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소묘』
김춘수(金春洙, 1922~2004)는 흔히 ‘꽃’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 ‘꽃’은 의미를 피워내는 형이상학적 존재다. 시인은 ‘꽃’을 연애의 심상으로 받아들이려는 대중의 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한다.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에 몰두한 시인임에도 세간의 오해에 힘입어 김춘수는 오래도록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의도적으로 현실을 지워버린다. 이는 현실과 역사에서 환멸을 경험한 이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대신에 그는 언어의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물론 그도 폭력적 현실과 마추치면서 시 속에 그 현실을 불러들인 적이 있긴 하지만 역사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허무감만을 확인하고 이내 내면 공간으로 다시 침잠한다. 그의 시어들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시와 언어의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길을 걸어온 시인 김춘수
김춘수는 1922년 경남 충무시 동호동의 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다. 서너 살 때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근처 어느 작은 섬에 나들이 가서 본 바다와 갈매기 등에 대한 기억, 다섯 살 때 다닌 호주인 선교사 부부가 운영하던 유치원에 딸린 사택의 이국적 분위기에 매혹되어 이를 동경한 기억은 시인 김춘수의 원체험이다. 일제 때 자식을 유치원에 보낼 만큼 부유하고 개방적 사고를 가진 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그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터. 그러나 김춘수는 자신의 유복한 환경에 우월감을 갖기보다 오히려 또래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이런 느낌에서 비롯된 소외감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와 같은 성장기의 콤플렉스는 충무 바다라는 공간적 배경과 함께 뒷날 김춘수의 몇 편 안 되는 소설 가운데 하나인 「처용」과 시 「처용 단장」에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중학교 4학년 때
1929년 김춘수는 시내에서 좀 떨어진 간이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서너 달 만에 통영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한다. 환경이 바뀐 탓에 그는 처음 한동안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2학년 때부터 내내 일등을 차지해 도지사 표창까지 받는다. 보통 학교 졸업 뒤 그는 서울로 올라와 가회동에 하숙을 정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낯선 도시와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춘기의 번민까지 겹쳐 수업에 자주 빠지면서 교과 성적이 자꾸 떨어진다. 이를 염려한 그의 아버지는 조부모만 고향에 남기고 가족과 함께 경성부 종로구 명륜동으로 이사한다. 그러나 김춘수는 좀처럼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결국 5년제 중학교의 졸업을 석 달 앞두고 자퇴한다.
1946년 통영중학교 교사 시절
얼마 뒤 김춘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대에 지원할 생각으로 학원에 등록한다. 어느 날 도쿄의 학원가 주변을 배회하던 그는 헌책방에 무심코 들어갔다가 서가를 가득 채운 책들이 뿜어내는 지적인 것의 위용에 압도당한다. 그는 얼떨결에 서가 한 귀퉁이에서 얇은 책 한 권을 뽑아 든 뒤 셈을 치르고 나온다. 하숙으로 돌아와서야 그는 자신이 가져온 책이 일역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릴케 시집에 실린 시를 몇 줄 읽자마자 아찔한 충격을 받는다.
1940년 법학과는 거리가 먼 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한 김춘수는 영미 문학 서적들을 탐독한다. 이 무렵에 그는 혼자 습작도 하는데 더러 고국의 신문 학예란에 투고까지 한다. 3학년 때인 1942년 12월, 그는 겨울 방학을 맞아 귀향길에 나섰다가 일경에게 체포된다. 요코하마헌병대와 세다가야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다가 7개월 뒤에야 귀국 조치된 그는 이 사건으로 니혼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당한다. 그의 죄목은 ‘불경죄’. 체포되기 얼마 전 김춘수는 친구들을 따라 나카사키항에서 아르바이트로 화물선 하역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휴식 시간에 별생각 없이 내뱉은 일본에 관한 험담이 문제가 된 것이다. 뒷날 그는 이 때 겪은 일을 6·25 체험과 결부시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에 끼워넣기도 한다. 그러나 1959년에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펴낼 때는 이 부분을 잘라버린다.
······ /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 대학생이었다. / 일본 동경 세다가야서(署) 감방에 불령 선인(不逞鮮人)으로 수감되어 있었다. / 어느 날, 내 목구멍에서 / 창자를 비비 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어머니, 난 살고 싶어요!’ / 난생 처음 들어보는 그 소리는 까마득한 어디서, / 내 것이 아니면서, 내 것이면서······
김춘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일부
1943년 여름, 김춘수는 일본 경찰에 의해 수갑이 채워진 채 부산 땅을 밟는다. 이렇게 귀국한 뒤 풀려난 그는 감옥 생활로 쇠약해진 몸을 추스르기 위해 한동안 금강산 등지에서 요양을 한다. 그는 요양을 마치고 결혼한 다음 일제 말기의 징병을 피해 주로 처가에서 숨어 지내다가 해방을 맞는다.
해방이 되자 그는 고향 충무에서 유치환 · 윤이상 · 전혁림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한글 강습회를 열고, 근로자를 위한 야간 중학과 유년원의 교사로도 나서 연극 · 음악 · 문학 · 미술 · 무용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친다. 1946년에는 조향 · 김수돈 등과 시 동인지 『낭만파』를 펴내고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경남본부에서 발행한 『해방 1주년 기념 사화집』에 시 「애가(哀歌)」 등을 발표한다. 그러나 김춘수가 본격적으로 시작 활동에 힘을 기울인 것은 이듬해 자비로 출판한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준비하게 되면서부터다. 유치환의 서문을 단 이 시집에서 김춘수는 비록 문단에 갓 나온 풋나기이지만 시인으로 산다는 게 여름 사막과 같은 현실 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의 길을 가는 것임을 이미 헤아린다.
가자. 꽃처럼 곱게 눈을 뜨고,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원한의 눈을 뜨고 나는 가자. 구름 한 점 까딱 않는 여름 한나절, 사방을 둘러봐도 일면(一面)의 열사(熱沙). 이 알알의 모래알의 짜디짠 갯내를 뼈에 새기며 뼈에 새기며 나는 가자.
김춘수, 「서시」 전문, 『구름과 장미』(행문사, 1946)
그의 첫 시집은 표제와 「서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수, 비탄, 그리움 같은 서정성과 ‘장미’에 매혹된 마음의 상태를 보여준다. 『구름과 장미』는 릴케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름과 장미』의 언어들은 존재와 부재 사이에 있는 실존의 흔들림에 섬세하게 반응한다.
1948년 그는 대구에서 나온 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온실」 외 1편을 발표하고, 이후 마산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1949년 『백민』에 시 「산악(山嶽)」과 『문예』에 「사(蛇)」 · 「기(旗)」 등을 발표한다. 김춘수는 이 무렵 손소희가 경영하는 다방에서 만난 서정주에게 새 시집의 서문을 부탁한다. 이윽고 그는 “전자(前者) 『구름과 장미』에 비하야 월등한 진경이나 비약을 뵈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서정주의 서문이 실린 두 번째 시집 『늪』을 펴낸다. 이 시집에서도 소멸하는 삶에 대한 응시에서 비롯된 허무적 비애와 존재론적 숙명성이 감상 어린 어조에 실려 있는 것은 여전하다. 다만 첫 번째 시집에 비해 『늪』에서는 정확하고 치밀한 언어의 운용이 돋보이고, 자연과 사물에 대한 묘사가 한결 정교해진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전쟁의 참상은 평소에 ‘불완전’과 ‘역사’는 아프게 무시하겠다고, 만일 이를 견디지 못하면 ‘시’가 아니라 산문을 쓰겠노라 결심한 순수주의자 김춘수조차 절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이 절규는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으로 표출된다.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 순간 /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 보 상공으로 뛰었다. /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 감시의 일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 다뉴브 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김춘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일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춘조사, 1959)
시인을 사로잡은 이런 현실 참여적인 열정은 이내 “역사는 이데올로기이며, 그것은 곧 폭력”이라는 역사 허무주의로 대체된다. 전시인 1951년 그는 세 번째 시집 『기(旗)』를 ‘문예사’에서 펴낸다. 이 시집에서 그는 자신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내면 공간으로 돌아가 존재의 위치와 자세를 탐색해나간다. 1952년 김춘수는 진주에서 설창수 · 구상 · 이정호 · 김윤성 등과 함께 동인 ‘시와 시론’을 만들고, 동인지 『시와 시론』에 시 「꽃」과 산문 「시 스타일론」을 싣는다. 이어 1953년에는 네 번째 시집 『인인(隣人)』, 1954년에는 시선집 『제일시집(第一詩集)』과 시론집 『세계 근대시 감상』을 내놓는다.
121존재의 위치와 자세를 탐색하기 시작한 김춘수의 세 번째 시집 〈기〉21954년에 내놓은 시선집 〈제일시집〉
1955년 그는 『현대공론』에 소설 「유다의 유서(遺書)」를 발표한다. 1956년에는 부산대 강사 시절의 제자인 고석규의 주선으로 유치환 · 김현승 · 송욱 · 고석규와 함께 동인지 『시 연구』를 내지만, 고석규의 죽음으로 더 이어가지 못한다. 1958년 그는 『문학예술』에 연재한 글을 엮은 첫 시론집 『한국 현대시 형태론』을 펴내 같은 해 12월에 제2회 ‘한국 시인 협회상’을 받는다.
김춘수는 이미 부산대학교와 해군사관학교 등에 출강한 바 있지만 일제 때의 갑작스런 피체와 감옥살이로 대학교를 중퇴한 이력 때문에 정식 교수로 인정받지 못한다. 1959년 4월, 그는 문교부 교수 자격 심사 규정에 의해 비로소 국어 국문학과 교수 자격을 얻는다. 그리고 6월 들어 예전에 주조를 이루던 막연한 감상의 분출이나 상투적 수사 또는 비유는 많이 줄이면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존재의 탐구로 나아간 시집 『꽃의 소묘』를 펴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토록 열심히 찾아 헤맨 ‘존재’는 손에 닿는 순간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잦아들거나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지기만 할 뿐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 너는 이름도 없이 / 피었다 진다. //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 나는 한밤내 운다.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일부, 『꽃의 소묘』(청자사, 1958)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존재의 탐구로 나아간 〈꽃의 소묘〉
「꽃」은 김춘수의 존재론적 추구가 가 닿은 절정에서 홀연히 피어난다. 이는 감각적인 실재라기보다는 불모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의미의 실재다. 평론가 신범순은 이 ‘꽃’에 대해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순결하게 자신의 의미를 아름답게 개화하는 것을 가리키는 하나의 존재론적 기호”라고 말한다.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일부, 『꽃의 소묘』(청자사, 1958)
저 밑바닥에서 ‘하나의 몸짓’으로 세계 속에 존재하던 그 무엇은 이름이 불림으로써 하나의 의미 있는 존재로 끌어올려진다. 개체로서의 존재 양식 밑바탕에 있는 것은 고독이다. 관계 맺음 이전의 뜻없는 사물 일반은 그저 무의미한 ‘하나의 몸짓’일 뿐이다. 시인은 뜻없는 존재이던 그것(꽃)에 이름을 붙이고 호명함으로써 실존의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름’은 ‘언어’에 다름아니고, 언어는 곧 의미 부여 행위의 매개체다. 이 무렵 김춘수는 “시를 잉태한 언어는 피었다가 지는 꽃들의 뜻을 든든한 대지처럼 제 품에 그대로 안을 수가 있을까.”라며 언어가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품을 수 있을지, 또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에 붙은 이름들이 제대로 붙여진 것인지 의문을 품는다.
시집 『꽃의 소묘』를 내놓은 그는 곧 ‘시인협회’의 중앙 위원이 되며,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으로 제7회 ‘자유 아세아 문학상’을 받는다. 1960년에는 마산의 경남대학교조교수로 임용된 데 이어 1961년에는 경북대학교 문리대 전임 강사를 맡는 한편 시론집 『시론』을 펴낸다. 1963년 그는 『현대문학』에 체험을 바탕으로 써낸 단편 소설 「처용」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64년에는 경북대학교 교수로 임명되고 1966년에는 ‘경상남도 문화상’을 받는다. 그는 1960년대를 이렇게 의욕적으로 보내지만, 정작 창작의 측면에서는 1959년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내놓은 뒤 별다른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채 꽤 긴 공백기를 갖는다. 그러나 이런 공백기 또한 결코 나태하게 보낸 시간이 아니라는 게 1969년에 이르러 여실히 입증된다.
「처용 단장」, 무의미 시의 한 극단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펴낸 뒤로 그는 겉보기에 10년 동안 시작의 공백기를 가진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념, 즉 의미 이전의 존재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놓지 않고, 언어나 의미 이전의 사물의 본질이 빚어내는 음영들을 관찰하고 포획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무의미 직전의 과도기 형태의 시들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1969년에 내놓은 시집 『타령조 · 기타』이며, 곧 이어 무의미시의 본격적인 단계를 풀어놓은 것이 『현대시학』에 1년 반에 걸쳐 발표한 13편의 연작 장시 「처용 단장」이다.
바다가 왼종일 /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 이따금 /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 느릎나무 어린 잎들이 /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김춘수, 「처용 단장」 Ⅰ의 1 일부
제목에서 보듯이 이 연작시는 고대 설화인 ‘처용가’를 패러디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용 면에서 처용 설화와의 연관성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관념과 의미가 제거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무의미 상태 속에서, 시인의 어릴 적 체험과 기억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구절 위로 손에 잡히지 않는 공기처럼 섬세하고도 매혹적인 이미지만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갈 뿐이다.
팔다리를 뽑힌 게가 한 마리 / 길게 파인 수렁을 가고 있었다. / 길게 파인 수렁의 개나리꽃 그늘을 /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가고 있었다. / 등에 업힌 듯한 그 / 두 개의 눈이 한없이 무겁게만 보였다.
김춘수, 「처용 단장」 Ⅰ의 9
1972년 그는 경북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의 주임으로 재직하면서 교재용 이론서 『시론』을 펴낸다. ‘민음사’가 기획한 ‘오늘의 시인 총서’ 가운데 하나로 시집 『처용』을 출간한 것은 1974년의 일이다. 1976년에는 수상집 『빛 속의 그늘』과 시론집 『의미와 무의미』, 시선집 『김춘수 시선』, 1977년에는 시선집 『꽃의 소묘』와 시집 『남천(南天)』, 1979년에는 월평과 시평을 담은 시론집 『시의 표정』과 수상집 『오지 않는 저녁』을 내놓는다. 이 무렵 영남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그는 이 학교의 문리대 및 문과대 학장을 지내면서 1980년 시사 칼럼을 주로 담은 산문집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와 시집 『비에 젖는 달』을 펴낸다.
1981년 4월, 김춘수는 교수에서 정치가로 변신해 국회 의원이 된 뒤 문공 위원으로 활동한다. 이즈음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기도 한 그는 1982년에 들어 경북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시집 『처용 이후』와 전 3권의 『김춘수 전집』을 ‘문장사’에서 펴낸다. 1983년에는 『김춘수, 현대시 문학 대계』, 1985년에는 수상집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을 내놓으며, 1986년에는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과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동시에 임명된다. ‘서문당’에서 『김춘수 전집』이 나온 것도 같은 해의 일이다. 1988년 해외 여행을 하고 돌아온 그는 시집 『라틴 점묘(點描) · 기타』를 펴낸다. 1989년에는 『시론』을 증보한 이론서 『시의 이해와 작법』을 내놓고, 1990년에는 시선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펴낸다.
1996년 서울 명일동 집 거실에서
1991년 시론집 『시의 위상』을 내놓은 김춘수는 박의상 · 이승훈 · 오세영 같은 후배 시인들의 도움을 받아 고희 기념으로 연작 장시집 『처용 단장』을 펴낸다. 같은 해 10월에 그는 ‘한국방송공사(KBS)’의 이사로 취임한다. 시선집 『돌의 볼에 볼을 대고』를 내놓고, 원로 시인으로서 ‘은관 문화 훈장’을 받은 것은 1992년의 일이다. 1993년에 산문시집 『서서 잠자는 숲』을 펴낸 뒤 시인은 그 동안의 창작 생활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각오를 밝힌다.
연작시 「처용 단장」을 끝내고 나자 나에게는 휴식기가 왔다. 숨을 좀 돌리자는 생각이다. ‘무의미의 시’를 고집하는 동안 나는 너무 팽팽한 긴장 속에서 시작(詩作)을 해 왔다. 용케도 지탱해 왔다고 스스로 놀랄 때가 있다. 긴장을 풀고 새로 시도해 본 것이 산문시다. 이것들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 93년에 낸 산문시집 『서서 잠자는 숲』이다. 나는 또 새 길을 개척해야 할 듯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부단한 설레임 속에서 산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고 나는 늘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제 딴데에 한눈을 팔 그런 나이도 아니다.
김춘수, 「통영 바다, 내 마음의 바다」, 『김춘수의 문학 앨범』(웅진출판, 1995)
김춘수는 이후에도 시집 『호(壺)』 등에서 “새 길을 개척”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1997년에 들어 그는 자전 소설 『꽃과 여우』와 시집 『들림, 도스토예프스키』를 펴낸다. 『꽃과 여우』는 일흔다섯 나이에 이르러 문득 유년 시절부터 1950년대의 삶까지를 돌아보는 회상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시인을 평생 사로잡고 있는 화두는 ‘나는 왜 여기 이러고 있는가.’다. 이 화두는 실존의 본질과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니까 『꽃과 여우』는 그 화두를 풀어나가는 도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은 책이다. 시인이 어릴 적에 처음으로 타자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을 즈음 타자와 세계 앞에서 겪은 것은 자아의 분열이다. 벌써 이 무렵부터 시인은 제 눈앞에 있는 타자와 세계를 응시하며, 문득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이러고 있는가.’하는 실존의 현기증을 일으키는 형이상학적 물음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시인은 사석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우리가 얼마나 왜소한 삶을 살았는지를 절감하게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만큼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깊이 빠져 거기서 많은 것을 건져 올린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작품을 낱낱이 다 읽었다. 그 중에서도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은 몇 번이고 되풀이 읽고 또 읽었다. 너무도 벅찬 감동이었다. 그 감동은 되풀이 읽고 또 읽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소설이라기보다는 나에게는 하나의 계시였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우리가 얼마나 왜소한 삶을 살았는가를 절감하게 된다.
김춘수, 『꽃과 여우』(민음사, 1997)
김춘수는 처음 시를 쓸 때부터 시에서 의미를 지워내려고 애쓴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회 현실 또는 역사로부터 자신의 내면 세계, 무의식으로 도망친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나쁜 현실로부터의 도피”인데, 그것은 소극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실 부정인 셈이다. 시인은 스스로 내면 세계에 침잠해 자신에게 하나의 ‘계시’로 다가온 바 있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듯이 삶의 덧없음과 싸우며 실존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붙들고 고투한다. 시집 『들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고투의 흔적이다.
참고문헌
김재홍, 「한국 현대시 약사」, 『한국 문학 개관』, 어문각, 1988
권영민, 『한국 현대 문학사 1945~1990』, 민음사, 1993
이혜원, 「시적 해설의 도정」, 『1950년대의 소설가들』, 나남, 1994
김주연, 「명상적 집중과 추억」, 『처용』 해설, 민음사, 1974
조남익, 『한국 현대시 해설』, 미래문화사, 1993
이남호 편, 『김춘수 문학 앨범』, 웅진출판, 1995
김창원, 「시적 욕망의 해소를 향한 여정 ― 김춘수론」, 『한국 전후 문학 연구』, 삼지원,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