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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중성을 그린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6.12 ~ 1918.10.31]
그는 남녀 인체의 육감성을 딱딱한 선과 강렬한 악센트로 표현하며
소외와 불안이라는 표현주의 미술의 커다란 주제안에서
극단적인 '자기 강박과 잠재된 욕망'이란 20세기적 문제에 몰입한 화가이다.
거칠하면서도 날카로우며 때론 촉각적인 느낌마져 불러일으키는 드로잉, 자폐적인 자화상과 누드화는 그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형상화되며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뇌를 표출시키고 있다.
포옹(연인) Embrace (Lovers II), 1917, 실레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포옹 혹은 연인들로 불린다.
주름진 시트 위에 전라의 남녀가 서로를 안고 있으나
밀착한 부분은 상반신 뿐 서로의 다리는 살짝 닿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런 불안전한 이들의 모습은 그림을 보는 이에게 공허함을 느끼게 만든다.
화면 한가운데 위치한 근육질의 남자와 여인의 포즈가 주는 생동감 뿐 아니라
화려하고도 밀도감이 느껴지는 색채감이 그림 속으로 관찰자를 끌어당기는 작품이다.
Fighter 1913, Gouache and pencil on paper, 48.8 x 32.2 cm, Private collection
화가는 그림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언급한다.
그리하여 뒤틀린 자신의 정서가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몰락하는 함스부르크 왕가의 수도 빈에서 활동하다 28세로 요절한 천재화가, 에곤실레
그는 당시 비엔나 사람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현실과 꿈의 간극 속에 감춰진 불안과
중산층 부르조아지의 허위의식을 파헤쳐 보여준다.
모든 인간은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성향을 가졌기에 그의 그림들은 '내부'로 향한다. 그리고 본의든 아니든 감추고 싶은 상처를 들추어 낸 사람은 어느 세계에서나 미움을 받기 마련이다. 그는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살아있는 내내 그런 적개심을 품은 사람들로 인해 고립되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선은 잔뜩 뒤틀리고 억지쓰는 듯한 느낌이 너무 강한 나머지 애처롭다.
내면의 앙상함과 암울한 면들을 강렬한 색체와 뒤섞혀 우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화상
Self-Portrait, 1912.
그는 채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비평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어내기 시작했고, 세 명의 후원자들에게 관심을 받아 경제적 안정을 찾았다. 2살때 부터 그림을 그렸고 7세때 이미 제대로 드로잉을 그린 조숙한 천재였던 그는 미술학교에 보내지지만 보수적인 미술학교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학교를 나와 버렸다. 하지만 부모조차 탐탁치않던 그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당대 최고의 화가 클림프였다. 그는 클림프에게 비범함을 인정받아 화가로 성장해나간다. 클림트가 장식적이며 부드러운 표현을 즐긴 반면, 쉴레는 삶의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듯한
절규에 가까운 인물상을 그려낸다. 이처럼 클림트와 쉴레는 각자의 개성대로
성(性)에 대한 위선과 허위를 파헤쳐 거침없이 그려나갔는데,
이들이 주도한 미술운동을 빈 분리파(Wien Sezession)라고 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t Fleud, 1856-1939)가 이들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Semi-Nude Girl
1911,Reclining, Gouache, watercolor,
and pencil with, white heightening on paper,
45.9 x 31.1 cm,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실레의 예술세계는 타인 의식과 자신에 대한 애착 그리고 잔득 꼬여진 인간의 노이로제가 담겨져 있다.
죽음이나 어린 소녀의 누드화는 몰락해가는 도시가 가진 욕망을 담긴 주제로 당시 화가들의
주된 소재이기도 했다. 또한 당시 사회는 세기말 정서와 포르노성 사진, 그림들로 만연되어 있었다.
실레는 꼬여있는 시대에 꼬여있는 가족관계를 가진 뒤틀린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부친과 냉담한 모친사이에서 조숙한 소년으로 자랐으며 14세때의 부친상은 커다란 충격이 된다. 그의 재능을 탐탁치않게 여겼고, 심지어는 학업을 이유로 그의 드로잉들을 태워버렸으며 말년에는 병으로 가족에게 폐를 주었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상실감에 빠진다. 더욱이 이 충격은 여동생과 유별나는등 어릴적부터 성장내내 그를 부담스럽게 지켜봤던 모친에 대한 미움으로 발전한다. 실레는 모친이 미망인으로서 충분한 애도를 표명하지 않았다며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를 이상화시키고 어머니에게 적대감을 가지며 청년으로 자라난다.
1912년 젊고 세련된 화가였던 그가 비엔나에서 떨어진 노이렌바흐에 아뜰리에를 열자 많은 소년 소녀들이 몰려들었고 사춘기에 강한 관심을 가지며 작품을 제작하던 실레는 그들을 모델로 드로잉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 작업으로 인해 미성년자 유괴및 외설적 그림제작 혐의로 체포되었다. 무죄로 판명되어 24일 후 출소되지만 이 감옥살이 경험은 실레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고 만다.
빨간 블라우스를 입고 등을 대고 누운 발리
Wally with red blouse lying on her back, 1913, 연필, 수채, 템페라, 31.5x49, 개인소장 실레의 그림들은 도발적이며 공격적이게도 보인다.
그림속의 여인을 보라. 그녀는 도전적으로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발리 노이칠은 1911년에 클림트의 소개로 만난 모델로17살에 찾아와 4년간을 함께한 여인으로
실레는 그녀와 함께 인상적인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이 몰락해갈 무렵, 비엔나 근방의 소도시인 툴린의 철도공무원 가문에서 태어났고 숨지던 바로 그날(1918년 10월 31일) 수도 비엔나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분할하기 위해
연합국 대표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제국의 쇠퇴와 그의 예술은 함께 한 셈이다.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속물 근성, 물질만능주의, 쾌락주의가 만연한 허영의 시장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길 즐겼고 부르조아처럼 살고 싶어했다.
이런 시대를 살던 그는 화가로서의 고단한 삶,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버지와 자신의 후견인이 누렸던 것보다 더 안락한 삶을 원했다. 그리고 그런 실레의
모순된 내면은 독특한 개성으로 표출되게 된다. 실레부인과 그녀의 어린 조카
Schiele's Wife with Her Little Nephew, 1915, Charcoal, opaque and transparent watercolor, 48.3 x 31.8 cm, Edwin E. Jack Fund 실레는 이웃으로 사는 철도공무원 가정의 하름스 자매에게 친목의 편지를 전하곤 하였다.
그리고 실레의 편지는 에디트 하름스가 실레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실레의 곁에 있던
발리에게 실레를 떠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녀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레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발리는 실레는 사랑했지만 실레에게 있어 발리는 이미 클림트의 모델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마음이 없던 실레는 정숙한 에디트를 아내로 택한다.
에디트는 그를 사랑했고 그의 모델이 되어 주며 함께 작업을 만들었다.
결혼한 이후 그는 작품을 꾸준히 제작했고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이름을 날린다.
그리고 1918년 제49회 빈 분리파 전시회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된다.
Artist's Wife - Sitting Woman with Legs Drawn Up,
1917, Narodni Galerie, Prague 그림속의 그녀는 아무 감정없이 앞에 있는 사람을 응시하고 있다.
아무 배경도 없이 그려진 이 여인은 쓸쓸하고 적막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공간에 어떤 이도 초대하고 싶지 않은 눈빛을 보내고 있다.
그가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오스트리아는 세계의 화약고로 변해가고 있었다.
실레에게도 징집장이 나왔고 그는 군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전투부대에 배속받지 않고
후방에서 군대 창고의 일부를 아뜰리에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받는다.
그러나 스페인독감이 창궐해 그의 아내가 죽었고 3일후 그도 아내를 따라 가고만다.
Little Tree (Chesnut Tree at Lake Constance), 1912, Watercolor and pencil on paper, 45.8 x 29.5 cm, Private collection, New York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생을 사랑한다. 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심층으로 가라 앉기를 원한다. "
- 에곤실레의 메모 -
불안전하고 뒤틀리고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스스로를 사랑해야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열등감에 빠지고 자신을 미워하면서도 자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그의 그림은 영혼을 들추어 벌거벗은 인간을 드러낸다. 뒤틀리고 꼬인 우리의 모습을....
Standing Male Nude with Red Loincloth,
1914, Gouache, watercolor and pencil, 48 x 32 cm,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허리를 감싼 천의 붉은 색조가 창백하고 날카롭기까지한 남자에게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인물은 깊은 생각을 하는 듯, 그 눈 속에는 깊이감이 느껴진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서 강한 자신감을 가기고 있었으며 자존심을 부여하고 있었으며 명성에 대해 집착하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중성과 관객의 이중성을 여지없이 들추어내고 있다. 오늘날 그의 회화가 전세계의 미술관에 걸리며 사랑받는 이유는 내제되어있는 적나라한 욕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노 화랑의 전시회 포스터 1914, 67x50, 1915년 갤러리 아르노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할때 그린 포스터이다.
날아오는 활과 지친 표정이 현대인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예술성과 욕망사이에서 가로놓인 그가 보여주는 그림은
욕망과 감추고자 하는 허위를 극명하게 드려낸다.
시대의 불안과 실레 자신의 내면적인 고독, 욕망, 혼란이 뒤섞인채
현대인들의 삶을 투영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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