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월둘째 주 목요일 아침이면 서울시청에서 열리는 시민고객감동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덕수궁 옆 서소문청사에 간다.
회의가 끝나고 모처럼 잠깐의 여유가 생길 때면, 인근에 있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50여년 전 어머니 손을 잡고 덕수궁길을 걸어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던 까까머리 소년은, 이제 희끗희끗한 머리의 할아버지가 되어 옛 교정에서 추억바라기를 한다.
설렘과 긴장을 감추려 어머니 손을 유난히 꼭 잡았던 그날의 기억은, 노랗게 핀 개나리꽃을 배경삼아 더욱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다.
지금은 배재중학교가 강동구로 이전되었지만, 당시의 서관에 책걸상, 교복, 교모 등을 갖추어 예전 교실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고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같이 오래된 졸업생이 추억을 되새김질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은 사는 게 참 힘들었다. 1961년 당시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은 91달러에 불과했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 자체가 힘겨운 시절이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훌쩍 넘는 지금의 세대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상 속에서도 나름대로 소소한 행복을 맛보곤 했다. 친구들과 어깨를 걸고 뛰놀며 깨알같은 웃음을 흩뿌리던 어린 시절이지나고,‘ 산업화의주역’으로서눈코뜰새없이바쁘게일하던젊은시절도지났다.
이제는 그 시절 친구들 모두 5, 60대의 노년층이 되어 대부분 현업에서 물러났다.
가끔 친구들끼리 만나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비록 얼굴에는 세월이 아로새긴 주름살이 가득하지만, 옛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어린 시절의 장난끼 넘치는 악동들로 되돌아가 있다. 아직까지 일을 하며 친구들의 식사값을 계산할 수 있는 것 또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을 지원하는, 무척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젊은 시절에는 20년 넘게 신용보증기금에 몸담았고, 지금은 영세한 소기업·소상공인의 경영안정화를 지원하는 서울신용보증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이 또한 쉽게 누릴 수 없는 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고, 경제발전에도 보탬이 되는 가치 있는 일을 이토록 오랫동안 할 수 있다는 데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한 달에 한 번, 시민고객감동회의 참석을 계기로 시작되는 추억여행은 언제나 이렇게 일상의 행복을 일깨워주며 끝난다.
‘광화문 연가’의 가사 한 구절처럼,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그리워지면, 다시 한 번 덕수궁 돌담길을 천천히 거닐어보고 싶다.
그때는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오래오래 행복을 곱씹어 보리라.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이 모든 것에 가슴깊이 감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