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강좌 10
이승하
제1강좌 : 문학이란 어떻게 생겨났을까?
문학은 인간이 자신의 직·간접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되,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표현하는 언어예술입니다. 오늘날 문학이란 문자로 씌어져 주로 책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을 가리키지만 말로써 전해 내려온 문학, 즉 신화·전설·설화·민담 등도 구비문학(口碑文學)이라고 하여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학의 기원은 인간의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 까마득한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요. 문학은 미술의 기원으로 삼는 동굴의 동물벽화가 그러했듯이, 풍요를 기원하고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담아서 말한 기도와 주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동물을 많이 잡게 해주십시오, 곡식을 많이 수확하게 해주십시오, 홍수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이 안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하는 마음을 담아 손과 발로 장단을 치고 주문을 외우는 데서 음악과 춤과 더불어 시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른바 원시종합예술이지요.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볼까요. 원시농경사회에서는 해마다 풍년을 비는 제례의식을 가졌을 것이고, 그때 읊었던 주문에서 문학, 특히 시가 출발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성에게 구애를 표시할 때나 자연신(自然神)에게 기도를 드릴 때도 특별한 언어활동이 필요했겠지요. 기억하기에 편리하고 듣는 이에게도 감동을 주는 운율 형태를 갖춘 시는 언어 자체의 기원과 궤를 같이했을 법합니다. 대다수 고대문명은 문명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종교적·주술적 송가, 설화적 서사시, 서정적 가요 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은 노래였습니다. 농사와 사냥 등 집단적인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노래를 불렀겠지요.
예를 들겠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고대 그리스 시대 호메로스(호머)의 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고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여기에 『구약성서』를 포함하여 고대 히브리 민족의 운문 시가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문자가 생겨난 이후에 기록됨과 동시에 살이 많이 붙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시경』 역시도 공자가 고대 중국의 민요를 모아 정리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운문과 산문은 어떻게 갈려진 것일까요. 일단 시의 역사는 산문의 역사보다 훨씬 깁니다. 인간에게 공포감을 주는 자연에게 외경심을 표현하고 자연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데에는 동일한 리듬의 반복인 운율(韻律)이 제격이었습니다. 또한 말을 오래 기억하는 데에는 규칙적인 반복이나 압운(押韻, 두운·각운 등) 같은 형식이 필요했을 테지요. 이와 달리 사람들간의 관계 설정에 필요한 것,
예컨대 계약문과 법 같은 것을 기록하는 데에는 산문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서도 철학·법률·지리지 등은 산문으로 씌어졌고, 희곡을 비롯한 순문학적인 것은 모두 운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후대까지 이어져 서구에서 소설이 문학의 주된 장르가 되는 것은 18세기에 들어와서야 이루어진 일입니다. 문학이 구비문학에서 문자문학으로 발전하는 데에도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우선 옛날에는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으며, 비싼 양피지에 필사한 사본은 수량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이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은 문자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권층의 전유물이던 문학작품을 종이와 인쇄술 덕분에 일반인들도 널리 읽을 수 있게 됨으로써 '독자층'이란 것이 생겨났습니다. 아무튼 원시종합예술에 있어 문학은 곧 시였고, 시는 노래의 요소와 이야기의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는 근대로 내려오면서 개인의 내적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내용도 점점 개인화 되어갔고, 그 형태도 짧아졌습니다. 그리하여 근대에 들어서서 시는 서사시와 극시와 구별하여 서정시에 국한시켜 말하려는 의식이 강해졌지요.
제2강좌 : 서양에서 문학장르는 어떻게 분화되었는가?
문자로 씌어진 '작품'을 대상으로 할 때 서양인은 당연히 고대 그리스 시대의 서사시를 문학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입니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영웅 길가메시의 여행 모험담을 이야기체의 운문에 담은 『길가메시』를 기원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서양의 경우를 먼저 봅시다. 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구분한 이래 서사시·서정시·극시로 분류되어 왔습니다.
첫째, 호메로스로 대표되는 서사시『일리아스』『오디세이아』가 있습니다. 영웅의 업적을 찬양하고 역사적·국가적·종교적·전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주제를 고상한 문체로 다룬 이야기체의 장시인 서사시의 효시는 기원전 900∼750년경에 완성된 호메로스의 서사시입니다. 『일리아스』는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 서사시이고, 『오디세이아』는 목마를 이용해 트로이를 점령한 영웅 오디세우스의 여행과 모험을 다룬 서사시입니다. 서사시의 전통은 고대 로마 시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중세의 『니벨룽겐의 노래』 『롤랑의 노래』로 이어지고, 다시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락원』 등으로 이어지지요.
둘째, 그리스의 칠현금인 리라(lyre)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 서정시가 있습니다.
서정시는 리라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기 쉬운 표현 방식으로 발달했는데, 특히 개인의 감정을 솔직히 나타내는 운문입니다. 기원전 7세기의 그리스 시인 사포가 쓴 『아프로디테 송가』는 그 시대 서정시의 대표작이었습니다. 그녀의 뒤를 이어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에서는 카툴루스와 호라티우스가 서정시를 썼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음유시인들의 노래, 기독교 찬송가, 다양한 발라드에서 서정시 형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페트라르카·셰익스피어·스펜서·존 밀턴 등이 완성된 서정시의 형태인 소네트를 발전시켰습니다. 18세기말부터 서구를 휩쓴 낭만주의는 서정시를 주된 장르로 삼았고, 19세기와 20세기 서양의 시는 거의 전부 서정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셋째, 극시가 있습니다.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시이면서 동시에 희곡이었습니다.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의 총사령관 아가멤논 가정의 복수극입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 『안티고네』 『엘렉트라』는 친부 살해, 어머니와의 결혼 등 아이러니컬한 상황 전개를 통한 일종의 성격 분석극입니다. 에우리피데스는 『트로이의 여인들』이란 대표작이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경에 아리스토파네스가 희극(喜劇)을 써 그 전통을 고전주의 시대에 가서 몰리에르가 계승합니다.
시의 시대가 전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산문이 태어납니다. 헤로도투스의『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크세노폰의『소아시아 원정기』 같은 역사서 외에,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와 윤리학서가 산문의 물꼬를 트고, 문학사를 만들어갔습니다.
한편 동물을 의인화시켜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 우화가 많이 탄생하여 글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대표적인 우화 작가는 기원전 6세기경 이오니아 지방의 노예로서 많은 우화를 남긴 이솝이죠. 이솝에 의해서 확립된 우화의 전통은 중세 영국의 초서를 거쳐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라 퐁텐으로 이어집니다. 중세에는 기사들의 모험과 사랑 이야기인 로맨스가 유행의 물결을 타고 전 유럽에 퍼집니다. 로맨스의 대표작은 뭐니뭐니 해도 영국의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와 『파르지팔』, 영국의 『가웨인 경과 녹의(綠衣) 기사』는 중세 각 나라를 대표하는 로맨스로서, 주인공이 고달픈 여정에 올라 온갖 형태의 장애를 다 극복하면서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모험담입니다. 희곡의 역사를 크게 발전시킨 셰익스피어의 시대만 하더라도 희극과 비극은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18세기에 이르러 전통적인 희극과 비극을 대신한 '드라마'가 생겨났습니다. 서양의 '소설'(novel)이란 것도 이 시기에 생겨났습니다. 소설은 산업혁명 이후 중산층이 대두되면서 크게 발전했습니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음유시인의 노래를 통해서 시를 감상하고 공연장에 몰려가서 단체로 연극을 봄으로써 희곡을 감상할 수 있었지만 소설의 융성으로 말미암아 각자 책을 사서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확산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일입니다.
문학을 '창작문학'과 '산문문학'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는데 시·소설·희곡·수필·평론이 창작문학의 5대 장르이고, 역사·철학·언어학·수사학이 산문문학의 4대 갈래입니다. 하지만 이런 낡은 분류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시를 형식상으로 흔히 정형시·자유시·산문시로 분류하는데, 이것 역시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분류인지 모호합니다. 오늘날 문학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영화와 공연예술, 컴퓨터와 E-book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서양 문학 장르의 분화에 대한 공부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문학의 생존 전략일 것입니다.
제3강좌 : 우리나라에서 문학은 어떻게 발달해 왔는가?
한국문학은 한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어로 행한 문학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한시나 고대가요 등 한자로 된 문학은 몽땅 우리 문학사에서 제외해야 할까요? 아니,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한문은 동아시아 전체가 공통으로 쓴 문자였고, 한국에서는 한국 발음으로 토를 달아서 읽었습니다. 한문 그 자체는 중국어와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한문은 한국어 문어체의 한 양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전제 아래 한시까지 포함하여 우리 문학이 흘러온 길을 이 자리에서 일목요연하게 훑어봅시다.
지금부터 1700년 전 중국 진나라의 진수가 쓴 역사책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까마득한 옛날 우리 조상이 어떻게 살았는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마한의 오월제·시월제 등은 제천의식 이름입니다. 농사를 시작하고 수확할 때 종교적 의식이 행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때는 반드시 춤과 노래가 있었으며, 노래는 시가 되었습니다. 음악과 무용과 시가가 분리되지 않은 원시종합예술은 삼국시대에 들어와 일단 구분이 됩니다. 일단 고대가요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고대가요 『황조가』는 고구려 유리왕 3년 때의 작품으로 『삼국사기』에, 『귀지가』는 가락국 때의 작품으로 『삼국유사』에, 『공무도하가』는 고조선 때의 작품으로 『고금주』에 한시로 적혀 전해지는 작품입니다. 원래는 우리말로 불려진 것이 우리말 가사는 소실되고 후대에 이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다행히도 그 유래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오랜 우리 시가는 바로 이 세 노래입니다.
『황조가』는 고구려 유리왕 3년(B.C. 17년) 때의 작품으로, 실연의 슬픔을 담은 노래입니다. 왕비 송씨가 죽은 후 한꺼번에 맞아들인 두 왕비 화희와 치희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치희는 중국 한나라 사람이었는데 화희의 질투를 참지 못해 고국으로 돌아가 버리자 왕은 상심하여 "펄펄 나는 꾀꼬리는 자웅이 노니는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더불어 돌아갈꼬"하며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귀지가』는 가락국 때(A.D. 42년)의 작품으로, 임금을 맞으려고 부른 일종의 희망적인 노동요입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내용으로, 현전하는 최초의 집단 무요(舞謠)입니다.
『공무도하가』는 고조선 때, 즉 A.D. 2세기경의 작품입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미친 남편(白首狂夫)이 술에 취해 강을 건너다 죽는 광경을 보고 그의 아내가 부른 노래 "당신은 물을 건너지 마오. 당신이 물을 건너다가 빠져 죽으면 어쩌자는 말인가"가 뱃사공의 아내에 의해 채록되어 후세에 전해졌다는 유래를 가진 노래 『공무도하가』는 원시적인 서사문학에서 서정문학으로 옮아가는 시기의 작품입니다.
고구려는 민족 대이동의 초기에 한반도를 개척한 씩씩한 기상을 물려받은 족속이었기에 서사문학인 설화가 발달했습니다.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온화한 기후에 풍부한 자원을 누리고 살았기에 서정문학인 시가가 발달했습니다.
백제 가요의 대표작은 『정읍사』입니다. 행상 나간 남편이 밤길에 무사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은 이 작품은 한글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노래이면서 현재까지 전하는 백제 유일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통일신라시대는 우리 문학사에 있어 향가문학이라는 꽃을 활짝 피운 시대입니다. '鄕歌'라는 용어는 중국의 노래에 대항하여 우리는 시골의 노래를 부르겠다는 민족적 성향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고유문화와 불교문화를 한데 융합한 신라 고유의 노래입니다.『서동요』『제망매가』『처용가』등의 향가 14수는『삼국유사』에 승려 균여의 향가 11수는 고려 문종 때에 혁련정이 지은 『균여전』에 전합니다.
고려 역사 500년은 정치적으로는 줄곧 내우외환에 시달렸지만 문화면으로는 현란한 신라의 문화를 계승하였고, 중국의 발달된 문화와 제도를 들여와 융성한 고려 특유의 문화를 이룩했습니다. 어지러운 사회 환경 때문에 현실 도피적인 성향이 강하였고 순간적인 향락을 추구한 문학도 있었지만 질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아주 많이 낳은 국문학의 절정기였습니다.
제4강좌 : 문학은 사실인가, 허구인가? 체험인가, 상상력인가?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이야기는 신문기사나 역사와는 다르지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만들어낸 것, 즉 허구입니다. 그리스 신화도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선녀와 나무꾼 전설도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군가가 만들어낸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감동을 줍니다. 신화나 설화는 물론 소설 속의 이야기도 얼토당토않은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언론에 보도가 되었거나 여러분 주변에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충격이나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문학의 감동은 보다 고차원적이지요. 소설 가운데에는 역사적 사건에서 소재를 취해오는 경우도 있고 전기나 자서전 같은 실제 이야기에서 작중인물을 빌려오기도 하지만 문학작품은 궁극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즉, 문학의 가치는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허구의 세계를 아주 그럴듯하게 그리되 '진실'을 추구해야 훌륭한 문학작품이 됩니다. '그럴듯하게'를 비평적인 용어를 써 설명하면 구체성·사실성·개연성 같은 것이겠지요. 문학이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럴듯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체험한 것을 정직하게만 그려서는 안 되며,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거짓 요소가 가미되어야 작품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가 겪은 일을 좋은 문장으로 곧이곧대로 그리는 것이 뛰어난 문학작품이라면 르포·수기·수필·서간문·일기 같은 것이 최고의 문학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문학으로 취급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저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지만 그 책을 훌륭한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문학은 사실과 허구의 교묘한 혼합을 지향합니다. 사실인 것도 같고 만들어낸 이야기인 것도 같고 잘 분간이 안 가는 데 문학의 묘미가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체험이고 하나는 상상력입니다. 이 두 요소에 관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
"The poem is born, not made."(서양 속담)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善의 훌륭한 방편이다."(셸리)
"상상력이란 것은 죽어가는 열정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두는 불사의 神을 말하는 것이다."(키츠)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감정이라면 젊은 나이에 다들 봇물처럼 넘쳐흐를 정도의 시를 갖게 될 것이 아닌가. 시는 정말로는 체험인 것이다."(R.M. 릴케)
체험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갑니다. 각자가 글을 쓰고 있는 그 시점까지 보고 듣고 느낀 온갖 것이 다 체험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또한 독서 체험을 비롯하여 예술작품을 본 체험, 영화를 본 체험, 여행을 한 체험, 꿈 체험 등 오관을 통해 감각한 모든 것, 각자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이 다 체험이지요. 그런데 시적 체험은 정서적 체험입니다. 시의 힘은 '공감' 내지는 '감동'에서, 혹은 '충격'에서, 혹은 '깨달음'에서 옵니다. 내 마음을 움직인 체험은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슴에 남는 것이 있어야 '시'입니다.
한편, 소설의 경우 또한 체험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앙드레 말로가 캄보디아에 가본 적이 없다면 『왕도』를 쓸 수 없었을 것이며, 생텍쥐페리가 비행기 조종을 해본 적이 없었다면『남방우편기』『야간 비행』『인간의 대지』같은 작품을 남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북전쟁 체험을 전혀 한 적이 없이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탁월한 전쟁소설 『붉은 무공훈장』을 쓴 스티븐 크레인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간접체험의 중요성은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는 자료도 열심히 찾아보았고, 남북전쟁에서 살아남은 당사자들(노인네들이었겠죠)과 그 후손을 수도 없이 만나 체험담을 들었다고 합니다. 꼭 등반 경험이 있어야만 산악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조업 체험이 있어야만 해양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을 읽고, 자료를 찾고, 사람을 만나고, 직접 가서 취재를 한 것도 다 체험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글을 쓰겠다면 유심히 보는 습관, 메모를 하는 습관, 스크랩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는 습관도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필요한 것이 상상력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체험을 얼마든지 메우고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영국 수필의 창시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역사는 기억에, 문학은 상상에, 철학은 이성에 직결된다고 말해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또한 역사가 사실을, 철학이 실재를 다룬 데 반해 문학은 상상의 세계를 다룬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실의 세계에 얽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더 추악하게, 더 진실되게, 더 거짓되게 만들어야 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환타지 소설이 오늘날 크게 유행하고 있는데 그 소설의 이상야릇한 이야기가 상상력이 없다면 어떻게 진행될 수 있겠습니까. 상상은 공상이나 망상과는 다르지요. 상상은 허구의 진실, 문학적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황당무계한 공상과 혹세무민하는 망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16세기 영국의 시인 에드먼드 스펜서는 "상상력이란 것은 우리들이 전에 경험했던 것을 기억케 하며, 그것을 어떤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다."라고 했습니다. 영국 낭만주의 초기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상상은 영혼의 감각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에 있어서도 상상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상상력이란 쉽게 말해 조금 엉뚱한 생각입니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 모든 예술의 원천이 됩니다.
자 그럼 결론을 내립시다. 문학은 사실과 허구의 접점에 서 있는 것이며, 체험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밀가루 반죽이랄 수 있습니다. 이 밀가루 반죽으로 빵을 만들거나 국수를 만들거나 자장면을 만들거나 그것은 쓰는 사람의 자유이겠지요.
제5강좌 : 문학은 말에서 출발하여 말로 끝나는가?
문학을 흔히 언어예술이라고 합니다. 음악·미술·조각·무용·건축 등 예술의 다른 분야와 달리 문학만이 언어를 재료로 하여 만들어내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미술·조각·건축이 공간을 차지하는 공간예술임에 반해 문학은 공간을 거의 차지하지 않습니다(책은 부피가 그리 크지 않으니까요). 또 음악이 연주를, 무용이 공연을 전제로 하는 시간예술임에 반해 문학은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도 다른 점입니다. 문자로 적힌 것이라 틈날 때 읽을 수 있고, 10년 뒤에 읽을 수도 있고, 외국어로 번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의 언어가 있습니다. 지시어와 함축어가 그것입니다. 지시어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정보를 전달하거나 의사소통에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규칙이나 법령은 반드시 지시어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언어를 다른 말로 과학적 언어라고 하지요. 법조문이 지시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애매한 표현이 있어 자구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면 큰 혼란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문학의 언어는 가급적이면 함축어를 써야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지시어는 머리나 이성에 의존하지만 함축어는 마음이나 감각에 호소합니다. 박남철의 詩「언젠가 태양의 바다」에서 함축어를 제일 많이 쓰는 이는 역시 시인입니다. 언어와 사물이 1:1의 관계가 아니라 1:多의 관계를 시인은 지향하지요. 알 듯 모를 듯한 말, 행간에 숨은 뜻이 있는 말, 해석의 여지가 풍성한 말이 문학적인 말(언어)입니다. 그와 아울러 시는 근본적으로 역설적인 언어입니다. 시는 언어를 구사하되 일상적인 언어로부터 해방되려는 모순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현대에 들어 점차 가속화되어 언어를 거부하거나 언어를 파괴하는 극단적인 형태로 치닫기도 합니다. 시에 사진·그림·만화·악보·화학방정식 등이 등장하기도 하니까요. 시의 언어와 소설의 언어는 꽤나 다릅니다. 시의 언어, 즉 시어는 축소지향의 언어입니다. 한 마디의 말에 여러 가지 뜻을 담고자 애를 씁니다. 정원사가 잔가지를 쳐내어 나무를 더 잘 자라게 하고 보기 좋게 하듯이 쓸데없는 말을 줄이는 것이 시를 쓰는 과정이지요. 앙상한 가지만으로 깊은 뿌리와 무성한 잎까지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시가 됩니다.
하지만 소설은 이야기에 살을 자꾸만 붙여, 앞 절에서 말한 구체성·사실성·개연성을 추구합니다. 확대지향의 언어, 즉 산문이 소설의 언어가 되는 것이지만, 소설도 때에 따라서는 함축적인 언어를 써 축소를 지향할 때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물과 물상을 다 껴안고 있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말)가 없으면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고, 언어를 통한 인식이 없이는 사물과 물상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언어가 존재를 존재케 한다는 뜻이지요. 언어가 존재를 존재케 한다? 어렵습니까? 말이 있어야 모든 사물과 물상의 존재가 가능하며, 문학은 말에서 출발하여 말에서 끝난다는 말을 하고자 저는 이때껏 말을 비비꼬아 했나 봅니다. 그런데 오늘날 문학에서도 말의 파괴현상이 위험수위를 넘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온갖 욕설과 음담패설이, 비어와 속어가, 외래어와 전문어가 넘쳐나는 것이 문학의 언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김영랑과 김소월, 백석과 만해, 윤동주와 이육사의 시가 지금까지도 국민적인 애송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시는 우리말로 우리 정서를 표현했기 때문이지요. 소설 중에서도 우리말이 풍성한 작품이 많습니다. 김유정의 단편들,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 김주영의 『객주』, 몇 년 전에 작고한 김소진의 소설, 젊은 소설가 전성태의 작품……. 문학은 말에서 출발하여 말에서 끝난다는 점을 누구보다 확실히 가슴에 새기고서 작품을 썼던 우리 문학의 보배로운 존재들입니다.
제6강좌 :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은 다른 것인가?
순수문학론은 문학이 정치나 이념과 상관없이 순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뼈대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술적인 가치가 가장 중요하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문학론이 순수문학론의 핵심입니다. 90년대 초까지 진행된 우리 나라 순수·참여 논쟁, 혹은 민족·민중문학론은 그런 대로 점잖고 건강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논쟁이었습니다. 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어 순수와 참여간의 줄다리기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그 대신 대중문학이 순수문학을 뒷전으로 밀쳐내고 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대중문학이 순수문학에게 강펀치를 먹이고, 순수문학은 그로기 상태가 되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대중이란 도대체 누구입니까? 엘리트의 반대말인 것은 알겠는데 워낙 포괄적인 개념이라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계층은 크게 나누어 무학문맹층, 한글 해독이 가능한 저학력층, 영세상인층, 고졸학력 고정봉급자, 자유업자, 고학력 지식인층으로 나눌 수 있지만 이것이 온전한 분류법일 수는 없습니다. 이 가운데 대중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지금 사회구성체론을 공부하고 있지 않으므로 곧바로 대중문학 속으로 뛰어듭시다.
문학작품을 평가할 때 흔히 창조적 정신, 진실의 발견, 진정성의 추구 등을 운위합니다. 역사적으로 문학이 대중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데 우리는 대중문학-본격문학, 통속문학-순수문학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순수문학 혹은 정통문학은 문학의 진정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대중문학 혹은 통속문학은 상업주의문학이므로 가짜요, 수준 이하요, 저급 문학이요, 장삿속으로 쓰고 출판한 문학일까요? 일단 90년대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봅시다.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과 이재운의 『소설 토정비결』은 역사적 인물의 신비화라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독자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충분히 주었습니다.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은 신데렐라 풍의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환상성을 결합한 작품인데, 남성 우월주의를 재생산한 문제 있는 베스트셀러였습니다.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남북한 핵 공동 개발과 일본 침략이라는 기본 줄거리를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엮어 국민의 반일감정에 호소한 소설인데, 황당무계하기가 환타지 소설 뺨치는 작품입니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역사소설에 추리소설의 요소를 가미한 작품으로, 젊은 작가의 방대한 자료 섭렵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지요. 역사적 사실 여부를 놓고 몇 명 사학자가 딴지를 건 작품이었다고 기억되는데, 논문이 아닌 소설이 꼭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요. 김정현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과 권위가 강조되는 가부장제라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절대적인 선(善)을 눈물로 강요한 작품입니다. 이들 책은 수십 판을 찍었지만 순수문학 진영 작가의 작품집은 상대적으로 판매 부수가 뚝 떨어진 것이 90년대의 출판계 현황입니다.
90년대 대중문학의 대약진은 대중문학의 순기능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대중문학 작품을 쓰는 이들은 주장합니다. 그들은 재미와 위안을 주는 대중문학, 즉 소일거리도 되고 문화적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는 소설은 자본주의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으므로 잘 팔리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또한 출판사도 살아야 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팔려고 드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는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문학이 오락의 기능을 다해 일상의 권태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면 그 나름의 소임을 다한 것이 아니냐는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이 논리는 출판사들이 앞을 다투어 신문지면을 통한 소설 광고에 나서게 했고, 문예지는 관련 있는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자의 홍보지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문학상도 상업적인 계산을 하여 주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한술 더 떠 대형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하여 사재기를 하는 추태를 연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면 독자는 남들이 읽으니까 나도 읽어야지 하면서 사는 경향이 있거든요. 지난 몇 년 동안 사재기를 통해 베스트셀러 순위를 조작한다는 소문이 무성했으나 표면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순위 조작이 소문이 아니라 사실로 드러난 적이 있었지요. 2001년에 마침내 출판협회가 출판사 두 곳을 협회에서 제명하는 초강수를 사용했습니다. 대중문학 작가를 자처한 소설가 이용범은 자신의 소설 『열한번째 사과나무』가 사재기한 책이라는 협회의 주장에 직면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중소설은 영웅주의, 감상주의, 오락성, 현실도피성과 같은 속성을 갖는다. (…) 대개 엘리트 집단은 대중문학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고, 타락한 작가들이나 쓰는 소설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선은 이미 지워져가고 있다. 요즘 문예지에 발표되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스토리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멜로드라마이거나 비현실적인 변설과 가벼운 농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소설에는 아무런 감동도 없으며, 겉멋과 치기만이 '문체'라는 포장지에 가려 있을 뿐이다. (…) 상업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비평가들이다. 그들은 특별한 보수 없이도 출판사나 잡지사에 전속되어 상업적 이익에 봉사한다. (…) 본격문학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문학 엘리트들이 내동댕이친 대중문학이라는 가시관을 기꺼이 내 머리 위에 얹을 것이다. 나는 비평가들을 향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을 향해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이용범은 너무나 당당하게,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에는 대중문학을 향해 비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뼈에 사무친 항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여 무조건 그 문학이 훌륭하다는 그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다음 절에서 대중문학론자와 순수문학론자의 입장이 어떻게 다른지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제7강좌 : 대중문학은 신문연재소설에서 시작되었는가?
김동인이 일찍이 대중소설을 가리켜 "유치한 통속소설"이라고 한 것은 단편소설만이 형식상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통속소설을 대표하는 것은 그 자신도 많이 썼던 신문연재소설입니다. 신문연재소설은 상업주의 경향이 농후해 비판적 통찰력과 반성적 사유를 결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소설은 약간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신문연재소설은 대중의 공감대와 밀착되어 있는 한편 그 시대 그 사회의 주요 관심사를 다룹니다. 신문연재소설 중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문학사의 신기원을 이룬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은 <매일신보>에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연재되었던 소설입니다. 1920년대 최독견의 『승방비곡』(조선일보), 1930년대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동아일보), 김말봉의 『찔레꽃』(조선일보)도 신문의 판매 부수를 올리는 데 큰 공헌을 한, 당시 인기가 대단했던 연재소설입니다.
소설 『자유부인』은 1956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이 영화는 해방 후 멜로드라마로서는 최초로 큰 선풍을 일으킨 작품이었다 1950년대에는 김내성의 『청춘극장』(한국일보)이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소설은 애정의 삼각구도라는 정공법 외에, 등장인물이 사랑의 본질과 의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려 청춘 남녀의 연애관을 정립하는 데 일조한 작품입니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서울신문)은 대학교수 부인이 춤바람이 나서 젊은 대학생과 놀아난다는 줄거리입니다. 지금으로서야 진부한 소재에 유치한 내용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세태풍자소설이었습니다. 서울대 황산덕 교수가 대학신문을 통해 작가에게 "신성한 대학교수를 모욕하지 말라"고 공격하면서 논쟁이 붙어 엄청난 파문이 일어났고, 그 덕에 소설집이 나왔을 때는 순식간에 몇만 부가 나가 그해 최고의 베스트 셀러 소설이 되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부부간의 갈등을 주로 성문제를 통해 묘파한 손창섭의 『부부』(동아일보)와 타락한 세태를 풍자적으로 그린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동아일보)가 신문의 지가를 올린 소설입니다. 1970년대 신문연재소설의 대표작은 뭐니뭐니 해도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조선일보)입니다. 주인공 경아는 비록 몸은 더럽혀졌지만 따뜻한 마음과 밝은 천성의 소유자입니다. 산업화와 과정에서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 편집증적인 이중인격자, 폭력을 행사하는 건달, 무위도식자 등의 남자에게 휘둘리는 주인공은 많은 여성 독자의 공감을 샀습니다. 영화 「별들의 고향」(1974년 제작)은 최인호의 조선일보 연재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감독 이장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조해일의 『겨울여자』(중앙일보)는 여주인공이 여러 남자를 거치는 점에서는 최인호의 소설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 남자들을 구원해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납니다. '더럽혀진 몸'과 '고결한 영혼'이라는 호스테스 소설의 정석을 제시한 작품이지요. 박범신의 『불의 나라』(동아일보)는 촌놈이 서울에 와 출세도 하고 연상의 여인과의 사랑도 이룬다는 진부한 내용이지만 문장의 속도감이 뛰어나 많이 읽혔습니다.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황석영의 『장길산』은 민중사관에 입각해 씌어진 소설로, 이전의 궁중야사와는 격을 달리한 역사소설입니다.
신문연재소설이 대중성을 획득하게 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당대 사회의 이슈로 부각된 문제들을 소재로 삼아 이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덕분이었습니다. 독자의 반응을 즉각 반영할 수 있었고, 독자에게 환상과 위안을 전달했습니다. 매일 아침 집에서 보고 학교나 직장으로 가기 때문에 신문지상의 소설은 늘 화제를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우리 사회의 실상을 반영하기도 했지요. 1980년대에는 신문연재소설이 인기리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나오고,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리고 나서 영화화되는 공식이 깨어집니다. 박완서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세태 묘사와 심리 탐구에 이산가족의 문제를 결부시킨 무거운 주제의 작품이었음에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김성동의 『만다라』,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도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구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고뇌를 다룬 작품이었음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산업화가 본 궤도에 오른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부각시킨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외에, 한수산의 『부초』, 김홍신의 『인간시장』도 어떤 집단의 비리나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일정 부분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1990년대 대중소설은 앞에서 다루었으므로 생략합니다. 대중문학을 향해 욕을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역기능을 말합니다. 대중의 통속적인 취향과 오락성에 영합한 작품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자본과 결탁한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상품이기 때문에 지배 이데올로기에 무감각한 허위의식을 유포한다고 주장합니다. 대중소설이 문화의 현실 비판적인 기능을 박탈한다는 이유로 폄하하기도 합니다.
대중문학은 상당수 비현실적입니다. 황당무계하지 않으면 혹세무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출세나 부의 축적, 또는 폭력·연애·모험 등이 문학작품 속에서 가능한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설 속에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주인공과 동일시를 느끼며, 현실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대중문학은 독자로 하여금 자기만족과 센티멘털리즘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즉, 책을 일단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분노할 수 있는 위안의 대상이 됩니다. 게다가 대중문학은 쾌락 내지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무력한 개인은 재미를 느끼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대중문학은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움을 끊임없이 모색합니다. 그래서 실제적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며, 현실 도피적인 오락의 기능을 다하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허구적 상황과 실제상황을 혼동하게 하여 현실의식을 무디게 합니다. 이런 식으로 대중문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들어 본격문학을 옹호합니다. 본격문학은 형식상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고, 사회적·도덕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비판적 통찰력을 키워주고 반성적 사유를 하게끔 유도한다는 것도 본격문학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대중문학 옹호론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중문학은 대중의 관심사를 신속하게 파악하여 효과적으로 반응하는 생산성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대중들에게 순간적인 환상의 쾌락을 제공하며, 절대적 신성성에 대항하여 완전한 개인성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본격문학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며, 문학의 타락은 대중을 평가절하하기 때문에 초래된다고 항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이런 식으로 2분법적 구분을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재미(오락성)와 교훈(작품성) 두 가지를 다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이 서로 적대적인 자리에 서 비난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대중의 공감대에 밀착하면서도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 앞장서는 문학을 이 땅의 문학인은 모색해야 합니다. 문학이 오로지 재미 추구에만 나서 비판적 통찰력을 기르지 못하게 하거나 반성적 사유를 하게끔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작품'이 아니라 '상품'일 따름입니다. 수준 높은 대중문학이 나오지 않으면 순수와 참여, 혹은 순수와 상업주의로 나누는 2분법적인 편가름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정통문학과 대중문학의 나눔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옛날에 그런 이분법을 지양하고자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시인의 소원은 가르치는 일, 또는 쾌락을 주는 일, 또는 그 둘을 아울러 하는 일"이라고 말했듯이 문학은 원래 재미(오락성)와 교훈(작품성) 모두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도시화를 통해 이룩된 근대사회는 대중매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대량 생산, 대량 전달, 대량 소비의 체제로 들어가게 됨에 따라 예술의 오락적 기능이 강화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대중예술이 문화의 대량화에 힘입어 대중적인 예술 장르가 발달하였고 문학도 거기에 따르는 추세이지요. 작품성과 상업성 두 가지를 아울러 갖춘 작품을 쓰고자 하는 마음은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다 갖고 있을 것입니다.
제8강좌 : 정보화 사회에서의 문학의 운명은?
현대를 흔히 '정보전쟁의 시대'라고 합니다. 남들이 다 아는 정보를 모르면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컴맹이 발붙일 데가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정보통이 곧 만능박사입니까? 많은 정보를 갖는다는 것은 많이 안다는 뜻인데, 이것은 지식의 차원이지 지혜의 차원은 아닙니다. 아는 것이 많다는 것과 인간의 됨됨이, 즉 인격과는 정비례하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정보에 대해서 갈증을 갖는 것만큼 그 많은 정보 중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판별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갈증을 느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갈려집니다. 자연과학에 대한 우리의 무한한 신뢰는 인문과학을 더더욱 하찮은 것으로 취급케 합니다. 대학의 교양과정 커리큘럼에 실용적인 학문이 대거 들어와 인문과학 과목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학부제 실시 후 취업에 도움이 되는 영문학과에 학생들이 대거 몰려듦으로써 독문학과와 불문학과는 존폐의 기로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철학과며 사학과 교수도 학생 수가 줄어들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기초학문의 토대 위에 실용학문이 있을 텐데 오늘날에는 너나할것없이 실용학문만 배우려 듭니다. 모든 학생이 사회에 나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공부만 한다면 대학이 학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문학은 그래서 미래사회에서도 그 생명력이 유지될 것입니다. 컴퓨터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려는 학생일수록 양서와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창의력을 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이 세계를 석권하게 된 것은 그들이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에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활자매체와 영상매체가 상호 배타적인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사 읽던 사람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비디오를 빌려 보게 되었으니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방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상호 보족(補足)의 관계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영상문화가 발달해도 활자의 고유 영역을 몽땅 차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진짜 컴맹은 컴퓨터의 기능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밖에 모르는 사람임을 지칭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컴퓨터는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기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기계가 사람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는데도 우리는 기계를 너무 많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지혜 없는 지식은 오히려 해악일 수 있지요.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컴퓨터는 정보의 검색·축적·관리·전달에 필요한 대단히 편리한 기계이기에 무시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학은 인간이 깊게 사고하고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 필요하며, 감동을 느끼게 하고 상상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문학을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인류의 미래가 밝아질 턱이 없습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가 무엇을 건져내어 써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 정보는 무용지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를 선별할 줄 아는 '나의 철학'입니다.
정보화 시대에도 문학은 분명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문인은 좁아진 영토에서나마 문명을 비판할 것이며, 자신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 보여줄 것이며, 생명체의 존귀함을 노래할 것이며, 전통문화의 잔영(殘影)을 자랑할 것이며, 신화가 숨쉬는 시원(始原)의 세계로 회귀하자고 권유할 것입니다. 더 새로운 유형의 작품이 나와 독자들을 경악케 할 것이고, 현대인의 심금을 울리는 서정시 또한 다양한 양상으로 읊조려질 것입니다. 아픈 영혼들의 신음소리가 문학의 세계를 이룰 것입니다. 그가 참된 문인이라면 이런저런 외부 상황의 변화 때문에 붓을 꺾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문인은 자본주의의 논리와 무관하게 고매한(사실은 고지식한) 정신세계에서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는 순간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고 고치는 운명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까. 첨단 과학문명이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를 약속할지언정 정신의 풍요까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문학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제9강좌 : 문학의 미래는, 혹은 책의 미래는?
오늘날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이며 다원주의의 시대입니다. 80년대의 대학생들은 정치현실과 노동문제, 분단문제, 지식인의 책무 등으로 고민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취업문제가 가장 큰 고민거리이고, 대중음악·영화·인터넷·스포츠·기철학 등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영어 공부에 여념이 없습니다. 한편 아이들은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통해 말을 배웁니다. 사람들의 행동·말투·사고방식·생활양식을 거의 텔레비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을 보니 대학생이 이렇게 말한 것이 기사화가 되었더군요. "오리가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어미라고 여기듯이 우리 세대는 텔레비전을 엄마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 신문기사의 제목은 '우리 시대 신드롬―영상 문화 열풍'이었고, "지루하고 딱딱해서 읽는 게 싫다. 오직 비디오뿐"이라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몇 년 전이었습니다. 쌍용건설이란 회사에서 젊은 사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은 한 달에 책을 몇 권 읽고 비디오는 몇 편 빌려봅니까? 책의 권수는 0.4권이고 비디오 편수는 4편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월간조선』 같은 시사잡지를 읽는 사람도 1권이라고 썼을 것이고, 베스트셀러 1권을 읽은 사람도 1권이라고 썼을 것입니다. 비디오 가게에 간 회수를 빌려본 편수로 쓴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연평균 책 4.8권과 비디오 영화 48편은 더욱 차가 벌어져야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연중 독서량이 적은 것은 문화의 역량을 자꾸만 위축되게 합니다.
한편, 영상은 걸러지지 않은 정보를 쏟아붓고, 사람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정보의 대부분을 영상에서 얻고 있는 요즘 세대가 즉흥적·감각적·비논리적인 것은 상당 부분 영상 매체의 영향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명작 장편소설을 독파하려면 일정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즉 여러 날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야 하는데 이런 고립을 감수할 신세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동네 비디오 가게가 상상의 세계(허구의 세계)에 대한 나의 욕구를 적절히 해결해주고 있고, 이제는 정말 정보전쟁의 시대라 재빨리 많이 듣고 보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판국입니다.
책의 미래는 전자북(e-book)에게 좌우될 것 같습니까? 사실 전자북이 나타났을 때는 출판사마다 머지않아 문을 닫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것이 기우였다고 판명되었지요? 책은 고유의 영역을 계속 유지하는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디스크 북과 스크린 북이 종이책과 더불어 공존하게 된 시대가 온 것입니다. 디스크 북과 스크린 북이 어떤 것인지 알아볼까요? 디스크 북이란 CD롬을 한 장 사오면 그것이 곧 책의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즉 책 대신에 필요한 것은 컴팩트 디스크, 메모리 카드, 메모리 칩, 집적회로(IC)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게 되면 활자를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음성을 듣고 동영상을 보면서 문학작품을 감상하게 됩니다. 간혹 우리가 텔레비전 '문학의 세계' 같은 프로를 보면 성우가 시를 읽어주고 화면에는 그 시에 맞는 장면이 펼쳐지고 화면 하단에는 시가 활자로 적히지요. 바로 그것처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문학이 디스크 북입니다. 디스크 북의 효시는 1987년에 나온 마이크 조이스의 『오후』입니다. 그 작품은 무가지였죠. 이것이 1994년에 나온 스튜어트 멀드롭의 『빅토리 가든』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작품은 출발점이 47개로, 194개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연결될 수 있고, 최소한 47개의 다른 내용을 가진 소설을 하나로 묶어 디스크에 담은 것입니다. 복합 줄거리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소설은 독자의 환영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디스크 북은 문학작품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형태였고, 어학사전·지리부도·백과사전에 어울렸습니다.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재작년부터인가 책으로는 찍어내지 않고 CD롬으로만 개정판을 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만약 디스크 북 세상이 온다면 전산사식업소는 CD롬 제작업소로, 제지회사는 디스크 제작업소로, 인쇄소는 디스크 프레스 회사로, 제책회사는 포장회사로 업종 변경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이 과연 올까요? 스크린 북은 우리말로 바꾸면 데이터베이스 책 내지는 모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C만 갖고서 모뎀을 통해 받는 데이터베이스 형태의 책을 말하니까 오늘날 널리 읽혀지고 논의도 활발한 PC통신문학이 바로 스크린 북을 통한 것이지요. 이제는 컴퓨터 통신망에 무료로 자기 소설을 올려(upload) 독자와 화면에서 1:1로 만나는 행위가 일반화되었습니다. PC통신문학이 발달한 사이버문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제10강좌 : 문자 문학에서 사이버 문학으로
지금은 21세기입니다. 20세기가 후기산업사회였다면 지금은 정보화사회입니다. 20세기가 대중소비사회였다면 지금은 사이버사회입니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고 팔고 은행업무가 이루어집니다. 우편업무와 병원업무까지 인터넷이 일부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말에 한창 유행한 PC통신문학이 지금은 사이버문학으로 발전해 있습니다. 사이버펑크(cyberpunk)는 정보기술에 지배되는 사회에서의 문학과 영화를 말합니다. 오늘날 널리 읽히는 환타지소설이라는 것도 사이버펑크의 일종이지요.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가상공간)는 가상현실(cyber-reality)의 무대로서, 네트워크를 통해 구현되는 조직적인 정보사회를 가리키는 신조어입니다.
가상현실이 나오는 최초의 소설은 흔히 미국 윌리엄 깁슨이 1984년에 발표한 소설 『Neuromancer』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걸리버 여행기』야말로 가상현실을 다룬 소설이 아닙니까. 하지만 오늘날 말하는 가상현실은 전자기술에 의한 3차원적인 영상·음향으로, 어떤 가상을 마치 실제의 세계처럼 경험케 하는 현실이지요. 현실세계에서 보면 가상의 공간이지만 그 속에서는 생생한 현실이 바로 가상현실입니다.
우리 나라 PC통신문학의 초기를 수놓은 작품으로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복거일의 「파란 달 아래」, 한수산의 「먼, 그날 같은 오늘」, 주인석의 「미래를 위하여」, 이순원의 「에덴에 그를 보낸다」, 박상우의 「라몽시」는 정통문학권의 작가가 통신상에 연재한 소설입니다. 아마추어 작가들이 써 수많은 독자를 컴퓨터 앞에 앉게 한 작품으로 이우혁의 「퇴마록」, 김성수의 「환웅의 날-환제국혁명사」, 김용남의 「사과전쟁」, 이성수의 「바이러스 임진왜란」, 박희권의 「서울대의 찌꺼기」, 김형진의 「컴퓨터 계엄령」, 조신호의 「사랑의 꽃동네」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 중 일부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이우혁의 「퇴마록」은 통신상에 인기리에 연재된 작품인데 출판사 몇 군데서 퇴짜를 놓아 어렵게 책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걸, 책으로도 아주 많이 팔렸지요. 사이버문학 세계에서는 등단 절차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울러 출판 절차라는 것도 없습니다. 통신망에 작품을 올리면 곧바로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작가와 독자의 구분이 모호해져서 수준 미달의 작품이 양산될 우려가 있습니다.
사이버문학은 실시간(real time)과 쌍방향으로 존재하며, 대부분 연재의 형식을 취합니다. 그래서 재미가 없으면 독자가 조회를 하지 않지요. 작자는 독자의 반응을 즉시 알 수 있으므로 독자를 계속 의식하게 되는 것도 사이버문학의 특징입니다. 사이버문학이 등장함으로써 독자가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문학행위의 주체가 되었고, 이렇게 되자 독자수용이론이 뒤집어졌습니다. 텍스트가 끊임없이 고쳐지는 열린 공간이 되어 텍스트의 완결성이 부정된 시대가 왔습니다. '원본'이니 '초고'니 하는 개념이 사라짐으로써 후기구조주의이론도 뒤집어졌습니다. 사이버문학의 또 다른 특징은 치밀한 묘사가 아닌 줄거리 위주로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짧고 감각적인 문체가 개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소재는 흥미롭고 자극적이며 충격적인 것이, 주제는 보다 가벼운 것이 선택될 공산이 큽니다. 사이버문학이 유행하면 할수록 인간의 내면세계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보다는 공상과학소설·환타지소설·추리소설·연애소설 등이 주종을 이루게 됩니다. 사이버문학이 지나치게 외설스럽거나 폭력 일변도로 전개되면 무슨 윤리위원회 같은 데서 경고 조치를 하고 물리적인 제재(制裁)도 가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검열기제가 확실히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재를 받더라도 법적인 처벌은 거의 받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ID를 새로 만들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사용하여 또 쓰면 그만입니다. 작자가 독자의 욕설과 인신공격 등 공격성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도 사이버문학의 한 특징입니다. 사이버문학은 또 익명성이 보장되므로 철저히 주체의 욕망에 의해 지배됩니다. 통신상에서 우리는 직업·연령·성별에 구분 없이 아무개 님이란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기 때문이지요. 사이버문학의 단점은 자유로운 수정이 가능해짐으로써 글을 쓴다는 성취감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몰개성적이며 내용 없는 글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개인의식이 특화되고 자아도취의 문화가 부각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집단의식의 부재로 나와 통신상의 상대방만 존재하지 나와 가족, 나와 우리 이웃, 나와 이 사회, 나와 종교단체 등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우려도 있습니다. 아무튼 21세기에는 사이버문학이 활자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문학과 함께 공존할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이비문학의 수준이 점점 높아질 것도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보론 : 문학과 영화는 동질성이 있는가?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고 사물을 모방하는 것처럼 영화도 현실의 재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예사조사 가운데 사실주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경향인데 영화도 현실에 기반을 두고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화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사실주의입니다. 문학과 영화가 어떤 만남을 이룩해왔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미국 최초의 장편영화인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은 영국의 사실주의 작가 찰스 디킨즈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피스는 몽타주 기법을 최초로 구사한 영화감독 아이젠스타인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이젠스타인의 대표작이 「전함 포템킨」인 것, 다들 알고 계시죠? 예전에는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어떻게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냐는 것이지요. 문학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뒤틀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기법을 동원해 변형, 재구성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사람이 많았던 탓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자 인도에서는 영화를 드르시아 카비아(Drsya Kavya), 즉 "눈에 보이는 시"라고 했습니다. 리치토 카누도 같은 사람은 영화를 공간예술(조각, 건축, 회화)과 시간예술(음악, 무용, 문학)을 종합한 제7예술이라고 했습니다. 영화를 시각예술이나 종합예술로 보려는 노력이 낳은 정의가 아닌가 합니다. 마침내 아스트뤽이란 영화학자가 『카메라 만년필론』에서 영화감독도 시인이나 소설가처럼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카메라가 펜처럼 현실을 뒤틀고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던 거지요. 인생의 희로애락을 시는 짧은 시행 속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소설은 언어로 설명하고(스토리 텔링), 영화는 영상으로 표현합니다. 예술영화나 문예영화는 시적 영상을 담지 않던가요. 시적인 영화를 꼽아보자면 장 콕토의「시인의 피」「오르페」「오르페의 유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거울」「향수」「희생」같은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타르코프스키 같은 감독은 영상시인이지요. 그가 만든 「희생」의 그 유명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세워진 집, 그 곁에 죽은 나무의 생성과 비밀, 물의 친화력을 암시하는 바닷가 배경……. 기독교적인 희생의 정신을 통해 인류의 미래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구원의 희망을 암시한 시적인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기법이 문학에 전이된 예도 적지 않습니다. T.S. 엘리엇의 「J.A. 프루프록의 연가」는 병행몽타주, 원근법 등의 화면 구성을 해서 시각적 효과를 높였습니다. 이인성은 소설 속에서 오버랩과 시간의 비약을, 유하는 시에는 편집효과를 적절히 응용해 썼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장 콕토, 「마지막 황제」를 만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오이디푸스」를 만든 P. 파울로 파졸리니는 모두 시인이었습니다. 시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는 「일 포스티노」(파블로 네루다), 「그라나다에서의 죽음」(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토탈 이클립스」(랭보와 베를렌느), 「금홍아 금홍아」(이상) 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기억됩니다. 마이클 레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1994)는 망명지의 파블로 네루다 시인에게 편지를 배달해주는 우체부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엮어 만든 작품이다. 우리 문학도 영화와의 만남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소설 속에 영화를 끌어들이거나 소설가의 영상체험 자체를 갖고 소설을 쓰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최성각은 엽편소설집 『택시 드라이버』에서 영상 체험이나 영화 이야기를 소설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방법을 썼습니다. 조성기는 「피아노, 그 어둡고 투명한」에서 영화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작중화자의 이야기를 넣는 방식을 썼습니다. 소설로 쓴 영화 관람기라고 할까요 영화평론이라고 할까요. 김경욱은 『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에서 「시네마 천국」 「택시 드라이버」 「지존무상」 같은 영화의 주제, 또는 그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의 제목을 따와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우리 영화사의 수작들 가운데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것은 부지기수입니다. 유현목의 「오발탄」은 이범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주요섭), 「독 짓는 늙은이」(황순원), 「까치소리」(김동리), 「갯마을」(이범선) 등이 언뜻 생각납니다.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을 이장호 감독이, 조해일의 『겨울 여자』를 김호선 감독이 만들었는데, 소설은 베스트셀러였고 영화도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우리 소설 중 영화로 만들어진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괄호 속 앞의 것은 작가 이름, 뒤의 것은 감독 이름입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장정일/장선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구효서 『낯선 여름』/홍상수)
『경마장 가는 길』(하일지/장선우)
『비상구가 없다』(이순원『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압구정동에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김영빈)
『깊은 슬픔』(신경숙/곽지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오병철)
『우묵배미의 사랑』(박영한/장선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문열/박종원)
『하얀 전쟁』(안정효/정지영)
『삼포 가는 길』(황석영/이만희)
『꽃잎』(최윤/장선우)
『그들도 우리처럼』(최인석 『새떼』/박광수)
『서편제』(이청준 「소리의 빛 1, 2」/임권택)
『축제』(이청준/임권택)
『화엄경』(고은/장선우)
『유리』(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양윤호)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안정효/정지영)
『만다라』(김성동/임권택)
『남부군』(이태/정지영)
『깊고 푸른 밤』(최인호/배창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제하/이장호)
유명 감독의 대표작 가운데 원작이 명작소설인 경우가 많지만 소설을 영화화한 것을 보는 것과 책을 보는 것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영상은 뇌리에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인간의식의 심층을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문학은 인식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주고, 영화는 감각에 호소하고 현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문학과 영화가 서로 배척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영역이 다르기는 하지만 공유하는 영역도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인데, 앞으로 영화적 기법을 이용한 시들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언젠가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가 대담에서 한 말이 기억납니다. "저는 활자문화의 종교성을 믿고 있습니다. 활자문화가 경시되고 있기 때문에 충무로 영화가 안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상황에서는 좋은 시나리오가 안 나옵니다. 충무로 사람들은 시나리오를 문학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으로, 이게 장사되겠느냐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전혀 설득력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작품을 내놓게 되지요." 지당한 이야기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어느 시상식장에서 "지금 영화를 하는 후학들에게 해줄 말이 없냐"는 질문을 받자 "책을 많이 보세요"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시를 영상으로 옮기는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두레문학(ISSN) 원문보기 글쓴이: 혜관 이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