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서구 문화를 받아들인 근대 일본인들의 수용방식
이한정 (상명대 교수)
외부를 통해 이루어진 문명개화
거리를 걷다 보면 단팥빵 전문점이 눈에 띈다. 단팥빵은 할머니 세대에 즐겨 먹었던 빵이다. 팥소와 빵이 균형을 이루어 낸 맛의 조화가 최근에 다시 주목받으면서 다양한 세대에게 단팥빵이 인기를 끌고 있다. 어린 시절에 먹었던 추억의 맛을 찾는 어르신부터 다양한 디저트의 세계를 탐색하는 젊은 세대에게까지 단팥빵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이 단팥빵의 시작은 일본이다. 쌀을 주식으로 하던 일본인들은 16세기 무렵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가져온 빵을 처음 접했다. 일본어 「パン」은 포르투갈어 에서 왔다. 서양식 빵은 속에 재료를 넣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은 서양의 빵을 자신들이 먹기 편하도록 변형해서 팥소를 넣어 단팥빵을 만들었다. 일본에서 예전부터 먹었던 팥이 서양의 빵과 만나면서 단팥빵이 탄생한 것이다.
단팥빵처럼 외래에서 들어온 요소가 일본 문화에 침투하는 외부로부터의 문명개화는 일본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전개되었다. 흔히 전통적인 일본 문화로 보이는 것들도 대부분 밖에서 유입된 외래문화와 섞이면서 형성된 것이다. 6세기 중엽에 중국에서 백제를 거쳐 전래된 불교문화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일본 문화를 생각할 수 있을까.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진 쇼토쿠태자(聖德太子)는 당시 일본인의 고유 신앙이었던 신도 세력의 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고대 일본 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일본인들이 쇼토쿠태자를 추앙하는 이유는 그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 등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일본 문화의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신불습합(神佛習合)’이란 말이 대변하듯 토착문화 신도와 외래문화 불교는 오랜 기간 서로 융합하는 현상을 보여 왔다. 근대에 들어 메이지시대(1868~1912년)가 되면서 일본은 신도를 국가 종교로 삼아 권력에 의해 두 종교가 ‘분리’된 시기가 있었으나 오늘날 일본의 사찰과 신사가 아주 가까이 있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각각의 종교의식이 한 곳에서 이루어지며 서로의 관습이 배척되지 않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불교와 신도의 관습과 문화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현대 일본인의 삶을 지탱한다. 이처럼 일본 문화가 외부에서 들어온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나가사키 카스텔라 또한 단팥빵처럼 외부를 모방해서 탄생한 먹을거리다. 16세기 무렵 나가사키 항구로 포르투갈의 배가 정박하며 일본은 서구 문화와 본격적으로 만났다. 그렇다고 일본인이 처음부터 서구 문화를 무조건 수용했던 것은 아니다. 17세기에 들어서 일본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추방하고 쇄국정책을 펼쳐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했다. 그런데도 규슈지방 나가사키에서는 항구를 개방해서 네덜란드 등의 서구 문물을 흡수했다.
에도시대 200여 년에 걸친 쇄국을 무너뜨린 것은 1853년에 요코하바 근처 우라가 (浦賀) 앞바다에 함대를 거느리고 나타난 미국의 페리 제독이었다. 미국의 문호 개방 요구를 수용하면서 일본은 서구 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였다. 물밀듯이 밀려든 서구 문화는 일상생활, 정치제도, 경제기반, 학문지식, 사회시설 등 전방위로 근대 일본을 휘감았다. 불교를 받아들인 이래 두 번째 문명개화라 할 수 있는 서구 문화 섭취는 일본 전통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이미 불교와 신도를 융합시켜 이질적인 문화를 조화롭게 공존시킨 경험이 있는 일본은 서구 문화를 적절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화혼양재와 모방
불교와 신도의 융합은 근대화에 이르러 일본 정신을 의미하는 '화혼(和魂)’과 서양 기술을 의미하는 '양재(‘洋才)’가 합한 '화혼양재' 사상으로 이어졌다. 에도시대 말기에 살았던 마지막 사무라이 세대라고 할 수있는 사쿠마 쇼잔은 ‘동양의 도덕과 서양의 예술'이라는 말을 통해 서양의 압박을 극복하는 근대화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일본 고유의 정신을 소중히 하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일본을 발전시켜 가자는 것이다. 서구의 위력을 실감하며 서구 문화를 최첨단에서 수용하던 인물에게서 화혼양재의 사고방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일본의 근대 문화를 설명할 때 후쿠자와 유키치를 빼놓을 수 없다.그의 이름은 생소할지 몰라도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화폐 만 엔권에새겨진 인물로 서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본의 근대화를 촉진한 사람이다. 그는 일본인에게 유럽 학문 배우기를 권장했고, 지식습득으로 개개인의 계몽을 주장했다. 한편으로 서구 문명은 단지 근대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본의 황실만이 일본인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중심이라고 했다.
정신에 대한 논의에 종교 문제가 빠질 수 없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의 전통적인 사상을 버리고 그리스도교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그는 두 제이J,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전통 사상을 토대로 한 일본적 그리스도교의 실상을 모색한 것이다. 니토베 이나조도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일본 고유의 정신인 무사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0년에 영어로 <무사도(Bushido) : The Soul of Japan>를 집필해 미국에서 출판했다. 무사도와 그리스도교의 접점을 탐색하며 일본과 서구의 상호 이해와 융합을 꾀한 것이다.
근대 초기 일본인들이 지닌 서구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모방은 서양인의 눈에도 색다르게 비쳤다. 페리 제독은 <페리 제독 일본 원정기>에서 “일본인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것을 재빨리 조사해서 제조 기술을 금방 자기 것으로 한다. 그 과정이 아주 정교하고 치밀해서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 낸다"고 언급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모방은 외래문화 수용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모방의 이면에는 맹목적인 서구문화 추구와 자기 주체성 상실 요인도 존재했다.
니토베 이나조와 마찬가지로 오카쿠라 덴신 역시 1906년에 <차의책 (The Book of Tea)>을 영어로 집필해서 서구에 일본 문화를 알렸다. 그런데 이 책에서 "우리 동포들 중 여러 사람은 서양 관습이나 예의범절을 지나치게 열심히 수용한다. 빳빳한 깃이나 높은 정장용 서양 모자로 치장하는 것을 문명 달성이라고 착각하는 사람까지 있다”라고 하면서 일본인의 피상적인 서구 모방을 비판했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일본인이 피상적으로 서구 문화를 추종하는 모습에 대한 우려는 문학자의 글에도 엿보인다.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적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근대화 속에서 일본인의 자아 확립을 강조했다. 나쓰메 소세키 역시 일본 화폐의 초상 인물로도 등장했는데, 그는 개인이 가진 개성을ㅜ존중하는 입장에서 '개인주의'를 주장했다. 개인의 주체성을 중요시한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독창성을 외면한 채 서양만을 위대하다”라고 하는 일본인의 서양 모방을 꼬집었다.
근대화 초기 서구 문화에 대한 경도는 서양과 대등한 일본을 보여주기 위해 과도한 경비를 쏟아 부어 건립한 서양식 사교장 로쿠메이칸(1883년 건립)의 불야성이 상징적으로 보여 줬다. 이곳에서는 매일 같이ㅜ양장 차림을 한 일본의 남녀가 서양인과 함께 서양인 흉내를 내며 무도회를 즐겼다. 서양인 복장을 하고 춤추는 일본인을 프랑스 장교이자 소설가 피에르 로티는 '원숭이 흉내'라고 묘사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피에르 로티의 <에도의 무도회>에서 힌트를 얻어 단편소설<무도회>(1920)를 썼다. 로쿠메이칸을 배경으로 일본 여성 아키코와 프랑스 장교의 만남을 가볍게 그리면서 주체성을 잃고 서구를 모방하는 일본문화에 비판적인 시선을 담아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모던 걸이 출현한 1920년대 서구 문화가 급속도로 일본 사회에 만연하던 시기에 도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소설을 발표했다. 서양 모방을 극단적 행태로 표출하며 주체성을 상실해 가는 젊은 일본인 남녀를 <치인의 사랑>(1924) 이란 작품에 형상화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 서양 배우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한다.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외모가 서구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좀 더 서양 미인으로 보이기 위해 온몸을 흰 분가루로 치장한다. 서구 문화를 즐기는 두 남녀의 사랑은 어리석고 우스꽝스럽다. 여자 주인공이 하얀 피부에 집착하는 장면을 보면 서양에 대한 동경과 모방으로 얼룩진 근대 초기 동양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든다.
외래문화를 감싸는 일본
일본은 근대 초기 화혼양재와 모방의 과정을 거쳐 외래문화를 자기안에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풍토나 문화 환경과 동떨어진 무조건적인 외래문화 수용에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서구 문화가 들어오기 전까지 일본에서는 사심을 버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서구 문화가 들어오면서 주관과 객관을 분리해서 인간의 모습을 탐색하는 철학이 일본에 이입되었다.근대 일본의 독보적인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는 서양철학을 열심히 연구하여 서양철학과 일본인의 사상을 혼합하여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주관과 객관을 대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양자를 융합하는 데 진실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고 확신했다. 니시다 기타로는 서양과 일본의 철학을 융합시킨 <선(善)의 연구》로 새롭고 독창적인 근대 일본 철학을 성립시켰다.
전혀 다른 두 요소를 적절하게 취합해서 발전시키려는 사고방식은 근대의 문화 수용에서 '화양절충' 방식으로 나타났다. 불교의 가르침으로 일본 사람들은 1,200년 동안 육식을 멀리했다. 고기를 먹는 습관은 근대 시기 서양 요리의 도입과 함께 생겨났다. 서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근대 초기에 천황은 직접 소고기를 시식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육식이 확산되면서 스키야키나 돈가스와 같은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이 만들어졌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에는 다양한 일본 음식이 나온다. 그중 '나폴리탄'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도 있다. 토마토 케첩과 스파게티 면을 섞어 만든 '나폴리탄'은 유럽의 파스타 요리를 일본식으로 재해석한 음식이다.
밖에서 들어온 문화를 일본의 환경에 맞게 정착시킨 사례는 1878년에 하코네에서 개업한 후지야호텔과 같은 근대 건축 양식, 미술, 음악등 문화생활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문화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갔다. 서구 문화를 일본에 수용하여 독창적인 일본 문화로 다시 수출했다. 일본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 시장에서도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다. 루시 M. 몽고메리의 <앤 오브 그린 게이블스(Anne of Green Gables)>는 캐나다 소설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우리에겐 오히려 일본에서 제작한 <빨간 머리 앤>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더 친숙하다. 이는 일본이 외부에서 수용한 문화를 외부로 다시 송출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위스키나 커피 같은 것 또한 서구에서 받아들여 캔 커피를 만드는 등 자신들의 색깔을 첨가해서 다시 수출하고 있다.
가토 슈이치는 1956년에 일본 문화를 '잡종문화'라고 정의했다. 일본 문화는 외래문화와 일본 전통문화의 혼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혼합 문화의 역사를 일본의 전통문화를 거부하고 외래문화를 일본 안에 정착시키려는 근대주의와, 서구 문화를 배격하고 일본 문화로 회귀하려는 국가주의의 투쟁사로 보았다. 그리고 잡종문화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자를 혼합하면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새롭게 만들어진 문화였다. 가토 슈이치는 이를 '일본화'라 했다. 일본의 문화 수용의 특징은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일본 문화와 조합시켜 창조적 문화로 만들어 간다는 점에 있다. 외래문화에 치우치면 자기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기 쉽고 외부의 것만 숭배하는 양상을 띤다. 또 자기 문화만 강조하면 문화의 유동성과 발전성을 망각하고 자기 문화의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국수주의 사고로 일관하기 쉽다. 외래문화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는 상당히 유연하다. 외부 문화를 가져와 내부 문화에 맞춰 변형시켜 새로움을 창조해 가는 경향은 다시 외부로 뻗어 나간다. 문화는 고립되지 않고 전파되고 수용된다. 근대 일본의 서구 문화 수용은 외부 문화를 자기 안에 소화하여 이를 통해 다시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