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해산공 문영- 수은공 홍조 ~~~약와 현정 - 경 - 병은- 수영- 1남 돈대(고조부) 1녀 따님 인천채씨 휘 석현에게 시집가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일명 수능이 몇일 남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고3 자녀 및 재수등 입시생 학부모님의 자녀사랑이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신념으로 매년 대구 팔공산 갓바위는 항상 사람들이 넘쳐난다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곳이다
소실적 팔공산에 올라 소원을 빌어본적도 있지만 이곳에는 왠지 모를 신비감이 항상 나를 이끌었던 곳이다
八公山(팔공산)은 신라시대에는 父岳(부악) 또는 公山(공산)이라 했다고 하며
지명은 改定(개정)시에도 전혀 다른 名稱(명칭)을 사용한 예는 극히 드물다. 계통적인 意義(의의)를 가졌다. 父岳(부악)과 公山(공산)은 전혀 다른 것이다.
父字(부자)는 公字(공자)의 誤字(오자)로 보고자 한다. 公岳(공악)을 父岳(부악)이라 잘못 읽은 것 같다.
母岳(모악)이 없는 바 아니나 父岳(부악)과 公山(공산)은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五岳(오악)의 中岳(중악)이었다.
三國史記 卷第32雜志第一祭祀 中祀條(삼국사기 권32제잡지제일제사 중사조)에는 "五岳 東吐含山大城郡 南地理山 菁州 西 龍山 熊川州 北太伯山 奈已郡 中父岳 一云公山押督郡 오악 동토함산대성군 남지리산 청주 서계용산 웅천주 북태백산 내이군 중부악 일운공산압독군" 이라 한 기사에서 中岳(중악) 父岳(부악) 公山(공산)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八公山(팔공산)의 이름은 의연히 公山(공산)이었다
조선 국초에 된 "신증등국여지승람"에 公山(공산)은 혹 八公山(팔공산)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는 기록이 史上(사상)에 처음이다. 팔공산의 명칭에 대하여는 여러 說(설)이 있다고 한다
이하중략 참고문헌 : 팔공산
그 팔공산에 관봉석조여래 좌상인 갓바위은 해발 859m 지점에 자리한 화강암석에 단독원각상으로 조각된 불상이다.
이 곳에서 팔공산 서북의 준령을 따라 북서쪽에 인봉, 노적봉과 같은 험준한 석군들이 팔공산 일대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정상에 총 높이 약 6m의 좌불을 화강암 1석으로 원각하여 조각해 두었는데, 단형의 대좌도 동일석이고 신부의 의문이 좌대석 전면을 덮어 이른바 상현좌를 이루고 있다.
갓 모양의 자연판석을 올려놓은 머리는 육계가 뚜렷한 소발이며 두 손 모양은 석굴암 등 8~9세기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항마촉지인과 유사한데 왼손에 작은 약호를 든 것으로 미루어 약사 여래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로 대구 동화사 지나 공산터널지나 공산저수지 근처에 야산정사라는 곳이 나온다
대은 이수영의 슬하 1남 1녀중 따님이 시집간 인천채씨 휘 석현의 가문이며 저의 4대조 고모부 마을이다
그곳에서 인천채씨 공산 휘 성원을 낳으셨다
대구스토리에서는
야산정사(冶山精舍)는 동구 내동(월전곡) 仁川人(인천인) 蔡晃源(채황원)의 樓息所(누식소)였다고 한다.
蔡晃源(채황원)의 자는 士重(사중) 호는 時軒(시헌), 兩傳軒(양전헌)의 后(후), 四男中(사남중)끝인데 幼時(유시)부터 體貌(체모)가 出衆(출 중)하고 聰明(총명)하여 耕山 崔蓄述(경산 최축술)의 門人(문인)으로 文彩(문채)가 爛華(난화)하였 다 한다.
兄弟(형제)들 모두가 뛰어나 伯公(백공)의 호는 勸齋(권재), 西山 金興洛(서산 김흥락)의 門人 (문인)이며
仲公(중공)의 호는 且(차)으로 대은(大隱) 이수영(李秀瑩)과 拓岩 金道和(척암 금도화) 兩門人(양문인)이다.
叔公(숙공)의 호는 且(차창)으로 모두 文集(문집)과 遺稿(유고)를 남겼으며 鄕里士林(향리사림)들이 評(평)하여 五常八龍(오상팔룡)이 古代(고대)에만 全美(전미)한 것이 아니라고 칭찬하였다.
[주]오상(五常) : 삼국 시대 때 촉(蜀)나라의 마량(馬良) 형세가 다섯으로, 모두 재명(才名)이 있었는데, 그들의 자(字)에 모두 상(常) 자가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마량이 가장 뛰어났는데, 마량의 눈썹이 희었으므로, 사람들이 “마씨의 오상(五常) 가운데 백미(白眉)가 가장 뛰어나다.” 하였다. 《三國志 卷39 蜀書 馬良傳》
《 [주]백미(白眉) : 형제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삼국 시대 때 촉(蜀)나라의 마량(馬良) 형세가 다섯으로, 모두 재명(才名)이 있었는데, 그들의 자(字)에 모두 상(常) 자가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마량이 가장 뛰어났는데, 마량의 눈썹이 희었으므로, 사람들이 “마씨의 오상(五常) 가운데 백미(白眉)가 가장 뛰어나다.” 하였다. 《三國志 卷39 蜀書 馬良傳》
[주]팔룡(八龍) : 동한(東漢) 때 순숙(荀淑)에게 검(儉), 곤(緄), 정(靖), 도(燾), 왕(汪), 상(爽), 숙(肅), 전(專) 등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이름이 나서 당시 사람들이 팔룡이라고 불렀다. 《後漢書 卷62 荀淑傳》 》
위에서 알 수 있듯이 향촌사림이 인정하는 곳으로 시집간 4대조 고모님은 슬하에 채성원을 낳으셨다
채성원(蔡星源)
1870년(고종 7)∼1932년.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사규(士奎)이고, 호는 공산(公山)이다.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대구(大邱)이다. 채응린(蔡應麟)의 후손으로, 고조는 채윤복(蔡允復)이고, 증조부는 채영국(蔡榮國)이며, 조부는 채범곤(蔡範坤)이다.
부친은 채세동(蔡世東)이고, 모친은 홍우찬(洪禹燦)의 딸 부림홍씨(缶林洪氏)이다.
생부 채석현(蔡錫玄)과 생모 대은(大隱) 이수영(李秀瑩)의 따님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지만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고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았다.
어려서는 외조부 이수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특출한 재주로 어린 아이답지 않게 경서(經書)의 의의를 말하여 크게 칭찬을 들었다.
자라서는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고 자기 수양과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간단명료하면서도 오묘한 이치가 드러나게 글을 지었다.
또한 고대의 예법(禮法)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데 힘썼다.
저서 『사례작휘(四禮酌彙)』 4편을 편집하여 후손들에게 실천하기를 강조하였으며, 유고로 8권 4책의 시문집 『공산문집(公山文集)』이 전한다. [참고문헌] 公山文集 [집필자] 정병섭
공산집 (公山集) 『공산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인 채성원(蔡星源 ; 1870∼1932)의 시문집이다.
그의 문장은 간단하고 오묘하여 고대의 작가들의 수준과 맞먹을 정도였으나, 저작을 즐기지는 않았다. 옛날의 흥했던 예법이 사라지고 쇠퇴해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의 실행을 위해 힘썼다. 『사례작휘(四禮酌彙)』4편을 편집해서 가정에서 실행하였다.
위 공산집은 현재 영남대학교 논문등 많은 곳에서 연구되고 있는 책자이다
대은 이수영의 외동따님은 인천채씨 명문가에 시집가셔서 채성원을 낳으셨으며 그 스승이 바로 외조부 대은 이수영 이며 척암 김도화이다
척암 김도화는 항일 독립운동가이며 바로 한산이씨 안동 수은공파 후손 대산학파의 세보를 이은 분이다
다음편에 소개하고자한다
4대조 고모님을 기리며 후손 이대원 삼가글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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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갓바위 가보지는 못하고 말로만 들었는데 상세한 설명과 사진을 올리셨네요. 수고하셨습니다.
회장님 좋은 덕담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십시요
좋은 글 잘 읽었소. 한산이씨가의 따님들이 출가하여서 어진 아내들이 되고 현명한 어머니들이 되는 것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네. 아우님의 4대조 고모님도 분명 현모양처의 훌륭한 분이셨음이 틀림없으셨으니, 명문 인천채씨 집안에 시집가신후 친정인 한산이씨 집안의 본받을만한 가풍을 접목시키시지 않으셨나 나름 추측을 해보네. 대산학문이 대은 선조를 거쳐 외손자에게 전수된것은 정재 유치명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일일세.
형님 잘 지내셨지요 3주 연속 문상 다녀오니 심신이 지쳐있습니다 좋은 뎃글 공감내용 감사합니다 대산학파가 요즈음은 영남학파 영남퇴계학파등 신 수식어로 바꾸어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견으로 저는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대산 선조님의 흔적이 한두줄 서술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길 수 있고 후손들이 깊은 공부를 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산 글자는 반드시 들어가야하지않나 나름 생각해봅니다 소호문중이야기가 정재 유치명 뿐만 아니라 긍암 이돈우와 연결되고 그이후 너무 빨리 변해버린 현대사 이야기만 남았습니다 변해버린 현대 보다 인정넘치는 옛날이 그리운 것은 조금씩 늙어간다는 것은 아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