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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배경음악을 클릭하시고 보시기 바랍니다!~(케니지의 forever in love 사랑은 영원히)
번개모임을 단순히 음주가무에 중점을 두지 않고 서울시내의 고궁과 민속박물관, 북촌거리, 인사동거리, 청계천 등을
두루두루 구경하면서 맛난 음식도 사먹으며 행복한 하루을 보내였습니다!~
그동안 자식들 키우랴!~ 돈벌어 집사랴!~~
서울에 오래살면서도 경복궁 구경한번 못하고 정신없이 살아왔지요.ㅎ
그 못한 것들을 친구들과 함께 정겹게 이야기나누며 구경하는 멋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경복궁하면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궁이지요. 하지만 사전 지식이 없어 구경하는 맛이 좀 덜하던군요.
다음에 구경할땐 공부좀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많은 사진은 찍어지만 사진은 골라 게시하겠습니다!~~ ㅎ
용섭이 친구가 사진을 잘 박았습니다!~ 입만 쌩쌩한 줄만 알고 있었는데 손은 쓸만합니다!~ ㅎㅎㅋ
근디 거시기도 사진 박드시 잘 박을까유? 모르겠군요 보~지을 못해서!~~~ㅋㅋ
사진 구경에 앞서 지가 쪼매 인터넷 검색을 해서 공부을 한 경복궁의 내력을 적을까 합니다.
내용이 정확지 않아도 이해하시기을 지가 거기까지가 한계이니까유!~~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강탈한 이성계(李成桂)는 꼭두각시 왕들을 내세워 막후 통치를 하다가 고려왕조를 끝까지 옹위하려는 세력들을 이방원이 대부분 제거하자,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8월에 고려시대의 삼경(三京 : 開京 西京 南京) 중의 하나인 남경(南京)의 이궁(離宮) 터에 왕도(王都)를 정하고 같은 해 10월에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를 하였습니다. 이때 창건한 조선의 정궁(正宮)이 경복궁(景福宮)입니다.
궁궐이 완성된 뒤 조선의 일등 개국공신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궁궐의 이름을 지었는데 <시경(詩經)>의 한 귀절인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 만년에 큰 경복일레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경복(景福)'을 따서 경복궁이라 했습니다
지금은 청와대가 들어섰지만 고려 숙종 때 지은 남경 이궁인 연흥전(延興殿) 터는 고려 때부터 명당(明堂)으로 지목되어 오던 곳으로, 북으로 주산(主山)인 북악(北岳)이 동쪽으로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이 서쪽으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이 남쪽으로 안산(案山)인 목멱산(木覓山)이 둘러싸고 있는 좋은 지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터가 이궁으로서는 적당했으나 새로운 나라의 정궁(正宮)의 터로서는 너무 협애하여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남쪽으로 조금 옮겨지었습니다.
너무 많이 쓰면 머리 아프다고 길동이가 찌증낼것 같아 그만 적겠습니다!~~ ㅎ
먼저 서울역에서 만나서 다쿠시타고 삼청동에 있는 삼청동수제비집에서 수제비을 먹었습니다.
유명한 식당이라서 그런지 손님들이 많아 한 30분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먹었습니다!~ㅎ
수제비을 먹기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제비 5인분에 막걸이 한대에 녹두전 2장(배터지게 먹었습니다!~ ㅎ)
식사후 경복궁을 구경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광화문(光化門)이란 이름은 '광피사표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方)'에서 따왔는데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만방에 보여준다"라는 뜻입니다. 광화문은 달리 정문(正門)과 오문(午門)으로도 불렸는데 정문(正門)이란 "닫아서 이상한 말과 사특한 백성을 막고 열어서 사방의 현인들을 들어오게 하는 것은 모든 바른 것 중에서도 큰 것입니다"라고 정도전이 그 뜻하는 바를 태조께 아뢰었고, 오문(午門)이란 궁궐의 좌향(坐向)이 배북남면(背北南面)이니까 그 정문은 오행(五行)으로 봐서 남쪽인 오시(午時) 방향임으로 오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闕門)의 형식을 갖추었는데 돌로 육축(陸築)을 높이 쌓고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을 내는 삼문형식(三門形式)인데, 가운데 칸이 양쪽 옆 칸보다 조금 더 높고 넓습니다. 이러한 양식을 고설삼문(高設三門)이라고 하고 가운데 칸은 어칸[御間]으로 임금과 왕비만이 드나들고 동쪽 칸으로는 문신(文臣)들이, 서쪽 칸으로는 무신(武臣)들이 드나들었습니다.
광화문의 현판 글씨는 고종 때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으로서 영건도감(營建都監) 제조(提調)를 맡았던 임태영(任太瑛)이라는 무인(武人)이 쓴 것입니다. 광화문은 남문이라서 천정에 주작[南朱雀]이 그려져 있고 북문인 신무문에는 현무[北玄武]가 동문인 건춘문에는 청룡[左靑龍]이 서문인 영추문에는 백호[右白虎]가 그려져 있습니다.
광화문 안쪽으로는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는 삼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곳은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이 머무르는 곳으로 궁이 아니라 궐에 해당되는 곳으로 지금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수비군의 교대식이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앞에 흥례문(興禮門)이 회랑을 좌우로 둘러치고 위엄있게 서 있습니다만 흥례문의 원래 이름은 홍례문(弘禮門)이었으나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당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이 홍력(弘歷)임으로 그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홍(弘)을 흥(興)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광화문에서 흥례문에 이르는 구간은 궁궐을 지키는 병사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요즘으로 치면 경호실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이곳은 삼도(三道)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병사들이 훈련할 수 있도록 평평한 광장으로 되어 있으며 군사들이 숙직할 수 있는 건물들도 있습니다.
경복궁 정문에서
티겟구매후 근정전으로 입장
근정전 입장 전
근정전 입장후
법궁(法宮)으로서의 경복궁에 대한 이해
궁궐은 그 용도에 따라 법궁(法宮), 정궁(正宮), 이궁(離宮), 행궁(行宮), 별궁(別宮)으로 나눠집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 경복궁과 창덕궁을 함께 축성하여 이 두 궁궐이 시기별로 정궁의 역할을 달리 하였지만 법궁(法宮)으로서 위치는 여전히 경복궁의 몫이었기에 그 축성에 있어서 당연히 중국의 전범(典範)인 <주례(周禮)>에 따라 많은 부분을 그 원칙에 맞게 궁궐을 지었습니다.
첫째는 대칭의 원칙입니다.
광화문(光化門)-흥례문(興禮門)-근정문(勤政門)-근정전(勤政殿)-사정문(思政門)-사정전(思政殿)-향오문(嚮五門)-강령전(康寧殿)-양의문(兩儀門)-교태전(交泰殿)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중심축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은 세자의 영역인 동궁(東宮)과 종친(宗親)들의 영역이고 오른쪽인 서쪽은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영역인 경회루, 집현전 그리고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잡았습니다.
둘째는 삼문삼조(三門三朝)의 원칙입니다.
삼문이라 함은 고문(皐門), 치문(治門), 노문(路門)이고 삼조라 함은 외조(外朝), 치조(治朝), 연조(燕朝)를 이름입니다. 외조는 신하들이 집무하는 공간으로 흥례문에서 근정문까지, 치조는 정전(正殿)과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던 편전(便殿)을 포함한 공간으로 근정문에서 향오문(嚮五門)까지, 연조는 임금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침전(寢殿)과 생활공간으로, 향오문 뒤의 임금의 침소인 강령전(康寧殿)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交泰殿), 그리고 대비의 생활공간인 자경전(慈慶殿) 일원입니다.
따라서 고문은 외조의 정문으로 흥례문이고, 치문은 치조의 정문으로 근정문이고, 노문은 연조의 정문으로 향오문인 것입니다.
근정전 내부
근정전에서
그러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외조의 정문인 흥례문 사이의 공간은 무엇일까요?
이곳은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는 군사가 머무르는 곳입니다. 궁궐(宮闕)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가 살고 있는 궁(宮)과 궁을 지키는 궐(闕)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궁은 외조와 치조와 연조에 있는 모든 건물들이고 궐은 경복궁의 사대문과 궁을 둘러친 담장[宮城]과 망루(望樓)로서의 동십자각(東十字閣)과 西十字閣(서십자각) 그리고 수비 군사들이 기거하는 광화문에서 흥례문 사이의 공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궁궐의 모든 길은 삼도(三道)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삼도의 길 중에 가운데가 약간 높이 솟아있는데 이곳을 특히 폐도(陛道)라 하고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고 동쪽의 길은 문신(文臣)이, 서쪽의 길은 무신(武臣)이 다니는 길입니다. 그래서 가운데 길인 폐도는 임금만 다닐 수 있어 폐도를 다니는 사람을 일러 폐하(陛下)라고 부르는데 아쉽게도 황제의 나라인 중국의 황제에게만 그렇게 부를 수 있고 제후의 나라인 조선의 왕에게는 그렇게 부르면 역심을 품은 것이 됩니다.
삼도와 마찬가지로 대문(大門)도 동쪽의 문에는 태양을 뜻하는 일(日)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문신(文臣)들이 드나들고, 서쪽의 문에는 달을 뜻하는 월(月)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무신(武臣)들이 드나드는데 근정문 동쪽의 일화문(日華門), 서쪽의 월화문(月華門)을 말함입니다.
또한 중심축의 건물들 좌우로 배치된 부속건물들도 동쪽에 있는 건물과 대문들은 봄 춘(春)자가 들어 있고 서쪽에 있는 부속건물과 대문에는 가을 추(秋)자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萬春殿)이, 서쪽에는 천추전(千秋殿)이 있고, 경복궁의 동쪽 문을 건춘문(建春文)이라 하고 서쪽 문을 영추문(迎秋門)이라 합니다.
흥례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근정문이 보이고 좌우로 행랑(行廊)이 둘러쳐 있으며 바로 앞에는 영제교(永濟橋)라는 돌다리가 놓여 있고 그 아래로는 명당수(明堂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궁궐의 최북단인 열상진원(列上眞原)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향원정(香遠亭)에서 연못을 이루고 전각들의 밑을 흘러 경회루 연못에서 잠시 쉬었다가 영제교 아래로 흘러 동십자각 못 미친 곳에 있는 궁궐담장 아래 이간수문(二間水門)을 통해 궁궐을 빠져나가 중학천(中學川)을 거쳐 청계천(淸溪川)으로 흘러갑니다.
이 물길은 서류동입(西流東入) 또는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명당수로서 금천(禁川)이라고 하는데 임금의 공간과 바깥공간을 구분짓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 천록(天祿)이라는 뿔 하나 달린 서수(瑞獸) 네 마리가 매서운 눈초리로 모든 사악한 것들이 금천을 건너지 못하도록 납작 엎드려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금천 위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 하고 조선의 모든 궁궐에 놓여 있으며 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敎)가 그것입니다.
흥례문에서 바라볼 때 동쪽인 오른쪽 행랑에는 덕양문(德陽門)을, 서쪽인 왼쪽 행랑에는 유화문(維和門)을 내고 그 옆에 기별청(奇別廳)을 두었습니다. 유화문은 신하들이 집무를 보던 장소인 빈청(賓廳)으로 통하는 문으로 궁 밖의 관료들은 광화문, 흥례문, 유화문을 거쳐 빈청을 드나들었습니다. 유화문 옆에 자그마하게 붙어 있는 기별청은 아침마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처리한 일들을 기별지(奇別紙)로 작성하여 배포하던 곳으로, 관청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있을 때 기별(奇別)이 왔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동쪽에 일화문을, 서쪽에 월화문을 거느리며 회랑으로 둘러쳐진 근정문을 들어서니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정전(正殿)이 이중월대(二重月臺) 위에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습니다. 근정전 앞 넓은 뜰에는 삼도(三道)의 양 옆으로 품계석(品階石)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 주위로는 다듬지 않은 돌인 박석(薄石)이 깔려 있는데 가공하지 않은 박석을 사용한 것은 햇빛의 반사를 막고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해섭니다.
근정전 뒤편에 사정문과 사정전(思政殿)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편전(便殿)으로서 임금이 집무를 보던 곳입니다. 사람이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쓰고 부리는 일의 극치이며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는 뜻으로 사정전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사정전 양쪽에는 사정전을 보좌하는 소편전(小便殿)으로 동쪽에는 주로 봄에 사용했던 만춘전(萬春殿)이, 서쪽에는 가을과 겨울에 사용했던 천추전(千秋殿)이 있어 계절에 따라 집무를 보는 장소를 달리 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정전은 온돌로 되어 있지 않고 마루로 되어 있어 겨울에 거처하기엔 불편함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돌로 되어 있는 두 개의 부속 건물을 배치하였습니다.
사정전 뒤에는 향오문(嚮五門)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는 왕의 침전(寢殿)인 강령전(康寧殿)이 있습니다. 향오는 오복(五福)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으로 오복이라 함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일컫는 것입니다. 수는 오래오래 천수를 다해 사는 것이고, 부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으며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고, 강령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유호덕은 덕을 쌓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항상 남을 도우려는 마음을 갖자는 것이고, 고종명은 마지막 죽음에 임해 고통 없이 평온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는 한다는 것입니다. 오복 중에서 세 번째 강령을 따와서 침전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강령전 건물은 용마루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잠을 자는 사람이 바로 용인데 또 다른 용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령전은 전각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월대(月臺)가 무척 높고 넓습니다. 임금의 침소 앞뜰에서도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증좌일 것입니다. 왕비와 세자가 석고대죄를 청하던 곳이기도 하고 임금의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조정대신들이 그 부당함을 목숨을 내놓고 바로잡기 위해 읍소하던 곳도 바로 강령전 월대였습니다.
강령전을 에워싸듯이 사방에 소침전(小寢殿)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동소침인 연생전(延生殿)은 서쪽을 향하고, 서소침인 경성전(慶成殿)은 동쪽을 향하고, 연생전의 북쪽에는 연길당(延吉堂)이, 경성전의 북쪽에는 응지당(膺祉堂)이 자리잡고 남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이 다섯 전각이 모두 회랑(回廊)을 통해 이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강녕전을 지나 양의문(兩儀門)을 들어서면 교태전(交泰殿)이 나타나는데 내명부(內命婦)를 총괄하던 왕비가 일을 보는 전각과 침전으로 이루어져 있고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고도 하며 이런 연유로 왕비를 중전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강녕전을 지나 양의문(兩儀門)을 들어서면 교태전(交泰殿)이 나타나는데 내명부(內命婦)를 총괄하던 왕비가 일을 보는 전각과 침전으로 이루어져 있고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고도 하며 이런 연유로 왕비를 중전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양의(兩儀)'와 '교태(交泰)'는 음양의 조화와 남녀의 교합(交合)을 의미하며 음양이 잘 조화를 이루어 순조로운 생산(生産)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특히 '태(泰)'는 <주역(周易)>의 64괘(掛) 중에서 하늘, 남자, 상승(上昇)을 의미하는 건(乾)괘 셋이 아래에 있고 땅, 여자, 하강(下降)을 의미하는 곤(坤)괘 셋이 위에 있는 모양으로, 앞으로 땅의 기운이 하강하고 하늘의 기운이 상승하여 비로소 천지음양의 기운이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 번영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태전은 원길헌(元吉軒), 함홍각(含弘閣), 건순각(健順閣) 등 부속 건물을 지붕을 낮게 달아낸 익각구조(翼閣構造)로 만들어 거느리고 있으며 뒤편에는 후원(後園)을 만들고 그곳에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으로 가산(假山)인 아미산(蛾眉山)을 쌓고 위쪽에는 큰 나무들을 심었고 아래에는 화계(花階)를 만들어 '노을이 드리운 연못[落霞潭]'과 '달을 품은 연못[函月池]'을 돌에 새겨 두었고 육각형의 굴뚝 4개를 두고 각 면마다 십장생(十長生), 사군자(四君子), 만자문(卍字紋), 봉황(鳳凰), 귀면(鬼面), 학, 박쥐, 불가사리, 당초문(唐草紋) 등의 아름다운 문양을 소조편(塑造片)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뒤에 굳이 가산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전통적 풍수적 인식에 의하면 백두산의 정기가 산줄기를 따라 방방곡곡으로 뻗어나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따라 남향한 산줄기가 분수치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한북정맥(漢北正脈)을 일구고 도봉산과 삼각산 사이의 영봉을 지나면서 정맥의 본줄기는 서쪽으로 노고산, 장명산을 지나 서해로 숨어들고 다른 한줄기는 남쪽으로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의 세봉우리인 삼각산(三角山)으로 솟구쳤다가 시단봉을 지나 보현봉에서 형제봉으로 이어져 구준봉을 지나 북악에서 경복궁으로 내려앉았는데, 백두산에서부터 이어져온 이 정기를 왕비가 받아 안아 왕자(王子)를 순산하여 왕실을 번영케 하라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교태전을 나서면 동궁 북쪽으로 고종의 양모인 조대비(趙大妃)를 위해 청련루 터에 건립한 자경전(慈慶殿)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경복궁에서 연침(燕寢)에 해당되는 강령전, 교태전, 자경전 중에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입니다.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나자 일제는 경복궁의 전각들의 재목을 창덕궁 복원에 사용하였는데 강녕전을 헐어 희정당(熙政堂)을, 교태전을 헐어 대조전(大造殿)을 복원하였고, 지금의 강녕전과 교태전은 1990년대에 중건한 것입니다.
궁궐에서 자경전은 임금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 등 여성들이 주거하는 공간을 일컫는데 정조(正祖)가 즉위하면서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를 위해 창경궁(昌慶宮)에 자경전을 짓는데서 비롯되었으며 자경(慈慶)은 임금의 어머니와 할머니 등 여자 쪽 어른들에게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자경전은 조선 초 경복궁 창건 때에는 없었던 건물인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고종의 양어머니가 된 조대비를 위해 특별히 지은 것으로 정문을 만세문(萬歲門)으로 이름짓고 담장은 아름다운 꽃담으로 장식하였으며 뒤뜰에는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 굴뚝과 불가사리와 같은 벽사(辟邪)를 상징하는 동물들도 벽돌로 구워 새겨 넣었습니다.
교태전 뒤편에는 조대비가 승하한 흥복전(興福殿) 구역인데, 상궁들의 침전 영역으로 흥복전 주변에 광원당(廣元堂), 영훈각(永薰閣), 다경각(多慶閣), 집경당(緝敬堂), 함화당(咸和堂) 등의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지금은 집경당과 함화당만 세 칸의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쓸쓸히 남아 있고 흥복전은 지금 한창 복원공사 중입니다.
건청궁(乾淸宮)은 고종이 아버지인 대원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내탕금(內帑金)으로 지은 궁궐 안의 궁궐로 경복궁의 북쪽 끝에 위치합니다. 고종이 머물렀던 사랑채인 장안당(長安堂)과 명성왕후가 머물렀던 안채인 곤녕합(坤寧閤), 그리고 행랑채로 구성된 일반 사대부 집과 같이 지어졌으며, 특히 곤녕합의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왕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고 옆에 있는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습니다.
경복궁에는 연못이 둘 있는데, 하나는 강녕전과 근정전 곁에서 정면 7칸 측면 5칸의 35칸 규모의 팔작지붕 중층건물(重層建物)인 경회루(慶會樓)를 품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건청궁 앞에서 정육각형 정자로 모지붕을 한 중층건물인 향원정(香遠亭)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경회루는 웅장하며 남성적이며 향원정은 아담하며 여성적인 분위기가 풍기며 '경회(慶會)'는 '임금과 신하가 덕(德)으로서 만난다'는 뜻으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외국의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던 공적인 공간이고 '향원(香遠)'은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진다'라는 뜻으로 임금이 휴식을 취하며 거닐던 사적인 공간입니다.
경회루 남쪽에 있는 수정전은 세종 때는 신하들과 만나 학문도 논하며 한글도 창제한 집현전(集賢殿)으로, 세조 때는 정례행사와 모든 중대회의에 참석하여 회의록과 사초(史草)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편찬하여 실록편찬(實錄編纂)의 자료로 삼았던 예문관(藝文館)으로, 고종 때는 잠시 침전(寢殿)과 생활공간으로 사용한 연거지소(燕居之所)로, 갑오경장(甲午更張) 때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로, 그 이후에는 내각(內閣)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경복궁의 네 개의 문은 드나드는 사람들이 달랐는데 정문인 광화문은 임금의 행차나 사신들이 주로 드나들었고, 세자의 공간인 동궁이 동쪽에 있어 건춘문으로는 왕실의 종친들이 주로 드나들었고, 궐내각사가 근정전 서쪽에 있어 영추문으로는 문무백관이 주로 드나들었으며, 북문은 특별한 일이 없는 동안에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종친부(宗親府)는 건춘문 밖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왕비와 궁녀들이 놀던 향원정에서
이밖에 더 많이 관람할 궁이 많았지만 시간도 마니 지났고 다리도 아프다고 해서
다음을 기약하고 경복궁 옆에 있는 민속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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