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흑살마녀(黑煞魔女)의 정체
자욱한 안개가 숭산을 휘어 감는다.
계절은 이미 가을 깊숙이 접어들고 있었다.
만산홍엽(滿山紅葉).
산은 산이 아니라, 백만대군(百萬大軍)이 피 흘리며 넘어져 있는 피비린
내 나는 전장(戰場)처럼 처절히 버티어 있었다.
자욱한 안개 속으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시각은, 승려들
이 저녁 공과를 드리는 그 시각이었다.
데엥- 데엥-!
급박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소림본사(少林本寺)와 하원(下院)에 기거하
는 모든 승려들의 귀를 쫑긋 세우게 했다.
"이 소리는……?"
"모를 일이야. 삼백 년 간 울려 퍼지지 않았던 범천항마종(梵天降魔鐘)이
울리다니……."
승려들의 얼굴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범천항마종!
젊은 승려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한다.
범천항마종은 녹옥불장(綠玉佛杖)과 더불어 소림사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
고 있는 것으로, 소림사에 존망의 위기가 일어날 때마다 타종되는 것이
다.
삼백 년 전, 수라혈교(修羅血敎)가 소림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삼천(三千)
마인(魔人)을 이끌고 소림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을 포위하였을 때, 그
종이 울려 퍼졌었다.
당시 소림사 지하 백 장 되는 장소에서 연공하고 있던 천자배(天字拜) 오
백나한(五百羅漢)이 육십 년의 폐관을 깨고 나왔으며, 그로부터 열이틀
낮 열이틀 밤에 걸친 대접전이 벌어졌었다.
결국 수라혈교는 오백나한진을 돌파하지 못한 채 패주하고 말았으며, 그
덕에 마도계에서의 모든 지지기반을 잃고 몰락하게 되었다.
오백 년 전에도 그러한 일이 벌어진 바 있다.
당시 마도무림을 석권하였던 일월마방(日月魔幇)의 방주가 오악성마검(五
嶽聖魔劍)을 쳐들고 칠백 명의 마도고수를 이끌고 소림사에 와 소림사가
일월마방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며 당시 방장스님이던 법운선사(法雲禪
師)의 선실을 포위한 바 있다.
법운선사는 그들을 말로 설복하고자 노력하였으되 그들은 도리어 법운선
사를 제압하고자 하였으며, 법운선사는 견디다 못한 나머지 범천항마종을
친 바 있다.
그리고 이틀도 안 되어 일월마방은 무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범천항마종은 이제까지 세 차례 울렸으며, 그 때마다 소림의 신위는 높아
져 갔다.
구백 년 전 남천열화궁(南天熱火宮)의 침입에서, 오백 년 전 일월마방의
침입, 그리고 삼백 년 전의 수라혈교의 침입 때에 울렸던 범천항마종이
울리다니…….
뎅- 뎅- 뎅-!
요란히 울려 퍼지는 범천항마종 소리 가운데 장로(長老)급 이상의 지위에
있는 고승들은 낡은 가사자락을 펄럭거리며 대웅보전 뒤쪽의 방장실(方
丈室)로 모여들었다.
선사의 주지승이 방장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방의 너비가 가로 일 장, 세
로 일 장에 달하는 방장(方丈)의 방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주지승은 방장이라 불리는 것이다.
즙기가 별로 없는 방장실.
소림사를 이끌고 있는 원로 승려들이 장문인을 중심으로 하여 빙 둘러
모여 있었다.
소림 장문인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나무갑 하나를 쳐들어 보였다.
"아미타불… 세속 무림계에 사마외도의 세력이 창궐한다는 소리를 들었
으되, 마도의 입김이 소림사에까지 미치게 될 줄이야……."
그는 격노하고 있었다. 소림사의 힘이 사라졌다고 하되, 소림사의 이상
가는 권위를 지닌 방파는 없다.
관산검맹도 그러하고 연환마교도 그러하다. 그들이 정사 무림을 장악하고
있을지언정, 오랜 전통으로 이룩된 강호 무림계에 있어 소림사 이상 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지는 못하는 것이다.
거대한 무림세력이라 하더라도 백 년 이상을 가지 못하고 붕괴되는 것이
무림계의 실정이되, 소림사는 굳강한 율법 아래 누천 년을 버텨 왔다.
그러하기에, 누구도 감히 소림사를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이다.
한데, 오늘 누군가 소림사에 정면으로 도전을 한 것이다.
대체 누가……?
많은 승려들이 모여 있으되, 방 안에는 침묵이 흐를 뿐이다.
"사실, 사흘 전에 한 장의 밀지를 받은 바 있소. 밀지 안의 내용이 황당
무계한 것이라 일소에 붙이고 말았던 것이오. 그런데 그것이 현실화될 줄
이야."
장문인은 착잡한 어조로 말하며 나무 상자 위에 놓여 있는 핏빛 배첩(拜
帖)을 쳐들었다.
배첩은 수좌승(首座僧)에게 전하였으며, 수좌승은 목청을 가다듬고 배첩
안의 글을 원로승에게 읽어 주었다.
"귀사(貴寺)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강호계의 거목(巨木)으로 군림해 왔소.
그러하니, 이제 강호제일지(江湖第一地)라는 이름을 내놓을 때가 되지 않
았는지……."
"아미타불… 방자하도다!"
"대체 어떠한 자가……!"
도처에서 흥분한 숨결이 치솟아 오른다.
어지간한 일로는 흥분하지 않는 고승들이되, 소림사의 명예에 먹칠을 하
고자 하는 자의 도발에 대해서는 비분강개하는 것이다.
수좌승은 좌중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글을 계속 읽어 내려갔
다.
"사흘 안에 봉파(封派)를 선언하고 이후 일백 년 간 강호계와 인연을 끊
는다고 맹세할 것이며, 장문영부인 녹옥불장(綠玉佛杖)을 본좌의 사자(使
者)에게 맡기기 바란다. 사자는 사흘 후 갈 것이며, 그를 정중히 마중하
고 녹옥불장을 맡기지 않는다면… 숭산은 피로 씻기워지리라. 나의 사자
는 무자비한 자. 녹옥불장을 가져오지 못하게 된다면, 소림사의 현판(縣
板)을 떼고 소림사의 승려들을 모조리 학살하리라!"
"기, 기가 막힌 말이로다."
"대체 누가 그런 광언(狂言)을 일삼는단 말인가?"
"아미타불… 현 무림이 말세로 치달아 가고 있다는 것은 아나, 이렇듯 오
만한 말을 지껄이는 자가 있다니……."
원로승들이 치를 떨 때, 수좌승은 배첩 말미에 적힌 인명을 읽었다.
"천마왕야(天魔王爺)!"
"천, 천마왕야?"
"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원로승들이 얼떨떨해할 때, 장문인은 합장을 한 채 탄식을 했다.
"아미타불… 천마왕야는 당세를 피로 적시는 패왕이며, 출신은 몽고(蒙
古)라 하오. 그리고 그의 무공은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어 누구도 그의
일 검을 막지 못하는 바, 더욱 무서운 인물은 그가 사자로 부리고 있는
흑살마녀(黑殺魔女)라는 인물이오!"
장문인은 그렇게 말하며 나무 상자를 열었다. 순간, 모든 승려들은 한 송
이 핏빛 우담화(優曇花)를 볼 수 있었다.
환상처럼 아름다운 꽃이다. 꽃술은 황금빛이며, 꽃잎은 크고 탐스럽다. 자
욱한 향기가 방장실을 뒤덮는 가운데, 기이한 마기(魔氣)가 치솟기 시작
했다.
"금, 금강명왕(金剛明王)과 더불어 나타난다는 우담화가 아닌가? 그런데
어이해 핏빛이란 말인가?"
"아미타불, 꽃을 보자 호법진공(護法眞功)이 흐트러진다. 우우……!"
"마, 마의 기운이 엄청나오. 우우, 어서 나한신공(羅漢神功)으로 몸을 보
호해야 하오."
원로승들은 핏빛 꽃에서 뿜어지는 가공한 마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얼
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찰나지간에 다섯 명의 노승이 구역질을 하며 휘청이기 시작하였으며, 내
공이 강하지 못한 학자승(學者僧)들은 마세를 이기지 못하고 아예 혼절해
버렸다.
핏빛 꽃송이에서 뿜어지는 마의 기운을 겨우 억제하는 사람은 장문인을
비롯해 일곱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장경각주(藏經閣主)인 법탑(法 ),
계율원주(戒律院主)인 천등선사(天燈禪師),
달마관주(達磨觀主)이며 십팔동인관문주(十八銅人門主)인 천우법사(天宇
法師),
마애사불(磨崖四佛)이라 불리우는 네 명의 등자배(燈字拜) 고승들.
그들을 제외한 모든 승려는 핏빛 꽃송이에서 뿜어지는 악마의 기운을 이
기지 못하고, 사색이 되며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장문인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핏빛 꽃송이를 상자에 담았다.
이어 그는 하나의 쇠구슬을 꺼내 좌중에게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생명화(生命花)라는 악마의 꽃과 더불어 보내어진 것이오."
장문인이 보여 주는 쇠구슬은 지극히 무겁고 단단했다.
한데, 신기하게도 매끄러운 표면에 또렷한 지인(指印)이 새기어진 것이
아닌가?
"만년한철(萬年寒鐵)과 설화오금(雪花烏金 : 오금(烏金)이란 철(鐵)의 다
른 이름)의 합금(合金). 아미타불… 노납이 보기에 우리들 가운데 이 구
슬에 흔적을 남길 사람은 없을 것이오. 노납이 한 번 시험을 해 보겠소.
노납은 소림칠십이종절기 가운데 하나인 항마금인지(降魔金印指)를 시전
해 보겠소!"
장문인은 옷소매를 걷어붙인 다음에 쇠구슬에 내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팔뚝 부위까지 금빛으로 달아올랐다.
항마금인지는 금옥(金玉)을 바수어 버리는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일 갑자의 연공이 필요하다.
쇠구슬은 장문인의 손바닥에 꽈악 쥐어졌으며, 좌중은 강한 강기가 일어
나는 것을 느꼈다.
장문인이 지금 발휘하는 힘은 가히 삼만 관(三萬貫)의 거석(巨石)을 오
장 밖으로 퉁길 수 있을 정도이다.
장문인은 일각 정도 내공을 주입하였으며, 그 가운데 그의 이마에는 땀방
울이 송글송글 맺히게 되었다.
"보시오!"
장문인은 천천히 손바닥을 폈다.
쇠구슬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쇠구슬에 패인 지인 또한 훼손
되지 않았다.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이 흔적을 지울 수 없을 것이오."
장문인은 쇠구슬을 자신의 사숙(師叔)이 되는 노승에게 전했다.
노승은 연화모니주공(蓮華牟尼珠功)을 발휘하여 쇠구슬을 파괴하고자 하
였으나, 허사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더 시험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침묵이 방장실을 휘어 감았다.
핏빛 배첩과 한 송이 악마의 꽃, 그리고 쇠구슬에 찍힌 지인이 좌중을 숨
막히게 하는 것이다.
"아미타불… 산사를 떠나신 창궁사숙조(蒼穹師叔組)께서 돌아오시거나,
칩거하고 계신 태상조(太上祖)께서 칩거를 깨고 나오시기 전까지는 우리
들의 힘으로 난국을 타개해야 하오. 녹옥불장을 줄 수도 없고 현판을 떼
어 줄 수도 없는 이상, 천마왕야의 사자를 막을 수밖에 없소!"
장문인은 녹옥으로 만든 불장을 쳐들었다.
불장에 걸린 금령(金玲)에서 영롱하고 신묘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순간부터 소림 전역을 나한호법진(羅漢護法陣)으로 봉쇄하겠소. 원로
승들은 젊은 제자들의 외부 출입을 금지하고, 호법승은 모조리 연무관에
서 나와 대웅보전을 지켜야 하오. 흑살마녀는 자시(子時)에 올 것이오. 흑
살마녀는 이제까지 천여 명의 강호고수를 척살한 자. 어쩌면 그 여인을
막지 못할지도……!"
장문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이다.
솔직히 그는 지난밤 백팔나한진을 이끄는 십팔철나한(十八鐵羅漢)을 은밀
히 파견하여 흑살마녀를 막고자 한 바 있다.
그들은 새벽에 돌아왔다. 그들은 마차에 태워져 돌아왔는 바, 중요한 것
은 그들의 수급(首級)이 목과 떨어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장문인은 원로승들이 흥분할 것을 염려하여 그 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이
미 소림사는 열여덟 고승의 목숨을 희생시킨 상황인 것이다.
"아미타불… 문제는 조사동(祖師洞)과 달마암(達魔庵) 외부로 나오시지
않으시는 태상조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하는 것이오."
장문인은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혼이 장막처럼 드리워지고 있다. 머지않아 밤이 깊어지리라.
"소림사가 그들을 막지 못한다면, 강호계의 대권은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
오!"
장문인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애제자 혜종(慧鐘)의 입심이 태상조를 설득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십팔나한이 죽어 돌아온 직후, 애제자 혜종선사를 달마암에 보낸 바
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소식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궁여지책으로 범천항마종을 울리게 한 것이다. 누워 잠든 거인,
소림사는 정말 오랜만에 소란한 밤을 맞이하는 것이다.
노승이 칩거하는 암자의 즙기래봤자, 찌그러진 공탁과 낡디낡은 포단(蒲
團) 방석이 고작이다.
묵궁법사의 거처 밖, 뜨락에서는 철관(鐵灌)이 달아오르고 있다.
철관은 다구(茶俱)의 하나이다.
아까부터 건강한 체격의 중년승려가 섬돌에 걸터앉아 탄식하고 있었다.
"차를 끓이라니… 끄응!"
인상을 잔뜩 찡그리는 승려는 소림사의 금강오승(金剛五僧) 가운데 수좌
승(首座僧)으로 꼽히고 있는 혜종선사였다.
그는 소림사의 후기지수(後起之秀) 가운데 최고로 불리우고 있는 인물이
다.
그는 장문인의 친서를 소지한 채 묵궁법사의 거처를 찾았으나, 반나절 내
내 묵궁법사의 심부름을 하느라 친서조차 아직 전하지 못했다.
안마를 해라!
책 떨어진 데를 꿰매라!
뜨락의 낙엽을 쓸어라!
묵궁법사는 혜종선사에게 동자승이나 하는 신부름을 거듭 시키기만 할
뿐이었으며, 일각 전에는 차를 끓이라는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태태상조(太太上祖)께서 이백 세 가까운 나이인 이상, 어찌 보면 이미
노망이 나셨을지도……."
혜종선사는 푸념을 했으며, 지붕이 기울어진 승방 안에서 호통 소리가 터
져 나왔다.
"이 녀석아! 물을 너무 끓이면 안 돼. 물은 삼불(三佛)로 끓여야 해. 삼불
이란 게의 눈알 같은 물방울이 세 번 떠오르는 걸 말한다. 끌끌, 선(禪)이
바로 다(茶)야. 다를 모르는 자는 땡추중 노릇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거
야."
까마귀 우는 듯한 목소리.
당금무림에서 가장 높은 배분에 있는 묵궁법사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차는 두 잔을 끓여 내야 한다. 한 잔은 노납이 마실 것이고, 또
한 잔은 네놈의 사숙조가 마실 차이다."
"사, 사숙조요?"
혜종선사는 귀가 번쩍 뜨이는 듯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에게 사숙조가 되는 사람은 소림사 내에 단 세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고불삼선(古佛三仙)이라 불리우며, 혜종은 그
들 세 명의 원로승을 오늘 아침에 만난 바 있다.
한데, 그들 가운데 하나가 묵궁법사가 있는 거처에 있단 말인가?
묵궁법사는 고불삼선이 어린 나이에 애늙은이 행세를 한다며, 얼굴을 보
지 않은 지 이미 오십 년째가 아니던가?
승방에서는 향내가 흐르기 마련이지만, 묵궁법사의 거처에서는 과일 향내
가 풍겼다.
묵궁법사는 주책스러운 자세로 앉아서 어린아이들처럼 능금을 먹고 있었
다.
"너무 시단 말야. 나이가 들수록 신 음식은 싫어하게 되지. 하지만 꽤 맛
이 좋은 편이야."
"하하… 전에 제가 있었던 난주(蘭州) 근처에는 푸른빛 포도가 나는 바,
그 맛이 꿀처럼 달지요. 기회가 있다면, 푸른 포도를 갖다 드리겠습니다."
"암, 암, 그래야지. 나이가 늙어지면 그저 먹는 게 최고란 말야.
"
승방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 왔다.
찻잔을 나무 쟁반에 받쳐 갖고 들어가던 혜종선사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언제 사람이 접어들었단 말인가?"
방 안에는 두 사람이 머물러 있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두 사람과 한 마리 노학(老鶴)이라 할 수 있었다.
묵궁법사는 포단에 앉아 있었으며 능금을 열심히 깨물어 먹고 있었고, 옷
자락에 과일 즙이 흥건히 묻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인상이 청수한 청년이 머물러 있는 바, 그의 옷가슴에 붙어
있는 백룡(白龍)의 수(繡)가 유난히 돋보였다.
'저 청년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 내가 모르는 사숙조의 제자일 지도
…….'
혜종은 조심조심 안으로 접어들었다.
그가 묵궁법사에게 절하고자 할 때.
"난 예절바른 놈을 싫어해. 예절바른 놈은 마음 속의 흑심을 숨기기 위해
겉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거든? 크크, 기왕 절을 하려거든 네놈의 사숙
조에게나 해라!"
"사숙조님은 어디에 계신지요, 태상조님?"
"네놈 바로 앞에 있지 않느냐?"
"흐윽?"
혜종선사는 기겁을 하며 청수한 인상의 흑포청년을 바라봤다.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절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크크… 절을 받아 두는 게 좋아. 어린 녀석들을 다룰 때에는 엄하게 다
루어야 한단 말이야. 노납이야 절을 너무나도 많이 받다 보니 지겨워서
절하는 것도 싫어하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네놈이야 언제 절을 받아 보겠
느냐?"
묵궁법사는 백태뿐인 눈에서 진물을 뚝뚝 흘리며 과일만 까먹었다.
'이 애송이가 나의 사숙조라니?'
혜종선사의 볼이 붉어졌다.
그는 금강관문(金剛關門)의 관주이며, 이천사백 젊은 승려들에게 나한십
팔수(羅漢十八手)와 달마삼검(達磨三劍)을 가르치는 무공교두의 지위에
있는 인물이다.
나이 어린 승려들은 소림사에 입사하기 위해 그에게 울며 간절히 부탁하
는 처지이며, 그러한 생활 탓에 그는 젊은이들에게 안하무인격으로 대하
는 타성이 붙은 것이다.
한데 세속의 나이로 본다면, 막내아들뻘에 불과한 청년에게 절을 해야 하
다니?
"절하란 말이다, 고약한 녀석!"
묵궁법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혜종선사는 엉거주춤해하다가 청년을 향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새파란 애송이가 배분만 높군. 자칫하다간 나를 아랫사람 취급할지 모르
니, 이 기회에 기를 죽여 놔야 한다.'
혜종선사는 겉보기 정중히 절을 하는 척하면서 소매에서 철수진기(鐵袖
眞氣)를 발휘했다.
소매섶이 너풀거리며 막대한 진기의 힘이 뿜어졌다.
그는 청년의 상반신을 뒤로 눕히어 그에게 자신의 내공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주고자 하는 마음을 품은 것이다.
"절은요? 핫핫! 전 속가제자(俗家弟子)에 불과하거늘……."
청년이 담담히 미소짓는다.
그는 구태여 절하는 것을 사양할 필요는 없다는 투였다. 그는 혜종선사가
절하는 걸 보며 여유자적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 이럴 수가? 아무런 반응도 없다니…….'
혜종선사는 십 성 내공으로 철수진기를 발휘하는 바,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시전하는 내공은 바다에 빠져든 진흙소 마냥 스르르 녹아 버리고
만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혜종선사는 엷은 표정을 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승방은 몹시 조용했다. 청년은 조용히 찻잔을 비웠으며, 묵궁법사는 주책
맞게도 후루룩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뜨거운 찻물을 식혀 먹었다.
한 시진 후, 묵궁법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난 늙었어. 이젠 자네가 맡아서 해야지."
"그럼 곧바로 난주로 가시렵니까?"
"헛허… 창궁(蒼穹)의 뼈가 뿌려진 곳에 가서 금강경(金剛經)이나 읊어
주어야지. 정말 오랜만에 사형제가 만나는데, 길이 너무 멀어 서둘러 가
도 며칠 걸리겠지. 중원의 혈사(血事)에 연연하여 옷자락에 피를 바르느
니… 헛허, 창궁 그 녀석의 뼈가 뿌려진 곳에 가서 불경을 암송하고 나서
창궁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하기 위해 천축에 가서 중원에 들어오지 않은
불경이나 찾아봐야지."
묵궁법사의 눈자위에 습막이 가득했다.
'대체 무슨 말을 나누시는 걸까? 설마, 이제까지 쭈욱 말을 나누어 왔단
말인가? 전음입밀(轉音入密)을 시전한다 하더라도, 입술이 달싹거리기 마
련인데…….'
혜종선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기공을 통해 목소리를 전하는 혜광심어(慧光心語)로서 말을 나누
셨단 말인가?'
전음입밀은 시전할 때 입술을 달싹거려야 하되, 불가의 전어법인 혜광심
어는 시전할 때 입술을 벌리지 않아도 되며 음식물을 먹으면서도 말을
전할 수 있다.
묵궁법사가 혜광심어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일리 있는 편이로되, 그
의 맞은 편에 있는 미청년마저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미타불… 흙으로 돌아갈 것은 흙이 되어야지. 산이 될 것은 산이 되
고, 바닷가 되어야 할 것은 바다가 되어야지. 그간 너무나도 오랫동안 산
사에 머물러 있었다. 이젠 바깥 바람을 쏘이고도 싶다. 솔직히 너의 무공
은 노납보다 두 단계 위의 경지에 도달했으니……."
"아닙니다. 전 미완성의 상태입니다."
"누구든 마찬가지야. 노납은 거의 백오십 년 간 불무학(佛武學)을 연구하
였으되, 최근 깨닫는 것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뿐이지. 헛헛헛, 세상
은 젊은이들의 것이지. 이제 네가 노납을 대신하여 무림의 정기를 수호하
는 호법이 되어야 한다."
묵궁법사는 그렇게 말하며 팔목에서 염주(念珠)를 끌렀다.
염주는 청년에게 전해졌다.
묵궁이 옷자락을 툭툭 털고 일어난다.
"노납은 난주로 가 보겠다. 그 염주는 노납의 신표인 철목묵주(鐵木墨珠).
그것을 보는 자, 너를 노납처럼 여길 것이다."
묵궁법사는 휘어이 휘어이 걸어 뜨락으로 나갔다.
혜종선사는 어안이 벙벙해하면서도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뜨락으로 따라
나갔다.
"가, 가시다니요!"
그가 통사정할 때, 묵궁법사는 키가 큰 단정학의 등 위로 올라탄다.
"길이 멀다. 난주까지 가 봐야 해. 노납이 내쫓은 창궁, 그 녀석의 고독한
영혼을 위로해 주어야만 해. 그 일은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할 일이야. 오
직 노납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난, 난주요?"
"헛헛헛… 경치가 좋으리라."
"이 곳 일은 어찌하시고?"
"괜찮아!"
묵궁법사는 그렇게 말하며 단정학과 더불어 검은 하늘로 떠올랐다.
새 울음소리가 길게 퍼지는 가운데, 묵궁법사의 모습은 한 점으로 화했
다.
"흑살마녀가 다가서거늘, 태상조께서 제자들을 버리고 떠나시다니."
혜종선사는 사색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때, 바로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흑살마녀가 왔소?"
청년은 어느 틈엔가 혜종선사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 그렇습니다. 오늘 밤, 소림사를 피로 씻는다며……!"
그가 더듬거릴 때, 청년의 눈에서 맑고 담담한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고월(孤月), 너의 야망은 이해한다. 그러나, 타인을 죽이며까지 너의 야
망을 이룩한다는 건 옳은 일이 아니야."
청년은 백무영이었다. 그는 새벽녘에 면벽굴에서 빠져 나왔으며, 이제까
지 쭈욱 묵궁법사와 더불어 지낸 것이다.
묵궁법사는 그에게 강호백도를 암중에 보호하라는 당부를 한 다음, 단정
학을 타고 난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나저나 흑살마녀가 누구인지 모르겠군. 고월은 본시 고독했던 녀석,
과거에는 단 한 명의 수하자(手下者)도 거느리지 않았는데……."
백무영은 추국(秋菊) 곁에 섰다.
추국의 이파리가 밤바람에 하늘거린다. 그는 문득 국화에 눈길을 던지며
어머니와 더불어 있다가 납치된 음월방을 생각했다.
'고월은 그녀를 좋아했지. 하지만 본시 성격이 냉혹한지라,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었지.'
그의 볼이 실룩거린다.
"어리석은 자, 하늘에 이르는 탑을 이룩하고자 하다니! 하긴 나도 얼마
전까지는 피의 길을 내어 한을 씻고자 하지 않았던가?"
그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혜종선사는 갑자기 숨이 막힘을 느꼈다.
'우우, 폐부 가득히 차오르는 웅휘로운 힘, 이 힘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혜종선사는 감히 제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두 걸음
을 물러났다.
그가 몸의 자세를 바로잡을 때, 백무영은 야풍(夜風)에 실리어 떠오르는
오동나무 잎 마냥 훌훌 떠올라 측백나무 숲 사이로 표표히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꿈이리라. 어이해 사람이 저리도 빠르게 사라져 갈 수 있단 말인가?"
혜종선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자시(子時)가 되며, 소림사 일대가 기이한 포효 소리에 휘말리기 시작했
다.
"크아아아……!"
저승의 수라악귀(修羅惡鬼)가 울부짖는 듯, 괴소가 울려 퍼지며 대웅보전
을 비롯한 모든 전각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범천항마종이 타종되던 종각(鐘閣)은 뿌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타종을 담당하던 현오선사(玄悟禪師)와 금강팔나한(金剛八羅漢)의 이마에
는 구슬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동심나한형(同心羅漢形)으로 격체합력(隔體合力)하라!"
현오선사는 계도(戒刀)를 흔들어 대며 불호령을 했다.
'자칫하다가는 천 년의 신종이 깨어진다.'
우르르르릉- 우릉-!
지진이 일어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대웅보전이 흔들리고, 종각이 뿌리째
뒤흔들렸다.
"크아아… 크아아아……!"
악귀가 울부짖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며, 공포스러운 부르짖음
소리 가운데 소림사 도처에서 혼절하는 승려들이 늘어났다.
포효 소리는 마음신후(魔吟神吼)라는 음공절학을 상회하는 천마혈후(天魔
血吼)이다.
천마혈후는 칠 갑자 이상의 마공을 지닌 자만이 토할 수 있는 음공절학
으로, 백도의 신공을 파괴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대웅보전 앞에는 백팔 명의 노선사가 동심원을 이룩하고 앉아 경문을 암
송하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천룡선창(天龍禪唱)이라는 불가음공절학을 시전하여 천마혈
후에 저항하는 중이다.
천룡선창의 소리가 고조되면 천마혈후 소리가 줄어든다.
천룡선창은 악의 힘을 멸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천마혈후 소리
는 천룡선창 소리에도 불구하고, 기세가 줄어들지 않았다.
흑살마녀는 오백 명의 혈포인(血袍人)과 더불어 들이닥쳤으며, 이미 다섯
개의 관문을 격파하며 대웅보전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가 울부짖는 천마혈후 가운데 호법나한진이 흔들렸으며, 그러한 가운
데 오백 명의 혈포무사가 난입하며 소림사를 피로 적시기 시작한 것이다.
천룡선창을 합창하는 노선사들은 소림사의 최후 보루라 할 수 있었다. 하
되 범천항마종과 천룡선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마혈후에 밀리어 점
점 그 위세가 줄어 가고 있었다.
"말세야."
장문인은 대웅보전 바로 아래 서 있었다.
그는 눈처럼 흰 승포 위에 황금빛 가사를 걸치고 있었으며, 자애스러운
눈길로 대웅보전에 걸리어 있는 현판(懸板)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현판에는 달빛이 금색의 깃털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현판의 글씨가 반짝거린다.
<소림대보찰(少林大寶刹)>
천 년 이상 누구도 조롱하지 못하였던 현판이다.
검을 멘 무사이든, 표행업에 종사하는 상인이든, 밭을 가는 농부이든, 화
복(華服)을 걸친 공자대부(公子大夫)이든, 소림사라는 권위만은 존중해 왔
었다.
한데 변황에서 준동하기 시작한 마도세력의 힘이 숭산 소실봉 중턱의 소
림사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 소림사의 제자들은 싸우다 죽을지언정 살수를 써서는 아니
된다는 율법이 원통스러울 뿐이다. 그러한 율법이 없다면, 동귀어진(同歸
於盡)마저 각오하며 싸울 것을……."
장문인은 소림사의 현판이 떼어지는 게 시간문제라 여기고 있었다.
일각 일각이 지날 때마다 관문이 격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며, 흑살
마녀와 동행자들이 대웅보전에서 일 마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입설전(立
雪殿)까지 다가섰다는 소식이 전해진 상황이다.
"대체 그 어떠한 힘이 소림사를 지켜 줄 것인가?"
장문인의 주름진 얼굴이 습기에 젖었다.
'태상조의 훈령이 철회되지 않는 한, 소림제자들은 착검하고 싸울 수 없
다. 아아, 태상조는 대체 어떠한 복안을 갖고 계시기에 사태를 방관하시
는 것인지…….'
그는 눈길을 현판에서 먼 산 쪽으로 돌렸다.
먼 곳에서는 불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있으며, 그 곳에서부터 천마혈후성
이 들려 오고 있었다.
천룡선창을 합창하는 노선사들은 진기가 탈진한 듯 휘청이기 시작했다.
어떠한 노승의 코와 입에서는 피가 주룩 흘러내렸으며, 대다수 승려들의
승포자락은 풍선처럼 팽팽히 부풀었다.
"관자재보살행심반야바라밀다(觀自在菩薩行心般若波羅密多)…!"
천룡선창의 합창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아 갔다.
노선사들의 몸에서는 더운 김이 푹푹 뿜어지기 시작한다.
노선사들의 몸뚱이가 말뚝이 땅으로 박혀들 듯, 한 치 한 치 땅 속으로
박히어 들기 시작했다.
장문인은 탄식하며 녹옥불장을 쳐들었다.
"더 이상 버티다간 모두 탈진해 죽는다. 아아, 천룡선창을 중지시켜야 한
다."
그가 녹옥불장을 흔들어 천룡선창을 중지시키고자 할 때, 노선사들은 눈
짓으로나마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하나 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장문인이 녹옥불장을 쳐들려 할 때.
"중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의 천룡선창에는 축(軸)이 하나 비었습
니다. 축은 중궁(中宮)과 홍문(洪門) 사이에 마련되어야 하며, 축이 제대
로 박히게 되면 선창의 위력이 배가되어 불멸성창(不滅聖唱)으로 화하게
됩니다. 천룡선창이 불멸성창으로 화한다면, 천마혈후 따위에 격파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이다.
장문인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사람 그림자는 찾아볼 수도 없
었다.
그가 어리둥절해 할 때, 갑자기 허공에서 한 송이 꽃이 날아 내렸다.
그것은 흰 국화였다.
"저 꽃송이는 어디에서……?"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얼떨떨해 할 때, 흰 꽃송이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
는 손에 의해 움직이듯이 느릿느릿 허공을 가로질렀다.
국화송이는 맑은 향기를 풍기며 백팔용호나한대진(百八龍虎羅漢大陣) 속
으로 파고들었다.
진세가 구축된 지점은 여러 겹의 강기에 의해 가로막히어 있어 맹호라
하더라도 다가서지 못하는 바, 꽃송이는 느릿느릿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쉽게 진세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오오, 허공접물(虛空接物)!"
장문인이 찬사를 발하며 저도 모르게 합장을 할 때, 흰 국화송이는 백팔
용호나한대진을 구축하는 수좌승의 등을 향해 다가갔다.
꽃송이는 명문혈(命門穴)에 가볍게 달라붙었으며, 순간 수좌승 공공(空空)
의 뇌리 속으로 벽력음(霹靂音)이 파고들었다.
"진기의 힘을 옥침관(玉枕關)을 향해 끌어올리십시오."
맑고도 힘있는 목소리이다.
공공선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대로 진기를 운용했다.
목소리는 혜공심어로 전해졌으며, 무상대능력(無常大能力)이 실리어 있기
에 타인의 심령을 제어하는 것이다.
공공선사가 진기를 옥침관으로 끌어올리는 찰나, 국화꽃에서부터 엄청난
열류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 힘은 공공선사의 진원진기와 합해졌으며, 일순 공공선사의 몸 뒤로 금
빛 배광(背光)이 치솟아 올랐다.
허공으로 금불영(金佛影)이 떠오르는 가운데, 공공선사의 몸 위치가 약간
이동했다.
그의 위치는 진세에서 중궁과 홍문 사이의 지점으로 이동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금광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사자후(獅子吼)가 중인을 압도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천룡선
창 소리의 위력이 배가되기 시작했다.
웅휘하고 맑은 목소리가 대웅보전 앞에서부터 시작하여 일대로 메아리치
는 가운데, 천마혈후 소리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기에 접해 혼절했던 승려들이 하나둘 정신을 되찾기 시작하였
으며, 범천항마종의 소리가 오랜만에 커지기 시작한다.
"공공선사를 보라! 와아! 저분이 언제 금광대정공(金光大正功)을 터득하
셨단 말인가?"
"아미타불… 이 소리는 만마(萬魔)를 멸하는 불멸성창이다. 소림사에서
오백 년 간 절전되었던 불멸성창이 공공선사로 인해 재현되었다."
근처에 있던 승려들은 공공선사를 향해 합장배례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감격해 절하기 시작할 때, 장문인은 이렇게 내뱉었다.
"누군가 일타화(一陀花)를 던져 공공의 내공을 삼 배 강하게 만들었다.
그 수법은 수미점화이물력(須彌 花移物力)! 아미타불… 대체 어느 고인이
… 아아, 이러한 무공은 태상조에게도 없는 것이거늘……."
그는 꽃이 날아온 곳을 힐끗 바라봤다.
문득 한 마리 금룡(金龍)이 치솟는 환상이 보인다.
금빛 안개가 용의 모습처럼 한 무더기로 뭉쳐진 채 하이얀 자작나무숲으
로부터 솟구쳐 올라 입설전 쪽으로 사선을 그으며 사라져 갔다.
"금룡의 영상! 오오, 설마 구룡비천(九龍飛天)이란 말인가?"
그는 넋을 잃고 합장을 했다.
'자비스러운 부처님께서 누군가를 보내 주셨다. 아미타불… 소림은 건재
하리라.'
어둠에 뒤덮인 길, 장명등(長明燈)의 불빛조차 흘러들지 않는 곳이다.
전율스러운 부르짖음 소리가 송백림을 뿌리째 뒤흔드는 가운데, 검은 회
오리바람이 일어났다.
흑마풍(黑魔風)이 일어날 때마다 숲은 고엽(枯葉)으로 덮이기 시작하였으
며, 아름드리 거목이 뿌리째 말라 죽기 시작했다.
"카아아… 카아아……!"
길 끝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풍성한 흑색 장포를 걸친 괴녀가 발광해 소리치며, 대웅보전을 향해 달려
들고 있었다.
그녀 뒤쪽으로는 오백 명의 혈포인들이 등에 쌍검(雙劍)을 십자로 교차해
메고, 손에 기형병장기를 든 채 뒤따라오고 있었다.
"흑살마녀의 마성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으음, 소림사의 저항이 예상보다
완강하군. 사라져 갈 듯하던 천룡선창이 되살아나다니……."
"빌어먹을! 후퇴할 수는 없다. 오늘 밤 안으로 소림사를 장악해야 한다.
그래야 천마왕야께서 소림사의 후광을 빌어 관산검맹을 장악할 수 있으
니까."
혈포인들은 몽고어로 지껄이며 흑살마녀를 뒤따라 대웅보전 쪽으로 몰려
들었다.
그들이 떼를 지어 이 곳까지 오는데 성공한 이유는, 소림사의 저항이 약
하기 때문이 아니라 흑살마녀의 무공이 워낙 초인적이기 때문이었다.
핏빛 머리카락, 홍보석(紅寶石)과 같은 눈동자…….
흑살마녀는 천마왕야의 오른팔로서 거치는 곳마다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룩했다.
천마왕야는 적에게는 흑살마녀를 보내 시산혈해를 이룩하게 하여 반대자
를 제거하고, 자신의 힘을 바라 마지않는 세력에는 다른 자를 보내어 회
유하며 암중에 세력을 형성해 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소림사는 봉파한 지 오래되며 강호계의 정세변화에 정면으로 나서지 않
는 실정이되 엄청난 권위와 저력을 갖고 있기에, 천마왕야는 소림사를 최
대의 적으로 규정짓고 흑살마녀와 오백혈살마위(五百血煞魔衛)를 보내 무
자비하게 붕괴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강호계의 정세는 축융곡 대회전(大會戰)에 집중되어 있는지라, 소
림사에서 혈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소문이 퍼져 나가지 않을
것이다. 고월(孤月)은 그것을 노리고 있다."
그는 나무 아래 서 있었다. 그는 마른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 있었으며,
흑살마녀가 백 장 안으로 접어들자 이제까지 씹고 있던 풀잎을 툭 뱉어
냈다.
"고월, 그는 가공한 병법가(兵法家)! 훗훗, 그는 중원천하의 세력판도를
제 손바닥 보듯 환히 알고 있다. 그는 낭인으로 떠돌며 천하정세를 완전
히 이해했다. 그러하기에, 천하가 사륵과 잠풍의 세력 다툼에 휘말려든
사이 모든 세력을 이용하여 흑도 백도를 암중 장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백무영의 어깨에 달빛이 흐릿하게 잠기어 든다.
달빛은 먹장구름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백무영의 발 아래 흰빛으로 반짝거리는 것은 무서리였다.
"흑살마녀, 넌 불행한 여인이다. 너의 눈빛으로 보아 넌 천마사혼대법(天
魔死魂大法)에 걸려들었다. 천마사혼대법은 인성(人性)을 제거하고 마성
을 심는 악마의 대법이지. 아마도 고월은 널 증오하는가 보다. 천마사혼
대법에 걸리면, 회복하지 못한다는 걸 모를 고월이 아니지. 그 녀석은 꽤
총명한 놈이거든."
백무영은 천천히 나뭇가지를 가슴에 안았다. 그는 신병이기(神兵利器)가
필요치 않은 상황이다.
그에게 있어 어장, 막사 같은 천하명검이나 메마른 나뭇가지나 마찬가지
이다.
"이대로 둘 때 너의 마성은 점점 더 확대될 것이며, 어느 순간 마성이 활
화산(活火山)처럼 터지며, 네 몸뚱이 또한 터져 버린다. 네 눈빛을 보니,
그 시각이 멀지 않았구나."
"크아아… 크아아……!"
흑살마녀는 백무영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핏빛 꽃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죽음의 증표로
갖고 다니는 생명화(生命花)였다.
<꽃을 받는 자 살고, 받지 않는 자 죽는다.>
흑살마녀는 죽음의 전설을 중원무사(中原武史)에 핏빛으로 기록하고 있었
다.
"너, 너를 죽이리라! 꽃을 받고 절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어야 한다!"
흑살마녀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거칠었다.
"글쎄, 난 죽을 수 없어. 난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지."
백무영은 죽립을 슬쩍 쳐들었다. 미간 사이로 머리카락 한 올이 흘러내린
모습이 남성의 얼굴이기는 하나, 대단히 관능적이다.
흑살마녀는 사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처지이나, 백무영의 얼굴을
보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어깨를 움찔거렸다.
"너, 넌 누구지?"
"백무영."
"으으… 넌 내 머리를 괴롭힌다. 너를 보자 내 머리가 빠개지는 듯 아프
다. 난 널 죽일 테다. 네가 내 머리를 아프게 하니까!"
흑살마녀는 사이한 호통과 함께 허공을 밟으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백무
영은 나름대로 짧은 시간에 그녀의 사혈을 점할 작정을 하고 절대구류검
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천마사혼공을 터득한 자의 허점은 양 미간(眉間), 내공을 한 점으로 모
아 양 미간을 벤다면 뇌수가 깨어진다. 그러면 마공이 파괴된다.'
그는 최근에 터득한 허공일점검결(虛空一點劍訣)을 그어 나가기 시작했
다.
우우웅……!
나뭇가지 끝에서 금빛 편린(片鱗)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는 신공을 뿜어 올리되, 주변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백만 관 거석을 쪼개어 버릴 힘을 나뭇가지 끝에 모았다.
그는 눈을 반개(半開)하며, 구태여 흑살마녀의 모습에 연연하지 않고자
했다.
진정한 절정검(絶頂劍)은 초식에 연연하지 않는다.
상승의 검은 형(形)으로 인해 강해지는 게 아니라, 기(氣)로 인해 강해진
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
그는 마음 속마저 텅 비게 하며 나뭇가지를 검으로 삼아 허공을 찍어 나
가기 시작했다.
흑살마녀는 광폭한 부르짖음 소리를 내며 바짝 다가섰으며, 두 팔이 떨치
어지며 검은 선풍(旋風)이 일어났다.
흑마선풍혈강(黑魔旋風血强)!
묵혈색 기류가 회오리치며 백무영의 가슴을 뒤덮었다.
백무영이 검으로 묵혈색 기류를 베어 내고자 할 때, 문득 그의 망막에 취
옥(翠玉)의 팔찌가 들어왔다.
흑살마녀가 번쩍 쳐든 팔뚝에 끼워진 옥환(玉環)이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귀여운 팔찌.
"저 팔찌는……?"
백무영은 저도 모르게 나뭇가지의 이동을 멈추었으며, 순간 흑마선풍혈강
이 가슴에 부딪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쾅-!
백무영의 몸뚬이는 실 끊어진 연처럼 훌훌 날아올랐으며, 허공에 이런 목
소리가 흘렀다.
"너였더냐, 흑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