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장 ------ 閻王府...... 陸地
좌르르......
드러눕는 우유빛 물결.
온통 거무튀튀한 흑강석을 깍아 만든, 그래서 섬칫하도록 사이한
기운이 칙칙하게 배어나오고 있는 거대한 대전의 바닥중앙에 사오
장 넓이의 욕탕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새하얀 산양의 젖인데......
춤춘다.
우유빛의 물결을 타고 해초처럼 흐느끼듯 우유와 대비되어 유난
히도 검고 윤기가 발해지는 검은머리가 물결을 타고 춤을 춘다.
적당히 데워진 산양의 젖에서 우러나오는 수증기 속에...... 사
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채 검은머리만 춤을 추는 광경은
그렇지 않아도 섬칫한 사기와 발해지는 거대한 흑전에 더할수 없이
사이하고 심혼을 휘잡는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조용한 물결.
그것이 한차례 크게 일렁인 것은 어느 순간이었을까?
손.
더불어 우유빛 물 속으로부터 서서히 떠오르는 것은 나긋하고도
산양의 젖보다 더욱 희디흰 손이었다.
오오......!
대체 그 섬연의 팔을 어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백설같이 희면서도 속이 비칠 것만 같이 투명한 손이 있다면 바
로 이러한 손인데...... 뒤이어 또 한차례의 물결이 일며 또 하나
의 섬섬옥수가 나오며 천천히 손등부터 훑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스르르......
하나의 섬연한 손이 또 하나의 손을 훑어내려가는 미끄러지는 듯
한 나긋나긋한 움직임!
오오, 숨이 막힌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일렁이는 유혹의 물결이란......!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폭발적인 유혹 때문일까, 아니면
대전에 짙게 드리워진 칙칙한 사기 때문일까?
해초처럼 흐느끼는 흑발 사이로 솟아오른 섬섬옥수의 움직임은
아름다움 이전에 기이한 전율을 불러 일으키며 악마의 숨결과도 같
은 마기를 뿌려내고 있었다.
스르르르......!
섬섬옥수가 서로 한차례 훑어 내렸을 때, 산양의 젖에 둥근 파문
이 일며 사방으로 퍼진 채 물결을 타고 있던 흑발이 정점으로 모아
지면서 한 여인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또르르르......
새하얀 우유방울이 수발에서부터 얼굴을 타고 어깨위로 구름따라
드러나는 나신.
일시에 천지가 밝아지는 것인가?
우유보다 더 해맑고 백설처럼 투명한 설부가 드러난다.
보라, 그 아름다운 여인의 용자를!
환하게 느껴지는 이마에 발그레한 장미빛 볼.
초승달처럼 휘어진 섬연한 아미에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이 태양
빛을 반사하듯 영롱한 빛을 머금고 있는 눈동자라니......
뿐이랴?
고즈넉한 콧날에 화편을 머금은 듯한 입술에, 가늠한 턱의 선이
극미를 이루고 있으며 그 선이 풍만한 귓볼과 이어져 폭발적인 마
력을 발하고 있다.
그 마력에 유혹을 더해주듯 애처러울 정도로 가녀리고 섬세한 목
덜미에 보송한 솜털이 유리알처럼 은은히 빛을 발하는데, 선이 이
어지는 둥그스름한 어깨는 사슴처럼 섬연한 극미의 선을 그리고 있
었으니......
드러난다!
수밀도처럼 탐스럽고 눈부신 가슴이...... 아니 더하여 설원과도
같이 말쑥하고 매끄러운 아랫배에 이어 잔잔한 구릉의 능선을 넘어
서 태고의 신비가 간직되고 뜨거운 열정의 생명력을 안고 있는 비
림이......
본시 인간은 원시적인 모습보다 살며시 가려진 선이 아름답듯 지
나친 노출은 아름답기 보다는 추악하다는 관념을 불러 일으키기 마
련이다.
그러나 단언컨데...... 이 여인의 육체를 보는 순간 조화옹의 진
전한 예술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리라.
여인이 미끄러지듯 욕탕에서 나올 때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잔잔한 대전의 공기에 미미한 파랑을 일
으키며 백의를 걸친 네명의 여인이 들어섰다.
그녀들의 손에 들려있는 백설보다 눈부신 백라의와 장식물들.
그녀들은 익숙하고 빠른 동작으로 여인의 나신을 닦고는 백라주
단을 펼쳐 천막치듯 여인의 동체를 가렸다.
그녀의 동체가 아쉽게도 가려졌을 때였다.
스스스......!
하나의 핏빛 그림자가 소리 없이 여인의 등 뒤에 내려서며 부복을
한 것은.
실로 귀신과도 같은 신법일진대......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림자에게 느껴지는 섬뜩한 사기였다.
피!
셈세한 몸과 머리가 여인임에 분명할진대 흡사 정혈의 화신인 양
핏빛과 머리, 그리고 걸치고 있는 옷마져 시뻘건 핏빛 일색이 아닌
가?
"혈령사자! 태주님의 명을 받고 대령했나이다!"
내려서자마자 울린 음성,
오오, 어찌 그것을 사람의 음성이라 할 수 있으랴?
감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흡사 만년동굴에서 불어나오는
음풍처럼 차가운 그 음성을......
사르르르......!
그 한마디가 대전을 울렸을 뿐, 여인은 우유를 닦아 내고는 마치
자신의 일에 스스로 빠져들듯 조용히 백라의를 걸치기만 할 뿐이다.
완전히 백라의를 걸친 여인이 화편과도 같은 입술 사이로 음성을
한줄기 바람처럼 흘려낸 것은 그녀의 손이 머리에 장식할 명옥의
투명한 나비를 한 여인에게서 건네받을 때였다.
"듣고 싶다. 혈부문을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
흡사 옥구슬이 은쟁반 위에 사르르 구르는듯한 명랑하고도 청량
한 음성일진대......
아아, 차갑다.
아니 무심하다.
그 화편같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고 믿기에는 너무도 무심한
그래서 섬뜩한 사기마져 느낄 무심한 음성이다.
혈령사자, 그녀는 한 순간 미미하게 어깨를 떨었다.
혈부문!
피빛의 도끼가 상징하듯 현 무림에서 가장 잔인하고 패도적인 이
름으로 천하무림인들의 고개를 저으며 공포의 빛을 떠올리는 이름.
헌데 지금, 태주의 어조는 마치 혈부문의 운명을 결정하여 가볍
게 처리하고 싶다는 어조가 아닌가?
혈령사자는 머리를 숙이며 예의 차갑고도 무심한 음성을 토해냈
다.
"멸!"
단 한마디.
비록 짧은 한마디에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도 명백한 뜻이 아닌가?
"이유는?"
태주는 수려하게 틀어올린 머리에 명옥접을 꽂고는 한 여인에게
서 푸른 빛의 구슬이 꿰어져 있고 역시 푸른 옥으로 만들어진 초생
달이 매달려있는 목걸이를 받아들며 예의 무심히 스쳐가는 음성을
흘려냈다.
"본 염왕부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이 혈령사자는 잘라 말했다.
헌데, 지금 그의 이름을 들었는가?
<염왕부.>
녹림의 세력이 하나로 규합되며 아룬 거대한 마벌.
당세 무림에 휘몰고 있는 거대한 마의 하나!
그렇다면 바로 이곳이 불과 몇개월 사이에 무림을 피의 공포속으
로 몰라넣은 사대마세의 하나라는 말인데......
혈령사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 한마디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 들었는지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혈부문의 문주인 천폐혈부 자공량은 본 염왕부를 거
부하는 대신 잠마천교와 사성, 그들 두 세력과 손을 잡으려는 듯 왕
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무서운 말만 토해내는 혈령사자.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이름을 만일 누군가 들었다면 심장이
터지고 말았을 것이다.
<잠마천교.>
스스로 마의 종주라 일컬으며, 지난 칠백년간 천하제일가에 억눌
려 온 마의 부활을 부르짖고 다시 일어선 마교.
<사성.>
사여 영원하라!
거역하는 자 오직 죽음만이 존재하는, 그 힘과 세력이 능히 잠마
천교와 비견할만한 사도의 대집체.
사대마세 가운데 두 개의 이름이 혈령사자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것이다.
태주는 목걸이가 수발 위에 겹겹이 둘러지며 푸른 옥을 깍아만든
초생달이 이마에 살포시 내려오자 이내 몸을 놀리며 나직하고도 무
심한 음성을 한줄기 바람처럼 흘려냈다.
"세상에 알려라. 염왕부를 거역하는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존명!"
혈령사자는 치장을 완전히 끝내고 사라져 가는 태주를 향해 깊숙
한 부복으로 전송하였다.
결정.
이미 혈부문의 운명은 태주의 한마디만으로 결정되고 만 것이다.
* * *
때는 메마르고 벌레먹은 고엽만이 바람결에 정처없이 딩구는 깊
은 가을.
쏴아아......!
은색의 포말이 양광에 반짝이는 모래사장.
지금, 태초에서부터 침범했던 이가 없는 듯한 깨끗한 모래사장에
하나하나 발자국을 찍어가는 인물이 있었다.
헤질대로 헤진 옷도 그러했지만 헝클어진 머리가 막 태풍과 해일
을 헤치고 나온 듯한 형상일진대......
사내는 두 눈 가득히 신기하다는 듯한 빛을 뛴 채 허리를 숙이더
니 모래를 두 손으로 가득 떠올리며 코로 가져갔다.
그런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흠, 같은 모래이건만 냄새가 사뭇 다른 것 같구나."
무슨 말인가?
모래면 모래지 냄새가 서로 다르다니......?
행색만큼 머리가 돌아버린 사람인가?
그러나 차라리 애처로울 정도로 깊은 한을 가슴에 안고 있는, 그
렇기에 스스로의 모든 것을 안으로 가두어 버린 여인 단봉중옥.
한떨기 수선화처럼 천신하면서도 사정없이 자신의 가슴속에 불길
같은 사랑을 심어놓은 그녀와의 나날들이......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다시는 메꿀수 없는 상처도 남겨놓
았다."
아픔처럼 나직한 음성을 흘려낸 금천풍호.
그는 어느 사인가 손가락 사이로 모래들이 빠져나간 것을 의식하
고는 몸을 돌려 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의 앞.
지금까지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그러했다.
언뜻 머리를 들어 올리며 모래사장 뒤로 이어지는 거대한 암벽의
물결을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
온통 신비하다는 듯한 기색을 머금고 있는 그의 준수한 얼굴은
바로 금천풍호가 아닌가?
불귀도.
마침내 죽음의 구역에서 그는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만이 모래사장의 드넓음과 내음새에 그토록 신기한 표
정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새롭고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그만
이......
문득 금천풍호는 무엇을 생각했음인지 몸을 돌려 망망대해를 주
시하였다. 지그시 대해의 끝없는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
에 서서히 짙은 음영처럼 떠오르는 영상.
사내는 바닷물의 냄새에 저린 모래의 냄새를 폐부 깊숙히 빨아들
이면서 스스르 눈까지 감고 있었으니,
"불귀도의 모래와는 감촉이 다르나. 육지의 모래는......"
불귀도!
한번 들어가면 두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마역.
헌데, 지금 이 사내는 그 이름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려내고 있
는 것이 아닌가?
"후훗! 몰랐어. 모래사장이 이처럼 광활하고 드넓은 것일 줄은......
이렇게 이 금천풍호도 세상이 또 다른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안 셈인가?"
금천풍호------!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