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동양건축이란 잡지에 실린
화재로 소실되기전의 쌍봉사 대웅전 원형모습
(목탑)
심주의 위치에 따른 사리 봉안 장소 도면
지상식 ⬆️
지표식 ⬆️
지하식 ⬆️
통일신라 초기
🌹감은사석탑, 고선사석탑은 3층탑신에,
🌹나원리오층석탑은 3층지붕돌에, 🌹황복사석탑은 2층지붕돌에, 🌹불국사석가탑은 2층탑신에 사리를 안치하였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후의 석탑 그리고 고려·조선시대의 석탑에 이르기까지 1층탑신 윗쪽에 사리 구멍을 만들고 사리를 안치하였다. 얼핏 보기에는 석탑의 경우 사리 봉안 장소에 일정한 규칙이 없었던 것 같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초기 석탑인 감은사와 고선사탑의 경우에는 목탑의 심주인 찰주(刹柱)가 상징적 철봉(鐵棒)으로 변하여 3층지붕돌을 관통해서 3층탑신까지 들어와 있는데, 사리는 찰주의 끝 밑에 두기 어려우므로 바로 옆에 봉안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석탑은 목탑처럼 찰주가 탑 중심부까지 이어질 필요는 없었으나 찰주 아래 사리를 봉안하던 목탑의 관습이 석탑에까지 이어져 찰주가 꼽혀 있던 3층탑신에 사리를 안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시대가 흐르면서 2층지붕돌과 탑신돌을 거쳐 1층탑신으로 사리 봉안의 위치가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외적으로 석탑임에도 불구하고 기단이나 탑신부의 위와 같은 장소에 사리를 봉안한 경우가 있다.
🌹김천(金泉) 갈항사(葛項寺)터삼층석탑과 울산 청송사(靑松寺)터삼층석탑의 경우에는 기단에 사리를 안치하였고,
🌹익산 왕궁리오층석탑과 부여 장하리(長蝦里)삼층석탑은 기단과 탑신부에 사리를 안치하였다.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은 5층지붕돌과 1층탑신에 사리를 안치하였고, 🌹중원탑평리(中原塔坪里)석탑은 6층탑신과 기단부의 하단에 사리와 공양물들을 나누어 안치하였다.
석탑의 시대별 사리공의 위치
감은사석탑은 3층탑신에, 나원리석탑은 3층지붕에, 대부분의 석탑은 1층탑신에 사리공이 있다.
(○는 사리공의 위치)
감은사석탑 ⬆️
나원리석탑 ⬆️
창림사지석탑 ⬆️
지표에 설치되는 목탑 심초석의 경우나 탑 안에 사리가 안치되는 석탑은 모두 돌 자체에 사각 혹은 원형의 사리공을 파고 그 내부에 사리를 봉안하였다. 목탑의 심초석에 판 사리공은 모두 사각으로 파여져 있고, 석탑도 초기 석탑은 사각으로 파여졌으나 9세기 이후의 석탑은 원형으로 파였다.
경주 망덕사지 목탑터 심초석 사리공
우리나라 목탑 심초석 가운데 유일하게 팔각으로 되어 있다.
전탑의 경우 아직 많은 탑들이 조사되지는 못했으나 안동 임하사(臨河寺)전탑터에서는 특이하게 심초에 사리를 안치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탑은 별도의 석함을 제작하여 그 안에 사리와 공양물을 넣은 후 다시 그 함을 벽돌로 된 사각의 공간 안에 넣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분황사탑의 경우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이 발견되었고
🌹송림사(松林寺)오층전탑의 경우 2층지붕돌에서 거북 모양의 석함이 발견되었다.
특이한 것은 벽돌로 탑을 쌓으면서 마련된 사각의 공간 안에 그대로 사리와 공양물들을 넣어도 되는데, 굳이 석함을 만들어 그 내부에 사리를 넣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처음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할 때
(돌 - 동 - 은 - 금 - 수정)의 순서대로 넣어 봉안했던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목탑의 심초석과 석탑의 사리공은 외함(外函)의 기능을 겸하고 있으며, 전탑에서 석함을 따로 만들어 넣은 것은 이러한 방식을 고수했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사리의 봉안 장소나 형태가 다르다 하더라도 변치 않은 점이 있다면 목탑, 석탑, 전탑 어느 경우에도 사리는 탑의 중심축에 봉안된다는 것이다.
분황사탑 석제사리함
전탑의 사리함은 탑과는 별도로 제작된 석제사리함으로 제작하여 봉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감사ㆍ感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