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하나되신 하나님 183
권두언
주님의 오시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립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발생하는 무서운 사고들과 전쟁들‚그리고 창궐하는 전염병 등은 인자의 오심의 징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세의 가장 확실한 징조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복음에 대한 배도입니다. 사탄은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복음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류 속에서 표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복음의 명확한 빛을 흐리게 하기 위해 사탄이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오늘 날 기독교에서 이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죄를 승리하고 성품이 온전히 변화되는 성화의 가르침이 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성육신의 신비한 주제는 구원의 계획의 모든 국면에 관련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인성이 신성과 연합할 때 어떤 생애를 살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가 성육신의 이유와 신비를 깨닫게 될 때에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신비에 놀라게 될 것이며‚이것은 우리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붙들어매는 중요한 황금사슬이 될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영적인 생애에 부흥이 가져오며‚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더 신실한 사람으로 서리라는 우리의 믿음을 분기시켜 줄 것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계 10:7).
하나님의 마지막 참 백성이 속히 준비되기를 기도합니다.
Love Letter_ 섭리의 책이 펼쳐질 때
강 영은
주님,
당신은 섭리의 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페이지마다 모든 사람의 이름과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그 책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책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각 사람이 겪는,
각 사람이 겪은,
각 사람이 겪어야 할 섭리의 사건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고서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당신의 섭리의 책에서…
어쩌면 당신께서 마련하신 그 일과 사건과 상황은
꼭 그 시간에, 그 사람만을 위해서 일어나는 것.
꼭 그 과정을 통과해야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개인교습 시간.
마치 각 사람에게 맞춘 맞춤옷처럼
모두에게 꼭 맞게 마련된 섭리의 사건을 지나면서,
하나도 허지로 돌아가지 않을 섭리의 교훈을 배우면서,
우리는 모두 익은 벼처럼 성숙해 갑니다.
때로 너무 날카롭게 도려내시는 당신의 칼날에
때로 너무 세게 갈아 내시는 당신의 연마기에
때로 너무 냉정하게 잘라내시는 당신의 전정가위에
아픈 눈물 흘리고, 놀란 가슴 쓸지만,
모서리 없는 둥근 돌 될 때까지
빛나는 보석으로 갈리기까지
쳐낼 가지 없는 올곧은 재목 될 때까지
당신의 자비로운 섭리의 페이지는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주님
아둔한 우리는 늘 나중에야 알아차립니다.
한참을 지낸 후에야 겨우 깨닫습니다.
세욕의 찌꺼기 다 타버리고 이기심으로 어둡던 눈이 밝아졌을 때에야
그것이 우리를 순결하게 정련시키는 섭리의 사건이었다는 것을…
그 일이 없었으면 오늘의 이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님
당신은 섭리의 책을 가지고 계십니다마는
언젠가 그 책이 덮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더 이상의 페이지들이 이어지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책을 덮으시면서 주님은 웃으시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이제 더 이상의 연단은 필요 없겠군!”
“내가 원한 것은 바로 이런 보석이었지!”
주님
당신의 섭리의 책을 바라보며 오늘도 기도합니다.
그 섭리의 책이 펼쳐질 때 원망하지 않게 되기를,
그 섭리의 페이지에 마련된 일이 닥칠 때 놀라지 않게 되기를…
오히려 계속 이어지는 그 페이지에 감사하게 되기를…
제1부_ 인간에게 나타난 가장 큰 계시
우리와 하나 되신 하나님
하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겨있는 엄청난 의미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뜻과 교훈이 우리에게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그것이 우리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또 왜 하나님께서 임마누엘이 되셔야 했는지, 그리고 이 주제가 마지막 성도들과 어떤 깊은 연관이 있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이 주제에 우리 구원의 관건이 달려있기 때문이며, 또 이것이 우리의 참믿음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임마누엘 되시고 성육신의 신비한 비밀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에 대해서 조명해 보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무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이 중요한 주제 연구가 독자 여러분의 신앙에 큰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부 –
제1부: 인간에게 나타난 가장 큰 계시
인류의 첫 시조의 범죄 이래로 긴 세월이 흘렀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후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구속의 계획을 발표하시고, 죄로 인해 발생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리와 죄가 빚어놓은 결과를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탄이 뿌려놓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계략에 의해 인간은 그분의 참모습과 속성에 대해 잊어갔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먹구름으로 가득 찼고 사탄이 의도한 대로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혹하고 형벌을 내리는 무서운 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을 인간의 허물과 잘못을 찾아내어 벌을 주려고 항상 주목하는 존재처럼 생각하고 그분을 공포심으로 대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사탄이 계획한 것이었다. 미신과 오류의 어둠이 세상을 뒤덮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무지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이 세상에 누군가가 하나님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계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 하나님을 증거하는 계시들
물론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계시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연계를 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성경 말씀의 계시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연계에 나타난 현상들, 온 땅을 비추는 햇빛과 산천을 적시는 비와 이슬, 산과 바다와 들을 채운 모든 생물, 꽃과 나비와 새와 동물은 창조주의 지혜와 사랑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자연법칙에 나타나 있는 순환과 인과의 법칙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속성을 나타내었다. 비록 인류가 범죄하므로 처음 창조되었을 당시의 아름다움이 없어지고, 세상에 쇠퇴의 증상과 저주의 음영이 드리워졌을지라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창조의 솜씨가 남아 있었다. 탐스럽게 피어나는 꽃봉오리마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싹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기록되어 있고, 공중을 즐거운 노래로 채우는 새들은 인류를 행복하게 하시려는 창조주의 자비와 사랑의 갈망을 노래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은 표상들로는 하나님을 증거하기에 부족하였다.
천연계와 함께 성경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큰 계시이다. 선지자들을 통해 보내신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과 교훈들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 때문에 이 세상에 초래된 죄의 결과와 비애와 고통으로 인해,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에 끼친 손상으로 말미암아 진리는 효력을 잃고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교훈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리가 살아있고 효력 있는 것이 되게 하려면 진리의 능력이 증명되어야 하였다. 세상은, 세상에 사는 인간들은 그들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참모습을 조명해 줄 누군가를,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리 그대로 사는 산 모본이 될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즉, 사탄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정부에 대해 반역을 일으킬 때에 주장하던 것, ‘하나님의 법은 불공평하며 아무도 지킬 수 없다’라고 주장하던 그의 고소를 파쇄할 누군가가 필요하였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 하나님의 법의 효력과 파워를 증명할 누군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2) 가장 큰 계시 - 아들 하나님의 강림
때가 차고 하나님 섭리의 시간표가 정한 때를 가리키는 바로 그때, 하나님을 올바로 현시할 가장 큰 계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성육신하셨다.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신 임마누엘,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그대로 나타내고 보이시려고 오셨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의 속성과 사랑의 품성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분은 하나님의 생각을 들을 수 있도록 한 하나님의 말씀이셨고, 그분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증거하기 때문에, 하늘에서, 우리는 땅에서, 넓은 대양의 물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별들이나 대양이나 큰 폭포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배울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품성과 인격을 묘사하기 위해 천연계보다 더욱 분명한 계시가 필요함을 아시고, 인간의 시력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까지, 인간의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까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들을 현시하시기 위하여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인류 가운데 사시려고 오신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심으로써 사탄이 뿌려놓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어두워진 이 세상의 음울한 그늘이 밝아지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탄의 기만적 세력이 깨어져야 했다. 이것은 힘으로는 할 수 없었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정부의 원칙과는 배치된다. 그분은 자원해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봉사만을 원하시는데 사랑은 명령으로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힘이나 권위로 얻을 수 없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진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히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므로, 그분의 품성이 사탄의 품성과 대조되어 드러나야 했다. 온 우주에서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는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시는 분, 그 사랑의 넓이와 성질을 아시는 분, 그래서 그분의 사랑의 품성을 그대로 가지고 오셔서 드러내실 아들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었다. 아들 하나님의 강림,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리시는 가장 큰 계시였다!
제2부_ 성육신의 또 다른 이유
성령의 인도와 지혜를 구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세상의 그 누구도 깨닫기 힘든 놀라운 진리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그것을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비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마련하신 신비한 구속의 경륜 속에 들어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골 1:26), 참된 믿음과 영적 안목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밝혀지고 있다. 다음 성경절은 이 비밀에 대해 가장 직접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읽는다면, 이 “비밀”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심오한 뜻과 의미를 간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비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1) 구속의 경륜 - 성육신의 신비한 비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이 땅에 강림하셨다. 성육신의 놀라운 신비!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위대한 지성과 지력을 가지고서라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비밀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비밀이 최근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만세 전부터 만대로부터 감취어져 온 것이었는데, 이제 성도들에게 나타났으며, 이 비밀은 곧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
구원의 경륜에 숨어있는 성육신의 비밀은 만세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만대로부터 감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위대한 비밀의 현시가 이 땅에 나타났다. 요한 계시록 5장 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이 구절에서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의 영어 원문은 “had been slain” 으로, 이것은 과거로부터 계속 죽임을 당해오신 어린 양이라는 뜻이다. 즉, 어린 양 되신 예수님께서 창세, 태초로부터 계속 죽임을 당해오셨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워진 구속의 경륜은 범죄 후에 세워진 고안책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그들을 구원할 대비책을 미리 세워 놓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구 상에 내려가 인간이 되셔서 당신의 생명을 속전으로 내어놓아 인간의 죄를 대신 속하신다는 계획이었다. 이 구속의 경륜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처음으로 창세기 3장 15절에 자세하게 선포되었는데, 곧 하나님 자신이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사탄의 세력을 파하시고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므로 아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시는 성육신의 비밀과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죽임을 당하신다는 구원의 계획은 인간이 범죄하기 전 창세로부터 세워졌다. 그래서 창세로부터 주님께서는 죽임을 당해오신 어린 양이 되신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이 그것이다.
만일, 우리의 모든 지력을 기울여 깊이 연구하며 우리의 온 마음과 정신을 집중시켜 명상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가 있다면, 하늘과 땅과 이 우주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놀라운 일, 곧 하나님 아들께서 성육신 하신 그 신비와 사랑일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주셔서 죄로 죽어가는 인간을 위하여 수치와 능욕의 죽음을 당하게 하셨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생명의 속전을 치르게 하신 것이다. 하늘의 크신 사령관이셨던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늘의 높은 지위를 버리시고, 하늘 왕의 옷과 왕관을 벗어 놓으시고, 그의 신성 위에 인성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인류의 모든 고난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고 고난을 겪으시기 위해 친히 몸을 낮추셨다. 죄로 갈라진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존귀를 받고 부귀와 명예를 누리는 군주가 아니라 종의 형체를 지니시고 사람들을 섬기고 멸시를 받으시는 낮은 계급으로 오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인성의 팔로는 인간을 감싸 안으시고 신성의 팔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보좌를 붙드셔서 둘을 화목하게 하셨다.
그러나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계획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했는지 그 구속의 역사는 신비로 남아 있으며,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생애와 역사를 통해 보인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자비가 그 신비의 이유임을 희미하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튼, 우리는 창세 전에 세워진 놀라운 구속의 경륜 속에 숨어있는 성육신의 신비한 비밀 때문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대속의 죽음과 그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오늘 이렇게 숨 쉬며 살 수 있다. 얼마나 놀라운 구속의 계획인가! 얼마나 큰 은혜와 사랑인가!
2) 대속인가 아니면 모본인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의심하거나 그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중에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구속의 비밀을 푸는 완전한 열쇠를 손에 쥐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단순하게 대속의 문제로만 보아 넘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극히 단적이고 표면적으로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데에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 외에 더 심오한 의미가 숨어있다. 이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이 구속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획득하는 것이며, 이 열쇠를 찾아 획득한 사람만이 진정한 믿음, 곧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죄를 승리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마지막 참백성과 교회를 탄생하게 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마지막 선과 악의 대쟁투를 종결짓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진정한 믿음 말이다.
성육신의 비밀 속에는 대속 외에 매우 중요한 관건이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본이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난 자들의 모본, 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본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 관건은 태초에 시작되었던 하늘의 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써, 이것이 선과 악의 대 쟁투의 원인과 이유가 되었고, 또 이 쟁투에 종결을 매듭짓는 중요한 조건이 되고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하늘과 우주의 평화가 실현될 수 없고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날 수 없으며, 사단의 주장이 기만이라는 사실이 증명될 수 없다. 사탄의 기만적인 주장이 무엇인가? 대쟁투의 초기에 사단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율법은 순종할 수 없는 것이며, 공의가 자비와 조화되지 않으므로 계명을 파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했다. 하나님은 지킬 수 없는 불공평한 법을 만들어 놓고 피조물들을 강요하시는 분이며, 그래서 사람은 율법을 순종할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인 계명을 없애버리려는 사탄의 기만적인 주장을 침묵시키기 위하여, 의심받은 하나님의 공의가 증명되기 위하여 이제 이 우주에 무엇인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죄인의 죄를 속하시는 대속만으로는 넉넉하지 않았다.
세상은 하나님의 법은 지킬 수 있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모본을 요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사탄의 기만적인 주장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고소를 침묵시킬 수 있는 누군가가 이 세상에 있지 않으면 안 되었고, 하늘 법정에 계류된 하나님에 대한 고소가 끝이 나고 선악의 대 쟁투를 종결짓는 일이 생겨나야 했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 인간의 행복을 위한 지침과 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되는 계명을 지킬 때에 인류의 행복이 어떻게 증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줄 누군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곧, 대속 뿐만 아니라 모본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지상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보여주셨다. 율법이 요구하는 의, 즉 의로운 생애, 그리고 완전한 품성을 보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것이다.
제3부_ 우리와 하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와 똑같이 하나가 되시는 것이었다. 곧, 인성을 쓰시되,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취하시는 것이었다.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입으시고 사탄의 유혹과 죄를 승리하시고 완전한 생애를 사시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의 공의로움과 사탄의 주장이 허위였음을 증명하시는 것이었다. 같은 조건과 방법과 수단하에서, 같은 경험과 상황을 겪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그것은 모본이 될 수 없다. 서로 다른 조건에서는 어떤 것의 표본이 탄생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똑같은 조건에서 이 땅에 사시면서 흠 없는 완전한 생애를 사시므로 우리에게 모본이 되신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한 번도 하나님이시기를 그쳐보신 적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모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면만을 생각해 보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 죄를 속하시기 위한 대속의 죽음을 자청하셨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인간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 버리고 취하신 것이 있다. 그것이 곧 성육신의 신비요,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라며 그 측량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금고리가 되는 예수님의 인성 문제를 깊이 연구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겸손과 희생과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그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어떤 육신을 취하셨는가? 무슨 수단을 빌어서 인성의 참여자가 되셨는가?
1) 여자에게서 나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방법으로 인간이 되셨다. 모든 인간의 자녀들이 된 것과 똑같은 수단을 빌어서 되신 것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는 말씀 그대로 되신 것이다(히 2:14 참조). “한 모양으로”라는 말은 “같은 방법으로”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출생하여 혈육에 속한다. 그리스도께서도 같은 방법으로 혈육에 속하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사 9:6)라고 성경은 말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왜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여자에게서 태어난 것은 인간의 속성이 죄를 지은 바로 그곳까지, 즉 하와가 죄를 지은 그 시작점 밑바닥까지 이르러 죄를 뿌리 뽑기 위해서였다.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 자는 “여자의 후손”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가 처음으로 세상에 들어오도록 한 여자에게서 태어났고,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 죄를 지은 남자에게서 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와 이 세상의 죄 사이에, 그리스도와 세상의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속성 사이에 단 한 치의 틈도 없었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나셨다는 것은 구원하시려는 자들이 율법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고, 저주가 되신 것은 구원하려는 자들이 저주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죄가 되신 것은 인간이 “죄 아래 팔린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육신이 되시고 “혈육에 함께” 속하신 것은 구원하려는 자들이 혈육이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얼마나 놀라운 겸양이며 사랑인가!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라는 말씀은 이 상황을 너무나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여기서 잠깐 참고하고 넘어갈 것이 한 가지 있다. 육신의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셨지만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는 사실을 용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을 믿는 데는 진리에 대한 대단한 통찰력과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에게 오실 수 있다는 사실과 자신을 낮추시고 육신이 되신 영광스러운 진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학설이 인간으로부터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로마 천주교회가 창안한 “무염시태설”(immaculate conception)이다. 이것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태어날 때 원죄에 물들지 않고 잉태되었다는 학설로서, 동정녀 마리아는 처음 잉태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은총을 받아 원죄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교리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에 의하면 자연히 ‘원죄 없이 잉태된 동정녀 마리아’, 즉 우리와 다른 몸을 가진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본성을 타고나신 것으로 간주된다. 언뜻 보면 이 교리가 예수님을 더 거룩한 분으로 높이는 듯한 좋은 교리로 보이지만, 실상은 인간과 혈육으로 한 혈통에 속하셔서 우리의 모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변질시키고 성경의 중요한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앞으로 계속되는 기사를 공부하면 그 의미가 더 확실하게 와 닿을 것이다.
2)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시고
히브리 1장과 2장을 심도 있게 연구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모양(본체, 형태)에 대해 특별히 다루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히브리서 2장 16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데, 일반 성경에는 이 구절의 뜻이 번역상 잘못되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진리가 혼돈되어 있으므로 킹 제임스 역과 비교해 보기로 한다.
* 개역 한글 성경: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 킹 제임스 한글 성경: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 킹 제임스 영어 성경: “For verily he took not on him the nature of angels; but he took on him the seed of Abraham.”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실 때 천사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과 같은 본성, 즉 아브라함과 같은 본성을 취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 아브라함의 인성을 입으셨다는 것을 이 구절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의 본성은 어떤 것이었는가? 아브라함의 본성은 아담의 범죄 후의 본성으로서 아담의 타락한 이후 모든 유전의 법칙을 받는 우리와 같은 본성이며,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시므로 범사에 형제가 되신 것이다. 이것은 대표적인 성경 절 빌립보 2장 5-8절에도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는 문장, “likeness of men”에서 “likeness”의 원어는 “Homoiomati”로서, “본질과 똑같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주제를 명백하게 밝혀주는 또 다른 성경 절이 있는데 그것은 로마서 8장 3절이다. 이 구절 외의 어떤 성경 절도 성육신의 이유와 어떤 종류의 육신으로 성육신이 이루어졌느냐에 관해 더 훌륭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여기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에서 사용된 “likeness”도 “안과 겉이 본질상 똑같은”이라는 원어의 의미가 있다. 또한, 그다음에 나오는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 속에 있는 죄를 멸하셨다”는 뜻인데, “condemned sin in the flesh”에서 “condemn”는 “폐기처분하다”, “멸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 가운데서 죄 없는 생애를 사심으로 실제로 육신 속에 있는 죄를 멸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빌립보 2장 7절과 마찬가지로 이 성경 절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인간의 모양만 취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죄 있는 육체(Sarkos hamartias)와 같은 본성을 취하셨음을 명백히 시사하고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이 성경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시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우리 인간이다. 이렇게 거룩하신 아들 하나님인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한 혈통이 되시고 한형제가 되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만일 하늘의 휘황찬란한 영광과 능력을 갖추고 그대로 오셨다면 우리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그 놀라운 영광을 가리시고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인성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범하지 아니하던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무한한 치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와 같이 유전법칙의 영향으로 생기는 결과를 받으셨다. 그러나 죄는 없으셨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같은 위치를 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신 비천한 분으로 봉사하시며 치욕스러운 죽음을 죽으신 그 희생과 겸손과 사랑을 보라! 그 앞에 우리의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 않는가!
제4부_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왜 중요한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쓰셨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그 사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1) 예수님의 인성과 마지막 백성과의 함수관계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가르침은 오랫동안 사탄의 공격 목표가 되어 왔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가르침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세 천사의 복음”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로 마지막 백성이 준비되며, 그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 완비된다. 만일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같은 인성을 가지고 죄를 승리하신 예수님처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음으로 그것을 믿고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일 때에 예수님의 성품,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계 14:7) 성품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예수 믿음”(계 14:12)을 가진 성도들이 생기게 되고, 결국 그 믿음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인을 받는 성품을 준비하게 하고, 그리하여 마지막 하나님의 참 백성인 십사만 사천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바른 진리가 가르쳐질 때에 마지막 백성들을 준비시킬 마지막 현대진리가 탄생되어 전해질 것을 알기 때문에, 사탄은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 기사에서 더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렵고 혼돈되는 교리로 인식되고 있으며, 많은 그리스도인이 별로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주제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꼭 알아야 할 중대한 주제로서,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가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다시 한 번 설명하자면,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인성은 타락한 우리 인간의 본성과는 다른,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의 본성, 곧 천사 같은 본성을 취하셨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우리도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성화의 가르침을 거절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다르므로 그분께서는 죄를 승리하실 수 있어도 우리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같은, 즉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승리하셨으므로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는 성화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고, 또한 그러한 가르침에 일치하는 생애, 곧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참고로, 죄의 본성이란 죄로 기울어지는 연약성이지 죄의 본성 자체가 죄가 아님을 주지하자. 사실 죄된 본성이란 단어가 좀 거룩하지 않게 들리지만, 그 말의 뜻은 실제로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유전법칙을 통하여 타고나는 육신적, 정신적, 도덕적 연약성들(inherent propensities)을 가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는 “악한 성향”(evil propensity), 곧 죄를 많이 지어본 경험에서 후천적으로 배양된 “악한 성향”이 없으셨다. 그러나 선천적인 경향을 유전적으로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지어 본 일이 없으셨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나 한 가지, 예수님께서 잉태되실 때부터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시고 출생하셨다. 주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거듭나신 분으로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본이 되시는 것이지 거듭난 경험이 없는 모든 사람의 표준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타락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본으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우리는 모본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할 수 있다.
2)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
인성을 쓰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모든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것은 인류에 대한 크고 위대한 사랑과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사명감이 아니었을까?
예수님께서 지상에 사실 때에 당하신 유혹과 시험은 말처럼 단순하거나 쉬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이 느끼시고 고민하시며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다(히 4:15). 그리고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해보셨기 때문에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지를 알고 계신다(히 2:18).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대항하실 때 우리와는 다른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여 이기신 것이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과 기도로 이기신 것이다. 성경은 인성을 쓰신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과 고난을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고 표현하고 있으며(벧전 4:1), 육체로 계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 자주 눈물과 통곡의 기도로 간구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님께서 사신 순간순간은 평탄한 시간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추방당한 사탄은 하늘 궁정에서 그가 질투하였던 하나님의 아들을 이기려고 필사적으로 투쟁하였고, 하나님의 아들을 발걸음마다 공격하였다. 특히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후 시험받으러 광야로 나가셨을 때는 그분이 40일을 금식하신 후 육신적으로 가장 약해지신 때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마련된 희생제물로서의 고난과 희생의 길 대신에, 안일하게 사명을 이루라고 유혹하며, 자신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보장할 것이니 쉬운 길, 인정받는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사탄의 시험은 연약해진 예수님의 인성과 육신이 당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의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사탄의 기만은 매우 유혹적이었다. 그 순간은 인간의 운명과 구속에 사활이 걸렸던 무서운 시험의 순간이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실패하신다면 인간의 구원은 수포로 돌아가고 세상에는 영원한 사망의 선고가 내려질 것이었다. 만약 그분이 그 시험과 시련에 실패하였더라면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치 않으셨을 것이며, 세계는 잃어버림을 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하나님을 강하게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 시험을 이기셨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를 꼭 붙잡았다. 그는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유혹을 저항하였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인성을 쓰시고 첫 아담이 실패한 시험과 시련을 견디셨다. 그 시험이 얼마나 심하고 맹렬한 것이었던지 기진맥진하여 쓰러진 예수님을 천사가 수종 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3) 항복할 가능성이 없다면 유혹이 아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과 같은 성정을 갖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의 모본이 될 수가 없다. 만약 그분이 우리의 성정에 참여하신 분이 아니라면 그는 사람이 유혹받는 것같이 유혹을 받으실 수가 없다. 만약 그분이 유혹에 굴복하는 일이 불가능하였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조력자가 되실 수도 없다. 만약 항복할 가능성이 없다면 유혹은 유혹이 아니다. 인간은 나쁜 행동을 하거나 죄를 지으라는 강력한 유혹과 영향을 받을 때 그 유혹에 맞서 고민하고 저항하게 된다. 유혹을 수락하고 나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굳게 붙들고 저항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통과하신 괴로운 체험이었다. 만약 그분이 실패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셨더라면 그는 인간이 시험당하는 것같이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주께서 당한 유혹은 무시무시한 현실이었다. 그분도 아담처럼, 그리고 모든 사람처럼 시험대 위에 올려진 자유 행위자였다! 그분은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할 자유의지를 가진 자유 행위자로서 시험대 위에 놓여 있었다. 만약 타락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더라면 그분은 인간 가족들이 시험을 당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있던 그의 마지막 몇 시간 동안 그분은 인간이 죄를 대항해서 싸울 때 경험해야 할 것을 더는 경험할 수 없으리만큼 충분히 경험하셨다. 그분은 인간이 죄에 굴복함으로써 얼마나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실제로 느끼셨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그 끔찍스러운 결과를 실감하셨다. 왜냐하면, 온 세상의 죄가 그분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하여 싸우러 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엄숙한 사실이다. 그분이 당한 유혹과 승리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그 모본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가운데 주님의 능력으로 유혹과 시험을 대항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예수님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기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능력을 굳게 붙잡을 때 꼭 같은 도움을 얻지 못할 남녀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유혹과 시련 중에서 하늘의 도움을 구하지 못할 사람은 땅 위에 단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다. 인간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승리하게 하도록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분의 모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제5부_ 예수의 인성에 대한 사탄의 공격
예수님의 인성이 이렇게 중요하므로 이 가르침을 변질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은 맹렬하였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당시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초기에 교부들이 바르게 믿고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왜 변질되고 왜곡되었는가?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본성이라는 가르침이 전멸되었는가?
처음에 제자들이나 그리스도교회에 던져지는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무엇이었느냐?”라는 것보다 “그가 누구인가?”였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했던 대답, 곧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대답은 이제 온 세상으로부터 들려지게 되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했던 메시아, 곧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탄은 인간적인 철학과 속임수로 하나님 아들의 인성을 공격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1) 첫 번째 사탄의 공격 – 영지주의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한 사탄의 도전 중 가장 강도 높은 것이 영지주의(Gnosticism) 이론의 제창이었다.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하고 믿었다. 사도 요한이 살아 있었을 당시에 벌써 발생했고, 그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했을 만큼 위험하고 교묘했던 영지주의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증인들이 점점 사라지고 주후 100년에서 200년 사이,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터툴리안 등 신실한 교부들이 교회를 지키던 때에 “발렌티누스”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을 한 학설이었다. 요한의 경고를 먼저 들어보자.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이 성경 절 뿐 아니라, 골로새서 2장 8절에도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골 2:18-20, 딤전 1:1-7, 딤후 2:16, 벧후 2:1 등에도 이에 대한 주의가 기록되어 있다.
영지주의는 이원론을 주장하며 신비하고 비밀적인 지식, ‘영지’(gnosis)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학설이었다. 이것은 헬라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존재하는데, 선한 신은 정신세계를, 악한 신은 물질 세계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영과 정신은 선하고 육과 물질은 악하다는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을 물질을 만든 저급한 신으로 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만을 강조하였다. 선한 그리스도의 영이 악한 인간의 육을 입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꺼렸으므로, 그리스도가 입은 육신은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실제로 인간의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육신을 영의 감옥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영을 가두고 있는 육을 제어하고 영을 육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으로 과도한 금욕주의나 쾌락주의를 적용하였다. 그들은 “가현설”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은 말씀이 실제로 육신이 되신 것이 아니라, 유령 같은 존재로 나타나 환영처럼 보였다가 사라진 것이며, 그러므로 십자가 상에서도 실제적인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초기의 신실한 교부들이 초긴장하며 영지주의를 대응했던 이유는 대부분의 영지주의자가 기독교인임을 고백하면서도 초대교회의 정통 그리스도교와는 너무도 다른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만을 주장하던 영지주의는 이설로 간주되어 퇴치되었지만, 338년경 이단으로 정식으로 규정되기 전까지 발렌티누스의 후예들에 의해 활발히 전해졌으며, 그 잔재는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만을 강조하는 현대 기독교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남아있다.
2) 사탄의 두 번째 공격 – 아리안주의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하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혼란시켰던 영지주의를 이어 다른 이설의 가르침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아리우스”(Arius, 250-336)에 의해 창설된 ‘아리안주의”였다. 아리안주의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을 강조하였다. 아리우스(Arius)는 256년 이집트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로서, 그는 그리스도는 인간일 뿐이라고 가르쳤던 안디옥의 루키안(Lucian)에게서 수학했다. 루키안은 후에 자신의 주장을 뒤집었지만, 루키안은 아리우스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아리우스와 4세기의 거의 모든 아리우스주의자가 그에게서 배웠기 때문이었다. 아리우스는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한 가르침을 통해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신플라톤주의는 신성의 절대적 단일성만이 최고의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 한 분만의 유일성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아리우스는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일본질”임을 부인하고, 다만 비슷한 “유사본질”이라고 믿었다. 니케아종교회의 325년에 이단으로 정죄 되었지만, 그 사상이 널리 남아 기독교의 가르침을 혼란시키고 있는데, 현재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교파가 존재하므로 그 잔재가 남아서 활동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여서 사탄의 공격을 많이 받았다. 이 가르침은 신성을 부정하는 에비안주의, 아리안주의로 약해졌고, 인성을 부정하는 영지주의, 말시온 주의, 아폴리나리우스로 혼란하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수차례의 종교회의 통과하게 되었고, 마침내 680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거쳐 기독교는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셨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많은 혼란된 가르침으로 인해 기독교는 골치를 앓게 되었고, 이것을 논하는 자체를 혼란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하여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가르침에 혼동이 오도록 만든 사탄의 계략은 성공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기독교는 두 본성을 믿게 되었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인성을 취하셨는가 하는 명확한 가르침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원죄설을 기본으로 하는 천주교는 “무염시태설”을 만들어 죄 없는 육신, 우리와는 전혀 다른 육신과 인성을 타고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게 되었고, 현재 기독교에는 그 가르침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명중한 사탄의 공격과 현대에 일어난 신신학의 봉기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진리는 완전히 훼파되었고, 그러므로 “대속”은 있지만 “모본”이라는 진리는 훼손되고 말았다.
** 예수님의 올바른 인성을 지지한 근대의 신학자들
그 모든 헛된 이론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켜 완전한 복음을 믿고 선과 악의 대쟁투에서 큰 역할을 담당할 마지막 백성을 준비시킬 마지막 현대진리의 탄생을 막는 사탄의 공격과 계략이었다. 여러 세기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입으셨던 인성이 아담의 타락 후의 인성과 같다고 믿는 것은 이설로 간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칼 발트(karl Bart), 에밀 부르너(Emil Brinner), 루돌프 볼트만(Rudolf Bultmann),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로빈슨(J.A.T. Robinson) 및 20세기 후반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진리를 올바로 주장했는데, 곧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같은, 아담의 타락 후의 본성을 입으셨다는 교리를 지지했다. 칼 발트는 저 유명한 <로마서 주석>의 저자로서 1934년에 출판된 기사를 통해 이 교리를 지지한 발언을 한 첫 번째 사람이었으며, 앞에 언급한 신학자들은 각각 자신의 저서와 기사를 통해 이를 증명하였다.
** 사벨리우스주의 - 성령은 기운이다?
여기서 잠깐 참고로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삼위일체설을 부인하고 성령을 인격을 가지신 분이 아닌 그냥 ‘기운’과 ‘힘’(force)으로 주장하는 사벨리우스주의는 3세기에 사벨리우스가 주창한 사상으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의 하나님을 한 하나님으로 보며, 그 한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각각 다르게 현현하셨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하나님으로, 그다음에는 성자로, 그다음에는 성령으로 나타났다는 “양태설”을 주장한다. 후에 성부와 성자, 성령을 동일 본질로 보지 않으며 피조물로 보는 이설로 변질하여 내려왔다.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사탄의 공격으로 나타난 이설들은 이 진리를 땅에 파묻어 하나님의 마지막 백성이 준비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명료하고 정확한 진리를 알게 됨이 얼마나 큰 특권이며, 이것은 얼마나 소중한 진리의 유산인가! 이 진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우리의 의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어깨가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 마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본되심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진리는 세 천사의 복음에 가장 중요한 골자가 되는 중심 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올바로 터득하고 경험하는 사람들만이 마지막 여자의 남은 무리로 준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승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인을 받는 마지막 백성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살과 피와 인성, 곧 죄의 연약성을 가진 똑같은 육신을 쓰셨지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의 능력으로 "육신에 죄를 정하"셨고 죄를 파쇄하셨습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고 우리의 승리가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 “새 영과 새 마음”을 받은 새 언약에 들어간 사람, 율법이 마음에 기록되는 거듭난 경험을 한 사람은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죄를 승리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은혜가(도)…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롬 5:21)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이런 경이로운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수많은 제자 안에서 재현되고 체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그리하여 어린 양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가 우리들의 생애에서도 재현되고,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을 변호하고 옹호하는 증인들이 탄생하게 되어 이 세상의 역사가 마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소망의 중심,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정복하신 것처럼 죄와 세상과 자신을 정복할 수 있다는 진리, 또한 그것이 가능하도록 능력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그것을 믿는 ‘예수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이렇게 귀한 현대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예수님의 인성을 함께 공부하고 나서, 이 귀한 진리가 우리 생애에서 이루어지고, 그분의 모본이 우리 성품과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세계 동향 Top News
1. 에볼라 바이러스 – 서아프리카에서 세계로 확산되는 공포
감염 1주일 내 치사율이 50~90%에 달해 ‘죽음의 바이러스로’ 불리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지난 2013년 12월 기니에서 보고된 이후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나이지리아 등 서아프리카 국가들로 확산됐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8월 20일 현재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가 1,427명, 감염자는 2,615명이다.
현재 서아프리카 국가 정부들은 에볼라 감염자가 많은 도시에 에볼라 격리센터를 설치하여 전염을 막고 있지만, 지난 8월 24일 중부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에 처음으로 에볼라 바이러스 환자 2명이 사망하는 등 바이러스의 확산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각국 정부들은 에볼라 바이러스 의심지역에서 입국하는 사람들을 추적하는 등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2. 세계 곳곳의 극심한 가뭄과 농산물 가격 상승
세계 최대 올리브 생산국 스페인이 역대 최악의 가뭄을 겪으면서 올리브 생산량이 지난해보다 40% 감소할 전망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가 지난 8월 17일 보도했다.
브라질은 84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게 되어 900만에 달하는 상파울루 주민들에게 수도가 공급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인 동북 지역은 53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 들었다. 이 가뭄으로 중국의 농산물 수확 감소와 이어지는 국제 곡물 시장의 농산물 가격 상승이 전망된다.
중미의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은 심각한 가뭄으로 식량 안보에 큰 위협을 받고 있다. 특히 1976년 이후 가장 심한 가뭄을 겪고 있는 니카라과에서는 옥수수나 대두 가격이 지난 5월 이후 4배나 뛴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캘리포니아는 지난 3년간 계속되는 가뭄으로 현재 주 면적의 58%가 최상위 가뭄 수준인 비정상적(Exceptional) 가뭄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가뭄으로 농사를 못 짓는 캘리포니아 농지가 40만 에이커(약 16만ha)에 달하기 때문에 농산물값도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세계 곳곳의 가뭄이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며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앞으로도 계속 심화될 전망이라는 것이다.
3. 미국의 IS 공습과 IS의 미국인 인질 처형
지난 8월 9일 미군은 이라크 반군인 IS(이슬람 국가)의 거점을 공습하며 2년 반 만에 이라크에서 전투행위를 했다.
미국의 공습에 대해 IS는 지난 9일 SNS인 트위터에 미국 본토 테러를 암시하는 글을 올렸으며, 20일 SNS에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라는 제목의 영상을 공개했다. 해당 영상은 억류하고 있던 미국인 기자를 참수하며 미국이 지금의 대(對) 이라크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또 다른 미국인 기자를 살해하겠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오바마는 IS와 맞서 싸우겠다며 강력한 대응 의지를 밝혔다. 이런 의지를 반영하듯 미군은 21일 이라크 모술댐 근처 IS 반군에 14차례 추가 공습을 단행했다.
4. 미국 미주리주 비상사태 : 흑인 총격사건과 폭동
미국 미주리 주의 퍼거슨시에서 지난 8월 9일 마이클 브라운(18)이라는 흑인 소년이 경찰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무장, 무저항 상태로 경찰의 총탄을 여섯 발이나 맞고 사망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연일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고, 지난 8월 16일 미주리 주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 일대 야간 통금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이 조치로도 항의 시위를 멈추는 데 실패하자 미주리 주 정부는 18일 새벽 주 방위군까지 투입했다.
퍼거슨 사태는 경제적으로 소외된 흑인들의 불만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주었으며, 이런 항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군대식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5. 교황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과 교황의 인기
교황 프란치스코가 지난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간 한국을 방문하여 시복식, 아시아 청년대회 미사, 꽃동네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교황의 인기는 대단했다. 교황 취재 신청 기자는 2,850명이었으며 그들에 의해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되었다. 가장 큰 행사였던 광화문 시복식 참가자는 교황청 추산 80만 명이었으며 무려 300만 가구에서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시청했다.
세상은 물론 성경의 진리로 분별해야 할 대부분 개신교인들까지도 교황을 좋아하고 따르는 모습을 보며 마지막 성경 예언의 성취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된다.
위대한 신앙인들_ 창조과학의 아버지 헨리 모리스
1859년에 찰스 다윈에 의해 발표된 '종(種)의 기원'을 통해 ‘진화론(進化論)’은 세계학문 전반의 지축을 뒤흔들면서 신앙과 신학에 대한 사상 최대의 타격을 가했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조차도 성경을 회의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이 배경 속에서 ‘자유주의(自由主義) 신학’이 등장하였다. 이런 신학적 사조는 여러 형태의 신(新) 신학으로 발전되면서 복음과 정통신학에 큰 도전을 주었으며, 결국 유럽을 중심으로 한 신학계는 자유주의 신학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고 영국과 독일의 교회들은 인본주의, 진화론, 자유신학의 영향으로 날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1925년 그 유명한 스콥스 재판(Scopes trial) 이후로는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로 공인되어가고, 모세의 창세기를 포함한 오경은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신화 정도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창조론을 주장하고 있는 책은 극히 드물었다. 교과서들은 진화론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당해 버렸고, 과학에 의해서 협박당하고 있던 대부분의 교회는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을 회피했다. 자유주의 교회들은 오래전부터 진화론으로 완전히 물들어 있었고, 성경을 믿는 많은 교회도 수십억 년의 오래된 연대와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에 굴복 되어 있었다. 과학이 오래된 연대를 사실로서 입증했다고 생각하고, 그 당시 믿는 과학자들의 모임이었던 ASA(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마저도 진화론 일색의 색채로 바뀌게 되었고, 신학자들은 진화론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간격이론(gap theory) 및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과 점진론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 등 타협이론들을 정론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인본주의적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의 위세에 눌려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던 보수 복음주의에 숨통을 터 준 사람이 헨리 모리스이다. 그는 모든 과학자들이 참 과학에 반하여 거꾸로 가고 있을 때, 즉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고 성경은 틀렸다고 말할 때, 굽힘 없이 과학을 통하여 성경의 기록이 사실인 것을 이 세상에 증거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의 책 ‘성경과 현대과학(The Bible and Modern Science)’은 이러한 것을 바꾸기 시작했고 헨리 모리스 박사와 존 휘트콤 박사가 1961년에 함께 저술한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 라는 책을 통하여 잠자고 있던 교회를 흔들어 깨웠다. 또 대학을 졸업한 새로운 세대의 크리스천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많은 사람은 그 책의 출간이 현대 창조과학 운동(modern creationist movement)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 책은 오래된 연대에 반대되는 증거들과 한 번의 전 지구적인 대홍수 격변을 찬성하는 과학적인 명백한 증거들을 제공했다. 모리스와 휘트콤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전 세계적인 홍수 기록과 일치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화석기록과 지질학적 지층들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라, 진화론자들이 진화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과학적인 증거들이 대홍수를 동반한 격변설적 개념으로 해석할 때 더 합리적으로 해석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 자유주의 및 복음의 세속화에 의분을 느낀 헨리 모리스 박사는 계속해서 1967년, 창세기와 노아 홍수를 계시된 말씀 그대로 믿는 창조과학자들의 모임인 CRS(Creation Research Society)를 진수시키고, 1970년, 버클리 대학의 생화학자였던 듀안 기쉬 박사와 함께 창조과학연구소 ICR(Institute of Creation Research)을 설립하여 창조과학의 기반을 닦으며, 미국 전역의 대학교에서 진화론과의 대 접전을 벌였다. 창조과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확신과 공인된 과학적 지식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라 세계적으로 ‘진화보다는 창조가 더욱 과학적이다’라는 사실을 알렸다. (한국의 창조과학회는 1981년 출범). 이러한 창조과학자들의 활약은 결국 오하이오 주를 시작으로 하여 미국의 많은 주(州)에서 과학 교과 과정에 ‘창조론’을 포함하는 성과를 이루게 된다. 문자적 성경 해석과 기독교관을 견고히 하며, 진화론적 과학과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는 성경적 창조론, 과학적 창조론, 젊은 지구 창조론(young-earth creationism)을 지지하는 수천의 주석을 포함하는 'the New Defenders Study Bible' 등 60여 편의 그의 책들은 일반 독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 후 새로운 일단의 창조과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BSA(Bible-Science Association)와 CRS(Creation Research Society) 같은 새로운 기구들이 조직됐고, 창조과학 운동을 지지하는 무수한 클럽과 단체들이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며 성장하게 되었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됐던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모세이며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랐던 한 사람에 의해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늘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다. 그의 개인적인 인내심, 근면성, 성결함, 그리고 그의 책들에서 볼 수 있는 지혜로움은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그들을 강하고 용기 있게 만들어서, 진정한 과학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들이 안주하고 있던 땅들을 떠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루터를 들어 쓰셔서 타락으로 치닫던 중세 카톨릭 교회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켜 참 신앙과 말씀으로 돌이키셨듯이, 후대에 헨리 모리스 박사를 지명하여 부르셔서, 인본주의적 진화론과 성서비평학의 영향으로 자유주의로 떠내려가던 미국의 기독교에 다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으려 하는 근본주의 및 보수 복음주의의 새 물결을 일으키셨다.
진리 탐구_ 다시 생각해보는 출애굽 역사 2
속죄 제사의 은혜에 들어간 “이방 민족”
하나님의 구원은 세대나 민족의 구분 없이 동일한 역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세대주의”7년 환란 속에 등장하는 유대인만의 구원이라든가, 특정 소속 교단의 구원이라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출애굽 당시에 이방 민족도 가나안 여정의 길에 속해 있었으며 그 여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계명과 규례가 동일하게 적용되었다는 것은 7년 환란을 진리로 믿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깊이 연구해야 할 주제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48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에 대한 은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할례”를 준수함으로써 유월절 율례에 참여하게 됨을 허락하셨습니다.
“할례”를 준수하게 되면 이방 민족도 이스라엘인들과 같이 유월절을 지킬 수 있는 백성의 자격을 갖추게 될 것임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고, 그 동일한 법을 준수한 사람들 즉 유대 민족과 이방 민족으로 이루어진 그들을 모두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온 이스라엘 자손”이라 칭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로마서 11장 26절에 나오는 “온 이스라엘”이라는 말씀과 연결이 되는 의미입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 온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대로 행하였으며 그 같은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출 12:48-5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출애굽 한 이방 민족들을 위하여 매우 세심한 사랑과 마음을 쓰신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죄 사함을 얻는 속죄제사의 율법의 약속이 이방 민족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즉 성소 제도가 유대인들만 위한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누구나 속죄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든 율례를 지킬 의무 또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 제사와 율례의 의무를 이방 민족들에게도 허락하신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오해하고 있는 7년 환란을 주장하는 사람들에는 빛이 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제사나 율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약속으로 알고 있겠지만, 이방 민족들에게도 그 언약의 약속을 이미 출애굽 당시부터 모두 허락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타국인을 학대하지 말고(레 19:33), 타국인이나 본토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유월절 율례 (민 9:14), 그릇 살인한 경우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게 할 것(민 35:14) 송사가 있더라도 공정하게 판결하며(신 1:16) 등 타국인에 대한 하나님의 세심함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5장은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한 속죄 제사의 내용인데 26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과 그들 중 우거하는 “타국인”으로 두 분류의 민족이 속죄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얻을 것을 말씀하시는데 그 죄 사함을 얻을 이유는 “온 백성”이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과 그들 중 우거하는 타국인을 포함하여 “온 백성”으로 지칭하신 점입니다.“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면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니 이는 그릇 범죄함이며 또 그 그릇 범죄함을 인하여 예물 곧 화제와 속죄제를 여호와께 드렸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도 사함을 얻을 것은 온 백성이 그릇 범죄하였음이니라 ”(민 15:25,26)
7년 환란의 기간에 유대인들이나 특정 교단의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아직도 진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에 대해 한때는 바리새인이었으며 민족적 선민사상과 구원의 우월주의에 가득 차 있었으며 이방인을 “부정한 자”로 여겼던 사도 바울께서 이렇게 큰소리로 외치고 계십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어떠한 교훈을 주시며 귀에는 어떻게 들리십니까?
기독교회사 Episode_ 교황의 방한과 임진왜란의 배후 예수회
1547년 7월, 일본 큐슈에 상륙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예수회 창설 6인 중 1명)의 전도를 받고 로마 카톨릭교를 허용한 일본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 그의 후계자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며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교황 로마 카톨릭교가 처음 우리나라 땅을 찾은 것은 치밀한 조직력을 갖춘 사탄의 검은 군대 예수회 수사들로 이루어진 침략자로서였다. 임진왜란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카톨릭 신도들로 조직된 그리스도단이라는 군단을 이끌었으며, 그 침략군단은 십자가가 새겨진 깃발을 앞세우고, 세스페데스가 이끄는 예수회 소속 사제들이 검은 사제복과 로만컬러를 하고 뒤따랐다. 이 사제들은 조선 사람을 잔혹하게 살육한 자들의 고해성사를 받고 성수를 뿌리며 조선 침략 행렬에 가담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이 2차 전쟁에서 함락되면서 6만 명의 민간인들이 이 무자비한 일본 십자군들에 의해 창고에 갇혀서 화형을 당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인 5만 명이 사로잡혀 노예가 되어 팔려갔고, 그들 중 7000명의 카톨릭 개종자들이 일본에서 나왔다. 아마도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더라면 현재 한국의 국교는 온갖 미신이 뒤섞인 바벨론 종교 로마 카톨릭교가 되었을지 모른다.
교황 로마 카톨릭의 아시아 선교의 첫발은 예수회 창설 멤버 중 한 사람으로 스페인 귀족 출신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내디뎠다. 그는 총포를 선물하며 인도와 일본 포교에 평생을 바쳐 포교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며 카톨릭의 성인 반열에 올랐다. 하비에르라는 이름을 가진 성당은 스페인은 물론 일본과 동양 포교의 전진기지였던 말레이시아 말라카, 중국의 상하이와 마카오에도 세워졌다. 한국에는 1963년 충북 수안보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이 지어졌다. 아시아의 한국에 첫발을 디딘 예수회 사제 프란치스코 교황의 즉위명도 하비에르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비에르가 죽은 해 태어난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선교는 이른바 문화 적응(cultural accommodation) 방식이었다. 서양의 진보된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대가로 선교의 편의를 얻어내려 했다. 마테오 리치의 후임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은 중국 연경의 남 천주교당에 머물며 병자호란 이후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물론 사행길의 실학자들과 교류했다.
예수회는 한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모교 서강대학교를 세웠다. 예수회 사제로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가 대한민국의 중심이며,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 광화문 광장에서 1백만 명이 운집하여 모든 언론과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톨릭 종교를 신봉하다 죽임을 당한 자들에 대한 시복 미사를 거행한 것은, 임진왜란 때 카톨릭 군대가 점령을 실패한 보복임과 동시에, 권력자들을 개종시켜 그들의 힘으로 한국인들을 교황의 종교 로마 카톨릭교로 전향하게 하려는 예수회식 선교전략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한민국 정권의 지원을 받으며 종교행사를 한 광화문 대로는 차량이 오가고 시민들이 다니는 곳으로, 2002년 월드컵 당시 시민들이 응원을 위해 사용했지만, 종교적·정치적 행사에 사용된 적은 없는 집회하는 장소가 아니다. 이 대한민국의 중심 대로의 차량 통행을 막고, 전철 출입구 폐쇄와 공항을 방불하는 출입 검열을 하며,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행한 시복 미사는 그동안 교황 프란치스코가 보여주길 좋아하는 청빈과 섬김의 쇼맨십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한국의 중심으로서의 상징성을 가진 장소에서 한국 정치권의 환대와 함께 전 세계의 이목과 찬사를 받으며 왕들 중의 왕으로 자처하는 교황권에 대하며 성경은
“모든 민족이 그녀의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에 취하였고 땅의 왕들이 그녀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또한 땅의 상인들도 그녀의 사치의 능력으로 인하여 치부하였”(계18:3)다고 예언하고 있다.
Healing Story_ 커피
한 초등학교 게시판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었습니다. 카페인이 들어있는 커피, 초콜릿, 콜라는 성장하는 어린이들에게 좋지 않으므로 물을 자주 마시라는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 교직원들의 아침은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되며 찾아오시는 손님들에게도 커피를 대접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한 손엔 스마트폰, 한 손엔 커피 잔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커피는 이미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듯합니다. 오늘은 커피가 우리 몸 곳곳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보시면서 과연 커피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독이 되는지 직접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커피의 주성분은 카페인입니다. 카페인(Caffeine)은 화학물질 중 하나이며 그 족보는 이러합니다. 카페인의 아버지 되는 물질은 메틸잔틴(methylxanthine)이고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은 알칼로이드(alkaloid)입니다. 카페인이 함유된 것은 홍차, 커피, 초콜릿 등이 있고 그 원료로서 코코아넛, 코코아빈, 마테(mate)라는 것이 있습니다.
홍차, 커피 <카페인 <메틸잔틴
그럼 메틸잔틴은 어떤 성질을 갖고 있을까요? 한마디로 대단히 난폭합니다. 세포의 원형질을 바꾸는 일을 하는데, 그냥 세포에 붙어있기도 하고 세포 안에 들어가서 농축되어 있기도 합니다. 문제는 메틸잔틴이 한 번 우리 몸에 들어오면 언제 그것이 비활성화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일생 우리 몸에 있다고도 합니다.
카페인은 어떨까요? 카페인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아주 즉각적으로 흡수되어 혈액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우리 몸의 간과 신장은 큰일이 생겼다고 판단하여 빨리 해독을 시키고 처리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4시간이 지나면 흡수된 카페인의 50%가 요산으로 분해됩니다. 이것을 반감기(half-lif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요산은 무엇입니까? 잘 아시다시피 통풍과 관절염을 일으키는 물질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의사에게 가서 검사를 해보면 요산 수치가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진을 내리게 됩니다. 커피가 요산이 되었지만 요산 수치가 정확히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커피에 있는 뭔가가 우리 몸이 제대로 알아내어 처리할 수 없게끔 속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뇌에 카페인이 들어갈 때는 어떤지 아십니까? 뇌에는 혈액뇌장벽(BBB:blood brain barrier)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름 그대로 혈액과 뇌를 둘러싼 액체 사이에 있는 장벽을 말하는데 혈액 내의 약물, 색소, 독성물질 등 이물질이 직접 뇌세포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는 경비원입니다. 그런데 카페인은 이 경비원을 무시하고 바로 통과합니다. 그럼 뇌에서 무슨 일을 할까요? 대표적으로 전두엽을 손상시킵니다. 전두엽은 뇌 전체의 1/3 정도를 차지하며 사람의 도덕심, 양심, 의지, 지적인 능력이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또한, 뇌에서는 무선 전신을 하듯이 뇌신경 세포들이 서로 교제를 통하여 정보를 전달합니다. 한쪽은 주먹같이 생겼고 또 한쪽은 뿌리같이 생긴 것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있는데 그 중간에 정보를 전달해 주는 신경전달물질(뉴로트랜스미터:neurotransmitter)이 있습니다. 신경전달물질의 종류는 수십 가지이며 우리가 흔히 듣는 아세틸콜린, 도파민, 아드레날린, 히스타민도 이 신경전달물질에 속합니다. 이것이 필요한 만큼 적당히 분비되어야 뇌 기능이 정상적으로 일하게 되고 우리 몸과 정신이 건강하게 유지됩니다. 그런데 카페인은 신경전달물질 중에서 선택적으로 아세틸콜린만 폭발적으로 많이 분비시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스트레스가 있을 때 분비되는 노르에피네피린은 75%를 증가시키며, 부신피질에서는 에피네프린을 200% 이상 증가시킵니다. 스트레스도 전혀 없이 단지 커피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 말입니다. 콩팥에서는 레닌이라는 호르몬 분비를 50% 증진시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맥박은 롤러스케이트를 탈 때처럼 빨라지고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는 올라갑니다. 그런데 좋은 콜레스테롤은 낮춰주고 LDL이라는 나쁜 콜레스테롤을 높여줌으로 동맥경화증에 의한 중풍과 심장마비 등 온갖 합병증이 따르도록 하니 알면 알수록 카페인은 예쁘게 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염색체(크로모좀:chromosome)를 마치 레이저로 삭삭 잘라내듯이 잘라내고 RNA, DNA를 돌연변이 시킴으로 암을 유발할 수 있는 세포 상태를 만들어 줍니다. 많은 학자들이 발표한 것에 의하면 카페인은 신장암, 유방암, 결장암, 췌장암, 난소암, 방광암 등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세포 안에는 난로 같은 미토콘드리아가 있는데 거기에 당이 들어가고 산소가 들어가면 열을 내는데, 그것이 세포에 필요한 대부분의 세포 에너지인 아데노신삼인산(ATP)입니다. 이것도 우리 몸에 힘을 내는 물질입니다. 이 ATP가 보통은 공장에서 시간마다 0.5mg 분비됩니다. 그런데 커피를 마시면 그 분비가 12배나 많아집니다. 그러니까 커피를 마시면 피곤하지도 않고 생각이 빨라지며 행동이 민첩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4시간이 지나면 어떻습니까? 권태와 짜증, 피곤이 밀려옵니다. 심하면 좌절감과 우울증, 정서장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카페인의 효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다시 커피를 찾습니다. 카페인의 슈퍼맨 같은 효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점점 카페인의 노예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정상적으로 신진대사를 하며,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 잘 운영되던 몸이 카페인이 들어옴으로 엉망진창이 된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카페인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지식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커피를 마시지 말아야겠다, 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성이 돈독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금방 결심이 무너지려고 하지요? 이렇게 우리의 의지는 썩은 새끼줄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그 연약한 의지를 예수님께 딱 맡기십시요.
"주님, 내가 커피를 끊기로 했습니다. 카페인이 해로운 것을 알았습니다. 나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십시요."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고 날마다 결심을 새롭게 하십시요.
음식을 아주 단순하게 하시고 자극성 음식이나 설탕이 많이 들어간 것을 삼가십시요.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거나 얼음물 수건으로 전신마사지를 해주시면 커피 마신 것보다 더 깨끗하게 잠이 깨일 것입니다. 그리고 뭣보다 저녁에 일찍 주무시고 제시간에 일어나십시요.
커피를 끊으므로 오는 금단 증상 중에 가장 힘든 것이 두통입니다. 그런 경우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도움 됩니다. 초조 불안 증세가 있을 때는 캐트닙(catnip)차를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아주 심하신 분은 커피 한 잔을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시고 1ts을 드십시요. 그래도 증세가 좋아지지 않으면, 30분마다 1ts을 드십시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잃어버리게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자세한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은 sostv.net의 라이프 토크로 메일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1
신앙 칼럼_ 우상숭배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로새서 3장 5절)
우상숭배란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형체를 모르는 신들의 상을 세워 놓고 그것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의 내용입니다. 즉, 나무나 돌, 뼈 등으로 만든 초자연적인 존재의 형상을 앞에 놓고 길흉화복을 점치고 개인이나 사회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며 현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복을 비는 기복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시험 합격을 위해, 승진을 위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정치개혁을 위해, 현 사회의 도덕과 윤리의 회복을 위해, 성전 건축을 위해, 사람으로 가득 찬 교회를 만들기 위해,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보기 위해, 신비한 능력을 받기 위해, 교회에서 뜨겁게 기도합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이 나 자신과, 가족과, 사회와, 교회를 위해 당연히 구해야 하고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 6.33) 어떤 설교가는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자손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오늘 우리도 받을 줄로 믿고 구하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한 간구가 없다면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마 3.9)
이처럼 지금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축복을 우상숭배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없이 구해지는 모든 기도와 간구는 우리의 소욕을 위해 복만 달라고 떼 부리는 우상숭배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 (마 3.8), 죄를 사함 받고, 나의 성품이 주님의 것으로 변화되어, 세상과 구분된 존재로 살면서 죄와 싸워 승리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 5.22-23) 천국백성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때 세상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옴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있게 하여 섬기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출 20.3~5) 이것은 십계명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위대한 성경 주석가인 C. H. 매킨토쉬는 “우상 숭배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가축이나 돌에만 머리 숙이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사로잡은 모든 세상 것이 우상이다. 어떤 대상에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이 우상 숭배다. 또 그것에다 마음을 빼앗기는 자는 우상 숭배자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지 않고 그의 축복만을 비는 행위는 곧 탐심이며, 이것은 우상숭배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