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2015년 2월호>
책 장례지도사
폐기도서들이 수레에 실려 나간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강냉이하고 바꿔 먹었으면 좋겠단다. 화장터로 데리고 가는 것 같다고 배움터지킴이도 끼어든다.
독서의 달 행사를 치르며 폐기도서 중 갖고 싶은 책이 있으면 가져도 좋다 했는데 교복 입은 아이들 반응이 차갑다. 낡고 지저분한 것에 대한 애착보다는 새롭고 자극적인 것에 더 예민할 때다. 새 책 들어왔을 때와 맞먹는 반응을 애초 기대한 건 아니어서 거리감 있게 바라본다.
폐기사유에 이용가치상실이나 훼손으로 기록했다. 세로줄로 써 있거나 몇 년 동안 대출되지 않은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이용가치상실로 처리된다. 신간이어도 인기가 너무 좋아 서가에 꽂힐 새 없이 손을 탈 경우 금세 훼손되기 마련이다. 사람이 순서 없이 죽는 것처럼 책의 사망도 마찬가지다.
상처의 정도에 따라 대일밴드를 붙이거나 수술을 하듯이 책도 사서의 손을 거친다. 실로 꿰매기도 하고 투명테이프를 붙이거나 글루건으로 뜨거운 봉합을 하기도 한다.
장례지도사가 주검을 어루만진다면 책은 사람 마음을 만진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었느냐에 따라 사람살이가 달라진다. 하루에도 사계절이 담겨 있고 생로병사를 드러내는 게 많다. 제 때 물을 줬는데도 꽃 한번 피우지 못하고 죽어가는 화분도 한 권의 책처럼 읽히긴 마찬가지다. 느끼지 못할 뿐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다. 떠오르는 햇살보다 지는 햇살이 떠 뜨겁다기에 서쪽을 바라보며 퇴근 한다 . 폐기도서에서만 맛볼 수 있는 더 뜨거운 뭔가를 찾으면서.
퇴직 후에 학교 다니는 걸 좋아하는 배움터지킴이다. 젊어도 봤고 늙어도 봤는데 젊은 사람들은 늙음을 모를 거라며 나이 드는 것마저 즐기는 분이다. 어느 순간 어리거나 젊다는 게 부러움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단풍이 들 듯 나이 들면 어떤 나로 변화할지 기대된다.
학교를 돌거나 교실을 오르내리다 도서실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즐거움이다. 거친 숨소리가 잠든다. 책은 한 그루 나무요 서가는 책의 숲이다. 도서실에 뿌리 내린지 5년째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처럼 책을 지키다 책이 된다.
입학식과 졸업식이 반복되고 교문에 내걸리는 현수막 내용도 거기서 거기지만 학교가 새롭다. 그 어느 곳보다 도서실은 창의적인 공간이다. 퇴고에 몰입할 때는 시끄럽던 서가도 조용하다. 서가에서 내 글이 출판될 날을 기다릴 것만 같다는 착각이 나쁘지 않다. 꿈꾸기 좋은 곳에서 꿈을 쓸 수 있으니. 교장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나만의 퇴임식을 그려본다.
폐기도서에 감정이입 하다 보니 수목장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이왕이면 유실수가 좋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서 있어도 좋겠다. 도서실 의자처럼 그루터기로 남아도 좋겠지.
지리산은 지는 해를 삼키며 지리산 너머로 넘어가라 했다. 사춘기에 앞집 옥상에 올라가 노을 구경하는 걸 즐겼다. 의정부와 동두천을 오가며 먼 산을 바라볼 때 지리산이 보인다. 늙느라고 아프다며 아랫목으로 파고들던 할매가 양지바른 곳에 누워 있다. 늙는 것이 아픈 것만은 아닐 텐데 약간의 엄살이 가미된 듯 아기처럼 귀여웠지. 쪼글쪼글 해지는 과정에서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작은 몸집은 영혼을 담는 주머니처럼 보인다.
동두천 토박이인 배움터지킴이는 은행나무집에서 산다. 수령이 많은 은행나무를 가족 소개하듯이 한다. 아침 햇살과 함께 밭곡식들을 깨우고 가방이 아닌 기타를 메고 출근한다.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목소리 콤플렉스를 극복한다. 도움반 아이들에게 하모니카를 가르쳐주면서 배우는 게 있단다. 마당을 나온 암탉처럼 꿈을 좇는 아이들 뒤를 쫓다가 숨이 차오르면 기타를 친다니. 그야말로 퇴직 후가 더 바쁘고 진짜 사는 것 같단다. 들꽃을 찍다가 들꽃처럼 예쁜 아이들의 한 때를 찍어서 이메일로 보내주니 아이들이 순해질 수밖에.
학생일 때는 학교를 떠나려 하고 정작 학창시절을 벗어나는 순간이 오면 학교가 그립다. 눈이 좋을 때 딴 짓하다가 정작 노안이 찾아오니 책을 읽고 싶고 죽음을 접할 때마다 살고 싶은 욕구라니.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하면서 반전 있는 게 어디 문학 작품 속에서만 가능할까.
청구기호와 바코드를 달고 인기를 먹다가 전사하는 책의 일생이다. 염하는 과정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마지막 표정이 신경 쓰인다. 지켜보는 이들에게 무섬증을 주지 않고 상상의 여지를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에 최대한 미치려고 화장을 해주기도 한다는데 마지막 표정관리는 장례지도사를 통해 완성되는 게 아니다. 화장터에서 불에 태워도 소멸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을 테고.
폐닭이 질기긴 해도 맛이 있다며 친정엄마는 가끔 압력솥에 통마늘을 듬뿍 넣고 닭을 삶았다. 압력밥솥이 딸랑거리다 멈추면 김을 빼줘야 한다. 내게 있어 책 읽기와 글쓰기는 책을 만지는 일과는 조금 다르다. 좀 더 적극적으로 김을 빼야 하니까. 책만 만지는 사람이 있고 책을 읽고 쓰다가 결국 책이 된 사람이 있다.
새 책이 들어오면 책의 장래가 밝아 아이들과 깔깔 웃고 폐기도서를 대하면 책의 장례를 치러야하는 통증으로 시무룩하다. 기일을 지키듯 연례행사로 책의 장례를 치른다. 책의 장례지도사로 스스럼없이 그야말로 스스로를 임명하면서.
첫댓글 책과 함께하면서도 책을 버려야 하는 현실, 그래도 책.
책 잡히지 않으려면 그야말로 책을 읽어내는 수밖에 없지요. 예술가는 타고난 것이지만,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길 여행을 하면 될 수도 있다네요!
낡은 것, 오래된 것들의 견고한 자리. 새 것들아, 얼마 안 된 것들아 까불지 마라.
영범 샘! 멘트 제대로 지대로 날리셨구먼유 ㅎㅎ
감동 제대로 받게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악수
아유~장자순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손이 마음처럼 크고 따뜻합니다^^
글 좋아요, 다음부터는 싸가지 없는 글을 써보심이..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까지 제가 싸가지 있는 글을 써왔나 보옵니다 ㅎ
포도주와 벗은 오래 묵을수록 좋다는디..ㅎ
오래된 농담처럼 오래된 책 냄새도 참 좋은디요
효숙샘의 책 장례지도사, 신발견이네요ㅋ
와우~기화샘 반갑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일부러 제 글 찾아 읽어주시고 겁나게 감사감사 해용~~^^
오늘 밤 두 편의 수필을 읽었습니다. 찾고 싶고 보고 싶은 수필에 음음음 역쉬 짙은 향에 취하는 밥입니다. 잘 지내시죠~~
친구님^^반갑습니다 ㅋ 잘 지내시죠!
시에 행사에서 잘 못 봐 아쉬웠는데 이렇게 깊은 밤 제 글도 읽어주시고 휘리릭 나가시지 않고 진한 댓글 달아주셨군요. 고맙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