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 10/05 세계 한인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멕시코한인이민100주년기념 (2005.5.12. 발행)
2007 - 제1회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서울 코엑스)
제1회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이 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세계 각지의 재외동포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외교통상부가 주최한 이 행사에는 재외동포와 모국간 연대를 강화하고 전세계 한인의 역량을 결집하자는 취지로 일본 프로야구 전설의 강타자 출신인 장훈씨, 독립운동가 조병요씨의 외손녀인 양은혜씨 등 재외동포들과 한덕수 국무총리, 송민순 외교부 장관 등 국내인사들이 참석했다.
행사는 장훈 씨 등 재외동포 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사들에 대한 훈장 수여식과 축하공연, 축하 조형물 점등식 등으로 진행됐다.
한 총리는 치사에서 "어제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났기 때문에 이 자리가 더욱 뜻깊다"면서 "특히 남북정상이 해외동포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은 동포들에게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 장관은 기념사에서 "정부의 대외동포정책은 동포들이 거주국에서 번창하고 거주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며 "외교부는 `세계한인의 날' 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재외동포 700만 시대에 걸맞게 인정미 넘치는 맞춤형 서비스를 동포들에게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영사관의 추천으로 헤시피에 거주하는 최공필씨와 연합뉴스와 재외동포언론인 협의회에서 초청으로 남미로닷컴이 참가했다. /남미로닷컴 2007/10/05, 19:16:06
1986 - 제10회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폐막
1986년 9월 20일에 개막한 서울아시안게임이 10월 5일 폐막됐다. 서울아시아드 심벌마크가 그려진 대형풍선이 6개의 조명을 받으며 승천하자 8만 관중은 빨강ㆍ초록ㆍ하양의 손전등을 일제히 켜들고 작별인사를했다.
27개국이 출전, 중국이 금메달 94개로 종합1위, 한국이 금메달 93개로 2위 일본이 금메달 58개로 3위를 각각 차지했다. 서울아시안게임은 역대 대회사상 최대규모인 4,839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했으며 경기종목은 태권도를 포함해 25개 종목이고 세계신기록 11개, 세계타이기록 2개, 아시아신기록 90개, 아시아타이기록 8개, 대회신기록 224개, 대회타이기록 32개를 각각 수립, 1982년 인도대회때보다 풍성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
1983 - 폴란드의 자유노조 지도자 레흐 바웬사, 노벨 평화상 수상
공산 폴란드 최초의 자유노조인 ‘연대’의 전국위원회 의장을 지낸 레흐 바웬사(Wałesa, Lech,1943~ )가 1983년 10월 5일 폴란드의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980년 8월 14일 1만6000여명의 노조원이 파업 중인 폴란드 그단스크의 레닌조선소 담을 넘어 자유를 부르짖었던 한 사내가 있었다. 바로 10년 전 이 공장에서 해고된 전기공 레흐 바웬사였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비록 초등학교와 직업학교 교육만 받은 그였지만, 1967년 레닌 조선소 전기공 시절, 거리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폴란드의 참된 자유노조를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결국 바웬사는 1980년 파업을 주도하면서 동구공산권에서 최초로, 지금은 불법화된 자유노조를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후 바웬사는 1990년 마조비에츠키와 대결해 압도적인 표차로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이후 경제개혁의 부작용으로 실업이 증가하고 경제난이 가중되는 등 국민의 불만과 시위가 확산되자 의회를 해산하고 1993년 9월 총선거를 실시, 신정부를 출범시켰으나 1995년 대통령선거에서 전 공산당원 A.크바스니에프스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조선
1978 - 자연보호헌장(自然保護憲章) 선포
자연보호를 위한 범국민적 결의를 성문화한 자연보호헌장을 1978년 10월 5일 정부가 선포하였다. 정부는 이 헌장의 제정을 위해 학계·언론계 등 각계 전문가 100명을 위원으로 위촉하였으며, 그 중 11명으로 구성된 헌장심의위원회가 헌장초안을 작성하여 여러 차례의 심의를 거친 끝에 헌장제정위원회와 자연보호위원회의 의견을 거쳐 확정하였다. 내용을 보면, 전문에서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자연생태계의 오묘한 법칙과 조상들의 자연보호관을 소개하고, 산업문명의 발달과 인구팽창 등에 따른 자연파괴의 심각성을 경고하면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자연보호를 위한 범국민적 결의를 담고 있다. /naver
[자연보호헌장]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혜택속에서 살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이 속의 온갖 것들이 우리 모두의 삶의 자원이다. 자연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원천으로서 오묘한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 땅을 금수강산으로 가꾸며 자연과의 조화속에서 향기높은 민족문화를 창조하여 왔다.
그러나 산업문명의 발달과 인구의 팽창에 따른 공기의 오염, 물의 오탁, 녹지의 황폐와 인간의 무분별한 훼손 등으로 자연의 평형이 상실되어 생활환경이 악화됨으로서 인간과 모든 생물의 생존까지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국민 모두가 자연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여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며, 모든 공해요인을 배제함으로서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회복, 유지하는데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 이에 우리는 이 땅을 보다 더 아름답고 쓸모있는 낙원으로 만들어 길이 후손에게 물려주고자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자연보호헌장을 제정하여 한사함 한사람의 성실한 실천을 다짐한다
1. 자연을 사랑하고 환경을 보전하는 일은 국가나 공공단체를 비롯한 모든 국민의 의무이다.
2.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문화적, 학술적 가치가 있는 자연자원은 인류를 위하여 보호되어야 한다.
3. 자연보호는 가정, 학교, 사회의 각 분야에서 교육을 통하여 체질화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4. 개발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신중히 추진되어야 하며, 자연의 보존이 우선되어야 한다.
5. 온갖 오물과 폐기물과 약물의 지나친 사용으로 인한 자연의 오염과 파괴는 방지되어야 한다.
6. 오손되고 파괴된 자연은 즉시 복원하여야 한다.
7. 국민 각자가 생활주변부터 깨끗이 하고 전 국토를 푸르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한다.
1978년 10월 5일 대통령 박정희
/브리태니커
1968 - 둡체크 체코 서기장 귀국
체코의 민주화 운동이 소련군의 무력에 의해 짖밟힌지 46일이 지난 1968년 오늘!
체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던 둡체크(Dubcek, Alexander, 1921~1992) 체코 공산당 서기장이 체코에 돌아왔다.
둡체크 서기장은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코시긴 소련 총리와의 회담에서 소련군의 체코 주둔을 강압에 못이겨 승인했다. /YTN
1968 - 미군, 베트남 케산 철수
베트남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68년 오늘!
미군이 헬리콥터를 이용해 베트남의 케산(Khesanh)에서 철수하고 있다.
후퇴하는 북베트남군을 추격하기 위해서였다.
케산은 북베트남군이 3개월전에 점령했던 곳이다.
미군은 케산에 대규모 공중폭격을 감행해 케산을 탈환했다.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죽음의 도시로 변해버린 케산!
미군은 폐허가 되어버린 케산을 뒤로 하고 또다른 전쟁터로 향했다. /YTN
케산은 베트남 전쟁 당시 비무장지대였던 북위 17°선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며 주(駐)베트남 미국군과 한국군의 기지가 있었다. 1968년 미국과 북(北)베트남 사이에 파리평화회담이 개최되기 직전 ‘제2의 디엔비엔푸’라고 일컬을 정도로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naver
1965 - 교황 바오로 6세, 뉴욕 방문
1965년 10월 5일 로마 교황 바오로 6세는 뉴욕 시를 방문해서 유엔총회에서 연설하였다. 죤슨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로마 교황을 방문하였고, 미국을 위해 뜻깊은 방문이라며 환영하였다. 대통령은 자신의 부인과 딸을 로마 교황에게 소개하였다. 그 후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에 자주 참석하였다. 1968년 4월 1일, 그는 차기 선거에 나서지 않을 것을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은퇴하였으며, 일년 후 사망하였다. 그가 임기를 치른 3년은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때였다. 50만 명 이상의 미군이 월남에 파병되었으나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대학가에서는 반전데모가 한창이었고 흑인 폭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해외에서의 미국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 /Google
1962 - 한국-에콰도르 국교 수립
에콰도르는 한국 단독수교국이다. 에콰도르 정부는 1949년 10월 4일 한국을 승인하였으며, 1962년 10월 5일에는 양국간의 외교관계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1974년 3월 상주공관을 설치하였다. 1983년 경제기술협력, 사증면제협정, 1984년 어업협정, 1985년 문화협정, 2001년 외교부간 태평양연안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상호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75년부터 한국의 건설업체가 에콰도르에 진출하여 1977년에는 정유공장의 배관공사와 키토시의 도로포장공사에 참가하였다. 또한 원양어선이 에콰도르에 어로기술을 제공하는 등 합작투자 형식의 어로협력이 이루어져 왔다. /naver
1958 - 프랑스, 제5공화정 출범
1958년 5월 알제리의 프랑스 주둔군과 이민자들의 반란을 계기로 드골은 절대다수로 국민의회의 신임을 얻어 정계에 복귀하였다. 곧 그는 의회로부터 위임받은 특별권한에 의하여 신헌법을 기초, 그 초안이 9월 28일 국민투표를 거쳐 10월 5일 공포됨으로써 제5공화정이 발족되었다. 이 헌법에서는 종래의 정국 불안정을 청산하기 위하여 의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하였으며, 총리를 임명하고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이외에는 행정 ·외교 ·군통수 분야에서 절대적인 권한이 인정되었다. 드골은 1959년 제5공화정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naver
1936 - 체코의 극작가, 인권운동가, 대통령 하벨(Havel, Václav) 출생
하벨 [Havel, Václav, 1936.10.5~ ]
1936년 10월 5일 프라하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48년 체코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에는 부르주아적인 배경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택시운전기사 등 노동을 하였다. 그후 프라하 예술아카데미를 졸업, 작가의 길로 매진하였으며, 1963년 희곡 《뜰의 축제 Zahradn
slavnost》로 국제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검열을 거부하여 국내에서는 20여 년 동안 작품발표가 금지되었다.
1968년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후에는 트로트노바 근처의 외딴 농촌에서 은거하며 양조장 직원으로 일하였으며, 수많은 동료 반체제운동가들이 투옥 등으로 활동에 제한을 받는 가운데 반정부운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 8월 '인권헌장77'을 공동기초하여 투옥되었고, 1979년 공화국 전복기도 혐의로 4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러자 그의 희곡을 읽지 않은 체코슬로바키아인들도 그를 반체제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받아들였다.
1989년 11월 그는 반체제연합 '시민포럼'을 조직, 공산당의 권력독점 폐지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여, 1940년 동안 군림해 온 공산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어 12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의회에 의해 비공산당 출신으로 임시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분립 이후인 1993년 1월 말 실시된 선거에서 5년 임기의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95년 체코의 실업률은 3.3%로 유럽 최저이며, 인플레율도 10%로 중앙 유럽국가 중 최저로, 박식한 지식과 균형잡힌 이념을 가진 하벨은 정치면에서의 경험미숙을 훌륭한 통찰력으로 잘 극복하고 있다. /naver
- P. R. Popovitch, Y. P. Artyukhin
and Soyuz 14
- Gagarin, Titop, Nikolayev, Popovich
1930 - 소련의 우주비행사 포포비치(Popovich, Pavel R.) 출생
포포비치 [Popovich, Pavel Romanovich, 1930.10.5~ ]
1962년 8월 12일 발사된 보스토크 4호를 조종했다. 보스토크 3호를 타고 하루 먼저 우주로 발사된 A.G.니콜라예프와 함께 최초로 동시에 2명이 우주에 있었다. 어렸을 때 목동이었던 그는 1951년에 러시아 연방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곧 공군으로 전속되어 1954년 볼고그라드공군대학을 졸업한 뒤 조종사가 되었다. 1960년에는 최초로 우주비행사 훈련에 참여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Y. P.아르튜힌과 함께 소유스 14호로 우주비행(1974. 7. 3~19)할 때 주조종사였다. 이들은 6월 25일 궤도에 올려진 우주정거장인 살류트 3호와 도킹하여 15일간의 과학실험계획을 수행했다. 자서전 〈아침에 이륙 Vyletayu utrom〉(1974)이 있다. /브리태니커
1922 - 한국보이스카우트 운동의 모체인 소년척후단 조직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은 한국 보이스카우트운동을 총괄하는 사단법인 청소년단체로 1922년 창립되었다. 청소년들이 책임있는 민주시민으로서 지역사회·국가·국제사회에서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개인의 정신적·신체적·사회적·지적 잠재력을 개발시키고, 평화와 이해·협조의 증진 아래 자연 속에서 개인의 인격을 개발하고 사회발전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1908년 영국의 K.S.S. 포웰이 창시한 보이스카우트운동은 전세계 100여 개국으로 확산되었다. 한국에는 1922년 10월 조철호(趙喆鎬)에 의하여 소년조선군, 정성채(鄭聖采)에 의하여 소년척후단이 창립되었다가 37년 9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해산당하였다. 8·15 후 46년 3월 대한보이스카우트 중앙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어 그 뒤 몇 차례 이름이 바뀌어 68년부터 현재의 사단법인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으로 자리잡았다. /naver
1919 - 인촌 김성수, 경성방직주식회사 설립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
1919년 10월 (5일) 김성수가 자본금 100만 원, 제1회 납입자본금 25만 원으로 창립한 회사.
1923년 4월 최초로 제품이 출하되었는데, '삼성'·'삼각산' 등의 상표가 붙은 광목(廣木)이었다. 광목은 일본 대(大)방직자본의 주력제품이었기 때문에 당시 다른 조선인 도시직물업자들은 이들과의 직접적 경쟁?회피하여 수입면사를 이용한 특수직물을 주로 제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성방직은 바로 이 광목을 생산했다는 점에서 근대 조선인 직물업의 발전과정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1923년 생산품이 출하되자 초창기의 낮은 품질 및 상품인식, 일본제 광목과의 경쟁으로 극심한 판매부진을 겪었다. 1923년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전개된 '물산장려운동' 등 민족감정에 대한 호소로 시장을 확보해나가는 한편, 증자와 조선총독부의 보조 및 식산은행으로부터의 차입으로 배당과 신증설을 이루어나갔다. ... /브리태니커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3654
1902 - 맥도날드(McDonald's Co.) 창립자 크록(Kroc, Ray) 출생
크록 [Kroc, Ray, 1902.10.5~1984.1.14]
Ray Kroc (October 5, 1902 - January 14, 1984) took over the then small-scale McDonald's Corporation franchise in 1955 and built it into the most successful fast food operation in the world. Dubbed the Hamburger King, Kroc was included in the TIME 100 list of the world's most influential builders and titans of industry, and ammassed a $500 million fortune during his lifetime. He was also the owner of the San Diego Padres baseball team starting in 1974.
http://en.wikipedia.org/wiki/Ray_Kroc
1895 - 미국의 육군 장성, 외교관, 행정관 스미스(Smith, Walter Bedell) 출생
스미스 [Smith, Walter Bedell, 1895.10.5~1961.8.9]
제2차 세계대전중 유럽에서 미군 참모장을 지냈다. 스미스는 인디애나 주 국민군에서 사병으로 군대생활을 시작했으며(1910~15), 1917년 미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잠시 전투에 참가한 후, 진급을 거듭하며 미국과 필리핀에서 복무했고 보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2년 2월 그는 준장의 계급으로 합동참모본부의 사무장 겸 연합군 통합참모본부의 미국측 사무장으로 임명되었다. 9월에는 유럽 작전지구 참모장 겸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장군의 참모장이 되었고 종전 후 아이젠하워가 유럽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연합군 대표로 협상에 참여해 이탈리아의 항복(1943)과 독일의 항복(1945)을 받아냈다. 1945년 미국으로 돌아온 스미스는 육군성 작전계획국의 참모장으로 있다가 얼마 후 소련 주재 대사가 되었다. ... /브리태니커
1887 - 프랑스의 법학자 카생(Cassin, Rene) 출생
1882 - 미국 로켓의 아버지 고더드(Goddard, Robert Hutchings) 출생
1864 - 영화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루이 뤼미에르(Lumiere, Louis) 출생
1789 - 파리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시위하고, 베르사유 행진을 벌임
1781 - 체코의 철학자, 수학자 볼차노(Bolzano, Bernhard) 출생
1713 -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디드로(Diderot, Denis)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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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