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언어의 온도
1). 진짜 사과는 아프다.
언젠가 정중히 사과를 건네는 사람의 표정을 들여다본 적 있다. 그는 어딘지 힘겨워 보였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왜일까. 엉뚱한 얘기지만 영어 단어 ‘sorry’의 어원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함을 의미하는 ‘sorry’는 ‘아픈’ ‘상처라는 뜻을 지닌 ’sore’에서 유래했다. 그래서일까 진심 어린 사과에는 ‘널 아프게 해서 나도 아파’라는 뉘앙스가 스며 있는 듯하다. 진짜 사과는 아픈 것이다.
2). 헤아림 위에 피는 위로라는 꽃
위로의 표현은 잘 익은 언어를 적정한 온도로 전달할 때 효능을 발휘한다. 짧은 생각과 설익은 말로 건네는 위로는 필시 부작용을 낳는다. “힘 좀 내”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이런 멘트에 기운을 얻는 이도 있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힘낼 기력조차 없는 사람 입장에선 “기운 내”라는 말처럼 공허한 것도 없다. 정말 힘든 사람에게 분발을 종용하는 건 위로일까, 아니면 강요일까.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3). 여행을 직업으로 삼은 녀석
여행은 인간의 본능이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욕망은 우리 유전자 안에 각인돼 있으며 인류 문명사는 이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박한 현실 탓에 여행에 대한 욕구를 억누른 채 살아갈 뿐. 삶의 터전을 잠시 떠나는 건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여행자는 낯선 길에서 걸음을 뗄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풍경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나’를 마주하기도 하고, 운전할 때 백미러(후사경)를 통해 지나온 길을 살피듯 삶의 궤적을 슬며시 되짚어 볼 수도 있다.
4). 노력을 강요하는 폭력
일 때문에 연락하는 사람 중에, 종종 내 노력에 등급을 매기려는 이들이 있다. 그런 관심은 정말이지 부담스럽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는 관심은 정말이지 폭력에 가깝고 상대에게 노력을 강요하는 건 착취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는 우리가 현실에서 감히 토해내지 못하는 말을 대신해주는 것 같다.
그뿐이랴, 게다가 어떤 영화는 어두운 방에서 문을 열면 빛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순식간에 어린 시절 기억을 되살려내 마구 솟구치게 한다.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 은밀하게 숨겨놓았던 스위치 같은 게 ‘딸각’ 하고 들어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5). 자신에게 어울리는 길
한껏 흐드러지게 피다가 일순간 꽃비를 흩뿌리며 사라진 벚꽃이 짧디짧은 우리네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 아닐는지. 살다 보면 누구나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들어서기 마련이다.
솔직히 말해, ‘솔직하기’ 참 어렵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 ‘남을 속이면 기껏해야 벌을 받지만 ’나‘를 속이면 더 어둡고 무거운 형벌을 당하기 때문이다.
6). 원래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인 듯하다. 순응 아니면 체념이다. 특히 체념은 슬픈 단어다. 국어사전에 실린 체념(諦念)의 정의는 이렇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하는 것.’ 무서운 이야기다.
희망을 삼켜버린다니. 이런 까닭에 오지 탐험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곧잘 한다. “조난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건 식량 부족도 체력 저하도 아닙니다. 조난자는 희망을 내려놓는 순간 무너집니다. 체념은 삶에 대한 의지까지 꺾습니다.” 정답은 없다. 아니, 모두가 정답이 될수 있고 모두가 오답이 될 수도 있다.
복잡한 사실과 다양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세상에 ‘원래 그러한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삶도 사람도 그리 단순할 리 없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에 낙원을 품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낙원에 도달하려면 일단 떠나야 한다. 어떻게? 호기심이라는 배에 올라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 수 밖에. 돌이켜보면, 내 내면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질문처럼 절박하고 명확한 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걸 따라가는 과정에서 널찍한 신작로는 아니지만, 나만의 샛길을 발견하곤 했다. 호기심이 싹틀 때 “원래 그렇다”는 말로 억누르지 않았으면 한다. 삶의 진보는 대개 사소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7). 한 해의 마지막 날
달력을 뜻하는 영어 단어 ‘calendar’의 어원은 라틴어 칼렌다리움 (calendarium)이다. ‘회계장부‘ ’빚 독촉‘ 정도의 의미가 있다. 그래, 철저한 자기반성은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숙연한 자세로 과거를 되씹어 봄 직하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 비하나 부정은 희망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법,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비관주의로 물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정도면 애썼다고, 잘 버텼다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그러면서 슬쩍 한 해를 음미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내다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8). 더 주지 못해 미안해
부모는 참 그렇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려주고 자신의 꿈을 덜어 자식의 꿈을 불려주고, 밖에서 자신을 희생해가며 돈을 벌어다 주고, 그렇게 늘 줬는데도 자식이 커서 뭔가 해드리려 하면 매번 “미안하다”고 말한다. 단지 받는 게 미안해서가 아닐 것이다. 더 주고 싶지만 주지 못하니까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향해 “미안하다”고 입을 여는 게 아닐까.
9). 부모와 자식을 연결하는 끈
어머니는 아들과 의사소통하는 데 애를 먹는 듯했다. 길거리에서 아들의 동선을 통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끈으로 몸을 동여맨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일순, 임신부의 자궁 안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태아의 모습이 그려졌다. 태아는 어머니 뱃속에서 탯줄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는다. 자궁 밖으로,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에선 그 줄을 끊어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목격한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의 몸뚱어리를 여전히 탯줄로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은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는 듯.
잠시 뒤 나는 버스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자 나와 모자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멀리서 바라본 어머니와 아들의 흐릿한 실루엣은, 서로의 몸을 생명줄로 연결한채 만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의 어느 기슭에서 대자연과 맞서고 있는 산악인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했다. 그렇다면 저 어머니와 아들은 어떤 산을, 무엇을 위해 오른 것일까.글쎄다. 어쩌면 저들은 낯선 길에 대한 두려움 없이, 꽤 아득하고 특별한 여정을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감히 오를 수 없는 그들만의 신성한 봉우리를 향해.
10). 긁다, 글, 그리움
’글‘이’긁다‘애서 파생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글쓰기는 긁고 새기는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글은 여백 위에만 남겨지는 게 아니다. 머리와 가슴에도 새겨진다.
마음 깊숙이 꽂힌 글귀는 지지 않는 꽃이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 때론 단출한 문장 한 줄이 상처를 보듬고 삶의 허기를 달래기도 한다.
그리움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닿을 수 없는 인연을 향항 아쉬움, 하늘로 떠나보낸 부모와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 같은 너무 깊게 박혀 있어서 제거할 방도가 없다. 채 아물지 않은 그리움은 가슴을 헤집고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그러다 그리움의 활동 반경이 유독 커지는 날이면 우린 한 줌 눈물을 닦아내며 일기장 같은 은밀한 공간에 문장을 적거나, 책 귀퉁이에 낙서를 끼적거린다. 그렇게라도 그리움을 쏟아내야 하기에, 그래야 견딜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