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標的은定해졌다!
희래각(喜來閣)-!
항주성 홍등가의 외각에 자리잡은 청루(靑樓)다.
청루란 전문적으로 여자만 파는 홍루(紅樓)와 달리
술과 여자를 함께 파는 곳이다.
매춘만을 하는 홍루가 붉은 홍등을 내거는 데 반해서
술까지 파는 청루는 푸른 청등(靑燈)을 내거는 연유로
청루(靑樓)라는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담사(潭邪)라고 불리운 황삼 청년은
어젯밤부터 유향(遊香)이라는 청기(靑妓)와 함께
방에 들어간 후 다시 하루가 지나 어두워지기까지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담사가 선택한 기녀 유향은
한때 이 바닥에서 제법 인기가 있었으나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은
기녀로서 황혼기에 든 퇴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법 풍만하고 흐벅진 몸을 소유한 덕분에 그녀는 그런대로 이곳에서 비록 시들어가는 몸뚱아리지만
손님을 받을 수 있었다.
세상에는 그녀처럼 적당히 닳고
적당히 살이 찐 여자를 좋아하는 사내들도 있는 것이다.
유향은 지난 수년 이래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었다.
입가에는 저절로 복사꽃 같은 미소가 감돌고
눈빛에는 생기가 가득 찼다.
주방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을 장만하는 그녀는
어젯밤의 일을 생각만 해도 전신이 황홀해졌다.
담사라는 이 젊은 손님은 겉보기에도 시골에서 막 대처로 나온 시골뜨기처럼 어리숙해보였다.
하지만 허름한 외양과 달리 그의 주머니는 상당히 두둑했다.
근 십여 일만에 손님을 받은 유향으로서는
담사가 눈이 번쩍 띄는 먹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숙맥 같은 이 시골 촌뜨기를 잘 우리내면
당분간은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비록 한물갔다고는 하지만 자신에게는
여전히 사내들의 단물을 빨아낼 훌륭한 수단과 기교가 있는 것이다.
까짓 몸매야 젊고 탱탱한 것들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여자의 그부분으로 사내들을 녹이고 조여대는 기술만큼은
상대가 없는 자신이다.
이 멍청이는 자신의 아랫도리에
숫총각의 왕성한 정욕과 함께
상당한 돈을 토해내게 될 것이다.
유향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하며 연하의 어리숙한 청년을 몸 위에 태웠다.
헌데,
그녀는 허둥대는 듯한 청년의 실체가
자신의 몸 안에 깊숙이 파고드는 순간
저절로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숱한 사내를 거치며 닳고 닳은 그녀의 육체가
감당할 수 없을 청년의 그것은 굵고 거대했던 것이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 시골무지렁이가
다른 흉기를 숨기고 있다가 밀어넣은 게 아닐까 하고
의심을 할 정도였다.
흡사 둔기가 몸속을 파고드는 듯한
강렬하고 뻐근한 느낌과 함께 시작된 청년의 무지막지한 행위는
수 년 이래 어떤 사내와의행위에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그녀를 몇 번이나 혼절시켰다.
사내는 거칠었다.
황소처럼 난폭하면서도 끝이 없었다.
유향은 상대가 흡사 몇년을 굶었던 것을
한 번에 자기 몸에 배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소호변에 은둔하여 수도승처럼 지냈던 담사는 일 년여 동안 쌓인 욕구불만을 한 번에 모두 배설해낸 것이다.
유향 같은 닳고 닳은 나이든 기녀를 택한 것도
젊은 기녀들은 그것을 감당해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향은 겨우 아침이 되어서야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담사는 밤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몇 번이고 혼절했던 유향이 깨어나면
그는 그 즉시 달려들어 괴롭히곤 했었다.
동창이 훤히 밝아서야 겨우 풀려난 유향은
전신을 쑤시는 아련한 통증과 함께
뼈 속까지 파고들어 남아있는 희열감에
새삼 다시상대를 쳐다보았다.
볼품없는 얼굴에 초라한 행색,
그리고 보통 보다 약간 더 클 뿐인 그의 몸에서
어떻게 그런 거칠은 힘이 숨겨져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몸이 드러났을 때 그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약간 갈색빛이 도는 육체에 구리빛 근육은 강철같이 단단해 보였다.
전신에 난 무수한 흉터가 더욱 강인해 보였다.
그것은 오히려 가슴에 난 털과 더불어 더욱 건강해 보였다.
정성들여 저녁상을 차린 유향은 음식이 담긴 소반을 든 채
수줍은 처녀처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담사는 그녀의 출현에 힐끗 시선을 던진 후
다시 무표정하게 어두워져 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눈길이 밖으로 향하고 있지만, 그의 정신은 다른 데 있는 듯했다.
{차린 것은 없지만 식기 전에 드세요.}
유향은 남편을 모시는 것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담사는 느릿하게 시선을 유향에게 돌렸다.
유향은 그의 시선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거려 고개를 푹 쉬였다.
담사는 말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음식을 먹는 방법은 특이했다.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골고루 먹으면서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유향은 그 모습을 행복한 눈빛으로 지그시 응시했다.
잠시나마 그녀는 자신이 한 남자만을 섬기며 사는 평범한 아낙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거의 한 시진에 걸쳐 음식을 천천히 그러나 남김없이
모조리 입안에 삼킨 담사는 품속에서 은자를 꺼냈다.
족히 이십 냥은 될 그 은자를 담사는 소반 위에 올려놓았다.
{돈은 주시지 않아도 돼요.}
유향은 약간의 서운한 감정을 느끼며 말했다.
자신이 이 어린 남자의 아낙이 된 듯한 환상이 그 은자들로 인해서 산산이 깨어진 것이다.
{오늘밤까지 예약하는 것이니 사양할 필요 없어.
나가있다가 삼경 무렵에 다시 들어오도록 해.}
하지만 담사는 냉랭하게 말하며 침상에 몸을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유향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종래 아무런 말도 못하고 나직히 한숨만 토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눈을 감은 담사는 잠이 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번 청부자의 정체는 생각보다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그들은 자객을 고용하기 위해 결코 간단하지 않은 거액의 돈을 지불했다.
아직까지는 그들이 목표로 하는 표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황금 일만 냥이란 거액의 대금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의 원하는 표적은 대단한 거물이 틀림없을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철혈무정(鐵血無情) 석무심이라는 인물은
담사 자신에게 비해도 결코 못하지 않은 절정고수다
. 만약 정면으로 상대한다면
그는 아마도 석무심의 적수가 안 될는지도 모른다.
암수(暗手)와 함정(陷穽)을 구사하는 것이 특기인 자객이
정식으로 무공을 수련한 일류고수를
정면으로 상대해서는 승산이 없는 것이다.
그런 석무심 정도의 고수를 포용하고 있는 집단에서자신을 고용했을 때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담사의 표정이 절로 음울해졌다.
자객으로서의 직감이지만 이번 일에는 막대한 위험이 따를 것이다.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여태까지 철저히 감추어 온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고 자칫하다간 생명까지 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까지 그는 여러 차례 살인을 해왔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정체에 대한 어떤 흔적도 남긴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행동했다.
심지어는 청부 중개인인 팽노대에게마저도
자신의 진실 된 정체를 모르게 하기 위하여 신경을 썼다.
때로 그는 자신의 발자취를 없애기 위하여
부득이 여러 사람을 파멸시킨 적도 있었다.
그러한 살인은 그에게 아무런 금전적인 이익도 없었지만,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였다.
그는 조그만 일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쓴 대가를 얻고 있었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수 명의 인물이 자신의 손에 파멸되고
살인 현장에는 담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남긴 상당한 증거물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체에 관해서는 관부나 무림 대문파들조차도
전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의 값은 비싸고, 그만한 가치와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담사는 봇짐 속에서 나무갑을 하나 꺼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는 조그만 구리 거울과
변장에 필요한 도구가 들어 있었다.
그는 재빠르고 익숙한 솜씨로 변장을 했다
. 턱 밑에 수염을 붙이고 얼굴을 문지르자
무겁게 중병이 든 얼굴처럼 변했다.
완전히 변장을 마치자 어리숙해보이던 시골청년은 간데없고
사십대의 중병이 든 듯한 농부처럼 보이는 얼굴이 나타났다.
이어 황삼을 벗고 허름한 마삼(麻杉)을 걸치자
그는 영락없이 시골의 농부처럼 보였다.
잠시 뒤 다시 봇짐을 챙긴 그는 창문을 열고 날렵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철혈무정 석무심이 머물고 있는 상가장(桑家莊)의 바깥에는
짙은어둠이 깔려 있었다.
오늘밤 따라 달도 보이지 않아 주위는 먹물같이 어둡고 적막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그만 등잔불은 허름한 방 안을 따뜻히 밝혔다.
석무심은 기이한 시선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면사(綿絲)여인을 간간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여인은 두터운 면사로 얼굴을 가려 본 모습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걸친 자색(紫色)의 우아한 치마와 연갈색 상의는
시중에서 보기 힘든 비단천으로 만들어졌으며
요란한 장신구로 치장된 날씬한 몸매는
그녀가 대단한 미녀임을 느끼게 했다.
징! 징!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징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되었군.}
석무심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창밖을 응시했다.
마침내 제사의 자객 담사가 정한 시간이 된 것이다.
헌데 막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석무심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크게 치떠졌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창 밖의 담벼락에는
어둠과 함께 서 있는 농부 차림의 사나이가 한명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면
석무심은 그 허름한 차림의 농부가
바로 어제 만났던 담사라는 인물이라는 것을
죽어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석형, 늦지는 않았겠지요?}
흡사 귀영처럼 창밖에 다가선 담사는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방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다루기 힘든 자로군.)
고저장단이 없는 무미건조한 그 음성으로
비로소 상대가 담사라는 것을 깨달은 석무심의 검미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불쾌한 기색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지금 이 방 주위에는 자신의 수하들이 물샐 틈 없이 지키고 있고 또 그의 청각으로 사방 십여 장의 동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헌데, 그는 담사라는 이 자가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내심 노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명하군. 고명해! 당신의 진실한 모습은 영원히 알아내지 못하겠군.}
석무심은 담사가 역용한 사실을 비웃듯 이죽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내 진실된 모습을 알 필요가 없으니까.}
담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말투는 평이했지만 그의 눈빛은 섬뜩한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누구도 내 정체를 모른 것!
내가 노리는 바는 바로 거기에 있소.
기밀의 유지는 당신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당면한 문제요.
나의 정체는 일을 수행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 주된 목적은 일을 만족하게 처리하는 것뿐이니까.}
담사의 착 가라앉은 그 말에 석무심은 자존심이 상하는지
차갑게 말했다.
{당신의 실력도 말솜씨와 같은지 궁금하군.}
하지만 담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싱긋이 웃었다.
{석형, 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그쪽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오.. 다소 기분이 나쁘더라도 그 점을 잊지 말아 주시오.}
{알겠소.]
석무심은 쓴웃음을 띠우며 면사여인을 소개했다.
[이 분이 이번 일을 주재할 분이요.]
하지만 담사는 손을 들어 석무심의 말을 막앗다.
{잠깐, 나는 일을 하려고 왔지 이름 따위나 듣고 있을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오.}
면사여인의 눈이 면사 속에서 반짝 빛을 발했다.
그녀는 처음 석무심을 통하여 담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한 흥미를 일으켰다.
석무림을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호기심을 가졌던 것이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담사의 언사에
석무심은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면사여인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너무 날뛰는 것은 신상에 좋지는 않지.}
석무심은 담사를 노려보며 짧게 말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속에는 짙은 살기가 서려 있었다.
담사는 석무심을 쳐다보며 서늘한 미소를 띠었다.
{강호를 위진하는 철혈무정(鐵血武情)의 이름으로 말이오?}
조롱하듯 말하는 담사의 말에 석무심의 눈썹이 휘어졌다
. 어지간한 그도 인내의 한계를 느꼈다.
담사란 이 작자에게는 사람의 속을 긁어놓는 묘한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석무심이 발작을 하려고 할 때였다.
{사형은 잠시 나가 있도록 하세요.}
면사여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듣는 이의 귀를 시원하게 만드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차갑고도 단호한 위엄이 깃든 목소리였다.
{이 일은 제가 처리하겠어요.}
여인의 말에 석무심은 무언가 항변을 할 듯 입을 발렸지만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밖으로 나갔다.
{당신이 담사라는 사람인가요?}
단둘이 남게 되자 면사여인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담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담사 역시 면사여인의 우아한 자태를 살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칩시다.}
순간 면사여인의 신형이 움찔했다.
{이상한 대답이군요.
맞으면 맞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그렇다니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소.
나의 이름은 항상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오!}
문득 면사여인의 눈빛이 예리하게 변했다.
허름한 그의 몰골로 보아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살수로서는 거리가 먼 인상이다.
하지만, 엄중한 경비를 뚫고 소리 없이 나타난 것과
종잡을 수 없는 모습, 그리고 석무심을 조롱하는 태도는
그가 뛰어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당신이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확실하군요?}
면사여인의 눈꼬리가 약간 휘며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렇소.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두터운 면사로도 가려질 수 없는 여인의 해사한 웃음에
담사는기분이 유쾌해진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나이나 육체의 조건, 실력 등은 내 자신의 문제요.
당신들이 믿지 않는다해도 나는 이 직업에서는 최고이며,
황제라도 조건만 맞는다면 목을 자를 수 있소.}
{호호...! 당신의 말은 매우 재미있군요.
허나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황제의 목이 아니니..!}
여인은 사내의 애간장을 녹이는 해맑고 고혹한 음성으로 웃었다.
하지만 그녀 웃음을 듣는 순간
조금 밝아졌던 담사의 표정이 갑자기 음산해졌다.
{흐흐! 그러나 당신들이 내게 맡기려는 일이
황제를 죽이는 것보다 오히려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소.}
면사여인이 처음으로 움찔 몸을 떨었다.
{좋아요. 말이 통하니 우리의 거래는 쉽게 이루어질 것 같군요.}
{나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소. 이런 거래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
면사여인은 잠시 동안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을 접한 담사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스쳐지났다.
{나에 관해서 흥미를 느낀 모양인데,
나의 정체에 어떤 사항을 모색하려는 것은
정말 무리한 일이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석무심이 나에 대하여 철저히 조사를 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소.
그걸 부정하지는 않겠지요.}
한 동안 기다려도 면사여인의 입에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자 담사의 입가로 야릇한 표정이 스쳤다.
{석무심이 모충이라는 자는 죽이면서
월화루의 월화를 죽이지않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어.
한 번 문 표적은 지옥 끝까지라도쫓아가 찾아낸다는
귀견수(鬼見手) 조중이 그것을 놓칠 리 없지.}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리는 담사의 말에
여인의 면사가 부르르 떨렸다.
얼굴을 가린 면사로 인해 표정은 볼 수 없었으나
그녀가 크게 놀라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당신은 많은 것을 알고 있군요. 지나치게 알고 있는지도 모르죠.}
면사여인의 음성엔 더 이상 웃음기가 실려있지 않았다.
하지만 담사는 개의치 않는 듯 편안히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지나치게 안다고는 할 수 없소.
이런 일을 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상세히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요.}
{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조사해야만 하오.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청부살인을 직업으로 삼아오면서도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아마 그러한 준비 덕택이었는지도 모르오.}
면사여인은 그가 한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객이란 이 위험한 직업에서는 작은 실수나 무지가 곧 죽음으로 연결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담사라는 이 의문의 사나이를 살펴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영민한 뇌리에서는 이번 일에 동원된 다른 세 사람의 자객, 비마영(飛魔影)과 추명사(追命蛇), 그리고 백명추혼(白名追魂)이라
암호로 불리는 낭혼(狼魂) 등의 살수들과
눈앞의 이 인물을 비교해 보고 있었다.
앞서의 세 사람도 모두 각자 행동을 하며
그 세계에서는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이 인물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게
뛰어 들어 온 것이다.
모든 것이 신비의 장막에 단단히 갇혀 있는 것이다.
{당신은 이번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나 짐작은 하고 있나요?}
{어느 선까지는...}
말꼬리를 끄는 담사의 표정이 진지해 보였다.
{당신네 쪽은 힘은 있지만 정체를 드러낼 수 없기에
나를 고용한 것이 아니오?}
여인의 음성이 다시 명랑해졌다.
{그 말이 맞는다고 치고, 당신은 이번 일의 표적이 누구라고 생각하죠?}
담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상대는 짐짓 자신이 노련하다는 것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으나,
실은 이런 일에 애송이임이 분명하다.
그녀의 이번 질문에 담사는 가소로움을 느끼며 조소를 띠웠다.
{피차 사정을 확실히 합시다. 표적이 누구이든 간에 그쪽이 노리는 것은 무림맹(武林盟)의 거물일 것이요.}
담사는 이어 경멸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뿐 만이 아니지!
이 일에 무제한 돈을 쓴다는 것은
표적이 그만큼 위험이 많다는 것을 뜻하고,
당신들이이미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애송이를 하나 선택해서
불장난을 하다가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는 일부러 상대방을 화나게 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그들의 계획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긴다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실히 증명해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운 계획에 결함이 있다는 것은
담사 자신에게 있어서도 위험한 것이다.
만일 그들의 실수로 그의 발목이 잡힌다면 그는 아무 목적도 없이
자기의 몸을 위험에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이다.
모충의 건에 대해 조롱을 받자
과연 여인의 얼굴을 가린 면사가파르르 떨렸다.
아마도 면사 속의 안색이 붉으락 푸르락 해질 정도로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면사여인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평정을 유지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좋아요.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일에 관해 본론으로 들어가죠.}
{잠깐만!}
담사가 손을 흔들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내쪽의 조건이 결정될 때까지 그쪽의 표적을 알고 싶지는 않소.}
{좋아요, 얼마를 원하는가요?}
면사여인이 아미를 상큼 찌푸리며 물었다.
담사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보수는 총 이만 냥이어야만 하오. 물론 황금으로!
오천 냥은 이미 받았으니 일이 끝나면 만 오천 냥을 화룡전장에 넣어주시오.}
[이만 냥!]
면사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음색을 토했다.
{호호! 농담이겠지요.
그 돈이라면 하나의 현을 통째로 살 수 있는 엄청난 액수라구요.}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자는 일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자
갑자기 대금을 두 배로 증액한 것이다.
여인의 반응에 담사는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그쪽에서 그렇게 말하다니 정말 유감이군.}
담사는 허리를 펴고 면사여인을 노려보았다.
{당신들은 나에게 혹독한 추적의 대상이 되는
살인을 시키려고 하고 있소.
내가 확실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만한 돈이 있어야하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예상을 넘는 액수예요.
난 당신을 쓰는데 일만 냥이면 된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면사여인도 지지 않고 항의를 했다.
그러자 담사는 망설임 없이 품에서 한 장의 전표를 꺼내들었다.
{이것은 화룡전장에서 발행한 전표요.
모두 황금 오천 냥의 액수, 돌려드리겠소.}
그는 탁자 위에 전표를 올려놓고 미련 없이 일어섰다.
{밤이 깊었군.}
그는 정중한 자세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오랫동안 실례가 많았소. 그럼 이만...}
말과 동시에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면사여인은 그가 이렇게 빨리 포기하고 돌아갈 줄은 몰랐다.
담사는 대담한 도박을 걸었으며, 여인은 그가 이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우리의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는 급히 일어서며 담사를 불렀다.
{이야기는 기꺼이 듣겠소.}
담사는 문 앞에 선 채로 대답했다.
{한 가지 말해 두겠어요.
어떠한 이유든 간에 표적물이 당신이 암살하기 전에 죽는다면
우리는 계약금 외에는 한 푼도 지급할 수 없어요.}
담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인의 말 뜻은 분명히 알아 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기다리고만 있었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면사여인은 말을 계속했다.
{정해진 기간 내에 이 일을 끝내야 돼요.
우리도 당신이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할 때까지
시간이 제법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단오절(端午節) 안으로 일을 마치지 않는다면
이 일은 백지로 돌아가는 것이예요.
이 두 가지 조건만 맞는다면 이 일은 결정된 것이예요.}
담사는 문 앞에서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탁자 가까이로 다가와서 전표를 집어 품 속에 넣었다.
면사여인은 그제서야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것으로 이야기는 결정된 것이예요.}
그녀가 한시름 놓은 듯이 말하자
담사는 다시 의자에 앉으면 말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알고 싶지도 않고 도움도 필요 없소.
단지표적의 이름만 가르쳐 주시오.}
{좋아요. 역시 당신은 말이 잘 통하는군요.
당신 표적은 바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담사의 눈이 야수의 눈처럼 무섭게 빛이 났기 때문이다
. 자신의 뼈 속까지 보는 듯한 매서운 눈초리는 그녀로서 평생 처음 보는 무서운 눈길이었다.
이미 평범한 농부차림의 중년사내는 온데간데없고 지금 여인의
눈앞에는 한 번 노린 목표는 결코 놓치지 않는
맹독(猛毒)의 독사 (毒蛇)가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도 치명적이고 위험한...!
{표적은?}
굳어진 면사여인을 향해 담사가 재차 담담히 물었다.
면사여인은 가볍게 몸을 떨며 그의 눈길을 피했다.
{무림맹의 소맹주(少盟主) 연대강(燕大强)!}
여인의 입에서 토해지는 그 이름을 듣고서도 담사의 표정에는 한점의 변화도 없었다.
그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빛낼 뿐이었다.
{흐흐 무림맹의 소맹주라...! 그러고도 이쪽의 보수를 깎으려 하시겠소?}
그는 느릿하게 일어서며 계속 말했다.
{그를 죽인 뒤 나는 일생동안 무림맹의 감찰전에게 쫓겨 다녀야할 신세가 된 것을 알면서도 말이지.
거기에 또 구파일방 외에 북방무림의 패주(覇主)인
북천뇌보(北天雷堡)의 추적도 피해야 하고 말이야.}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이 일을 성공하면
나는 전 백도(白道)무림의 공적이 된다 말이오.
아무튼 그쪽에서 받는 돈은 필요한데 쓰이게 될 것이요.}
말을 마치자 담사는 몸을 돌렸다.
{두 가지 조건을 잘 기억하세요.
한 가지라도 잘못된다면 우리는 한 푼도 주지 않을 테니까.}
면사여인은 냉랭히 그의 등 뒤를 향해 외쳤다.
담사는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항주의 번화가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의 중요성을 너무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표적(標的)은 결정(決定)되었다!
상대는 천하무림의 대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거물 중의 거물인 것이다.
거기에다, 그의 주위에는 무수한 절정고수들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호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객인 그의 사기를 드높이고
자극을 주는 하나의 도전일 뿐이었다.
-범천대공(凡天大公) 연대강(燕大强)!
그의 부친은 무림맹을 만든 우내삼기(宇內三奇)의 일 인인
신검황(神劍皇) 연주백(燕州伯)이다.
무림맹 삼태상(三太相)의 일인인 부친의 후광과 빼어난 재질을배경으로 그는 이십 세가 되기 전 무림맹의 차기 후계자로 내정되었고
고절한 무예와 지모(智謀)로 강호에서 협명(俠名)을 떨치고있었다.
게다가 타고난 관옥(貫玉) 같은 용모는
강호 명문규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니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절세미녀가 따르고
세상에서 온갖 행운을 차지한 전형적인 명문의 후예였다.
비단 배경과 외모뿐이 아니었다.
그는 부친인 신검황의 성명절기인 신허검법(神許劍法)을극성까지 익혔고 또 철불(鐵佛)이라고도 불리는 혜천(慧天)대사로부터
소림절기까지 이어받아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실공히 천하기남(天下奇男)이기도 하다.
바로 그 당대제일의 기린아 범천대공 연대강이 표적인 것이다.
강호 뭇 여협들의 가슴을 애태워온 연대강은
다가오는 단오절에서북무림의 맹주격인
북천뇌보(北天雷堡)의 여식과 화촉(華燭)을 밝힐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면사여인이 단오절 안에 일의 결행을 요구한 것은
복잡한 내막이 있을 것이다.
물론 담사로서는 그 내막이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었고
흥미도없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직업인 자객의 역할만을
확실히 수행해 내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