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진 숲을 헤치며 누나가 잠든 산소를 다시 찾았다. 엉성하게 심었던 잔디는 수북하게 자랐으나, 심지도 않은 잡초들이 무성하여 주인 없는 묘지처럼 어수선하였다. 미안한 마음으로 벌초를 했다. 오랜만에 이발소를 다녀온 것처럼 단정해졌다. 잠시 앉아 고개를 들었다.
아래 언덕 끝, 큰 나무 위에 둥지 하나가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가지에 힘겹게 매달려 있는 빈 둥지의 잔재였다. 한때 풍성한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아늑한 둥지였다. 여기서 어미 새는 알을 낳고, 품어서 새끼를 부화했고, 먹이를 날라주었다. 먹이를 받아먹고 다 자란 새끼들은 창공을 향해 힘찬 날갯짓으로 모두 둥지를 떠났다.
주인이 떠난 빈 둥지는 허물어져 뜯겨나갔다. 모진 비바람을 견디지 못해 잔재들만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새들이 떠난 빈 둥지나 주인이 떠난 빈집은 쓸쓸함과 무상(無常)함을 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거들고 있을 때였다. 들에 갔다 돌아오니 누나가 와 있었다. 진학하지 못하고 시골에서 농사일하는 나의 장래가 걱정되어서였다. 누나는 내게 도시로 나가 일하면서 공부하는 길을 찾아보자고 하였다. 나는 시골을 벗어난다는 말에 꿈이 아니기를 바랐다. 어머님이 급히 챙겨주신 쌀자루를 들고 엉겁결에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도시로 가는 비포장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면서 차창은 마구 흔들려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귀청이 따가운 버스의 소음도, 몸이 솟구쳐 머리가 천정에 부딪히는 흔들림도 도시로 나간다는 기쁨에 롤러코스터를 타는 아이들처럼 기뻤다. 누나는 피곤한 듯 겨우 눈을 뜨고, 그렇게도 좋으냐며,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 지나가자, 이웃면에 있는 누나의 시댁 마을이 보였다. 누나의 시댁은 그 마을에서 부자였다. 누나가 오대 독자였던 자형과 결혼하였고, 6.25 사변이 터졌다.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자형은 군에 징집되었다가 전사했다. 누나는 손이 귀한 집안에서 딸만 둘을 기르면서 시댁 어른들의 구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시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자, 두 딸을 데리고 도시로 나와 공장에 다녔다.
시외버스에서 내려 다시 합승을 탔다. 누나가 사는 집 앞에 도착했다. 슬레이터 지붕에 판자로 울타리를 한 작은 집 대문으로 들어갔다. 좁은 마당에는 손수레와 지게가 있었고, 주인집 어린아이들은 마당에서 소란스럽게 놀고 있었다. 방이 두 개이고, 길 쪽에 있는 방 처마에서 담장까지 가닥을 달아내 부엌을 만든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사글세 기한은 눈 깜박할 사이였다. 누나는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본체와 아래채가 있는 넓은 마당에 우물이 있었다. 본체는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큰 방과 작은방이 있었다. 우리는 작은방에 살았지만, 꽤 넓었고, 방 앞에 쪽마루가 있어 편리하였다. 아궁이가 있는 쪽에 가닥을 달아내 꽤 넓은 부엌도 있었다. 내가 공부하기 좋게 하려는 누나의 배려였다.
주인집 큰 방에 인자한 노부부가 살았다. 평소 조용하던 집안은 주말 저녁이 되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술에 만취한 큰아들의 고함, 나와 동갑내기 딸이 징징대며 토해내는 불평, 양철 세숫대야를 내던져 굴러가는 소리, 주인 할머니의 땅이 꺼지는 한숨 소리, 절망과 자책이 엉킨 주인의 절규가 새벽잠을 깨우는 것이 어느덧 만성이 되었다.
사글세 기한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누나는 싱글벙글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주 작은 이상한 집 한 채를 샀다고 했다. 오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푼푼이 모아 온 돈과 직장 상사에게 사정하여 약간의 돈을 융통해 집을 샀다. 마당도 정원도 없이 부엌과 작은방 두 칸이 전부였다. 그러나 아무 간섭이나 이사 걱정이 없는 우리 집이라 여느 대궐 부럽지 않았다.
태풍이 전국을 강타하던 날이었다. 식구들은 컴컴한 방에서 도배에 여념이 없었다. 일을 끝내고, 밖으로 나섰다. 골목은 온통 흙탕물로 가득 차 있었다. 태풍의 위세는 저지대였던 난민촌을 사정없이 강타하여, 온 마을을 흙탕물로 채웠다. 낮고 길게 지은 가건물에 칸막이 한 칸이 우리 집이었다. 울타리까지 가닥을 달아내 부엌을 만들었기에 방안은 언제나 한밤중이었다.
작고 초라한 이 집은 우리 형제자매들에게는 둥지였다. 작은누나는 이곳에서 잠시 일하다가 결혼해서 떠났다. 나는 여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군에 입대했다. 그사이 동생이 들어와 어렵사리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부후보생으로 군인의 길을 갔다. 형님은 동생들의 무거운 짐을 누나가 대신하여 고맙고 안쓰러워 자주 들락거렸다.
동생과 작은누나는 이곳을 떠나 각자 자기들 삶의 터전을 닦아 정착해 갔다. 나는 병역을 마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숙원이었던 대학교에 입학하여 이곳에서 작은 꿈을 이루었다. 늦게 입은 교복이었지만 꿈과 낭만도 있었다. 이 년 제였던 교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출근을 시작했다.
나는 첫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한 해만이라도 전부 누님께 드리고 싶었다. 매월 급여 일이 되면 갓 인쇄된 빳빳한 고액권이 제법 도톰하게 든 월급을 봉투째 누나에게 내밀었다. 누나는 처음 사양하였으나, 봉투째로 받아 차곡차곡 모았다. 부모님이 출산 사고로 잃어버린 소를 마련해 드렸다. 나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얼마나 보람되고 행복한지를 처음 경험하였다.
행복한 순간은 잠시뿐이었다. 운명은 나에게서부터 그 보람도 기쁨도 사정없이 앗아가고 말았다. 아직 어린 두 생질녀와 우리 형제들을 남겨두고, 누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을 서둘러 떠났다.
누나는 생질녀들의 한 맺힌 눈물과 절규를 외면한 채 둥지를 떠났다. 내가 처음 고향을 떠나올 때, 누나와 함께 이 도시로 왔던 그 길을 따라갔다. 덜컹거리는 자동차에서 피곤함에 지쳐 눈을 감았던 누나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 사이 우리들은 누나의 시댁 마을 뒷산에 도착했다. 들국화 사이로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는 양지바른 곳, 산새가 울어대는 넓은 정원에 작은 집을 지어드렸다.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것처럼 쓸쓸하고 허무했다. 만사가 싫어지고 무기력해지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나가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가슴속에서 내 성공을 지켜본다고 생각하며 슬픔을 달랬다. 정신과를 지망했던 사촌이 내가 너무 낯설다며, 충격에 빠져 헤맸던 나를 건져주었다.
나는 상석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른 풀 사이에 청순하게 자란 들국화가 고개 숙여 맞으며, 속삭여 주었다. 인생은 결국 이 둥지에서 저 둥지로 옮겨가는 덧없는 삶이라고…, 작은 둥지 하나면 족한 것을 큰 저택만을 바라보며 발버둥 쳤던 삶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가를 고개 저으며 알려 주었다.
누님 앞에 겹겹이 쌓인 한과 고마움을 술잔에 담아 따랐다. 사글셋방으로 전전하다가 작은 둥지 하나를 남기고, 고달프게 살다 가셨다. 땅에 묻혀 썩은 밀알처럼,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준 그 얼굴이 떠올랐다. 산새들의 울음소리에 서러움을 묻은 채 발길을 돌렸다. 저 아래 나무 끝 새들이 떠난 빈 둥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김희슬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