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피앙(기표), 시니피에(기의), 레페랑(지시체)
기호학의 기초인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본개념은 알아야 했으므로 소쉬르의 기본 개념 몇가지를 설명하는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우선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e). 이것은 ‘의미하다’라는 뜻의 불어 동사 signifier에서 파생된 것으로 시니피앙은 ‘의미하는것’, 시니피에는 ‘의미되어진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 보통명사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서 기표(記表), 기의(記意)라는 혁명적인 개념으로 변했다.
생소한 단어가 나타났다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들이 기표(시니피앙)이고, 그 단어들의 의미가 기의(시니피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책’이라는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는 기표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책’이라는 개념은 기의이다.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라는 말이 어려우면 우리가 ‘책’이라고 썼을 때의 글자, 그리고 우리가 ‘책’이라고 발음할 때의 음성적인 물질성이 바로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이다. 이 ‘책’이라는 기표가 의미하는 내용은 ‘글자가 인쇄된 종이들의 묶음’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바로 기의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들이 기표와 기의라는 얇은 두 겹으로 분리되어 있다.
똑같은 의미의 단어가 왜 나라마다 다른가를 생각해보면 기표와 기의의 분리가 쉽게 이해될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책’이라고 하는 것을 영어는 book, 불어는 livre라고 하니 말이다. 결국 기표는 내용 없는 겉 껍데기이고, 그것이 어떤 기의와 결합되었을 때만 의미가 발생된다. 그러고 보면 ‘책’이라는 기표가 반드시 ‘책’이라는 의미를 가져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저 한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사물은 책이라고 하자’라고 정했을뿐이다. 영어권에서서는 그것을 book이라고 정했고, 불어권에서는 livre라고 정했을 뿐이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다”라는 소쉬르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기호에서 지각될수 있는 부분이 기표(시니피앙)이고 부재하여 우리의 지각이 감지할수 없는 숨겨진 부분이 기의(시니피에)이다. 덴마크의 언어학자 옐르슬레우(Hjelmslev)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대신 표현(expression)과 내용(contenu)이라고 말했는데, 이 용어가 좀 더 쉽게 다가올지 모르겠다. ‘책’이라는 기표와 ‘글자가 쓰여진 종이묶음’이라는 기의가 합쳐져 ‘책’이라는 의미가 발생한다. 이것이 의미작용이다. 그러므로 의미작용(signification)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에서 일어난다. 한편 기표와 기의가 지시하는 현실 속의 대상은 지시체(指示體)(referent)이다. 예컨대 우리가 ‘황소’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 음성적, 활자적 물질성은 시니피앙이고, 그것이 뜻하는 바의 의미는 시니피에인데 여기서 지시된 대상, 즉 현실 속의 황소는 ‘지시체’ 혹은 ‘지시대상’이다.
막연하게 확고부동한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고 있던 말들이 미세한 두 겹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잠시 혼란을 느끼는 듯 했다. 편안한 의식을 잠시 뒤흔든 이 가벼운 충격이야말로 인문학의 첫걸음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사물 속의 물자체(物自體), 가시적인 것 속의 비가시적인것, 존재 속의 무(無), 현상 뒤에 숨겨진 이데아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구 철학의 전통이 모두 이 미세한 두 겹 분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적 현상도 개인의 의식 속에 깊이 파묻힌 시니피에에 다름 아니다. 하나의 소설 작품에서도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적 형식은 시니피앙, 소설 속에서 말해지고 있는 이야기는 시니피에라고 말할수 있다. 이것은 광고나 영화 분석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소설 전체, 영화 전체만이 아니라 부분 부분의 형식과 내용에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데노타시옹과 코노타시옹
데노타시옹(denotation)과 코노타시옹(connotation)은 옐름슬레우가 처음으로 말했으나 롤랑 바르트가 차용하여 널리 퍼뜨린 이후 기호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정착했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에서 의미작용이 생기는데, 이 의미작용 역시 두 개의 층위가 있다. 그 첫 번째 층위가 데노타시옹으로, 이것은 단어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 ‘명백한 의미’ 혹은 ‘상식적인 의미’이다. 우리말로는 외시(外示)라고 한다. 우리가 사전에서 찾아보는 말들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의미작용의 두 번째 층위인 코노타시옹은 한 단어가 가진 사회 문화적 연관 혹은 이데올로기적 연관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니그로(negro)라는 단어는 글자 그대로의 사전적인 의미는 ‘피부가 검은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사회,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는 ‘백인 사회에서 천대받는 유색인종’을 뜻한다. 이것이 코노타시옹이고 우리말로는 공시(共示)라고 한다. 외시는 단 하나지만 공시는 무수하게 많을 수 있다. 윌든(Wilden)은 데노타시옹을 디지털 코드로, 코노타시옹을 아날로그 코드로 간주하기도 했다.
모든 기호에는 외시와 공시가 있다. 외시의 층위에서 기호는 기표와 기의가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공시는 이 기호, 그러니까 ‘니그로’라는 시각적, 청각적 물질성과 ‘검은 피부의 사람’이라는 의미가 결합된 이 기호를 다시 하나의 시니피앙으로 삼아 그것의 시니피에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노타시옹은 외시적 기호를 시니피앙으로 삼아 거기에 또 다른 시니피에를 추가시키는 2차 의미작용이다. 따라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분석의 수준에 달려 있다. 한 쪽 층위에서 시니피앙인 것이 다른 쪽 층위에서는 시니피에가 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런 2차 의미작용을 넘어 세 번째 단계의 층위도 있다고 말한다. 다름 아닌 신화의 층위이다.
마릴린 몬로의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외시적 수준에서 이것은 마릴린 몬로라는 한 배우의 사진이다. 그리고 공시적 층위에서 이것은 한 여배우가 표상하는 글래머, 섹슈얼리티, 아름다움을 뜻한다. 그러나 세번째 단계에서 이것은 헐리우드적 신화, 그리고 글래머 배우가 만들어내는 아메리칸 드림을 뜻한다. 이것이 신화의 단계이다. 이 세 번째의 신화적, 이데올로기적 의미작용은 주류 문화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기호와 커뮤니케이션
기초적인 용어를 익혔으니 이제 기호학으로 진입해 보기로 하자. 사전적인 의미에서 기호학이란 기호의 과학이다. 그러나 현대의 문화연구에 폭넓게 적용되고 있는 기호학은 엄밀히 말해서 기호의 성격과 기능 작용을 연구하는 기호학이 아니라 의미에 관한 이론이다. 프랑스의 대표적 기호학자인 그레마스(Algirdas Julian Greimas, 1917-1992)는 기호학을 “의미의 생성과 파악의 조건”을 규명하는 이론이라고 정의하고, 담화(discours)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서 담화는 언어로 쓰여진 텍스트뿐 아니라 비언어적 언어, 즉 몸짓, 그림. 영상 등과 같은 모든 매체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뜻한다. 따라서 기호학은 담화를 통해 나타난 모든 의미 활동들의 조건들을 규명하는 것이다.
그럼 기호란 무엇인가? 기호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또는 사건)을 대신하거나 재현하는 그 무엇, 즉 사실이 아니라 가상이며 허구이다. 화폐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신은 비어 있으면서 외부로부터 가치를 부여받는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은 의사소통에 필요한 메시지를 구성하기 위해 청각, 시각, 시청각, 후각의 기호들과 제스추어를 사용한다. 동물도 의사소통을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의사소통은 거의 생존의 필수적인 조건이라 할수 있다. 다른 인간들과의 의사소통이 없는 인간은 아무리 생존에 필요한 공기와 음식을 섭취하며 생명을 유지한다 해도 그의 삶은 인간으로서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메시지를 주고 받는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메시지의 송신자와 수신자가 있어야 한다. 송신자(emetteur)는 수신자(recepteur)에게 말, 그림, 글, 몸짓등을 통해 하나의 메시지를 보낸다. 이때 송신자가 보낸 메시지를 수신자가 이해하고, 이번에는 자기가 송신자가 되어 또 다른 형태의 메시지를 되돌려 보내면(feed-back) 그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아니 우리의 인생은 이런 관계의 끊임없는 교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우리의 메시지를 보내는 수단이 바로 기호이다. 기호의 과학, 즉 기호학이 현대의 중요한 학문으로 떠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상호 소통 관계는 주로 이미지나 소리의 관계에 근거해 있다. 따라서 메시지의 수단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적 기호, 즉 말(parole)과 글(ecriture)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시청각적 요소와 도상적(圖像的) 기호(signes iconiques)이다. '아이콘적(도상적) 기호‘라는 용어는 글자가 아닌 모든 이미지 형태의 의사소통을 말한다. 기호학이 왜 주로 언어적이거나 시청각적, 혹은 아이콘적인가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미국의 언어학자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74-1914)는 언어 체계 이외의 모든 유사 재생산 체계를 ‘아이콘적’이라고 불렀다.
도상(icone), 지표(indice), 상징(symbole)
아이콘의 말이 나온 김에 퍼스의 세 가지 유형의 기호 분류에 대해서 좀 더 알아 보자. 도상 기호의 지배적 원리는 유사성이다. 즉 도상은 주로 유사성에 의해 그것의 대상을 표상한다. 퍼스 자신은 도상 기호의 예로 그림과 사진을 들었다. 이때 그림은 물론 추상화가 아니라 실물과 흡사하여 혼동을 줄 정도의 사실적 그림이다. 오늘날에 와서 도상의 전제 조건이 되는 유사성은 시각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청각적, 후각적인것등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를테면 바나나의 인공 향료는 바나나의 도상이 될 수 있다. 별개의 두 항목이 의미론적 공통성에 의하여 관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엘람(Elam)은 도상을 은유(隱喩)(metaphore)에 비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연극 무대 위에 걸쳐 놓은 대형 녹색 천은 녹색이라는 공통적 특성에 의해 숲이라는 무대 배경을 대체해 준다. 이 경우 녹색 천은 은유적 대체를 이용한 도상적 기호가 되는 것이다. 야콥슨(Roman Jacobson)은 은유적 대체가 언어 표현뿐 아니라 모든 예술 활동의 기본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퍼스의 두 번째 기호 분류는 지표이다. 하나의 기호가 어떤 역동적 대상과 갖는 실재적 관계에 힘입어 부각될때 그 기호를 지표라고 한다. 고유명사가 가장 좋은 예이다. 병의 징후도 역시 지표이다. 화재를 알려주는 연기도 또한 지표이다. 벼락에 대한 청각적 시각적 기호인 천둥과 번개, 또는 호흡기 점막 염증에 대한 징후로서의 기침등이 지표이고, 모래 위나 눈 위에 남겨진 발작국과 같은것도 인간이나 동물이 지나갔음을 알리는 지표로서의 자연적 기호이다.
이처럼 지표는 지시 대상과 실재적 관계를 갖거나 인과관계를 가지는 기호를 폭넓게 지칭한다. 역시 엘람은 지표가 인과관계나 공간적 인접성에 의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이것을 환유(換喩)(metonyme)와 비교했다. 환유의 예로 많이 이용되는, 미국 대통령을 지시하는 백악관이나, 영국 시민을 지시하는 우산, 실크 해트등이 다름 아닌 지표인 것이다. 연극이나 영화 속의 어떤 소도구가 그것을 항상 착용하고 사용하는 인물과 그의 행동을 지시하는 경우, 그것은 환유적 성격을 가진 지표인 것이다.
퍼스의 세 번째로 기호 분류인 상징은 그것이 해독될 의미 안에서만 대상과 관여하는 기호이다. 이때 의미의 도구로서의 기호와 대상 사이에는 아무런 유사성이나 근접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퍼스는 언어를 들었다.
코드
요즘에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코드이다. 신문 잡지의 영화 평이나 문화시론에서 여러분들은 코드라는 단어를 무수하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코드란 무엇인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화폐가 교환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그 화폐가 어떤 가치를 대신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런 가치 공감대가 없으면 화폐는 한갓 종이장에 불과하여 그것으로는 아무런 물건도 살 수 없다. 이 가치 공감대가 체계화된 것이 코드이다. 코드란 사회적인 성격을 지닌 추상적인 규칙의 총체이다. 따라서 코드는 사회적인 성격을 갖는다. 한 번 체계가 잡히고 나면 일종의 강제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요컨대 코드는 메시지의 생산과 수용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다. 기호학에서 코드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메시지를 만들고 풀어내는 규칙이다. 메시지를 생산하는 행위는 코드엮기(불, codage, 영, encoding)이고, 메시지를 수용하는 행위는 코드풀기(불, decodage, 영, decoding)이다. 코드엮기와 코드풀기의 과정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고 진행되며 조절되고 유지된다.
광고에 적용된 기호학
베르나르 투셍의 <기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예로 든 것은 로크포르 회사에서 나온 치즈 광고이다. 위 아래 두 개의 사진이 있는데, 윗 부분은 숲속 타원형의 호수에 양떼가 와서 물을 먹고 있는 사진이고, 아래 쪽은 전통 방식의 치즈 숙성 창고이다. 이 두 사진 한 가운데 비어 있는 여백에 “로크포르 회사. 한 지방, 많은 사람들, 한 치즈”라는 카피가 들어 있다. 이 카피 바로 아래에 조그만 완제품 사진과 녹색 타원형의 상표가 있다. 두 개의 그림, 한 개의 카피로 3등분된 이 광고를 한 번 기호학적으로 분석해 보자.
윗 그림의 데노타시옹은 물론 숲 속 호수에 양들이 와서 물을 먹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코노타시옹은 ‘깨끗한 대자연’이다.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바위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호수의 청녹색 물은 현대 환경론자들의 꿈인 청정한 대자연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양들이 와서 물을 먹는다. 그리고 호수의 모양은 타원형이다. 사진 밑에 조그맣게 인쇄된 회사 로고도 초록색 타원형이다. 로크포르 치즈의 상표가 타원형이고, 또 이 회사의 치즈가 양젖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광고그림은 결코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다. 양들이 숲 속 호수에서 물을 먹는 무심한 사진 한 장을 보며 소비자는 로크포르 치즈가 깨끗한 양젖으로 만들어진 치즈라는 것을 은연중에 머리 속에 떠올리게 한다.
“지방, 사람, 치즈”라는 3행 구조는 농부들이 즐겨 말하는 3행 경구를 상기시킴으로써 향토적 이미지를 풍긴다. 이 향토적 이미지는 아래쪽의 숙성 창고 사진으로 이어진다. 숲 속 호수와 마찬가지로 지하 숙성창고도 기계적 생산이 아닌 ‘자연스러움’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오래된 지하창고는 옛것과 전통적인것에 대한 현대인들의 기호(嗜好)에 부합된다.
화면도 셋으로 나뉘고, 카피도 3행 구조이다. 첫 번째 사진은 ‘한 지방’이라는 카피와 일치하고, 두 그림 사이의 흰 여백은 ‘사람들’과 일치하며, 숙성중인 치즈를 보여주는 세 번째 사진은 ‘치즈’라는 카피와 일치한다. 물을 먹는 양과 완제품의 치즈는 이미지로 나타냈지만 양젖을 치즈로 가공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그냥 ‘사람들’이라는 글자로 압축했다.
이 광고 화면에서 우리가 논리적으로 유추할수 있는 사실은 로크포르 회사가 양젖으로 치즈를 만든다는 것, 양들이 공해 없는 청정한 자연 상태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 젖은 틀림없이 양질일 것이라는 것, 치즈는 옛날 지하창고에서 숙성되고 있으므로 완벽한 품질의 전통적 생산품일것이라는 것등이다. 초록색 물과 지하 숙성창고라는 외시적(外示的) 기표(記表)(signifiant denotatif)는 ‘야생의 자연’과 ‘시골’이라는 외시적 기의(記意)(signifie)를 갖는다. 이것이 이미지들의 1차적 의미작용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외시적 기표와 기의를 한데 합친 것이 공시적(共示的) 기표(signifiant connotatif)가 되고 그것의 기의, 즉 공시적 기의(signifie connotatif)는 ‘자연적인 것’과 ‘진짜 전통적 방식으로 만들어진 진품(眞品)’이라는 의미가 된다. 광고는 “토속적인 시골의 재래 방식으로 만들어진 깨끗한 치즈”라는 2차적 의미작용을 이끌어 내기 위해 숲속의 호수와 옛날 시골 지하 숙성창고의 사진을 사용한것이다.
회화에 적용한 기호학
투생은 조르쥬 스라(Georges Seurat, 1859-1891)의 유명한 그림 <그랑드 자뜨 섬의 한 일요일 오후>를 자료체로 삼아 기호학적 분석을 가했다. 여기서 그는 그림의 제목도 하나의 렉시이고, 아이콘(그림 자체를 아이콘이라고 부르는것에 주의하자)도 하나의 렉시라고 했다. 기호학의 모든 용어가 그렇듯이 렉시(lexie)도 언어학에서 차용한 용어이다. 렉시는 담화내에서 의미작용의 기능을 하는 단위이다. 그것은 단어 하나일수도 있고, 일련의 단어일수도 있다(예컨대 집 maison이라는 단어 하나, 또는 타자기 machine a ecrire라는 복합어, 또는 ‘초조해 하다’ se faire du mauvais sang라는 숙어가 모두 렉시이다).
이 그림에서 우선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무수한 삼각형의 구조들이다. 그 삼각형 하나하나가 의미의 최소 단위인 렉시를 구성하고 있다. 첫 번째 삼각형은 양산을 쓴 인물들 사이에 형성된다. 그것은 그림 오른쪽에 검은 양산을 쓴 한 여인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간에 흰색 옷의 소녀를 데리고 빨간 양산을 쓰고 빨간 상의, 흰색 스커트를 입은 인물로 이어지고, 이어서 왼쪽 강물 앞에 한 사람은 서 있고 한 사람은 앉아 있는 두 사람으로 이어진다. 이 두 꼭지점은 원근법이 마주치는 지점 저 멀리 거의 눈에 띌 듯 말듯한 양산 쓴 인물과 연결되면 하나의 커다란 삼각형이 된다. 왼쪽 아래에 앉아 있는 세 사람도 역시 조그만 삼각형을 이루고 있고, 두 마리의 개와 한 마리의 원숭이도 삼각형인데, 중경(中景)의 두 젊은 여성과 후경(後景)의 두 연인과 두 명의 군인은 이원적 구성이다. 강 물 위의 두 척의 증기선과 두 척의 돛배도 역시 이원적 구성이다.
이렇게 보면 이 그림은 삼각형의 요소들이 일종의 퍼즐처럼 또는 성당의 채색유리처럼 하나하나 맞추어져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림 전체의 일차적인 코노타시옹은 한가한 산책, 일요일의 휴식이다. 그림 제목도 ‘한 일요일 오후’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모든 인물들이 다른 사람들을 전혀 바라보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17세기 푸생의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시선의 순환이 없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강물을 향하고 있다.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없이 모든 사람들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발밑에 있는 대지를 잊고, 일상적인 생활을 잊고, 타인을 잊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그림의 이차적 코노타시옹은 ‘망각’이라 할 수 있다.
모두 옆모습으로 처리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종이를 오려 붙인 작은 종이 인형들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회화적 기법의 코드는 콜라쥬이다. 전혀 상호 소통이 없는 인물들의 혼합을 마무리해주는 것이 한 마리의 작은 원숭이와 두 마리의 작은 개이다. 큰 개 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작은 개의 모습은 콜라쥬처럼 정지된 인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생동감을 보여준다.
정지된 인물묘사가 우편엽서를 연상시키는, 일견 평범한 이 그림을 기호학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이것은 결코 인상주의적 사실화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서 사용된 콜라쥬의 미학은 이 그림이 한 일요일 오후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림의 대상과 우리의 지각을 고의적으로 흐릿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은 구상화와 추상화의 한 중간 지점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 지각의 직접성은 사진이나 크로키의 단계에만 있는 것이지 일단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 거기에는 체험적 사건과 지각 사이의 지연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이 틈새에 화가의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끼어든다. 19세기말 한 화가가 그린 이 일요일 오후의 정경은 그저 단순한 일요일의 풍경이 아니라 당대 부르주아 계급의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진에 적용된 기호학
사진의 자료는 그 유명한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바이욀의 카니발>이다. 사진은 모자와 제복을 입고 냉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 사람의 헌병 옆에 소녀가 카니발의 마스크를 벗어드는 장면이다. 여기서 코노타시옹(그레마스는 코노타시옹을 의미의 의미라고 했다)은 아주 분명하다. 세 명의 헌병은 이미 제복이라는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런데 소녀는 사육제의 가면을 벗어 들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가장(假裝)’을 문제 삼는다. 누가 자신을 가장하는가, 누가 가면 뒤에서 자신을 숨기고 있는가? 가면을 벗는 사람은 누구인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찍는 사진도 이렇게 많은 의미를 발생시킬수 있다.
문학에서의 기호학
문학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은 Jean-Yves Tadie의 <20세기의 문학비평>(La Critique litteraire au XXe siecle, Pierre Belfond 출판사 1987년간)의 제3장 ‘문학 기호학’(Semiotique de la litterature)에서 Umberto Eco, Roland Barthes, Greimas et Propp, La Semantique structurale de Graimas등의 부분을 교재로 택하고, 조셉 쿠르테스의 <서사, 담화 기호학 : 방법론과 적용>(La Semiotique narrative et discursive : methodologie et application, Paris, Hachette superieur, 1993)을 참조했다.
우선 프로프의 31가지 민담 구조를 기초로 한 그레마스의 설화구조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소련의 형식주의자 블라디미르 프로프(Vladimir Propp)는 1928년에 <민담 형태학>이라는 저서에서 여러 나라의 민담이 등장 인물과 셩격은 각기 달라도 모든 이야기에 공통된 31가지의 기능이 있음을 밝혀냈다. 우리의 <장화 홍련전>과 프랑스의 <신데렐라>가 매우 유사한것에 놀라움을 느꼈던 사람들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교류가 전혀 없는 단절된 문화권 사이에 왜 이와같은 민담의 유사성이 보이는가? 발생론을 구조적 관점으로 대체한 프로프의 이 31가지 기능이 바로 구조주의 문학 혹은 문학 기호학의 출발점이다.
프로프의 민담 구조
프로프에 의하면 모든 민담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순서로 전개된다. 물론 한 이야기 안에 31가지 기능이 다 들어 있는 수도 있고 그 중의 몇가지만 들어 있는 수도 있다.
1. 이야기는 가족 묘사로부터 시작된다. 2. 서막에 이어 멀리 떠남 혹은 금지의 기능이 이어진다. 3. 금지는 위반된다. 4. 침입자가 정보를 수집하려 한다. 5. 그는 정보를 얻는다. 6. 침입자가 희생자를 속이려 한다. 7. 희생자는 순순히 속임을 당한다. 8. 침입자의 악행. 9. 악행은 폭로되고, 사람들은 진짜 영웅에게 부탁한다. 10. 영웅은 행동하기를 수락한다. 11. 행동 개시. 영웅이 출발한다. 12. 증여자의 첫 번째 기능이 시작된다. 13. 영웅이 반응을 보인다. 14. 마술적인 물건이 영웅에게 주어진다. 15. 영웅은 추구하는 대상 가까이 간다. 16. 영웅과 침입자가 만나 싸움을 벌인다. 17. 영웅은 어떤 증표를 받는다. 18. 침입자가 싸움에서 진다. 19. 최초의 악행이 바로잡아지고, 부족했던 것은 충족된다. 20. 영웅이 돌아온다. 21. 영웅이 추격을 받는다. 22. 영웅이 구출된다. 23. 영웅이 아무도 못 알아보게 변장한 후 자기 집에 돌아온다. 24. 가짜 영웅이 나타난다. 25. 사람들이 진짜 영웅에게 어려운 임무를 시킨다. 26. 임무는 완수되고, 사람들은 진짜 영웅을 알아본다. 27. 영웅이 인정받는다. 28. 가짜 영웅이 탄로된다. 29. 영웅은 새로운 외모를 갖추게 된다. 30. 가짜 영웅이 처벌된다. 31. 영웅은 결혼하여 왕좌에 오른다.
그레마스의 행위자 모델
그레마스는 프로프의 이 분석을 토대로 행위자 모델을 만들어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이야기에는 이야기 안에서의 역할과 관계에 따라 규정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 있다. 이 전형적인 인물을 그는 행위자(actant)라고 부른다. 행위자의 명칭을 정하기 전에 이야기 안에서 “누가 무엇을 부족해 하는가?”, “누가 무엇을 획득하는가?”, “누가 탐구 작업을 통해 부족에서 획득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가?”, “누가 탐구를 도와주는가?”, “누가 탐구를 방해하는가?”라는 다섯가지 질문을 우선 던져 볼 필요가 있다.
무엇을 부족해 하는 사람이 destinateur(발송인, 전달자, 발신자)이고 그가 부족해 하는 대상은 objet(대상, 원하는것)이다. 이 ‘대상’ 혹은 ‘원하는것’을 획득하는 사람은 destinataire(수신자, 수용자)이다. 탐구의 모험을 통해 부족에서 획득으로의 이행을 실행시키는 사람은 heros(영웅, 주인공, 주체)이다. 탐구를 도와주는 사람은 adjuvant(원조자, 도와주는자)이고, 탐구를 방해하는 사람은 opposant((반대자, 방해하는 자)이다. 이 여섯 개 행위자의 상호 관계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송신자 ----------→ 대상 ←------------ 수신자
↑
원조자 ----------→ 주인공 ←------------ 반대자
‘송신자’, ‘수신자’라는 말이 모호하게 들린다면 destinateur가 ‘편지를 부치는 사람’, destinataire는 ‘편지를 받는 사람’이라는 최초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새로운 이야기를 적어 상대방에게 편지를 부치는 사람처럼 송신자는 이야기에 시동을 거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상을 정하고, 지금 자기에게 부족한 그 대상을 가져다 줄만한 영웅(주인공)을 부른다.
대상은 추구되어지는 바의 것이다.
주인공은 송신자의 요구에 따라 그와 계약을 맺고 탐구의 대상을 가져오는 임무를 수행할 작업에 돌입한다.
반대자는 주인공의 탐구를 방해하는 자이다.
수신자는 제일 마지막에 탐구의 대상물을 받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그레마스의 행위자 모델(modele actantiel)이다. ‘행위자’라고 하지만 반드시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장소나 사건, 상황일 수도 있다. 예컨대 주인공의 의식이 주인공 자신에게 반대자의 역할을 할 때도 있다. 또 한 인물이 한 기능만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 인물이 한 기능을, 혹은 한 인물이 여러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도 있다. 주체(주인공)가 동시에 수신자가 될 수 있고, 수신자가 또한 스스로 송신자도 될 수 있다. 원조자는 상호 소통을 돕고, 원하는 것을 얻는 방향으로 활약함으로써 주인공을 돕는다. 그러나 반대자는 욕망의 실현이나 대상의 전달을 방해함으로써 지장을 초래한다.
그레마스의 서사 기호학은 문학 작품은 물론 이야기 구조를 가진 영화나 미술등 모든 장르에 다 적용할 수 있고, 하다못해 하나의 문장, 한 시대의 학문에 대해서도 젹용할 수 있다. 예컨대 “기회가 주어져서 내가 당신에게 이 책을 줄 수 있는 것이 참으로 행운이다”(C'est une chance que je puisse te donner ce livre, etant donne que j'en ai l'occasion.)라는 문장에서 송신자는 ‘행운’이고, 수신자는 ‘당신’이며, 주체는 ‘나’, 대상은 ‘책’, 원조자는 ‘기회’이다. 또 고전주의 시대의 한 철학자에게 있어서 주체는 ‘철학’이고, 대상은 ‘세계’이며, 송신자는 ‘신’, 수신자는 ‘인류’, 반대자는 ‘물질’, 원조자는 ‘정신’이다.
프랑스의 구전 동화 <흰 티티새>
그레마스의 행위자 모델을 실제 예에서 보기 위해 프랑스의 구전 동화인 <흰 티티새>를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늙은 왕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둘은 거칠고 사나웠으며 막내는 부드럽고 착했다. 어느 날 왕이 세 아들을 한 자리에 불러 말했다. “여기서 50리쯤 떨어진 곳에 흰 티티새라 불리우는 영특한 짐승이 있다고 들었다. 이 짐승은 자신을 소유한 사람을 젊게 만들어주는 능력을 가졌다더라.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너희들 중 누가 이 영특한 짐승을 내게 갖고 오면 왕위를 물려 주겠노라.”
첫째가 나섰고, 왕은 좋은 말과 돈을 주어 그를 떠나 보냈다. 장남은 한 도시에 도착했는데 그 곳에는 쾌락을 즐기는 방탕한 왕이 살고 있었다.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등에 맨 그를 보고 사람들이 환대하며 환락의 궁정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한편 1년이 지나도 장남이 돌아오지 않자, 이번에는 둘째 아들이 길을 떠났다. 역시 좋은 말과 돈을 가지고였다. 똑같은 일이 벌어져, 그도 역시 아버지 일은 까맣게 잊고 방탕한 생활 속에 빠져 들었다.
1년후 이번에는 막내 아들이 임무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돈과 말과 무기를 가져가기를 거부하고 맨 몸으로 길을 떠났다.
궁을 떠난지 닷새 후 숲 속에서 왕자는 짐승 한 마리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덫에 걸린 여우의 비명 소리였다. 왕자는 한 걸음에 달려가 여우를 구출해 주었다. 왕자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한 여우는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와서 구해주겠다고 하면서 자기를 부르는 주문을 아르켜 주었다. 그리고 흰 티티새가 살고 있는 장소도 말해 주었다. 흰 티티새는 성 안 커다란 탑에서부터 백 걸음 떨어진 동굴 속에 두 마리 용의 호위를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용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4파운드 짜리 빵 16개와 두 마리의 거위가 필요하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빵을 위스키에 담궈 용에게 던져 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우는 “내가 당신을 다시 보기 전까지는 결코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어서는 안된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성문에 다다른 왕자는 내일 아침 두 왕자를 반역죄로 처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이 그의 두 형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즉각 알아 차렸다.
그러나 우선 필요한 빵, 거위, 그리고 위스키를 구한 후 그는 성 안의 커다란 탑을 향해 갔고, 여우가 시키는 대로 흰 티티새의 동굴을 찾아 갔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그는 다가가 용에게 자기가 갖고 간 음식을 던져 주었다. 1시간 후 그는 흰 티티새를 손에 넣었다. 그것은 날개가 태양처럼 빛나는 거대한 새였다.
“내게 뭐를 원하십니까?” 새가 물었다.
“우선 두 형을 구해주게.”
“좋습니다. 내 목에 올라 타세요.”
그리고 흰 티티새는 몸이 자그마하게 줄어 들어 수탉만한 크기가 되었다. 순식간에 현장에 도착한 그들은 두 형을 구출했다. 그러나 막내의 은공도 모른채 두 왕자는 풀려나자 마자 마법의 짐승을 차지할 음모를 꾸몄다.
“저기 있는 금광 보았니?” 두 형중의 하나가 막내에게 말했다.
“아뇨. 못봤는데요.”
“그럼 우리 가 보자.”
세 형제는 큰 웅덩이에 다가 갔고, 막내가 더 잘 보기 위해 아래를 내려다 보는 동안 두 형은 깊은 폐광 속으로 동생을 밀어 넣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막내는 여우의 말을 생각나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여우가 곧 그의 옆에 나타나 혀로 상처를 핥아 낫게 해주고, 자기 꼬리를 붙잡고 올라 가도록 했다. 웅덩이를 거의 다 올라 갔을때 피로감으로 허약해진 왕자가 그만 여우의 꼬리를 놓치고 말았다. 여우는 다시 내려와, 아까처럼 왕자를 끌어 올렸고, 이번에는 왕자를 땅 위에 올려 놓는데 성공했다.
아버지의 성으로 가기 전에 왕자는 농부의 아들로 변장했다. 얼굴에 숯 검댕이도 칠해 아무도 그를 왕자로 알아 보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 왕에게 가서 흰 티티새를 돌보는 일을 맡겨 달라고 말했다. 그 동안 흰 티티새는 자기를 데리고 온 것이 두 왕자가 아니므로 왕을 젊게 해줄수가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두 형들은 자기들이 이 새를 잡아 왔으며, 이 새가 복수심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막내 왕자가 흰 티티새에게 다가가자 새는 몸을 숙여 자기 목에 타라고 말했다. 잠시 후 둘은 왕에게 가서 두 왕자의 속임수를 폭로했다.
화가 난 왕은 궁정 뜰에 화형 기둥을 두 개 세우고 두 아들을 거기에 묶어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그는 왕관을 벗어 막내에게 주었다. 잠시후 왕은 흰 티티새 덕분에 다시 젊어졌다.
이 동화는 프로프의 기능 모델에도 정확히 들어 맞지만 그레마스의 행위자 모델에도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예로 사용될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기능을 하는 것은 왕이다. 왕은 자신에게 부족한것(젊음)을 밝히고, 추구의 대상인 흰 티티새(왜냐하면 이 동물이 젊음을 가져다 주니까)를 정해주면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부족한 대상을 찾아 가도록 시킨다. 그러므로 왕은 송신자이고, 그의 대상은 흰 티티새, 젊음 또는 왕권이다. 그러나 왕은 수신자도 될 수 있다. 주인공은 흰 티티새를 그에게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한 편 흰 티티새는 추구의 대상이다. 왕에게는 젊음을, 왕자에게는 권력을 주기 때문이다. 막내는 결핍된 대상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동시에 수신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추구의 대상은 권력에의 접근이기 때문이다. 장남과 차남은 이야기 도입부에서는 잠재적 주인공이었다. 곧 주인공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후 그들은 막내의 반대자가 되었다.
여우는 막내의 원조자이다. 용들은 물론 막내의 반대자이다. 돈과 무기와 말은 주인공의 반대자이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이것들을 장애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들이 반대자 혹은 반-영웅으로서의 역할을 할때 이것은 형들의 원조자가 된다.
방탕한 왕과 그 궁정은 좀 모호하다. 그는 반-영웅들(두 형들)에게 있어서는 반대자이지만 막내를 위해서는 원조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설화성(narrativite)
전통적으로 우리는 텍스트를 문자로 된 글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기호학에서는 문자는 물론 말, 필름, 음, 도형적인것등이 모두 텍스트이며, 따라서 회화, 영화, 광고, 신문기사등 모든 것이 텍스트 분석의 대상이다. 단 거기에는 설화성이 있어야 한다. 기호학적 연구의 대상은 설화성이다. 설화성이란 무엇인가?
설화성이란 그 안에 이야기(recit)가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럼 이야기란 무엇인가? ‘옛날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을 떠올리는가? 남루한 소녀 신데렐라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비가 된다.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막내 왕자가 흰 티티새를 잡는 모험을 통해 왕으로 등극한다.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건 대중소설이건 또는 영화건 만화건간에 모든 이야기의 공통점은 거기에 서로 정반대가 되는 최초의 상태(situation initiale)와 최후의 상태(situation finale)가 있다는 것이다.
가치가 부여된 어떤 대상이 있고, 이것을 소유한 사람, 혹은 소유하지 못해 박탈감과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이 최초의 상태와 전혀 다른 새로운 상태가 되어 결핍이 소유로 바뀌는 과정이 있을때 우리는 거기에 설화성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정리해 보면 설화는 출발 상태(etat de depart)에서 새로운 상태(etat nouveau)로 이어지는 도정(parcours narratif)이고, 출발 상태에서는 가치가 부여된 대상(objet valorise), 소유(possession), 박탈(depossession)등이 있으며, 새로운 상태에서는 소유가 결핍으로, 빈곤이 부유로, 무지가 지식으로, 불행이 행복으로, 도덕적 결점이 교정된 결점으로 바뀌는등 정반대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이야기 구조이다.
그레마스에 있어서 이야기의 필수적인 요소는 이접(離接)(disjonction), 계약, 시련의 세 가지이다. 추구하는 대상에서부터 분리된 이접의 상태에서 정반대 상황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주인공은 모종의 계약을 맺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 혹독한 시련을 거쳐야만 한다. 그레마스는 그 시련을 자격부여의 시련(epreuve qualifiante), 본격적인 시련(epreuve principale), 영광의 시련(epreuve glorifiante)등 세 가지 시련으로 나눈다. <흰 티티새> 이야기를 상기해 보면 진짜 영웅이 누구인가를 가려내는 시련은 이웃 나라 방탕한 왕의 유혹을 이겨내는 일이다. 용을 물리치고 흰 티티새를 잡아 오는 임무가 주된 본격적 시련이고, 가짜 영웅인 형들을 물리치고 진짜 영웅으로 인정받아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 마지막 시련이 영광의 시련이다.
결국 이야기의 서사적 전개는 이 혹독한 시련의 주체가 역량(competence)을 갖고 있느냐, 또는 역량을 갖고 있다 해도 직접 그 역량을 수행(performance)했느냐의 두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 주인공(주체 또는 영웅)은 온갖 시련의 모험을 통해 탐구의 대상을 손에 넣을능력이 있어야 진정한 영웅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해도 그가 실제로 모험 속에 몸을 던져 행동으로 실행시키지 않으면 그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역량의 유무와 수행의 유무에 따라 세 가지의 기호학적 존재 양식이 결정된다. 첫째, 역량을 획득하기 이전의 잠재적 주체(sujet virtuel), 둘째, 역량을 획득하고 난 후의 현동화된 주체(sujet actualise), 셋째, 직접 수행을 통해 가치 있는 대상과의 연접을 실현시킨 실현된 주체(sujet realise)가 바로 그것이다. <흰 티티새>의 막내 왕자는 두 형이 티티새를 찾으러 떠난 시기에는 아직 영웅이 아니고 잠재적 영웅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두 형이 다 실패한 후 자기가 길을 떠나 여우의 도움을 받았을때 그는 역량을 갖춘 현동화된 주체가 된다. 그리고 이 역량을 사용하여 실제로 그가 티티새 찾기의 행위를 수행했을때 그는 비로소 영웅으로 실현된다.
기호 분석을 위한 몇 개의 용어와 신데렐라
구조 언어학 혹은 기호학에서 여러분들은 음소, 의미소등 ...소(素)로 끝나는 전문 용어들을 자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영역의 최소단위라는 뜻이다. 물리학의 소립자(素粒子)라는 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것이다. 수많은 소(素)자 돌림의 용어중 설화분석에 꼭 필요한 4개의 용어만 설명해 보겠다.
우선 의미소(意味素)(semes)는 의미작용의 최소단위이다. ‘살구’(abricot)처럼 단 한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사과와 흙이라는 두 어휘를 합쳐서 만든 ‘감자’(pomme de terre), 그리고 호밀로 만든 빵이라는 뜻의 ‘호밀 빵’(pain de seigle)처럼 두 개 이상의 단어가 합쳐진 연사(連辭)일 수도 있다. 이런 형태적 구분을 형태의미소(sememes)라고 한다. 그래서 abricot처럼 한 개의 어휘로 된 의미단위는 lexemes(어휘소)(語彙素), pomme de terre처럼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의미단위는 paralexemes(평행 어휘소), pain de seigle처럼 통합관계를 보이는 어휘의 연합은 syntagme(통합적 어휘소)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의미의 최소 단위가 의미소이고, 이것을 형태적으로 분류한 것이 형태의미소이다.
의미소를 형태적으로 분류했을때 형태의미소가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의미의 차원에서 분류하면 핵심 의미소(semes nucleaires)와 분류소(classemes)로 나뉘어진다. 핵심 의미소는 어휘소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핵심의미소라고 해서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bal(무도회)이라는 명사에는 다섯 가지의 핵심의미소가 있다. 첫째 /시간성/(무도회는 한정된 시간 동안 지속된다). 둘째 /공간성/(무도회는 특정 장소에서 열린다). 셋째 /몸짓/(거기서 사람들은 몸은 흔들며 춤을 춘다). 넷째 /사교성/(무도회는 사람들이 모여 사교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다섯째 /성별/(무도회는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한 편 분류소는 좀 더 넓은 통사 단위 안에서 나타나는 의미이다. 문맥 속에서의 의미소라고 할 수 있다. bonne(좋은)라는 수식어를 생각해 보자. 이것의 핵심 의미소는 ‘긍정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실제 문맥 속에서 이것은 각기 다른 분류소를 갖는다. 예를 들어 bonne biere(좋은 맥주)라는 표현에서 bonne의 분류소는 ‘미각’이고, bonne affaire(좋은 사업)이라는 표현에서 bonne의 분류소는 ‘경제’이다.
이 분류소는 동위소(isotopie)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개념이다. 하나의 담화적 시퀀스가 하나 혹은 여러개의 반복적 분류소를 가질 때 그것을 동위소적이라고 한다. 두 개 이상의 어휘 혹은 언표가 비록 서로 다른 핵심 의미소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분류소가 동일하면 그 어휘 혹은 언표들은 동위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랭보의 <계곡에서 잠자는 사람>(Le Dormeur du val)이라는 다음의 시를 예로 들어 보자.
(...) Un soldat jeune, Bouche ouverte, tete nue, Et la nuque baignant dans le frais cresson bleu, Dort; il est etendu dans l'herbe, sous la nue, Pale dans son lit vert ou la lumiere pleut, Les pieds dans les glaieuls, il dort. Souriant comme sourirait un enfant malade, il fait un somme: Nature berce-le chaudement: il a frois. Les parfums ne font pas frissonner sa narine; Il dort dans le soleil, la main sur sa poitrine Tranquille. Il a deux trous rouges au cote droit.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연상시키는, 젊은 군인의 죽음이 이 시의 주제이다. 여기서 이탤릭체로 표시한 부분들, “입을 벌리고”, “차거운”, “누워서 잠자고 있다”, “초록빛 침대 위에 창백하게”, “아픈 아이처럼”, “싸늘한 한기”, “풀향기는 그의 코를 간질이지 못해”, “고요한”등의 말들은 핵심 어휘소가 전혀 다른 완전히 이질적인 표현들이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두 개의 붉은 구멍이 있다”라는 마지막 연에 이르러 이것들이 모두 ‘죽음’이라는 분류소를 갖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다. 이것들이 바로 동위소이다.
이번에는 두 의미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 이접(離接)(disjonction)이고, 서로 가까이에 있으면서 비슷하면 연접(連接)(conjonction)의 관계이다. garcon(소년)과 fille(소녀)라는 두 의미소의 관계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점에서 확실하게 이접의 관계이다. 그러나 한 단계 높은 의미소적 카테고리, 예컨대 ‘성별’이라는 범주에서 생각해 보면 이 두 의미소는 똑같이 성 구별의 의미를 지녔다는 점에서 연접의 관계이다.
신데렐라
너무나 재미있고 유명한 동화 신데렐라는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신분상승 욕구를 보여주는 일종의 원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기호학적 의미 분석에서도 이 이 이야기는 하나의 전범이 될만 하다. 여기서 우리는 /굴욕/ 대 /상승/, /가난/ 대 /부유/라는 의미소적 대립을 볼 수 있다. 왕자와 신데렐라라는 두 주체가 이접적 상황에서 연접적 관계로 변화하는 통합적 구조인데, 우선 공간적 연접과 연애적 연접이라는 두 유형의 연접이 눈에 띈다. 공간적인 연접은 무도회이고, 연애적 연접은 신데렐라의 미모에 의한 유혹이다. 그리고 마차와 아름다운 의상은 상황 변화를 위한 매개적 대상이다. 원래 요정인 대모가 신데렐라를 힘 없는 상태에서 힘 있는 상태로 전환시켜 주었고, 신데렐라는 유혹에 의해 왕자를 욕망의 부재에서 욕망의 상태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자는 결혼에 의해 이접에서 연접으로의 전환을 성사시켰다.
강의 리뷰를 마치며
실제의 강의 내용에 기호학적 분석을 위한 몇 개의 용어 해설을 덧붙였다. 광고, 사진, 회화, 문학등에 적용된 기호학이 어떤 기발하고 참신한 해석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상식적인 수준의 이야기 혹은 전통적 해석을 기호학적 용어로 설명했을 뿐이라는 인상이 짙다. 이것은 기호학이 규명하고자 하는 의미 자체가 ‘공통의 의미 세계’이기 때문이다. 기호학은 의미작용의 대상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의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기호학적 분석은 이 공통의 의미 세계를 규명하는 일이다. 따라서 태생적으로 기호학적 분석은 상식 수준의 결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위소’, ‘분류소’, ‘데노타시옹’, ‘코노타시옹’등의 기호학적 공식들은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모든 정치적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도구이고, 정의를 내세우는 모든 언어적 폭력들의 뒷 모습을 폭로해주는 효과적인 수단임에 틀림없다. 기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젊은이들의 반 지성적 쏠림 현상을 치유해 줄수도 있을 것이다. 학문은,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기만 하면, 결코 구호 몇 개로 환원되는 몽매주의(蒙昧主義)로 인도하지 않으니까.
(2003년 2월, 박정자)
기호학이란?
넓은 의미로 기호의 기능과 본성, 의미 작용과 표현, 의사 소통과 관련된 다양한 체계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기호학이란,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호를 지배하는 법칙과 기호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 기호를 통해 의미를 생산하고 해석하며 공유하는 행위와 그 정신적인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호학의 전통은 철학의 전통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스토아학파,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자들과 인문주의자들, 근대 철학자들이 모두 기호와 기호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고, 중국에서는 역(易)의 체계가 바로 세계에 대한 기호학적 해석을 시도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학문으로서의 기호학은 과학적 경험주의, 즉 논리 실증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체계화하였으며, F.de 소쉬르, C.S.퍼스, C.W.모리스 등의 작업으로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때 비로소 기호학이 독립된 학문의 한 분야로 등장하였고, 오늘날에는 언어기호학, 시각기호학, 건축기호학, 음악기호학, 연극기호학, 문학기호학, 텍스트기호학 등 다양한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 삶을 포함하여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은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들은 문자를 포함한 상징(symbol)과 도상(icon), 지표(index)로써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며, 서로 의사를 소통한다. 여기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 내는 행위를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 하고, 의미 작용과 기호를 통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행위를 커뮤니케이션이라 하며, 이 둘을 합하여 기호 작용(semiosis)이라 한다. 기호학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 기호 작용에 관한 학문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기표(記表:signifiant)와 기의(記意:signifi) 그리고 기호 자체로 구성된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을 선물했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기의이고, 꽃집에서 산 장미꽃은 나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 곧 기표가 된다. 곧 기의가 기표와 결합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기호를 만들어낸 것이다. 장미꽃을 받아 든 사람은 그것을 선물한 사람의 의도를 해석한다. 이때 발생하는 현상을 의미 작용이라고 한다. 기표로써 기의를 표현하는 쪽뿐만 아니라 기표를 대할 때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쪽에서도 의미 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준 쪽과 받은 쪽의 의미 작용이 동일하게 일어날 경우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송신자가 목표한 의미 작용이 만일 수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에도 의미 작용은 역시 일어난다. 이것은 기호란 단일 의미만을 갖지 않고 다의성을 띨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상징으로 표시되는 기호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며, 따라서 다의적인 기호를 매개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기호학이 의미 작용과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기호 작용에 관한 학문이면서도 특히 의미 작용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정신적 과정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만일 인간의 삶 전체를 문화라고 한다면 문화야말로 기호 작용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질서에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번역, 해석하여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바꾸어 나간 것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기호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고 그 안에서 살다가 그 안에서 죽는 것이다. 오늘날 기호학이 기호가 가진 힘과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몫뿐만 아니라 기호의 과잉에 따른 위험을 지적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문화 기호학
‘문화라는 기호’의 해명에서 출발, 관계론적 시점에 입각한 문화학 ·인간학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문화기호의 학’으로, ‘자연기호의 학’인 자연기호학과 대립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전자를 단순히 기호학(smiologie)이라고 하고, 후자를 징후학(smiologie)이라 하여 구별하는 학자도 있다.
E.뷔상과 L.J.프리에토로 대표되는 기능주의학파가 그 입장인데, 그들에 의하면 일상생활에서의 ‘기호(signe)’라는 개념은 매우 다종다양하다. ‘피는 상처의 기호’라고 말한 에피쿠로스식(式) 생각에 따르면, 검은 구름은 폭풍우의 기호이고, 연기는 불의 기호, 고열은 병의 기호가 된다. 또, 수학의 연산기호, 교통신호, 지도의 표지, 모스신호 ·해상신호를 비롯하여, 몸짓이나 의복 ·그림 ·조각 ·음악 등도 일종의 기호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기호를 모두 기호학의 대상으로 생각하면 잘못이다. 왜냐하면, 폭풍우를 알리는 검은 구름으로 대표되는 기호는 자연기호, 즉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다른 문화기호가 가지는 커뮤니케이션의 의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기상학자와 교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38 ℃의 열이 의사에게 무엇인가를 통보하려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것들이 자연현상임에 대해서 인공적 기호는 인간이 만든 코드에 속한다.
프리에토 등의 정의에 의하면, 기호학이란 곧 ‘문화기호학’이며, 커뮤니케이션의 의도와 양해를 전제로 하는 ‘신호’의 연구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자연과 문화의 분명한 구별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물리학 제국주의하에서 자연과학이 만들어낸 사실신앙에 입각한 것이다.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로서 움직일 수가 없다. 과학이론은 이 ‘사실의 세계’와의 조합(照合)에 의하여 확보되며, 그 체계의 진위는 이론 밖에서 이론을 심판하는 엄파이어로서의 사실이 정한다는 베이컨주의인데, 이 베이컨주의 또한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뉴턴처럼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는 입장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뉴턴 자신이 절대시간이나 절대공간 ·동일원인 ·동일결과라고 불리는 인과율을 가설에서 출발하여, 그 이론에 의해서 역으로 데이터를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기호학과 자연기호학, 또는 기호학과 징후학을 구별하는 근거는 이미 없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표(indice) ·징후(symptme) ·신호(signal) ·상징(symbo1e)등을 모두 포함한 넓은 뜻의 ‘기호(signe)’가 문화기호학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여러 기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기호를 둘러싼 고찰에서부터 기호의 본질을 살피려고 한 것이 2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지는 현전(現前)기호학이다. 현전기호학은 기호를 실재(實在)의 표상 또는 대행(代行) ·재현물(再現物)로 보는 기호관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요컨대, 오리지널을 가리키는 코피(copy)로서의 기호이며, ‘진짜를 가리키는 대용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지하라’는 명령이 진짜라고 한다면, 이를 대신해서 그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 문명사회에서 사용하는 적신호라는 기호이고, 어떤 미개사회에서의 신의 노여움이 진짜라고 한다면, 이에 대신해서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홍수라는 기호라고 생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이라는 보편적 관념의 대용품은 때로는 ‘애정’이고 때로는 ‘love’, ‘Liebe’이기도 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진짜는 선험적(先驗的)으로 현전(現前)하는 것으로 여겨 이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철학자나 언어학자들은 ‘현전과 기호, 로고스와 목소리, 사물과 명칭, 관념과 표상’과의 관계만을 탐구해왔으며, 이것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존재란 항상적 현전성(現前性)이다”라고 하는 형이상학과 같은 뿌리를 가지는 기호학이다.
F.소쉬르의 문화기호학이 이러한 현전기호학에 대한 진보적인 비판이라고 간주되는 까닭은, 그가 기호개념을 협의의 용어나 부호로부터 유형 ·무형의 문화현상일반으로 확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 자체를 하나의 기호로 본 데에 있다.
이 ‘문화라는 기호’가 뜻하는 기호성이란, 이미 ‘스스로 외재(外在)하는 실체를 고지하거나 지시하는 표상’이란 뜻이 아니라, 스스로 일체의 근거를 가지지 않는 ‘비실체적 관계, 자의식 가치’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문화기호학이란, 개별적인 문화 안에서 쓰이는 여러 가지 기호를 분류하거나 기술하는 일이 아니라, ‘문화라는 기호’의 해명에서 출발, 관계론적 시점에 입각한 문화학 ·인간학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다.
문화란 원래 본능도식(本能圖式)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호=말’에 의해서 태어난, 또 하나의 ‘기호=공동환상(共同幻想)’ 그 자체라는 것이 이렇게 해서 판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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