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무인(武人)
[1 회]
제1장 기연
1992년 가을 '아, 도대체 왜 안 되는 거지? 무엇이 문제일까'
사방 40평 정도의 도장 안이었다.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치기가 엿보이는 소년이 흰색 도복을 입고 바닥에 큰대자로 길게 누워 있었다. 땀에 절은 숱많은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에 엉켜붙어 있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에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었고, 짙은 눈썹과 우뚝 선 콧날이 아직 소년임에도 남성미를 강하게 풍기는 소년이었다.
푸른색 매트리스로 도배를 한 체육관에는 흰색 천장에 1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검은색 샌드백이 쇠줄에 매달려 있었다. 누워있는 소년의 뒤에는 간단한 역기와 아령 등이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도장 안에는 소년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워있던 소년은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을 하는 듯 하더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하긴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 몸이 공중 사회전을 감당할 정도의 체공시간을 갖고 있지 못한 탓일 테니... 휴... 결국은 수련밖에는 없다는 말인데... 그래도 벌써 6개월이나 매달리고 있는데 3회전 반에서 나머지 90도를 돌지 못한다는 말이야.. 아아 정말 열 받는구나!'
소년은 완전히 일어서더니 가볍게 온 몸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평소 몸을 풀던 정해진 순서대로 움직였다. 심장에서 먼 부분인 손끝과 발끝 그리고 머리끝부터 이완시키기 시작한 그의 몸놀림이 몇분 지나자 체조선수를 연상케 할 정도로 부드러워졌다. 두 다리를 벌리고 바닥에 앉은 채 가슴과 바닥을 밀착시키고 앞뒤로 움직이던 소년이 몸을 일으켰다.
몸이 원하는 만큼 이완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소년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먹과 발의 연속적인 컴비네이션이 허공을 난자했다. 10여분 동안 쉐도우복싱을 하듯 움직이던 소년의 몸이 멈추었다. 입이 꾹 다물어졌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양손으로 상반신 방어자세를 잡고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던 그의 힘찬 기합소리가 도장안을 울렸다.
그의 몸이 회전하며 공중으로 도약했다. 팽이처럼 도는 그의 신형에서 한 바퀴를 돌때마다 바람처럼 발길이 허공을 걷어찼다. 제대로 알아보기도 어려울 만큼 빠르고 강력한 발차기였다. 소년은 매트리스위로 착지했다. 착지하는 마지막 자세가 불안정하게 보였다.
그의 입에서 가는 한숨이 흘러 나왔다.
"역시 오늘은 이게 한계인가 보군. 초조해하지 말자. 하다보면 언젠가 되겠지"
소년은 실망스런 음성으로 중얼거리더니 도장의 한쪽 구석으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며 뒤흔들린 심신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가 시도했던 기술은 무술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간단치 않은 것이다. 그 나이에 시도하기에 기술의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것이다.
"한아"
도장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소년의 또래로 보이는 교복을 입은 소년이 가방을 등에 매고 도장안에 들어섰다. 여자도 부러워할만한 흰 피부에 흑백이 뚜렷한 눈을 가진 대단한 미소년이었다. 도장안에서 운동을 하던 소년이 선이 굵어 남성적인 얼굴이라면 지금 들어온 소년은 177센티미터 정도의 키만 아니라면 여자라 해도 믿을 정도로 해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교복 왼쪽 가슴에 이청운이라는 명찰을 붙인 소년은 도장의 한쪽 구석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한이라 불린 소년에게 다가가더니 이마를 손으로 쳤다.
"야 임마 일어나"
명상을 하던 중 나른한 기분과 함께 살짝 잠에 빠졌던 한은 청운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아 계속 그 자세를 유지하다가 자신의 이마를 내려치는 청운의 손바닥을 피하며 눈을 떴다.
"도서관에 있어야 할 놈이 여긴 왜 왔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청운을 바라보는 한의 눈빛은 대단히 부드러웠다. 하긴 청운은 그의 거의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 좀 하다가 종일 허공이나 때려대고 있을 니가 불쌍해서 구제해주려고 왔다."
청운은 씨익 웃으며 가방을 도장 구석에 내려놓고 한의 옆에 편하게 앉았다. 도장의 전면벽에는 커다란 대형태극기가 걸려 있었는데 그걸 바라보던 청운이 한에게 말했다.
"야, 바깥 날씨도 좋은데 여기서 이러구만 있을 거냐, 어차피 시합 같은 데는 나가지도 않는 놈이 적당히 한다구 누가 뭐랄 사람도 없는데,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 할 이야기도 있고..."
"그럴까? 오늘 운동은 마침 마무리하려고 하던 참이라... 그래 나가자. 잠깐 기다려. 준비할 테니..."
청운은 가방을 둘러매고 한이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도장안의 샌드백을 두드리기도 하고 5킬로그램짜리 아령을 들어 몇 번 해보기도 하다가 탈의실에서 청바지와 흰티로 갈아입고 나온 한과 함께 체육관을 나섰다.
바깥 날씨는 청운의 말대로 정말 좋았다. 9월말의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보기 어려울 만큼 맑았고, 적당한 바람이 불고 있어서 몇 시간 동안을 정신없이 땀구덩이에서 뒹굴었던 그의 기분을 편안하게 했다. 체육관이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매연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설사 도시 한복판에 있었더라도 날씨가 좋다는데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지난밤에 비가 내려서 그런가 하늘이 더 높아진 느낌인데..."
그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청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아 점심 먹었냐?"
"아니"
"어디가서 뭐 좀 먹자. 보나마나 쉬지 않고 운동했을 테니"
청운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앞서서 걷기 시작했고 그는 그 뒤를 별 표정없이 뒤따라 걸었다. 청운은 체육관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전주식당이라고 쓰여진 음식점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 한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주인아줌마에게 김치찌개 2인분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자 둘은 별 말없이 음식을 먹고 나서 식당을 나오며 청운이 계산을 했다.
두 사람은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시내에서 버스를 내린 한과 청운은 마치 정해진 갈 곳이 있는 것처럼 시내의 골목을 약10여분 걷다가 다향이라는 간판이 걸린 고풍스런 느낌의 찻집으로 들어섰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20대 후반의 개량한복을 입은 아가씨가 웃는 얼굴로 둘을 반겼다.
"한이하고 청운이로구나. 한이는 오랜만에 오네. 청운이두 열흘만인 걸! 왜 이렇게 뜸했어?"
"미진이 누나. 미안해요. 학력고사가 얼마 안 남았잖아요. 공부해야죠. 나중에 제가 대학가면 누나가 오지말라고 할 때까지 질리게 올게요."
청운도 반가운 어투로 근 일년 가까운 출입으로 친해진 다향의 젊은 여주인 오미진에게 말했다.
"한이는 여전히 말이 없네. 나 오랜만에 보는게 별루 안반가운가보다."
미진은 장난스런 말투로 청운의 옆에 말없이 웃으며 서 있는 한을 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한은 웃으며 미진에게 인사를 했다. 미진은 그의 말 수가 별로 없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고 둘을 한쪽 구석 자리로 안내한 후 주문한 녹차를 가져다주었다. 찻집 안은 40여평 정도 되었고 바닥에 작은 자갈들이 깔려 있었다.
탁자는 열서너 개 정도 였는데 통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 운치가 있었다. 청운은 2-3곳의 탁자를 차지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다른 손님들을 둘러보다가 한의 눈을 쳐다보더니 진지한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한아, 너 이제는 집에 다시 들어오는 게 어떻겠냐. 아버지 어머니도 니가 혼자서 체육관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해 걱정들을 많이 하시고 계셔. 내 생각에도 학교도 다니지 않고 검정고시로 졸업장을 얻겠다는 거나 시합 같은데 나가지도 않으면서 혼자 운동을 계속하는 것도 이해하기가 사실 쉽지 않고 너무 니 생활이 폐쇄적이 돼 가는 것 같아서 걱정이 돼. 내가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사고는 이제 그만 가슴속에 묻고 우리 가족과 함께 생활했으면 해. 벌써 이년이 지났잖아..."
청운의 마지막 말에는 슬픔과 친구에 대한 걱정이 같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청운의 아버지 이진석의 마음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청운의 아버지 이진석과 그의 아버지 임정훈은 중학교 동창으로 임정훈이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깊은 우정을 나누었었다. 물론 지금도 이진석은 그를 친자식인 청운만큼이나 귀하게 여겼다.
한은 자신의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친구 이청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기분이 좋아졌다. 친구는 지난 사고로 자신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오해였고 풀어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청운의 말처럼 청운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생활하기는 싫었다. 청운의 부모님과 가족들은 자신을 한가족처럼 대해주겠지만 자신의 가족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편안하게 지내며 이제는 영원히 다시 볼 수 없게 된 자신의 가족들을 잊게 될까봐 겁이 났다.
"지금이 좋아. 너희 부모님 그리고 여경이 한테도 감사하고 있어. 하지만 지금처럼 혼자 지내고 싶어.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얼마 남지 않았어. 더 이상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다음 달에 승단시험이 있어. 아마 4단을 딸 수 있을 거야. 검정고시두 붙어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딸 자신도 있어. 그러면 아버지 친구분의 도장에서 사범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수 있을 것이고 나도 니가 지금 걱정하는 것처럼 혼자만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지금처럼 네게 걱정을 끼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는 차분한 어조로 청운에게 말했다. 친구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 잘 될지는 자신할 수 없었지만.
청운은 자신과 함께 형제처럼 자라온 사랑하는 친구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꺽을 수 없는 친구였고 아무 이유없이 고집을 부리는 것도 보지 못했다. 생각이 깊어서 다른 사람을 걱정시키지 않던 친구였기에 지금 하는 말을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알았다. 그런 말 할 줄 알았다. 그래두 집에는 한 번 와라. 부모님이 보고 싶어 하신다. 그리고 여경이도 난리고... 네가 오지 않는다면 니가 생활하는 체육관에 처들어가겠다구 벼르고 있다. 내가 말리고는 있는데 너도 알다시피 그 녀석 고집이 장난 아니잖아. 체육관에 찾아가면 난장판 되는데 아마 1분도 안 걸릴 거다. 하하"
"알았어. 다음주 토요일쯤에 찾아갈 테니까. 부모님께 그렇게 말씀드려 둬."
한은 분위기를 바꾸어서 청운의 얼마남지 않은 학력고사와 학교생활에 대해서 물어보며 이야기를 하다가 한시간쯤 후 자리에서 일어나 자주 찾아오라는 다향의 여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찻집을 나섰다.
그는 청운을 버스에 태워 먼저 보내고 책을 몇 권 사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두워지는 거리를 걸어 골목길로 걸어 들어갔다.
번화가의 한블럭 뒤편에는 재래시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시장을 한블럭 지나가자 헌책방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 나타났다. 한은 골목의 끝부분에 자리잡은 초우서점의 낡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섰다. 책방안은 5-6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고, 사방에 헌책들이 쌓여 책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이곳은 한이 2년 넘게 단골로 다니며 책을 사온 곳이라 카운터에 앉아 책상위에 쌓인 낡아 보이는 책들을 뒤적이며 장부에 무언가를 적어넣고 있던 40대 중반의 책방주인은 반갑게 한을 맞았다. 두터운 뿔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이 나이답지 않게 맑은 중키의 중년이었다.
"이번엔 꽤 오랜만인 걸. 한아 전에 사간 책들은 다 읽었냐?"
"예, 저번에 사간 책들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여러 번 읽었어요. 아저씨가 권해 주신 책들이라 그런지 더 좋았습니다."
한은 인심좋아 보이는 책방주인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이번에는 어떤 책들을 사가려고?"
한이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이 기분 좋은 듯 책방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번에도 아저씨가 권해 주세요. 한문 공부를 할 수 있는 책도 몇 권 포함해서요.'
그럼 무엇이 좋을까 하고 중얼거리며 책방주인은 작은 책방안의 오른쪽 구석으로 가서 서가에 꽃혀있는 책들과 한쪽에 쌓여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책들을 뒤지더니 양손에 10여권의 책들을 들고 와 카운터에 놓았다.
"한아. 이 책들을 한 번 살펴봐라. 한문이 많이 섞여 있는 책들을 중심으로 골랐고, 완전 한문으로 되어있는 책들도 세권 정도 있다. 그 세권은 무술에 관한 책 같은데 네가 그런 쪽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골랐다."
한은 카운터에 쌓여 있는 책들의 겉을 살펴보고는 별 생각 없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책값을 주인에게 지불했다.
"어... 한아 살펴보지도 않는 거냐?"
"됐어요. 아저씨가 골라 주시는 책이잖아요. 갈게요"
한은 책방주인에게 대답하고 그가 보자기에 쌓아준 책들을 들고 책방을 나섰다.
''내가 저 아이에게 진결을 전함은 정해진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저 아이에게 이런 짐을 지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지만 한아! 내게도 선택의 여지는 없구나, 후일 사정을 알게 되었을 때 네가 나를 용서하기를 바랄뿐...."
책방주인은 속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한스러움과 기대, 쓸쓸함이 복잡하게 얽힌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곧 일상의 모습을 회복했다.
그는 평범한 책방주인인 것이다. 그는 다시 카운터에 앉아 책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한은 버스를 타고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2층짜리 건물로 1층엔 체육관이 2층에는 살림집의 구조로 되어 있는 곳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이었다. 그는 2층으로 올라가 간단하게 씻고 헌책방에서 사 온 책들을 들고 서재로 갔다.
서재는 사면의 벽에 책장이 있었고, 그 책장들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문가에는 책상과 그 위에 컴퓨터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은 책상에 앉아 책이 쌓여진 보따리를 풀었다. 책들은 오래된 책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 중의 세권은 고서적들처럼 끈으로 묶여져 있었다. 그는 일단 끈으로 묶인 책들은 한쪽으로 치우고 다른 책들을 살펴보았다. 노자의 도덕경과 맹자, 장자, 춘추 등이 원문과 해설이 함께 되어있는 책들이었는데 한문밑에는 한글로 음이 적혀 있어서 읽는데 무리가 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만족스러웠다. 대학에 갈 생각은 없었으나 생활속에서 여러 가지를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최근 1년 동안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한편 독학으로 천자문과 소학을 뗀 상태였다.
한문을 어느 정도 공부하고 난 후에는 일본어와 중국어를 공부할 생각이었다.
한은 큼직했던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난 후 사는 것에 대한 의욕상실로 1년여를 방황했지만 돌아가시기전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때문에 마음껏 방황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절규를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스스로를 포기한다면 돌아가신 부모님은 저승에서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생각에 한은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 사이 한은 학교에서 자퇴했다. 어차피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밖에 없는 그에게 학교생활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체육관 관장이었던 아버지가 운영하던 체육관 내에서 미친 듯이 자신을 혹사한 덕분에 그의 실력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루가 다르게 상승했다.
한은 4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태권도를 비롯한 여러 무술을 체계적으로 전수받았다.
한의 아버지 임정훈은 태권도 공인7단외에도 택견과 해동검도, 수벽치기, 기천, 합기도 등 우리 무예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고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무예를 자신의 하나뿐인 자식에게 전수하는데 온 정성을 쏟았던 사람이었다.
한은 현재 나이제한 때문에 태권도 삼단이었지만 태권도외에도 아버지가 가르쳐준 여러 전통무예에 대한 이해가 깊은 소년이었다. 거기에 최근 이년 동안에는 하루 8시간 이상씩 미친듯이 운동한 때문에 그 실력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수준에 근접하고 있었다.
실력을 쌓기 위하여 한 수련이 아니었고, 그 자신은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긴 하였어도.
한은 다른 청소년과는 상당히 다른 유소년기를 보냈다. 그의 아버지 임정훈은 자신이 10대 후반에 무술을 시작한 것이 가슴에 맺혔던 사람이었다. 몸이 거의 굳어버린 후 시작한 무예수련으로 고생했던 그는 자신의 자식이 자신과 같은 아쉬움 속에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4살 때부터 임정훈의 계획속에서 무술을 배워야만했다. 너무 어렸을 때부터 시작한 무술이라 아버지에게 반항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
선택의 여지도 당연히 없었다.
임정훈은 무술을 전수할 때는 엄격한 사람이었지만 일상생활속에서는 대단히 자상한 성격으로 가정에 충실한 보통의 아버지였고 외아들인 한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한의 어머니 이윤임은 무술가의 아내라고 하기에는 조용한 현모양처형의 여인으로 아들의 힘든 수련 때문에 임정훈과 가끔 말다툼을 하기는 하였으나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 줄 아는 현명함이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했던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그 분들이 남겨 준 유산은 상당한 액수였고, 보험금과 가해자로부터 받은 보상합의금의 액수도 상당해서 한이 혼자 생활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한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리웠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고 살아서 다시 볼 수 없는 분들이었다. 2년전에는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만 같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차분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은 한쪽으로 치워 두었던 끈으로 묶여진 책을 앞으로 당겨서 살펴보았다. 세권 모두 책의 겉표지에 동일한 초서체의 글들이 적혀 있었는데 한이 읽을 수 있는 것은 卷之一, 卷之二, 卷之三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이었다. 맨 위에 있던 책을 들어 첫 장을 넘기자 초서체의 흘려 쓴 한문들이 적혀 있었다. 당연히 임한은 한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한문서체의 종류 : 1. 전서(篆書) 2. 예서(隸書) 3. 해서(楷書) 4. 행서(行書) 5. 초서(草書) 최초로 초서가 생길 때에는 전서나 해서보다도 쓰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이는 전서에서 초서로 그 모양이 변하였기에 처음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으며 한나라 이전에는 모든 초서가 한자 씩 떨어져 있었다. 요즘처럼 이어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 부터였다. 획이 균일하지 않고 대소, 태세, 장단의 조화가 변화무쌍하고 직선과 곡선의 조형의 아름다움이 초서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예) 17첩(十七帖). 위의 서체들중 초서의 흘림이 가장 심하여 초서체를 읽을 줄만 알아도 한문공부의 초보는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은 인터넷상의 출처불명 서류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책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내용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어떤 것이 적혀있는지 책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페이지를 무심결에 넘기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이상한 그림들이 책에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의 10여 페이지에는 초서체의 한문으로 내용이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 그가 바라보는 페이지부터는 그림이 사분의 삼이고 하단에 글이 4-5줄 정도였다.
그림은 인체를 그려놓은 모양이었는데 발가벗은 모습이었고,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하단전이라고 알고 있는 부위에 소용돌이가 그려져 있고, 전신에 복잡한 선이 그어져 있었으며, 한의학에서 혈이라고 부를만한 부위에 화살표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화살표가 선을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화살표의 허리부분이 꺽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페이지를 다시 넘기기 시작했다. 다음페이지에도 역시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며, 그러한 인체도형은 정확하게 108개였고 인체에 그려져 있는 선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며, 인체의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처음에는 반듯이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모습이더니 여러 가지 자세로 모습이 바뀌었으며, 최종적으로는 태극권의 기세와 비슷한 모습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음 책을 펼쳤다. 다음 책도 마찬가지의 초서체였는데 글씨체가 같은 것이 동일인이 작성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내용의 전개도 비슷했는데 10여 페이지 뒤부터는 역시 그림이 있었다. 이 책에 그려진 그림은 사방을 뛰어다니는 사람과 발의 모양, 그리고 발모양을 연결하는 동선등이 절반이었고, 주먹과 손바닥, 발등으로 역시 사방을 뛰어다니며 휘두르는 모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역시 주먹과 손바닥, 발에는 동선이라고 생각되는 선들이 그려져 있었고 앞의 책과 마찬가지로 인체에는 선과 화살표들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세 번째 책을 펼쳤다. 세 번째의 책에는 칼이라고 생각되는 도구를 든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한 장에 칼의 모습이 수십 개씩 그려져 있어서 한을 한숨 짓게 했다. 한은 책을 덮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 책일까. 전에 청운이가 보던 무협지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하긴 한데 그림만으로는 전혀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일단 글자를 읽을 수가 있어야 뭐가 되도 되겠다.'
그는 일단 책을 서재의 한쪽 책장에 꼽아놓았다. 초서체를 어느 정도 공부한 다음 다시 꺼내 어 볼 생각이었다.
한은 예전에 청운이 무협지를 읽으며 자신에게 하늘에서 절세의 무공비급이 떨어져 그걸 수련한 자신이 무림고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말을 듣고 웃은 적이 있었다.
책을 보고 고수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십수년간 여러 무술을 수련한 한의 입장에서 그렇게 고수가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서점에 나와 있는 무술수련 서적만 보아도 당장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비전이라고 할 만한 내용은 없는 일반 입문서적 정도였지만 설령 비전으로 내려오는 책이라하더라도 그런 책을 보고 수련해서 고수가 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책만 보고서는 태권도의 뒤돌려차기라는 하나의 형도 배우기가 난해한 것이다. 선배의 가르침과 시범, 잘못된 부분에 대한 끊임없는 지적과 바로잡음 등이 없다면 현대의 스포츠화된 무술의 단순한 동작도 마스터하기가 어려운데 무협지에 나오는 식의 고도의 체계화된 속칭 신공들이라면 책만 보고 혼자서 배우기는 정말 어렵다는 것이 임한의 생각이었고, 방금 본 책의 내용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무심히 책장에 꽂아 둔 이유이기도 했다. 사실 임한은 그 책들이 누군가의 장난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임한은 무공비급같은 것은 믿지 않는 평범한 소년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초서체를 공부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책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일부러 초서체를 공부할만한 소재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임한의 생활은 규칙적이었다. 새벽 네시 반에 기상해서 한 시간 동안 10킬로미터 런닝을 하고 체육관으로 돌아와 8시까지 수련을 하고 간단하게 밥을 해 먹은 후 점심때까지 검정고시 과목들을 공부했다. 점심을 먹은 후 오후 한시부터는 다시 수련을 시작해서 다섯시까지 수련을 한다. 저녁을 먹은 후 일곱시부터 열한시까지는 한문을 공부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며 열한시에 잠을 자고 다시 새벽 네시반에 기상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새벽수련을 제외하고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려 노력했다.
그는 초서체를 공부한 지 2개월이 지났을 때부터 초우서점에서 사 온 이상한 헌책들의 해석을 시작했다. 그동안 국기원에서 태권도 4단심사에 합격했고, 이청운의 집에 가서 인사도 드리고 하룻밤을 묶기도 했다.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인 청운의 여동생 이여경에게 시달림을 당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한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사춘기 소녀의 변덕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경은 나이에 비해 조용하고 의젓해 보이는 임한의 분위기를 어떻게 해서든 무너뜨리려고 했고, 임한은 그 모든 것을 받아주어야만 했으니 청운의 집에서 보낸 일박이일은 임한에게 일년과도 같았다. 하지만 오랜 만에 가족의 정을 느낀 임한에게 여경의 변덕은 괴로우면서도 즐거운 경험이기도 했다.
108개의 벌거벗은 스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던 첫 번째 책은 책의 겉표지에 적힌 글의 제목은 무상진결이었고, 첫장은 이 책을 만든 사람이 쓴 서문이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스승의 은혜를 받아 생명의 구함을 받고 가르침까지 받는 복을 누렸다. 미천한 재질의 제자를 수습하시느라 노년을 고심으로 보내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하였으나 돌아가실 때까지도 못난 제자에 대한 근심을 지우지 못하셨으니 그 죄가 적지 않다. 강호에 나와 세상의 바람을 쏘이기 수삼년 절반도 수습치 못한 스승의 무예를 제대로 상대하는 자가 없는 현실에 실망하고 다시 입산하여 수련을 계속하였다.
귀천하기전에 문호를 이으려 하였으나 마음에 드는 전인을 발견할 수 없어 평생의 심득을 글로 남긴다. 이글을 볼 수 있는 자라면 설치된 기문진을 지혜로 파훼한 자일테니 능히 본문의 절기를 익힐 수 있으리다. 본문의 무예는 오랜 세월동안 많은 조사들께서 보완발전시켜 온 것으로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인연이 있어 이 글을 보는 자여 부디 본문의 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주기를....'
그 외에도 이어지는 글이 있었으나 한은 대충 해석하고 넘어갔다. 문파의 이름은 무상문(無常門)이라는 것이었고, 끝에는 무명산인(無名山人)이라는 서명이 되어 있었다.
한은 어렵게 해석한 글을 읽고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졌다. 내용을 보면 이 글을 썼던 사람은 무상문이라는 문파의 주인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문파의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었고 강호 운운하는 것이 무슨 소설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어려운 초서체로 쓴 것이나 서체의 유려(流麗)함이 도저히 장난스런 수준으로는 볼 수가 없었고, 내용대로라면 이 책들은 무
언가의 보호를 받는 지역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헌책방을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그를 더 어리둥절케 했던 것이다.
한은 어렵게 글을 읽으며 책장을 넘겼다. 서문이 끝난 후에는 천단무상진기(天壇無上眞氣)라는 이름이 있었고 그 후로 검은 것은 글이고 흰 것은 종이라는 수준의 글들이 이어지다가 예의 그 벌거벗은 스님(?)들의 그림으로 이어졌는데 책에 적혀 있는 대로라면 그 그림들이 천단무상진기의 4단계 중 1단계인 연정화기를 이루는 과정이었다.
무명산인이라는 사람이 적어놓기로 천단무상진기는 4단계로 되어 있었다. 1단계연정화기 2단계 연기화신 3단계 연신환허 4단계 연허합도의 단계이고 1단계는 108식의 자세를 구결에 따라 수행하면 공을 얻을 수 있으나 2,3,4단계는 형을 수련해서 얻을 수 없는 단계라 구결만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권은 천단무상진기의 실용수법편으로 2권의 상반부에는 무명산인이 강호 주유중 수집했던 정사양도의 각종 절기들이 기록되어 있었고, 하반부에는 무상문의 독문절기라는 소요유운보, 암향부동신법, 연환벽력수, 무상금강권법, 천강지등 십여 종의 실용수법이 그리고 세 번째 책에는 창궁무상검도라는 한 가지의 무학이 기록되어 있었다.
한은 대충 막히는 글은 사전을 찾으며 한달 여에 걸쳐 세권의 고서적을 읽은 후 할말을 잃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책에 써 있는 내용대로라면 그 세권의 책에 적힌 내용대로 수련을 한다면 가히 슈퍼맨에 가까운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학교를 고등학교 1학년에서 중퇴한 임한이지만 현대 과학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받으며 살아 온 그가 고서적에 적혀있는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일인 것이다.
임한도 무예수련을 십 수 년 동안 해오면서 기와 단전 그리고 경락의 존재 등을 이해하기도하고 믿기도 하지만 이 고서적들에 적혀있는 내용은 그런 수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책의 내용에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해도 이러한 내용을 담은 책들이 골목헌책방에 뒹굴고 있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가히 인간의 역사에 핵폭탄보다도 더한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었고, 책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뿐만이 아니라 국가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책의 내용을 믿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하다가 일단은 천단무상진기라는 수련법을 수련해보기로 결정했다. 조심스럽게 수련을 하면서 문제가 생긴다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호기심이 절반 이상 섞인 기분으로 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치기가 가시지 않은 그 결정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으리라고는 당시 그로서는 예상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