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경(經) / 신성애
살다보면 너나없이 마음의 빚이 쟁여져 가는 걸 모른 척 하기 십상이다. 그러다 한순간 봇물 터지듯 빗장이 풀리면 온전히 자신을 내려놓는다. 모두들 하나로 이끄는 풍물소리는 또 다른 의미의 경經이 아닐까 싶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며 심연의 바닥을 훑고 가는가 하면 회오리처럼 모든 것을 삽시간에 날려버릴 듯 강렬함도 가졌으니 말이다.
동아리에서 연수를 갔을 때였다. 집을 새로 지은 동네사람이 풍물굿 한마당을 부탁해 왔다. 마침, 마지막 날이라 시간이 있어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다. 징소리를 신호로 꽹과리, 장구, 큰북을 울려대며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는 지신을 밟아 나갔다.
"어따 그집 잘 이었다/ 입춘 하니 대길이요 건양하니 다정이라/ 소재하니 황금 출이요/ 개문하니 만복래라 이 집이라 대주양반/ 동네출입 하시거든 남의 눈에 꽃이 되고/ 말씀마다 향기 나소"
줄줄이 사설이 실꾸리 풀리듯 나오고, 집주인은 연신 떡과 술이며 과일을 내어왔다. 성주풀이를 시작으로 우물, 장독, 부엌, 마구를 거쳐 뒤주신을 불러내어 어르고 달래었다.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 잠에서 깨어난 듯 일시에 술렁거렸다. 덩-더-쿵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덩실덩실 장단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였다. 잘박잘박한 발장단과 하늘거리는 손동작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멋들어지게 돌아갔다. 늘어졌던 가락이 점차 자지러지며 집안에 배어있는 나쁜 기운을 들어내듯 춤사위도 빨라졌다. 누군가를 위해 신명을 풀어낸 몸과 맘이 묵은 때를 민 것처럼 개운해졌다.
어차피 풍물이란 이웃 간의 벽을 허무는 난장의 놀이판이 아니던가. 주인과 객이 따로 없고 모두가 한데 놀며 복을 빌어주는 미덕의 장인 것을…. 천지만물의 기운을 빌어 축수하는 판이 끝나고 떠날 준비를 서두르는데, 아까부터 우리를 지켜보던 꼬부랑 할머니가 앞길을 막아선다. 내 집에만 풍물을 치고 헌집은 그냥 두면 찝찝해서 어찌하느냐며 한사코 붙잡았다. 열댓 집이나 찾아갈 거라고 미리 말해두었는데 모른 척하면 늙은이가 실없는 사람이 된다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일 년에 한 번 동네 사람 스스로가 집집이 돌며 살림살이의 윤택함을 빌었던 그 옛날처럼 기쁨은 나누고 모자람은 채우며 정을 나누고 싶어서였을까. 가무잡잡한 얼굴에 검버섯이 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은 채 발길을 재촉했다. 무언가 꾹꾹 눌러 놓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솟구치는지, 담 모퉁이를 돌다 말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모습에 언뜻 탈춤판의 할미 얼굴이 겹쳐졌다.
"이 집은 알토란 같으니 열심히 두드려라. 먹을 게 많이 나올 끼라."
"여기는 그냥 가자. 예수 믿으니 굿하면 안 된다."하고 곤궁한 집에 들러서는 "받을 복이 많도록 애살 갖고 치거래이. 설렁설렁하지 말고" 일일이 그 집에 맞는 사설을 주문하고는 삐뚝삐뚝한 걸음새로 앞서가며 지치지도 않았다.
얼마나 가슴속에 쌓인 것이 많았으면 어설픈 우리들의 장단이 위로가 되었을까. 악기가 없으면 숟가락 궁채와 젓가락 얼채로 감자상자 장구를 쳐도 전혀 객쩍을 필요가 없는 풍물가락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것이다. 꽹과리와 장구채비는 어느새 풀풀 날고 북채비도 굿걸며 휘몰이로 사람들을 돌아쳤다. 느슨한 마음 줄을 팽팽하게 끌어당겼다.
적당히 놀아주는 놀이판은 불가사의한 세계로 사람을 끌고 갔다. 서산에 불그레하게 노을이 퍼지듯 늙고 야윈 얼굴들에 서서히 붉은 물이 들었다. 바야흐로 사방이 풍물소리에 파묻혀서 빙그르르 돌았다.
어느 순간 풍물을 치던 우리들은 믿기지 않는 놀라운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성한 사람 못지않게 허리를 쭉 편 할머니가 훨훨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온몸의 기운이 살아 도는 그 신명의 소리가 굽었던 허리도 꼿꼿이 세워 놓았을 줄이야. 열었다가 달아내고, 맺었다가 풀어내는 가락에 따라 온몸이 흔들리며 무아지경에 든 것 같았다. 제 흥에 겨워 절정에 이르면 막혔던 기혈이 뚫리고 가벼워질 수 있는 게 몸인가 보다. 나이도 아픔도 잊어버리고 자신마저 벗어던진 몰입에 든 그 모습은 딴사람처럼 보였다.
진실로 무엇에 취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보이지 않는 소리의 힘이 그리 센 줄 예전엔 몰랐었다. 희한하게도 할머니의 몸은 풍물에 감응된 듯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소나기처럼 흥을 쏟다가 햇살처럼 풀어져 흐느적거렸다. 그러다가도 따-땅하고 장단이 멎으면 지팡이를 찾아 두리번거리셨다. 방금 전의 날렵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또닥또닥 지팡이 소리 울리며 다음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해가 설핏 넘어가도록 비설거지 하듯 풍물을 치고 다녔다. 마지막 집에 도착하자 저녁을 대접하겠다며 노인은 외딴집으로 먼저 건너가셨다. 구수한 된장국에 잘 익은 김장김치면 되는데 풀물판이 끝나도록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설마 그새 잊어버렸나 싶어 일행을 보내고 한참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심부름을 간 사람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 가쁘게 달려왔다. 나들이 차림의 할머니가 말끔히 치워진 방 안에서 미동조차 없다고 했다.
고인물을 휘젓듯이 원시의 본능을 일깨우는 풍물소리가 이승과 저승의 문을 여닫는 어떤 손길로 느껴졌을까. 할머니는 한바탕 소리 경으로 먼 길 떠나기 전에 정들었던 모든 것들과 작별인사를 하였나 보다.
영혼을 일깨우듯 두-둥 북소리가 들려온다. 새털같이 여린 가벼움의 뿌리도 한없는 무거움에서 움터 오를진대 뜨거운 열망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삶일지라도 한순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서로 마주 앉은 채, 때론 등 기댄 채 살아온 살가운 이를 떠올리며 나는 살풀이를 하듯 풍물을 치러간다. 엉겼던 것을 풀어내고 녹여내는 그 무엇을 찾아 아득한 보이지 않는 맥 속으로 잠행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