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맛' 경차, 오히려 비싸야 대박..'하극상' 레이·캐스퍼, '살맛'난다 [세상만車]
최기성입력 2022.09.03. 17:18수정 2022.09.03. 18:57
크기=가격=신분, 경차=싼차
레이·캐스퍼, 車카스트 파괴
오히려 비쌀수록 잘 팔렸다
차박도 가능, 하극상 결정판
신형 레이와 캐스퍼는 공간활용성이 우수한 경차다.
【사진 제공=기아·현대차】
[세상만車] '경차·소형차=20대, 준중형차=30대, 중형차=40대, 대형차=50대 이상'.
인도 신분제인 카스트(caste)처럼 국내에서는 '크기=가격=신분'으로 구성된 자동차 카스트가 맹위를 떨쳤다.
생애 처음으로 차를 사거나 돈이 부족한 2030세대에게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경차·소형차·준중형차가 제격이라고 여겨졌다.
운전 미숙은 남녀가 따로 없는데도 유독 여성들을 '김 여사'로 비하하면서 작고 싼 경차가 어울린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운전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잠깐 타기 때문에 돈 쓸 필요가 없다고 간주됐다.
경제력을 갖추기 시작한 40대부터는 '자의 반, 타의 반' 더 비싸고 더 큰 차가 어울린다고 반강요하는 분위기도 형성됐다.
결국 '큰 차=비싼 차=좋은 차' '작은 차=싼 차=불편·불안한 차'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불편·불안·불만 '3불'의 악순환
대우 티코와 마티즈 【매경DB】
자동차 카스트 최하층으로 간주된 경차는 '싼 맛에 타는 차'로 치부됐다.
덩달아 "싸야 한다"고 강요받았다.
'싼 값'에 '안심·안전·안락'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작아서 '불편'하다.
안전성이 떨어져 '불안'하다.
탈수록 '불만'이 커진다"는 인식이 생겼다.
경차 판매는 자동차 브랜드 입장에서도 '남는 장사'는 아니었다.
대당 수익이 50만원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편·불안·불만 '3불'을 줄이기 위해 안전·편의사양을 강화하고 가격을 올리면 저항이 생겼다.
그 가격이면 좀 더 돈을 보태 소형차나 준중형차를 사는 게 낫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반대로 싼값을 유지하자니 수익성도 부족하고 '3불'에 수요 창출도 어려워졌다.
경차 입장에서는 설상가상이 발생했다.
생애 첫차 시장에서 준중형 세단에 이어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라는 강력한 경쟁 차종이 등장했다.
경차 시장 규모는 계속 작아졌다.
내우외환인 셈이다.
수요 감소 경차, 욜로족이 살렸다
모닝 【사진 제공=기아】
경차 수요는 줄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경차를 타려는 소비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자동차 브랜드 입장에서도 적지만 돈은 된다.
또 '경차→소형차 또는 준중형차(세단·SUV)→중형차'로 이어지는 구매 사이클을 갖춰야 소비자를 끌어들이고 유지할 수도 있다.
새로운 구매층도 등장했다.
가격이나 크기에 집착하지 않는 신인류인 '욜로(YOLO)족'이다.
욜로는 'You Only Live Once(한 번뿐인 인생)'라는 뜻이다.
욜로족은 미래보다는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한다.
삶의 질을 높여주는 취미생활, 자기 개발 등에 아낌없이 돈을 쓴다.
욜로족은 '크기=신분=가격'으로 구성된 자동차 카스트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신에게 큰 차가 가치가 있다고 여기면 다른 비용을 아껴서라도 큰 차를 구입한다.
반대로 '작은 차, 큰 기쁨'을 원하면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차를 산다.
대신 비싼 편의·안전 사양을 선택한다.
소형차를 살 돈으로 경차를 선택한다.
싼 맛 대신 '살맛'을 중시한다.
차급을 뛰어넘는 '안전·편의 하극상'
캐스퍼 【사진 제공=현대차】
자동차 브랜드는 새로운 구매층인 욜로족을 겨냥하고 덩달아 이익도 내기 위해 '3불'을 줄인 경차들을 내놨다.
차체는 작지만 차급을 뛰어넘는 안전·편의사양을 장착했다.
가격도 차급을 뛰어넘었다.
'풀옵션'을 선택하면 소형차를 넘어 준중형차 수준까지 도달했다. '하극상'이다.
예상대로 가격 논란이 발생했다.
'1000㏄=1000만원'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경차보다 큰 소형차나 준중형차는 '1㏄=1만원'에서 벗어난 지 오래지만 경차에서는 여전히 힘을 발휘했다.
1000만원대 후반에 도달한 기아 레이는 물론 경차 최초로 2000만원을 돌파한 현대차 캐스퍼는 가격 비난에 시달렸다.
"그 가격에 누가 사"라는 지적과 함께 판매도 저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캐스퍼의 경우 현대차 임금 절반 수준인 광주글로벌모터스에서 생산하는 데다 온라인 판매망을 이용해 생산·유통비용이 줄어들어 1500만원대에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깨지면서 더 큰 비난으로 이어졌다.
레이·캐스퍼, 비싼 트림일수록 '대박'
레이 신형과 구형 【사진 제공=기아】
결과는 반대였다.
레이와 캐스퍼는 "20·30대 초보·여성 운전자가 싼 맛에 경차를 산다"는 굴레에서 벗어났다.
트림별로 살펴보면 소형차보다 비싸고 돈을 좀 더 보태면 준중형차도 살 수 있는 경차가 잘 팔렸다.
레이 구매자들은 가장 저렴한 스탠다드보다 소형차 값에 육박하거나 오히려 더 비싼 프레스티지와 시그니처가 선호했다.
기아에 따르면 올 1분기(1~3월) 가장 인기가 높은 트림은 프레스티지(70%)로 나왔다.
구매자 10명 중 7명이 선택한 셈이다.
그다음으로 시그니처(21%), 스탠다드(8%) 순이다.
같은 기간 캐스퍼도 비쌀수록 잘 팔렸다.
현대차에 따르면 구매자 10명 중 7명이 2000만원 논란을 일으켰던 인스퍼레이션(70%)을 골랐다.
중간 트림인 모던은 2명(20%), 가장 저렴한 스마트는 1명(9%)에 불과했다.
20대 여성보다 40대 남성이 경차 선호
캐스퍼 밴 【사진 제공=현대차】
2일 매경닷컴이 카이즈유 데이터연구소에 의뢰해 성별·연령별 구매 현황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자동차판 카스트가 파괴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은 국토교통부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동차 등록 현황을 집계한다.
올해 상반기(1~6월) 개인이 구매한 레이는 총 1만4919대다.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40대(5246대)가 가장 많이 구입했다.
그다음 30대(3824대), 50대(3080대), 60대(1804대), 20대(965대) 순으로 나왔다.
레이는 남성보다는 20대 여성의 퍼스트카, 30·40대 여성의 세컨드카라는 등식도 깨졌다. 남성(8560대)이 여성(6359대)보다 많이 구입했다.
또 20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이 여성보다 많이 샀다.
40대 남성(3236대)이 레이를 가장 선호했다.
40대 여성(2010대), 30대 남성(1965대), 50대 남성(1877대), 30대 여성(1859대), 50대 여성(1203대), 60대 남성(1104대), 60대 여성(700대), 20대 여성(587대), 20대 남성(378대)이 그 뒤를 이었다.
같은 기간 개인이 산 캐스퍼는 총 1만7747대다.
30~50대가 가장 많이 구입했다.
30대 여성(2968대), 40대 남성(2575대), 40대 여성(2216대), 50대 남성(2115대), 30대 남성(2049대) 순이다.
캐스퍼를 가장 적게 산 연령대는 경차 주요 구매층이라 알려진 20대(1881대)다.
60대(2297대)보다 적게 구입했다.
더뉴 레이, '싼 맛' 대신 '살맛' 추구
더뉴 레이 【사진 제공=기아】
기아가 이달 출시한 부분변경(페이스리프트) 모델인 '더뉴 레이'는 경차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했다.
'하극상' 정신을 이어받아 더 주제를 모르는 경차가 됐다.
차급을 뛰어넘는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을 적용했다.
차로 유지 보조, 후측방 충돌방지 보조, 하이빔 보조, 후방 교차충돌방지 보조, 안전 하차 경고는 경차의 단점인 '불안'을 없애준다.
편의사양도 경차 수준을 뛰어넘었다.
프리미엄 차종에 주로 장착했던 운전석 통풍시트와 공기청정 모드, 도어록 연동 아웃사이드 미러 폴딩, 원격시동 스마트키, 개별 타이어 공기압 경보 시스템, 뒷좌석 C타입 USB 충전단자 등으로 '불편'을 줄였다.
디지털 편의성도 강화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차량을 원격 제어할 수 있는 기아 커넥트, 차량 내 간편 결제 시스템인 기아 페이, 홈 IoT(사물인터넷) 기능 등을 채택했다.
레이와 캐스퍼 【사진 제공=기아·현대차】
하극상 결정판은 공간이다.
경차는 좁고 불편하다는 편견을 파괴했다.
앞좌석 풀 폴딩 기능과 뒷좌석 슬라이딩 6대4 폴딩 기능으로 운전석을 포함해 모든 좌석을 접을 수 있다.
'풀 플랫'은 더뉴 레이를 '작은 별장'으로 만들어준다.
차박(차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가격도 기존 모델보다 100만원 정도 비싸졌다.
차량용 반도체 대란과 원자재 값 상승, 편의·안전 사양 강화 등이 가격 인상에 영향을 줬다.
승용 기준으로 1390만~1720만원이다.
더뉴 레이는 캐스퍼와 함께 '타도 카스트' 최전방에 섰다.
물론 경차 가격이 너무 비싸졌다고 한탄하며 소형 SUV나 준중형세단으로 갈아타는 소비자도 있다.
하지만 돈보다는 안전 때문에, 편의성 때문에, 공간 때문에 경차 구입을 포기했거나 포기하려던 소비자를 붙잡을 수 있다.
'작은 차, 큰 기쁨'으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다.
무엇보다 안전에는 '귀천'이 따로 없다.
[최기성 매경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