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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는 천지의 바른 정기를 받는 구도자의 자세로 뿌리로 돌아가 역사혼을 되살렸다. 이론가이면서 실천가로서 항일운동을 했던 그는 신교(神敎)의 종주국으로서 제천의례(祭天儀禮)를 회복하고 낭가정신(郎家精神)을 이어 세계사의 주역이 되는 다수의 영웅들이 출세하기를 학수고대하며, 일편단심 투철한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삶을 살았다.
아! 고결하고 거룩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혼백이 수호하시는 이 땅 대한민국. 9200년 민족사의 주역으로, 새 시대의 영웅으로, 동포여 깨어나자!!!
<참고자료>
신채호 , 『조선상고사』1, 2, 일신서적출판사, 1995년 4월 20일
신채호 , 『조선사 연구(초)』, 범우사, 2004년 2월 10일
계연수 엮음, 고동영 옮김, 『환단고기』, 한뿌리, 2005년 3월 20일)
신채호 , 정필선 번역, 『을지문덕』, 단재문화사, 1955년 6월 25일
김삼웅, 『단재 신채호 평전』, 시대의창, 2005년 08월 15일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글쓴이 진국범은 치의학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익산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다. 원광대학교 치과대학 외래교수를 하고 있으며 익산시 치과의사회 이사를 맡고 있다. 또한 인터넷 까페 <역사왜곡의 진실을 밝히자> 부운영자로 활동중이다. 09. 3. 17
단재 신채호 선생이 말하는 `역사` 역사로 민족정신을 깨운 단재 丹齋 신채호申采浩 입력 09.03.11. 글쓴이 유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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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을 막 지낸 2월 21일은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신 지 71주기 되는 날이었다. 이날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단재 사당에서는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와 ‘한국민족예술인 총연합회 충북지부’ 등의 주관으로 추모행사가 열렸다.
천재적 사학자이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으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한평생 ‘민족’과 ‘역사’를 가슴에 품었던 단재 신채호. 그의 날카로운 필치는 당시 국정과 일본의 불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고고한 지성과 뜨거운 민족애는 조선민중의 혼을 깨웠다. 남북 만주와 시베리아를 돌아다니며 민족사의 족적을 더듬어 역사를 바로잡아 동포들에게 자부심과 희망을 심어주고자 했던 신채호 선생. 삼천리 한반도를 태극기로 뒤덮었던 3월을 맞아 단재 선생의 삶을 조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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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힘 없는 강직한 성품에, 일본에 고개 숙이는 것이 싫어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세수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단기 4213년(1880년) 양력 12월 8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났다. 9세에 자치통감을 통달하고, 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해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그 박식함과 천재성으로 이름을 떨쳤다.
26세에 박사가 된 선생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을 통해 뛰어난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며 그 문명을 날렸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단재 선생에 대해 당대 우리나라 사가(史家)들 중에서 제1인자이며, 문장 호걸로도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한다고 했다.
단재 선생의 첫 번째 일념은 조선의 독립이었고, 그것을 위해 찾은 대안이 민족사를 바르게 써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1910년에 맨몸으로 조국을 떠난 선생은 남북 만주로, 북중국, 시베리아를 주유하면서 조선의 역사를 연구했다. 선생은 수많은 유적지들을 직접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료들을 접하면서 우리 고대사(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었음을 확인하며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선생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도 조선사를 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많이 없어져버렸다고 비판하며 “집안현(고구려 유적지)을 한번 본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민족의 고대사를 바로잡고자 했던 선생은 중국망명 시절, 너무도 빈곤하여 우리 역사의 유적지를 눈앞에 두고도 돈이 없어 발굴조사를 하지 못함을 비통해 하였다. 또 책 살 돈이 없어 하루 종일 서점에서 책을 읽었는데, 조선에 관한 내용이 있으면 주인의 핀잔을 맞으면서도 요긴한 구절은 베껴 썼다. 또한 독서력이 뛰어나 책장을 헤아리는 것 같이 훌훌 넘기면서도 책 내용을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선생은 <조선문화사>와 <조선상고문화사>를 신문에 소개했는데, 수십만 독자들로부터 절대적인 환영과 지지를 받았고 ‘조선 역사의 대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선생은 기존의 한국사, 즉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 이어진 역사인식 체계를 비판하고 대단군조선-삼조선-부여-고구려 중심으로 계승되는 역사체계를 다시 세웠다. 그러면서 우리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대륙이 우리 민족의 영토였음을 밝혔다. 선생의 이러한 역사연구는 일제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된 주민들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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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논설과 역사서, 선언문으로 독립심을 부추겼던 선생은 1928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로 나서 비밀결사조직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을 결성한다. 그런데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 어음을 만들어 사용하려다 발각되어 여순감옥에 수감된다.
그리고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쓰러져 순국한다. 수감 중에도 틈틈이 역사책을 읽고 역사책을 구상했던 선생이기에 민족사를 온전히 복원하지 못한 깊은 한과 안타까움을 안은 채 눈을 감았으리라.
그런데 선생이 그토록 어렵게 밝혀낸 한민족의 역사건만, 오늘날 친일사학의 잔재와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여 근래에 또다시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우리역사를 침탈당하고 있다.
또한 누구보다 조선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누구보다 뜨겁게 조선을 사랑했던, 진정한 조선인이었던 단재 선생은 아직도 법적으로 대한민국인이 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 일제 당시,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며 신고를 거부했던 단재 선생을 비롯하여 200∼300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아직도 무국적 상태로 남아 있다.
또한 단재 선생의 묘소는 파묘되어 지금도 초라하게 이장된 상태이다. 다행히 청원군과 유족 측의 최종합의가 마무리되는 대로 올 상반기에는 묘정비를 새롭게 한다고 한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역사를 통해 민족정신을 깨우고 역사 속에서 민족의 희망과 비전을 찾았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가의 손에 민족의 미래까지도 달려있음을 통찰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소명을 다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단재 선생의 못다 이룬 꿈,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 애국선열들이 지켜온 이 나라 이 땅에 이제는 우리가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하리라.
[장병영 칼럼리스트] 단재 선생 국적회복, 되찾은 대륙魂 2009년 03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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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적 회복은 뒤늦은 감이 있지만 후손들에게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
[프라임경제] "내가 죽거든 시체가 왜놈들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띄워라"(1936년, 단재 신채호 선생 유언)
지난 삼일절은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한 획을 그은 의미 있는 날이었다. 정부는 3.1운동과 4.13 임시정부 수립 90돌을 맞아 “무호적 상태로 숨진 독립 운동가들에게 호적을 새로 만들어 전달한다”라고 밝혔다.
이로써 단재 신채호(신채호 1880~1936), 석주 이상룡, 여천 홍범도, 부재 이상설, 노은 김규식 선생 등 200여명의 독립운동가들이 가족관계등록부에 이름을 올린다.
이번의 정부 결정은 늦었지만 참으로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동안 구천을 떠돌았던 순국 영령들이 그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일이고,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후손들과 독립 운동가의 자손이라는 자긍 또한 심어 주게 되었다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효율적인 식민지 통치를 위해 호적제도를 개편하자 "일제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고, 거의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순국했다. 어렵사리 광복을 이루었으나 정부가 일제 때 호적을 유지하는 바람에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해 대법원은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이, ‘일제 때 정비된 호적에 올라있지 않다’고 해도 대한민국 국민이란 점은 명백하다"라고 밝혔다.
이에 보훈처가 "일제 때 사망한 독립운동가들의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이 가능하도록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의 개정 작업했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 한해, 대법원 규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가족관계등록부를 창설할 수 있다'는 내용의 신설 조항 삽입과 함께 지난해 후반기에 입법예고 됐다.
그 무엇보다 이번 애국선열들의 국적회복의 일등공신은 단재선생의 며느리 이덕남(66)여사이다. 1967년 단재선생의 아들인 故 신수범과 결혼한 이 여사는, 70년대 초 첫 아이의 호적등재를 하다가 남편이 호적상 사생아로 등재되어 있음을 알고 기절초풍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훌륭한 분이시라더니 호적도 없다니…” 억장이 무너졌지만, “망연자실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라고 전한다.
80년 중반부터 이여사는 선생의 국적회복을 위해 남편과 함께 관계기관과 국회, 언론 등을 찾아다니며 불철주야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 다녔다. 그 과정에서 단재선생처럼 일제의 호적을 거부하다 광복 전 숨진, 호적도 국적도 없는 독립운동가가 300여명에 이른다는 사실도 알게 되면서, 여사의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사실 그동안 국회에서 여러 차례 ‘무국적 독립운동가’의 국적회복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법률 개정안이 발의 되었으나, 당시의 국회사정과 사회 상황에 따라 흐지부지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여사는 단재선생의 국적회복 소식을 듣자 "호적을 받으면 바로 누워 계신 곳(충북 청원군)으로 뛰어 가겠습니다"라며 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 언론은 전했다.
호적이 없었던 선생은 순국하여 통한의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뼛가루가 되어 조국에 돌아 왔으나, 정작 한 몸 뉘일 곳이 없었다.
아래는'조선상고사'(원작 신채호 역자 박기봉 비봉출판사)권말 부록 ‘단재 신채호 연보’에서 단재선생의 순국직전의 상황을 부분 발췌 옮긴다.
1935년(56세).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에서는 맡아서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통고하였다. 이에 서울의 친지들이 선생의 옛 친구이자 일가벌이 되는 친일파 부호 한 사람의 보증 아래 가출옥을 종용하였으나, 선생은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며 단호히 이를 거절하였다.
1936년(57세). 2월 18일. 여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자 급보에 접한 부인과 아들 수범, 친우 서세충이 여순으로 달려갔으나, 2월 21일(음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향년 57세.
선생은 늘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 발끝에 체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으나, 후손들을 생각하여 국내에 묘를 쓰기로 하고, 여순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봉안해 왔다. 당시 국내의 각 신문에서는 순국하여 말없이 환국한 선생을 애도해 마지않았다.
유골은 충남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 기슭 선생이 살던 옛집 터에 암장 되었다.민적(民籍)이 없었던 선생은 묘소허가를 받지 못하여 친척뻘 되는 면장의 묵인하에 암장했던 것인데, 이것이 발각되어 면장은 파면되고 말썽이 많았다.
선생은 살아 계실 때 “곡하고 노래하기 그마져도 어려워라”고 했지만, 죽어서도 정작 묻힐 곳이 없는 형편이었다.
묘소의 비갈(碑碣)은 만해 한용운이 돌을 캐고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丹齋 申采浩之墓'라고 서각(書刻)하였다. 만해가 따로 비문을 쓰기도 했으나, 일경(日警)의 감시가 심하여 실현되지 못하고 묘비만 경부(?夫) 신백우(申佰雨)가 몰래 갖고 가서 세웠다.
[한겨레] “한국, 동아시아 평화체제속 중형국가로 가야” 기사등록 : 2009-03-04
제국 이후의…’ 펴낸 최원식 교수 “중·일과 평화공존 위해 대국주의 지향 탈피해야 생태계 보호 환경·복지 추구 제3의 길 모색을”
"한국은 태생적으로 대국(大國)이 되기 어렵습니다. 영토적 제약도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을 주변국들이 두고 보질 않아요. 참여정부의 동북아균형자론이 좌초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닙니다. 한국이 지역의 중심이 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주변국들로부터 강력한 견제가 들어왔던 겁니다.”
‘창비판 동아시아론’의 지적재산권자 가운데 한 사람인 최원식(60·사진) 인하대 교수(국문학)가 15년에 걸친 지적 여정을 매듭지었다. 1993년 이후 써 온 ‘동아시아론들’ 가운데 “그래도 좀 나은” 14편을 거두어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창비 펴냄)란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그가 서문에 옮겨놓은 심경은 이렇다. “겨우 이 정도인가 아쉬움도 작지 않지만 한편 이만하면 됐다는 단(斷)의 마음이 홀가분하다.” 지난 3일 서울 서교동의 세교연구소에서 만난 최 교수는 최근의 동아시아 형세를 ‘비등하는 대국주의’로 요약했다. “중국은 잃어버린 자존을 회복하기 위해 대국굴기(큰 나라가 솟구쳐 일어섬)를 꿈꾸고, 일본은 막강한 경제력에 군사력까지 갖춘 보통국가 전환을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이명박 정부가 내세웠던 ‘747’이야말로 전형적인 대국지향의 부국강병론입니다. 모두가 대국을 향해 치닫는 곳에 어떻게 평화와 공영이 깃들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겸양과 절제다. 대국을 향한 욕망의 무한연쇄를 적절히 제어하는 것만이 파국과 공멸을 막는 길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대국주의의 유혹은 간단치 않다. 사대와 내침의 슬픈 기억만 간직해 온 한국인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저 역시 대국주의자의 기질이 농후한 사람입니다. ‘강도 일본이…’로 시작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을 읽고 한동안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했어요. 처음 ‘소국주의’를 얘기한 게 98년 <창작과 비평> 창간 30주년 때인데, 여기엔 소국주의를 밖으로 선언함으로써 ‘내 안의 대국주의’를 억제하려는 의지 또한 담겨 있었습니다.” 최근 최 교수는 한국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국가 형태로 ‘중형국가’를 제안하고 있다. 생태계 부담을 줄이고 복지와 분배를 악화시키지 않으며, 이웃나라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대국도 소국도 아닌 중간 수준의 국력이면 적당하다는 얘기다. 문제는 모두가 대국을 향해 내달리는 상황에서 홀로 다른 길을 걷다가는 생존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라는 문제 설정이 긴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시의 인식은 소박했다. 한국 문학을 제대로 보려면 한반도가 자리잡은 지역을 숙고하는 것이 필수적이란 생각이었다. 여기에 서구 자본주의도 동구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대안을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에서 찾아보자는 문명론적 관심이 더해졌다. 하지만 때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이론과 변혁론이 승하던 80년대였다. 최 교수의 동아시아론은 ‘물정 모르는 문학도의 한가로운 공상’쯤으로 치부됐다. 그러던 차에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91년 소련이 붕괴했다. 최 교수는 93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탈냉전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이란 글을 발표했다. 냉전의 정신유산에 긴박돼 있던 진보 지식인 진영을 향해 지적 쇄신을 촉구하는 격문이자, ‘창비판 동아시아론’의 발진을 알리는 선언문이었다. “글의 초점은 동아시아의 화약고인 한반도의 분단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극복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한반도를 동아시아 지역모순의 결절점으로 보고, 분단의 해소책을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구축이라는 거시적 구도 안에서 찾아보자는 것이었죠. 여기에 더해 동아시아가 공유하는 역사적 경험이나 문명적 자산이 동아시아 평화의 중요한 접합제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기대도 있었습니다.” 90년대 중반 이후 동아시아론은 몇 차례 보완을 거듭했다. 이른바 ‘아시아주의’에 복병한 국가주의·패권주의에 포획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한·중·일 3국이 아닌 북한·대만·오키나와·홍콩 등 ‘주변의 시각’이 도입되고, 패도(覇道)의 대국주의와 길항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이 논구됐다. 이 과정에서 최 교수의 관심은 “꿈길에 유폐된 소국주의를 어떻게 현실로 불러올 것인가”로 모아졌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지혜는 뜻밖에도 백범 김구의 건국강령이다. 최 교수가 소개한 백범의 말은 이렇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나의 소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