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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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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감동글 스크랩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김홍곤의 `참 어른` / 2009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 한국문단 박인과 문학평론가
김윤선 추천 0 조회 29 09.01.16 04: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2009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자 김홍곤 작가(동그라미 안쪽)





[참 어른]


  나는 오곡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들녘을 바라볼 때면 아스라이 떠오르는 유년시절의 맹세가 있다.
세상 풍진의 찌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히말라야 산맥의 백설만큼이나 교교했던 그 순수했던 많은 날들. 어른들의 온갖 세상의 풍진들로 오염된 생활관과 자가당착적인 사고와 행위들에 실망하여 마음속으로 심하게 도리질을 쳐대며, 이다음 나 어른이 되면 주위 어른들을 他山之石(타산지석)삼아 참 어른이 되겠다고 굳은 맹세를 하곤 했다. 지금도 내 작은 식견 때문인지 내 주위에는 제대로 된 참 어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나 어릴 적에는 간난의 시대와 교육의 부재 탓이었으리라.

  유년시절 비록 머리엔 온통 하얀 서리를 이고 얼굴엔 검버섯들이 그 동안 어른들을 스쳐 지나갔던 세월의 무게를 증빙하고 있었지만, 내 이상형의 참 어른의 모습은 맞닥뜨리질 못했다. 그러한 고로 나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를 갈구했고 그만큼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또 유년의 어린이들에게 어른의 모범상이 되고 싶었다. 유년시설 방과 후,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이 십리길 신작로를 걸어서 귀가하면 집안에서 나를 맞이했던 것은 외양간에서 일소 한 마리만이 처연한 눈빛으로 눈꺼풀을 슴벅거리며 나를 바라보곤 했다. 부모님은 늘 집에 계시지 않았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 계곡의 논배미에서 추수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초가삼간의 청 마루는 늘 들판과 신작로에서 날아 들어온 회색먼지가 켜켜이 내려앉아 마치 오랫동안 비운 폐가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배가 고팠으나 요기할 것이 부족했다. 장작불을 지펴 밥을 짓던 대형 가마솥이 설치된 정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렁위에는 새까만 보리개떡 몇 덩이와 삶은 보리쌀이 종댕이에 담긴 채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나는 늘 그것들의 일부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몇 시간 후 나보다 고학년이었던 누나들이 학교를 파한 후 귀가하면 보리개떡으로 헛헛한 배를 채우고, 들녘에서 부모님의 일을 도와야했기에 늘 놀기만 하는 내 배만을 채울 수는 없었다. 결국은 허기로 충만한 배를 채우기 위해 배고픈 또래의 동무들과 어울려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곡이 익어가는 들녘에서 무와 생고구마를, 과실나무가 있는 산에 올라가 감과 밤 등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비록 어린 마음에도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으로 주린 배를 채웠기에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부모님의 그늘 내에서야 가쁜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년시절 비록 위장은 작았지만 단 한번도 배의 포만감을 느껴보진 못했다. 일터인 들녘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루하루 생활의 밑천을 수확하시는 부모님의 애달픈 삶의 고통을 그때는 잘 몰랐다. 부모님께서 먹는 것이 늘 부족했다는 사실 또한 그 때는 몰랐다. 부모님과 대부분의 마을 어른들의 팔다리에서는 왜 皮骨(피골)이 상접했는지, 또 움푹 패 인 양 눈언저리와 이로 인해 유난히 툭 불거져 보이는 광대뼈의 원인을 그때까지는 까마득히 몰랐다. 그저 자식에게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부모님이 한량없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이 싫었고, 가끔 부모님이 하시는 농사일을 돕는 것조차도 뜨악했다. 부모님께서 농사를 짓지 않는 면 소재지에서 생활하는 급우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그땐 정말 산간벽촌에서의 생활이 지긋지긋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신작로에서 드잡이 질을 하고 대낮에 들녘에서 일하다가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는 일부 마을 어른들도 어린 내가 이해하기에는 무척 힘들었다. 󰡐나는 이 다음 어른이 되면 절대로 저러지 말아야지.󰡑 수십 번씩 다짐하기도 했다. 나 유년시절에 바랑을 메고 밥그릇을 손에 든 채 朝夕(조석)으로 없는 집 사립문을 넘나들었던 걸개들은 어찌 그리도 많았는지….
학교에서 학습한 내용과는 달리 자라나는 미래의 주인공들에게 모범적인 생활상을 보여주기는커녕, 손가락질 받을만한 일을 일삼는 어른들을 바라보노라면 난 이다음 어른이 되면 아이들에게 모범적인 참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했고, 또 가족과 굶주린 이웃들을 보살피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이타적인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더랬다. 유년에는 아직은 我(아) 위주의 이기적인 어른들만의 세상을 나는 몰랐다. 어른들의 마음속에 잠재해있는 양날의 검을 그때까지는 잘 알지 못했다. 1960년대 이후 보릿고개의 연속이었던 그 시절, 대다수의 가난한 서민들이 굶주림으로 인한 신산에서 헤어나지 못해 팍팍한 삶을 살고 있음을 유년의 나는 까마득히 몰랐었다.

  어느 듯 세월의 파도에 휩쓸려 네 번의 강산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나도 오래전에 불혹의 언덕배기에 편승한 가장이 되었다. 지금 두 자식을 둔 한 가정의 가장이고, 사회의 작은 구성원이 되어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내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어느덧 인생의 긴 행로에서 터닝 포인트를 지나왔건만 정작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게 없다. 나 어릴 적 맹세를 돌이켜보면 커가는 자식들 앞에서 초라한 지금의 내 모습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다. 스스로에게 한없이 부끄러워 수치심을 숨기지 못한다. 유년시절의 많은 날들, 나 어른이 되면 기성세대와 같은 사람이 절대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그 수많은 날들, 그날의 맹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지금의 나는 그 옛날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어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가 않다. 그땐 몰랐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 직장생활을 핑계 삼아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한번 갖지 못하는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가장의 태도, 삶에 있어 正道(정도)를 벗어나기를 마치 하루 삼시 밥 먹듯이 하면서도 자가당착과 기망으로 일관된 철면피한 중년의 내 삶. 참으로 부끄럽기 한량없다. 이웃에 대한 관용과 이타심의 도덕은 둘째라 치더라도 아집과 독선으로 끝내 타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며 즐거워하는 뻔뻔스런 어른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내 자화상임을 애써 인정하려하지 않고 있다.

  후시지탄의 중년, 그렇지만 마냥 후회와 고뇌만으로 소일하기엔 내 여생이 녹록치가 않다. 지금부터라도 어릴 적 내가 그토록 동경했던 참 어른의 길을 걸어가 보련다. 한편으론 가정의 행복과 평화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에도 한 치의 소홀함이 없어야겠다. 근년에 와서 소홀해진 아내와의 사이에 사랑과 우정도 연애시절만큼 회복하고, 두 자식에게도 자상한 아버지, 책임감 넘치는 아버지로 거듭나야겠다. 주변의 불우한 이웃들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고, 또 형편이 닿는 대로 物的(물적)인 도움도 베풀어야겠다. 내 작은 도움으로 그들에게 짙게 드리워진 실루엣과 같은 어둠의 그늘들이 걷혀지기만 한다면 무엇을 더 주저한단 말인가. 10여 년 전 이립의 나이 때  직장 내에서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경쟁자들을 기망하면서까지 밟고 올랐던 지난날의 내 짧은 사고와 가치관을 훌훌 벗어던지고, 가족과 이웃간의 아름다운 동행을 통해 더불어 상생하는 어릴 적 꿈꾸었던 참 어른의 길을 걸어가 보련다.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지구, 그 중에서도 이 금수강산에 태어난 것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자. 또 내 思考(사고)를 키워준 멘토들에게도 감사해야겠다. 그리고 나에게 생명을 잉태해 준 내 부모님에게도 늘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가련다. 비록 하잘것없는 甲男乙女(갑남을녀)에 지나지 않지만 나로 인하여 내 가족과 이웃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뜻 깊은 인생이 되겠는가.
  
  시나브로 서녘하늘에선 붉은 꽃노을이 영롱한 빛을 발하며 낮게 드리워져 내린다. 한적한 한길 양 가장자리로 늘어선 은행나무 이파리들은 어느새 노랗게 물들어 낮게 불어오는 소슬바람에 쉴 새 없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나 또한 오래지 않아 깊은 산중에서 햇살을 받아 가까스로 피어난 야생초가 소리 없이 저 혼자 져가듯이 그렇게 잊혀지고 사라져가겠지. 부모님께 몸 받아 나와 존재의 작은 의미하나 남기지 못한 채 세상과 결별해야 하겠지. 상념의 나래를 펼치며 눈시울이 붉어져오는데 문득 어머님의 “저녁 먹어야지.” 하는 말씀이 나를 현실세계로 인도한다. 오늘에서야 제대로 깨달은 것 같다. 지금껏 유년시절에 꿈꾸어왔던 참 어른의 正道(정도)를 걷지 않고 있음을…….




[당선소감]


  솔직히 10대, 20대 학창시절에는 문학이 뭔지 몰랐다. 수필이 뭐며, 소설이 뭔지는 더더욱 몰랐다. 중학교 재학시절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작은 상을 수상한 적은 있었지만 글쓰기에 충실할 형편이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10년에 걸친 직장생활과 2000년 이후 서울에서 수입무역을 주업으로 하는 작은 법인체를 설립하여 회사를 운영하던 과정에서, 내 인생의 길러잡이를 구하고자 자기계발서적을 엄청 많이 읽었다. 그러나 크게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10여 년 전부터 유전성 질환으로 인해 청력이 서서히 약해지더니, 3년 6개월 전부터는 완전히 잃었다. 지금은 청각 장애인이다. 난 지인과 공동으로 운영하던 무역회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3년 전 가족은 서울에 두고 나 홀로 외따로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로 귀향했다. 갑자기 변한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골로 귀향 후 2년간은 심한 방황의 나날들이었고, 위험한 생각들도 참 많이 했다. 나는 시골에서 아버지의 농축산업을 도우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별도로 찾아야만 했다. 척수수술로 인한 근력이 부족했기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책을 읽었다. 소설책이든, 에세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밤새도록 읽었다. 단 자기계발서적은 더 이상 읽지 않았다. 그리고 나만의 글을 쓰보고 싶었다. 소설이 뭔지, 수필이 뭔지 아직도 확실히 모른다. 작품의 평가기준이 뭔지는 더더욱 모른다. 2009년 신춘문예에 난생처음으로 소설을 몇 편 작성해서 퇴고도 하지 않은 채, 바로 탈고해서 몇 개의 언론사에 응모해 봤다. 지금 생각해보니 뭘 몰랐기 때문에 응모가 가능했던 것이다. 수필 “참 어른”은 소슬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어느 날 저녁 창가에 앉아서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집필해본 글이다. 수십 차례의 퇴고 과정을 그쳤다. 끝으로 습작에 지나지 않는 제 졸작을 뽑아주신 창조문학신문사 대표 박 인과 사장님과 여러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프로필]

- 나이 43세

- 직업 : 농축산업

- 1987년 2월 대구미래대학 무역과 졸업

- 공모전 입상경력 : 2008년 11월  월간조선, 통일문화연구원 공동주최
                       세종문화회관  <우람 청소년 문학상 수필부문 장려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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