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5일 오후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이를 기념하여 현재 인천광역시 해안로 올림포스호텔 앞 삼거리에는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이 서 있다.
이로써 미감리회와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서울과 함께 인천은 감리회의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선교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은 내리교회였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들은 조선 정부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 전도나 종교 행위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1898년 6월 정부가 ‘전도하는 일을 하도록’ 호조(護照-며행증명서)를 발행해 공개적으로 인정하기전까지 공식적인 복음전도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공개적인 복음전도가 허용되기에 앞서 이미 인천 지역은 복음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복음화에 헌신한 이들은 다름 아닌 인천 내리교회의 교인들이었다. 이들을 후원한 것은 1892년부터 인천구역 담당자로 파송된 존스(G.H.Jones) 선교사였다. 한국인 전도자들은 열정적으로 서해안 지역과 섬들을 누비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바로 이들을 통해 복음은 인천을 거점으로 하여 뱃길을 따라 확산 되기 시작하였다. 남쪽으로 서해안에 따라 화성지역에 이르고 북쪽으로 황해도 연백지역까지 이르렀다. 인천에서 가장 가까운 섬인 강화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수난과 저항의 역사
강화는 서울의 출입을 지키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곳은 몽고, 프랑스, 미국, 일본군과 같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민족적 시련이 닥칠 때마다 늘 마지막 저항지가 되었다. 또 정치 투쟁에서 패배한 이들이 유배와서 한(恨)을 간직하며 죽어 갔으며, 최근에는 민족 분단의 현장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강화는 어느 곳보다 많은 ‘한과 눈물’을 간직한 채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체험한 곳이다.
이러한 곳에서 강화 사람들은 독특한 문화와 종교를 만들어냈다. 수난과 저항의 역사는 강화의 기독교를 처음부터 민족적이며 주체적인 색깔을 강하게 만들었다. 감리교와 성공회에 의해 이루어진 강화의 기독교는 토착화된 문화 유적과 함께 민족과 더불어 수난당하며 십자가를 젊어진 모습 속에 신앙인들의 열정과 헌신이 어울러진 신앙 유산을 남기고 있다
성공회의 대표적인 신앙 유적으로는 강화읍 관청리 422번지의 산마루턱에 자리잡고 있는 ‘강화읍성당’을 꼽을수 있다. 이 건물은 한국성공회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의 대표적인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지나가던 스님들이 가끔 발길을 멈추고 성당을 향해 정성껏 합장을 하고 지나간다는 ‘절 같은 교회’의 분위기를 갖고 있다. 성공회는 1897년 트롤로프(M.N.Trollope,趙馬可)신부가 강화읍내에 위치한, 견자산 산마루의 성터를 사들이고 터닦는 작업을 시작했다.
배(舟)모양의 터를 닦고 그 위에 서양의 전통적인 교회 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 양식을 조합시켰다. 건물 외형은 전통 한옥, 그것도 불당(佛堂)식으로 꾸몄고, 내부 배치는 서양 성당 건축의 양식인 바실리카, 로마네스크 혼합양식으로 했다. 성당 본체는 정면 4간, 측면 10칸이 되는 장방형 2층 석탑 모양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청․녹․황․흑․백 5색의 단청을 했다. 건축에 쓰인 목재는 백두산 원시림에서 벌채한 소나무로 트롤로프 신부가 직접 운반했으며, 목수일은 경복궁 중건 작업에 참여한 도목수가 맡았다. 성당은 1900년에 ‘성바우로와 성베드로 회당’ 으로 축성되어 봉헌되었는데, 현재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Ill호로지정되어 있다.
또 길상면 온수리에 자리잡고 있는 온수리성당은 1911년 11월 30일에 건축된 것이다. 성당 정문은 우진각 지붕의 솟을 대문 형태이며 지붕 아래 종이 달려 있다. 강화읍성당에 비해 화려함이나 그 규모가 왜소하지만, 소박하고 순수한 토착미를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온수리성당의 멋이다. 정면 3간, 측면 9간, 도합 27간 규모의 일자형 전통 한옥 형태로, 향교나 관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건물 형태이다. 지붕은 단층 팔작 지붕으로 공포 장식이 없고 단청을 하지 않았으며, 들보나 서까래에 아무 장식이 없다. 내부는 서양의 전통교회 양식으로 배치되었다.
김상임에게 임한 하나님의 섭리
반면에 1893년부터 성공회와 동시에 강화선교를 시작한 감리교의 모습은 성공회와 자못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성공회가 강화읍에서부터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어 간 반면에 감리교는 외곽지역으로부터 전파되었다. 복음의 수용 계층도 성공회가 주로 강화지방의 지배 계층과 유식자 계층이었으나, 감리교는 농어업에 종사하는 상민 이하 계층이 대부분이었던 것이 특징적이다.1892년 여름부터 인천에 머물며 선교활동을 시작한 존스 선교사는 강화읍에 들어가려다가 강화읍 유수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거절을 받고 인천으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결국 감리교의 강화지역 선교는 강화출신의 전도자에 의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설립한‘조선수사해방학당’덕택으로 수월하게 강화읍에 들어간 영국성공회와 달리 감리교는 강화읍에서 강한 배척을 받고 변두리를 통해 들어 왔던 것이다.
강화 서북 해안 서사면(지금의 양사면)시루미(甑山) 마을 출신인 이승환은 인천에서 복음을 접하고 존스 선교사에게 어머니의 세례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서사면 해안에서 내려 이승환의 집이 있는 시루미로 가려면 다리목(僑項)이란곳을 지나야 했다. 그때 이 땅의 임자인 ‘경주김씨’ 양반인 김초시가 “만약에 서양 사람이 내 땅을 밟을 시엔 네 놈의 집을 불사라 버리겠다”고 위협을 한 것이다. 이에 존스 선교사는 이승환에게 어머니를 배로 데려오라고 했다. 밤이 되어 달이 뜬 후에 이승환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다리목을 지나서 약300미터에 이르는 갯벌을 걸어 배에 도착했다. 그의 어머니는 달빛이 비치는 가운데 존스 선교사로부터 ‘선상세례’를 받았으며, 강화 최초의 세례 교인으로 ‘강화의 겨자씨’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이승환의 집에서 강화지역의 '첫'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한편 존스 선교사의 출입을 막았던 양반 김초시는 이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스스로 존스 선교사를 찾아가 만났다. 그는 대화 중에 기독교의 복음이 진정한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개종하게 되었다.그가 바로 강화 기독교의 선구자인 김상임(金商任)이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 변화시켜 사도 바울로 만드셨던 하나님의 섭리가 강화의 김상임에게 나타난 것이다.
1884년 10월 세례를 받고 다리목 마을을 복음화한 김상임은 시루미 이승환의 집에 모이던 평민들과 다리목 양반들을 한 곳에 모아 예배를 드림으로써 강화의 첫 교회인 ‘산교회’ 를 탄생시켰다. 양반앞에서 고개도 못들던 ‘상놈’출신의 교인들이 이제는 양반과 함께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로 부름을 받고 한 공간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이었고, 강화 사회에 가져온 가장 커다란 변화였다. 김상임은 이후강화 전역을 돌아 다니며 전도사역을 감당하다가 목사 안수 받기 네 달 전인 1902년 4월에 별세했다. 1995년 강화기독교백주년 기념사업회에서는 교산교회 안에 그를 기념하여 공덕비를 세웠다.
복음의 첫 씨앗이 떨어진 '교산교회'
강화에서 복음의 첫 씨앗이 떨어진 '교산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강화에서 두 번째 교회가 설립되는 것은 홍의교회이다. 송해면 상도리에 위치한 홍의 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박능일(朴能-)은 유학자 칭호를 듣던 김상임이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따지러 갔다가 전도를 받고 교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것이 홍의교회의 시작이었다.
특히 홍의교회 교인들은 같이 믿기 시작한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형제됨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이름끝자에 한 일(一)자를 넣어 개명했다. 이것은 신앙적 결단을 나타내는 강화 교인들의 독특한 신앙형태가 되었다. 홍의교인들은 이후 강화 다른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주역들이 되었다. 권신일 ․ 권혜일 부자는 바다 건너 교동으로 가서 1899년에 읍내리교회를 개척하였고, 종순일은 길상에서 교인을 얻었다.또 박능일은 1900년에 강화읍에 들어가 강화읍교회(현재 강화중앙교회)와 '잠두의숙'(현재 강화합일초등학교)을 설립하였다.
외세 침략을 통해 민족고통을 많이 체험한 강화교인들은 초기부터 민족적 신앙을 형성하고 있었다.1907년 일제가 구한국군대를 해산시킴에 따라, 해산군인들이 이에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강화에서는 친일세력인 일진회원들이 일제에 대해 비판적인 기독교인들을 무장 투쟁의 혐의로 밀고하였다. 결국 7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 강화읍교회의 김동수(金東秀)권사와 김영구, 김만수3형제는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가던 중 더리미(加里尾)해안에서 살해당했다.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던 이들의 죽음으로 강화의 복음은 외세와 육지 사람들에 대한 강한 배척심을 지니고 있던 강화사람들의 민족의식 속에 더욱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