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회고록 요약본
중앙일보
입력 2001.02.16 00:00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15일 발간됐다.‘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이란 제목의 회고록은
상·하 두권으로 합쳐서 8백쪽 분량으로 조선일보사에서 펴냈다.
金전대통령은 자신의 재임시절(1993년∼1998년)을 회고한 이책에서
▶안가(安家)철거 ▶하나회 숙정 ▶공직자 재산 공개 ▶금융실명제 실시
▶이회창 총리 경질 ▶북핵(北核)위기 ▶남북 정상회담 준비와 김일성 사망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12·12와 5·18 정리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구속
▶금융개혁 파동 ▶황장엽 망명 ▶기아사태 ▶김현철씨 구속 ▶전두환·노태우 사면
▶IMF사태 ▶1997년 대선과 중립 ▶김대중 비자금 등에 대해 적고 있다.
재임 당시 미국의 클린턴,러시아의 고르바초프와 옐친,중국의 장쩌민(江澤民)등 각국 정상들과의 회담
뒷이야기도 담았다.
이수호 기자
다음은 회고록의 주요 내용이다.
▶대통령 집무실의 초대형 금고 해체
청와대에서의 첫 집무가 시작된 날,나는 앞으로 5년 동안 내가 일할 대통령 집무실을 둘러보다가 집무실 한쪽 모퉁이의 조그마한 방문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방 전체가 하나의 금고였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 일부러 짜맞춘, 천장까지 높이가 닿는 엄청나게 큰 금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금고를 떼어내라"고 지시했다. 워낙 큰 금고였기 때문에 그것을 떼어내는 데는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처음에는 경호실 직원들이 떼어내려고 했으나, 도저히 처리할 수가 없어서 외부에서 기술자를 부르고 기중기까지 동원했다. 과거 청와대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오고 갔는지 알게 해주는 웃지 못할 풍경이었다.
▶골프연습장과 노래방 기계 철거
골프 연습장은 청와대 뒤편 북악산(北岳山)에도 설치되어 있었다. 청와대 경내에서 뒤편 인왕산을 향해 힘차게 골프 공을 치면, 청와대 경비를 맡고있던 군인들이 산에 대기하고 있다가 날아온 공을 주워야 했다. 청와대를 경호하는 군인들이 경호와는 전혀 상관없는 골프 공 줍는 일에 종사해온 것이다. 나는 이 골프 연습장도 즉시 철거하도록 지시했다.
내가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 입주해보니 큰 노래방 기계가 놓여있었다. 나는 관저의 노래방 기계도 치우도록 했다.
▶금융실명제
금융실명제는 1992년의 대통령 선거 당시 나의 공약이었다. 여기에 반해 나는 실명제 같은 충격적인 조치는 경제가 나쁠 때 하더라도 잃는 것이 적다고 생각했다. 이경식(李經植)부총리와 홍재형(洪在馨) 재무장관은 이 같은 내 생각에 적극 따라준 사람들이었다.
6월 22일 나의 지시를 받은 이부총리는 비밀리에 실명제 실무 작업팀을 구성했다. 금융실명제 준비 작업은 한편의 007영화처럼 진행됐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양수길 박사등 극소수의 유능한 인물들이 선발되어 작업에 착수했다. 초기 작업은 서울 강남구에 있던 이 부총리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이 부총리는 열흘만에 실명제 초안을 마련해 나한테 보고했다. 7월 하순, 실무진으로 선발된 이들 멤버들에게 갑자기 40일 간의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이들은 실제 공항에 나가 직원들과 가족들이 환송하는 가운데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일본까지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비밀 작업 장소인 과천의 아파트로 비밀리에 들어갔다.
실무진들은 실명제 작업을 '남북통일 작전'으로 불렀다. 집주인에게도 대학 교수들이 남북통일 용역 연구를 수행한다고 둘러댔다.
이들 실무진들은 삼복더위를 견디며 밀폐된 아파트 공간에서 강행군을 했다. 자료 인쇄에도 문제가 남았다. 실명제 실시 발표 전날 밤 모(某) 인쇄소에서 인쇄공 7명으로부터 '비밀 서약서'를 받은 뒤, 지하 작업장에서 밤샘 작업 끝에 인쇄가 완료되었다.
금융실명제 준비 작업은 그만큼 비밀을 지키며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작업 실무자를 제외하고는 나와 이경식 부총리, 홍재형 부총리, 황길수 법제처장뿐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정작 내가 언제 금융실명제를 발표할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금융실명제 발표 이후에 황인성 총리나 박관용 비서실장, 박재윤 경제수석 등이 섭섭함을 토로했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비밀 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회창 총리 경질
이회창씨의 총리 발탁은 UR 협상에 따른 국정 분위기 전환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내 주변에서는 이회창씨가 균형 감각이 부족하고, 다양한 사람을 포용해야 하는 조직 생활에는 맞지 않는 인물이라며 그의 발탁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신임 이회창 총리에 대해 나름대로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총리 취임 직후부터 내 기대에서 멀어져갔다. 내가 외국을 방문하는 동안 안기부장에게 업무 보고를 요구하는가 하면, 나와 독대한 장관들에게 나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자신에게 보고할 것을 요구했고, 4월 5일의 'UR 이행 계획서' 수정 파동 때는 사과 담화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내가 이회창씨를 총리직에 더 이상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사건이 발생했다. 4월 중순 내가 남북 특사 교환 조건을 북한 핵 문제 해결의 전제 조건에서 철회하고, 북한 벌목공(伐木工)의 수용 대책을 추진하려하자, 이 총리는 4월 21일 총리실 간부 회의를 통해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회부된 안건도 관계 장관이 사전에 총리의 승인을 받아 시행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또 이를 언론에 발표하고, 북한 벌목공 수용 대책의 경우도 자신이 확정하기 전에는 공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영덕(李榮德) 통일부총리와 한승주(韓昇洲) 외무장관을 불러 이같이 지시했다.
그런데 이회창씨는 대통령이 대북 문제 대응을 위해 구성한 회의에 대해 "총리의 승인을 받으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회창씨는 총리 취임 이후 국무총리의 '법적 권한'을 주장하며 대통령의 지휘를 받기를 꺼려하더니, 급기야 북핵 및 외교적 문제 등 대통령의 업무까지 자신이 지휘하겠다며 언론에 공개한 것이었다.
국무총리 임명 4개월만에 경질하는 데 따른 부담은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4월 22일 오후 4시 이회창 총리를 청와대로 불렀다. 총리의 주례(週例)보고 자리였다. 나는 이 자리에서 전날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에 대한 이 총리의 발언에 대해 호되게 질책했다.
이회창 총리는 자신의 언행에 대해 "잘못했으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며 시종일관 장황하게 변명을 했다. 나는 "지금 당장 사표를 내지 않으면 대통령으로서 헌법에 따라 해임 조치하겠다"고 호통을 쳤다.
그런데 총리실로 돌아간 이회창씨는 또다른 언론 플레이를 했다. 청와대에서 경질을 공표하기 전에 사표를 썼다고 발표한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나와 이회창씨가 얼굴을 붉히며 고성(高聲)으로 다투었다느니, 이회창씨가 나에게 반발해 사표를 던졌다느니 하는 등의 거짓 보도를 했다.
▶미국의 북한 선제 폭격 저지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의 일이다. 6월 16일 오전 안보수석으로부터 내게 이런 보고가 올라왔다. "레이니 주한 대사가 내일 기자회견을 합니다." 그 내용인즉 '회견 직후 주한 미군 가족과 민간인 및 대사관 가족을 서울에서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미군 가족이나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하는 것은 미국이 전쟁 일보 직전에 취하는 조치였다. 미국은 유엔 제재와 별도로 북폭(北爆)을 감행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의 폭격이 이뤄질 경우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 가까이 전진 배치되어 있는 엄청난 규모의 화력을 남한을 향해 쏟아부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나는 즉시 레이니 대사를 수소문했다. 16일 오후 나는 비밀리에 집무실로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를 불러 단독으로 1시간 동안 요담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레이니 대사, 당신은 나와 오랜 친구가 아니오.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그 즉시 우리 남한도 북한의 포격에 의해 초토화됩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있는 한 전쟁은 절대 안되고 가족 등 미국인들의 소개도 안됩니다.
지금 바로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락해 내 이야기를 분명히 전하세요. 나는 한국군의 통수권자로서 우리 군인 60만 중에 절대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겁니다.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는 없어요. 전쟁은 절대 안됩니다."
레이니 대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외교안보수석이 "미국 대사가 회견을 일단 연기했습니다"하고 보고해왔다. 레이니 대사가 나와 만난 직후 직접 백악관의 클린턴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했다는 보고였다. 나는 일단 숨을 돌렸다. 그날 새벽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거세게 몰아붙였다.
"클린턴 대통령, 이게 말이 됩니까.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상 우리 60만 군대는 한 명도 못 움직입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은 절대 안됩니다. 전쟁이 나면 남북에서 군인과 민간인이 수없이 죽고 경제는 완전히 파탄 나며 외국 자본도 다 빠져나가게 돼요.
당신들이야 비행기로 공습하면 되지만,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에서 남한의 주요 도시를 일제히 포격할 겁니다. 우리가 6·25때 수없이 죽었는데 지금은 무기도 훨씬 강력해졌어요. 전쟁은 절대 안됩니다. 나는 우리 역사와 국민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소."
▶남북 정상회담 준비와 김일성 사망
나는 정부 내외의 모든 채널을 통해 북한과 김일성 주석에 대한 치밀한 정보를 입수·분석했다.
과거 행적으로 볼 때 김일성은 술수에 능하며 절대 믿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이 카터 대통령의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인 것을 볼 때 나는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이 성공을 거둘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분단 50년만의 첫 회담이니 만큼 관계 부처에서 올라오는 보고서의 양도 엄청났다. 나는 나대로 김일성 주석에게 제기할 이야기와 회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 등에 대해 온갖 가상을 해보고 대응 방안을 세워 대학노트에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김일성과의 회담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나의 신념대로 당당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성격이었다. 단지 내가 우려한 것은 김일성의 건강 문제였다.
7월 4일 나는 이북5도 지사와 도민회장 등 이북 출신 인사 21명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을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남북 정상회담은 양측이 서로 조건 없이 만나기로 한 것이지만 이산가족 문제는 중요한 의제로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과 전쟁의 포기 외에 남북 정상간 핫라인(Hot Line) 설치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대신 나는 북한 주민의 고통스러운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식량을 도와줄 의사를 제시할 생각이었다.
나는 김일성 주석의 건강을 우려하고는 있었지만 회담을 하기도 전에 사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는데,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김일성은 당시 남북 정상회담에 신경을 많이 쓴 듯 하다.
일본 언론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회담에 앞서 13차례나 참모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북한 관리들이 나중에 방북 인사들에게 밝힌 증언에 의하면, 7월 7일 김일성은 묘향산에 도착한 뒤 내가 묵을 별장의 침실과 욕실까지 직접 점검하고 냉장고에 광천수를 넣어둘 것까지 일일이 지시했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 82세의 노령에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중대한 일을 맞아 갑자기 업무량이 폭증한 데다, 회담 준비를 하면서 남북간의 현실적 격차를 확인한 데 따른 스트레스 등이 김일성의 사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종필씨 끝내 탈당
문민정부 출범 이후 당 대표를 맡아온 김종필(金鍾泌)씨에 대해 당내에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특히 민주계 사람들은 대부분이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투쟁을 하면서 중앙정보부나 군 정보기관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투옥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씨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많았다.
그러던 중 1994년 12월 민주계 핵심인 최형우(崔炯佑) 내무장관이 당의 지도체제 개편을 주장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12월 13일 최형우 장관은 기자들에게 "내년에는 큰 변화가 있으며, 당대표제는 필요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최형우 장관의 말은 '세계화 개혁을 위해 당 대표를 새 인물로 바꿔야 한다. 즉 김종필 대표의 2선 후퇴가 불가피하다'는 뜻으로 해석돼 논란을 일으켰다.
김종필 대표는 크게 오해했다. 12월 17일 오후 나는 청와대에서 김종필 대표와 주례 회동을 했다. 김종필 대표는 내가 사전에 최형우 장관을 비밀리에 만나서 그런 발언을 하도록 지시한 것이 아니냐고까지 말했다. 나는 대단히 난감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나는 사전에 최형우 장관과 따로 만난 일이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화 통화를 한 적도 없었다.
나는 김종필 대표가 전당대회 이후의 거취를 내게 맡겨줄 경우 그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5일 대전 유성(儒城)에서 열린 민자당 대전·충남지방의 신년 모임에서 민자당 탈당과 '내각제 신당' 창당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어서 1월 19일에는 대표위원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나는 "김종필 대표가 2월 7일 전당대회를 멋지게 치러주기를 바랐으나 지금 사의를 표명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막상 김종필씨가 탈당한다는 소식은 내게는 충격이었다.
만약 그때 내가 김종필씨의 청구동 자택으로 찾아가 내 본심을 전했다면 오해가 풀렸을 것이고 탈당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탈당은 지금까지 나의 정치 역정 가운데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사건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북한 쌀 지원과 인공기사건
기근(饑饉)에 시달리던 북한이 조선 삼천리총공사(三千里總公司)와 우리의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등 몇 군데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쌀 지원을 요구해왔다.
대북 쌀 지원 결정을 하기까지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북한 식량난의 심각성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북한 동포의 생존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북한측 협상단은 옷차림부터가 보기 딱할 정도로 남루했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 대표인 전금철 단장은 쌀을 달라면서 통사정을 했다. "식량이 없어 우리가 다 죽게 생겼습니다. 형제밖에 더 있습니까. 제발 우리 좀 살려주십시오" 하며 울다시피 매달렸다.
북한의 전금철 단장은 협상이 타결된 직후 감시의 눈을 피해 이석채 단장에게만 특별히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전금철 단장은 "김영삼 대통령 각하께, 배려에 대해 특별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북한 대표가 '대통령 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북한은 6월 25일 쌀 제공 관련 계약서에 합의·서명했으며, 우리 쌀 1차분 2천t을 실은 '씨아펙스호(號)'가 이날 오후 강원도 동해항(東海港)을 출발해서 청진항(淸津港)으로 향했다. 나의 지시로 이홍구 부총리가 항구까지 나가보았다. 우리의 국적선(國籍船)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북한 영해를 항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씨아펙스호는 그러나 청진항 진입과 쌀 하역작업 중 북한의 위협으로 태극기를 내리고 북한 인공기(人共旗)만 달았던 것으로 29일 확인되었다.
이날 유종하 외교안보수석이 "북한측으로부터 인공기를 게양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선장의 육성 방송을 밤 9시 뉴스에서 듣고 내게 밤늦게 전화로 보고했다. 삼풍백화점 뒷수습 문제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지쳐 있던 나는 유종하 수석의 전화를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했다. 나는 쌀을 싣고 북으로 향하던 배 두 척을 즉시 회항(回航)시키라고 지시했다.
나는 재임 중 세계 사회주의 정당 대표들을 초청한 일이 있었다. 그때 러시아 공산당의 핵심 간부 한사람이 "공산당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압니다. 공산당은 주면 줄수록 더 요구를 하고 욕을 합니다"라고 말한 기억이 새삼 떠오르기도 했다.
▶김대중의 영국 출국
199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나에게 "당선을 축하한다. 나는 정치를 떠났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영국으로 떠났다. 그의 말바꾸기와 거짓말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국민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 선언을 했을 때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나와 국민은 김대중씨에게 또 한 번 속았다. 김대중씨의 영국행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자신의 부정한 과거가 수사 대상에 오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으로 생각된다. 김대중씨는 노태우씨로부터 20억 원을 받는 등의 부 자신의 행적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황장엽 망명
1997년 2월,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황장엽(黃長燁) 서기와 그의 심복인 노동당 중앙위 자료연구실 부실장 김덕홍(金德弘)씨가 2월 12일 오전 중국 북경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한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했다.
북한은 황장엽 서기의 망명 요청이 남한의 납치극이라고 생떼를 쓰면서 그를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때는 복수하겠다고 위협했다.
우리 영사부는 일시적으로 북한의 시위대에 의해 고립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중국이 황장엽 서기를 북한으로 보낼 것이라는 분위기도 감지됐다. 우리 대사관에서도 영사부를 포기해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강택민(江澤民) 주석에게 친서를 보냈다. 강택민 주석에게 이런 문제로 편지를 쓰는 일은 처음이었다.
나를 만난 후 장정연 대사는 강택민 주석에게 오늘 중에 즉각 보고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것이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얼마 후 회신이 왔다. 황장엽 서기를 한국에 바로 보내는 것은 힘들고, 국제 관례상 제3국으로 보내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한국으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여러 나라를 떠올리며 고민한 끝에 필리핀으로 최종 결정했다. 나의 친서를 전달했고, 라모스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이 부탁하는 것인데 들어줘야죠"하며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라모스 대통령한테 비밀리에 사신(私信)이 왔다. 라모스 대통령은 "나는 간단히 생각하고 김 대통령 말을 들었는데, 지금 참 괴로운 형편입니다. 야당에서 들고일어나고, 언론에서도 황장엽 서기를 빨리 내보내라고 난리입니다. 공산당 게릴라들의 습격도 우려됩니다" 하고 난처한 입장을 호소해왔다.
황장엽 서기 일행이 한국에 도착한 후 나는 적당한 때에 그를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일성 사후 북한 체제 내부의 상황과 김정일 체제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어느 날 언론에서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를 대서특필했다.
황장엽 서기가 풀어놓을 '정보 보따리'에 그동안 소문으로 나돌던 국내의 친북(親北) 인사에 관한 정보가 있을 것이고, 그 정보의 파괴력은 엄청날 것이라는 추측보도였다. 거기에는 김대중씨의 과거 행적에 대한 상당한 비밀도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 시작했다. 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황장엽 서기를 만났다가는 내가 공작을 했다고 공격을 해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재임 중에는 황장엽 서기를 만나는 것을 피했다.
▶차남 김현철 구속
야당에서는 내 둘째아들 현철이가 한보 특혜 대출 비리의 배후라고 주장하면서 정치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2월 21일 현철이는 검찰에 출두하여 밤샘 조사를 받은 뒤 무혐의로 풀려났다. 현철이가 국정에 개입했다는 야당의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른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아들을 검찰 조사를 받게 하고 청문회에까지 세운 심정은 이루 말로 다 못 하지만 본인의 떳떳함을 만천하에 밝히고, 국민들의 뜻에도 부합하는 올바른 길이라 여겼다. 사회에 물의를 빚은 대통령의 아들은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김기수 검찰총장은 여론 재판에 따른 구속은 법치주의에 어긋난다고 했지만, 나는 혐의를 찾아 반드시 구속하라고 엄중히 지시했다. 5월 17일 현철이는 정치자금에 세금을 내지 않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사면
나는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내 임기가 끝나기 전에 두 사람을 사면할 생각이었지만, 대선 전에는 절대로 발설하지 않도록 주변을 단속했다. 그러나 1997년 9월 1일과 2일 이회창씨는 전, 노 두 사람의 사면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후보 교체론이 대두되던 시점에 이인제를 비롯한 당내 비주류를 추스르지도 못하면서 엉뚱한 발상을 한 당시 이회창씨의 정치적 판단 미숙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이던 12월 11일 나는 전, 노 두 사람에게 사면은 하되, 부정축재에 대한 추징금은 사면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결국 그들은 구속 수감 2년여 만에 석방되었다.
▶김대중 비자금의 비밀
이회창씨가 대선주자인 김대중씨의 비자금을 폭로하고 검찰 수사를 요구한 일은 15대 대통령 선거를 겨우 두 달 앞둔 때 일어났다. 김대중씨의 부정축재 내용을 조사하면 그의 구속은 피치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라도와 서울에서 민중 폭동이 일어나고 대선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결국 나는 선거를 치러야겠다는 생각으로 김태정 검찰총장으로 하여금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의 비자금 의혹 고발 사건은 15대 대통령 선거 이후로 유보한다'고 공식 발표하도록 했다. 김대중씨는 사람들을 통해 "나도 칼국수 먹을 줄 압니다"라면서 내게 다섯 번이나 면담을 요청해 왔고 나의 의지를 전해들은 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그 뒤 12월 30일, 김태정 검찰총장은 김대중씨가, 내가 퇴임하기 전에 자신의 비자금 수사건을 깨끗이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무혐의 처리해 달라는 얘기였다. 노태우 부정축재 사건이나 김대중씨 비자금은 모두 금융실명제 덕으로 밝혀진 것이었다. 이회창 총재가 폭로한 내용은 당시 배재욱 비서관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 중 일부분이었다.
김태정 총장은 이렇게 보고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눈 궤변처럼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씨의 비자금 수사는 그의 지시대로 그렇게 '깨끗이 처리'되었다고.
▶IMF 사태의 진실
IMF의 지원을 받으면 우리나라 경제 정책에 IMF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어차피 IMF행이 불가피하다면 서둘러 경제를 안정시키는 것이 차선책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IMF와의 협상이 언론에 노출되면 금융시장이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국가 경제는 공황 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었으므로 극도의 보안 속에서 통상 한 달 이상 소요되는 협상 기간을 단 하루 만에 끝냈다.
이런 긴급한 과정에서 임창렬 신임 재경원장관이 엉뚱하게도 IMF 구제금융 신청을 긴급 금융안정 대책에서 제외된다는 발표를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하시모토 일본 총리의 협조를 약속받았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배신
당선 직후 나와 앞으로 협력해 나가겠다는 말을 거듭 했던 그는 취임 이후 그의 말과는 다르게 내 측근을 감시하고 뒷조사하여 권영해 안기부장 등 수많은 사람을 구속했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지역 감정의 골이 깊게 파이도록 부추겼다. 그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인간적으로나 정치인으로서나 그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지금도 그는 나에게 정치 보복을 계속하고 있다.
▶헬무트 콜 수상 방한
1993년 3월 1일 나의 대통령 취임 후 나흘만에 첫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거구(巨軀)인 콜 수상은 키뿐 아니라 몸집도 대단히 장대했다. 내가 "체중이 105kg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하고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자, 콜 수상이 "제 몸무게는 국가 최고 기밀입니다" 라고 말해 폭소가 터졌다.
이날 회담에서 콜 수상은 직접 "고속전철 건설 사업을 독일 쪽에 맡겨달라"고 솔직하게 부탁해왔다. 나는 내심 깜짝 놀랐다, 국익(國益)을 두고 국가 정상이 직접 세일즈에 나서 '사업 유치'를 솔직하게 부탁하는 콜 수상의 자세도 놀라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 직접 여러 가지 이권(利權)에 개입해왔기 때문에 이런 직접적인 청탁이 생기는구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테랑 대통령의 구토
미테랑 대통령은 내가 재임 중 만난 정상들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지도자이며, 가장 훌륭한 인물이었다. 1993년 9월 14일, 프랑스 국가 원수로는 처음으로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앞서 미테랑 대통령은 심한 구토 증세를 보여 30여분 정도의 휴식을 취하느라 정상회담이 그만큼 늦어졌다.
미테랑 대통령은 우리측 의전 관계자로부터 서명용 만년필을 넘겨받아 방명록에 서명했다. 그러나 결국 구토증을 참지 못했다. 구토물을 왼손으로 받아 카펫에 버린 뒤 시종무관으로부터 손수건을 받아 입가를 닦았다. 이어 1층 홀에서의 기념 촬영을 위해 시종무관의 부축을 받아 걸어가던 중 선 채로 다시 카펫 위에 구토를 했다.
이날 내가 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한 것은 외규장각(外奎章閣) 도서의 반환이었다.
미테랑은 외규장각 도서에 대해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그렇게 중시하는지 몰랐다고 하면서, 프랑스로 연락해서 당장 내일 두 권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300명의 기자들을 기다리게 한 한·러 정상회담
러시아 방문 이틀째인 6월 2일 오전 나와 옐친 대통령은 크렘린궁(宮)에서 단독 및 확대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날 단독 정상회담에서 옐친 대통령과 전날 마무리 못한 대(對)북한 무기 공급 문제를 결론짓자고 했다. 나는 한국에 치명적인 위해(危害)가 되는 러시아의 대북(對北) 무기 부속품 공급 및 판매를 완전 중단하라고 촉구했고, 옐친 대통령은 완강히 거부했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기자회견 시간이 다가왔다. 옐친 대통령은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3백여 명의 기자들이 모여있습니다. 이제는 가야됩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기자들은 기다리면 됩니다. 여기서 합의를 합시다"하고 강하게버텼다. 결국 기자회견은 1시간 이상 지연되었다.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던 옐친 대통령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는 손으로 책상을 '쿵'치면서 "대통령 각하, 정 그러시다면 그렇게 합시다"하고 말했다.
확대 정상회담은 두 정상의 합의 내용을 간단히 통보하는 형식이 되었다. 이어서 옐친 대통령은 6·25 전쟁 관련 문서 사본이 든 검은 서류 상자를 내게 전달했다.
이들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오랜 세월 북한과 친북 성향의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해온 이른바 북침
설(北侵說)이나 수정주의가 허구였음이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
옐친 대통령은 강한 의지력이나 고집이 센 점까지도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술을 많이 마신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옐친 대통령은 나와 만났을 때 조심스러웠는지 그다지 술을 많이 들지 않았다.
옐친 대통령은 악단을 향해 몇 번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고, 흥겨운 음악에 맞춰 커다란 러시아 스푼으로 식탁을 힘차게 두드리며 장단을 맞췄다. 너무 세게 두드린 나머지 나중에는 스푼이 완전히 휘어지고 말았다.
▶테이블 밑에서 내 발등 밟은 엘리자베스 여왕
1995년 3월 8일 오전 런던에 도착한 나는 영국 여왕 관저인 버킹엄궁(宮)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
과 엘리자베스 여왕이 주최한 환영 오찬에 참석했다.
여왕 부부와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를 하던 중 내 발 위로 뭔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이런 곳에 쥐가 있을 리 없을 텐데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식탁보를 살짝 들춰보았다. 그랬더니 여왕이 맨발로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발이 불편해 구두를 잠깐 벗어 놓았던 여왕이 신발을 다시 찾느라고 발로 바닥을 더듬다 내 발을 건드린 것이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고르바초프와의 우정
2월 8일 오후 5시 나는 국제 그린크로스 총재자격으로 방한한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구(舊)소련 대통령과 부인 라이사(Mrs. Raissa Gorbachev) 여사를 청와대에서 만났다.
하지만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내가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을 대단히 꺼려했다. 러시아
는 쿠나제 대사를 통해 우리 외무부에 강력한 반대의 뜻을 거듭 전해왔다.
참모들은 나에게 강대국인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서도 러시아의 요구대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러시아에 통보해 나의 분명한 입장을 옐친 대통령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고르비, 당신이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너무 느슨하게 풀어놓았기 때문에 쿠데타가 발생하고 옐친 대통령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사태가 발생한 것 아닙니까?"
내가 실각(失脚) 과정에 대해 묻자,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련 공산당서기장 겸 대통령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힘으로 권력에 안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변화를 가져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 속도가 너무 앞질러 가다보니 당(黨) 조직이 느슨해졌던 것 같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결국 정권을 빼앗기는 사태가 왔지만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로 가는 것이 역사적인 필연(必然)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결국 민주주의로 갈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라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주의하에서 당(黨)의 이념과 조직에 충실해서 서기장과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또 진보되어 가는 것 아닙니까. 이제 나는 철두철미한 민주주의자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반세기 이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양분되어 온 세계를 화해시킨 우리 시대의 영웅이다. 고르바초프는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강택민 주석 첫 방한
11월 13일 오후 강택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이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했다. 중국 권력 서열 1위인 국가주석이 우리나라를 방문한 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이었다.
나와 강택민 주석은 또 일본의 과거사(過去史) 망언(妄言)에 대한 문제를 집중 논의했다.
나는 강택민 주석에게 "일본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번에도 그냥 넘어간다면 일본의 과거사 망언은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강 주석과 내가 강력하게 대처합시다" 하고 제의했다.
강택민 주석은 "내가 어렸을 때 일본군이 남경(南京)에서 대학살을 하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잡아떼고 있습니다"라고 일본을 비난하면서, "좋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제의에 동의합니다. 일본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우리의 의지를 공표합시다"고 동의했다.
정상회담을 마친 나와 강택민 주석은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의 과거사 망언(妄言)에 대해서 단호하게 비판했다.
과거사 망언에 대한 나와 강 주석의 강도 높은 공동 규탄은 일본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가의 비상한 관심은 물론 모든 언론이 공동회견 내용을 크게 보도하였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나의 발언에 대해서 일본 정부 대변인 노사카 관방장관이 "좀더 절도있게 발언해주기 바란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