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아 추천 0 조회 164 13.11.25 18:04
제3편 위탁의 대상
제1장 위탁의 일반적 대상
제2장 현세적 사물에 있어서의 위탁 일반
제3장 외부적 선과 악, 행과 불행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순경과 역경
제2절 공적 및 사적 재화
제3절 부귀와 빈천 ①②
제4절 장소와 환경 ①②
제4장 육체 및 정신의 각가지 자연적 선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건강과 질병 ①②
제2절 질병의 지연과 그 결과 ①②
제3절 삶과 죽음
제4절 자연적 은혜의 분배에 관한 불평등에 대하여
제5절 직무
제6절 휴식과 평온
제5장 명성의 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호평
제2절 굴욕
제3절 선인으로부터의 박해
제6장 본질적인 영적선익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영광의 생명
제2절 은총의 생명
제3절 선덕의 실천
제4절 죄를 피하는 일
제5절 계명, 서원, 회칙 등의 준수
제7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어떤 종류의 영적원조의 상실 -
⑴
⑵
⑶
⑷
제8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실패와 과실 -
제1절 분발심에 의한 사업에 있어서의 실패
제2절 자기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3절 남의 영혼의 성화에 있어서의 실패
제4절 우리 자신의 죄과
제9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내적시련의 일반 -
①
②
③
④
제10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유혹 -①
- 유혹 -②
- 유혹 -③
제11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위안과 건조-①
- 위안과 건조-②
- 위안과 건조-③
- 위안과 건조-④
제12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암흑, 무감각, 기타
제1절 정신의 암흑 ①②
제2절 마음의 무감각, 혐오감, 기타
제3절 의지의 무력
제4절 영적빈곤 ①②
제13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 평화, 불안, 소심
제1절 평화 ①②
제2절 각가지 공포 ①②
제3절 거룩하고 정의이신 천주께 대한 경의 ①②
제4절 양심상의 小心 ①②
제14장 심령생활의 일반적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1절 일반적 길인가, 신비적 길인가 ①②③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갖가지 상태 ①②③
제3절 관상의 진보와 덕의 진보
제4절 신비적 길에 있어 "천주께서 하시는 대로 맡긴다는 것"
제15장 기억해야 할 두가지 실례제3편 위탁의 대상
제 3 편 위탁(委託)의 대상(對象)
제 14 장
심령생활(心靈生活)의 신비적(神秘的) 길의 각가지 상태에 있어서의 위탁
제2절 신비적 관상의 각가지 상태 ②
p.505
왜 그렇게도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나는가.
그것은 영혼이 아직 근본부터 정화되지 않고,
감각에서 충분히 이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모든 사물에서 이탈하고,
감각의 작용에 너무 의뢰하지 않게 될 필요가 있다.
영혼은 그리스도교적 제욕의 업을 행하여 이에 힘쓴다.
그러나 천주의 굳센 손이 반드시 여기에 가해져야 한다.
주께서는 이미 감미로운 관상의 열화(熱火)로써 시작하셨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넉넉하지 못하다.
즉 넘쳐 흐르는 광명과 사랑 아래
우리는 과연 잘 자신의 비참함, 가난함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아마 오만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음은
거기에 가장 감미로운 영양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묵은 사람은 도저히 숨을 걷우지 못하리라.
그러나 천주께서는 절식 요법(節食療法)으로써 또한 필요하다면
단식(斷食)에 의해서 묵은 사람을 극복하신다.
그렇게 하여 천주께서는 이 영혼에서
이제까지 습관이 된 묵상, 생각의 풍부함,
애정의 다양성(多樣性), 천주의 애무의 상쾌함을 제거하신다.
그리고, 이런 것에 대치되는 관상을,
더구나 위안이 따르지 않는 정화(淨化)가 되는 관상을 조금만 주시며,
이로써 광명과 사랑을
십자가의 고통이 될 정도로 겨우 한 방울씩 밖에 영혼 안에
주입하지 않으신다.
p.506
천주께서는 이런 것을
이 영혼이 당신을 향하고 당신만을 찾으며,
당신의 곁에 있는 것만을 즐기도록 충분히 주입하신다.
그러나 천주께서는 이런 것을
이 영혼이 당신을 소유하는 것을 감미롭게 느낄 정도로
충분히 주입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참된 신비적 관상인데,
그렇지만 그것은
불안에 가득 찬 추구, 괴로운 궁핍, 충족되지 않는 굶주림 안에 행해진다.
때때로 천주께서는 얼핏 당신의 모습을 엿보게 하신다.
그 때 영혼은 즉시 감미로운 관상의 거룩한 열애와 환희를 맛본다.
그러나, 즉시 천주께서는 영혼을
다시 이 단조로운 쓸쓸한 감각의 암야(暗夜)에 다시 데려오시고,
아마 오랜 동안 거기에 머물게 하시며,
이 안에 영혼을 아낌 없이 몇 번이고 던져 넣으신다.
그리고
영혼이 온전히 자신에게 죽기 위하여,
얼마 후 더 커다란 고통을 초래하는 정신의 암야(暗夜)를 이에 주신다.
(「묵상의 각가지 길」3편3장)
어디에 이 영혼은 탄식하고 호소할 이유가 있는가.
아니다, 결코 없다.
그것은 확실히 엄한 쓰라린 은총이지만,
그러나 섭리의 일반적인 인도방법에서 본다면, 얼마나 필요한 은총이랴!
바라건대 이 영혼이 천주의 계획을 깨닫고,
이에 신뢰와 관대함으로써 적합하도록 노력하기를.
천주께로부터 저버림을 당하였다고 생각되는 것은
사실은 표면상의 일에 불과하다.
정신의 공허, 마음의 무감각, 자주 유혹 안에까지 버려지며,
자신의 무력함을 똑똑하게 보게 되어,
영혼은 자신의 눈에도 보잘것없는 것으로 비치기 시작하여
그래서 천주와 사람 앞에 겸손되이 복종하게 된다.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던 감미로움이 끊임없이 박탈되고,
드디어 무사(無私)의 마음으로써 착한 스승을 섬기기 위하여,
그런 것이 없어도 된다는 것을 배운다.
이렇게 하여 자애심의 폐허 위에 신애(神愛)가 세워지고,
모든 덕은 성장하며,
이 건조 자체에서마저 더욱 커다란 힘과 공로와 찬란함을 이끌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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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 하면,
천주께서 그 사랑을 감추시고, 거룩한 가혹함만을 드러내시는 동안,
영혼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써
또한 복종과 위탁으로써 천주를 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기도 안에 굳건히 견인(堅忍)하고,
시련에 의해서 흔들리지만 않는다면,
영혼의 정화와 덕의 진보를 위하여 채굴(採掘)해야 할 하나의 금광이
거기에 있다.(「묵상의 각가지 길」3편3장)
요컨대, 위로가 없는 관상도 감미로운 관상도,
각각 천주의 섭리에 의한 역활을 가지며,
충실한 영혼에게 귀중한 이익을 초래하는 것이다.
즉
전자는 그 직접적인 목적으로서 우리를 자아(自我)에 죽게 하고,
후자는 우리를 천주에 있어 살게 한다.
하나는 자애심을 없애는데, 또 하나는 신애(神愛)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데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용기에 결여됨으로써 후자에게 각각 장해가 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어느 것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겠는가.
그런 어느 것이라도 혹은 선용(善用), 혹은 악용(惡用)하는 적이 없겠는가.
물론 우리는 그 어느 것이든지 바라고, 또한 기도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중요한 그리고 천주의 의지에 기인한 어떤 일에 관해서도
미혹함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으므로,
선택을 천주의 손에 맡기고,
어느 것으로 정하시드라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것을 각오하면서,
미리 그것을 받는 일이 가장 현명한 길이 아니겠는가.
성인들도 모두 같은 묵상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이는 이 효애에서 우러난 위탁을 실천하고,
은총의 활동에 온순히 따랐다.
p.508
성녀「요안나.드.샹딸」이 그 거룩한 영적 아버지인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들어 보자.
「그는 어느 때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였읍니다.
자기는 지금 위안 중에 있는지 적막(寂寞) 안에 있는지,
조금도 유의하고 있지 않다.
주께서 나에게 좋은 감정을 주실 때, 나는 그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며,
또한 주시지 않으셔도 별로 그것을 괴롭게 여기지는 않는다고.
그러나 그가 평소에 커다란 내적인 감미로운 위로를 받고 계셨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읍니다.
그의 용모가 충분히 그것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四, 五년 전
그는 나에게 묵상 안에 감각적인 위로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
천주께서 그이 안에 작용하시는 것은,
느껴지지 않는 광명과 사랑에 의해서 라는 것,
그리고,
천주께서는 그런 것을 영혼의 오성적(悟性的)인 부분에 베푸시고,
영혼의 하부는 조금도 그것에 한 몫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을
말씀하였읍니다.
그런 것을 지극히 깊은 경건함과 겸손함으로써 단순히 받고 계셨읍니다.
왜냐 하면,
그의 주의(主義)는,
천주의 어전에 사랑하는 아들로서 드물게 보는 존경과 신뢰로써
지극히 겸손하게, 지극히 미소하고, 지극히 비천하게
처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동 성인전」부록「성녀 요안나.드. 샹딸의 서간」-「서간」520)
성녀「요안나.드.샹딸」은
천주의 손에 단순하게 몸을 두고 일체를 천주께 맡기는 바 간단없는
「성의(聖意)가 이루어지소서」라는 하나의 수동적 묵상의 상태에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천주의 뜻에 맡기며,
오성(悟性)도 의지(意志)도
이것을 작용시키려고 조금도 움직이는 일이 없이,
즉 방법적(方法的), 추리적(推理的), 또는 감각적인 행위를 하는 일 없이,
천주와 자신의 허무에 대한 단순한 바라봄 안에,
이 묵상 안에 조용히 있었다.
「주께서는 그의 영혼 안에 몇가지 필요한 감정을 부여하시며,
그리고, 모든 일에 관해서,
그가 자신의 추리(推理)와 상상에 의해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탁월하게 완전히 비추셨다.」
p.50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정열적인 기질과 이 묵상의 길의 예외적인 일 때문에,
그에게는 그런 단순한, 그런 수동적인 상태가 괴롭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그에게 있어, 이해할 수 없는 것, 불안, 초조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거룩한 영적 지도자는,
「의지가 천주의 뜻에 극히 단순하게 복종하는데 머무는 마음의 평온함은
매우 훌륭한 것이며,
또한 모든 욕구에서 정화될수록 더욱 탁월한 것이 된다」라고 가르쳐,
그를 안심 시켰다.
그리고 그가
「천주의 사랑과 천주의 만족을 위하여 만족함을 가지지 않는 것에
만족하는 것 이외에
어떤 만족도 구하려 하지 않고」,
은총의 작용에 유념하지 않고 따를 수 있기 위하여,
저 유명한 비유로써 그를 격려하였다.
「만일 방의 중앙의 굄목 위에 놓여진 석고상이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에 질문한다면, 이와같이 대답하리라.
.....왜 그대는 거기에 있는가.
.....주인이 나를 여기에 두었기 때문에.
.....왜 묵묵히 있는가.
.....묵묵히 있는것이 주인의 소망이므로.
.....그렇게 하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떤 이익이 그대에게 있는가.
.....여기에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주인을 위하여 주인의 소망에 따르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그대에게는 주인이 보이지 않을 것인데.
.....그러나 주인에게는 내가 보이고,
두어진 곳에 그대로 있는 것이 주인의 마음에 드는 일이다.
.....주인 곁에 가기 위하여 움직이고 싶지 않은가.
.....아니다, 주인이 명하지 않는 동안은.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가.
.....그렇다, 나는 주인이 둔 곳에 있으며,
주인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기쁨이다.
.....나의 딸이여,
천주의 의지, 그 뜻 안에 머문다는 것은 참으로 탁월한 묵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이 수동적인 상태 안에 있어서도, 성녀는,
천주께서 그 작용을 멈추실 때,
또는 그의 마음을 그것에 움직이실 적에는,
스스로 행동할 것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언제나 짧고, 겸손하며, 사랑에 충만한 것이었다.」
.....그런 지도는 매우 현명한 것이며또한 그런 행동은 결실이 풍부한 것이었다.
p.510
「왜냐 하면, 이 수동적 묵상이 1, 2년 동안 계속된 후에,
갑자기 성녀『요안나.드.샹딸』안에,
그가 이제까지 가지지 않았던 몇 줄기 광명,
천주와 자신과 피조물에 관해서
놀라운 깊은 감정, 치열한 열성, 성의에 대한 위탁,
세인이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지상의 사물에 대한 갈망이 나타나,
만인이 그것에 마음을 빼앗겼다.」
(후고 주교「동 성녀전」18장,
「신애론」6편 11장-「서간」454-보수에「묵상의 상태」8.26-40)
주께서는 어느 날 성녀「말가리다.마리아.알라콕」에게,
「나의 딸이여,
복종과 희생을 수반하는 묵상은, 관상보다도 나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성녀「요안나.드.샹딸」의 딸과도 같은 이 동정은,
「사랑으로써 감수하는 내적 고통은,
영혼안에 있어 천상 정배의 성심(聖心)에 적합하지 않는 모든 것을
모르는 사이에 태워버리는 정화(淨化)의 불이다」라고
흔히 말하였다.
「이것을 경험한 영혼은 누구나가 모르는 사이에 큰 진보를 이룩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만일 위로와 고뇌와의 어느 하나를 택할 수 있다면,
충실한 영혼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주의 십자가를 껴 안으리라.
그것으로써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천상 정배의 모습을 닮는 것 외에
이익을 얻지 못하드라도
이 십자가를 포옹해야 한다.」(「동 성녀전」33, 3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