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3일(목) 전도서 1:1-11 찬송 337장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개역 개정)
- 해 아래 인생 허무에 대한 총론적 고찰 -
1절은 본서의 저자 및 본서 전체의 성격을 밝히는 표제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비록 저자인 솔로몬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는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통치자임을 강조하는 ‘예루살렘 왕’
그리고 뛰어난 지혜로써 인생의 문제를 탐구하였음을 강조하는 ‘전도자’라는
3중적인 자기 소개를 통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혜를 소유하였던 자이며
온갖 부귀 영화를 누렸던 성군(聖君) 솔로몬이 본서의 저자임을 암시하여
본서의 권위와 신뢰도를 더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본서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본서에 기록된 내용의 실천을 촉구하는 것은
본서 표제인 1절에서 뿐 아니라 본서 결론(12:8-14)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본절이 외형적 권위 강조의 성격이 강하다면
결론 부분은 영적 권위 강조의 성격이 강하다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약을 중히 여기신다는 사실과
진리를 깨달은 자는 그것을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전파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또한 2-11절은 전도서의 총(總)서론 부분이다.
여기서 전도자는 해 아래 인생의 허무함을 총론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절대 초월자요 창조주로서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죄성에 오염되어 그저 짧은 순간만을 무의미와 고통속에 살다가
떠나야 할 인생의 절대 허무라는 인생 궁극의 실존적 문제를 다룬다.
이는 이어 본론부인 1:12-12:7에 나오는 인생의 허무와 그 극복을
주제로 하는 4중적 강화(講話)의 시작을 유도하는 성격을 지닌다.
한편 전도자는 본서 서두인 2절에서 인생의 헛됨을 반복하여 선언함으로써
본서 전체를 통하여 다루어 나갈 허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3-11절에서는 인생이 허무한 까닭을 밝힌다.
즉 여기서 전도자는 애써 수고하는 것이 무익함(3절),
변함없이 순환하는 대자연에 비해 인생이 짧고 덧없음(4-7절),
만족함이 없음(8절), 인간의 한계를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음(9-11절) 등을 들어
인생이 허무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이러한 전도자의 지적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이 세상의 궁극적 통치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자 및 인본주의자들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영원하시며 유일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홀로 전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무신론(無神論)의 관점하에서 바라본 인생은
인간의 근본 출발점과 존재 근거를 상실한 것이므로
지극히 무의미하며 절망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시14:1-3)
②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단된 인간에게 다가오는 인생 허무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보편성과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떠한 수단에 의해서도
결코 극복되지 않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시53:1-6)
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기서 ‘헛되다’라는 말은 원문상 ‘공기’, ‘호흡’, ‘공허함’, ‘불만족함’ 등의
뜻을 가진 말로서 잡거나 취하려 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 ‘헛되다’라는 말을 ‘헛된 것들 중에 헛된 것’이라는
최상급의 표현을 통해 강조하였고 이를 거듭 반복함으로
세상사가 헛되고 무상함을 단정하여 말한다.
그가 인생의 무수한 경험을 통해 느끼게 된 이 허무함이 얼마나 컸으면
최상급의 표현을 거듭 반복하여 말하였을까?
그만큼 그는 다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인생의 허무를 절감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백은 아무리 인생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최고의 지혜를 얻으며, 최고의 영광을 누려도
인생의 허무는 그 누구라도 피해 갈 수 없는 필연적 운명임을 말해준다.
우리는 흔히 남들이 누리는 것을 누리고
남들이 갖춘 것올 다 갖추면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인생의 부귀영화를 얻고자 열심을 낸다.
이러한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목표한 바를 성취하여 큰 부를 획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성공의 여부와 상관없이 세상사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극한 허무(虛無)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마치 누구도 죽음의 운명을 빗겨갈 수 없듯이 그 누구라 할지라도
이 본질적 허무의 문제를 피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이러한 솔로몬의 고백에 주목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인생은 누구라도 공허와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으며,
세상 무엇도 사람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내면에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는 허탄한 것으로 자기 중심을 채우려 한다.
이것이 인생의 불행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생의 공허와 허무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무수한 물질이나 재화로, 또 어떤 이는 성공이나 성취로
공허와 허무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술과 마약과 같은 것으로 인생의 허무를 채우려 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어리석으며 제한된 것이다.
여기에서 탐욕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며, 마음속에 헛된 욕망이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게 되면 우리를 더욱 큰 불행과 비극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솔로몬은 바로 이것을 알리고자 인생이 허무함을 반복해서 고백하고 있다.
즉 자신도 이러한 허무와 맞닥뜨리지 않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며 오히려 더 큰 허무와
인생의 비애를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인생은 그 자체만으로는 허무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것, 허탄한 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정직하게 확인하는 자리,
그 자리가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3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