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尹心悳(1897∼1926) 略史
윤심덕의 일생은 화려하고도 비참했고 행운과 수난이 엇갈린 삶이었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였던 윤심덕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 더군다나 여성의 사회참여가 막혀있던 시기에 그 명성을 남긴 인물이기에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녀는 평양 남산재교회의 권사부부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남동생인 윤기성은 오늘날까지 불리워지는 {들장미}의 가사를 번 역했고, 여동생인 윤성덕은 미국에 유학한 피아니스트로 형제들 모두가 음악적인 소질이 있었다. 그녀는 경성여고 사범과를 나와 강원도 원주의 보통학교 음악선생으로 재직했다. 그러다가 소질이 인정되어 일본 우에 노 음악학교에 관비유학생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녀가 택한 죽음이었다. 윤심덕은 일본에 다녀오던 길에 애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이루지 못 한 사랑을 죽음으로 끝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재능보다 이러한 비 극적인 죽음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윤심덕의 죽음은 이렇게 통속적인 미화나 도덕적인 평가로 결론 낼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당시 음악의 열정과 대중문화를 태동시키기 위 한 욕구로 충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수로 활동하던중 홀연 중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와 연극계에 투신한 윤심덕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새 로움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금번 내 생활의 전환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우연히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일찍부터 생각해오던 바가 이번에 실현되었을 뿐입니다. 물론 아직 우리사회에서는 여자란 배워서 가정으로 돌아가 현모양처가 되거나 교사가 되고 간호부, 사무원 같은 것이 되어 말썽없이 살아가는 것이 좋 다고 합니다. 특히 배우라는 것은 부량무식한 타락자나 하는 일로 알아 온 이상 나의 이번 길은 갈 곳까지 다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는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나섰습니다. 오로지 힘을 다하여 새로워 지려는 당돌한 발걸음이 이에 이르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 말은 그녀가 당시 천대하던 배우의 길을 선택하면서 얼마나 당찬 의지 를 가졌는가를 보여준다.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하기에 앞서 예술에 대한 정열을 불태웠던 그녀는 노래와 연극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라 디오 방송에까지 출연함으로써 대중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사회에 당당했던 윤심덕, 그녀는 예술가를 진실로 사랑할 줄 모르는 시대 에 태어난 비극적 여인이었다.
그녀의 애뜻한 사랑이야기는 연극..드라마 책으로 출간이 되었다
윤심덕과 유뷰남 김우진과의 이룰수 없는 사랑을 고뇌하며
사회의 모순 일제의 시대배경과 그리고 그의 음악생활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녀의 노래는 판이긁킨 노래이기에
김정호님의 노래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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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의 찬미 김정호가 부르니 또 다른맜이군요 처음듯지요 너무좋으내요 감사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