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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일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눅 11:42)
예수 그리스도는 십일조론을 통해 이 부분을 확실히 짚어 주셨다. 마태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했고 누가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렸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따져 보아야 한다. 십일조의 정신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십일조의 정신이 의와 인과 신이기 때문이다. 십일조의 정신이 빠져 있는 십일조란 율법에 강제되어 있는 신자의 의무이행일 뿐일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것도 하고 의와 인과 신도 더하라 하신다. 이 말씀으로 십일조의 정신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왔다는 점을 확인해 주셨다. 그리고 의무감으로 하지 말고, 너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늘창고에 쌓아 두라고 말씀하신다. 십일조를 권장하시는 예수님은 십일조를 받으신 적이 없다는 사실도 상기해야 한다.
십일조의 시작은 모세 시대의 광야교회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모세시대보다 500년 전인 아브라함의 시대부터 십일조가 시작되었다고 말씀한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의 연합군이 전쟁을 일으켜 소돔을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따라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바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소알왕 벨라가 동맹하여 대항하였으나 패하고 소돔 땅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포로가 되어 전 재산을 빼앗기고 끌려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318명의 사병을 이끌고 가서 밤에 기습을 하여 저들이 빼앗아 간 탈취물과 사람을 몽땅 되찾아 왔다. 이때에 살렘왕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영접하며 축복하였다.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감사함으로 탈취물의 십분의 일을 바쳤다. 전쟁에 패해 도망했던 소돔왕이 부하들과 함께 아브라함을 영접하며 재물은 가져가고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만 돌려 달라고 요청해왔다.
멜기세댁에게 축복을 받고 십일조를 바친 아브라함은 기쁨으로 가득 차서 사람뿐만이 아니라 재물까지 몽땅 돌려주었다. 소돔왕이 아브라함을 치부케 하였다 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돌려주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감사와 기쁨으로 바쳤고 여기에 더해 소돔왕에게 탈취한 탈취물까지 다 내 줄 수 있을 만큼 기뻐했고 감사했다.
그런데 시시때때로 십일조 반대론자들은 십일조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십일조 폐지론자들은 십일조란 구약의 하나님이 강제한 것이며 신약에서는 구습이며 율법이 폐지되었으니 십일조도 마땅히 폐지 되어야 한다. 목사가 십일조를 강제하고 십일조를 통해 치부하고 있는데 신약의 예수님은 십일조를 내라 하신 적이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한 사도바울의 예를 들어 교인이 십일조를 드릴 마음이 없는데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현재 "십자가마을"이라든지, 일부 목사들까지 동조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들이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사도바울의 헌금론을 살펴보자. 고린도후서 9장 6절과 7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문제는 물질이 넉넉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충분할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던 십일조가 빈곤하게 되고 이로 인해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졌을 때에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십일조의 정신을 바르게 깨닫고 있는 성도는 십일조 문제로 인하여 시험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한다.
십일조 반대론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는 율법폐지론을 근거로 십일조도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인가?
예수님께서 확고히 말씀하신 것은 모세의 율법이라는 단서를 달았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율법에는 율법의 정신과 거룩한 의무의 정신이 강조되고 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하시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에는 두 가지의 정신이 담겨 있다. ‘복의 언약’과 ‘선민으로서의 의무’가 그것이다. ‘복의 언약’은 말씀의 정신이고, ‘선민으로서의 의무’는 성도의 정신이다. 율법의 정신은 두 가지 정신이 함께 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면서 서기관과 사두개인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충실하기 위하여 적용할 수 있는 사례집을 만든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 사례집은 실상 유대인의 재판에 사용되었던 판례이기도 하다. 이것을 탈뭇이라 불렀고 탈뭇은 율법을 해석한 장로(랍비)의 전통적 해석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탈뭇은 성경을 재해석한 책이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이다.
탈뭇은 본문인 미쉬나와 주석인 게마라로 되어 있다. 미쉬나는 모세의 율법을 해석 적용한 역대의 랍비(장로)들이 사회전반에 걸쳐 적용했던 사례들이 문답형식으로 구전되었으며 후대에서 이를 편집해서 탈무드가 되었다.
탈뭇은 4세기경에 편집된 팔레스틴 탈무드와 6세기경까지에 편집된 바빌론 탈무드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인이 되면 자기의 토라를 의무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했다. 탈뭇은 장로들(당시의 랍비로 불리우는 서기관, 사두개인, 바리새인 등 종교지도자)이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주석 성경의 원조에 해당한다.
탈뭇이 모세의 율법에서 강제하고 있는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법으로 이행하느냐 하는 합리적인 방법에 매달리게 되자, 율법의 두 가지 정신 중에 선민으로서의 거룩한 의무의 본질이 훼손되었다. ‘복의 언약’에 충실하려면 ‘의무의 정신’도 충실해야 하는데, 의무에 무게를 두다 보니 정신이 사라졌다.
정신이 사라진 율법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정신이 빠져 나가니 의무만 남았다. 의무만 남은 율법은 실상 세금과 같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걸림돌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장로의 유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바로 이점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이며, 이 지적은 미가서 6장 6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에도 같은 의미로 기록되어 있다.
(2) 고르반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고르반이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버리는도다"(막 7:9)로 시작된 이 말씀은 모세의 율법이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밝혀 준다. 어떻게 변형되었을까?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막 7:10~11)로 변형되었다. 결과는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막 7:12~13) 까지 갔다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신다. 예수님의 지적에 따르면, 탈뭇(장로의 유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자는 지도자인 서기관이며 바리새인이며 사두개인 이다.
성경을 해석하되 자신들의 입장과 입맛에 따라 해석하고 적용함으로 율법의 원래 정신을 훼손하여 인간중심의 해석전통(탈뭇)을 만들어냈다는 지적이다. 이 해석전통이 정형화됨으로 인해 원래의 율법정신이 왜곡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폐하시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의 율법이 아니다. 해석전통으로 인해 변형된 ‘사람의 율법’인 장로의 유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아가페 성경사전의 풀이에 의하면, 고르반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유대인들 가운데 생겨난 관례로서 하나님께 예물로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을 가르킨다로 풀이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고르반 된 돈은 공공의 복리를 위한다 할지라도 종교적 목적 이외에는 그 전용이 불가한 바쳐진 돈이라고 정의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고르반이란, 헌물 또는 제물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을 중시하여 고르반이란 말로 맹세한 경우, 그것이 부모 부양에 필요한 것일지라도 취소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이 맹세는 악용되어 부모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게 되는 핑계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로의 유전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율법의 정신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말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예수는 신약성서 《마가복음》 7장 11절에서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라고 언급하였다. 미슈나를 보면 고르반은 바쳐진 성물이나 돈을 말한다. 후기 유대교에서 이 용어가 등장하며 고르반으로 성별된 물건은 무엇이든지 간에 결코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는 경건을 가장하여 자기들의 연로한 부모를 부양할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고르반을 사용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실이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계명에 전적으로 반대되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이슬람에서는 ‘고르반 이드’라는 이름으로 매년 제사를 드린다. 인구의 90%가 이슬람교도인 방글라데시에서는 2006년 고르반 이드를 위해 인도에서 110만 마리의 소를 수입했다. 수입된 소를 포함하여 약 350만 마리의 소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방글라데시는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 부자는 낙타나 소 두마리를 바치기도 했다. 모스크에서 나온 사제(이맘)가 소를 잡는다. 고르반 이드에 사용되는 소는 치장을 한 뒤에 제사를 드리는 제사자의 대문 앞에서 이맘의 날카로운 장칼에 의해 목이 절단되며 죽는다. 이때 쏟아져 나온 소의 피는 가족(특히 장남)을 위해 대문에 발려진다. 고르반 이드에 바쳐지는 제물 중에 제사장의 의식에 의해 방면을 받는 자유소가 있다. 종교의식에 따라 특별히 자유를 얻은 소는 표식을 하게 되고 표식을 한 소는 어디에서든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된다.
문제는 또 있다. 십일조 폐지론자들이 주창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 없기 때문에’ 라는 근거 제시는 실상 베뢰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성부께서 법으로 정하신 일인데 어찌 성자께서 아버지의 법을 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베뢰아에서는 된다.
베뢰아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베뢰아의 특징은 성부하나님과 성자예수님을 동일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위상을 높이다 보니 성령의 좌소마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하에 통합시켜 버린 양태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성경본문에 매달려 성경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 워치만 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 "예수"를 반복하여 부르면 예수의 이름이 참된 영의 양식이 되어 성도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니 예수라는 이름을 부름으로 참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베뢰아 1기생인 이명범은 레마선교회의 "목회자 REM" 이라는 영성 프로그램에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구주"를 30여 분간이나 반복해서 부르는 예수타령 시간을 배정했다. 레마 선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다가 탈퇴하여 서울TD(Tress Dias)를 맡고 있는 이정식 장로는 "예수타령" 시간은 원래 TD의 프로그램에는 없는 것으로 이명범이 집어넣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오순절 계통에서 분리하고 있는 세대론도 위험하다. 구약은 성부 하나님의 시대요,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이며, 교회의 시대는 성령의 시대이다 라고 구분을 짓는 세대론은 삼위일체론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위험하다. 성령을 강조하고 교회를 강조하게 되면, 구약의 하나님은 유대교의 하나님으로 인식되게 되며 멀어지게 되어 있다. 인간 세상의 예를 들면 할아버지쯤으로 인식되게 되더라는 이야기이다.
분명하게도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시며, 구약의 시대에도 사역하셨다. 승천하신 후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성도들에게 보내셔서 내주하시며 성도를 견인해 가시는 것으로 성경은 말씀하시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 4절에서 살아 있는 돌이라는 뜻으로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인 로고스로서 천지를 창조한 말씀이며 그 앞에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난다는 말씀으로 말씀인 로고스의 격을 높이고 있다. (히 4:12,13) 뒤를 이어서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항상 살아계시며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증거하고 있다. (히 4:15, 16, 7:25)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의 사역이며 그 사역은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를 동일시하는 양태론은 이단사상이다. 사역 면에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하나님을 구분하며, 구약은 성부시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교회는 성령시대로 분리하는 세대론이 위험한 이유이다.
(3) 탈뭇
탈뭇을 보면 참 재미있다. 적용된 실예와 함께 가슴 깊숙이 교훈이 되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참으로 가치있는 책이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탈뭇이 재미있고 깊이가 있는 것은 인간이 지어낸 작품이며, 오랜 시간 적용되어진 삶의 흔적에서 나온 교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미도 있고 이해하기가 쉽고 적용하기도 쉽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의 정신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 경계해야 한다.
토라를 예로 들어 보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토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처럼 아끼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탈뭇에 보면 탈뭇을 팔 수 있는 경우가 예시되어 있다. 남성이 결혼을 앞두고 혼인비용이 부족하면 토라를 팔아서 결혼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토라를 팔 수 있다. 이는 유대인의 가치관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유대인은 결혼과 교육을 가장 중요한 일로 우선 취급하고 있다.
탈뭇은 대제사장 외의 전 계층에 걸쳐서 일부다처제를 인정하고 있다. 두번째 부인을 얻기 위해서 혹은 세 번째 부인을 얻기 위해서 토라를 파는 행위가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만연되어 있었고 첫 번째 부인이 아니라면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은 이혼증서를 써 주기만 하면 이혼이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이혼증서를 써서 두 번째 부인을 내 보내고 토라를 팔아 세번째 부인을 맞아들이는 행위 등으로 인해 혼인의 성스러운 개념이 실종되었다.
우리의 현실로 눈길을 돌려 보자. 기독신문 3월 20일자 사설에는 무속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기독인들의 신앙에 빨간불이 켜져 있다고 지적한다. 사설은 역술 관계로 먹고 사는 사람이 100만 명이나 되고 그 시장은 수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들 중에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우려했다. 웰빙을 부르짖으며 삶의 양태는 화려해진 반면, 정신세계는 추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독신문 사설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이 같은 배경에는 교회가 신앙적 신념과 강한 의지, 삶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다는 의미다. 가정문제 진로문제 이성문제 등 현대인의 고민과 관심사에 대해 교회가 제대로 지표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골병 든 현상들 속에서 안일해진 한국 교회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순교를 각오한다는 말이나 한국 교회의 외형적 힘을 믿고 큰소리치는 허풍을 보이기 전에 본연의 모습에 충실해야 한다. 매년 주기적으로 또는 선거가 있는 해에는 점집이 더 성행하고 무속이 횡행한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 교회가 참고해야 될 일이다. 교회는 영혼구원에도 힘써야겠지만 인간의 건강한 정신과 평안한 삶을 인도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대책을 세우고 세대구분이 너무나 뚜렷한 지금의 교회 구조를 개선해 교회 안에서 선배가 후배들의 정신적 상담자가 되고 조언자가 되는 세대간 교류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맺고 있다. (하나님의 낑낑 육아백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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