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아이 화자 동시에 대해
(전략) 어린이의 마음은 ‘어린이 시’로 표현될 수 있도록 내어주고, ‘동시’는 다른 자리를 찾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내적 자질이 다른 존재인 어린이에게 어린이인 ‘척’해서 공감을 획득하기는 어렵다. 막된 비유지만 그런 동시는 태진아, 송대관이 2PM, 비스트처럼 노래하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다른 것을 다르다고 인정해야 새 출발이 가능하다.
아침에 밖에 나가 보니
회관 문이 깨져 있다.
우리들은 바람이 깼다 생각하고
어른들은 우리가 깼다 생각한다.
(‘회관문’. 삼척 고천분교 3년 고현우.《새들은 시험 안 봐서 좋겠구나》)
(전략) 위와 같은 시는 화자만이 아니라 글쓴이도 어린이어야만 공감은 증폭된다. 그래야 믿게 된다. 이 시를 어른이 썼다면, 어린 독자는 어른이 왜 어린이 편에서 이렇게 썼을까, 그 의도에 대해서 먼저 궁금해 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교과서 동시에 질린 탓이 크겠지만, 그런 의심은 자연스럽다. (중략) 위와 같은 시적 전언은 같은 또래의 어린이가 썼다는 신뢰감이 바탕이 되어야 공감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똑같은 시라도 어른이 쓴 것이라면 그런 공감은 어렵다. 어린이 화자는 어린이 자신이 써야 진짜가 된다.
(중략) 이런 방식으로는 (*어른이 쓴 어린이 화자의 시를 ) ‘어린이 시’와 게임이 안 된다. 어린이 시 교육을 해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어린이들은 동시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어린이 시’에 쉽게 공감하고, 호응한다. 어차피 그런 것이라면 이제 어린이 시에게 어린이 화자의 몫을 넘겨주는 것은 어떨까. (중략) 어린이 화자를 동시가 갖추어야 할 무슨 절대 기준처럼 생각하는 태도에서는 그만 벗어나자는 말이다. 재롱 놀음이 지겹지 않은가. 《일하는 아이들》(1977.청년사) 이후 빼어난 어린이 시집의 역사는 이런 생각을 더욱 강화하게 만든다.
(‘동시 쓰기, 생애의 작업’에서. 김권호 평론가. 동시마중. 2011. 4월호.)
내가 아무리 아이 화자의 동시에 대해 비판을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김권호 씨의 긴 글 중에서 중요한 대목만 뽑아 옮겼다. 더 궁금한 분은 동시마중 6호를 찾아서 전문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 글과 관계없는 말이지만 동시인들 만큼 시 공부 안 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고집쟁이는 없다고 본다. 연유는 동시를 만만하게 보기 때문이다. 아이 화자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 -에피소드에 해당할 거리-를 행과 연만 만들어 쓰면 되는 줄 알기 때문이다. 이런 동시들이 동시문학을 유치하게 하고 있고 어린이시보다 못한 게 동시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동시를 쓰겠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성인시와 동시, 어린이시의 차이를 모르고 그저 아이 화자로 아이인 척하고 쓰면 되는 줄 안다. 결과적으로 동시를 우습게 알고 그런 동시를 써서 등단하게 되면 그 자신도 시인 대접 온전하게 못 받는다는 것을 모른다. 누워서 침 뱉는 격이다.
무턱대고 동시를 쓰기 위해 쓰려 하지 말고 좀 고민하면서 쓰는 자세가 필요하다. (2018.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