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뮤즈, 베아트리체(Beatrice)
이탈리아어권의 여성 이름. 라틴어 여성 인명 베아트릭스(Beatrix)의 이탈리아식 바리에이션이다.
이 Beatrix라는 이름의 유래는 좀 복잡하다.
이 이름의 기원은 여행하는 자를 뜻하는 라틴어 '비아토르(Viator)'의 여성형
'비아트릭스(Viatrix)'인데, Viatrix가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축복받은
자라는 뜻의 라틴어 '베아투스(Beatus)'와 합쳐지면서 철자가 Beatrix로 바뀌었다.
Beatrice를 영어로는 '비트리스' 또는 '비어트리스'로 읽고, 프랑스어로는 '베아트리스'라고 읽는다.
영어로는 라틴어인 Beatrix를 그대로 써서 '비어트릭스'라고 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식 애칭은 '비체(Bice)', 영어식 애칭은 '비(Bea·Bee)', '트릭시(Trixie)', '트릭스(Trix)'.
본명은 베아트리체 디 폴코 포르티나리(Beatrice di Folco Portinari).
1266년경 피렌체에서 출생, 1290년 6월 8일 피렌체에서 사망.
신곡을 쓴 이탈리아의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가 평생을 두고 사모한 여인이다.
귀족의 딸이었다고 하며 단테는 어린시절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평생을 맘속에서
사랑해왔으며, 결국 그의 평생의 대작 신곡 안에서 단테를 인도하고 구원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단테가 평생 연모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제대로 대화 한 번 해본 적이 없었으며
주고받은 말은 인사말 정도가 전부였다.(...)
모처럼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한자리에 있을 기회가 생겼지만
그녀에게 제대로 말도 못 걸고 바라만 보며 가슴앓이만 하다가
스스로 자리를 뜨고 말았다는 안쓰러운 일화도 있다.
단테의 아내는 '만약 그녀와 맺어졌으면 평생 그렇게나 그리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렌체 사람 폴코 포르티나리의 딸로, 1288년 이전에 시모네 디 발디의 아내가 되었으나
24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단테는 9세 때(1274) 한 살 아래인 그녀와 만나 사랑과 찬미의 감정을 품게 되고
9년 후에 우연히 길에서 다시 만나 그녀의 정중한 인사를 받자 지극한 행복을 느꼈으며
그후로는 영원한 여성으로 그의 마음속에 살아남게 되었다.
보카치오는 단테전-보카치오에서 이의 사실설(史實說)을 들고 있으나 이 외에
단테가 만들어낸 가공의 이상적 여성이라는 이상설(理想說), 혹은 어떤 이상을 상징화한 것으로서
사랑·진리·신학·천계(天啓) 등의 관념의 상징이라고 하는 상징설,
또는 실재하기는 했으나 폴코 포르티나리의 딸은 아니었다는 베아트리체 실재설도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못지않게 서양 문화 속에서 연인, 애인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어 왔다.
대개 마음의 지주, 동경하는 여성, 한 남자가 마음에 두고 계속 사랑하는 사람 등으로
이상화된 형상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소설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가 짝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는데
싱클레어는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해 이 베아트리체에서 따서 그녀를 베아트리체라고 부른다.
베아트리체 첸치
Beatrice Cenci
베아트리체 첸치(Beatrice Cenci, 1577년 2월 6일~1599년 9월 11일)
이탈리아의 귀족 여성. 빼어난 미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인 프란체스코 첸치에게 성폭행을 당하여 이를 신고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아버지에 의해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에 베아트리체는 계모, 친오빠, 이복 남동생, 하인 두 명(둘 중 하나는 베아트리체의 연인)과
공모하여 프란체스코를 살해했다. 원래는 독살을 시도했으나 죽지 않자,
망치로 쳐서 죽인 다음 실족사로 위장하기 위해 높은 난간에서 시체를 떨어뜨렸다.
결국 아버지를 살해한 사실이 밝혀져서, 관련자 중 범행 당시 너무 어려 사형에
처할 수 없었던 막내 동생만 감옥에 보내지고 나머지 가담자 전원이 사형을 당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로마 시민들이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항의하였으나,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아버지를 죽인 것은 패륜이라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 일로 로마인들은 베아트리체를 오만한 귀족 계급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삼았으며 그녀가 죽은 날마다 산탄델로 다리에 잘린
자신의 머리를 든 베아트리체의 유령이 나온다는 괴담도 떠돌았다.
이후 그녀의 모습을 동시대에 살았던 르네상스 대가인 볼로냐인 귀도 레니가 그렸다고 전해졌는데
그 그림을 여류화가 엘리사베타 시라니가 레니 스타일로 간략화해서 그린 그림이 우리가
흔히 아는 '베아트리스의 초상'이다. 이후 이 그림은 스탕달 신드롬으로 유명해졌다.
간단 요약은 여기를 참조할 것.
그림 속 인물이 뒤를 돌아보는 구도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요하네스 베르메르)에 영감을 주었다.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년~1321년)
이탈리아어권의 고전적인 이름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이탈리아 외의 국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미국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이름이다.
물론 미국 본토의 이름보다는 그 사용량이 적지만, 해외에서 이민 온 사람이
선택하는 쪽보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지어주는 경우가 더 많다.
이유는 모르지만 미국 흑인 사이에서도 많이 사용된다
대중매체에서 쓰이는 단테라는 이름은 대부분 신곡의 저자인 단테 알리기에리의
이름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아서 왠지 지옥과 관계가 있는 경우가 많다.
두란테의 약칭인 단테(Dante) 또는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의 시인이다.
피렌체의 알리기에리 혹은 알라기에리(Alagh(i)eri) 가문의 일원이다
(단테의 아들 야코포의 설명: “Durante olim vocatus Dante, condam Alagherii de Florentia”).
두란테 알리기에리의 이름은 "장수하는 날개가 달린 자"라는 뜻인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남긴
다양한 영향들의 결과를 예언한 실로 상징적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단테는 1265년 이탈리아의 중부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생일에 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며, 5월 30일이 실제 출생일이라는 설이 있다.
유년 시절의 단테의 삶에 관해서는 무엇보다도 소년 시절에 경험한 베아트리체와의
인연을 주제로 하는 자서전적인 《새로운 삶》(Vita nuova)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단테가 9살이 되었을 때 폴코 포르티나리 (Folco Portinari)의 딸
동갑내기 베아트리체를 처음으로 멀리서 보고 애정을 느끼며, 이 진귀한
유년 시절의 경험은 단테의 인생 행로를 좌우하게 된다.
그러나 단테는 12세 때인 1277년 젬마 도나티(Gemma Donati)와 약혼을 하게 되며 1291년 결혼하게 된다.
즉, 베아트리체가 24세로 사망할 때까지 단테는 베아트리체에게 혼과 열정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1275년부터 1294년에 걸쳐 약 20여 년간 신학을 비롯하여
다방면에 걸쳐 교육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단테는 특히 브루네토 라티니 밑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신곡》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단테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스콜라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또한 배운 것으로 추측된다.
단테는 1290년대에 피렌체와 피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당파 싸움에 가담하였으며
1300년에는 피렌체 시협의회 회장(Priorat)직을 맞아 1303년까지 적극적으로
정치무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단테는 피렌체가 로마 교황의 세력에서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로마의 교황을 옹호하는
구엘프를 지지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받드는 기벨린과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 후 기벨린의 승리로 두 세력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구엘프가
흑당과 백당으로 나뉘어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된다.
흑당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야심을 이용하여 백당을 패배시키게 되고
단테를 추방했으며 이 때부터 단테의 길고 긴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그 후 단테는 백당의 남은 사람들과 함께 흑당을 무찔러 피렌체를 탈환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하게 되고, 단테만이 백당의 일원으로 남게 된다.
그 후에 단테에게 고국으로부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면 사면을 내려주겠다는 조건부의 사면령이
내려졌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겐 더할 수 없는 치욕이라 생각하고 응하지 않았다.
결국 흑당은 단테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궐석 재판을 열었다.
단테는 라벤나로 돌아가 귀도 노벨로(Guido Novello)의 비호를 받으며 그곳에서 말라리아로 생을 마감했다.
단테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신곡》이며 이외에도 라틴어로 쓰여진 수필,
청년기의 시집도 다수 있다. 청년기에는 로맨틱한 스틸 노보 (Stil Novo) 풍의
연애시를 다수 썼으나 피렌체에서의 추방 이후부터 《신곡》과 《항연》,
<토착어에 대하여> 등의 그의 대표작이 쓰여졌다.
망명 중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생활하였다.
여러 편의 시나 논문을 썼으나 가장 유명한 것은 《신곡》이라는 장시이다.
내용은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에 이끌리어 지옥에 가고, 지옥보다는 고통이 덜한 연옥을 지나
끝으로 베아트리체에게 안내되어 천국에 간다는 기독교 사상에 기반한 이야기인데
그 생생한 묘사가 근세 문학을 낳게 하였다.
유랑 중에 철학 윤리 등의 문제를 논한 《항연》 등이 있다. 《신생》은 18세 때부터
그 후 7-8년간에 걸쳐 완성한 것으로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탈리아어로 된 최초의 것으로 중요한 문헌이다.
신곡은 오늘날 세계 고전 문학의 최대 걸작으로 광대한 규모와 조화의 미를 가지는 대서사시이다.
<토착어에 대하여>(De Vulgare Eloquentia)는 이탈리아의 토착어를 언어학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작품으로 간주되나, 라틴어로 쓰여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군주들에게 바쳐진 책으로 생각된다. <토착어에 대하여>는 군주들을 청자로 삼아
국가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단일된 토착어의 보급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언어로 말미암은 이탈리아의 통일을 최초로 언급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단테는 행동만이 사람들을 비참함으로부터 행복으로 이끌어올릴 수 있다고 설파한 뒤,
비길데 없는 시구(詩句)로 씌여진 자신의 작품을 "코메디아"라고 했다.
당시 결말이 행복하게 끝나는 작품은 희곡(코메디)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표현 방법을 "볼품없고 저급한" 것이라고 변명했으나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곧 "여자들도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언어"였던 것이다.
당시 문화어인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고 속어인 이탈리아어를 사용한 것은 《신곡》에 담긴
중세적인 카타르시스와 구원의 메시지를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리려는 뜻이었다.
단테는 자신의 아내가 아닌, 한번도 소유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한 여성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원동력으로 삼아 《신곡》에 뒤지지 않는 유명한 연애시도 썼다.
단테는 자신의 부인에 대해서는 자신의 시 속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결혼생활의 사랑은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내 마음의 여주인"인 베아트리체를 로맨틱한 열정을 기울여서
또한 그녀의 죽음까지도 초월하여 정열적으로 사랑했다.
찬양받아 마땅한 여성, 천국과 같이 해맑은 그녀는 살아 생전에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사후에는 하늘에 올라가게 되었고 동정녀 마리아와 견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