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사회] 2002년
성민엽 <한국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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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대중문학과 무협소설
1961년 김광주가 웨이츠원(尉遲文)의 무협소설 『검해고홍(劍海孤鴻)』을 번역(정확히는 번안)하여 『정협지(情俠誌)』라는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한 지도 어언 40년이 지났다. 세부적인 내용으로 보자면 부침이 있었지만, 『정협지』에서부터 1960년대 후반의 무협소설 붐, 1977~1978년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 성행한, 한국 작가가 쓴 ‘창작 무협,’ 1980년대 후반의 진융(金庸) 붐, 그리고 1990년대 중반부터 나온 새로운 스타일의 창작 무협소설, 이른바 ‘신무협’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동안 무협소설은 한국의 대중문학과 대중문화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현재 애호가(흔히 마니아라고 부르는)라고 할 수 있을 고정 독자만 해도 10만 명이 넘는다 하니 무협소설을 이따금 읽을거리로 찾는 사람들까지 치면 그 숫자는 엄청날 것이다. 더욱이 무협소설은 그것 자체만으로 그치지 않고 만화 영화 컴퓨터 게임 등 다른 대중문화 장르에도 현저히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 고유 용어들(이를테면 공력 내공 초식 백도 흑도 같은)을 한국어의 일상 언어 속으로 침투시키고 있기까지 하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무협소설은 대중문학과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서 의당 진지한 문화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무협소설은 그에 합당한 학술적 및 비평적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만화보다도 더 천박한 것으로 백안시하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이런 백안시를 초래한 가장 큰 책임은 1980년대의 ‘창작 무협’에 있다. 황당무계한 기연(奇緣)의 연속과 터무니없는 주인공의 초능력이라는 틀에 박힌 구성, 거기다 도저히 읽을 수조차 없는 엉터리 문장, 싸구려 외설 등이 대다수 ‘창작 무협’의 특징이었던 것이다).중국의 경우를 보면,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금지되어왔던 무협소설이 1980년대부터 다시 읽히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대중문학 중에서 가장 유행하는 장르가 되었는데, 그러자 학계에서 무협소설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1994년에는 북경에서 전국 규모의 중국무협문학학회가 창립되었고, 1995년에는 북경대학교 중문과 대학원에 옌쟈옌(嚴家炎) 교수의 ‘진융(金庸) 소설 연구’라는 강좌가 개설되었으며, 20세기 후반의 대표적 무협소설 작가인 홍콩의 진융이 절강(浙江)대학교 문과대학 학장으로 초빙되기도 했다. 중국 학계의 이러한 무협소설 붐에서 주류를 이루는 입장은, 무협소설을 『삼국연의(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에서 『홍루몽(紅樓夢)』에 이르는 명청(明淸)의 통속소설 전통과의 계승적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그 계승적 관계를 근거로 무협소설을 20세기 중국 문학의 중요한 성과로 인정한다.
이러한 입장은 약간의, 그러나 아주 중대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 수긍하기가 어렵다. 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배제한 채 손쉽게 무협소설을 기성의 문학 개념 속으로 편입시키고 있다는 점, 그리하여 대중문학 대중문화로서의 무협소설의 진정한 의미가 오히려 은폐되거나 왜곡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수주의적인 복고주의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렇기는 하나 이러한 중국의 상황은 무협소설에 대해 학술적 및 비평적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한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 흥미롭다.무협소설이야 중국 것이니 그건 당연한 게 아니냐, 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중국 것이라 해도 그것이 한국에서 읽히고 있다면 그 독서는 이미 한국의 문화 현상인 것임이 분명하고, 더구나 중국 것이 아닌, 한국에서 한국인에 의해 씌어진 한국 무협소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런 반문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199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의 무협소설 독서 시장의 주류가 더 이상 중국 무협소설의 번역물이 아니라 한국의 창작 무협소설로 바뀌었다. 이 한국 무협소설은 무협소설이라는 점에서는 중국 무협소설과 동류이고 중국 무협소설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중국 무협소설의 복제품이거나 아류인 것만은 아니다.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 무협소설 중 다수는 중국 무협소설과 구별되는 뚜렷한 독자성을 긍정적인 의미에서 갖추고 있다.
이상의 논술에서 이미 드러났지만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혀두자면, 필자는 지금 무협소설을 좁게는 대중문학, 넓게는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 보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은 대중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일정한 검토 위에서 세워지는 입장이어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예술의 분화에 관한 아놀드 하우저의 논의가 유용하다고 필자는 전부터 생각해왔다. 지면 관계상 자세한 소개는 할 수 없겠고, 단지 하우저의 만년의 저서 『예술의 사회학』 제5부에서 개진되고 있는 예술의 분화 문제에 대한 통찰력 있는 논의를 참조해주기 바란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고급예술과 통속예술-대중예술의 차이,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고급예술은 주류 예술이고 통속예술-대중예술은 비주류 내지 주변 예술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주류/비주류(주변)의 문제는 고급예술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전통과 전위의 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 시대의 비주류(주변)가 다음 시대의 주류로 되는 경우는 있어도 한 시대의 통속예술이 다음 시대의 고급예술이 되는 경우는 없다. 다만 한 시대에 통속예술로 여겨지던 작품이 다음 시대에는 고급예술 작품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그 역의 경우도 있다). 하우저는 고급예술과 통속예술-대중예술의 예술 내용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한다.
진지하고 까다로운 고급예술은 불안을 야기시키고 또 충격과 고통을 주는 반면, 통속예술은 불안을 진정시키고 삶 속에서 부딪치는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피하게 해주며, 적극적인 자세와 긴장, 비판 및 자기 반성에로 자극하는 대신 소극적인 자세와 자기 도취에 빠져들도록 부추긴다.1)
하우저의 이러한 견해에 필자는 적극 동의한다. “고급문학이나 본격문학이라는 말은 그 어감상 문제가 있으므로 그냥 ‘문학’이라고 하거나 차라리 ‘고통의 문학’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라는 식의 말을 필자는 자주 해왔는데 그것은 위 인용문과 입장을 같이하는 것이다.
당겨 말하면, 무협소설이라는 통속문학-대중문학의 문학 내용은 위 인용문에서 하우저가 설명한 통속예술-대중예술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바로 그 문학 내용의 자세한 내역을 살펴보자는 것이 이 글의 목표 중의 하나이다. 어떤 불안이 어떻게 진정되는가 하는 것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무의식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무협소설 중에도 하우저의 설명과 일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무협소설 중 일부가 그러하고 한국 무협소설 중 1990년대 중반부터 나온 이른바 ‘신무협’의 다수가 그러하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문화적 의미를 탐문해보자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표이다. 이로부터 대중문학과 대중문화에 대한 재인식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_무협소설을 보는 관점
1969년에 한국의 젊은 문학비평가 김현이 당시의 무협소설 현상에 대해 진지하고 깊이 있게 성찰한 글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 허무주의의 부정적 표출」(『세대』, 1969년, 10월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글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방면의 독보적인 글로 남아 있다. 최근 국내의 무협소설 작가 및 애호가들과 소수의 문학 연구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는 논의들은 대체로 장르 문학의 틀 안에서의 논의이어서 문화적 의미에 대한 적극적인 질문과 검토로까지는 나아가지 않고있고,2) 그 밖에는 무협소설을 아예 ‘무협소설’이라고도 부르지 않고 ‘무협지’라고 부르며 그것의 천박함을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발언들이 대종을 이루어왔다. 그러니 김현의 글은 충분히 우리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된다.
김현의 결론은 무협소설 읽기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이며 그 읽기에서 독자가 얻는 것은 대리 만족(김현이 이 말을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뜻으로 보면 그렇다)이라는 것이다. 무협소설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이 바로 도피와 대리 만족이어서 김현의 결론은 그 자체만으로는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김현이 그 도피와 대리 만족을 문학사회학적으로 치밀하게 설명했다는 점이다.
김현은 무협소설의 주된 독자가 중산층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무협소설 현상이 한국 중산층의 비개성적 허무주의의 발로임을 해명했다. 그에 따르면, 중산층은 자본주의의 발달로 점차 영세민화하며 자기 시대의 중추적 세력이라는 중산층의 자각이 대 부르주아지에 대한 복종과 공포로 바뀌고, 개인의 무력함, 개인의 무의미성이 점차 모든 중산층을 파고든다. 여기서 중산층의 비개성적 허무주의가 생겨나는데, 무협소설이 제공하는 도피와 대리 만족은 바로 이 비개성적 허무주의의 불안과 초조에 대해 환각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명 자체보다도 이러한 해명의 근거로서 제시되는 무협소설의 서사 구조에 대한 분석이다.
김현은 무협소설을 일종의 성장소설(이 말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로 파악했다. 그가 보기에 무협소설 주인공들의 복수담은 그들이 사회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을 ‘과장’하여 내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한 청년 고수가 대협으로 커나가는 과정은 마치 사회 생활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처세술, 혹은 자기 본능을 억제하는 억제술과 비슷하다. 둘째 주인공의 상대로 등장하는 마두(魔頭), 즉 악당의 독(毒)은 자기 내부의 욕망이고(그 마두는 그와 대결하는 청년 고수의 본능과도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그 마두는 밖에 있지만,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이 헤매는 지하의 미로는 일상인의 회의와 불안이다(지하의 미로에서 쓰러진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환영 앞에 쓰러지는 것과 다름없다). 주인공이 마두를 이기고 미로를 벗어나는 것은 욕망과 회의 불안을 이겨내고 사회의 기성 윤리와 기성 질서에 편안하게 적응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 성장소설의 특이한 점은 주인공의 성장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기존 윤리의 확대이고 성공한 인간의 확인이라는 점이다.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에게는 생의 의미란 미리 주어져 있으며(그는 그 주어진 의미에 대해 전혀 회의하지 않는다. 회의와는 반대로 그는 자기 행위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 오히려 무관심하다),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뜻한다. 이 특이한 성장소설은 생의 의미에 대한 모색과 반성을 핵심으로 하며 그리하여 일상의 편안함마저 불편한 것으로 느끼게 하고 쾌락을 증오와 혐오로 느끼게 하는 교양소설과 여러모로 상반되는바, 이를 근거로 김현은 무협소설은 예술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이상 살펴본 김현의 무협소설론은 몇 가지 점에서 한계가 지적될 수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할 것은 김현이 텍스트로 삼은 것이 1950~1960년대 대만 무협소설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한국에 번역된 것이 그것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62년부터 1969년까지 한국어로 번역 추란된 35편의 무협소설은 모두 대만 신파 무협소설이고, 그 대부분이 대만 신파 무협소설 중에서도 워룽성(臥龍生)류의 주류 무협소설이다. 이 대만의 주류 무협소설만을 놓고 볼 때 김현의 분석은 대단히 예리하고 설득력 있는 것이 되지만, 진융(金庸) 량위성(梁羽生) 등의 홍콩 신파 무협소설과 1949년 이전 중국 대륙의 구파 무협소설3)에는 그 분석을 그대로 다 적용하기 어려우며 특히 1960년대 중반 이후 대만 구룽(古龍)의 작품 및 그 계열에 대해서는 부합하지 않는 면이 더 많다. 다음으로 김현의 문학사회학적 설명은 당시의 한국 사회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일반화하기에는 난점이 따른다. 무협소설이 한창 유행하던 1960년대의 대만도 그 사회 상황이 한국과 유사했기 때문에(반공주의에 기초한 정치적 독재, 자본주의적 발달의 빠른 진행 등) 김현의 설명은 동시대 대만에도 대체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회사적 맥락이 달라지면 똑같은 현상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심지어는 상반되게 해석할 수도 있다. 또 텍스트의 파악 자체도 좀더 복합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가령 본능 내지 욕망의 왜곡된 표현은 기성 질서에의 안주에 도달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보면 견고한 사회적 규범에 의해 억압되고 있는 본능과 욕망의 현현이라는 측면을 갖는다. 이 현현은 체제 전복적이고 해방적인 환상문학과도 상통한다. 이 점을 중시하면, 우리는 무협소설의 본능 내지 욕망의 왜곡된 표현으로부터 그것이 한편으로 전복적이고 해방적인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전복적인 불온성을 길들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드러내지 않고서는 길들일 수도 없는 것이니까)는 양면성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김현이 자신의 설명을 의식적으로 중산층 독자에 국한시켰다는 점이다. 김현은 “이 중산층의 독자 외에 대서점에서 책을 빌려보는 저소득층의 독자를 상정할 수 있다”라고 쓴 뒤, “대서점을 통한 잠재 독자는 제외한다 하더라도 소위 중산층이 무협소설에 지대한 흥미를 표현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던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당시의 무협소설 독자는 책을 구입해서 읽은 중산층 독자보다 대서점에서 빌려 본 저소득층 독자가 더 많았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중산층 문제와 관련한 자기 자신의 고뇌가 김현으로 하여금 문제를 그렇게 보도록 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수의 저소득층 독자까지 포함해서 생각하면 우리는 이 문제에 김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여기서 우리는 무협소설에 대한 중국 쪽의 평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1920, 1930년대의 대표적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마오둔(茅盾)이 1933년에 발표한 「봉건적 소시민 문예」라는 글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전문적으로 무협소설에 대해 논하고 있다. 여기서 마오둔은 평강불초생(平江不肖生)의 『강호기협전(江湖奇俠傳)』의 독자가 대부분 소시민이고 그것을 영화화한 「화소홍련사(火燒紅蓮寺)」의 관객이 예외 없이 소시민, 특히 소시민층의 청년임을 지적한 뒤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러한 ‘무협 마니아’ 현상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봉건적 소시민의 ‘출로’에 대한 요구의 반영이고,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또한 봉건 세력이 동요하는 소시민에게 주는 마취약이다. 소시민은 탐관오리와 토호열신을 극히 미워하므로 무협소설이나 영화도 탐오와 토열을 공격해야 하지만, 동시에 청렴한 관리와 불호(不豪)한 지주, 불열(不劣)한 신사(紳士)를 등장시켜 대조로 삼음으로써 지배 계급을 위해 변호하기도 한다. 소시민은 ‘출로’를 갈망하므로 소설이나 영화 속에는 ‘위민제해(爲民除害)’하는 협객이 있게 되는데 이 협객들은 반드시 성명(聖明)한 관리, 공정한 신사에 의존하고, 이들과 다른 ‘재야’의 협객들은 반드시 온갖 악행을 일삼는 악당이다. 협객이 영웅이라는 사실은 소시민이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힘이 아니라 불세출의 영웅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협객이 되기 위한 유일한 자격은 충효절의이고 협객이 보호하는 것도 충효절의를 따르는 백성들인데, 이것은 소시민의 동요를 안정시키는 소극적 작용 이외에도 봉건 사상의 기초를 두텁게 하는 적극적 작용을 첨가한다.
이처럼, 소시민층 독자에 대한 무협소설(그리고 영화)의 소극적 작용과 적극적 작용의 이중성을 마오둔은 아주 명쾌하게 지적했다. 이 지적은 김현의 분석과 기본적으로 입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명쾌한 지적에서 주목되는 것은 마오둔이 말하는 소시민은 봉건적 소시민이라는 점이다(시민과 도시가 반드시 근대에 들어와서만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전근대에도 시민과 도시가 있었다). 이는 20세기 전반 중국의 현실을 돌이켜볼 때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당시 중국은 사회구성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반봉건(半封建)적 성격이 주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김현이 본 ‘중산층’은 근대적 의미의 소시민이고 그가 다룬 텍스트는 1960년대 대만이라는 근대 사회의 산물인 데 반해 1930년대의 마오둔이 본 소시민은 봉건적 의미의 소시민이고 그가 다룬 텍스트는 반봉건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김현이 텍스트에 대해 심층적인 정신분석적 조명을 수행한 데 비해 마오둔은 ‘대리 만족’과 ‘영웅 숭배’의 측면을 간략히, 텍스트에 대해 외적으로, 지적했을 뿐이라는 데 있다(마오둔 당시의 중국 지식계에 정신분석학적 지식이 극히 초보적일 뿐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시대를 건너뛰어 마오둔의 무협소설론을 계승한 사람은 북경대학교 중문과의 천핑위엔(陳平原) 교수이다. 천핑위엔은 우선, “대중문학은 독자 내면의 무의식적 갈구를 반영하여 혼돈 상태로 감추어져 있는, 아름다움을 기대하는 욕구를 간접적으로 만족시킨다”라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주장에 동의한 뒤, 그러나 그 무의식적 욕망이 꼭 ‘아름답고 이상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수정을 가한다. 무협소설의 경우, ‘강호(江湖)’라는 상징은 유토피아 정서의 반영이지만, 개인 의지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살인이라는 점에서 쾌감을 가져다주는 복수 모티프는 결코 아름다운 욕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욕망은 현실 생활에서는 이성과 법률의 억제를 받지만 무협소설의 창작과 독서 속에서 대리 실현을 얻게 된다(이 지적은 앞으로 논의할 일부와 가깝다).그 다음, 무협소설을 현실의 고난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라고 보는 견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비판하면서 천핑위엔은 오히려 무협소설의 성행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사회 환경과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독자들에게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독자들에게 관건적인 것은 ‘평범에 대한 반항’이다. 스스로 초조와 불안을 느끼는 ‘평범’한 현대 독자들에게 협객의 ‘평범’을 초월한 모습은 커다란 흡인력을 갖는다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천핑위엔은 무협소설의 ‘친숙감과 도식화’가 문화 상품으로서의 속성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는 견해에 반대하고, 독자에게는 새로움과 변화에 대한 욕구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실제로 무협소설은 평강불초생에서 왕두루(王度廬) 환주루주(還珠樓主)까지, 다시 진융 구릉까지 그 변화의 폭이 작지 않고, 그 변화는 제재나 스토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서사 어법에도 있는데, 그 변화의 영감과 동력은 고급문학과의 대치 및 대화로부터 획득되었다.4)고급문학의 시각에서 대중문학을 내려다보는 데에 반대하고 고급문학과 대중문학은 서로 다른 것이므로 대중문학은 대중문학의 입장에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려 한 것이 천핑위엔의 의도이다. 그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만 약간의 유보는 필요할 것 같다. 작가나 작품으로 볼 때에도 엄밀히 말하자면 고급문학과 대중문학-통속문학 사이의 경계가 그렇게 확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독자로 볼 때에도 고급문학 독자와 대중문학-통속문학 독자는 사실상 다소간 혼합되어 있다는 사실 등이 유보 내용이다. 예컨대 사르트르가 자기 자신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물보다도 괴기소설 민화같은 것을 더 즐겨 읽는다고 한 것은 자주 언급되는 예인데, 이때의 사르트르는 고급 지식인 사르트르가 아니라 대중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사르트르인 것이다.천핑위엔의 무협소설론은 대중문학 장르에 대한 성찰과 문학사회학적 분석 및 정신분석학적 분석의 지평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앞에서 살펴본 마오둔 및 김현의 분석과 기본적으로 입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인데, 어느 대목에서는 일보 진전된 논의 수준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마오둔이 구파 무협소설 초기작들만을 텍스트로 했고 김현이 대만 신파 중 워룽성류만을 텍스트로 한 데 비해, 천핑위엔은 구파 중의 북파사대가(北派四大家)5)와 진융 구릉까지를 텍스트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점이 있는 것 같다.이 논의의 계보를 이어서 무협소설에 대한 보다 진전된 논의로 나아가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인데, 이러한 우리의 의도를 성립시켜주는 것은 다름아닌 한국의 ‘신무협’이라는 텍스트이다. 한국의 ‘신무협’은 종래의 무협소설관으로는 포괄되지 않는, 어느 면에서는 종래의 무협소설관을 붕괴시키거나 해체시키는 새로운 텍스트이다.
3_한국 ‘신무협’의 작가와 작품
1995년 4월에 신세대의 좌백(左栢)이 『대도오(大刀傲)』를 발표하면서 한국 무협소설에 이른바 ‘신무협’의 시대가 열렸다. 좌백과 그의 처녀작 『대도오』는 획기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대도오』의 주인공 대도오는 낭인 무사이다. 그는 무림 명문 출신도 아니고 가문의 복수라는 사명을 짊어지지도 않았으며 미남도 아니고 의협(義俠)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생아 출신이며 자신이 사생아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밝히는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생존뿐이다. 주인공의 이러한 설정은 무협소설이라는 장르의 관습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종래의 무협소설에서라면 주인공으로 등장할 만한 인물들이 여기서는 조연으로 등장하는데 그들 또한 관습적으로 기대되는 영웅적 성격을 띠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적 약점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이야기는 대도오가 감숙성, 즉 중국 서북부 변방의 철기맹(鐵騎盟)이라는 한 무림 방회(幇會)에 용병으로 들어가 흑기당(黑旗黨) 풍자조(風字組)―나중에 흑풍조(黑風組)로 이름이 바뀐다―의 조장을 맡는 데서 시작된다. 철기맹과 구륜교(九輪敎) 간의 패권 다툼은 이 변방의 두 방회가 각각 구대문파(九大門派)의 하나인 종남파(終南派)와 녹림의 연합 세력인 녹림맹(綠林盟)에 흡수되어버리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군대로 치면 분대나 소대 정도에 해당할 흑풍조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작은 공동체로서의 존재 가치를 획득하는 일이다. 본래 무림 명문 출신이지만 성격적 결함으로 방황하던 매봉옥이 흑풍조원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중시하는 것이나 멸망한 철기맹의 맹주 운기준, 역시 멸망한 구륜교의 소교주 독고청청 등이 흑풍조에 참여하는 것은 무협소설의 관습적인 가치의 위계 질서가 전복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대도오는 결코 무림의 대협(大俠)이 되지 않는다. 그는 처음에도 낭인 무사였고 끝에도 낭인 무사일 따름이다. 그는 무림 사회의 기성 질서에 내포된 허위와 속물성을 비웃으며(대도오의 시선은 그 비웃음의 시선이어서 기성 질서에 편입되어 있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낭인 무사라는 하층의 삶의 존재 방식이 갖는 독자적 가치를 실현한다. 김현이 분석했던 대만의 주류 무협소설이 사회의 기성 윤리와 기성 질서에의 편안한 적응에 대한 이야기라면 『대도오』는 그 적응을 거부하고 그 적응의 이야기가 갖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폭로하며 그 적응 바깥에서 가능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이다. 종래의 무협소설이 중산층의, 그리고 중산층 지향의 무협소설이라면 『대도오』는 하층, 소외된 자, 주변, 소수자의 무협소설이라 할 수 있다.서술 방식이라는 측면에서도 『대도오』는 획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서장」은 대도오를 1인칭 화자로 하여 서술되고, 제1장부터는 3인칭 서술이되 시점을 거듭 바꿔간다. 흑기당 향주 노종도의 시점→ 대도오 시점→ 반효 시점→ 대도오 시점→ 매봉옥 시점→ 객관적 서술→ 노대 시점→ 대도오 시점→ 반효 시점→ 노대 시점→ 대도오 시점, 이라는 식이다. 이러한 서술을 통해 서술자가 되는 인물들 각각의 내면이 각 인물 자신의 입장에서(전지적 화자의 입장이 아니라) 드러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처음 풍자조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대도오는 “하급 무사에게도 저마다의 인생이 있다”라고 독백하는데, 바로 그 ‘저마다의 인생’의 속내가 여기서 표현되는 것이다. 육홍타 기자가 신문 기사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삶의 문제를 짊어지고 스스로와 싸워나간다.” 그들에게는 미리 주어져 있는 생의 의미란 없다. 그들에게 생의 의미는 불확정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며 모색의 대상일 뿐이다. 대도오의 경우 “인생은 때로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그에게 다가왔고, 만족할 만한 이유를 제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6)고 독백하며 “‘나는 뭘 바라고 있는 것인가?’ 왜 기다려주는 사람 아무도 없는 중원으로 저 황하의 물결을 타고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만약 가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7)라고 자문한다. 그런가 하면 운기준은 여태껏 피 흘린 자들을 위해 철기맹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안소에게, “건방진 소리 마랏! 네가 피 흘린 자들, 죽어간 자들의 말을 다 들었나? 그들이 철기맹을 위해 피를 흘리고 죽어갔느냐? 너는! 너는 어떠냐? 너는 철기맹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들고 있는 그 깃발과 네 자존심을 위해 싸우고 있느냐? 네가 진정 철기맹과 나를 위해 싸운 적이 있었나? 나는 또 어떠냐? 네 말이 다 맞는다 해도 내가 왜 희생하고 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거려야 하느냐? 날 위해서냐? 아니면 네 알량한 신념, 네 자존심을 위해서냐?”8)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미리 주어져 있는 생의 의미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사회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 의미의 모색 과정에서 실존적 충실을 획득하는 데 있다. 김현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이 대목에서 『대도오』는 예술과 만나는 것이다.『대도오』와 홍콩의 진융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겠다. 진융은 사상적으로 보자면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이지만 그의 작품은 의외로 폭이 넓어서 작품마다 스타일의 차이가 적잖이 나타나는데 그 중 후기의 작품인 『소오강호(笑傲江湖)』나 『녹정기(鹿鼎記)』는 『대도오』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소오강호』가 무림 사회의 기성 질서의 허위를 부정하는 것이나 『녹정기』가 하층민 출신의 주인공을 설정한 것, 두 작품 모두 아이러니를 서술 원리로 하고 있는 것(하나는 비교적 비극적으로, 다른 하나는 골계적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으나) 등이 그러하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오강호』와 『녹정기』는 진융이 추구해오던 무협소설 세계가 붕괴 혹은 해체되어가는 가파른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소오강호』의 자유 분방하며 냉소적인 주인공 영호충(令狐衝)이나 영호충의 스승으로서 위군자(僞君子)의 대표 격인 화산파 장문인 악불군(岳不群)은 그 붕괴와 해체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인물들이다. 무협소설의 관습상 주인공의 스승이 악불군 같은 위선자로 그려지는 경우는 종래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규화보전(葵花寶典)』의 절세 무공이 거세라는 조건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설정 또한 무공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회의의 발생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는 영호충이 그 자유 분방하고 냉소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교적 가치를 믿고 지키려는 안간힘을 쓰고 있다. 『녹정기』에서는 주인공과 예교적 가치의 마지막 끈마저 끊어진다. 주인공 위소보(衛小寶)는 하층민 출신의 순수함과 교활함이 공존하는 인물로서 예교와는 무관한 인물이다. 『녹정기』에서는 무협소설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예외 없이 희화화되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일종의 반(反)무협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녹정기』를 마지막으로 진융이 절필을 하게 된 것은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좌백은 진융이 마지막에 보여준 장르의 붕괴와 해체 과정을 이어받으며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무협소설 세계를 열었다고도 볼 수 있다.그러나 실제로 『대도오』에 영향을 미친 것은, 진융이 아니라, 한국 작가로는 1980년대 ‘창작 무협’과 1990년대 ‘신무협’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한 용대운(龍大雲)(그 이전의 야설록[夜雪綠]도 고려할 수 있겠다)이고 중국 작가로는 대만의 구룽이라고 할 수 있다. 용대운의 문체와 『마검패검(魔劍覇劍)』 『유성검(流星劍)』 『탈명검(奪命劍)』 『태극문(太極門)』 등에 등장하는 고독한 주인공의 성격은 확실히 『대도오』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구룽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사실은 용대운도 이미 구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허무주의와 시니시즘, 실존주의적 경향, 서술의 실험성, 간결한 문체, 장르 혼합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구룽 특유의 모더니즘적 소설 세계를 『대도오』는 성공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대만과 홍콩에서 구룽의 에피고넨들이 실패한 것과는 달리 좌백의 구룽 계승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근본적으로 구룽과 구별되는 소설 세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구룽의 실존주의가 중산층의 속물성을 비웃는 귀족적 데카당스의 그것인 데 반해 좌백의 실존주의는 하층, 소외된 자, 주변, 소수자의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좌백은 또한 구룽의 전복이기도 하다.『대도오』에 이어 몇 개월 간격으로 발표된 『생사박(生死搏)』과 『야광충(夜光蟲)』은 좌백 자신에 따르면 그 구상은 오히려 『대도오』보다 빨랐던 작품들인데 『대도오』와는 또 다른 독특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생사박』만 살펴보기로 한다. 『생사박』의 주인공은 오 척 단신에 못생긴 외모, 이마에는 ‘파계’라는 두 글자가 낙인 찍혀 있고, 내공은 파괴되고 팔의 힘줄이 끊겨 조막손이 된 ‘흑저(黑猪)’라는 이름의 파계승이다. 그의 꿈은 자신을 쫓아낸 소림사로 귀환하여 자신이 창안한 박투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금룡장의 권력 투쟁에 휘말려들어 당대의 최고수들과 거듭되는 생사의 결전을 벌인 끝에 그는 드디어 자신의 박투술을 완성하고 소림사로 귀환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귀환과 동시에 그의 무공은 상실된다. 대신 그가 얻는 것은 불도(佛道)이다.이 이야기는 미묘한 양면성 위에 세워져 있다. 애당초 그가 소림사에서 쫓겨난 것은 그의 박투술이 소림 무술의 법식으로부터 일탈한 것이기 때문인데, 그 박투술이 ‘생사박’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소림 외가 36종의 하나로 인정받는 순간 그는 자신의 무공을 상실한다. 그의 일탈과 그 일탈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소림사의 견고한 규범과 질서에 대한 항의이고 도전이다. 그러나 그 일탈이 인정받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일탈이 아니고 규범과 질서 속으로 흔적 없이 흡수되어버린다. 그가 무공을 상실하는 것은 일탈의 불온성이 거세되는 것이다. 여기서 거세 없는 귀환은 없다. 그는 거세되고, 소림사의 규범과 질서는 도전받기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진다. 그의 이야기는 소림사의 권위의 근본적 정당성을 입증해주는 전설이 되어버린다. 그가 소림사 밖에서 자신의 질서를 세우지 못하고 소림사 안으로 흡수되어버린다는 의미에서 『생사박』은 『대도오』에 비해 후퇴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다른 한편으로 소림사 안의 세계와 소림사 밖의 세계의 대립 구조 위에 짜여져 있고 여기서 전자는 후자의 부정성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이 점에서 보면 『생사박』은 소외된 자의 삶의 실존적 의미를 묻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세속적 세계의 부정성(자기 중심적이고 영악하며 교활하고 잔인한 금룡장의 후계자 소운의 광기가 이를 대표한다)을 심문하는 종교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무협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심문이기도 하다. 이 점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엽검영(葉劍影: 전근대인의 성으로 쓰였으므로 엽이 아니라 섭으로 읽는 것이 옳을 것이다)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가진 인물이다. 마치 명문 정파에서 수련을 마치고 갓 출도한 청년 협사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는, 말하자면 무협소설의 주인공에 딱 부합하는 외모를 가진 그는 그가 읽은 무협소설의 세계를 현실에서 기대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노신선(老神仙)이 있고, 걸음걸이 하나로 일국(一國)을 무너뜨릴 정도로 아름다운 절세가인(絶世佳人)이 있고, 의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쾌히 던지는 협사(俠士)가 있어야 한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같은 절세의 미남, 천하의 기재, 불행을 밟고 일어서서 천하의 기연(奇緣)을 얻으며 보는 사람 모두가 친구가 되거나 부하가 되고자 머리를 숙이는, 빛나는 인물이 있어야 했다. 그에게는 그것이 무림인 것이다.9)
이는 종래의 무협소설, 특히 1980년대 한국의 ‘창작 무협’을 요약해놓은 것인데, 그가 겪는 무림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또한 무협소설의 주인공을 닮기는커녕(미남이라는 것만 빼고) 무능하고 어리석기만 하다. 그는 무협소설의 주인공을 욕망하는 하나의 돈키호테이다. 엽검영이라는 인물의 희화화는 그 자체로 종래의 무협소설에 대한 통렬한 야유이고 풍자이다.좌백의 바로 뒤를 이은 작가는 풍종호(風從虎)이다. 1995년 8월에 출판된 풍종호의 처녀작 『경혼기(驚魂記)』는 아마도 무협소설의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작품일 것이다. 주인공 분뢰수(奔雷手)는 자아를 상실한, 아니 아예 자아가 없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이름도 없고(분뢰수라는 이름은 그의 무공 수법의 이름일 따름이다), 얼굴도 없다(그는 얼굴과 손까지, 두 눈을 제외한 전신을 백포로 친친 감싸고 있는데 그 백포는 벗길 수도 없고 심지어 칼로 자르거나 찢을 수도 없다). 그에게는 과거의 기억도 없다. 그의 기억은 2년 전 그가 지금과 같은 상태로 천축에서 흑포인을 만나 분뢰수라는 무공을 배운 데서부터만 있을 뿐이다. 그는 무림의 온갖 인물들과 은밀한 사실들까지 다 알고 있는데 유독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기억상실증 환자인 것일까. 기억상실증은 대중문학에서 애용되는 모티프이고 1980년대 창작 무협소설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서효원(徐孝源)의 『대자객교(大刺客橋)』에서도 효과적으로 사용된 바 있는데, 이 모티프는 항상 인물이 본래의 자신을 되찾는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러나 『경혼기』의 분뢰수는 본래의 자신을 되찾기 위한 여행이 끝난 뒤에도 결국 자신을 되찾는 데 실패한다.분뢰수가 누구인지를 몇몇 인물들은 짐작한다. 2년 전 섭혼루라는 조직이 무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을 때 섭혼루주를 죽였던 ‘그’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단지 ‘그’라고만 호칭되는 그는 절대 무적의 무공 소유자이며 섭혼루 사건 이후 실종되었다. 그러나 부활한 섭혼루주가 분뢰수에게 다시 죽음을 당하는 장면에서 그 짐작은 부정된다. 분뢰수는 ‘그’를 찾아 떠나고 그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없다. 중간에 환혼노인이 방술을 사용하여 7백 년 전의 인물인 마교(魔敎) 교주의 혼을 부르고 그 부름에 이끌려온 분뢰수의 정체를 ‘그’라고 판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분뢰수가 마교 교주의 환생이고 ‘그’의 변신임을 암시한다. 종래의 무협소설 같으면 이 암시를 명시적으로 서술할 것이다. 그러나 『경혼기』는 그렇지 않다. 사실 여부에 대해서 서술자도 모르고 주인공 분뢰수도 모르며 다른 모든 인물들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모호성만이 서술을 지배한다. 『경혼기』의 서술을 지배하는 모호성은 마왕선(魔王船)이라는 떠 있는 인공의 섬에 대한 묘사에서 극도에 달한다. 이 섬은 등장인물들 모두가 모여드는 장소이고 분뢰수와 섭혼루주의 대결이 벌어지는 장소인데, 거기에서는 현실의 견고한 합리적 질서가 흐물흐물해져서 일종의 혼돈 상태 속으로 용해되어버린다. 마치 이 섬이 이성과 의식의 빛이 가 닿지 않는, 끝 모를 어둠에 잠긴 무의식의 심연인 것만 같다. 이 도저한 모호성 속에서 붕괴되는 것은 자아의 정체성과 그 통일성에 대한 믿음이다.그 믿음의 붕괴를 통해 풍종호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같은 해 10월에 출판된 풍종호의 후속작 『일대마도(一代魔刀)』가 유효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연적심(燕赤心)은 그의 귀신 붙은 칼을 파괴하고서 “저는 이제 자유가 아닙니까? 저에게는 칼이 필요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위지관은 복수극이 종결된 뒤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신만의 자유”를 일깨움 받는다. 그들에게는 사문(師門)의 복수가 생의 목적이 아니다. 무도(武道)의 완성이나 명예나 권력의 획득 등은 더더욱 아니다. 사부의 복수를 완수하는 것(연적심)이나 사부와의 계약을 이행하는 것(위지관)은 그들이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이다. 사부, 즉 아버지와의 관계로부터 형성된 그들의 자아를 부정하고 그들은 그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욕망하는 것이다. 『경혼기』가 그리고 있는 자아의 정체성과 그 통일성에 대한 믿음의 붕괴는 바로 이 해방의 욕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1996년 3월에 『홍엽만리(紅葉萬里)』를 출판하면서 전업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진산(眞山)은 각별히 주목해야 할 작가이다. 한국 무협소설 최초의 여성 작가로 기록될 진산은, 그 필명이 신동엽 시인의 시 「진달래 산천」에서 유래했다는 데서 이미 짐작되듯이, 짙은 서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독창적 스타일을 개척했다. 진산의 서정성은 소녀적이고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서정성인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 비극성이 더욱 중요하다.『홍엽만리』의 주인공 뇌가도(賴軻度)는 술김에 누이동생을 범한 근친상간의 죄의식으로 고통받는 인물이고 그가 홍교(紅敎: 여기서의 홍교는 미륵불을 신앙하는 백련교의 별칭이다. 원래 홍교는 티베트 불교의 한 종파 이름이다)에 가입하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홍엽만리』는 한편으로 뇌가도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홍교라는 종교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홍교는 관부와 무림 양쪽의 공격을 받고 교단 내부의 갈등이 겹쳐 멸망하는데 이 과정에서 주요 인물들 대부분이 죽음을 맞이하고 소수 몇 명이 살아남는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인물들 간의 비극적 관계이다. 홍교의 신동 소홍은 뇌가도의 근친상간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이다. 검아는 홍교의 전 교주 한백과 그의 여제자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데, 검아의 모친은 뇌가도의 손에 죽었다. 소홍을 지키기 위해 뇌가도와 검아는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다. 이 두 사람이 후일담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암시되지만 단지 암시에 그칠 뿐이고 그 살아남음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살아남음이라기보다는 재생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자신들의 운명적 죄업을 씻어내는 죽음의 과정을 거친 것이기 때문이다.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도저한 유토피아주의가 감싸고 있다는 점이다. 유토피아의 추구는 현실에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 좌절에 의해 비극성은 더욱 고조되며 삶의 근본적 결핍을 가슴 아프게 되비춘다. 이를 비극적 유토피아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진산의 비극성은 가령 워룽성의 『군협지(群俠誌)』(원제: 『옥차맹(玉?盟)』)나 상관딩(上官鼎)의 『침사곡(沈沙谷)』의 비극적 결말과는 근본적으로 종류가 다르다. 성공을 목전에 둔 좌절, 아니 성공과 동시에 닥친 좌절이 불러일으키는 차탄과 삶의 근본적 결핍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슬픔이 같은 종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비극적 서정으로부터 시작된 진산의 무협소설 쓰기는 근본적 결핍이라는 삶의 조건 위에서 인간 관계를 고찰하며 그 속에서 어떤 진정한 가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대사형(大師兄)』 『정(情)과 검(劍)』 『사천당문(四川唐門)』(2부작) 등이 그것들이다.장경(長鯨)의 처녀작 『철검무정(鐵劍無情)』(1996)과 두번째 작품 『천산검로(天山劍路)』(1997)는 주변부의 소외된 자의 입장에서 중심부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중심을 중심으로 만드는 권력을 부정하는 이 작가 특유의 시각이 뚜렷이 나타나지만 한편으로 1980년대 ‘창작 무협’의 틀을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장경은 세번째 작품 『장풍파랑(長風破浪)』(1997)에 이르러서야 1980년대 ‘창작 무협’의 좋지 않은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시각이 갖는 문제성에 걸맞는 서사를 구축했다. 『장풍파랑』의 주인공 위무일(魏武逸)은 천하제일의 무공을 습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출신 때문에 절망에 빠져 있다. 그가 속한 장강수로연맹(長江水路聯盟)도 무림 사회의 주변에 속하지만 그 주변 속에서도 그는 주변인일 뿐이다. 이야기는 위무일이 은거지로부터 장강으로 돌아오는 데서 시작해서 환멸을 겪은 뒤 다시 은거지로 떠나는 데서 끝난다. 『장풍파랑』의 또 하나의 주목되는 면모는 비극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인데, 이 비극성의 추구로부터 다음 작품 『암왕(暗王)』(1998)이 나오게 된다.대뜸 진산의 『홍엽만리』를 연상케 하는 『암왕』은 『홍엽만리』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운명과 종교의 운명을 겹쳐놓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종교는 배교(拜敎: 페르시아에서 발생한 조로아스터교, 즉 배화교의 별칭으로 사용되고 있다)이다. 『홍엽만리』의 홍교가 그런 것처럼 여기서의 배교도 관부와 무림 양쪽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다(이러한 종교적 박해의 이야기에는 아무래도 진융의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및 『소오강호』로부터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주인공 명강량(明彊良)과 운악약(雲鄂藥)은 각각 배교의 명옹(明翁)이고 성녀(聖女)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명옹과 성녀가 무림인의 추적을 피해 움직이는 행로가 서사의 골격을 이룬다. 그 행로에서 많은 배교 사람들이 희생되고 결국 명옹과 성녀는 하룻밤을 함께한 뒤 헤어지게 된다. 후반부는 암왕이 된 명강량이 귀환하여 행하는 피의 복수행이 서사의 뼈대가 된다. 운악약은 명강량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을 낳다가 죽었고 그 딸 예령이 성장하여 다음 대의 성녀가 된다. 명강량은 자신의 암왕의 힘을 봉인하고 예령의 손을 빌려 스스로를 죽이며, 암왕이 희생양이 됨으로써 배교는 천하인의 증오를 벗어나고 지하로 잠적한다.『암왕』의 전반부가 『홍엽만리』와 동궤의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장경의 독창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후반부가 『암왕』에 신화적 성격을 부여한다. 후반부의 암왕 이야기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암왕을 제도적 질서의 억압에 대한, 폭력과 파괴에 의한 대항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항은 종교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종교는 그 대항을 희생양으로 삼아 제도적 질서와의 타협을 이루고 그 희생양 이야기는 신화화된다. 다른 하나는 암왕을 제도적 질서에 의해 억압된 본능과 욕망의 표현으로 보는 것인데, 이렇게 보면 그 암왕이 스스로 자기 존재의 지속을 포기하게 되는 결말은 오히려 제도적 질서의 불가피함을 수긍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수긍은 암왕 출현의 불가피함에 대한 강력한 주장과 함께하는 것이고 이 양면성이 암왕의 비극적 신화의 진정한 의미 내용이 된다. 이상 살펴본 좌백 풍종호 진산 장경 이외에도 한국 ‘신무협’의 전모를 살펴보려면 『추룡기행(追龍奇行)』 『대붕이월령(大鵬易越嶺)』의 운중행(雲中行), 『칠석야(七夕夜)』 『묘왕동주(苗王東走)』의 이재일(李宰一), 『암천명조(暗天鳴鳥)』 『독왕유고(毒王遺稿)』 『산타(散打)』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의 설봉(雪峰), 『삼우인기담(三愚人奇談)』의 장상수(張尙洙), 『반인기(反人記)』의 여성 작가 유사하(流沙河), 『악인지로(惡人之路)』의 하성민(河成珉), 『표류공주(漂流空舟)』의 최후식,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의 백야(白夜), 『청룡장(靑龍莊)』의 유재용 등과 최근에 속속 등장하고 있는 보다 젊은 작가들에 대한 개별적 고찰이 필요하다.10)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지면이 요구되므로 우리의 고찰은 ‘신무협’의 초기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는 4명의 작가로 제한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이 4명의 작가들만으로도 ‘신무협’의 대강의 윤곽은 파악되는 것 같다.
4_‘신무협’을 통해 본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
좌백 이후의 한국 무협소설은 1969년에 김현이 분석 대상으로 삼았던 워룽성류의 대만 무협소설과 비교해볼 때 여러 측면에서 그것의 전복임이 확연하다. 1949년 이전의 구파 무협소설이나 1980년대 한국의 창작 무협소설,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 번역된 진융 구릉의무협소설과의 관계도 기본적으로 전복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전복적 관계는 그 중 워룽성류의 대만 무협소설과 한국 ‘신무협’ 사이의 그것이 가장 극명하다. 이제 그 전복의 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 물을 차례이다.
김현의 텍스트가 되었던 워룽성류의 무협소설은 엄밀히 말하면 소설이라기보다는 로망스에 가깝다. 여기서는 고난은 성공이 예정되어 있는, 혹은 성공을 위한 고난이고 욕망렸맛퓐불안의 드러냄은 그것의 길들이기가 예정되어 있는, 혹은 길들이기를 위한 드러냄이다. 텍스트 차원에서 보자면 그 성공과 길들이기는 오히려 중산층의 자신감의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무엇에 대한 자신감인가 하면 중산층적 질서의 승리 혹은 안정성에 대한 자신감이다. 현실에서 대다수의 중산층이 불안과 초조를 느끼는 것과 텍스트의 자신감은 반드시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자신감은 이데올로기인 것이기 때문이다. 중산층 독자의 불안과 초조는 텍스트의 자신감 속에서 위안받고 중화되며 중산층 독자는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재확인 받는다. 저소득층 독자의 경우에는? 그들에게 무협소설의 성공담은 일종의 신분 상승의 이야기가 된다. 이 이야기는 저소득층 독자의 업둥이 콤플렉스를 자극하며(실제로 많은 무협소설들에서 주인공은 업둥이이거나 업둥이에 준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에게 너도 중산층이 될 수 있다, 너는 중산층이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너는 원래 중산층이었고 다시 중산층을 회복할 수 있다, 너의 현재의 곤경은 중산층이 되기 위한 밑거름이다, 라는 암시를 건다. 그렇다면 1960년대 한국의 무협소설 현상은 중산층의 불안과 초조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기보다는 중산층의 삶에 대한 욕망이 한국 사회의 무의식적 욕망이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 욕망과 실제 중산층의 불안 초조는 상호 모순이 아니다. 그것들은 양립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기성 질서의 의심할 바 없는 정당성과 중산층적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대전제이다.1990년대 중후반의 한국 무협소설은 중산층에의 욕망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 욕망에 대한 야유와 조소가 그 출발점이 되고 있다. 이 야유와 조소는 그 욕망의 충족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각성에서 우선 비롯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욕망의 실현 가능성 이전에 중산층적 삶의 의미 자체가 이제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대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산층에의 욕망을 야유하고 중산층적 삶의 의미를 조롱하는 ‘신무협’은 대신, 『대도오』가 그 대표적 예를 보여주듯, 하층, 소외된 자, 주변, 소수자의 실존적 의미를 긍정한다. 대다수의 주인공들은 처음에도 하층, 소외된 자, 주변, 소수자였고 일련의 고난을 거치고 그 과정에서 승리하거나 살아남은 뒤에도 여전히 하층, 소외된 자, 주변, 소수자로 남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분 상승이 아니라 삶의 실존적 의미인 것이다.이 일종의 실존주의는 기존의 질서와 규범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장르 내적으로는 기존의 무협소설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작품 내적으로는 무림 사회의 질서가 의심의 대상이 되며 작품 외적으로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제도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때로 그것은 기성 질서의 정당성을 허물기 위해 오히려 독자의 불안과 초조를 부추기기까지 한다. 『경혼기』의 압도적인 괴기 모티프 사용이나 『표류공주(漂流空舟)』의 부조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의심이 가 닿는 가장 근본적인 곳에 있는 것이 자아이다. 『경혼기』는 자아의 정체성과 그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붕괴시키고 『호접몽(胡蝶夢)』(풍종호의 작품이다)은 상징계의 문화 질서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된 자아를 지지한다. 이러하니 ‘신무협’ 작가들의 시선이 일반적으로 삐딱한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 시선의 삐딱함이 기존의 문화적 질서가 우리에게 심어준 생의 의미를 불신하게 하고 생의 의미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질문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신무협’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골계도 그 삐딱함의 문체적 발현인 경우가 많고, ‘신무협’을 반(反)로망스, 즉 소설로 만들어주는 것도 그 삐딱함이다.대중문학이 독자 내면의 무의식적 욕망을 되비춰낸다는 것은 오늘날의 대중문학론의 정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대중에게 기존 질서에 대한 전복의 욕망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두 축으로 하는 기존 질서로부터 배제된 것을 향한 욕망이 잠복되어 있는 것일까. ‘신무협’의 독자가 수적으로 많다고는 하나 요즘 같은 시장 규모에서 상대적으로 보자면 결코 많다고만은 할 수 없다. 오히려 애호가 층이 두텁다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니 그 전복의 욕망은 아직은 부분적인 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사실을 말하자면 대중이 대중문학에 대해 갖는 관계는 결코 단일하게 동질화되어 있지 않다. 하우저의 지적처럼 그 관계는 다양하게 동질화되어 있다. 소박하게 말해본다면, 대중문학의 독자는 서로 구별되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그룹을 형성하는 것 같다(물론 다소간 혼합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그 그룹에 따라 서로 다른 장르 문학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또한 하나의 장르 문학 안에서도, 즉 무협소설 안에서도 독자는 다시 여러 개의 그룹으로 나뉘는 것 같다. 그 중 한 그룹이(규모가 크든 작든) ‘신무협’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신무협’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을 반응하게 하는 모티프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두 축으로 하는 기존 질서로부터 배제된 것을 향한 욕망’과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욕망과, 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바의, 중산층에의 욕망에 대한 야유, 중산층적 삶의 의미에 대한 조롱은 종래의 무협소설관 바깥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한국 ‘신무협’으로부터 종래의 무협소설관을 수정하는 데 대한 강력한 요구를 읽는 것은 결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는 한국 ‘신무협’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고 질적 전환의 징후를 보이고 있음이 분명하다.그러나 ‘신무협’이 다음과 같은 최종적 질문을 견뎌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신무협’은 전복의 욕망의 표현을 통해 그 욕망을 대리 만족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거꾸로 기존 질서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유지에 기여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이 질문은 예술에 대한 프로이트의 기초적 정의를 적용해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거듭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아예 명시적으로 기존 질서와의 타협으로 나아가버리는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비타협적임을 확신하는 경우에도 이 질문은 거듭 되새겨져야 한다.이 최종적 질문을 견뎌낼 때, 대중문학이 하우저가 말하는 “적극적인 자세와 긴장, 비판 및 자기 반성”으로 연결되고 김현이 말하는 “생의 의미에 대한 모색과 반성”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무협소설은 보여주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협소설이 대중문학과 고급문학 사이의 범주적 경계를 넘어서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범주의 차이와 개별 작품의 성격이 꼭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외적인 개별 작품들의 존재가 범주의 차이를 없애지는 못한다는 뜻도 되고, 반대로 범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개별 작품이 그 경계를 무화시킬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무협소설은 엄연히 대중문학에 속하는 하나의 장르 문학인 것이지만, “적극적인 자세와 긴장, 비판 및 자기 반성”과의 연결, 그리고 “생의 의미에 대한 모색과 반성”과의 연결 속에서 대중문학과 고급문학의 범주적 구분에 얽매이지 않으며 그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예외적인 작품이 태어나는 장면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기대는 지나친 기대일까. 설사 지나친 것이라 하더라도 필자는 이 기대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것은 ‘팝 예술’이라는 범주에 대한 고려이다. 하우저에 의하면, ‘팝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는 “특수하게 총괄할 수 있는 독특한 ‘제4의’ 교육 계층을 형성”하고 있고, 이 제4의 교육 계층은 “그들의 예술적 욕구와 가치 척도를 견지”하면서 “고급예술의 담당자들과 통속예술의 추종자들 사이에 중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팝 예술은 “진정한 문화적 욕구”로부터, 그리고 “사회 엘리트층의 지배에 대한 뚜렷한 불만”으로부터 생산되는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문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혁명의 결과”라는 점이다.11) 그런데 팝 예술은 대부분 음악이나 미술에 속한다.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신무협’이 보여주는 문화적 가능성을 문학 방면에서의 팝 예술로 간주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확실히 ‘신무협’에는 팝 예술적 성격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나타난다. 하지만 현재의 필자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내놓을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 해답을 찾지 위해서는 팝 예술을 별도의 범주로 설정하는 것이 정당한가, 유용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원론적인 검토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로 남기기로 한다.
▒ 주
1)아놀드 하우저, 최성만 이병진 옮김, 『예술의 사회사』(한길사, 1983), p. 237.
2) 참조할 만한 논의로는 대중문학연구회 편, 『무협소설이란 무엇인가』(예림기획, 2001)에 실린 글들과 이등연, 「무협소설의 현단계」(『상상』, 1994년 겨울호); 공상철, 「중국 무협소설에 나타나는 영웅 형상」(『상상』, 1996년 겨울호) 등이 있으나 이들에 대해 살펴볼 지면의 여유가 없다.
3) 중국에서 무협소설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15년이었고, 오늘날 무협소설이라고 불리는 장르에 명백히 부합되는 작품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말, 1920년대 초였다. 다시 말해 무협소설이란 장르는 20세기에 나온 근대적 장르인 것이다. 20세기의 중국 무협소설의 역사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하나는 1949년 이전 중국 대륙의 구파 무협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1949년 이후 홍콩과 대만의 신파 무협소설이다.
4)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보충이 필요하겠다. 변화의 영감과 동력은 고급문학과의 대치 및 대화로부터도 획득되지만 다른 대중문학 및 대중문화 장르로부터도 획득된다(다른 대중문학 및 대중문화 장르가 고급문학과의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대만의 구룽이나 한국의 ‘신무협’ 작가들은 스티븐 킹류의 미국 대중소설을 비롯하여 추리소설 과학소설 판타지소설 공포소설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그 영향의 내역을 추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작업이 될 것이다.
5) 1930년대에 등장하여 북경-천진 지역에서 활동한 4명의 대표적인 작가, 즉 환주루주(還珠樓主) 바이위(白羽) 정정인(鄭證因) 왕두루(王度廬)를 일컫는 말이다. 할리우드 영화 「와호장룡」은 왕두루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이다.
6) 좌백,『대도오』1(도서출판 뫼, 1995), pp. 216~17.7
7)좌백,『대도오』 2(도서출판 뫼, 1995), p. 159.8
8)좌백, 『대도오』 3(도서출판 뫼, 1995), pp. 185~86.9
9)좌백, 『생사박』 1(도서출판 뫼, 1995), pp. 109~10.10
10)『드래곤 라자』(1998) 이후 국내의 대중문학 독서 시장을 판타지 소설이 장악하게 되자 이에 편승하여 소위 ‘판타지 무협’이 나오기 시작했다(그 중에는 무협+판타지도 있고 판타지+무협도 있으며 이름만 판타지 무협이고 실제로는 판타지 성격이 거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판타지 소설은 금년 들어 벌써 퇴조의 기미를 보이고 있으므로 ‘판타지 무협’의 미래는 좀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1) 아놀드 하우저, 앞의 책, pp. 317~18 참조.
[출처] 성민엽 <한국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 |작성자 툭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