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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쉐핑의 양림촌 묘지를 찾은 이일성경학교 학생들, 왼쪽 끝이 도마리아 교장, 1940년 사진(사진 제공 : 양국주) |
양림천의 거지들을 목욕탕에서 묵은 때를 벗겨주던 그녀, 새 옷을 입히고 복음과 더불어 육신의 허기진 창자를 배려하던 넉넉함. 그녀가 나눈 삶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같은 조선의 영광도 있는 것이다.
대동강 쑥섬에서 피 흘린 로버트 토마스 이래 조선에서 피 흘린 1200명의 선교사. 선교사의 삶, 누구를 위한 헌신일까? 선교사란 삶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쉐핑이 죽고 난 이후 남겨진 재산은 오로지 현금 27전이 전부였다. 텅 빈 저금통장은 그녀가 빈민들을 위해 사용하느라 마를 날이 없었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반 쪽짜리 담요는 반을 찢어 가난한 이들에게 구제하느라 주고 나머지 반 쪽으로 가냘픈 육신을 가려야 했다.
조선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에게는 식모뿐 아니라 유모를 고용하거나 자녀 교육비, 심지어는 애완견의 사육비까지 지급되었다. 선교사의 하루 식대가 3원인데 반해 쉐핑의 하루 식대는 언제나 10전이었다. 그야말로 다른 선교사가 사용하는 생활비 30분의 1로 자신의 목숨만 버텨온 셈이다. 쉐핑의 삶과 철학은 후배 선교사 유화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유화례에게 있어 쉐핑은 동역자요, 가족이며 믿음의 피붙이였다. 유 선교사는 수피아여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쉐핑의 이일성경학교에서 성경 교사로 봉사하였다. 쉐핑과 함께 보낸 8년이 유 선교사의 사역에 미친 영향과 자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은 불문가지다. 유선교사 주위에는 이러한 모범적인 동역자로 가득한 편이었다.
당시 남장로교 선교부가 위치한 양림동 선교사 촌에는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 선교사들이 많았다. 쉐핑을 위시하여 이일학교를 돕던 닷슨(도마리아), 매퀸(구애라)등 많은 여자들이 이런 저런 모습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1900년대 초 목포 지역에서 의료 사역을 했던 포사잇(N.H.Forsyth)은 의사로서의 치유뿐 아니라 시간만 나면 길거리에 나가 전도하는 일에 열정적이었다. 특히 포의사의 나병환자에 대한 애정은 유난하여 그에게는 ‘나환자의 아버지’라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였다. 특히 소록도 나병원과 나환자근절협회를 만들었던 최흥종 목사는 원래 신자가 아니었으나 나병환자에 대한 포의사의 살신성인적 헌신에 감동을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목사가 되었던 사람이다.
포의사는 사역하던 목포에서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 밤, 친구인 유진 벨이 맹장염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밤을 달려 광주로 오던 중 산모퉁이에 곡식을 덮는 데 사용하던 섬피 자락을 뒤집어 쓴 채 추위에 떨고 있는 나환자를 만났다. 그는 말에서 내려 자신이 입고 있던 털외투를 벗어 입히고 덥석 안아 말 등에 앉혔다. 나환자를 광주까지 데려온 그가 마구간을 막아 임시로 나환자를 수용하게 된 것이 오늘날 나병원의 시작이 되었다.
거지를 만나면 돈을 털어주고 헐벗은 이를 만나면 자신의 옷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 남들이 질겁하며 피하던 나병환자의 고름을 빨아주고 이들을 돌보던 사람들, 폐결핵과 온갖 전염병이 득시글거리던 1900년대 조선 사회에 그런 선교사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다.
성육신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육신 가운데 살점을 나누고 사랑의 언어로 대화하며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부르는 연애편지다. 그러한 이유로 삼천리 방방곡곡에 이름도 빛도 없이 찾아와 삶을 나눈 하나님의 사람들이 선교사다.
진주처럼 빛나는 삶을 살았던 쉐핑은 자신의 주검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하기도 했다. 사후 그녀의 장기는 시험관에 담겨졌고 볏짚을 뱃속에 채우고 바늘로 꿰매었다. 버려진 자와 함께 나누며 자신을 버리는 삶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선교자의 위대한 간증이 된 것이다.
호남 선교에 목숨 바친 유화례 선교사
유화례는 한국을 돕고, 이현필, 박석현, 손양원 목사는 유화례를 돕고
수피아에 피인 거룩하고 아름다운 꽃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한국인들을 남겨놓고 나만 떠날 수는 없다...』짧고 간결한 음성이 다소곳하면서도 강한어조로 한반도의 하늘로 울려 퍼진다. 그녀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뜨거운 청춘을 가슴에 묻고 선교의 극한에 선 가녀린 꽃처럼이나 아름답고 앳된 여성의 몸으로 83년전 이 곳 양림동 동산을 오르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조선, 광주, 양림동, 수피아학교, 양림교회... 척박하고 가난했던 땅, 나병환자들과 거지들로 북적거렸던 소외와 가난의 땅이었던 전라도로 파송되어 온 유화례, 그녀가 오르내렸던 양림동산 옆으로 갓 심어 놓은 호랑가시나무마저도 애처러워 했을 서른넷의 유화례(florence e. root) 선교사의 삶.
1927년 1월 11일 27일간의 긴 뱃길을 뚫고 도착한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 콜레라의 창궐과 풍토병이 우글거리는 미개한 나라 조선, 어쩌면 눈발이 뿌려졌을 머나 먼 바닷길을 헤쳐가며 부산를 지나 도착한 곳은 전라도 광주였다. 그녀가 졸업한 매사추세츠의 스미스대학은 하버드의 레드크립으로 웨슬리대학과 자웅을 겨루는 명문 대학이었고, 졸업 후 뉴욕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석사학위까지 수여받았지만 그녀가 열려진 기회의 문을 뒤로하고 여성의 몸으로 선교 미개척지인 한반도를 택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에서의 51년간의 삶의 긴 여정을 접고, 1957년 수피아여중고 교장직을 은퇴한 후 결국 1978년 미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독신의 삶 103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1893년 미국 뉴욕주의 쿠퍼스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유화례 선교사의 인생역정은 한편의 파노라마이며, 극적인 역경과 위기를 셀 수 없이 겪으면서도 늘 한결같은 신앙적인 베이스를 유지하며 살았던 복음전도의 철인이었다.
한편의 극적인 아름다운 드라마 철인의 귀환
1927년 광주, 양림천을 사이에 두고 서양인 선교사촌을 중심으로 태동하던 복음의 열매들이 한반도 미래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어린아이들의 교육 현장으로 승계되어 복음의 씨앗을 만들어 간다. 멀고 먼 조국해방의 아득함과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조선의 앞날... 수피아여고 음악교사로 첫 부임한 유화례 선교사에게도 1927년은 가슴 떨리는 해였을 것이다.
유화례 선교사는 제 5 대 수피아여학교 교장으로 1934년 4월 1일 취임하였고, 1937년 9월 6일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를 주도하였다.
수피아여학교는 1908년 4월 1일 미국 남장로교 배유지(dr. eugene bell) 선교사가 여학교를 설립 개교, 초대 교장으로 엄언라(miss ella graham) 선교사가 취임한 이래, 1919년 3월 19일에는 기미년 독립 운동에 전교생이 선봉으로 참가, 교사 2명과 학생 21명 등 23명이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고, 1929년 11월 1 일에는 광주 학생 독립 운동에 참가하는 등 복음과 애국이라는 뚜렷한 족적을 남겨놓고 있었다.
수피아여학교 폐교이후 애양원을 찾은 유화례 선교사는 애양원교회의 손양원전도사가 신사참배 문제로 광주지역의 목사들과 감옥에 구금중이었던 그때 수개월간 목자 없는 애양원에 머물며 예배를 인도하고 한센병 환자들의 친구로 살았지만, 결국 1942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했다.
해방 직후 조선으로 되돌아오려던 유화례 선교사의 간절한 바램은 남장로교 선교부의 반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한반도의 정세라는 게 일촉즉발의 화약고와 같았던 것이다. 노환에 시달리던 아버지와 가족들을 뒤로하고 끊임없이 지향해가는 불타는 마음 안에는 누가 있었을까? 기약조차 없는 조선으로 언제든 돌아가야만 할 것 같은 선교사의 삶이 주는 때로 고단함...
5년만의 귀환과 여수 애양원에서 손양원 목사와 함께
1947년, 5년만의 귀환이었다. 자신의 조국보다 더 사랑했던 나라 조선으로의 귀환... 결국 광주로 돌아와 손양원 목사의 애양원 교회 초청으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그녀의 하나님 사랑과 한국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증명된다. 은혜와 성령의 오순절 역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환자들에게도 조국의 해방과 누릴 수 있는 신앙의 자유는 실로 감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가난하고 빈 마음으로 부르짖었을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달고 오묘했을까? 시련과 고난의 시작에 주시는 은혜 앞에서 잔인한 일제치하와 신앙의 억압이 주었을 고통이 훌훌 풀려나가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터졌던 여순 반란 사건 때 손양원 목사가 동인이와 동신 두 아들을 잃고서 보여주었던 예수사랑의 정신에 유화례 선교사는 녹아내리는 사랑의 원자탄을 목격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났고, 21일에는 당시 순천사범학교에 다니던 그의 큰 아들 동인(東仁)과 순천중학교에 다니던 둘째 아들 동신(東信)이 좌익에 의해 '예수쟁이' '친미주의자'라며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인민재판에 회부되고 만 것이다.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며 신념을 지키던 두 아들이 무참하게 총살당한 것이다. 그렇지만 손양원 목사는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살려달라며 리승만 대통령에게 탄원을 하고, 증오 대신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유화례로서는 하나님의 생생한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대통령을 위시한 온 나라를 전율에 떨게 했던 목회자의 눈물 쏟아지는 사랑 이야기... 양림교회 박석현 목사와 유화례 선교사
박석현 목사는 진도군 의신면 출신으로 1899년에 출생하였고, 미국 남장로회로부터 파송받은 맥칼리(mc callie. h. douglas-孟顯理)에게 전도를 받았다. 여러 도 지방과 완도, 강진, 장흥, 그리고 박석현 목사의 고향인 진도 등지를 순회하면서 보여준 선교 개척자로서의 삶은 박석현의 마음 안에 작은 불씨가 되었고 당시 그의 마음은 활활 불처럼 타올랐을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 안에 녹아있는 사랑의 불덩이를 발견한 맥칼리 선교사는 그를 추천하였던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평생 어부로 살았을 그가 맥칼리 선교사의 추천으로 목포 여흥학교와 미국 남장로교 교육부의 스칼라 쉽을 받아 중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이후 당시 전남노회로부터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을 추천받았다.
1938년 평양장로신학교를 33회로 졸업했으나, 같은 해 평양장로회 신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폐교 당했다. 당시 박석현은 강신명, 계일승, 김양선, 손양원 등과 함께 졸업했으며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나주읍교회로 첫 목회지를 명받았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고 잔학한 일제는 신사참배, 학도병 징병, 정신대, 세금강제징수 등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거부하고 잔인하고 간교한 인간이하의 수단을 동원했으며 한반도는 전쟁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수탈의 장이 되어갔다. 이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 당시 지방에는 3년 동안의 가뭄이 계속되어 교회도 상당한 어려움에 처했었다고 전한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일제치하의 하늘... 하늘도 문을 닫고 인간으로서의 한계 앞에 부딪치게 했을 가뭄과 가난, 총칼을 배후에 업고 가하는 신앙의 핍박은 임박한 일본 제국주의의 종말을 깨닫지 못하게 했으며, 천황을 신성시하며 갖은 미화와 숭배로 정신적 지배를 이끌려 했던 일본의 간교함을 어찌 알았겠는가?
기독교안의 지울 수 없는 아픔의 흔적 신사참배
장로회 총회장 김응순은 “기독교 일본화”에 힘쓰는 일환으로 총회 서기 김종대 목사와 함께 이중교에서 궁성 요배(23일), 메이지신궁 참배, 야스쿠니신사 참배(26일), 이세신궁 참배(29일)를 하고 돌아왔다는「기독교신문」1943년 3월 3일자와 “장로회 총회대표, 靖國神社 참배”를 보면서 느껴지는 기독교 역사의 참담한 자화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에 앞서 1941년「장로회보」10월 1일자,『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0회 회록』에는 노회연맹 대표 72명이 참가하여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 부여신궁어조영 근로봉사대”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전필순ㆍ조승제ㆍ곽진근ㆍ박석현 목사가 이끄는 4대로 나누어 신궁 터를 닦는 작업을 하고 돌아왔다는 내용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이 박석현 목사의 뜨거운 신앙의 불꽃을 흔들리게 했을까? 목회 강단권과 교회 재산권, 노회 제명과 사택 몰수 등의 강압과 각종 회유와 협박이 난무했고 ‘신체제’에 적응한다고 하여 교회의 종을 떼어 바쳤는데 1942년 10월 15일까지 1,540개를 바쳤다고 나온다. 교회의 통폐합도 널리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당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자행된 교회안의 질서 파괴와 하나님에 대한 배교의 흔적은 한국교회의 커다란 아픔으로 남아있음을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는 없다. 참고로 1942년 장로교회 총수는 2,543개, 249,666명으로 나와 있다.
1945년 8월 15일은 민족의 해방이요, 교회의 해방이었다. 해방과 함께 박석현 목사는 시국대책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48년에는 건평 50평의 새 교회를 건축하는 등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며 선교활동을 펼친다. 1949년 18년간의 목회생활에서 은퇴하고 광주 양림동으로 이주하였지만 소식을 들은 양림교회 교인들이 김창국 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줄 것을 간곡히 청하여 양림교회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중견목회자로 안정된 목양을 했지만 1년도 못되어 비극적인 6.25가 터졌다. 박석현 목사가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였을 때 장모가 될 나옥매 전도사를 만나 딸인 김귀남 사모를 아내로 맞았는데 그의 장모가 된 나옥매 전도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4년 5개월간을 옥살이 하였던 장본인으로 전남노회에서도 유명한 신앙인이었다.
신사참배는 박석현 목사를 순교자로 만들었다.
그의 마음속을 휘몰아오던 신사참배라는 굴욕의 순간들이 수도 없이 교차 했을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산당의 무자비한 박해와 핍박을 감내하였지만 신앙의 결단 앞에서 죽음을 택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마음 한 켠에 진 신사참배로 인한 배교와 굴욕적인 양심이 회복될 수 있는 전기가 자신의 순교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원했을 수도 있다. 31년간을 속국으로 산 당시의 신앙인들에게 신사참배는 어떤 거부 할 수 없는 흐름이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6.25전쟁 중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총부리를 겨누는 동족인 공산당의 만행 앞에서 신앙은 선택이 아닌 절대적인 무언가를 그에게 부여했을 것이다. 목사와 일행 5명이 연행되가는 중 어린 아들 박원택을 살려주려는 인민군이 있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천국에 가야한다고 거절하여 결국 박 목사, 김귀남 사모, 나옥매 전도사, 아들 박원택, 신덕철 전도사 5인이 모두 순교하였다. 가족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태연자약하게 찬송을 불렀다고 하는 박석현 목사는 “식모는 내 식구가 아니니 놓아주시오."라는 간곡한 요청을 하였고 공산당들은 그 식모를 석방해주었고 한다. 그 때문에 박석현 목사와 가족들의 숭고하면서도 가슴 아픈 순교가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죽음 앞에 서서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하는 올해 다시금 신사참배의 부당함과 굴절된 교회 역사의 회복을 부르짖는 교회 안의 외침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간 우리는 두루뭉실하게 흘러가고 있는 배교의 역사를 외면하고 100배 성장이라는 과속 드라이브에 영성을 맡긴 체 우리의 속옷을 세탁할 마음마저 놓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숱한 순교자들의 숭고한 죽음위에 이미 교권과 영성 회복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아니었는가?
생각해 볼 일이지만, 예장 통합과 합동, 기장, 합신 등 4개 교단이 가졌던 2008년 한국교회 제주 선언문에서 1938년 제27회 장로교 총회 결의로 실시된 신사참배에 대한 70년만의 회개가 통한과 자복함으로 드려졌고, 이미 1992년 6월엔 고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가 템플턴상 수상 축하예배에서 “반세기 전에 지은 신사참배의 죄를 참회 한다” 고 머리를 숙인 것을 필두로 2006년 1월 기독교대한복음교회, 2007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시 같은 해 9월 총회 때 신사참배 행위를 사과한 적이 있다.
유화례 선교사, 박석현 목사와 손양원 목사의 순교를 아파하다.
유선교사는 1950년 10월 6일 밤에야 광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7월 23일 순교한 박석현 목사의 소식을 듣고는 그의 위대한 신앙의 결단에 크게 감동이 되어 그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면서 더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박석현 목사가 순교한 7월 23일이면 그녀가 공산당의 추적을 피해 홑이불로 묶인 몸뚱이 위에 두꺼운 헌 담요까지 덮고는 한참 기승을 부리던 더위를 무릎쓰고 몸과 옷까지도 땀에 절인 체 땀범벅이가 되어 5시간을 지게에 얹혀 피난을 가던 날 밤이었음을... 푹푹 찌는 담요 속에 숨어서 하루종일 지게를 의지하여 보내면서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음은 맨발의 성자로 알려진 동광원의 이현필 선생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욱 그녀를 아프게 했던 사건역시 1950년 9월 28일에 일어났다. 믿음의 동역자요 신앙의 친구였던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의 순교사건이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8일 일어 난 것이다. "내 주소는 주님의 품 속이며, 생일은 중생된 날입니다. 생일의 기쁜 잔치는 천당에 들어가는 그 날 뿐입니다."라고 말했던 산돌 손양원 목사의 음성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을 것이다. 믿음의 동역자 손양원 목사마저 6.25 전란중 인민군의 총탄에 여수시 둔덕동 한 저수지에서 처절하게 순교를 당한 것이다.
도대체 왜! 이 민족 안에 불어 닥치는 고난은 상상을 초월하는 극악과 극단의 모습이었을까? 과연 신사참배의 결과로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굴레였을까? 정치적 대립과 오랜 유교사회의 종속적 관계로부터의 자연스런 해방이 아닌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회주의 개념의 팽배로 인해 발생한 사상적 대립이 그 원인은 아니었을까?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가시지 않는 신사참배의 오욕... 벗겨도 벗겨도 드러나지 않는 이 정체불명의 무엇인가가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여전히 회개를 요구하며 신사참배 회개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한 단체까지 생겨나고 있는 것은 쉽게 잊어버리는 국민성에 대한 자정과 잊기에는 너무도 크고 과중한 책임이 따랐던 역사의 교훈과 아픔의 전철을 되밟지 않으려는 깊은 속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전쟁, 신사참배의 결과인가? 역사가 맞이해야 할 당연한 흐름이었는가? 사랑의 원자탄 산돌 손양원 목사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땅에서 삼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손양원의 아명은 연준이고 호는 산돌이다. 남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한 전도사이자 탐험가인 리빙스턴(1813∼1873)을 사모하여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1935년 4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능라도(綾羅島) 교회의 전도사로, 신학교에서는 뜨거운 기도생활과 성경 읽기로도 유명했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경남노회는 그런 산돌에게 목사 안수조차 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전도사 자격도 박탈하였다.
1939년 7월 15일 산돌은 신학교 동창인 김형모 목사의 추천으로 전남 여천군 율촌면 신풍리에 있는 나병환자들의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일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고 이름도 '양원'으로 고쳤고, 그의 부인도 양순(良順)으로 개명했다.
1943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체포된 후, 5월 출옥될 예정이었으나 전향(轉向)해야 한다는 검사의 위협에 "당신은 전향이 문제지만, 내게는 신앙이 문제"라면서 끝내 거부하였다. 결국 경성 구금소로 넘겨졌다가 1943년 10월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해방이 되어 1945년 8월 17일 6년만에 출옥하자 산돌은 애양원교회에서 다시 나환자 목회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새로운 목회인생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권하는 교인들에게 나환자 교인들을 버려 두고 혼자 피난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교회를 지키던 산돌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가, 전세가 불리해 후퇴하던 이들에 의해 28일 새벽에 총살당했다. 두 손바닥에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고 하니 죽는 순간의 영상이 머리를 스치운다.
유화례 선교사 죽음의 100일 피난체험과 동광원과의 평생지기의 연을 맺다.
1950년 7월 23일 아침 양림동은 전쟁의 여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양림교회 예배당으로 으로 달려온 조용택 전도사와 동광원 이현필 선생은 “양치는 목자가 양을 버려 둘 수 없다”고 버티는 유화례 선교사를 설득하고 피난을 종용하기에 이른다. 푹푹 찌는 삼복의 더위를 무릎쓰고 동광원에서 나온 두 명의 청년은 두꺼운 이불로 겹겹이 싼 유화례 선교사를 들처메고 양림동을 나섰다. 동광원과 유화례 선교사의 평생지기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피난지인 전남 화순까지 하루종일 지게에 의지하여 그것도 홑이불과 두꺼운 담요로 덥힌체 도암 마을까지 이동하였고 산의 모습이 학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613m 높이의 화학산 토굴과 농가를 오가며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인민군은 퇴각하였고 유화례 선교사는 1950년 10월 6일 밤, 3개월여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꿈에 그리던 광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보리밥과 쑥죽으로 연명하며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숨막히는 더위와 배고픔을 참고 돌아왔지만 조용택 선교사는 이미 순교한 뒤였고, 양림교회의 당회장이었던 박석현 목사도 가족과 함께 영암군 학산면에서 순교한 뒤였다.
놀라운 것은 광주가 수복되고 난 후 그녀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인민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의 위태로운 목숨을 『원수를 원수로 갚지말라』며 이들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숨겨주었던 동광원과 이현필 선생의 신앙에 대한 순수성과 신실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던 화학산에서의 삶을 통하여 동광원과 이현필 선생에 대한 기성교단과의 이단 시비를 해소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그녀를 위해 동광원 식구들은 무려 8명이나 순교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지만 유화례 선교사는 평생 동광원과 귀일원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그들을 조력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분단의 끝이 통일이듯, 분열과 분리의 끝은 하나됨이다. 가슴 아픈 전쟁은 휴전으로 결말이 나고 찾아온 전후의 아픈 상처는 많은 눈물과 고난의 부르짖음을 한반도에 남겨놓았다. 3년간... 동족간 전쟁이라는 슬픈 역사를 가슴에 담고 우리는 또다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북한의 두꺼운 장벽을 향해 기도를 퍼붓고 있다. 3대 세습이라는 기이한 정권의 탄생을 예고하며 잘사는 중국을 향해 러브콜을 보내는 김정일의 애타는 정권유지의 깊은 고뇌를 들여다보지만 중국을 살리는 힘은 지하교회의 1억명의 기도와 간구일 수 있다는 것을 김정일은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김일성⁃김정일 가문에 흐르고 있는 신앙의 베이스에 귀를 기울이고 지금 북한이 받아들여야 할 것은 계급과 공포를 벗겨낼 가공할만한 능력을 지닌 예수의 복음이라는 것을 빨리 알아야 할 텐데... 한국 교회는 6.25 전쟁이후 아픈 상처를 보듬고 영성운동과 치유사역을 병행했어야 함에도 또다시 나라가 분단된 것처럼 교단의 분리라는 극단의 선택을 돌파구로 마련했었다. 1953년 광주는 예장과 기장의 분리로 양림교회가 둘로 나누어졌고, 기존의 양림 교회당은 기장측이 소유하고 예장측은 오원 기념각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오원 기념각 옆에 붉은 벽돌로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1959년 예장은 다시 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쟁으로 분리되었고 본 예배당은 통합측에서 소유하게 되었으며, 합동측은 다시 오원 기념각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역시 그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는 곳에 교회당을 신축하고는 양림교회라는 간판을 내 걸었다. 그리고 1979년 합동측과 개혁측의 분쟁으로 분리라는 극단을 선택했다. 4차 분열로 불리워지는 이 때 교권과 지역갈등으로 예장 합동에서 정규오 목사가 중심이 되어 호남권 인사들이 탈퇴, 개혁교단을 설립하면서 장로교 분열은 가속화 됐다.
1940년, 1953년, 1959년, 1979년, 중요한 역사적 고비마다 교단은 분열과 분리로 통한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신앙의 바닥을 들어내던 우리에게 역사는 쓰디 쓴 아픔의 질곡을 남겼다. 오웬, 일명 오목사로 불리우던 오웬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그 기념예배당에서 분열의 아픔을 달래며 기도했을 사람들의 처절했을 마음들이 느껴짐은 왜일까? 분열, 분리... 그리나 다시금 일어서야했던 사람들... 분단의 끝이 통일이듯, 분열과 분리의 끝은 하나 됨이다. 분열에 불어 닥치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기억해야함은 물론이거니와 신사참배나 궁성요배와 같은 역사적 아픔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교단과 교단의 책임자들은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 같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이요,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같다.
36년간의 식민생활과, 3년간의 전쟁과 분단국가, 정치적 독제와 4.19, 5.16 이후 군부독제와 서슬푸른 군인대통령 시절을 거슬러 장로 대통령 시대를 열어가는 지금 우리 교회는 과연 제대로 흘러가고는 있는 것인가... 분리와 통합이라는 끊임없는 모순을 극복하고 상생과 화합의 발판을 마련할 뚜렷한 구심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교단이 추구하는 이상과 목표의 합치가 진정 어렵다면 몇 개의 추구해야 할 공동의 목표들을 설정하고 매년 특별기도회와 공동회개기도회를 개체하여 그 날만은 같은 자리에 모여 다시금 이 땅이 신사참배와 같은 극단의 선택 딜레마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회개하는 운동이 필요할 때이다. 자라나는 복음 2, 3세대들을 위한 교단 지도자들의 노력이 절실할 때이다.
▲ 양림동 양림교회의 역사는 한국교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노을을 받으며 3개의 양림교회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상생과 연합이 시대적 흐름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파란만장한 한국에서의 삶을 살았던 유화례 선교사(florence e. root), 후로렌스 룻은 1957년 수피아여중고 교장직을 은퇴하고 197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고국으로 돌아가 양로원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한국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는 그녀는 103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유 선교사의 도움으로 신학을 공부한 안영로(광주서남교회 원로목사), 안종철, 노태연, 김남길 목사와 어려운 시절에 도움을 받은 광주 수피아여고 전 동창회장 조아라씨 등은『유화례 선교사는 일제 때는 신사참배 반대로 고통을 겪었고 6.25 동란 때는 교회를 지키느라 어려움을 당했다』면서 『유 선교사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딸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그녀가 개척한 교회만도 20여개에 이른다. 특히 빌려준 6천환이 호남최대의 성전으로 알려진 성광교회를 짓는데 초석이 됐던 양재열 장로와 김행이 권사와의 훈훈한 이야기도 이미 알려져 있다. |
- 수피아 90년사에서 발췌 -
유화례(Miss Florence Root) 선교사는 일본의 군국주의 팟쇼 체제하에서 남장로회 선교부가 운영하는 미션학교인 수피아여학교의 교장으로서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1937년 9월 6일에 선교부 정책에 좇아 학교를 자진폐교하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복음선교를 하다가 1942년 6월 1일 강제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2년 9월부터 1947년 10월까지 미국에 체류하면서 선교 본부의 요청에 따라 미국 전역을 순회 강연하였다. 비참한 한국인의 생활과 일본의 극악무도함을 눈물로 소개하고, 한국이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 독립국임을 널리 알려서, 한국의 독립과 미국인의 현재에 이르는 깊은 우정에 기여한 바 있다.
그러다가 세계대전이 종료되어 한국이 해방되고 정세가 호전되자 1947년 12월 유화례 선교사는 광주에 돌아왔다. 1948년 10월 수피아여중 8대 교장으로 재 취임하여, 중․고 졸업생 292명을 배출하였으며, 1949년 3월 교장직을 사임하고는 도서지방과 불신자의 가정심방을 통한 복음선교에 전념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로 미대사관으로부터 긴급 철수명령을 받았으나, 양을 치는 목자가 양을 버려 둘 수는 없다는 심정으로 이 국난을 한국민족과 함께 보내기로 결정하고, 동광원의 친구들인 조용택, 정인세, 이현필 등의 도움을 받아 풀지게 속에 숨어 화순군 도암면 깊은 산골에 가 숨어살고 동북면 화학산 동굴로 피난하였다. 그때 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나갔던 조용택은 공산군의 손에 피살되어 순교하였다.
유 교장은 ‘수피아와 나’라는 회고록(전남매일신문, 1975.5)에서 이때의 형편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7월 23일 상오 11시. 양림동 예배당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내게 조용택 전도사, 동광원장 이현필 등이 달려왔다. ‘인민군이 지금 장성까지 내려왔습니다. 광주사람들은 어물어물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곧 숨이 넘어갈 듯한 다급한 소리다. ‘벌써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미국인으로, 지금 어디를 가나 집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겁니다.’하고 거절의사를 나타냈으나, 나를 숨길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놓았으니 빨리 떠나자고 하는 것이었다. 조 전도사와 함께 간단한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우리가 호남신학교에 갔을 때 동광원에서 나온 청년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둘이서 맬 수 있도록 한 것을 만들어 준비해 놓고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홑이불로 덮었다. 숨이 막히고 푹푹 찌는 더위였으나 긴장되어 더운 줄도 몰랐다. 나주, 남평으로 가는 철도를 넘어 거의 30분 가량 실려갔다. 그러나 그 곳에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피난 나와 산에서 옹기종기 산 속에 앉아 있었다. 바로 그들이 있는 곳에 동광원 사람들이 나를 숨기기 위해 굴을 파 놓았으나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 나를 그 곳에 숨길 수는 없었다. 나는 그 곳에서 거의 6시간 동안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밖에 나올 수도 없었다. 그 곳에 와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안되었기 때문에 모두들 나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수풀 속에서 기다렸다. 우리가 그 곳에서 쉬는 동안 동광원 청년들이 화순군에 있는 친척집에 연락, 그 곳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 곳에서는 도저히 사람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손으로 양 무릎을 잡고 몸을 활의 시위를 당기기 직전처럼 웅크린 채 홑이불로 묶인 내 몸 위에 두꺼운 헌 담요까지 덮었다. 한참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23일이었고 보니, 온통 후줄근하니 몸에 땀이 배었다. 몸뿐이 아니라 옷까지도 온통 흠뻑 젖어 후줄근하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온통 땀으로 목욕을 하여 5시간을 가다 잠깐 쉬었다가 다시 지게에 얹어져 밤길을 갔다. 내가 타고 있는 지게를 청년 2명이 번갈아 가며 지고 갔다. 이렇게 푹푹 찌는 담요 속에서 24시간을 보냈다. 만 하루를 지게 위에서 보낸 것이다.”
유화례 선교사는 거기에서 ‘버선에 고무신에 머리에는 수건을 둘러쓰고 누더기 치마 저고리’까지 입어 한국여인으로 위장한 후 동광원 사람들과 함께 산 속에 숨어 3주간을 살았고, 그 곳도 안심이 안되어서 동굴생활을 10일간이나 하였으며, 또 산 속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2주일을 보내고 나니, 광주를 떠나 산 사람이 된지 벌써 2개월 5일이 지났다. 9월 29일 산에서 내려와 화순 한천의 농가에서 며칠을 더 묵는데, 캄캄한 벽장 속에 숨어서 지냈다. 드디어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여 북한 인민군은 물러났고, 유 교장은 1950년 10월 6일 밤에야 사선을 이겨내고 경찰의 안내를 받아 광주에 돌아오게 되었다.
유화례 선교사는 보리밥과 쑥죽으로 연명하던 피난생활에서 돌아와서 수피아 10대 교장으로 세 번째 부임하여 1960년 3월까지 봉직하였으며 졸업생 505명을 배출하였다. 교장직을 사임한 후 1963년 3월까지 목포 지방교회와 인근 도서를 순회하면서 복음전도에 힘쓰고 사경회를 인도하였다.
1963년 3월, 만 70세로 선교사 일에서 정년퇴직하고 잠시 귀국했으나, 일가 친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생을 사랑하는 한국에서 보내기로 작정하고 선교부의 보조도 없이 독자적으로 광주에 돌아와 양림동 집에 거주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계속하였다.
(1) 전도사업 ; 광주교도소 성경공부 매주 1회, 불우 여성 선도회인 계명여사 성경공부 매주 1 회, YWCA성경공부
(2) 장학사업 ; 전도사, 목사에게 장학금을 지급(안종렬 등 15명), 여자신학생에게 장학금 지 급(유오순, 전현목 등), 일반장학생(조선대 조중기, 교육대 김현순, 간호대 박인자 등)
(3) 평생 미혼이었으므로 정금순를 양녀로 삼고, 그의 군산애육원 설립을 보조함.
(4) 사회사업 및 전도사 생활비 보조 ; 자신의 생활비 절약과 미국 교우들의 헌금으로 생활이 어려운 22명 전도사를 돕는 등 오로지 50여 년을 한국인을 위해 성처녀의 희생과 봉사를 바 쳤다.
유화례 선교사는 85세가 되던 1978년에 자기의 늙음이 사랑하는 한국인에게 부담을 주고 짐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에 건너가 해리슨버그 안식관이라는 양로원에서 기도와 성경과 찬송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03세가 된 1995년 5월 26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양로원에서 주는 생활보조비를 아껴서 강당기금으로 700달러를 보내기도 하고 수피아를 위하여 매일 기도하였다.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바치고도 자신을 위해서는 묘지 하나조차도 마련하지 않았던 그는 정녕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살아가신 성녀였다고 말할 수 있다. 6월 7일 2시에 미국현지와 수피아 대강당에서는 동시에 추모예배를 드렸다.
그에 앞서 수피아에서는 유화례 교장의 숭고한 정신과 수피아 사랑을 기리기 위하여 동창회 주관으로 유화례 기념 도서관을 건립하였다. (뒤에 기술함)
또한 호남기독학원 이사장인 안영로 목사는 유교장의 전기로「메마른 땅에 단비가 되어」(1994)라는 저서를 발간하였다.
< 수피아여고를 다녀와서 >
유화례선교사의 삶을 찾아보면서, 그녀가 교장으로 재직하였던 수피아여학교를 방문하였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 수피아고등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모구 쉬는 날이라 학교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 수피아고등학교를 방문하는 순간 무언가에 홀린 듯 발길은 학교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건물들과 나무들은 오랜 세월을 이야기 해주고 있었으며 건물 하나하나에 신선을 땔 수 없었다. 이곳에서 유화례선교사의 발취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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