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생활성서 – 소금항아리]
인성을 취하신 주님의 신성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
2022/4/13/성주간 수요일
⠀
마태오 복음 26장 14-25절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
유다의 죄
예수님께서 자신을 팔아넘길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일제히 근심하며 예수님께 묻기 시작합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유다도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 여기서 제자들과 유다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라고 번역하는 ‘퀴리오스κύριος’를,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번역하는 ‘랍비ῥαββί’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의미합니다. ‘퀴리오스’는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며 제자들이 어린 나귀를 구해올 때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마태 21,3)라는 대답에서도 사용된, 부활의 영광을 누릴 ‘신적 칭호’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역사적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로서 갖는 ‘주님성(性)’ 즉 신적 권능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랍비’는 율법 교사에게 붙는 명예로 단순한 ‘인간적 칭호’입니다. 즉 유다에게 들어간 사탄은 예수님을 ‘주님’이 아니라 ‘스승’이라고만 부르도록 함으로써, 예수님의 인성은 몰라도 신성만큼은 부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수난을 통해 드러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모두를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승’으로만이 아니라 ‘주님’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유다에게 죄가 있다면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은 죄입니다.
⠀
김정일 신부(의정부교구 고양동성당)
생활성서 2022년 4월호 '소금항아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