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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천안문 광장 남쪽.
일명 전문 (前門) 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정양문(正陽門)이 있습니다.
이 정양문의 바깥문이 건물안에서 화살을 쏠 수 있다는 전루 (箭樓).
과연, 화살을 여기저기서 쏠 수 있게 창이 많이 나있습니다.
병자호란.
한반도 역사에 많은 전란이 있었지만, 이처럼 치욕스러운 전쟁도 드물었나 봅니다.
야만족이라고 생각하던 여진족과 군신의 관계를 맺은 '삼전도의 굴욕'이 그렇고,
무려 50만명에 달하는 부녀자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는, '화냥년'의 유래가 그렇습니다.
조선은, 임금과 백성을 막론하고, 꿈에도 이 치욕을 잊지 못합니다.
'북벌론'이 등장하고, '임경업전'이나 '박씨전'같은 소설이 탐독됩니다.
청의 눈을 피해,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제사를 지냅니다.
이렇게 일백여년.
어이없게도 여진족의 청은 중원의 주인인 한족을 완벽하게 장악합니다.
강희-옹정- 건륭 황제의 시기에, 중국은 전무후무한 '역사의 황금기'를 구가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문화적 자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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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문 앞 치엔먼따지에 (前門大街)
근래에 말끔한 쇼핑가로 탈바꿈한 거리입니다.
북경오리구이 전문점인 '전취덕' 등의 간판이 눈에 띄는 이 거리에, 우리가 보기에는 좀 우습지만, ' 조류전선'이라는
큼지막한 한글 간판도 있습니다.
의역하자면 '유행의 첨단' 정도가 되겠지요.
전국적 유통망을 가진 이 패션브랜드의 본사는 광동성 동완시에 있던데요.
회사 소개를 보니, 실제로 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한류'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차원일겁니다.
크라운 베이커리가 실제 프랑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빠리 바게트'라는 빵집을 운영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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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엔먼따지에 서쪽 골목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식당들이 줄지어 서있고, 사람들의 왕래가 분주합니다.
이백육십여년전, 그때도 이 길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겁니다.
무리 가운데, 갓을 쓰고 도포를 펄럭거리며 걷는 젊은 선비 하나가 눈앞에 보이는 듯 합니다.
1765년, 조선의 선비 한 명이 북경땅을 밟습니다.
사신으로 파견된 숙부를 따라왔습니다.
3개월 가량을 북경에서 체류합니다.
이 선비가 조선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백여년에 걸친 문화적 정체와 자폐상태에 파열구가 뚫립니다.
이 선비는 이른바 '북학파'의 선구가됩니다.
담헌 홍대용입니다.
북경에서의 3개월,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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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연, 인적이 드물어 집니다.
여기저기 철문이 내려지고, 건물도 무너져 있습니다.
재개발 지역으로 들어섰습니다.
이 어수선한 재개발 지역에, 동서를 가로질러 백삼십여 미터 정도의 작은 골목길이 있습니다.
깐징 (甘井) 후통.
홍대용이 기록에 남긴 간정 (乾淨)이라는 지명은 북경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정양문에 인접한 위치라는 점, 중국어로 발음이 같다는 점 등이 원래의 乾淨 이 후대에 甘井 으로
바뀌었음을 추정케 합니다.
깐징후통 표지판 아래, '생명을 소중히 여겨 연탄가스 중독을 예방하자'라는 표어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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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징 후통으로 들어갑니다.
골목길 양쪽으로, 북경의 전통가옥 양식인 사합원 (四合院)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사합원은 사각형의 가옥구조로서, 동서남북이 합해져 있다는 의미를 갖는 건축양식인데요.
골목길, 거의 절반 되는 사합원들이 이미 철거됐습니다.
乾淨會友錄 (간정회우록)
홍대용은 이 골목길에 있던 한 여관에서 항주 출신의 중국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 등과 만나 교류합니다.
경전, 성리, 역사, 풍속, 종교 등이 그들의 대화주제 였습니다.
지식의 정확한 교류를 위해 수만 글자의 필담을 나누었고, 귀국후 홍대용은 이 필담을 '간정회우록'이라는 이름으로
편찬합니다.
이 책의 서문을, 연암 박지원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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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합원의 대문 위쪽입니다.
대문과 처마사이, 검은 벽돌 장식이 이채롭습니다.
이 집이 헐리면, 장식은 고가구시장으로 팔려나갈 것입니다.
비싼 값에 유통 되겠지요.
홍대용의 발언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일갈합니다.
'오랑캐가 지배하고 있어 문물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사람만은 고금이 다를 바 없다'
'조선을 소중화로 부르긴 하지만, 100리 되는 들판이 없고 천리를 흐르는 강이 없으며 땅덩어리가 좁고 좁아
중국의 한 고을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그 가운데 도사리고 앉아 부릅뜬 눈으로 소소한 영리를 추구하고
악착한 언론을 구사하니 그들이 가련하다'
'천하의 큼을 보고 천하의 선비를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하며 저들의 규모와 기상을 한 번 볼 필요가 있다'
홍대용이 보기에 조선의 선비들은 영락없는 우물안 개구리였습니다.
소중화니 북벌이니 하는 것들은 정신적 마스터베이션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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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 아래쪽입니다.
사합원들을 보노라면, 모든 집들의 문 입구 좌우에 저런 돌 장식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마치 천안문 입구 양쪽에 돌사자상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액운을 쫓고 길운을 부른다는 의미가 있겠지요.
이 집의 경우, 돌 장식에 노송이 새겨져 있습니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겠지요.
홍대용과 중국 선비들과의 우정은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엄성과의 우정은 언뜻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인데요.
항주로 돌아간 엄성은 병사합니다.
이때 엄성은 홍대용이 선물한 조선산 먹을 가슴에 품고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엄성의 아들 엄앙은 홍대용을 백부라 부르며 유고집을 부쳤는데, 9년만에 홍대용에게
도착한 이 책에는 엄성이 그린 홍대용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홍대용은 엄성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모두 7통이었다고 합니다.
반정균에게 보낸 편지에서 홍대용은 이렇게 씁니다.
'엄성의 묘의 풀이 벌써 두달이 묵었구려. 매양 깊었던 우정을 생각하며 벽을 돌면 기가 꺾이고
마음이 슬퍼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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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합원의 대문은 둔탁한 질감을 보여줍니다.
문은 닫혔으되 여기저기 벌어진 틈이 보입니다.
한국의 시골마을에 온듯한 착각이 불현듯 일어납니다.
이런 문이 여닫힐 때 돌쩌귀에서 나는, '찌이걱~'소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혹시 이곳이 홍대용이 드나들던 여관이 아니었을까.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홍대용이 걸어나올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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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철거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무너진 사합원 건물 잔해에서 재활용할 수 있는 벽돌을 골라내는 것이지요.
인적 드문 고요한 골목길.
벽돌 다듬는 정소리만이 쩡쩡거리며 울립니다.
'북쪽 벽 위에 당중하여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으니 계집의 의상이오, 머리를 풀어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데를 바라보니
무한한 색과 근심하는 기색이라. 이것이 천주라 하는 사람이니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있는 모양이오, 선 곳은 깊은 감실(龕室)
같으니, 첫 번 볼 제는 소상(塑像)인 줄만 여겼더니 가까이 간 후에 그림인 줄 깨달았으나, 안정(眼睛)이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격이오...'
홍대용이 북경의 남천주당을 방문, 묘사한 예수상의 모습입니다.
홍대용은 서양 신부들을 만나 예수상의 화격(畵格)이나 천주교리에 대하여 비판하기도 하고 오르간의 구조와 음계를 관찰하고 즉석
에서 연주 실력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또 그들과 장시간 만나 종교와 교리, 역서(曆書), 혼천의, 관상대, 망원경, 안경 등 과학과 문물에 관한 문답을 교환합니다.
이렇게, 조선의 젊은 선비 홍대용은 서양 문물을 접합니다.
은둔의 국가 조선이, 서양문물과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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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쩌면 이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홍대용이 불쑥 문을 열고 나올 곳이.
깐징후통 28호.
거북등처럼 갈라진 대문위에, 세월이 내려앉아있습니다.
서양사제들과의 만남을 통해 홍대용은 절감합니다.
서양의 천문 역법은 중국을 능가하고 있으며, 중국이 더이상 세계문화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안에 전시된 천문기구와 자명종, 망원경 등에 홍대용은 경탄합니다.
홍대용 이후, 남천주당은 조선사신단의 필수방문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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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잔해.
폭격을 맞은듯, 벽들은 무너져 내렸고 기둥들만이 쭈뼛거리듯 서있습니다.
잔해의 현장은, 자꾸 시선을 끌어당겼습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달라는, 애절함이 있는 듯 했습니다.
사라지는 것에, 울림이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는 고층건물이 세워질 것입니다.
마술처럼, 지금의 모습은 사라지겠지요.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흔적의 조각 하나를, 이렇게 줏어담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중국의 선비를 만나고 서양의 과학문물을 접한 것이, 필경 홍대용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홍대용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이것들은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되어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제시됩니다.
문화적 자폐증에 빠져있던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이는 '충격' 자체였습니다.
조선 선비들의 북경행이 홍대용 이전과 홍대용 이후로 나뉘어지는 이유입니다.
북경에서의 3개월 체류.
홍대용은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6C251B4BF0CFEE45)
깐징후통을 벗어납니다.
총기있는 조선의 젊은 선비 홍대용은, 나타날 듯 나타날 듯, 끝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사합원 대문을, 굴러다니는 벽돌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다녔을 뿐입니다.
그것들에 아로새겨진 홍대용에 대한 기억을, 교감하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마지막 한국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 깐징후통에 찾아와 홍대용의 자취을 더듬어본.
아름드리 홰나무가 우뚝 서있었습니다.
가벼운 봄바람에 잎들이 살랑이고, 그 연푸름에 눈이 시렸습니다.
녀석은, 당당해보였습니다.
베어져 사라지는 것이 목전의 운명임을, 녀석이 모를리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녀석은 이처럼 당당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