사람이 얼마든지 부를 수 있는 대중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흥에 겨워 노랫말만 공감대를 이룬다면 음의 박자나 고저는 별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진도 아리랑의 가사는 대부분 일상생활에서의 억제된 성적해방이나 남녀 관계에 관련된 노골적인 노랫말이 많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느냐 날 두고 가신 임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십오야 밝은 달은 내 사랑 같고 그믐의 어둔 밤은 내 간장 녹이네" "춥냐 덥냐 내 품안으로 들어라 베개가 높거든 내 팔을 베어라" "저기 가는 저 처녀 엎으러나 져라 일서나 주는 듯이 보듬아나 보자" "신작로 복판에 솥 때우는 사람 내 정 떨어진 데는 못 때우나요" "서방님 올까 봐 꾀를 벗고 잤더니 문풍지 바람에 설사병이 났네"
이처럼 진도아리랑의 가사는 비교적 점잖은 표현에서 언제 들어서 웃음이 금방 쏟아지는 재미난 표현들도 많다. 앞소리에 이어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라는 힘차고 신명나는 후렴을 부르면서, 함께 노래했던 사람들은 또 한번 공감대를 이루게 된다.
다시래기
다시래기는 초상이 났을 때, 특히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사람의 초상일 경우 동네 상여꾼들이 상제를 위로하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해 전문예능인들을 불러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 노는 민속극적 성격이 짙은 상여놀이이다. 다시래기라는 말은 정확한 어원을 알 수 없으나, 다시락(多侍樂)이란 '다시 낳다' '다시 마음을 먹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즐거움을 갖는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진도다시래기는 다섯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마당은 가상제놀이로 가짜 상제가 나와 상여꾼들과 농담을 주고받는다. 둘째 마당은 봉사인 거사와 사당 그리고 중이 나와 노는데, 진도다시래기의 중심굿에 해당된다. 셋째마당은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만가(輓歌)를 부르는데 다른 지역의 상여소리와 달리 씻김굿의 무당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넷째 마당은 묘를 쓰며 부르는 가래소리를 하면서 흙을 파는 시늉을 한다. 다섯째 마당은 여흥놀이로 이어져 예능인들은 후한 대접을 받는다. 진도다시래기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례 때 무당단체인 신청(神廳:당골들의 자치기관인 무계의 집합소)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골 전문예능인들에 의해 전승된 민속극으로 장례풍속과 민속극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운림산방
진도는 언제나 문화와 예술의 땅으로 불리운다. 그 이름에 걸맞는 걸출한 화가가 있었으니 바로 소치 허련(少痴 許鍊)이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로 불리우는 그가 만년에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렸던 곳이다. 순조 9년(1809)에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난 소치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28세에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 밑에서 공제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33세 때는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된다. 김정희는 허련과 그의 그림을 대단히 사랑해서 원나라 4대 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라고 하는 데 빗대어서 소치라는 호를 지어주며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까지 칭찬하였다. 서울에서 지내면서 이름이 난 허련은 38세 때 왕(헌종)에게 그림을 바친 이래 여러 차례 궁중을 드나들며 왕 앞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왕실에 소장된 고서화를 평하기도 하였다. 헌종의 배려로 여러 벼슬을 거치기도 하였으며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한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소치는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는 그의 대표작이다. 운림산방은 허련의 셋째 아들인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2∼1938), 손자인 남농 허건(南農 許楗, 1908∼1988)이 태어나 남종화의 대를 이은 곳이며 또 한 집안 사람인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이 그림을 익힌 곳으로서 한국 남화의 성지이기도 하다. 후손들이 진도를 떠나면서 운림산방은 오랫동안 원형을 잃고 방치되어 있었는데 1982년에 손자 허건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운림산방에는 소치가 기거하던 초가와 사랑채, 화실, 소치기념관 등이 있다. 또한 연꽃으로 덮인 연못이 주위의 즐비한 나무들과 더불어 운치를 더해준다.
남종화의 맥
1) 소치 허련(小癡 許鍊) 조선 말기에는 남종화풍의 유행과 중국에서 불어온 남종문인화를 중시하는 여파로 김정희 등에 의해서 직업화가를 경시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18세기 한국적인 회화 장르로 자리잡았던 풍속화나 진경산수화의 쇠잔을 가져왔다. 진도에서 태어난 허련은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등과 함께 김정희 일파의 화가였다. 본관은 양천으로 허균(許筠)의 후손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예이다. 자는 마힐(麻詰), 호는 소치(小癡), 노치(老癡), 옥주산인(沃州山人)이라 했고 허유(許維) 라는 다른 이름도 사용하였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어 28세 때부터 두륜산방(해남 대둔사)의 초의선사 밑에서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33세 때는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된다. 김정희는 허련과 그의 그림을 대단히 사랑해서 원나라 4대 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大癡)라고 하는 데 빗대어서 소치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는 김정희의 문하에서 중국 북송대의 화풍과 김정희의 화풍을 전수 받으면서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였고, 김정희를 통하여 당시의 사대부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40세 되던 1847년 7월에는 낙선제에서 헌종을 배알하고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하여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허련은 중국 남종화의 맥을 이어온 대가들의 화풍을 많이 따랐는데, 특히 예찬과 황공망을 추앙하였고 그들의 필법과 구도, 화풍을 소화하였다. 그러나 진한 먹을 대담하고 능란하게 구사한 모란·화초·괴석(怪石)·노송·사군자·연화도(蓮花圖) 등은 특징적인 개성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허련의 개성이 뚜렷해지는 시기는 대체로 50대를 전후해서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화풍은 크게 2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기는 김정희를 통해서 훈련된 남종문인화의 화풍을 소화한 시기이고 후기는 추사가 세상을 떠난 후(1856)부터는 특징적인 독필과 자유분방한 수묵 구사가 나타나는 시기이다. 50대 후반 이후 허련의 회화는 더 이상 새로는 면모를 나타내지 않고 급격히 양식화 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 때에 형성된 허련의 화풍은 한국에서의 남종화풍의 토착화와 관련지어 그가 한국회화사에 남긴 업적으로 평가된다. 허련의 화풍은 진도의 운림산방에서 가전(家傳)되어 아들인 미산 허형(米山 許瀅)으로, 미산에서 방손(傍孫)인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과 손자인 남농 허건(南農 許楗)으로 계승되어 현대 남도 화단에 전통회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허련은 여러 그림 중에서도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선면산수도」(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대표작으로 꼽히며 『몽연록(夢宴錄)』등 『소치실록』을 써서 남겼다.
2) 미산 허형(米山 許瀅) 소치 허련은 제 아들을 두었는데 특히 큰 아들이었던 허은이 어려서부터 시·서·화에 남다른 재주를 보여 자신의 가문에서 전통문인화의 맥을 이어주는 화가가 나오기를 기대하였다. 허련은 그의 스승이었던 김정희를 비롯해 당대의 뛰어난 문인들과 교유하는 장소에 허은을 데리고 다니면서 식견과 학문을 겸비한 화가로 키우기 위해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 그리고 은의 호를 미산이라 지어주었는데, 이는 북송시대 선비화가로 존숭되던 미불(미불)........의 성을 따 미산이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허은은 18세로 요절하고 만다. 그런 중에 넷째 허형이 그린 흑목단을 통해 재주를 우연히 발견한 소치는 크게 기뻐하며 그 날부터 큰형의 아호인 미산이라는 호를 넘겨받고 허련의 화풍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허형은 그림의 재능을 인정받았을 뿐이고 그의 그림은 아버지의 문기나 화격을 따르지 못하였으며 특히 산수화에 있어서는 허련의 품격과 거리가 많았다. 그 이유는 대체로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사회상, 가세가 어려웠던 점, 근대 화단의 동향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특히 허련의 타계 이후 운림산방에서 그림을 팔아 가계를 운영해 나가야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어 다작을 하여 어색한 그림의 경우도 보인다. 비록 그의 그림은 수준에 못 미쳐 소외되었지만, 아들인 남농 허건과 방손계인 의재 허백련 등 허련으로부터 남도의 양대 화백과 전통을 잇게 해준 교량역할을 한 것만으로도 그의 위치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3)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의재 허백련(1891-1977)은 소치 허련과 마찬가지로 조선 중기에 진도로 이주해 온 허균의 후예 허대(許岱)의 후손이다. 그는 소치 허련의 방손으로 항렬로 보면 허련의 고손(高孫)이 된다. 허백련은 어려서 아버지인 허경언(許京彦)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운림산방을 드나들며 허형에게서 묵법(墨法)을 배웠다. 7세부터는 진도에 유배 온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무정 정만조(茂亭 鄭萬朝)에게 본격적으로 한학과 그림을 배우게 된다. 스승인 정만조는 허백련이 18세 되던 해 그의 이름인 백년(百年)을 소치와 연결지어 백련(百鍊)이라고 고쳐 불렀고, 의재라는 이름도 『논어』'강의목눌근인(剛毅木訥近仁)'에서 따와 지어주었다. 이처럼 허백련은 어려서부터 스승 정만조의 학문과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는 그림을 통해서 부유하고 넉넉한 삶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가 법률공부에 뜻을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입명간대학(立命館大學) 법학과와 명치대(明治大) 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곧 흥미를 잃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두루 다니며 중국과 일본의 명작 감상에 관심을 가진다. 이렇듯 일본 생활 속에서도 그림의 인연을 끊지 못하였던 그는 당시 김성수(金性洙)와 송진우(宋鎭宇)를 만나고 일본의 전통남화를 고수하던 소실취운(小室翠雲)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소실취운에게 소질을 인정받고 그의 집에 기거하며 그림을 그리면서 회화세계 정립에 많은 자극을 받게 된다. 또한 김성수와 송진우는 화가로서의 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이후 선전(鮮展;오늘날의 국전) 출품, 후원회 조직 등을 통해 허백련의 화명(畵名)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성수·송진우와의 지속적인 만남은 그의 민족의식에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결국 법학과 그림사이에서 갈등하던 청년기의 방황은 그가 화가로서 대성할 수 있도록 폭넓은 교양을 마련해 준 것이고 많은 명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위치도 다져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승인 허형이 소극적이고 위축되는 활동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활동범위가 넓고 적극적이었던 의재는 근대회화사에 기억할 만한 거장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화가로서 입신하는데 허형이 끼친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다. 1918년(28세) 3년 만의 일본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허백련은 본격적인 회화활동에 들어간다. 1938년(48세) 연진회(鍊眞會)를 발족하고 광주에 정착하기까지 목포·광주·서울·전주·진주·평양·신의주·함흥 등 경향 각지에서 시화전을 가졌고 선전에의 참여, 금강산 여행 등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작품활동 외에도 민족주의적 사회교육에도 앞장섰다. 해방이 되면서 삼애학원(三愛學院)의 설립, 증심사 기슭에 춘설헌(春雪軒) 마련, 농업기술학교의 설립 등이 그것이다. 그는 화단에서도 지도적 역할을 하였는데 국전(國展)에 중진·원로로 참여하여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의 60-70년대 화단활동과 그 지위는 후배나 문하의 역량 있는 작가들이 등단하고 성장하는 데 큰 힘이 되었고, 남도의 화단을 풍성하게 하였다. 그의 작품은 산수화 외에도 화조, 영모, 사군자 등 다양한 화재에서 뛰어난 필력을 발휘하였지만 역시 그의 업적은 산수화에서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산수화를 중심으로 볼 때 그의 작품세계는 세 시기로 나눌 수가 있다. 아호를 의재(毅齋)가고 쓰던 40대 중반까지는 회화수업기로 선전 출품과 입상 등 활약을 보이지만 전통적인 남종화법이 깔려있었다. 금강산 여행 등 사생에도 관심을 가졌던 시기이고, 이때 다양한 화풍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회화세계를 정립해 나갔다. 의재산인(毅齋散人)이라는 서명을 주로 사용한 40대 중반에서 50대 말까지는 전기의 다양한 시도를 종합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말기인 60년대에서 만년까지는 의도인(毅道人) 혹은 의옹(毅翁)이라 했는데, 허백련 회화의 안착기로 간소한 맛의 형식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났다. 그의 산수화는 화보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풍경을 그려낸 관념적인 표현이 대부분이고 철저하게 허련의 필치와 색감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면서도 남도의 풍경이 연상되는 산수표현이나 경물(景物)의 형식은 사생적인 태도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흔적이며, 소치의 화풍을 나름대로 소화한 갈필과 진한 먹의 무디고 대담한 구사나 선명한 색감, 진지한 화면 처리에 그의 개성적인 화격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허백련은 말년에 다향(茶香)에 심취하여 이를 통해 도인적 생활과 정신을 지속시켰고, 광주에 정착하여 해방 후인 1946년에는 증심사 입구에 있는 차밭을 일본인으로부터 인계받아 '삼애다원(三愛茶園)'이라 이름지었다. 그의 차에 대한 애정은 남도에 뿌려진 다산 정약용,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 등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4) 남농 허건(南農 許楗) 남농 허건(1907-1987)은 의재 허백련과 함께 근대 남종화단의 맥을 일구어 온 두 기둥이다. 진도의 운림산방에서 태어난 그는 화가인 아버지 허형의 다섯 형제 중 4남이며 막내인 허림(許林)과 함께 가업을 이어 화가로서 성장하였다. 림(林)은 25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지만 허건은 지속적인 제작활동을 통해 남도화단의 중추적 역할을 고수하였다. 그가 태어난 1907년은 의재 허백련이 16세 때로 운림산방을 드나들며 허형에게 그림을 배우던 때이다. 허건은 집안의 전통과 분위기에 젖어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목포 북교보통학교 6학년 때 전국학생미술대회에서 동양화부 1등으로 입상한 뒤부터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목포상업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1930년 스물셋의 나이로 제9회 선전에 첫 입선하여 화단에 등단하게 되었으며 이후 해방 전까지 꾸준히 선전을 통해 자신의 펴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국전(國展)에 추천 초대작가로 참여하였고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는 허백련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추대되어 화단에서 중진적 위치를 굳혔다. 또한 경향 각지에서 개인전 혹은 초대전을 통하여 활발한 전시활동을 펼쳤다. 또 그의 활동과 그 위치에 부응하여 전라남도문화상(1956), 목포문화상(1960), 5.16민족문학상(1977)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남화연구원(南畵硏究員)'을 열어 문하생을 받아 후진을 양성하고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하였으며, 그들에게 국전 진출 등의 길을 마련해 주어 남도 화단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그의 회화는 할아버지 소치, 아버지 미산의 영향을 받아 가풍을 이었으나 선전과 특히 일본의 '남종원전(南宗院展)'이나 '문전(文展)'에 참가하면서 새로운 변모를 이루었다. 이들 공모전에서의 입선을 통해서 일본화풍 및 서구화법의 사생화(寫生 )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거기에는 동생 허림이 일본화풍을 받아들였던 것에 대한 자극도 있었다. 당시 허건의 작품은 실경을 바탕으로 농촌이나 바다의 정경을 담은 온화한 분위기의 것들로 향토색 짙은 화재와 화풍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해방 후 40대부터는 다시 남종화풍의 형식에 눈을 돌려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산수화를 중심으로 한 그의 회화적 특징은 현란한 스케치풍의 몽당붓으로 쏟아놓은 듯한 독필구사에 있다. 즉 얼기설기한 종횡의 필치를 속도감 있게 구사하여 나무·산 등의 경물을 그렸으며, 대담한 수묵의 농담으로 개성있는 화면을 연출하였다. 이러한 감각에는 역시 허련으로부터 내려온 가풍이 진하게 배어있는 것이었다. 가법(家法)을 바탕으로 한 그의 화풍은 새로운 자신의 필법을 구축하기 위하여 철저히 현대적으로 소화하려는 노력의 결집이다. 허건의 거친 독필의 구사와 속도감 넘치는 필치는 허백련의 두루뭉실한 화풍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허건의 화풍을 그가 정착한 목포의 유달산에 허백련의 화풍을 무등산의 분위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따라서 허건의 회화는 허백련보다 자유분방하여 새로운 조형의식이 드러나 있으며, 그의 화면은 전통을 탈피한 현대적 감흥에 부합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회동 신비의 바닷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신비의 바닷길.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의 띠섬(모도) 사이 약 2.8km가 해마다 음력 2-3월 보름쯤에 한 차례 갈라져 바닷속을 드러낸다. 이러한 현상은 조수간만의 차이로 수심이 낮아지면서 바다밑의 산등성이처럼 돌출된 부분이 드러나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폭 40여m의 길이 바닷속에 만들어진다는 것 자체가 신비롭기 그지없다. 바닷길은 약 1시간 동안 계속된다. 전세계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을 보기 위해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곳 신비의 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가 진도로 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프랑스 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는 뽕할머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회동리의 옛이름은 호동리였는데 이는 호랑이가 많이 출몰한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어느 날 호랑이가 나타나 피해를 입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바다 건너 띠섬으로 배를 타고 떠났는데 그만 급하게 떠나느라 뽕할머니 혼자만 남게 됐다. 뽕할머니는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어서 매일같이 용왕님께 기도를 하였고 드디어 바닷길이 열렸다. 하지만 너무 지친 할머니는 가족을 만나자마자 "이젠 한이 없다"며 숨을 거두었다. 그 뒤부터 마을에서는 해마다 할머니의 제사를 모셨는데 이것이 바람의 신인 영등신에게 한해의 풍요로운 어업과 농사를 기원해 모시는 영등제와 어우러져 진도 영등축제가 되었다. 마을로 다시 돌아온 주민들은 호랑이의 피해도 없어지고 어업도 잘 되자 마을 이름도 호동을 회동(回洞)으로 바꾸어 불렀다. 바닷가 사당에 모셔져 있는 뽕할머니 영정은 진도 출신 동양화가 옥전(沃田) 강지주 화백이 그렸으며 문을 열면 기적의 현장을 바라보게 되어 있고, 바닷길 입구에는 뽕할머니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진도홍주〉 진도홍주는 진도의 음식문화를 상징한다. 진도홍주가 아름다운 홍색으로 착색되어 맛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매력을 주며, 독특한 향기를 지니게 된 것은 바로 '지초(芝草)' 때문이다. 진도홍주는 선혈같이 붉은 빛 소주를 지초(芝草,紫草)라는 식물 뿌리로 염색한 술이다. 그래서 지초주(芝草酒)라고도 한다. 진도 홍주는 주재료인 지초가 주는 효능으로 인해 소화를 도와 식욕을 왕성하게 하고, 소량의 술로 취기를 느끼게 하며 숙취가 없고, 지초는 설사와 복통에 특효가 있으며 피를 맑게 한다.
〈세방낙조〉- 한반도 최남단 제일의 낙조 조망지 진도 해안도로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세방 해안 일주도로. 가사도, 주지도, 양덕도 등이 멀리 보이고, 이름 모를 섬들이 옹기종기 바다를 수놓고 있다. 해질 무렵이면 세방리 해안도로 어느 곳에서든 발길을 멈추면 황홀한 일몰을 볼 수 있다. 진도대교에서 전망대까지 한시간 가량의 운전이 결코 후회스럽지 않다. 진도대교에서 전망대까지 한시간 가량의 운전이 결코 후회스럽지 않다. 손가락섬, 발가락섬, 사자섬 등 기묘한 섬들을 찾아보는 것도 독특한 재미다.
〈금골산 오층석탑〉 금골리에 있는 나즈막하고 둥근 금골산(193m)은 오래 전부터 진도사람들이 영험 있는 산으로 신성시 여기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산밑에 16나한을 세우고 67칸의 해원사라는 절을 짓기도 했었다. 금골산 아래 금성초등학교 안에는 해원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5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1973년에 학교터를 정리하던 중에 웅장한 석재며 초석, 온돌의 흔적 등이 나왔다. 이 탑은 해원사에 속했던 것으로 지금 자리한 곳이 원래의 위치로 짐작된다. 이 탑은 형식과 만들어진 수법으로 보아 고려 시대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5.4m이며, 이 탑의 기단부와 1층 몸돌은 매우 길게 조성되어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는 정림사지오층석탑과 맥을 같이 하는 백제계의 석탑양식이 이곳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진돗개〉 진돗개는 한국 토종견으로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돼 있다. 진돗개의 역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속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속설로 구전도어 온 몽고견설이나 송나라 표류견설은 근거가 애매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진돗개는 많은 개들 중에 충성심이 탁월하다. 1993년 의신면 돈지리에 살던 백구가 대전으로 팔려갔다가 2개월만에 혼자 힘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적이 있어 한반도를 놀라게 하였다. 진돗개는 네 다리가 늠름하고 털에 윤기가 있으며 체격이 다부지다. 머리는 팔각형이고 굵직한 목에 등이 곧으며 세모꼴의 작은 귀는 앞쪽으로 숙이고 꼬리는 굵고 힘차게 위쪽으로 말려있는 것이 진짜 진돗개다. 진돗개는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포수의 총질 없이도 노루나 멧돼지를 잡을 정도로 사냥에 뛰어난 개일 뿐 아니라 사람을 잘 물지 않는 부드러움을 갖춘 개다. 진도사람들은 1968년에 진돗개 보육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우수한 진돗개를 육성하고 무분별한 반출이나 육지 개의 반입을 막는 등 혈통 보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 자료> 문화유산답사회, 전남, 돌베개 향토문화진흥원, 진도문화 진도자랑 진도군지, 진도군 원형의 섬 진도, 김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