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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三宗의 혈맥 :17효종/18 현종/19숙종(인현왕후,장희빈,숙빈최씨)
이장희 추천 0 조회 190 16.01.06 23: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효종현종·숙종을 잇는 삼종(三宗)의 혈맥 시대를 열었고

독살된 왕 경종(재위 : 4년 2개월)...영조, 정조 시대로 이어진다

 

제17대 효종 가계도

인조 - 인렬왕후 청주한씨(한준겸의 딸)

제 17대 효종

차남 : 효종,봉림대군(1619-1659)

재위기간 : 1649.5-1659.5(10년)

부인 : 2명 / 자녀 : 1남 7녀

1부인

인선왕후

덕수장씨

(장유)

1남6녀

2부인

안빈 이씨

1녀

제18대 현종

숙신공주

숙안공주

숙명공주

숙미공주

숙정공주

숙경공주

숙녕옹주

 


같은 현실을 보고도, 소현과 봉림 두 형제의 꿈은 달랐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① 三宗의 혈맥

| 제112호 | 20090502 입력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처럼 때로는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 대권이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대운(大運)이 따라 준 것이다. 그러나 대운은 여기까지다. 대운을 천명(天命)으로 승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다. 인조가 소현세자 일가를 죽이면서 생각지도 않게 대권을 잡은 효종은 굴러온 대운을 천명으로 전환할 방법을 숙고했다. 그것이 북벌이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장수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산해관까지 가서 명군이 청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사진가 권태균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뿐 아니라 봉림대군(효종)도 인질로 끌려가는 것이 강화 조건 중 하나였다. 강화도에서 나온 봉림대군은 남한산성 아래서 인조를 잠깐 뵙고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 길에 올라야 했다. 19세의 봉림대군은 압록강 건너 만주 땅 청석령(靑石嶺)에 올랐다. 숙종 때 사신으로 이 고개에 올랐던 이의현(李宜顯)은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에서 “길이 좁고 험한데 돌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고 적고 있다.

 

청석령 고개에서 봉림대군은 시조를 토해 냈다. “청석령 지나거다 초하구(草河衢) 어디메뇨. 호풍(胡風)도 차도찰샤 궂은비는 무슨 일고. 뉘라서 내 행색(行色) 그려내어 임 계신데 들이리.”(『가곡원류(歌曲源流)』)

이 재를 넘어 심양(瀋陽)으로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가 불투명했다. 인질 생활 동안 봉림대군은 소현세자 못지않게 고생했다. ‘효종대왕 묘지문’은 그가 청나라 군사들과 “서쪽 몽고 경계에 갔고, 남쪽 산해관에 갔으며, 더 남쪽 금주위(錦州衛)의 송산보(松山堡)에 이르러 (명나라) 제장(諸將)들이 패배해 항복하는 것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소현세자와 함께 명나라의 몰락 장면을 목도하면서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달랐던 게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 놓았다.

 

소현세자가 여진족(만주족)이 중원의 새로운 패자가 되는 현실을 인정했다면, 봉림대군은 그들을 꺾는 설치(雪恥)를 꿈꿨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소현세자를 꺾고 임금이 되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 효종의 5녀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쓴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에는 효종이 훗날 아들(현종)에게 “내가 형님과 심양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신민(臣民)들이 내게 어진 덕이 있다고 오인하여 마음으로 따랐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 발언이 심양관 내에 소현세자의 노선을 반대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다는 뜻인지, 인조가 소현세자를 제거하려 함을 안 심양관의 일부 세력이 봉림대군에게 미리 선을 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봉림대군이 스스로 만든 세력은 아니었다. 소현세자가 제거된다 해도 원손(元孫)으로 불리던 장남 석철이 있었다. 장남이 부친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을 경우 차남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이 조선의 종법이었다.

하지만 9년간의 인질 생활 끝에 인조 23년(1645) 귀국한 소현세자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임을 당한 상황에서 인조가 원손 석철 대신 봉림대군을 후사로 점 찍으면서 운명은 달라졌다. 소현세자가 급서한 날은 인조 23년 4월 26일,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기로 작정한 날은 윤6월 2일이었다. 이때 인조는 원손을 세워야 한다는 많은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국본(國本:세자)을 물을 것이므로 급급하게 의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청 세조와 섭정왕 다이곤은 공부상서(工部尙書) 흥능(興能) 등을 소현세자 장례의 조제(弔祭)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들의 도착 예정 날짜가 윤6월 4일이었다. 이들이 소현세자의 뒤를 원손 석철로 하여금 잇게 할 것을 요구하기 전에 봉림대군을 세자로 결정하려는 것이 인조의 생각이었다.

인조는 원손을 세워야 한다는 많은 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결정했다. 드디어 사신들이 도착한 윤6월 4일 조정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하나는 봉림대군이 세자 책봉 사양 상소를 낸 것이다. 봉림대군은 “선세자(先世子:소현세자)가 오랫동안 동궁으로 있다가 이제 막 졸서(卒逝)했는데, 원손(석철)의 칭호는 온 나라 사람이 우러르는 바입니다”라면서 소현세자의 후사는 자신이 아니라 석철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같은 상소에서 봉림대군은 “가슴에서 나오는 말을 이길 수 없어 성상의 위엄을 범하였으니 두려움이 이르는 것을 더욱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며 혹여 인조가 이 상소에 화를 내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도 드러냈다. 인조는 이렇게 비답했다.

심양시 아동도서관. 소현세자와 조선 인질 일행이 거처하던 심양관 구지(舊址)로 알려져 있다. 사진가 권태균
“상소를 살펴보고 너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너는 총명하고 효성과 우애가 있으며 국량도 좁지 않다. 그래서 특별히 ‘형이 죽으면 다음 아우가 뒤를 잇는 예절(兄亡弟及之禮)’을 썼으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孝悌)의 도리를 닦아 형의 자식을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거라(視兄子猶己出).”(『인조실록』 23년 윤6월 4일 )

인조가 손자들에게는 일말의 애정이 남아 ‘형의 자식을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라’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국왕 즉위 예정자가 즉위하지 못한 뒤 목숨을 보전하는 예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조가 아니었다. 문제는 청나라 사신들의 태도였다. 같은 날 청나라 사신들은 청 세조의 조제문(弔祭文)을 전달했다.

“세자가 갑자기 서세(逝世)했다는 말을 듣고 깊이 놀라고 애도하였다. 세자가 북경에 있을 때 언동이 완연했던 것을 추상(追想)해 보니 더욱 통석(痛惜)을 느낀다…하루아침에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헤아렸겠는가. 오호라, 가슴 아프다.”(『인조실록』 23년 윤6월 4일)

청 세조의 숙부인 섭정왕 다이곤도 치제문에서 “어찌 하늘이 착한 사람을 도움 없이 하루아침에 꺾어 버린다는 말입니까?”라고 애도했다. 그러나 청 사신들은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에는 공개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인조실록』은 같은 날 통역관 정명수(鄭命壽)가 다른 신하들을 모두 나가게 한 후 인조와 사신 3명, 그리고 환관 두 명만 있는 자리에서 밀담을 나누었다고 전하고 있다. 사신이 나간 후 인조는 도승지 김광욱(金光煜)을 앞으로 가까이 나오게 한 후 “사신이 섭정왕의 뜻이라면서 ‘동방의 인심이 좋지 않은데, 이런 때 만일 어린 원손이 후사가 된다면 위태롭고 불안할까 염려됩니다’고 말하기에 내가 사실대로 고했더니 사신이 다 기뻐하면서 ‘국왕께서 이미 정한 계책이 있으니 동방의 다행입니다’고 기뻐했다”고 설명했다. 청나라 사신들이 봉림대군을 세운 것을 ‘동방의 행복’이라고 했다는 것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신들은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봉림대군으로서는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한 셈이었다.

그래서 봉림대군은 사흘 후인 윤6월 7일 “신이 어찌 감히 재주도 덕도 없는 몸으로 갑자기 세자의 자리를 담당하여…”라는 사양 상소를 다시 올렸으나 이번에는 원손 운운하는 구절조차 빠진 완전히 형식적인 사양 상소였다.

이렇게 봉림대군은 인조의 후사가 되었으나 문제는 원손 석철이었다. ‘형의 자식을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라’고 말했던 인조는 재위 25년(1647) 5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그러자 병조 참지 정언황(丁彦璜)이 상소를 올려 ‘네가 낳은 자식처럼 보라’고 말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지금 이 세 아이를 동궁에게 맡게 시키시고 빈궁(嬪宮:세자빈)의 아들로 삼아서…어린아이들의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하소서”(『인조실록』 25년 5월 14일)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인조 19년(1641)에 부인 장씨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는 봉림대군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을 수는 없었다. 후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이 민감한 문제는 석철이 인조 26년(1648) 9월 18일 제주도에서 죽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이 기사를 전하면서 사관은 “이에 앞서 용골대(龍骨大)가 와서 석철을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고 쓴 것처럼 후사 자리를 빼앗긴 그의 죽음은 예견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들과 손자까지 죽인 인조가 재위 27년(1649)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 동침(東寢)에서 세상을 떠나고 봉림대군은 5월 13일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했다.

그는 광해군 11년(1619) 음력 5월 22일 해시(亥時:밤 9~11시)에 향교동(鄕校洞) 잠저(潛邸)에서 태어났는데 『효종행장』은 “이날 저녁 흰 기운(白氣) 세 가닥이 침실로 날아와 서쪽 창가에 엉키어 있었는데 연기와 비슷했으나 연기가 아니었다. 한참 후에 흩어졌는데 본 사람들이 다 기이하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다. 날 때부터 왕기(王氣)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그가 국왕이 될 것으로 여긴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태어날 때 국왕이 될 확률이 거의 없었던 효종은 이렇게 삼종(三宗) 혈맥(血脈)의 시대를 열었다. 이때부터 조선 왕조는 효종-현종-숙종의 핏줄을 뜻하는 삼종의 혈맥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의미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북벌군주 효종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소현세자一家에 쏠린 동정론, 효종의 逆鱗 건드리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13호 | 20090509 입력

 

정치는 이상만 추구할 수 없다. 현재 시비(是非)가 분명한 일도 때로는 훗날 가리는 것이 지혜일 수 있다. 강빈(姜嬪:소현세자 부인)의 옥사가 그런 일이었다. 강빈의 억울함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빈 일가의 비극 위에서 효종은 즉위할 수 있었다. 효종의 왕위를 인정한다면 강빈의 신원은 훗날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산림은 즉각적인 신원을 요구했고 효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성종의 후손인 이개윤의 딸 의순공주의 묘. 의순공주는 청나라 섭정왕 다이곤에게 시집갔다가 다이곤이 죽은 후 귀국했다. 묘는 의정부에 있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② 강빈 신원 논란

효종은 원손(元孫)의 자리를 대신한 정당성을 북벌에서 찾았다
. 그러나 강화조약에 군비 증강 금지 조항이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시선을 속이면서 군비를 강화해야 했다. 그러자면 표면적으로 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했다. 효종 원년(1650) 3월 청나라 사신 파흘내(巴訖乃)가 가져온 국서가 일종의 전기를 마련했다.

 

상처(喪妻)한 섭정왕 다이곤(多爾袞:1612~1650)이 “예부터 황제국은 번국(藩國)의 정숙한 여인을 가려 비(妃)로 삼는 전례가 있었다”면서 “국왕의 누이나 딸, 혹은 왕의 가까운 친족이나 대신의 딸 중에 정숙하고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 자를 뽑아 보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명나라 때도 많은 조선 여인이 북경으로 갔다
. 태종은 재위 8년(1408) 명의 성조(成祖) 영락제의 요구에 따라 5명의 반가(班家) 여인들을 북경으로 보냈는데, 고 전서(典書) 권집중(權執中)의 딸은 명나라 현비(賢妃)가 되고, 전 전서(典書) 임첨년(任添年)의 딸은 순비(順妃)가 되었으며, 나머지도 모두 후궁이 되었다.

 

태종 17년에도 명 성조(成祖) 영락제는 내관 황엄(黃儼)을 보내 다시 요구했고 한확(韓確)의 누이동생 한씨와 황씨를 북경으로 데려 갔다. 그때는 내심으로도 상국으로 인정하던 명나라 때였으나 황엄이 황씨 집을 방문했을 때 황씨가 화장도 하지 않고 눈물 자국이 있다는 이유로 화를 낸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외국으로 가기를 꺼렸다. 하물며 속으로 오랑캐라 업신여기는 청나라에 가기를 원하는 반가 여인은 없었다.

그때 성종의 8남 익양군(益陽君) 이회(李懷)의 후손인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이 자신의 딸을 보내겠다고 나섰다. 효종은 그 딸을 의순공주(義順公主)로 높이고 오빠 이준(李浚) 등에게 벼슬을 주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아들이자 청 태종의 동생인 다이곤의 초상화. 다이곤은 성년의 장조카 대신 어린 조카를 황제로 만들어 정권을 장악했는데, 조선 여인을 부인으로 삼았다. 사진가 권태균
청사고(淸史稿)』 예충친왕(睿忠親王) 다이곤 열전에는 순치(順治) 7년(1650) 5월 “다이곤이 직접 연산(連山)까지 가 성혼(成婚)했다”고 전하는데, 연산은 현 요녕(遙寧)성 요양(遼陽)이니 북경에서 천리 밖까지 마중 나온 것이다.

 

의순공주가 다이곤의 왕비가 된 것은 효종에게 좋은 기회였다. 청 태조의 아들이자 태종의 동생인 다이곤은 태종 사후(1642) 태종의 장자인 35세의 호격(豪格:1609~1648)을 제치고 아홉째 아들인 여섯 살의 세조 순치제(順治帝)를 즉위시켰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다이곤은 의순공주가 청 조정에서 자리도 잡기 전인 7개월만에 순치 7년(1650) 12월 수렵 도중 말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로 사망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듬해 정치 보복이 자행되어 다이곤은 봉호(封號)가 박탈되고 시신의 머리가 잘렸다.

 

그러자 이개윤은 효종 6년(1655) 동지사로 갔다가 딸의 귀환을 요청했고 청 세조는 효종 7년(1656) 4월 “과부로 저택에 살면서 부모형제와 멀리 이별하였으니 내가 측은하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며 귀국을 허락했다.

 

효종은 “귀국한 의순공주에게 평생 쌀을 지급하라”고 명했는데, 대간에서는 이개윤이 조정의 명령도 없이 딸의 귀환을 요청했다고 탄핵했다. 효종은 몇 차례 거부했으나 끝내 삭탈관작할 수밖에 없었다.

 

비운의 의순공주는 현종 3년(1662) 8월 사망했다.

이건창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세상에 전하기를 반정 초에 공신들이 회맹하면서 두 가지 밀약(密約)을 했는데 ‘국혼(國婚)을 잃지 말자’는 것과 ‘산림을 높여 임용하자’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국혼은 세자의 혼인을 뜻하는 것으로서 왕비는 서인 집안에서만 내겠다
는 뜻이었다
. 산림은 재야에서 독서하는 유학자들을 뜻하는 말인데, 쿠데타 명분이 부족했던 서인으로서는 이들의 지지가 절실했다. 효종 또한 산림의 지지가 중요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산림이 소현세자 부인 강씨의 신원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연려실기술』은 ‘감사 김홍욱(金弘郁) 비문[金監司弘郁碣]’을 인용해 “효종이 즉위하자 민정중(閔鼎重)이 상소를 올려 강빈의 원통함을 호소했는데 임금이 편전(便殿)으로 불러들여 그 전말을 조용히 말해 주면서 “‘강(姜)의 사악한 음모는 의심할 것이 없으니 이후에 감히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의 의논[不道論]으로 다스리겠다’면서 마침내 금지령을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 효종은 재위 3년(1652) 5월 조강(朝講)을 마치고 신하들에게 “지난번 민정중이 역강(逆姜:강빈)의 일을 진소(陳疏)하였다. 민정중은 후진(後進)인데 어떻게 그때의 곡절을 알겠는가…사주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민정중은 강빈 사형(1646) 때 열네 살에 불과했다.

효종은 “역강이 많은 금백(金帛)을 뿌려 두루 당원(黨援)을 맺었으므로 이에 연연하여 잊지 못하는 자가 이런 말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효종실록』 3년 5월 21일)고 공격하면서 “지금 역강을 구하려 하는 자들이 어찌 역적과 다르겠는가?”라고 퍼부었다. 『효종실록』은 이때 “여러 신하가 다 겁을 먹고 대답하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심양에서 9년간 함께 고생했던 형수를 역적으로 몰아야 하는 것이 효종의 처지였다. 그 역시 강빈과 아들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덕분에 자신이 즉위할 수 있었다. 강빈을 신원하면 그 아들도 신원시켜야 했고, 효종의 왕위에 대한 정당성 시비가 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시비(是非)나 논리의 문제는 아니었다.

산림도 사육신처럼 효종의 왕위를 거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을 추대하든지, 효종의 즉위를 인정하고 먼 후왕(後王)의 신원을 기다리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산림은 효종의 즉위는 인정하면서 강빈의 옥사는 김자점과 인조의 후궁 조씨의 소행으로 돌리는 절충안을 택했다.

 

그러나 『효종실록』의 사관(史官)이 이 기사 뒤에 “대개 임금의 뜻은 강씨의 옥사가 아무 내용이 없는 것으로 돌아가 선왕에게 누가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고 덧붙인 것처럼 ‘강빈 비극’의 원흉이 인조라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효종이 강빈 옥사 언급을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선언하면서 이 문제는 시대의 금기가 되었다.

그러나 효종 5년(1654) 재변이 잇따르자 내외에 구언(求言)했는데 황해도 감사 김홍욱이 응지상소(應旨上疏:임금의 구언에 응하는 상소)를 올려 이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김홍욱은 효종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을 듣고 가장 크게 의심스러운 옥사(獄事)를 풀어야 재변이 그칠 것”이라고 간언하면서 “역적 조(趙:후궁 조씨)는 안에서 날조하고, 역적 김자점은 밖에서 조작해 서로 모여 옥사를 일으켜 끝내는 (강빈이) 사사(賜死)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온 가문의 노소가 남김없이 주륙당했으니 아, 참혹합니다”(『효종실록』 5년 7월 7일)고 호소했다.

 

게다가 김홍욱은 “설령 그 어미가 죄가 있어도 어리고 연약한 아이들은 원래 몰랐을 것인데, 하물며 그 어미의 죄가 그리 명백하지 않은데도 갑자기 유배시켜 끝내 애매하게 죽여 영원히 구천(九泉)에서 한을 품도록 만들었다”면서 아들들의 문제까지 거론했다.

분개한 효종은 “상소를 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면서 김홍욱을 압송해 친국했다.

 

영의정 김육(金堉),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등이 “성상의 덕에 손상이 될까 염려스럽다”고 말리자 효종은 “후세에 악명이 있더라도 내가 감당할 것인데 경들이 무슨 상관인가?”라면서 형신(刑訊)을 감행했다.

 

김홍욱은 대신과 삼사(三司)를 부르며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옛날부터 말하는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 내가 죽거든 내 눈을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 두면 국가가 망해 가는 것을 보겠습니다”(『효종실록』 5년 7월 13일)”고 울부짖었다.

김홍욱은 효종 5년(1654) 7월 장사(杖死)했는데 구언에 따른 응지상소는 처벌하지 않는 관례를 깬 것이므로 큰 반발이 일었다. 전 판서 조경(趙絅)은 “대신은 광보(匡輔:보필)하는 도리를 상실했고, 대간은 입을 다무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며, 언로는 막히고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고 비판했고, 부사직(副司直) 정두경(鄭斗卿)도 “김홍욱에 대한 처분이 지나쳤다”고 비판했다.

 

이런 항의에 대해 효종은 “국사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憂愛之誠)을 내가 가상하게 생각한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산림을 전부 적으로 돌리면 국정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효종과 산림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국왕은 제1사대부에 불과할 뿐 임금은 명나라 황제’라고 생각하는 서인에게 언로를 막고 사대부를 죽인 효종에 대한 거부감은 커져 갔다.

 

 

러시아를 두 번 이기고 털어낸 ‘삼전도 콤플렉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14호 | 20090516 입력

 

서양은 이미 동양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잇따라 표류하고, 러시아는 흑룡강까지 진출했다.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만난 다른 세상에 조선도 어느덧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효종은 청의 요구에 따라 러시아 정벌군을 파견해야 했다. 조선과 서양의 첫 조우는 원하지 않는 충돌로 시작되었다. 효종은 이를 북벌 테스트로 생각했다.

 

북정일기(57Χ90㎝) : 1658년 제2차 나선 정벌에 참전한 신류 장군의 조총부대는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이후 러시아군은 청·러 국경 지대인 흑룡강을 넘지 못했다. 출병 84일 만에 개선한 신류 장군은 나선 정벌을 일기 형식인 『북정록』으로 남겼다. 우승우(한국화가)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③ 서양과의 접촉

효종 4년(1653) 8월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를 올려 이상한 배 한 척이 난파되었다고 보고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서 뒤집혔는데 생존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는 보고였다. 그들은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인이었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 북부의 텍셀(Texel) 섬을 떠난 일행은 그해 7월 16일 대만에 기착했다가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향하던 중 제주도에서 난파되었다.

 

하멜은 10월 말께 제주목사 관아에서 뜻밖에도 한 서양인을 만난다.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목사 이원진의 질문에 “홀란드(네덜란드) 사람인 것 같다”고 대답하자 이원진은 껄껄 웃으며 “이 사람은 조선 사람이니 너희가 잘못 보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 사람’은 26년 전인 인조 5년(1627)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벨테브레이(J J Weltevree)였다.

 

과거 조선은 서양인이 표착해 오면 북경으로 보내 귀환시켰다.

『선조수정실록』 15년(1582) 1월조는 서양인 마리이(馬里伊)가 표류해 오자 진하사(進賀使) 정탁(鄭琢) 편에 북경으로 보냈다고 전하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

 

벨테브레이가 표착했을 때는 정묘호란 직후였다. 게다가 벨테브레이는 화포 제작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인조는 벨테브레이를 동료 두 명과 함께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화포를 개량하게 했는데, 동료 둘은 병자호란 때 전사했고 벨테브레이는 조선으로 귀화했다.

그가 바로 박연(朴燕)으로서 조선 여성과 혼인하고 후사도 둔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이듬해 서울에 올라온 하멜 일행은 효종에게 귀국을 간청했으나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을 내보내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여생을 보내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멜 일행도 박연과 함께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북벌에 대비했다.

『하멜 표류기』는 효종 5년 8월 ‘청나라 사신이 오자 국왕은 우리를 요새로 보내 사신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명했다는데, 그 요새가 남한산성이었다
. 효종 때는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러시아와도 맞닥뜨려야 했다.

효종 5년(1654) 2월 청나라에서 온 차관(差官) 한거원(韓巨源)이 나선(羅禪:러시아) 정벌에 조선군 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조창수(鳥槍手:조총수) 100인의 파견을 요청한 것인데 효종이 “나선은 어떤 나라인가?”라고 묻자 한거원은 “영고탑(寧古塔) 근처에 사는 별종(別種)입니다”고 대답했다.

 

나선은 ‘Russian’의 한역(漢譯)인데 효종은 이때까지도 이들이 서양인인 줄 알지 못했다.

러시아는 17세기 초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서면서 유럽 동북쪽과 시베리아 쪽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 이 무렵 러시아의 하바로프(E Khavarov)는 원정대를 이끌고 흑룡강까지 진출해 강 우안(右岸)에 알바진(Albazin) 성(城)을 쌓고 군사기지로 삼았다. 담비 가죽을 비롯한 모피 획득을 위해서였는데 17세기 모피 자원은 러시아 국고 수입의 10%를 차지했다고 전해진다.

만주를 선조의 발상지로 중시하던 청조는 효종 3년(1652) 군사를 보내 영고탑 부근에서 맞붙었으나 거듭 패배했다
. 청은 효종 4년(1653) 사이호달(沙爾虎達)을 영고탑 지방 앙방장경(昻邦章京:장군의 명칭)으로 삼고 다음 해 명안달례(明安達禮)에게 북경수비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을 격퇴하라고 명하면서 조선에도 원병을 요청한 것이다. 조창수를 요구했다는 것은 조선 조총수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인조 14년(1636) 청에 항복한 후 맺은 강화조약 때문에 청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효종은 함경북우후(北虞侯) 변급(邊<5C8C>)을 영장(領將)으로 삼아 군사를 파견했다. 제1차 나선 정벌군이었다. 변급은 100명의 조총수와 20명의 화병(火兵:취사병) 등 도합 150여 명을 이끌고 3월 26일 두만강을 건넜다. 27일 후통강(厚通江:송화강)에 도착한 변급과 조선군은 28∼29일 러시아군과 접전했다. 변급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300석(石) 크기의 대선 13척, 소선 26척에 병력은 400명 미만이었다.

조청연합군은 대선 20척, 소선 140척에 1000여 명이었다. 조청군이 숫자는 많았지만 대선은 17명이 승선하는 작은 배에 불과했다. 화력이 열세라고 생각한 변급은 수상전(水上戰) 대신 육지에 ‘유붕(柳棚:통버드나무로 만든 방패)’을 세우고, 이를 방패 삼아 러시아 함선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 새로운 전법에 러시아군은 많은 부상자를 내고 5월 5일 흑룡강을 거슬러 도망갔다.

조선군은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5월 16일 철군해 6월 21일 두만강을 건너 84일간의 원정을 마무리지었다. 『청사고(淸史稿)』 ‘명안달례 열전’은 명안달례가 “순치 11년(1654) 군사를 이끌고 악라사(鄂羅斯:러시아)를 정벌했는데, 흑룡강에서 적을 물리쳤다”고 적고 있다. 이 1차 나선 정벌 이후 러시아군은 ‘머리 큰 사람(大頭人)이 두렵다!”며 벙거지(戰笠:전립)를 쓴 조선 군사를 두려워했다.

청조는 이듬해(1655) 명안달례에게 호마이(呼瑪爾) 하구에 있는 러시아의 근거지를 공격하게 하고 효종 8년(1657)에는 사이호달을 보내 상견오흑(尙堅烏黑)에서 러시아와 싸웠으나 다시 패배했다. 그러자 효종 9년(1658) 재차 조선군의 출병을 요청했다. 효종은 일단 거부했으나 재차 회계(回啓)가 내려오자 함북병마우후 신류(申瀏:1619∼1680)를 총병관으로 삼아 정벌군을 구성하게 했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기회에 청군의 허실을 엿볼 생각이었다.

조총수 200명과 기고수(旗鼓手:군기와 북 관리 병사)·화정(火丁) 60여 명 등 도합 260여 명의 조선군은 3개월분의 군량을 휴대하고 5월 2일 두만강을 건넜다. 조선군은 6월 10일 송화강과 흑룡강의 합류 지점에 도착해 러시아 스테파노프(Stepanov) 함대와 격전을 벌였다.

신류는 『북정일기(北征日記)』에서 “적선 11척이 흑룡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아군은 즉각 적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병들이 숨 돌릴 겨를 없이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니 배 위에서 총을 쏘던 적병들은 드디어 지탱할 수 없어 모두 배 속으로 들어가 숨기도 하고 배를 버리고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초반 습격으로 승기를 잡은 신류는 적선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것으로 전투를 끝내려 했으나 청장(淸將) 사이호달이 전리품에 욕심을 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방화 금지령이 급하게 전해지는 사이 강가 풀숲에 숨어 있던 러시아군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신류는 “여세를 몰아 일시에 적선들을 불태웠다면 적병 중에 살아남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인데, 대장이 재물을 탐내 불태우지 말라고 무모한 명령을 내렸다”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조선군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했다. 청군은 무려 120여 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부상했다.

러시아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어 11척의 선단 중 10척이 불타고 1척만 겨우 도망갔다. 스테파노프의 부하 페트릴로프스키(Petrilovsky)는 “이 전투에서 대장 스테파노프와 카자크 270명이 전사하고 차르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 가죽 3080장, 대포 6문, 화약, 납, 군기(軍旗), 식량을 실은 배가 파괴되었으며 겨우 성상(聖像)을 실은 배 1척이 95명을 태우고 탈출하였다”고 적고 있다.

신류는 전사자를 화장하라는 사이호달의 권유를 거부하고 흑룡강가의 약간 높은 언덕 위에 동향(同鄕)끼리 묻어 주었다. 신류는 “아아! 멀리 이국 땅에 와서 모래펄 속에 묻힌 몸이 되었으니 참으로 측은한 마음 이를 데가 없구나”고 추도했다.

사이호달은 러시아의 재침이 우려된다며 효종 10년(1659) 봄까지 주둔하라고 요구했으나 신류는 거부하고 11월 18일 영고탑을 떠나 12월 12일 회령으로 귀국했다. 조선군은 이렇게 1, 2차 나선 정벌을 모두 승리로 장식했다.

 

불과 20여 년 전 삼전도 치욕을 겪었던 조선군으로선 청군이 연패한 러시아군을 꺾은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청군과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효종은 더욱 강하게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말로는 북벌 외치며, 武臣 우대 발목 잡은 文臣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15호 | 20090524 입력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정권교체보다 몇 배는 어렵다. 조선은 개국 이래 문신 우대 풍조가 뚜렷했다. 사대부는 임진·병자 양란으로 전국이 유린되고도 숭문천무(崇文賤武) 사상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천한 무신은 고귀한 문신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효종이 북벌 단행을 위해 무신을 양성하려 하자 문신은 갖은 방법으로 제동을 걸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을 침략했던 청 태종과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의 심양 북릉. 200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효종은 북벌을 꿈꾸며 군비를 증강했으나 문신의 반발에 부닥쳤다. 사진가 권태균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④ 사대부들의 저항

‘삼전도의 치욕’ 이후 모두 북벌을 주창했지만 속내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효종과 병조판서 박서(朴筮)·원두표(元斗杓), 훈련대장 이완(李浣)처럼 실제 북벌을 단행하자는 쪽이었다. 다른 하나는 입으로는 북벌을 주창하지만 실제로는 북벌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반대하는 쪽이었다. 대다수 문신이 여기에 속했다.

 

효종은 재위 1년(1650) 6월 도승지 박서가 “근래 날마다 세 번씩이나 경연을 개최하셔서 옥체가 피곤하실까 염려되오니 하루에 한 번씩만 열도록 하소서”라고 건의할 정도로 학문에도 뜻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즉위를 천명(天命)으로 승화하는 것은 북벌이지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북벌에 매진했다.

효종은 재위 2년(1651) 8월 박서를 병조판서로 임명했다. 박서는 문관이었지만 도승지를 역임한 데다 효종의 군비 확장 계획에 대다수 문신이 반대할 때 홀로 ‘수륙군환정사목(水陸軍換定事目)’이란 군정 개혁 5개조를 내놓고 찬성했던 인물이다.

 

박서에게 지경연(知經筵)을 겸하게 한 이유는 경연을 북벌 논의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벌 대의에 동조하던 박서는 효종 4년(1653) 6월 급서하고 말았다. 효종실록이 “연일 과음하다가 갑자기 죽었다”고 적은 대로 과음에 의한 쇼크사였다. 사관은 “박서가 병조판서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몸가짐이 검소했고 군국(軍國)의 계책이 임금의 뜻에 부합했으므로 임금이 총애하고 신임했었다”고 적고 있다.

효종은 박서의 뒤를 원두표에게 맡겼다. 원두표 역시 군비 증강을 지지하는 소수 문신 중 한 명이었다. 효종은 또 이완을 어영대장에 임명해 문무를 조화시켰다. 문신 원두표에게는 북벌 기획을, 무신 이완에게는 실행을 맡기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 대의 앞에는 수많은 암초가 가로막고 있었다. 가장 큰 암초는 사대부의 숭문천무 사상이었다. 임진·병자 양란을 겪고도 이런 사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효종은 이런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 후기에 많이 배치된 화포류, 효종은 북벌을 위해 소총수 부대를 양성하고 훈련도감에 무기를 개량하도록 지시했다. 사진가 권태균
우리나라 장수들은 이웃 나라에 견주어 부끄럽다. 문관은 문을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무관은 무를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국가에서 취하는 것도 이것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문관이 무변(武弁)처럼 생기면 경시당하지만 무관이 서생(書生)처럼 생기면 용납된다.”(『효종대왕 행장』)

온 국토가 외적의 말발굽에 유린되는 참화를 겪고도 무를 경시하는 풍조는 여전했다. 효종은 “무관이 말달리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광패(狂悖)스럽다고 지목하니 풍조가 괴이하기 그지없다…지금 세상에 서생 같은 무관이 어떻게 전진(戰陣) 사이에서 힘을 쓸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문신이 아니라 무신이 군사를 지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효종은 “전시에 일개 서생들이 군사를 지휘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큰 폐단이다”고 비판했다. 무신 사령관을 문신 도체찰사가 지휘하는 군사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효종은 군사는 무장에게 맡기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밭갈이는 마땅히 남자 종에게 묻고 길쌈 일은 마땅히 여자 종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문이라 이름하였으면 독서와 강학(講學)에 힘써야 하고 무라 이름하였으면 무예와 병법을 익히면 될 뿐이다. 무인의 길은 차라리 거칠고 사나운데 지나칠지언정 나약하고 옹졸해서는 안 되는데, 오늘날 비국의 낭청이 슬기롭고 힘 있는 자를 뽑지 않고 단지 글자나 아는 영리한 자를 뽑다 보니 모두 서생뿐이다. 긴급하게 적을 상대할 때 서생을 쓸 수 있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풍습이 추구하는 하나의 커다란 병폐이다.”(『효종실록』 3년 5월 15일)

군사 전문가에게 군사를 맡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효종은 숭문사상에 젖은 사대부와 싸우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무장을 양성하려 했다. 특별 무과시험인 관무재(觀武才)를 실시한 게 그중 하나였다. 효종은 재위 4년(1653) 9월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를 실시하고 성적 우수자에게 지방 수령을 제수해 사기를 높이려 했다.

 

그러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수령은 상으로 줄 수 있는 벼슬이 아니니 다른 상을 주소서”라고 반대했다. 그래서 효종은 첨사(僉使:병마절제사)를 제수할 수밖에 없었다. 무장 양성에 좋은 제도는 영장(營將) 제도였다. 임란 때 류성룡의 주도로 양반과 노비들을 함께 배속시켜 조직했던 부대가 속오군(束伍軍)인데 지방의 몇 개 속오군을 통합 지휘하는 직책이 영장이었다. 처음에는 무장이 임명되었다가 임란이 끝난 후 지방 수령이 겸직했는데 정묘호란 때 문신 수령들이 지휘법을 몰라 기껏 기른 군사들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병조판서 박서는 효종 3년(1652) 2월 “만약 군정을 다시 밝히려 한다면 무엇보다 다시 영장을 설치해야 합니다”며 부활을 건의했다. 효종은 “경의 말이 옳다”면서 의정부에 논의시켰으나 논의만 분분할 뿐 박서가 죽을 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효종 5년(1654) 2월 병조판서 원두표가 “사변은 항상 뜻하지 않은 데서 발생하니 남방의 16영(營)에 영장을 차출해 보내 군무(軍務)를 전적으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고 다시 건의했다. 이번에는 효종도 의정부에 맡기지 않고 “삼남에 먼저 차출해 보내라”고 동의했다. 원두표가 이때 “여러 고을의 군사를 통제하는 영장이 품계가 낮고 미천하면 누가 기꺼이 명령을 따르겠습니까”라며 높은 직급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문신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효종은 “많은 말 할 것 없다. 나이는 어리지만 기예가 있는 자들을 우선 시험적으로 써 보다가 효과가 없으면 자급(資級)을 빼앗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효종실록』5년 4월 13일)라며 고위 직급을 주라고 명령했다.

효종이 같은 해 12월 무신 유혁연(柳赫然)을 승지로 임명한 것도 무신을 우대하기 위한 조치였다. 『효종실록』은 “유혁연은 무인 유형(柳珩)의 손자이고 유효걸(柳孝傑)의 아들인데, 수원부사로 있을 때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수리했는데 임금이 유능하다고 여겨 특별히 승지를 제수한 것이다”고 적고 있다. 유혁연의 조부 유형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한 무반(武班) 가문이었고, 유혁연도 인조 22년(1644) 무과에 급제한 무관이었다. 또다시 사헌부에서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사헌부는 “무신으로서 승지가 된 경우는 국조(國朝) 이래 없었습니다…유혁연을 특별히 승지에 제수하자 여론이 모두 놀라고 해괴하게 여깁니다”면서 명을 거둬 달라고 말했다. 여론이란 승지는 문신만이 할 수 있다는 문신의 의견일 뿐이었다.

효종은 문신의 반대를 묵살하고 유혁연의 승지 임명을 강행했다
. 효종이 유혁연을 승지로 임명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유혁연은 병방(兵房)승지로서 병조에 관한 일을 전담하는 자리였다. 효종은 지방관을 파견할 때 특별히 군사관계 일은 병조판서에게 직보하고 병조판서는 무신 승지 유혁연에게 전달하게 했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외교안보비서관인 셈이었다. 효종은 또 문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위군인 금군(禁軍)을 늘리고 창덕궁 후원(後苑)의 담장을 헐어 기사장(騎射場)을 만들어 주었다. 지형이 험준한 조선보다 광활한 만주와 중원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기마병을 양성하려 한 것이다.

이처럼 갖은 방법으로 무장을 양성하고 군비를 증강한 결과 재위 6년(1655) 무렵에는 상당한 병력을 갖게 되었다. 효종은 이해 9월 28일 장릉(章陵)에 참배하는 날을 조선군의 위용을 과시하는 날로 삼았다
. 장릉으로 떠나면서 노량진에서 배 위에 올라 군사들이 진 친 모습을 보면서 시신(侍臣)들에게 “이런 군사와 말이 있어도 제대로 통솔을 못 하면 쓸모없는 군졸이 될 것이니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김포의 장릉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노량진에서 군사들의 훈련을 직접 참관했다. 『효종실록』은 “임금이 서문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가면서 시신들에게는 곧바로 남문을 따라 들어갈 것을 명했다”고 전하면서 “오랫동안 훈련을 하니 서울의 사대부가 여자들까지 와서 구경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동원된 군사는 모두 1만3000여 명이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 지 20여 년 만이었다. 효종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북벌에 나서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북벌 추진에 대한 문신의 반발은 작지 않았다.

 


‘설욕보다 기득권’ 사대부들 安民 내세워 양병론을 꺾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16호 | 20090530 입력

 

인조반정은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만들었다. 국왕은 사대부 가운데 제1 사대부에 불과할 뿐 초월적 존재가 아니었다. 국왕이 아니라 사대부가 나라의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효종은 북벌을 가능한 목표로 여겼으나 사대부는 불가능한 꿈으로 여겼다. 사대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기득권 수호였다. 북벌 추진으로 위협받던 사대부의 기득권은 효종의 급서로 계속 유지되었다.
요동벌판 : 효종은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경험을 통해 북벌을 가능한 목표라고 여겼으나 사대부들은 불가능한 꿈으로 여기고 반대했다. 사진가 권태균
국란을 겪은 임금들 효종⑤ 스러진 ‘북벌의 꿈’

윤휴(尹휴)의 일대기인 『백호(白湖)행장』에 따르면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윤휴는 병자호란 직후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면서 “좋은 때를 만나 벼슬을 하더라도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고 약속했다고 전한다. 치욕을 북벌로 갚자는 북벌설치(北伐雪恥)의 뜻이었다. 하지만 문신들은 효종이 막상 군비를 증강하려고 하면 “백성의 생활이 피폐해진다”며 반대했다.

효종이 재위 7년(1656) 만일에 대비해 산성 수축을 지시하자 전라감사는 상소를 올려 “험한 곳에 성을 쌓는 것은 국가를 튼튼히 하고자 하는 것인데 백성이 먼저 피폐해진다면 국가가 튼튼해질 수 없으니 산성이 국가에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효종실록』7년 11월 26일)라고 반대했다. 군사를 기르는 양병(養兵)보다 백성 생활을 안정시키는 양민(養民)과 안민(安民)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이때 가장 강하게 북벌을 주창한 세력이 숭명(崇明) 의리를 당론으로 삼던 산림(山林), 즉 산당(山黨)이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효종의 군비 증강 계획에 안민을 내세워 반대했다.

효종 즉위년 우의정 김육(金堉)이 양호(兩湖:전라·충청)에 대동법 확대 실시를 주장했을 때

 

산당 영수 이조판서 광산김씨 28(世)김집(金集)과 송시열·송준길 등 양송(兩宋)이 일제히 반대했다. 대동법은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내자는 안민책인데 양반 지주의 입장에 서서 반대한 것이었다.

 

이때 효종은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부자)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가난뱅이)이 원망한다는데 그 원망의 대소(大小)가 어떠한가?”(『효종실록』즉위년 11월 5일)라고 물었다. “소민의 원망이 더 큽니다”고 대답하자 효종은 “그 대소를 참작해 시행하라”고 사실상 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양반 사대부의 반발 때문에 효종 2년(1651)에야 겨우 충청도만 확대 실시될 수 있었다. 안민은 결국 일부 사대부의 북벌 반대 명분이자 기득권 수호 논리에 불과했다.

충북 괴산군에 있는 만동묘비.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의종을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 문신들은 명 황제의 복수를 외쳤으나 정작 북벌에는 반대했다. 사진가 권태균
그래도 효종이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하자 재위 8년(1657) 무렵부터는 사대부의 집단 저항이 노골화되었다.

 

전 헌납(獻納) 윤겸(윤겸)은 “재변에 대비하는 것은 국가가 마땅히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니 군사를 기르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만 영장(營將)을 설치하는 것은 그 폐단이 만 가지나 됩니다”(『효종실록』8년 2월 8일)고 무장 양성책을 비판했다.

 

사간(司諫) 이정기(李廷夔)는 “군사를 기르고 무기를 수선하는 것은 군국(軍國)의 일로서 하지 않을 수 없으나 여러 신하는 전하께서 무예를 좋아하신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효종실록』8년 8월 23일)라고 효종의 상무(尙武)정책을 비판했다.

 

같은 해 송시열은 밀봉 상소인 ‘봉사(封事)’를 올려 효종에게 전면전을 선포했다.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 세월만 지나갔을 뿐 한 자 한 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위로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답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와 백성의 바람에 답하지 못함이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해 안에서 떠들고 밖에서 공갈하여 망할 위기가 조석(朝夕)에 다다랐습니다.”(‘정유봉사(丁酉封事)’)

‘정유봉사’는 효종의 통치 행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19개 조에 달하는 ‘정유봉사’의 핵심 역시 양병보다 양민에 힘쓰라는 것과 사대부를 우대하는 왕도(王道)를 기르라는 것이었다.

 

19번째 항목에서 송시열은 “주자가 처음에는 효종(남송의 효종)에게 금나라를 쳐 북벌하는 의리에 대해 극진히 말하였으나 20년 뒤에는 다시 북벌에 관해 말하지 않고…”라면서 주희(朱熹)의 사례를 들어 북벌에 반대하는 속내를 보였다. 국왕에게 중요한 것은 북벌이 아니라 ‘수신(修身)’이라는 것이다.

효종은 “오늘날 씻기 어려운 치욕을 당했는데,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매번 내게는 수신만 권하고 있으니 이런 치욕을 씻지 않고 수신만 하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효종실록』9년 9월 1일)”고 반발했으나 산당의 협조 없이 북벌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효종은 산당과 대연정을 구성하기로 결심했다. 효종 9년(1658) 9월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로,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인사권과 탄핵권을 쥐었으니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셈이었다.

 

효종 10년 1월에는 인조의 시호에 ‘조(祖)’자를 쓰는 데 반대하고 ‘종(宗)’자 사용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던 유계(兪棨)가 복귀하고 이유태(李惟泰)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는 등 산당이 대거 조정에 들어왔다.

반면 원두표·이완 등 북벌 인사들은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효종의 정치적 양보에는 조건이 있었다. 산당이 책임지고 북벌을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실제 북벌 추진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효종은 재위 10년(1659) 3월 11일 송시열과 담판을 지었다. 이른바 기해독대(己亥獨對)였다. 이 날짜 『효종실록』은 효종이 승지와 사관(史官)에게도 물러가라고 분부한 다음 “송시열 혼자 입시했는데, 바깥에 있는 신하들은 송시열이 어떤 일을 진달했는지 알 수 없었다”고 쓰고 있다. 사관이 배석하지 않고 내관도 내보냈으나 독대 내용을 송시열이 ‘악대설화(幄對說話)’란 기록으로 남겼고, ‘독대설화(獨對說話)’라는 필사본도 전해져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효종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현재의 대사(大事)를 논의하기 위함이다”고 말했는데 현재의 대사란 물론 북벌이었다. 효종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오랑캐의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오랑캐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악대설화’)

효종은 자신의 볼모 생활에 대해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겪게 한 뜻이 우연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고 회상했다. 효종은 또 “대사를 위해 내전(內殿:왕비의 침실)에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주색을 끊은 결과 정신과 몸이 좋아져 앞으로 10년은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할 정도로 북벌에 집착했다.

 

그러나 송시열의 생각은 달랐다. 효종은 “신하가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면서 북벌을 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듯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서 놀라니 나 혼자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다”고 한탄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자고로 제왕은 반드시 먼저 자신의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修己刑家)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습니다. 여러 신하가 제 집안 살찌우는 데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면전에서 비판했다.

효종의 북벌 주장에 대한 송시열의 대안은 오직 ‘자신의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수기형가’였다. 군왕의 수신(修身)이 북벌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효종은 송시열을 버릴 수가 없었다.

 

효종은 “조만간 경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양전(兩銓:이조판서와 병조판서)을 겸직하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 송시열의 ‘악대설화’는 “내가 밖으로 물러나오자 임금께서 직접 중관(中官)을 다시 오라고 불렀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이날의 독대는 송시열에게 ‘더 큰 권력을 주겠지만 적극적으로 북벌을 추진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산당에게 준 정권을 회수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기도 했다.

송시열이 입장 정리를 위해 상황을 모색하는 동안 급변이 발생했다
.

 

앞으로 10년은 보장한다’던 효종이 독대한 지 두 달이 채 못 된 재위 10년 5월 4일 급서하고 만 것이다.

 

효종의 병은 귀 밑에 난 종기였는데 송시열이 5월 15일 정안숙(鄭晏叔)에게 보낸 편지에서 ‘침의(鍼醫)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놓자 처음에는 고름이 조금 나오다가 이어서 피가 두어 말이나 나왔다’면서

 

‘아침에 침을 놓았는데 사시(巳時:오전 9~11시)에 승하했다’고 쓴 것처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급서였다.

북벌 군주의 급서에 민심이 흉흉해진 것은 이런 의외성 때문이었다
. 살아서 이루지 못한 북벌의 꿈 때문인지 효종은 승하 후에도 이 세상을 떠나지 못했다.

 

시신에 부기가 있었으며, 관이 시신보다 짧아서 널판을 덧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드디어 현종 즉위 직후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예송논쟁이 발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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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현종 가계도

 

효종 - 인선왕후 덕수장씨 장유의 딸

제 18대 현종

장남 : 현종(1641-1674)

재위기간 : 1659.5-1674.8(15년 3개월)

부인 : 1명 / 자녀 : 1남 3녀

1부인

명성왕후

청풍김씨

(김우명)

1남3녀

제19대 숙종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임금도 사대부’ 예학의 틀에 갇혀버린 효종 장례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17호 | 20090607 입력

 

인조반정 이후 국왕은 천명이 아니라 사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 전락했다.

 

서인은 소현세자를 제거하고 효종을 추대했지만 둘째 아들로 낮춰 보았다.

 

국왕을 사대부 계급의 상위에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왕실의 시각과 제1 사대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서인의 시각은 큰 괴리가 있었다.

 

국왕 독점의 권력이냐 사대부 균점의 권력이냐의 문제였다.

 

양자의 시각이 충돌한 것이 제1차 예송(禮訟) 논쟁이었다
.

조선 성리학의 흐름을 예학으로 이끈 태두 광산김씨 27(世) 사계 김장생을 모신 충남 논산 돈암서원. 김장생과 송시열·송준길 등 당대의 서인-노론 계열 예학자들을 배향하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살아남았던 47개 서원 중 하나다. 사진가 권태균

국란을 겪은 임금들 현종① 제1차 예송 논쟁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 일행이 인질로 끌려간 지 5년 만인 인조 19년(1641) 2월 4일 심양(沈陽)의 조선관(朝鮮館)에서 태어난 아이가 현종이었다. 『현종실록』은 ‘왕의 휘는 연( )으로 효종대왕의 맏아들’이라고 적고 있다. 『현종실록』은 현종이 인조 22년(1644) ‘동국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는데 부친과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하기 1년 전이었다. 『현종실록』은 “을유년(인조 23년:1645)에 소현세자가 죽어 효묘(孝廟:효종)께서 둘째 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자 왕 역시 원손(元孫)의 봉호가 올려졌다”고 적고 있다. 그 전까지 원손은 소현의 장남 석철이었다. 조선의 종법(宗法)은 소현세자의 뒤를 석철이 이어야 했으나 봉림대군이 이어받았고 원손의 지위도 이연이 차지하게 되었다.

송시열의 초상 : 송시열은 효종 국상 때 표면적으로는 경국대전을 인용해 자의대비 복제를 1년으로 의정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둘째 아들로 대우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는 ‘효종→현종→숙종’의 피를 이은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뜻하는 핏줄이 된다.

 

쿠데타를 일으켜 화가위국(化家爲國)한 인조에서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소현세자가 아닌 둘째 효종이 왕위를 이었음을 중시하는 의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효종은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야 했다. 속으로는 명나라를 섬기며 북벌을 외치지만 현실로는 청나라에 사대했던 조선 사대부는 효종에 대한 태도에서도 이중적 성격을 띠었다.

숭명반청(崇明反淸)을 기치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은 청나라를 인정하려 했던 소현세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제거되었다면 그 뒤를 누가 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 있어야 했다. 종법에 따라 원손 석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목숨 걸고 간쟁하든지, 비록 편법이지만 봉림대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효종의 왕위 계승도 인정하면서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과 그 아들들의 신원(伸寃)도 요구했다. 소현세자 일가의 억울한 죽음과 효종의 왕위 계승은 한몸이었다. 소현세자와 그 일가의 억울한 희생 위에서 효종이 국왕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세조냐 단종이냐의 문제와 같은 것이었다.

 

정인지·신숙주가 되든지 성삼문·박팽년이 되든지 한길을 택해야 했다.

윤휴의 초상 : 윤휴는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는 논리로 자의대비 복제를 3년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서인은 몸은 정인지·신숙주의 길을 선택했으면서도 마음은 사육신이고 싶어 했다. 효종을 왕으로 섬기면서 강빈과 그 아들들의 신원을 요구했다.

이는 효종의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모순이 현실에서 폭발한 사건이 제1차 예송 논쟁이었다.

 

기해년(1659)에 벌어졌다 하여 기해예송(己亥禮訟), 또는 상복 문제로 논쟁했다 하여 기해복제(己亥服制)라고도 하는 예송 논쟁은 효종의 국상 때 계모(繼母)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발생한 것이었다.

 

예송이 민감한 정치적 현안이 된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 조선 후기 성리학의 흐름이었다. 양란(兩亂:임진·병자) 이후 피지배 백성의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 커지자 서인 유학자들은 예학(禮學)을 강화해 신분제를 고수하려 했다.

 

양반에서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宋翼弼)이 조선 예학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것 또한 모순일 수밖에 없는데, 광산김씨 27(世)김장생(金長生)은 송익필의 예학을 크게 발전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김장생의 예학은 아들 김집(金集)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로 계승되면서 조선 성리학의 주류가 되었다.

 

서인이 율곡의 개혁사상을 사장시킨 채 예학을 조선 사상의 주류로 만든 이유는 백성의 신분제 철폐 움직임에 맞서 지배층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예(禮)란 본질적으로 하(下)가 상(上)을 섬기는 형식적 질서일 수밖에 없었다.

둘째, 효종에 대한 서인의 이중적 태도였다. 인조반정 후 서인에게 임금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사대부 중의 제1 사대부에 불과했다. 효종이 왕통은 이었지만 가통으로는 둘째 아들에 불과하다고 나누어 생각했다.

 

효종에 대한 이런 이중적 태도가 예송 논쟁의 발단 원인이었다. 고대 『주례(周禮)『나 『주자가례』 등에서 규정하는 상복(喪服)은 다섯 종류가 있었다. 참최(斬衰:3년), 재최(齋衰:1년), 대공(大功:9개월), 소공(小功:5개월), 시마(<7DE6>麻:3개월)가 그것이다.

 

부모상에는 자녀가 모두 3년복을 입고

 

자식상에도 부모가 상복을 입었다.

 

장자(長子)의 경우는 3년, 차자(次子) 이하는 1년복이었다.

 

효종 승하 때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기간이 문제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왕통을 이었지만 가통(家統)으로는 차자로 여긴 것이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큰 폭발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부왕의 급서로 경황이 없던 18세의 왕세자(현종)에게 예조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 발단이었다. 예조는 대비의 상복 규정에 대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와 있지 않다면서 “혹자는 당연히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혹자는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상고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대신들과 의논하소서”(『현종실록』 즉위년 5월 5일)라고 주청했다. 서인 대신은 대부분 1년복이 맞다고 생각했다.

국왕이지만 차자라는 생각이었다. 집권 서인의 의견에 따라 그렇게 결정되려 할 때 전 지평 윤휴(尹휴)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의례(儀禮)』 ‘참최장(斬衰章)’의 주석에 ‘제일 장자가 죽으면 본부인(嫡妻) 소생의 제이 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고 쓰여 있다는 점을 들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황한 왕세자(현종)는 “두 찬선(贊善)에게 모든 것을 문의하라”고 명하는데 두 찬선은 송시열과 송준길이었다.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윤휴의 3년복설을 듣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서한을 보내 의견을 묻자 정태화는 송시열에게 되물었다. 송시열은 “예법에 천자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次長子:둘째아들)를 세우면 그 복제 역시 장자와 같습니다만 그 아래 사종지설(四種之說)이 있습니다”(『현종실록』 즉위년 5월 5일)고 답했다.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예외 사항인 사종지설(四種之說)은 극도로 민감한 문제였다. 송시열은 정태화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①정이불체(正而不體)는 맏손자가 승중(承重)한 것이고, ②체이부정(體而不正)은 서자(庶子)가 후사가 된 것이고, ③정체부득전중(正體不得傳重)은 맏아들이 폐질(廢疾:불치병)에 걸린 것이고, ④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는 서손(庶孫)이 후계자가 된 것입니다.”(『국조보감』현종 즉위년)

부모가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경우는 ①손자가 후사를 이은 경우 ②장자가 아닌 아들(庶子)이 후사를 이은 경우 ③장자가 병이 있어 제사를 받들지 못한 경우 ④맏손자 아닌 손자(庶孫)가 후사를 이은 경우라는 설명이었다.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은 이때 송시열이 정태화에게 “인조(仁祖)로서 말하면 소현의 아들이 정이불체이고 대행대왕(효종)은 체이부정입니다”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정태화가 깜짝 놀라 손을 흔들어 막으면서 “예가 비록 그렇다 해도 지금 소현에게 아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이론으로 지금 논의하는 예의 근거로 삼겠습니까?”라고 말렸다.

송시열은 ‘이택지에게 보낸 편지(與李擇之)’에서 “영상(정태화)이 머리를 흔들어 말리면서 ‘소현에게 아들이 없다면 정이불체라는 말을 할 수 있지만 내가 지금 어떻게 감히 이 설을 말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송시열은 또 정태화가 “제왕가(帝王家)의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그 때문에 큰 화(禍)가 일어나는 것이 많습니다.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으니 정이불체 같은 말이 훗날 한없는 화의 근본이 될까 두렵습니다”는 말도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정태화와 송시열은 국제(國制), 곧 『경국대전』을 근거로 1년으로 의정해 올렸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의 ‘오복(五服:다섯 가지 상복)조’에는 장남과 차남의 구별 없이 ‘기년(期年)’으로 기록된 것에 착안한 것이다. 속으로는 효종을 체이부정으로 여겼지만 겉으로는 『경국대전』에 따라 장남으로 대우한 것처럼 편법을 쓴 것이다.

 


그런데 장남과 차남은 구분하지 않았던 『경국대전』은 장자처(長子妻:큰며느리)는 기년(期年:1년), 중자처(衆子妻)는 대공(大功:9개월)이라고 구분해 놓아 15년 후 제2차 예송 논쟁의 불씨가 된다.

 

현종은 1년복설이 내심 불쾌했지만 송시열 같은 예학자들의 논리를 반박할 학문이 없었다. 그러나 커다란 내부 모순을 안고 있는 이 문제가 그냥 덮어질 수는 없었다.

 


국왕 장례 예법 둘러싼 사대부 싸움, 王權만 추락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 | 제118호 | 20090613 입력

 

집권 서인들은 겉으로는 효종을 국왕으로 여겼으나 속으로는 차자(次子)로 낮춰 보았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정당이 집권하면 불필요한 정쟁이 빈발한다. 겉과 속이 다르니 논리의 모순이 생기고 반대편이 이를 지적하면 정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송 논쟁은 일인(日人)들의 주장처럼 무의미한 당쟁이 아니라 효종의 종통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기에 치열했던 것이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에 있는 윤선도 사당. 윤선도는 효종의 사부였으나 격정적 성격 때문에 자주 논란에 휩싸였다. 예송 논쟁 때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끝내 함경도 삼수로 귀양가게 된다. 사진가 권태균
국란을 겪은 임금들 현종② 예송 논쟁의 칼날

왕조국가에서 왕위를 계승한 국왕에게 장자니 차자니 따지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집권 서인은 송시열·송준길의 예론에 따라 효종을 차자로 여겨 1년복으로 의정했으나 겉으로는 국제(國制:경국대전)에 따른 것처럼 위장했다.

 

남인 윤휴가 “무릇 제왕가의 사체는 사가(私家)와 아주 다르므로 대비가 대행대왕(효종)에 대해 참최복(3년복)을 입는 것이 옳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5월 5일)”고 반발한 것처럼

 

이 문제는 윤휴처럼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느냐, 송시열처럼 왕가 역시 사대부가(家)와 같다고 보느냐의 문제였다
.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에 있는 허목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삼척부사 시절 동해를 예찬하는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전서체(篆書體)로 이 비를 세워 바다를 달래자 범람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복제뿐만 아니라 효종의 장지(葬地)도 문제였다.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摠護使)인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장지를 간심(看審)하러 가면서 효종 말년에 파직된 윤선도(尹善道)를 대동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윤선도는 풍수에 밝았다.

 

『현종실록』은 윤선도가 효종의 대군 시절 스승이었으므로 현종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전하는데 그런 윤선도가 천거한 곳은 수원이었다.

 

서울 홍제동도 유력 후보였으나 현종은 효종이 생전에 홍제동이 멀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윤선도의 주장대로 수원으로 결정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현종 즉위년조는 ‘당초 수원부에 석물(石物)을 세우는 일까지 진행했다’고 전하는데 송시열이 계속 홍제동을 고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송시열은 수원이 오환(五患)의 염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례편람(四禮便覽)』 상례(喪禮)조는 장지를 가릴 때 피해야 하는 오환(五患)으로 앞으로 도로·성곽·연못이 되거나 세력가에게 빼앗기거나 농지가 될 곳이라고 적고 있다.

 

그래서 현종은 부왕을 즉위년(1659) 10월 홍제동에 안장했으니 영릉(寧陵)이었다. 그러나 현종 14년(1673) 석물에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으로 천장(遷葬)하는 것처럼 문제 있는 자리였다.

송준길의 별당인 동춘당.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 있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는 송시열과 함께 1년복설을 지지했다.

자의대비의 복상이 거의 끝나가는 현종 1년(1660) 3월 16일. 사헌부 장령 허목이 상복 문제를 다시 제기하면서 예송 논쟁이 재연되었다.

 

남인 허목은 상소문 서두에서 대비가 당연히 3년복을 입는 줄 알고 있다가 시골로 내려온 후 기년복을 입는 줄 알게 되었다면서 “당초 상사 때 너무 황급한 나머지 예를 의논한 여러 신하가 혹시 자세히 다 살피지 못해 이런 실수가 있었던 것입니까?”라고 추측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후한(後漢) 정현(鄭玄)이 지은 『의례주소(儀禮注疏)』의 「상복 참최장(喪服斬衰章)」을 근거로 삼았는데 핵심은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대신 세우고 역시 장자(長子)라 이름한다”는 구절이었다. 이 경우 효종은 장자가 되므로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했다.

“소현(昭顯)이 일찍 세상을 뜨고 효종이 인조의 제2장자로서 이미 종묘를 이었으니대왕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또 임금의 자리에 오르셨으니 당연히 존엄한 정체(正體)인데도 그 복제는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3년을 입을 수 없는 자와 같게 했으니 신은 그 근거를 모르겠습니다.(『현종실록』1년 3월 16일)”

허목의 말에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 현종이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자 송준길이 나섰다.

 

만약 허목의 말대로라면 가령 사대부의 적처(適妻) 소생이 10여 명인데, 첫째 아들이 죽어 그 아비가 3년복을 입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죽으면 그 아비가 또 3년복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다섯째·여섯째가 차례로 죽을 경우 그 아비가 다 3년을 입어야 하는 데, 아마 예의 뜻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현종실록』1년 3월 20일)”

송준길이 자식이 모두 먼저 죽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논리가 부족했다. 허목은 재차 상소를 올려 송준길이 자신의 뜻을 곡해했다고 주장했다. “신의 말은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立嫡以長)’는 뜻입니다…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아버지의 뒤를 이은 ‘정체(正體)’라는 것이지 첫째 아들이기 때문에 참최복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현종실록』1년 4월 10일)”

먼저 죽은 아들이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정체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는 것이지 장자냐 차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허목은 “효종은 인조의 체(體)를 계승한 적자이고 종묘를 이어받아 일국의 임금이 되었는데 지금 그의 상에 3년 복제를 쓰지 않고 강등해서 기년(期年)으로 한다면, 체이부정(體而不正:서자가 후계자가 된 경우)의 복제입니까? 정이불체(正而不體:손자가 후계자가 된 경우)의 복제입니까?(『현종실록』1년 4월 10일)”라며 효종을 둘째로 대우하려는 서인들의 아픈 속내를 찔렀다.

『당의통략』이 ‘처음에는 사람들이 윤휴의 설을 더 지지했으나 서인들이 송시열을 높이 받들고 숭상하므로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라고 쓴 것처럼 예론에 따르면 윤휴와 허목이 맞았다. 남인들이 작성한 『현종실록』의 사관은 허목의 상소에 대해 ‘그때 군신(群臣)들은 다 허목의 말이 정론이라면서도 시의(時議)에 저촉될까 두려워 한 사람도 변론하는 자가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윤선도가 송시열을 직접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파란을 일으켰다. “성인이 상례(喪禮)에 있어 오복(五服)의 제도를 정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라고 시작하는 윤선도의 상소문은 송시열을 직접 지목하고 있었다. “송시열은…(장자가) 성인이 돼 죽으면 적통이 거기에 있어 차장자가 비록 동모제(同母弟)이나 이미 할아버지와 체(體)가 되었고, 이미 왕위에 올라 종묘를 이어받았더라도 끝까지 적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니 그 말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효종의 장지 선정 싸움에서 패한 윤선도의 언사는 거칠었다
. “차장자가 부친과 하늘의 명을 받아 할아버지의 체(體)로서 후사가 된 후에도 적통이 되지 못하고 적통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한다면, 이는 가짜 세자(假世子)란 말입니까? 섭정 황제(攝皇帝)란 말입니까?(『현종실록』 1년 4월 18일)”

서인들이 세운 논리의 모순을 정확히 뚫어본 말이지만 ‘가세자·섭황제’ 운운한 것은 역공을 받을 소지가 충분했다. 먼저 김수항(金壽恒)을 비롯한 승지들이 윤선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현종은 “윤선도의 심술이 바르지 못하다”며 관작을 삭탈하고 향리로 쫓아냈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가형(加刑)을 요구했다. 『당의통략』이 “윤선도의 상소를 보고 남인들이 이를 빌미로 송시열을 죽이고 서인들을 축출하려는 것을 알았다”고 적고 있듯이 이 문제는 이제 예송 논쟁이 아니라 직접적인 권력투쟁이었다.

부제학 유계(兪棨)와 사간원은 윤선도에게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남을 무고하면 해당 형벌을 자신이 받는 게 반좌율인데 사간원에서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했다는 죄를 송시열 등에게 씌우려 했다’고 공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반좌율이 적용되면 사형이었다. 서인들의 치열한 공세로 윤선도가 위기에 빠지자 우윤(右尹) 권시(權<8AF0>)가 옹호하고 나섰다.

“항간에서도 송시열·송준길의 잘못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감히 못하고 뱃속으로는 비방하면서도 입으로는 말을 못하는데, 이것이 태평성대의 기상입니까? 신은 성조(聖朝)를 위하여 걱정하고 그 두 사람을 위해서도 걱정하고 있습니다.(『현종실록』 1년 4월 24일)”

권시는 “대왕대비 복제가 당연히 3년이어야 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며 “윤선도가 남을 꾸짖고 참소한 것은 매우 나쁜 짓임에 틀림없으나, 자기 몸에 반드시 화가 닥치리라는 것도 계산하지 않고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했는 데 역시 감히 할 말을 하는 선비입니다.(『현종실록』 1년 4월 24일)”라고 옹호했다.

 

서인들은 일제히 권시를 비난했고, 그는 벼슬을 내놓고 낙향했다. 윤선도는 상소가 불태워지고 극변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그래도 진사 이혜(李혜) 등 142명이 다시 윤선도를 공격하자 현종은 드디어 예송 자체를 금지시켰다. 기년복제는 국제(國制)에 따른 것이지 차자로 대우한 고례(古禮)를 따른 것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1차 예송은 외견상 송시열과 서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현종은 ‘만일 다시 복제를 갖고 서로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중형을 쓰겠다’며 거론 자체를 금지시켰으나 왕권은 이미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국왕의 복제를 두고 신하들이 싸운다는 것 자체가 왕권의 추락이었다. 게다가 서인들은 효종을 차자로 본 속내를 국제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포장과 내용물이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15년 후의 2차 예송 논쟁이었다.


양반들의 조세 저항, 7년 걸린 대동법 호남 전역 확대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19호 | 20090621 입력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이 자신의 개인적·계급적 이익을 뛰어넘는 위민(爲民)정치를 펼치는 경우는 드물다. 조선처럼 양반 사대부만이 정치를 할 수 있었던 나라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김육과 이시방 같은 소수의 관료들은 계급적 이익을 뛰어넘어 백성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나라 전체의 이익을 추구했다. 그것이 대동법이자 시대를 뛰어넘는 정치(正治)였다.
김홍도가 그린 ‘벼타작.’ 대동법은 농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담시키고 빈농에겐 면제해 주는 세법이었기에 조세 저항이 심했다(큰 사진). 오른쪽 작은 사진은 호서대동사목 표지와 호서대동절목 서문. “군자가 태어나 학문에 힘써 벼슬하는 것이 어찌 혼자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한 것이겠는가. 장차 그 뜻을 백성들에게 베풀려는 것이다”는 말이 적혀 있다.
三宗의 혈맥 현종③ 공납 개혁 갈등

현종 즉위년(1659) 9월 송시열(宋時烈)은 효종의 묘지문을 지어 올리면서 “신의 기억에 따르면 봄에 삼가 대행대왕(효종)의 옥음을 들었는데 ‘마땅히 가을에 가서 호남 산군(山郡)의 대동법 실시에 대해서 의논해 결정해야겠다’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현종실록』 즉위년 9월 3일)”라고 말했다.

 

현종은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는 일은 경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 어찌 알았겠는가? 마땅히 의논해 처리하겠다”고 답했다.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되었다가 효종 2년(1651)에 호서(湖西:충청도)에 확대 실시되었고 효종 9년(1658)에는 전라도 해읍(海邑:바다를 낀 읍)으로 다시 확대되었다. 효종 10년(1659) 호남 산군(山郡:내륙 군현)에도 실시하기로 했으나 그해 5월 효종이 급서하면서 무산된 것이었다.

송시열이 호남 산군의 대동법 시행을 찬성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의외였다.

 

효종 즉위 초 서인들은 대동법 실시를 찬성하는 청풍김씨 김육(金堉) 중심의 한당(漢黨)반대하는 광산김씨 김집(金集)·송시열 중심의 산당(山黨)으로 분당되었는데 당시 송시열은 대동법 반대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이다. 대동법은 각 지역의 특산물을 진상(進上)하거나 각 관아에서 쓰는 물품을 바치는 공납(貢納)을 쌀로 대체하자는 법이었다. 공납은 가짓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어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되었고 그 군현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형평에 맞지 않는 점이었다. 광대한 농지를 소유한 양반 전주(田主)나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전호(佃戶:소작농)의 납부액이 비슷했다. 여기에 방납(防納)의 폐단까지 더해졌다. 방납업자들은 경아전(京衙前)의 관리들과 짜고 자신들의 물품을 사서 구입해야만 납부를 받아주게 했다.

 

방납업자와 관리들이 챙기는 뇌물 성격의 수수료가 인정(人情)인데, 현종 2년(1661) 4월 영부사 정유성(鄭維城)이 “인정(人情)으로 드는 비용이 원래의 공물 값보다 두 배나 드는 형편이라서 가산을 탕진하고 떠돌아다니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배보다 배꼽이 컸다.

 

대사간 윤황(尹煌)은 “손에는 진상품을 들고 말에는 인정물(人情物)을 싣고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인조실록』 14년 2월 10일)”라고도 말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고향을 버리고 유랑할 정도로 폐단이 컸지만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부과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농지 면적으로 바꾸고 쌀로 일괄적으로 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는 ‘대동법 시행비’. 효종 10년(1659) 대동법 실시에 찬성하던 김육이 세웠다. 사진가 권태균
잡다한 공납을 쌀 하나로 통일했기에 대동(大同)이란 표현을 쓰는데 농지가 많은 부호들은 많이 내는 반면 전호(佃戶)들은 면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세정의에 가까운 이 법은 양반 전주(田主)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조선의 개혁정치가들은 조광조가 그랬고 율곡 이이가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 이 방안을 지지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 유성룡은 작미법(作米法)이란 이름으로 이 법을 실시했으나 종전(終戰)과 동시에 집중 공격을 받아 실각하고 이 법도 폐기되었다.

그러나 이 법에 대한 백성들의 희구가 컸기 때문에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된 이후 진통을 겪으면서 계속 확대 실시되는 과정을 걷고 있었다
.

 

효종이 재위 9년(1658) 7월 조정에 들어온 충청도 회덕 출신의 송시열에게 “호서(湖西:충청도)의 대동법에 대해서 백성들의 생각이 어떠하던가?”라고 묻자 송시열도 “편하게 여기는 자가 많으니 좋은 법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 효과는 컸다.

 

송시열이 당초의 견해를 일부나마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시방(李時昉) 때문이었다.

 

이시방은 인조반정 일등공신 이귀(李貴)의 아들이자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의 아우이기도 한데 그의 문집인 『서봉일기(西峯日記)』에는 그가 자주 송시열을 찾아가 대동법에 대해 역설하자 송시열도 “임금에게 진달하겠다”고 동의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양반 지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법에는 암초가 너무 많았다. 김육은 효종 9년(1658) 9월 임종 직전 상소를 올려 “신이 만약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져 일(대동법)이 중도에 폐지될 것이 두렵습니다”고 우려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육이 죽은 후에는 이시방이 대동법에 정치인생을 걸었으나 그 역시 현종 1년(1660) 1월 사망했다. 『서봉일기』는 이시방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내가 죽은 후에 누가 다시 대동법을 주장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고 적고 있다.

현종은 선왕의 결정사항이란 사실을 알고는 호남 산군으로 확대 실시 결심을 굳혔다. 그래서 재위 1년 6월 영의정 정태화가 전라감사와 다시 의논하자고 건의하자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은 이미 완전히 결정난 것이니 거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못박았다.

 

현종은 7월 11일 호남 산군의 대동법 시행을 결정하고 그 시행 절목은 연해(沿海) 각 읍에 준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막상 추수기가 다가오자 반대론이 다시 들끓었다. 가장 큰 명분은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이조판서 홍명하(洪命夏)는 현종 1년(1660) 9월 “금년 호남의 농사는 연해 지역은 흉년이지만 산군에서는 약간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의논이 대동법을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니 신은 의혹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시행을 주장했으나 소용 없었다.

흉년이 들어 더욱 더 실시해야 한다는 반대론은 파묻혀 버렸고 비변사(備邊司)는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흉년에 강행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백성’의 이름을 빙자해 반대했다. 그래서 대동법은 1년 연기되었으나 현종 2년이 되자 다시 반대론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김육의 아들인 공조참판 김좌명(金左明)은 사직 상소를 내면서 “호남에 안찰사로 나가 대동법을 시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경직(京職)이 스스로 향직(鄕職)을 자청한 드문 경우지만 비변사는 “대동법 시행 절목도 여기에서 요리할 수 있으니 그가 꼭 그 지역에 가 있은 후에야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반대했다. 그렇게 다시 1년이 더 연기되었다.

현종 3년(1662) 7월 김좌명은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올가을부터 실시할 예정인데, 영상이 장차 사신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마땅히 속히 의논해서 결정해야 합니다”라고 주청했다. 영상이 없다는 핑계로 다시 연기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다수 벼슬아치는 반대했지만 소수 신료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현종 4년(1663) 3월 12일 호남 산군에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1결당 가을에 쌀 7말, 봄에 6말을 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쌀을 납부해야 할 10월이 되자 전라도 유생 배기(裵紀) 등이 상소해 “대호(大戶:부유한 집)는 대호대로 귀한 쌀을 탕진하고 소호(小戶)는 소호대로 연역(煙役:잡역)에 시달린다”면서 “옛 법을 따르고 가혹한 정사를 제거하면 되는데 어찌 반드시 새로운 법과 특별한 정치를 별도로 만들 것이 있겠습니까?”라면서 대동법 혁파를 주장했다.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태화·홍명하·허적 등 삼정승은 물론 송시열도 반대로 돌아섰다. 그래서 현종 6년(1665) 12월 27일 호남 산군의 대동법은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명분으로 다시 혁파되고 말았다. 이 날짜『현종개수실록』은 “대동법을 설행한 후 소민(小民:가난한 백성)들은 다 편리하다고 말했으나 대호(大戶:부유한 백성)들은 한꺼번에 쌀을 내는 것을 어렵게 여겨 모두 불편하다고 했다. 조정의 논의도 혁파해야 한다는 자가 많았다”고 쓴 것처럼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조세저항이었다.

 

현종은 재위 7년(1666) 8월 말 각 도에 어사를 파견하면서 전라도에는 신명규(申命圭)를 보냈다. 신명규는 남루한 행색으로 촌락에 드나들며 대동법 민심을 수집한 후 “호우(豪右:부유하고 세력 있는 집)는 대동법 혁파가 편리하다고 말하고 잔호(殘戶:가난한 집)는 다시 실시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현종실록』 7년 10월 22일)”라고 현장의 민심을 전했다.

 

『승정원일기』 현종 7년 11월 10일자에 따르면 현종은 “지금 어사의 옥계(玉啓)를 보니 (대신들의 말과는 달리) 백성들이 대개 대동법이 다시 실시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면서 “어느 것이 진실이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김좌명을 비롯한 대신들이 재실시를 주장했고 호남 산간의 대동법은 현종 7년 말 다시 살아났다. 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전국을 초토로 만드는 현종 11~12년의 (1670~1671) 경신대기근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층의 희생과 대동법, 天災에서 나라를 건져내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21호 | 20090705 입력

 

유례를 찾기 힘든 경신 대기근을 맞아 조선은 기민(饑民) 살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소빙기(小氷期)의 재앙에 맞서 수도(修道)하는 자세로 재난 극복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망국 지경까지 갔던 나라가 되살아났다. 위기를 맞이하고도 당리당략 외엔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 정치권이 되돌아볼 만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18세기께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해동지도’의 경기도 편. 조정은 대동법 등으로 확보한 곡식을 조운을 통해 기근이 든 고장에 옮긴 다음 기민 구제용으로 풀어 많은 백성을 살렸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현종⑤ 대기근 극복

현종 11년(1670:경술년)∼12년(신해년)의 경신 대기근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변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현종 11년 8월 전라감사 오시수(吳始壽)는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깔렸고, 무리를 지어 겁탈까지 했으며, 조금 익어 가는 곡식이 있으면 전주(田主)를 묶어 놓고 공공연히 베어 가며 들판에 방목하는 소와 말을 대낮에 잡아먹지만 감히 물어보지도 못합니다”(『현종실록』 11년 8월 10일)라고 보고했다.

한해(旱害:가뭄)·수해(水害)·냉해(冷害)·풍해(風害)·충해(蟲害)의 오재(五災)에 인간 전염병과 가축 전염병이 가세한 칠재(七災)였다. 여기에 겨울 혹한(酷寒)까지 팔재(八災)가 되었다. 전라감사는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해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는데 집에 조금의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합니다. 심지어 무덤을 파내 관을 쪼개 시신의 염의(斂衣)를 훔치기도 합니다”(『현종개수실록』 12년 1월 11일)라고도 보고했다.

(위) 가흥창이 있던 충청도 충주 가금면 가흥리의 수운판관 공덕비.(아래) 공세창이 있던 충청도 아산 인주면 공세리의 해운판관 공덕비. 해운판관은 곡식의 수송을 책임졌다.
현종 12년 2월 보성군의 교노(校奴) 일명(日命)과 남원부의 어영군(御營軍) 김원민(金元民) 등이 무덤을 파 옷을 벗겨 팔다가 시신의 친척에게 발각되었다. 대명률(大明律) ‘발총(發塚:무덤을 파헤침)’조는 “관곽(棺槨)을 열고 시신을 본 자는 교수형”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도 이들은 추위가 극심했기 때문이라고 무심하게 자백했다. 경상도도 마찬가지였다. 경상감사 민시중(閔蓍重)은 그해 4월 참혹한 정경을 보고했다.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10여 세의 어린 아들이 이웃집을 도둑질했다고 물에 빠트려 죽였으며, 또 한 여인은 서너 살짜리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 않고 갔으며, 금산군(金山郡)의 굶주린 한 백성은 죽소(粥所:죽을 제공하는 곳)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 아내는 곁에서 죽을 다 먹고 난 다음에야 곡했습니다.”(『현종실록』 12년 4월 6일)

굶주린 백성들은 관아 창고에도 손을 댔다. 현종 12년 11월 함경도 길주(吉州)의 허홍(許泓) 등 150여 명은 관고(官庫)의 감관(監官)이 진휼곡 대출을 미루자 관고에 난입해 곡식 35석을 3두씩 나누어 가진 후 각자 이름을 써 후에 환납(還納)하자고 약속했다. 함경감사 홍처후(洪處厚)는 주동자 5인을 강도률(强盜律)로 목을 베려 했으나 영의정 허적과 이단하 등이 감관의 잘못도 있다고 옹호해 가볍게 처벌했다. 그러나 반란사건에 대한 처벌은 강력했다. 금산의 향청(鄕廳) 좌수(座首) 이광성(李光星) 등이 50여 명을 모아 덕유산 깊은 계곡에 진을 치고 용담(龍潭)·무주현의 무기와 곡식을 탈취하려던 사건이 발생했는데 반역으로 규정되어 39명이 사형당했다. 이런 와중에 병사자와 아사자가 잇따랐다.

“이달에 서울에서 굶거나 병을 앓아 죽은 자가 1460여 명이었고 각 도에서 죽은 수가 1만7490여 명이었다…도적이 살해하고 약탈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호남·영남이 가장 심했고, 두 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소와 가축도 다 헤아릴 수 없었다.”(『현종실록』 12년 6월 30일)

6월 한 달 동안 1만7000여 명이, 8월에는 서울에서 250여 명, 각 도에서 1만5830여 명이 죽었다. 소빙기가 불러온 대재앙이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국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종 11년 7월 23일 “관고의 곡식도 이미 바닥났다”면서 “오늘의 계책은 온갖 벌인 일들을 정지시키고 번잡한 비용을 줄여 오직 구황 정책에 전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고 건의했다. 국가의 모든 역량을 굶주린 백성 살리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태화는 진휼청(賑恤廳)을 상시 가동하고 인상했던 관료들의 녹봉도 줄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닷새 후인 7월 28일 양심합(養心閤)에서 재난대책회의가 열렸다. 병조판서 김좌명은 “어영미(御營米) 5000석을 취해 사용하되 군량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자를 더해 다시 갚아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전시 대비 비축곡까지 임시로 방출하겠다는 뜻이었다. 진휼에 쓸 총 가용 경비를 뽑아 보니 ‘은 7100냥, 포 960동, 쌀 3만 석, 벼 1만 석’이었다. 왕실에 바치는 각종 공물과 관리들의 녹봉을 줄이면 쌀 3만6760석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임금은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금주했으며 백관은 봉급을 줄여 만든 비용으로 기민(饑民) 살리기에 나섰다. 병자를 치료하는 활인서(活人署)와 죽을 제공하는 진휼소(賑恤所)가 중심이었다.

현종 12년 1월 16일 선혜청·한성부·훈련원 세 곳에 진휼소를 설치했는데, 『현종개수실록』은 “첫날 죽을 먹은 자가 6000여 명이었고 다음 날에는 1만 명을 훨씬 넘었다”고 전하고 있다. 진휼소에 나올 수 없는 사대부가의 부녀자들에게는 따로 곡식을 제공했다. 기민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1월 25일에는 1만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한성부는 삼강(三江)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조석으로 진휼소까지 오기 어렵다면서 용산과 홍제원에도 진휼소를 설치했다. 지방 각 관아도 진휼소를 운영했다. 또 동소문 밖 연희방의 동활인서, 남대문 밖 용산강의 서활인서에서는 병자들을 치료했다. 현종 12년 5월 비변사는 “두 활인서에 1000여 명의 병자가 있고 사막(私幕)에도 7860여 명이 있다”면서 “막에서 나간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죽은 자가 많다는 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 만합니다”(『현종실록』 12년 5월 11일)라고 보고했다.

진휼소 덕분에 무수히 많은 백성이 살아났지만 곡식이 부족해 무한정 운영할 수도 없었다. 『현종실록』 12년 5월 15일자는 “각 도의 굶주린 백성에게 진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는데 보릿가을 철이 되었고 또 안팎의 저축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내쫓은 것은 아니었다. 서울 진휼소의 3만2040여 명 중 서울 백성 1만9570여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 먹을 양식을 주어 보냈다. 자활하라는 뜻이었다.

마지막 방안은 청나라에서 곡식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현종 11년 겨울부터 일부 관료가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현종 12년 6월 형조판서 서필원(徐必遠)이 공사 간의 모든 저축이 바닥났다면서 “외간에서 곡식을 빌리자는 의논이 많아 감히 아룁니다”라고 공론화했다. 그러나 『현종실록』은 “불가하다는 신하가 많아 서필원의 의논은 시행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굶주린 백성 앞에서도 이념을 앞세웠던 것이다.

 

게다가 대기근을 정략에 이용하는 당인(黨人)도 있었다. 현종 12년 12월 5일 헌납 윤경교(尹敬敎)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토착 농민의 수를 온 나라를 합해 계산하면 거의 100만 명에 이릅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경교의 상소는 남인 영상 허적(許積)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종은 영의정 정태화가 재위 12년 칠순이 되었다는 이유로 거듭 사직을 요청하자 그해 5월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정치화(鄭致和)를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윤경교는 남인이 영의정으로 있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는 뜻에서 현종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심지어 “전하께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시상(時相:허적)의 말은 모두 굽혀서 따르시면서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유현(儒賢:송시열)의 아룀에 대해서는 어찌 한결같이 머뭇거리고 어렵게 여기십니까”라고도 비판했다.

현종은 크게 분개해 “윤경교는 간관(諫官)으로 오래 있으면서 나라를 근심하는 말이 일언반구도 없었다…당(黨)을 끌어들이고 남의 뜻에 부합했다”고 비판하면서 체차(遞差:갈아치움)시켰다. 이처럼 대기근 앞에서도 당리당략을 앞세운 일부 무리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기근 극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하늘이 왕조를 버린 듯한 천재(天災)가 왕조 타도 투쟁으로 전환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동법도 큰 역할을 했다. 경신 대기근을 극복한 현종 14년 11월 전 사간(司諫) 이무(李무)는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대소 사민(士民)이 서로 ‘우리가 비록 신해년(현종 12년)의 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동법의 은혜입니다. 대동법 이전에는 농지 한 결(結)에 쌀을 60두씩 바쳐도 부족했지만 대동법 이후에는 한 결에 10두씩만 내어도 남습니다. 만약 대동법을 혁파한다면 백성이 굶주리고 흩어져도 구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승정원일기』 현종 14년 11월 21일)

 


국가나 정치권이 백성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는 좋은 정책과 시의에 맞는 법 제정이란 뜻이다

 

오만한 西人에 분노한 임금, 정권 바꾸려다 의문의 죽음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22호 | 20090712 입력
국가 통치이념이 현실에서 벗어나 사변(思辨)으로 흐르면 이미 사회 통합과 선도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예송논쟁은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처럼 무의미한 논쟁은 아니었으나 경신 대기근을 겪은 나라가 걸어야 할 길은 아니었다.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식량이었으나 집권 서인은 겉과 속이 다른 예론에 집착했다.

 

예론은 자신들의 당파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외피에 불과했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는 효종 부부의 영릉(寧陵).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죽음은 1, 2차 예송논쟁을 각각 촉발했다. 1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서인은 2차 예송논쟁으로 몰락했다.
三宗의 혈맥 현종⑥ 34세에 요절하다

김수항 초상. 현종 15년 판중추부사 김수항은 형인 영의정 김수흥과 함께 송시열의 대공복설을 지지하다 실각했다
현종은 재위 기간 내내 대기근과 왕권 약화에 시달렸다.

 

조선의 약한 왕권은 청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대기근에 시달리던 현종 12년(1671:신해년) 2월 북경에 갔던 동지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67DF>)은 청나라 황제가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이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하기 때문(臣强)이라고 한다. 돌아가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고 말했다(『현종실록』

 

12년 2월 20일)”고 산해관(山海關)에서 보고했다. 현종의 사촌인 복선군이 “어찌 신하가 강해 백성이 이렇게 굶주릴 이치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박하자 강희제(康熙帝)는 “정사(正使)가 국왕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말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청에서 보기에 국왕이 승하했는데 신하들이 3년복이니 1년복이니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이상현상이었다.

그런데 기해년(현종 즉위년:1659)의 1차 예송논쟁 15년 후인 갑인년(현종 15년:1674) 2월 23일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면서 이상현상이 재발할 조짐이 보였다.

 

기해 예송 때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은 효종을 둘째 아들로 보아 기년복(1년복)으로 의정했으나 겉으로는 ‘장자·차자 구별 없이 기년복으로 규정되어 있는 국제(國制:경국대전)를 쓴 것’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현종은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의정한 것으로 믿었다.

 

『경국대전』 ‘오복(五服)’조는 아들이 먼저 죽었을 때 장·차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1년복을 입게 되어 있었으나 맏며느리인 장자처(長子妻)의 경우는 1년, 기타 며느리인 중자처(衆子妻)는 대공복(大功服:9개월복)을 입는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했을 당초 예조판서 조형(趙珩) 등은 기년복으로 의정해 올렸다.

그러나 2월 27일에는 기년복이 잘못이라며 대공복으로 바꾸겠다고 수정했다. 남인이 편찬한 『현종실록』은 이에 대해 “송시열의 당(黨) 사람들이 송시열의 의논과 다른 것을 미워해 옥당(玉堂:홍문관)에 편지를 보내니 예조판서 조형 등이 시의(時議)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 대공복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대공복은 왕비를 기타 며느리로 대접하는 것이었으므로 문제가 있었으나 1차 예송 때 윤선도가 삼수로 귀양 간 전례가 있었으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칠순의 노구를 끌고 서울로 올라와 대궐 문 앞에 꿇어앉아 상소문을 봉입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승정원은 “예송은 금지되어 있다”면서 반 달 이상 상소문 자체를 받아주지 않았다. 상소문은 현종 15년(1674) 7월 6일 현종의 손에 들어가는데 조부 청풍김씨 김육(金堉)의 장례 문제로 송시열과 싸운 좌부승지 김석주(金錫胄)가 전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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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김씨 김우명(1619∼1675)의 자는 이정(以定).

본관은 청풍(淸風). 대동법의 실시로 유명한 김육(金堉)의 아들이며

형은 병조판서 김좌명(=아들 : 김석주)

현종 비(妃)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아버지이다.

 

서기 1642(인조 20)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강릉참봉(江陵參奉)과 세마(洗馬) 등을 지냈다.

그의 딸이 태자빈이 되었는데, 서기 1659(효종 10)년 현종이 즉위하자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졌다. 1661년에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서인(西人)에 속했으나,

민신(閔愼)의 대부복상(代父服喪) 문제를 계기로 남인 허적(許積)에 동조하여 송시열과 사이가 벌어졌다.

숙종 초에는 복창군(福昌君)·복평군(福平君) 형제의 행패를 탄핵하였다.

그 뒤 반대파들의 질투가 더욱 심해지자 두문불출하였다.

당시 그를 가리켜 외서내남(外西內南)이라는 평판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겉으로는 서인에 속하지만 속으로는 남인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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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상복.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은 효종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였으나 성격상 사변적인 논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사진가 권태균
“대왕대비의 복제를 처음에는 기년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으로 고친 것은 어떤 전례를 따른 것입니까?…기해년 국상 때 대왕대비는 ‘국전(國典:경국대전)에 따라 기년복으로 거행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대공복은 국제 밖에서 나온 것이니 왜 이렇게 전후가 다르단 말입니까.(『현종실록』 15년 7월 6일)”

기해년 국상 때 근거로 썼던 경국대전에 따르면 대비의 복제는 기년복이어야 하는데 왜 대공복이냐는 항의였다.

 

도신징은 “안으로는 울분을 품고도 겉으로는 서로 경계하고 조심하면서 아직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해 입을 열어 말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탄했다.

 

실제로 도신징으로서는 목숨을 건 상소였다. 도신징의 상소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현종은 일주일 후인 7월 13일 대신들을 불렀다. 그 사이 자신의 견해를 정립했던 것이다.

현종은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에게 “15년 전의 일을 다 기억은 못 하지만 고례(古禮:고대 중국의 예)가 아닌 국제를 써 1년복으로 정했다고 기억한다”면서 “오늘의 대공복 또한 국제에 따라 정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대답이 궁색해진 송시열의 제자 김수흥은 고례와 국제를 뒤섞어 설명했다. 그러자 현종은 “이번 국상에 고례를 쓰면 대왕대비의 복제는 무엇이 되겠는가?”라고 물었고 김수흥은 ‘대공복’이라고 대답했다. 현종은 “기해년에는 시왕의 제도(時王之制:조선의 제도)를 사용하고 지금은 고례를 사용하니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라고 재차 물었다. 갑작스러운 부왕의 급서에 허둥대던 18세 청년이 아니었다. 현종은 다시 “이번 복제를 국제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자 김수흥은 “기년복”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현종은 “그렇다면 오늘의 복제는 국제와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해괴한 일이다”라고 되물었다. 김수흥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해년에 고례로 결정했으므로 다투는 사람이 저렇게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스스로 함정에 빠진 격이었다. 현종이 “고례대로 한다면 장자의 복은 어떠한가?”라고 묻자 김수흥은 “참최 3년복입니다”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현종은 도신징의 상소를 김수흥에게 건네주면서 “기해년에 과연 차장자(둘째)로 의정한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때 좌부승지 김석주가 “송시열의 수의(收議)에 ‘효종대왕은 인조대왕의 서자로 보아도 괜찮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송시열이 효종을 둘째로 봤다고 보고했다.

호조판서 민유중이 의논할 시간을 달라고 건의하자 현종은 ‘반드시 오늘 안에 의논해 보고하라’고 재촉했다.
시간을 주면 송시열과 논의해 당론을 정한 다음 집단적으로 대처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영의정 김수흥, 판중추부사 김수항(金壽恒), 이조판서 홍처량(洪處亮) 등의 대신들이 긴급히 회동한 후 계사를 올렸는데 기해년에 기년복으로 정한 근거만 장황하게 써 올렸다. 현종은 승전색(承傳色:왕명을 전하는 내시)을 시켜 “대왕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지 지적하여 결말지은 곳이 없다”고 지적하며 다시 의정하라고 명했다. 이때 대신들이 “국제에 따라 기년복을 입으셔야 합니다”라고 답했으면 예조의 몇몇 신하가 처벌받는 것으로 끝났을 문제였다. 현종이 여러 차례 ‘국제에 따르면 대왕대비의 복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물은 이유는 ‘기년복’이란 대답을 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인에게 효종은 둘째 아들이었고, 인선왕후도 중자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것이 당론이었으므로 김수흥은 ‘지금 예조가 대공복으로 의정해 올린 것이 맞는 것 같다’고 고수했다. 몇 차례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서인이 계속 대공복을 고집하자 드디어 현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계사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무상한 점에 대해 매우 놀랐다…경들은 모두 선왕의 은혜를 입은 자들인데…임금에게 이렇게 박하게 하면서 어느 곳(何地)에 후하게 하려는 것인가.(『현종실록』 15년 7월 15일)”

‘어느 곳’은 바로 송시열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이것이 왕실과 서인 사대부의 싸움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인 사대부는 왕실의 특수성을 부인하고 자신들과 같은 계급으로 보는 것이었다. 현종은 “당초 국전에 따라 정해진 자의대비 복제를 기년복으로 실행하라”고 단안을 내리고 예조판서 조형을 비롯한 예조 관료들을 투옥했다. 현종은 7월 16일에는 영의정 김수흥에 대해 “선왕의 은혜를 잊고 다른 의논에 빌붙은 죄를 결코 다스리지 아니할 수 없다”면서 춘천에 부처(付處)했다. ‘다른 의논’이란 물론 송시열의 설을 뜻한다. 그러자 승정원과 홍문관이 일제히 김수흥 구하기에 나섰다.

“내 심기가 매우 불편한데 대면을 청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대신을 위해서가 아닌가. 군신의 의리가 매우 엄한 것인데 너희는 전혀 생각도 안 한다는 말이냐?(『현종실록』 15년 7월 16일)”

승정원과 홍문관의 김수흥 구하기가 불발로 끝나자 이번에는 사헌부가 나섰다. 현종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를 살펴 탄핵하는 것이 대간(臺諫:사헌부)의 직책인데 오히려 남을 두둔하며 구하기에 급급했다’며 삭탈관작하고 도성에서 내쫓았다.

 

 

현종은 끝까지 효종을 둘째 아들로 취급하는 서인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했다.

 

남인 장선징(張善<7013>)을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을 판의금, 이하진(李夏鎭)을 사간으로 삼고 7월 26일에는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런데 정권을 남인으로 갈아치우기 시작한 직후부터 갑자기 현종은 뚜렷한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이 생겼다. 『현종실록』 8월 17일자는 ‘의관을 갖추어 입고 허적을 인견했다’고 적고 있으나 그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34세, 재위 15년, 정권을 갈아치우던 와중의 의문의 죽음이었다.

 

 

각종 재해와 강한 당파에 시달렸던 유약했던 임금이 처음으로 칼을 뽑아 휘두르는 도중에 저세상으로 간 것이다
.

 

 

그의 유일한 후사는 14세 숙종이었으므로 약체 왕실의 지속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

제19대 숙종 가계도 

현종 - 명성왕후  청풍김씨 김우명의 딸

제 19대 숙종

장남 : 숙종(1661-1720)

재위기간 : 1674.8-1720.6(45년 10개월)

부인 : 6명 / 자녀 : 3남 6녀

1부인

인경왕후

광산김씨

(김만기)

3녀

2부인

인현왕후

여흥민씨

(민유중)

자식없음

3부인

인원왕후

경주김씨

(김주신)

자식없음

4부인

희빈

인동장씨

(장형)

1남1녀

5부인

숙빈

해주최씨

(최효원)

1남2녀

6부인

명빈 박씨

1남

여(일찍죽음)

여(일찍죽음)

여(일찍죽음)

 

 

 

 

제20대

경종

성수(여)

영수(여)

 제21대

영조

(연인군)

?(여)

연령군

 

 

<읽기 참조> 서인(노론)은  붉은색 표기/ 남인& 소론은 파란색 표기

 

 

민생 무너지는데, 임금·사대부 눈엔 은진송씨 송시열만 보였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23호 | 20090718 입력
 
사회를 선도할 명분과 동력을 상실한 정치세력은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다. 이런 지배집단은 본질적 현안에는 눈을 감은 채 비(非)본질적 현상을 두고 사변적 논쟁에 몰입하게 된다. 이때 역사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호명한다. 비극은 이런 책무를 수행할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조선 후기가 이런 상황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른지 반문할 때다.
창경궁 명정전의 어좌.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지은 전각으로 용상 뒤에는 일월오악병이 있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숙종① 14세 소년 국왕

 


서인 정권을 갈아치우던 현종이 재위 15년(1674) 8월 18일 급서했을 때 외아들인 세자(숙종)는 14세였다. 어린 세자가 효종과 현종에게도 맞섰던 사대부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과연 현종이 세상 떠난 3일 후 원상(院相:어린 국왕을 보좌하는 재상)들은 예송논쟁의 당사자인 은진송씨 송시열도 원상으로 삼자고 제의했다. 왕세자는 이를 수락하고 사관(史官)까지 보냈으나 송시열은 단번에 거절했다. 송시열은 자신이 대죄하고 있다면서 “선침(仙寢:선왕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어찌 차마 갑자기 무죄로 자처(自處)하면서 임금 계신 곳에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숙종실록』 즉위년 8월 21일)”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죄인을 자처한 것이지만 실제는 항의의 표시였다.

세자가 왕위에 오른 8월 23일, 성균관 유생 이심 등은 송시열이 ‘덕을 쌓은 유학의 종주(宿德儒宗)’라면서 “현자(賢者)의 진퇴는 구차스럽게 할 수 없지만 군주의 정성스러운 예절이 어떠한가에도 달려 있다”며 ‘정성스럽게 모셔야 한다’고 상소했다.

 

같은 날 전 영의정 안동김씨 김수흥과 그를 구원하다 유배형에 처해졌던 간관(諫官)들에 대한 처벌도 모두 무효화되었다. 24일에는 숙종이 가주서(假注書) 이윤(李綸)을 보냈으나 송시열은 이미 서울을 떠나 버린 뒤였다. 이윤이 뒤따라가 국왕의 말을 전했음에도 광주(廣州)를 거쳐 수원으로 가 버렸다. 숙종은 송시열을 거듭 타이르면서 현종의 능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했으나 송시열은 모두 거부했다.

“얼마 전 여러 신하들이 득죄(得罪)한 것은 그 근원이 신에게서 나왔습니다. 선왕께서 여러 신하들을 벌할 때 신의 죄상이 여러 번 전교에 나왔지만 특별히 그 성명을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8일).”

벼슬이 아니라 벌을 달라는 주청이었다. 어린 국왕 길들이기였다. 그의 말대로 현종도 영의정 안동김씨 김수흥은 처벌했지만 은진송씨 송시열은 이름도 적지 못한 상대였다.

 

누가 보더라도 현종의 급서로 생긴 권력의 공백을 차지할 인물은 예순여덟 살의 송시열이지 열네 살의 숙종이 아니었다.

송시열이 우거하던 충북 괴산 화양계곡의 바위글씨들. 忠孝節義(충효절의)는 명 태조 주원장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蒼梧雲斷(창오운단) 武夷山空(무이산공)은 ‘임금 묻힌 창오산엔 구름이 끊어지고, 주자 계신 무이산도 비어 있구나’란 뜻이다.
그러나 9월 17일 작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동래정씨 정치화(鄭致和)를 정1품 영중추(領中樞)로 승진시키면서 영중추 송시열을 종1품 판중추(判中樞)로 강등한 것이다.

 

정치화는 제1차 예송논쟁 때 송시열에게 왕가의 일에 체이부정(體而不正)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영의정 정태화의 동생이었다.

 

18일에는 숙종의 장인 광산김씨 30世 김만기(金萬基)를 호위대장으로 삼고,

 

19일에는 인선왕후 국상 때 기년복(1년복)을 대공복(9개월복)으로 고쳐 올린 예조판서 조형(趙珩)을 비롯한 예조의 주요 관료들을 모두 귀양 보냈다.

 

남인들은 숙종이 현종의 유지를 이어 남인으로 정권을 교체하려는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9월 25일 진주 유생 곽세건(郭世楗)송시열을 겨냥한 상소를 올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 곽세건은 ‘선왕이 급서하는 바람에 왕법(王法)을 다 밝히지 못했으니 그 뜻을 따르는 달효(達孝)를 해야 한다’면서 송시열에게 지문을 짓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론(邪論)에 붙은 김수흥도 오히려 편배(編配:유배안에 기재됨)되었는데, 사론을 창도한 송시열이 어찌 헌장(憲章:법)에서 빠질 수 있습니까?… 송시열은 효묘(孝廟:효종)의 죄인이고, 선왕(현종)의 죄인이니 왕법을 시행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전하의 책무입니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25일)”라고 말했다.

『현종실록』은 곽세건이 현종 생존 시인 그해 5월에도 송시열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병조에서 기각했다고 전하고 있다.

 

좌부승지 청풍김씨 김석주(숙종의 외숙)곽세건이 계속 서울에 머물고 있다가 다시 상소를 올린 것이라면서 ‘삼조(三朝:인조·효종·현종)에서 예우하던 재야의 늙은 신하를 불측한 곳에 빠뜨리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숙종은 “알았다”라고 심상하게 답했다. 곽세건의 상소에 대해서도 역시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노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은 “승정원의 계달이 김석주에게서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다 시원하게 여겼으나 이때 임금은 이미 마음에 들어온 것이 있어서 (곽세건의 상소를) 끝내 엄히 배척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청풍김씨 김석주(숙종의 외숙)의 계달에 시큰둥하게 답한 것은 의외였다
. 김석주는 서인이면서도 2차 예송논쟁 때 서인 정권(숙종의 왕권강화?)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책략가였다.

 

서인들에게 곽세건은 묵과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다음 날 대사헌 여흥민씨 민시중(閔蓍重: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큰아버지) 등이 곽세건을 엄하게 국문하자고 청하자 숙종은 “금일 유생의 상소는 (그 말을) 쓰느냐 안 쓰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라며 거부했다.

 

남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조정의 서인 벼슬아치들과 관학 유생들은 곽세건 공격에 대거 가담했다.

 

숙종은 곽세건의 말을 ‘충언(忠言)이자 지론(至論)’이라고 옹호해 서인들을 다시 충격에 빠뜨렸다.

송시열이 ‘지문 찬술’을 계속 거부하자 청풍김씨 김석주에게 대신 짓게 했다. 이조참판 덕수이씨 이단하(李端夏)에게는 현종의 『행장』을 짓게 했는데 그는 송시열의 제자였다.

 

이단하는 현종의 『행장』에 “(예송논쟁 때) 실대(失對:국왕에게 대답을 잘못함)했다는 이유로 수상(首相:영의정)을 죄주었다”고 썼으나 숙종은 “다른 의논에 붙었기 때문에 수상을 죄주었다”라고 고치라고 명령했다. 다른 의논이란 물론 송시열의 예론이었다. 이단하는 스승의 이름을 쓰지 않으려 했으나 여러 번 독촉을 받고 “공경(公卿)들이 『의례(儀禮)』의 네 가지 설(四種之說: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경우)로써 대답했는데 이는 본래 송시열이 인용한(所引) 말이다”라고 이름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숙종은 “인용한(所引)의 소(所)자를 잘못한 오(誤)자로 바꾸라(『숙종실록』 즉위년 11월 30일)”고 명했다.

이단하는 할 수 없이 이를 고친 후 물러나와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자 숙종은 “이모(이단하)는 다만 스승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구나(『송자대전(宋子大全)』, 『수차(隨箚) 5권』)”라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했다.

 

경기 유생 이필익(李必益) 등이 상소해서 송시열을 옹호하고 곽세건을 먼 변방으로 내치라고 요구하자 숙종은 거꾸로 이필익을 먼 변방으로 유배 보냈다.

 

이 조치에 대사간 정석(鄭晳)과 관학 유생 이윤악(李胤岳) 등 90여 인이 항의하자 숙종은 “내가 어린 임금(幼主)이라고 그러는 것이냐? 내가 심히 통탄스럽고 해괴해서 똑바로 보지 못하겠다”고 꾸짖었다.

어린 숙종이 (김석주=숙종의 모친의 사촌오빠의 왕권강화 책략으로) 송시열을 꺾어 가면서 정권은 남인에게 넘어갔다
. 나아가 숙종은 재위 1년(1675) 1월 13일 드디어 송시열을 덕원(德源)으로 유배 보냈다.

 

송시열의 문인 최신(崔愼)이 쓴 『최신록(崔愼錄)』에 따르면 이때 충청도 진천의 길상사(吉祥寺)에 있던 송시열은 유배 소식을 듣고, “청풍김씨 김청풍(金淸風:김우명)의 계획이 지금에야 실현되었다. 지금까지 지체된 것은 임금의 참으심이 많으셨던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숙종의 외조부인 김우명이 부친 김육의 장례 문제로 송시열과 구원(舊怨)이 있었던 것을 빗댄 것이다.

 

송시열을 처벌하자 그 제자들은 사직하거나 나오지 않는 것으로 대응했다.

숙종은 재위 1년(1675) 5월 16일 “송시열이 죄를 입은 이래 조정의 신하들이 까닭 없이 나오지 않는 자들이 있다. 아! 아비가 죄를 입었어도 그 아들은 오히려 벼슬을 하는 것인데 하물며 스승이 득죄(得罪)했다고 그에게 배운 자가 나오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숙종실록』 1년 5월 16일)”라면서 그 제자들을 처벌했다.

 

일부 남인들은 ‘송시열이 효종의 역적이니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예송논쟁 때 송시열과 맞섰던 판부사 허목은 『죄인에게 형을 더하는 것을 반대하는 차자(請勿罪人加律箚)』를 올려 송시열이 “효종을 마땅히 서지 못할 임금으로 여겨 지존을 헐뜯고 선왕을 비방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셋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목은 형량을 가중해 송시열을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대부들이 송시열 문제로 당파가 갈려 날을 지새우는 동안 백성들은 생존에 허덕였다.

 

숙종 즉위년 8월 전국 각지에 거듭 우박이 내렸고, 9월에는 평안도에 긴 가뭄 끝에 홍수가 들고 서리와 우박이 겹쳐서 전야(田野)가 쑥밭이 되었다. 경신대기근을 기억하고 있는 안주(安州) 백성은 “내년 봄에 굶어 죽느니 오늘 자진(自盡)하는 것이 낫다”면서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같은 달에는 황해도·평안도·원양도(原襄道:강원도)·함경도에 비둘기 알만 한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쳤다. 국내뿐만 아니었다.

 

청나라에서는 내란이 한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송시열 문제로 날이 지고 해가 뜨고 있었다.

 

남원윤씨 윤휴 북벌론 꺾은 사대부들의 이중성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24호 | 20090725 입력
 
북벌론은 효종 사망과 동시에 사라진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현종 14년(1673) 청나라가 삼번(三藩) 철폐 문제로 내전에 휩싸이자 조선에서 다시 북벌론이 등장했다. 이때의 북벌론은 예송논쟁 때 송시열과 대립했던 남인 남원윤씨 윤휴가 주창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지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역사의 붓대를 잡은 자가 미래인의 뇌리를 지배하는 사례다.
 
강희제의 초상화. 9세에 왕위에 올라 69세까지 60년간 통치했다. 중국 임금 중 가장 오랜 기간 재위했다. 재위 시절 삼번(三藩)을 철폐하고 대만을 장악해 청조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숙종② 淸 내란의 호기

현종 말~숙종 초 청나라는 ‘삼번의 난’이라고 불리는 내전에 휩싸였다.

 

삼번은 청나라 남부에 있는 일종의 자치왕국들로서 오삼계(吳三桂)가 중심이었다. 명나라 총병(總兵)이었던 오삼계는 산해관(山海關)에서 청의 남하를 막아냈으나 1644년(인조 22년) 농민군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하고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이 자살하자 ‘황제의 원수를 갚자’는 명분(실제는 연정녀 진원원에 대한 복수극) 아래 청에 항복했다.

 

청나라 군사와 북경에 입성한 오삼계는 이후 청나라의 장수가 되어 남부의 섬서·사천성 등지를 점령하는 데 공을 세웠다. 청이 명의 항장(降將)들에게 분봉(分封)해 다스리게 한 것이 삼번이다.

 

오삼계를 평서왕(平西王)으로 봉해 운남(雲南)·귀주(貴州)성을 다스리게 하고, 상가희(尙可喜)를 평남왕(平南王)으로 봉해 광동(廣東)성을, 경중명(耿仲明)을 정남왕(靖南王)으로 봉해 복건(福建)성을 다스리게 했다.

1649년(인조 27년) 경중명이 죽자 아들 경계무(耿繼茂)가 정남왕의 지위를 세습한 것처럼 사실상 세습왕국같이 행세했다.

 

대륙 전체를 지배하기가 버거웠던 만주족이 한족에게 한족을 다스리게 한 ‘이한제한(以漢制漢)’이었다.

 

즉위(1662) 당시 강희제(康熙帝: 1654~1722)는 아홉 살의 소년이었으므로 청 태종(太宗)의 부인이었던 할머니 태황태후(太皇太后)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와 오배(鰲拜) 등 고명(顧命) 4대신의 도움을 받아 제국을 통치했다.

 

강희제는 열여섯 살 때인 재위 9년(1670)에 친정을 시작했으나 삼번엔 손을 대지 못했다.

 

재위 12년(1673:현종 14년) 3월 평남왕 상가희가 요동 귀향(歸鄕)을 요청하면서 아들 상지신(尙之信)에게 평남왕의 자리를 세습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강희제는 귀향을 허락했지만 세습은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두 번도 형식상 철번을 요청했으나 막상 철번을 받아들이면 내전이 발생할 분위기였다. 청 조정도 ‘철번 반대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청사고(淸史稿)』 근보(<9773>輔)열전에 따르면 강희제는 “친정 이후 삼번, 하무(河務), 조운(漕運)을 (국가) 삼대사(三大事)로 삼아 기둥에 써 놨다”고 전할 정도로 철번 의지가 강했다.

 

스무 살의 젊은 황제는 전쟁을 각오하고 철번을 명했다. 오삼계는 예상대로 천하도초토병마대원수(天下都招討兵馬大元帥)를 자칭하면서 군사를 일으켰고 두 번왕(평남왕과 정남왕)이 가세하면서 남부 전역이 전쟁터로 돌변했다. 전황은 불투명했으나 강희제가 불리하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중국 운남성 곤명시 외곽의 금전사(왼쪽). 금전사에 있는 신상들. 한족들 사이에서는 이 신상이 청나라에 맞섰던 오삼계 상이라는 구전이 전해 내려온다(오른쪽).
효종이 재위 10년(1659) 송시열과 독대에서 “틈을 봐서 저들이 예측하지 못할 때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가면 중원의 의사(義士), 호걸들이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희망했던 국제 정세가 조성된 것이다.

 

효종 같으면 비축미를 풀어 당장 압록강을 건넜을 상황이었지만 북벌 대의를 외치던 집권 서인은 조용했다.

 

청이 전란에 휩싸였다는 소식은 현종 15년(1674) 5월께는 지방 유생들도 알 정도가 되었다. 현종 15년 5월 16일 유생 나석좌(羅碩佐)·조현기(趙顯期) 등이 ‘오삼계의 거병으로 천하사세의 급변이 박두했다’며 “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훈련하고 식량을 저축한다면 크게는 치욕을 씻는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고 작게는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安國保民)”고 주장했다. 현종은 내용이 누설될 것을 우려해 비답하지 않았다.

훗날 제자들에 의해 북벌의 화신으로 추앙된 은진송씨 송시열은 정작 아무 말도 없는 상황에서 그해 7월 1일 비밀상소(密疏)를 올려 북벌을 주창한 인물이 남원윤씨 백호 윤휴(남인)였다.
윤휴는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정4품)과 사헌부 지평(持平:정5품) 등을 역임했으나 포의(布衣)로 자칭하며 상소를 올려 ‘효종이 10년 동안 북쪽으로 전진해 보려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며 북벌을 주창했다.

“우리나라의 정병(精兵)과 강한 활솜씨는 천하에 이름이 있는 데다가 화포와 비환(飛丸:조총)을 곁들이면 진격하기에 충분합니다. 군졸 1만 대(隊)를 뽑아 북쪽의 수도 연산(燕山:북경)으로 넓은 규모로 나아가 그 등을 치고 목을 조이는 한편 바다 한쪽 길을 터 정인(鄭人:대만)과 약속해 힘을 합해 그 중심부를 흔들어야 합니다…(『현종실록』 15년 7월 1일).” 윤휴는 ‘동시에 중국 북부와 남부, 일본에도 격문을 전해 함께 떨쳐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인(노론)이 작성한 『현종수정실록』은 “윤휴가 밀소(密疏)를 올렸으나 (현종이) 답하지 않았다”고만 쓰고 밀소의 내용에 대해서는 한 자도 적지 않는 대신 “윤휴는 얼신(얼신)의 자식으로서 거짓으로 유학자라는 이름을 빌려 집에 있으면서도 불의를 자행하고 또 선유(先儒)의 학설을 공척(攻斥)하였다”는 비난만 잔뜩 써놓았다
.

 

송시열이 아니라 윤휴를 북벌 주창자로 만들어줄 수는 없다는 당파적 오기였다.

이런 와중에 제2차 예송논쟁을 계기로 서인들이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

 

남원윤씨 윤휴는 숙종 즉위년(1674) 12월 1일 다시 상소를 올려 ‘복수(復<8B8E>)와 설치(雪恥)’를 주장하면서 북벌 계책을 담은 밀봉한 책자(冊子)를 함께 올렸는데, 사관은 윤휴의 주장이 “책사(策士)의 설(說)과 같은 종류였다”고 적고 있다. 다음 날 숙종은 남인(탁남) 영의정 양천허씨 허적(許積)에게 “윤휴의 상소는 화(禍)를 부르는 말이다”고 평했다.

 

그러자 남인(탁남) 정승 허적은 “그 뜻은 군신 상하가 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의 사세와 힘으로는 미칠 수 없으니 다만 마땅히 마음에만 둘 뿐입니다”고 숙종의 말에 찬동했다. 역시 남인이었던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도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큰소리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심히 불가합니다(『숙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고 가세했다.

 

서인은 물론 남인들 중에서도 북벌이 가능하다고 믿는 벼슬아치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숙종 1년(1675) 1월 2일 경연 시독관(侍讀官) 권유(權愈)가 허목(許穆)과 윤휴를 경연에 출입하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벼슬을 사양하던 윤휴는 숙종이 사관을 통해 비망기를 보내 ‘생각을 고치기를 내가 날마다 바란다’고 전하자 드디어 경연에 나왔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윤휴는 첫 경연에서 소매 안에서 혁제(赫<8E4F>:종이쪽지)를 꺼내 읽었는데 ‘정도를 확립하고 천하의 대의를 펴자’는 내용이었다. 숙종은 “격언(格言)이 아닌 것이 없으니 마땅히 유심하겠다”고 답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5년 후에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이때만 해도 송시열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으로 여겨졌다. 윤휴의 출사로 현종 때 묵살되었던 비밀상소가 숙종 1년 1월 경연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정오에 시작된 경연은 포시(哺時:오후 3~5시)에 끝났는데 사관은 긴 시간 동안 숙종이 “단정히 손을 모으고 듣기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숙종의 나이 열다섯, 강희제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할아버지(효종)가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했을지를 숙고했을까? 윤휴가 병거(兵車)를 만들자고 주장한 것도 대륙에서 기병을 상대로 싸우기 위한 것이었다. 간수하기 불편하다는 반대론이 나오자 윤휴는 ‘수레 하나를 10인이 담당해 서로 교대로 간수하게 하고 지방에서는 민간에게 내주어 짐을 싣는 수레로 사용하면 보관에 어려움이 없다’고 반박했다. 검토관(檢討官) 이하진(李夏鎭)도 “적의 돌진을 막고 기병을 제어하는 데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고 호응했다. 이하진은 실학자 성호 이익의 부친이기도 하다. 숙종은 “이미 만들게 했으니 그 제도를 보면 가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고 답했다.

 

숙종은 윤휴의 북벌 주장에 군비를 증강하면서 기회를 보자는 쪽이었다.

 

 

노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 사관의 말은 윤휴의 북벌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잘 드러나 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복수하고 치욕을 씻는 천하의 대의를 무릇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단 지금이 어떤 때인가? 백성의 곤궁은 극에 달했고 재력도 고갈되었다. 어린 임금(幼主)이 새로 섰고 조정이 이렇게 어지러운데도 천하의 일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윤휴가 한 번 입으로 대의를 빙자했으나 이날 군신들이 경연에서 정한 것은 머뭇거리고 미룬 것에 불과한데 윤휴가 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고 여겨 스스로 그 일을 담당했으니 그도 우활(迂闊)하다 하겠다(『숙종실록』 1년 1월 11일).”

윤휴는 숙종을 국왕으로 봉하는 강희제의 칙서도 거부하자고 청했는데

 

이에 대해 숙종이 “자강의 방책은 지금 실행할 수 있지만 국왕으로 봉하는 칙서를 가져오는 사신을 어떻게 거절하고 마중 나가지 않겠는가?(『
숙종실록』 1년 1월 28일)”라고 거부했다.

 

숙종 1년 2월 전 우후(虞候:병마절도사, 종3품) 노우(盧瑀)가 상소해서 북벌을 주창했는데 “윤휴의 논의가 있고 나서 이런 상소가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숙종실록』 1년 2월 12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인물은 윤휴·이하진 등 남인 중에서도 소수일 뿐 대다수 사대부는 불가능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북벌은 말로만 주창해 선명성만 나타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속 다르고 겉 다른 이중처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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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윤씨 윤휴 1617(광해군 9)~ 1680(숙종 6).

 

주자학이 지배하던 17세기 사상계에서 주자의 학설·사상을 비판·반성하는 독자적 학문체계를 세웠다.

 

예송(禮訟) 때 남인으로 활동하며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계와 맞섰으며, 숙종 즉위 후부터 경신대출척 때까지 많은 개혁안을 제기하고 실행하려 했다.

 

송시열 서인계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받고 끝내 처형당했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하헌(夏軒). 초명은 정(?)이었으나 25세 때 휴로 고쳤다.

 

아버지는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낸 효전(孝全)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덕민(金德民)의 딸이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627년(인조 5) 후금의 침략이 있자 보은 삼산(三山)에 있는 외가로 피난하여 외할아버지 김덕민에게서 학문의 기초를 익히고, 조식(曺植)과 학문적으로 가까웠던 성운(成運)의 서실(書室)에서 독서했다.

 

이때 〈황극경세서 皇極經世書〉를 접했다. 이후 이수광(李?光)의 아들인 이민구(李敏求)와 이원익(李元翼)에게서 배웠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치욕을 씻을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과거 준비를 포기했다. 1639년 공주 유천(柳川)으로 내려와 지내면서 〈논어〉·〈맹자〉 등 사서(四書)와 시·서·삼례(三禮)·역(易) 등 경서 학습에 몰두했다.

 

이때 권시(權?)·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 등과 막역한 관계를 맺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했다. 1656년(효종 7) 세자시강원자의로부터 1659년 사헌부지평까지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1660년(현종 1)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송시열 등 서인이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여 시행하자, 삼년상을 지내자는 참최설(斬衰說)을 들어 이를 반대했다(기해예송).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국에서 참최설은 남인의 서인 공격에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는데, 기년복제는 왕과 사대부를 구분하지 않고 사대부의 예(禮)를 왕에게 잘못 적용하여 '왕의 지위를 낮추고, 왕의 법통을 둘로 나누어버리는'(卑主二宗) 논리이므로 어떤 경우든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675년(숙종 1)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일어난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집권한 뒤,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자,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을 이끌며 활동했다. 이해 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헌·성균관좨주 등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승진했다. 이후 대사헌·좌참찬·우참찬·형조판서·우찬성 등을 번갈아 역임했다.

 

1680년 영의정 허적(許積)의 아들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에 관여했다고 하여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5월에 처형당했다.

 

재직중 지패법(紙牌法)·호포법(戶布法)·상평법(常平法) 등 부세제도 개혁안을 여러 번 제기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지패법을 변형한 호패법(戶牌法)만이 시행되어 개혁의 뜻이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한편 도체찰부(都體察府) 설치와 무과인 만과(萬科)의 시행을 주장하여 북벌을 위한 준비를 주도했다. 정치제도에 대해서는 간관(諫官)과 과거제, 그리고 비변사를 혁파해야 한다고 보고, 〈주례 周禮〉를 원용한 〈공고직장도설 公孤職掌圖說〉을 숙종에게 올려 그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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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강병의 길 특권이 막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25호 | 20090801 입력

 

지배층만 부유한 나라보다 다수 백성들이 부유한 나라가 강국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수 백성들을 잘살게 하자는 민생론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정치가의 단골메뉴였지만 많은 경우 현안 회피용에 불과했다.

 

어떤 정치세력이 진정으로 민생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민생을 위한 법제화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윤휴 초상. 진정한 북벌론자인 윤휴는 사대부의 각종 특권을 폐지해 민생을 강화한 뒤 광활한 요동 지역을 수복하자고 주장했으나 호응하는 사대부는 거의 없었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숙종③ 민생 개혁의 좌초

갓 즉위한 숙종이 안으로는 각 당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대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민생을 보존하며, 밖으로는 내전에 휩싸인 청나라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였다.

 

그러나 숙종은 조숙(외숙 청풍김씨 김석주의 지원)했다. 숙종은 재위 1년(1675) 11월 허적과 허목불러 만경창파에 일엽편주가 떠 있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배가 닻줄과 노도 없이 물결 가운데 있다가 바람을 만나면 반드시 뒤집힐 염려가 있으니 이는 임금의 도(君道)를 미루어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림 위에 숙종이 쓴 어필이 있는 『어제주수도설(御製舟水圖說)』이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다섯이 있으니 첫째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 어진 현량(賢良:어질고 착한 사람)을 쓰는 것이고, 셋째 충간(忠諫)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넷째 과실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다섯째 보물을 천하게 여기고 어진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숙종실록』 1년 11월 8일)”

숙종이 재위 1년 윤5월 평안도 관찰사 민종도(閔宗道)에게 한 말은 조선 정치구조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당론이 선조 조부터 성하기 시작해 효종 조에 이르러서는 송준길·송시열이 두소(斗<7B72>:국량이 작음)의 비루하고 미세한 무리로서 유학자라는 이름을 빌려 산림에 물러나 있으면서 조정의 권력을 멀리서 잡고 무릇 인물의 진퇴나 크고 작은 정사도 반드시 먼저 이 두 사람에게 품의한 후 (임금에게) 상달(上達)했으니 일이 극히 한심했다.(『숙종실록』 1년 윤5월 27일)”

영의정부터 송시열에게 먼저 허락을 받고 나서 임금에게 진달했던 서인 정권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숙종은 선왕의 유지를 이어 정권을 갈아치웠지만 남인의 당세는 미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휴가 숙종의 마음을 끈 것은 그의 정책관이 기존 관료들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타파해 백성들을 살림으로써 그 역량으로 북벌을 단행하자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발해 건국지인 동모산 부근의 강과 평야. 길림성 돈화현에 있는데,

발해 유적지는 동북공정에 따라 한국인들의 접근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윤휴가 북벌을 주창하자 북벌 반대론자들은 민생우선론인 양민론(養民論)으로 맞섰다.

 

윤휴는 양민론이 북벌의 현실화를 막기 위한 사대부들의 허울 좋은 명분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동법 이후 민생의 가장 큰 문제는 신역(身役:병역)의 폐단이었다. 조선은 16세부터 60세까지 병역의 의무를 졌는데 직접 군역에 종사하는 대신 군포(軍布)를 납부했다. 이것이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인데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가난한 상민들은 군포 부담에 허리가 휘지만 부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의무조차 없는 모순된 상황을 바꾸는 것이 민생 개혁의 핵심이었다.

현종 때 각종 재이가 발생하자 군역의 폐단 때문에 하늘이 노했다고 해석했다
. 이 때문에 현종 말에도 군역개혁론이 논의되었다.

 

현종 15년(1674) 영의정 안동김씨 김수흥이 “몇 해 전부터 입이 달린 사람이면 모두 ‘재이가 거듭 닥치고 민생이 곤궁하게 된 것은 다 신역의 폐단 때문’이라고 말하면서도 변통(變通:개혁)하려고 하면 그 폐단만 말할 뿐 구제의 도(道)는 말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큰 골칫거리입니다(『현종실록』 15년 7월 13일)”라고 말했다.

사실 군역 폐단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를 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종 말 모든 양반은커녕 생원·진사를 제외한 유학(幼學)들에게만 포를 받자는 소변통(小變通:온건개혁론)이 나왔을 때 대사헌 강백년(姜栢年)은 이렇게 반대했다.

“국조(國朝) 300년 이래 사자(士子)를 매우 후하게 대우해 왔습니다. 그 사이에 혹 이름을 빙자해 역(役)을 면한 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체 선비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서로 섞어 똑같이 포를 징수하면 어찌 역(役)을 정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현종실록』 15년 7월 13일)”
유생들도 사대부니 군역을 부담할 수 없다는 항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윤휴가 구상한 것은 전체 사대부들도 똑같은 군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대변통(大變通:급진개혁)이었으니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윤휴는 지패법(紙牌法)과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해 양역 부담을 균등하게 하려고 했다. 현재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지패는 종이신분증을 뜻했다. 지패법이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을 산 이유는 반상(班常)의 구별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지패법은 다섯 가구를 한 통(統)으로 묶는 오가통법(五家統法)이 전제였다. 오가통법 사목(事目)은 “무릇 민호(民戶)는 그 이웃에 따라 모으되, 가구(家口)의 다과(多寡)와 재산의 빈부(貧富)를 물론하고 매 다섯 집을 한 통(統)으로 만들고, 한 사람을 통수(統首)로 뽑아 통 안의 일을 맡게 한다(『숙종실록』 1년 9월 26일)”고 규정하고 있다.

통-리(里)-면(面)-읍(邑) 순의 행정조직으로 재편한 것인데 ‘재산의 빈부를 물론한다’는 것은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가통법은 또 흉년으로 유망한 백성들을 거주지역의 행정단위로 포섭해 전체 민정(民丁) 숫자를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영의정 양천허씨 허적은 지패법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지패법은 구애되는 일이 있으니, 사대부가 상한(常漢:상놈)의 통수 하에 들어가니 일이 매우 불편합니다”고 토로했다. 오가(五家)의 통수가 상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나마 지패법과 호포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던 허적이 이 정도면 다른 양반들은 볼 것도 없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지패법에 반대하는 근본 이유는 호포법(戶布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호포법은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오가통 내의 모든 호(戶)에 군포를 걷는 법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백성들이 불편해한다는 명분을 대면서 반발했다. 심지어 벼슬 없는 가난한 유생들에게만 포를 걷는 유포(儒布)제를 실시하려는 것이라는 소문을 내기도 했다.

그러자 영상 허적이 “이른바 유포(儒布)의 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신부터 아래까지 무릇 호(戶)를 가진 자는 모두 마땅히 포를 낸다면 어찌 유포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숙종실록』 2년 1월 19일)”라고 방어했다. 영의정인 자신부터 호포(戶布)를 낼 것이니 어찌 가난한 유생에게만 걷는 것이냐는 반론이었다.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를 잘 아는 숙종은 “형세를 보아서 시행할 것”이라고 일단 실시를 유보했다.

그러자 조정에 의논시켜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윤휴는 국왕의 결단을 촉구했다.

“마땅히 성상께서 속마음으로 결단을 내려 먼저 덕음(德音)을 발표하셔서 백성들의 해를 제거하시고, 서서히 호포법이나 구산법(口算法)을 의논하셔서 백성들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고 나라의 경비를 풍족하게 하소서. (『숙종실록』 3년 12월 5일)”

사망자나 도주자, 갓난아이의 군포를 가족이나 이웃에게 씌우는 족징(族徵)이나 인징(隣徵)의 폐단부터 먼저 없앤 후 호포법이나 구산법을 논의하자는 말이었다.

 

호포법이 가호(家戶)를 기준으로 군포를 받는 법이라면 구산법은 양반·상민 할 것 없이 모든 백성에게 군포를 받자는 것이니 호포법보다 근본적인 개혁론이었다. 당연히 양반들의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의정 허적도 족징이나 인징의 폐단 등만 일단 해결하는 온건개혁으로 물러섰다.

 

서인에 비해 열세인 집권 기반으로 구산제와 호포제를 함께 밀어붙이다 정권이 무너진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런 정책 차이 등으로 집권 남인은 급진개혁파인 윤휴 중심의 청남(淸南)과 온건개혁파인 허적 중심의 탁남(濁南)으로 갈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윤휴의 생각은 확고했다.

“물고(物故:죽은 사람), 아약(兒弱:갓난아이)에게서 거두는 포(布)는 먼저 탕감해 주고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호포법을 시행한다면, 군병(軍兵)과 공천(公賤)·사천(私賤)의 제도를 모두 변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숙종실록』 3년 12월 11일)”

윤휴의 이 말에 대해 『숙종실록』은 양천허씨 허적·청풍김씨 김석주(숙종의 외숙)·동복(同福)오씨 오시수 등이 모두 놀라, “오늘 논의하는 것은 아약과 물고된 자의 폐단을 변통하는데 불과한데 만약 윤휴의 말대로 한다면 국가 제도를 모두 바꾸어야 할 것이니 결단코 행하기 불가합니다(『숙종실록』 3년 12월 11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윤휴의 ‘군병과 공천·사천의 제도를 모두 변통(개혁)하자’는 말은 군제 개혁을 통해 신분제의 틀을 흔들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신분제를 완화시켜 국력을 증진시키자는 것이 윤휴의 본뜻이었다
.

그러나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윤휴의 지패법은 호패법으로 대체되었다. 벼슬아치들은 상아로 만든 아각패(牙角牌)를 차고, 일반 백성들은 나무로 만든 호패를 차게 했다. 호포제도 사대부들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사대부들은 기득권을 양보해 국력을 키울 생각이 없었고 효종이 바라마지 않았던 천재일우의 기회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직 왕권을 위해 남인,북벌론 버렸다

이덕일 | 제126호 | 20090809 입력
 
숙종은 두 당파를 경쟁시켜 왕권을 극대화하는 길을 택했다. 한 당파를 이용해 다른 당파를 제거할수록 왕권은 강해졌다. 그러나 그는 왕권 강화 그 자체에 목적을 두었을 뿐 강화된 왕권으로 추구할 목표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사대부들의 착취에 시달렸다. 왕권 강화와 백성들이 따로 노는 괴리현상이 심해졌던 것이다.
 
허적의 초상. 허적은 원만하고 신중한 인품을 갖춰 온건개혁파인 탁남을 이끌면서 강경개혁파인 청남과 야당인 서인 사이를 중재했으나 경신환국 이후 정치보복을 당해 사형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숙종④ 경신환국

 


윤휴((淸南)가 숙종 1년(1675) 9월 체부(體府: 도체찰사부) 설치를 주장한 것은 북벌을 위한 것이었다.

 

윤휴의 체부 설치 주장에 대신들은 “저 사람들(彼人: 청나라)이 의심할까 두렵다”고 우려했다. 숙종은 체부 설치를 결정하고 영의정 허적에게 도체찰사를 겸임시켰다. 허적은 부체찰사 후보로 김석주·윤휴·이원정을 천거했고(三望) 숙종은 김석주를 낙점했다.

 

도체찰사를 남인 허적이 차지했으니 부체찰사는 서인 김석주에게 맡겨 견제하게 한 것인데, 부체찰사로서 체부를 북벌 총지휘부로 꾸리려던 윤휴의 계획은 제동이 걸린 셈이었다. 북벌을 위한 윤휴의 암중모색이 계속되는 가운데 숙종 6년(1680)이 되었다.

남인 정권은 강경개혁파인 청남(淸南)과 온건개혁파인 탁남(濁南)으로 나뉜 채 6년째 집권하고 있었다.

 

숙종 5년(1679) 일흔 살이 된 허적은 거듭 면직을 요청했으나 숙종은 반려했다. 무려 열 번의 사직상소 끝에 허적은 다시 조정에 나왔고 숙종은 재위 6년 3월 안석과 지팡이, 1등의 음악을 내려주었다.

 

허적은 영의정으로서 행정권을 장악하고 도체찰사로서 군권을 장악했으나 신중하게 처신했다.

 

그런 그에게 세종의 장인이었던 영의정 청송심씨 심온과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양천허씨 허적이 할아버지 허잠(許潛)이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아 잔치하는 영시일(迎諡日: 시호를 맞이하는 날)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한 해 전인 숙종 5년부터 서인들의 공세가 거칠어졌다
.

 

서인들의 공세는 허적(濁南)의 서자 허견(許堅)과 윤휴(淸南)에게 맞춰졌다.

 

허견은 서자였지만 외아들이었기에 문과(文科)에 급제해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를 지낸 인물이었다. 허견에 대한 서인들의 광범위한 정보 수집은 당초 의도와는 달리 그의 부인 홍예형과 유철의 간통사건이 발각되는 부산물을 낳았다. 숙종은 두 간부를 유배 보내라는 좌의정 권대운(權大運)과 우의정 민희(閔熙)의 건의에 ‘둘의 행위는 개돼지와 같다’면서 사형시키라고 명했다. 숙종 5년(1679) 2월 20일의 일이었다.

숙종의 어필. 그 내용은 ‘경(敬)으로써 안의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의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숙종의 마음이나 행동은 경이나 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인들은 또 허견이 서억만(徐億萬)의 아내 이차옥(李次玉)을 5∼6일 동안 납치해 능욕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이차옥의 옥사를 의금부로 이송한 후 여러 사람들을 신문하니 모두 포도대장의 꼬임에 따라 거짓 자백을 했다고 말을 바꾸었다(『숙종실록』 5년 3월 4일)”는 기록처럼 수사기관마다 진상이 달랐다. 남인들은 정권을 잡았지만 포도청 같은 여러 기관들은 여전히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허적은 “신의 자식이 남의 아내를 납치해 집에 두었다 돌려보냈다면 신이 집에 있으면서 어찌 몰랐겠습니까?”라면서 “포도청은 도둑을 살피기 위하여 만든 것인데, 신이 대신의 지위에 있는데도 그 감시의 대상이 되었으니 어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불평한 대로 포도대장 구일(具鎰)은 허적의 집을 집중 감시했다.

 

숙종은 “포도청에서 거짓 자백을 받은 것이 명약관화하다”면서 허견을 석방하고 포도대장 구일을 문초했다.

한성부 좌윤 의령남씨 남구만은 대사헌 윤휴가 서도(西道: 황해·평안)의 금송(禁松) 수천 그루를 베어 강가에 새 집을 짓고 있다고 한다(『숙종실록』 5년 2월 10일)”고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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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 1629(인조 7)~ 1711(숙종 37). 서인(소론)

조선 후기의 문신.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널리 알려져 있는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지은이이다.

 

본관은 의령.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

 

개국공신 남재(在)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지방 현령이었던 남일성(一星)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었던 송준길(宋浚吉)에게 수학,

 

1656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정언·이조정랑·집의·응교·사인·승지·대사간·이조참의·대사성 등을 거쳐서 1668년 안변부사·전라도관찰사를, 1674년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숙종초 대사성·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같은 해 남인인 윤휴·허견 등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병조판서가 되어 무창(茂昌)과 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했다. 이때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자 소론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84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 인동장씨(남인계열)를 가볍게 처벌하자고 주장했으나 숙종이 희빈장씨를 사사(賜死)하기로 결정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 갔다. 그뒤 유배·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등용되었으나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강릉의 신석서원(申石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약천집〉·〈주역참동계주 周易參同契註〉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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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남인 :청남)는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과 같은 이름의 사람이 살인을 했는데 증삼이 살인했다고 모친에게 전하자 처음에는 믿지 않던 어머니가 세 번째에는 베 짜던 북을 던지고 달아났다는 삼지주모(三至走母) 고사를 인용하며 헛소문이라고 항변했다.

 

성균관 직강(直講) 김정태(金鼎台)가 “관리들이 윤휴의 집에 달려들어 새것, 헌것을 가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일일이 헤아려 조사하고 있다(숙종 5년 2월 13일)”고 항의한 것처럼 서인은 야당이지만 수사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성부는 서도에 사는 김세보(金世寶)가 선산(先山)의 선영 봉분을 소나무 뿌리가 파고들었다는 명분으로 벌목 허가를 받아 소나무를 윤휴의 집으로 운반했다고 보고했으나
좌상 권대운이 “윤휴가 지은 집은 10여 칸이 되지 않는다”고 방어한 것처럼 정치공세의 성격이 짙었다.

양천허씨 허적의 조부 영시일은 숙종 6년(1680) 4월 1일이었는데, 일부 야사는 이날 남인들이 서인들을 독살하려 했다고 적고 있다
.

 

병조판서 청풍김씨 김석주와 광성부원군 광산김씨 김만기 등을 짐새의 독을 이용해 독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잔치에 참석한 숙종의 장인 광산김씨 30世 김만기가 남의 술잔을 먼저 빼앗아 마시고 자신의 잔은 ‘벌써 취했다’면서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잔치에 하객으로 참석한 임금의 장인(김만기)을 독살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허적이 김만기와 김석주에게 허견을 다섯 번이나 보내 간곡하게 참석을 요청했다는 점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야사에는 허적이 사당에 고유제(告由祭)를 올릴 때, 그리고 잔칫상에도 암탉이 날아들어 술병을 깨뜨렸는데 허적이 잡아 죽이라고 말하면서 “닭은 유(酉)이고, 유는 서인을 뜻하는데…”라고 중얼거렸다고도 전한다. 닭 유(酉)자는 서(西)자로 통용되기도 한다.

 

이날 비가 내리자 숙종은 중관(中官: 내시)에게 궁중에서 사용하는 유악(油幄: 기름 칠한 천막)을 갖다 주라고 말했는데 내시가 ‘이미 가져갔다’고 답하자 “한명회도 감히 이런 짓은 하지 못했다”고 크게 노했다.

야사『조야회통(朝野會通)』은"숙종이 궁중 하인에게 해진 옷을 입고 가서 정탐하게 하니 서인은 소수이고 남인들의 숫자와 기세가 성하다는 말을 듣고 제거할 결심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은 군권을 갖고 있는 훈련대장 유혁연과 포도대장 신여철, 총융사 김만기를 급하게 패초했다.

 

잔치에 참여했던 김만기가 패초를 받고 일어서자 허적은 크게 당황하면서 잔치는 일순간에 파장이 되었다. 『조야회통』은 “좌중이 모두 경악(驚愕)하고 실색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고, 『당의통략』은 “허적이 크게 놀라 급히 수레를 타고 따라가 대궐문에 이르렀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은 남인 유혁연을 서인 광산김씨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 신여철, 수어사에 김익훈 등 모두 서인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안동김씨 김수항을 영의정, 여흥민씨 민정중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이것이 숙종 6년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가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사전에 짜인 각본처럼 허적(탁남)과 윤휴(청남)에 대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허적의 서자  허견에게는 인평대군의 아들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을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병조판서 청풍김씨 김석주는 경기도 이천의 둔군(屯軍)들이 매일 훈련하고 대흥산성에서도 군사훈련을 했는데, 이것이 “훗날 군사를 동원하는 계제(階梯)로 삼으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천의 둔군 훈련이 복선군 추대를 위한 예행연습이었다는 것이다.

허견은 혐의를 부인했으나 숱한 고문 끝에 4월 12일 군기시(軍器寺) 앞 길에서 능지처사 당했고 복선군 이남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허적(탁남) 역시 서인으로 강등당했다가 사형당했다.

 

윤휴(청남)에게 정사에 관여하는 대비(大妃)를 조관(照管: 단속)하라고 말했다는 점과 자신이 부체찰사로 선임되지 않자 얼굴에 불쾌한 빛을 띠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윤휴가 부체찰사가 되기를 원한 것은 북벌을 위한 것이었다는 공지(共知) 사실은 애써 무시되었다.

윤휴는 5월 20일 사사(賜死)당하는데
『당의통략』은 사약을 마시기 전 “조정에서 어찌해서 유학자(儒者)를 죽이는가?”라고 항의했다고 전한다. 도체찰사부 설치 주장이 역모의 근거로 사용되었으나 『당의통략』이 도체찰사부는 “실상 김석주도 찬성했던 일”이라고 정치보복의 구실에 지나지 않음을 전해 주고 있다.

허적은 국청에서 허견이 윤휴를 부체찰사로 천거하면서 “이 사람이 대의(大義: 북벌)를 밝히려고 하는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구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허견 역시 윤휴의 북벌론을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간 경신환국은 서인남인 사이 당쟁의 결과물로만 인식되고 있었지만 실상 청의 정세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 이 무렵 남부 중국 전역을 전쟁터로 몰고 갔던 삼번(三藩)의 난이 거의 진압되고 있었다. 숙종 4년 8월 오삼계가 죽고 손자 오세번(吳世번)이 뒤를 이었고, 청군은 숙종 5년 악주(岳州: 현 호남성 악양)를 탈환했다.

 

삼번의 패퇴가 기정사실이 되자 숙종은 북벌을 위한 도체찰사부를 역모의 근거지로 만들고 북벌론자 윤휴 등을 사사함으로써 청의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술책을 부린 것이다.

예송논쟁에서 왕가(王家)를 높이는 3년복설과 북벌을 주창하고 호포제 등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던 유신(儒臣) 윤휴는 이렇게 정치보복으로 세상을 떠났다.

 

윤휴가 죽은 지 나흘 후인 5월 24일 숙종은 영의정 안동김씨 김수항과 우의정 여흥민씨 민정중의 주청을 받아들여 송시열을 방면했다. 윤휴의 빈자리를 다시 송시열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權道의 말단’ 정치공작, 당쟁의 피바람 키웠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27호 | 20090815 입력

 

세상 모든 길에는 상도(常道)와 권도(權道)가 있다. 정도(正道)라고도 불리는 상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는 원칙이고, 권도는 상황에 따른 응용이다. 당쟁이 심해지면 권도의 말단인 정치공작의 유혹이 커져간다. 정치공작이 용납되는 세상은 그 자체로 개혁 대상이 된다. 권도는 정도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三宗의 혈맥 숙종⑤ 서인의 분열

 

<숙종 초반 3대 외척 : 청풍김씨/ 광산김씨/ 여흥민씨>

 

 

제19대 숙종 가계도 

현종 - 명성왕후(청풍김씨)

제 19대 숙종

장남 : 숙종(1661-1720)

재위기간 : 1674.8-1720.6(45년 10개월)

부인 : 6명 / 자녀 : 3남 6녀

1부인

인경왕후

광산김씨

 父 김만기

3 녀

2부인

인현왕후

여흥민씨

 父 민유증

 

3부인

인원왕후

경주김씨

 父 김주신

 

4부인

희빈

인동장씨

1남1녀

5부인

숙빈

해주최씨

1남2녀

6부인

명빈 박씨

1남

여(일찍죽음)

여(일찍죽음)

여(일찍죽음)

 

자식없음

 

 

자식없음

 

제20대 경종

성수(여)

영수(여)

 제21대

영조

(연잉군)

?(여)

연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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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김씨 김우명(1619∼1675)의 자는 이정(以定). 현종의 장인

 

본관은 청풍(淸風). 대동법의 실시로 유명한 김육(金堉)의 아들이며

형은 병조판서 김좌명(=아들 : 김석주)

현종 비(妃)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아버지이다.

 

서기 1642(인조 20)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강릉참봉(江陵參奉)과 세마(洗馬) 등을 지냈다.

그의 딸이 태자빈이 되었는데, 서기 1659(효종 10)년 현종이 즉위하자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졌다.  1661년에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서인(西人)에 속했으나,

민신(閔愼)의 대부복상(代父服喪) 문제를 계기로 남인 허적(許積)에 동조하여 송시열과 사이가 벌어졌다.

숙종 초에는 복창군(福昌君)·복평군(福平君) 형제의 행패를 탄핵하였다.

그 뒤 반대파들의 질투가 더욱 심해지자 두문불출하였다.

당시 그를 가리켜 외서내남(外西內南)이라는 평판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겉으로는 서인에 속하지만 속으로는 남인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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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김씨 김석주(金錫?, 1634년 ~ 1684년)는 조선시대의 외척, 권신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본관은 청풍.

 

1657년 진사를 거쳐 6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전적, 이조좌랑을 지냈다.

 

당시 한당(漢黨)으로 집권당이던 산당(山黨)에게 중용되지 못하다가 1674년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상복을 입는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서인이었음에도 남인(南人)의 온건파 청남 허적(許積) 등과 결탁하여 송시열(宋時烈)· 안동김씨 김수항(金壽恒) 등의 산당 훈신들을 숙청하고 특진되어 수어사(守禦使), 도승지 등을 지냈다.

 

그 뒤 허적과 등을 돌리고 다시 송시열과 결탁하여 남인을 역모로 몰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어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으로 진급했다. 1682년 우의정이 되었고, 그해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했으며,

 

이어 광산김씨 김익훈(金益勳)과 함께 남인의 완전 박멸을 위해 김환, 전익대 등을 사주하여 허영, 허새 등 남인들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는 등 음모를 꾀하였다. 이로써 서인 청류파의 비난을 샀다.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음험한 수법으로 남인의 타도를 획책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심한 반감을 사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당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축출되고 공신의 호를 박탈당하였으나 후에 복관되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식암집》, 《해동사부(海東辭賦)》 등이 있다.

[가계]

 

 

조부 : 영의정 잠곡 김육

    • 숙부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 증 영의정

              김우명(=현종 비(妃)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아버지

  • 계실 : 창원황씨 - 황일호의 딸

 

청풍김씨 김석주 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 있다. 서인과 남인을 넘나든 최고의 실세였으나 남인 제거를 위한 정치공작을 주도하면서 명성이 급격히 퇴락했다. 무덤의 무성한 풀이 후세 사람들에게 권력무상을 경계하는 듯하다. 사진가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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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훈(金益勳 1619~1689: 광산김씨 29世)은  청품김씨 김석주의 외삼촌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27世의 손자이며 ,

아버지 이조참판 김반(槃)28世의 네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첨중추(僉中樞) 김진려(金進礪)의 딸이다 

 

1648( 26) 음보(蔭補)로 처음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고 승진하여 사복시(司僕寺)에 오래 내사복(內司僕)으로 있었다.

 

조카 김만기(萬基)의 딸이 숙종의 비(=정비 인경왕후)였으므로 숙종이 즉위하자 군권(軍權)을 장악하였고

1674년(현종15) 예송에서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1680년 청풍김씨 김석주의 주도로 경신대출척[경신환국]을 일으켜 남인들을 숙청하는데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보사공신 2등 광남군(光南君 정2품)을 봉작 받았다.

숙종의 깊은 신임을 받아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특히 청풍김씨 김석주 등과 함께 훈척의 세력으로서, 송시열 등과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1689년 어영대장 재직 중 기사환국(남인 기사회생)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문정공신호를 빼앗기고 강계로 유배되었으며, 가혹한 고문을 당하여 옥중에서 졸하였다.

 

1682년 남인의 모역사건 당시의 떳떳하지 못한 행동은 서인내부 소장파의 반감을 부채질하여, 훈척과 서인 노장파의 협력소장세력이 크게 대립하고, 결국 노론과 소론이 분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 등의 노장파(노론)는 두둔하고, 윤증의 소장파(소론)는 대립하여 분당하게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비문에는 처음부터 1682년(숙종 8년) 허새(許璽)의 모반사건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되어 있고 기사환국 당시 억울하게 절명한 사실과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신원된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


 

8 () 1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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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기(金萬基 1633~1687(숙종 13): 광산김씨 30世)는  숙종의 첫번째 장인

 

김익훈(광산김씨 29世)의 조카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27世의 증손자이며

할아버지인 이조참판 김반(槃)28世의 세째아들 생원 김익겸(29世)의 아들이다

호는 서석(瑞石) 또는 정관재(靜觀齋)이다.

다섯 살 때 병자호란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둘째 큰아버지인 김익희(29世)에게 수학하다가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수찬?정언?교리를 역임하였다.

현종 12년(1671)에 딸이 세자빈(숙종비 인경왕후 광산김씨)이 되었고

그로부터 3년 뒤 숙종이 즉위하니 국구가 되어서 광성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영돈령부사에 승진되었다.


안동김씨 김수항의 천거를 받아 대제학에 올랐으며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 때에는 훈련대장으로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남인과 맞섰으며, 강만철 등이 허적의 서자 견(堅)과 종실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자 이를 다스려 공을 세워 보사1등공신이 되었다. 노론의 과격파로서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삭직되었다가 뒤에 복직되었다. 사후에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는 문충이다

김만기

김만기 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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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 민씨 민유중[閔維重, 인조 8년(1630)∼숙종 13년(1687)], 숙종의 두번째 장인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여흥,

 

증조부는 민여건(閔汝健), 조부는 경주부윤 민기(閔機),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따님 연안이씨,

 

정배는  좌참찬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따님 은진송씨,

 

계배이조판서 이경증(李景曾)의 따님 덕수이씨이고,

 

딸이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민씨이며

 

위로 형님이 대사헌 민기중(閔蓍重)·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다.

 

 송시열·송준길의 문인으로 효종 즉위년(1649) 진사가 되고, 효종 3년(165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병조좌랑을 지내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친 뒤 사간원정언을 시작으로 1656년 병조정랑, 그 뒤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을 지내면서 대신들과 시폐를 놓고 다툰 끝에 조정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이때 선정을 베풀어 7개 고을의 주민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듬해 중앙에 돌아와 의정부사인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665년 전라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이후 장례원판결사·사간원대사간·승정원승지·이조참의·충청도관찰사·성균관대사성·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대사헌·의정부우참찬·한성부판윤·호조판서 겸 총융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 내려가 지내다 끝내 흥해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공조판서·호조판서 겸 선혜청당상·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서인정권을 주도하였다.

 

리고 이듬해 3월 국구(國舅)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돈령부영사가 되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효종의 묘정과 장흥 연곡서원, 벽동 구봉서원에 배향되었다. 경서에 밝았으며, 《민문정유집 閔文貞遺集》 10권 10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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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의 어린 왕, 숙종이 즉위하자(1674년) 조정의 주도권은 남인세력으로 넘어갔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반정이 성공한 후 실로 40여년 만에 서인이 정권으로부터 물러나게 된 것이다.

 

남인 정권의 성립에는 숙종의 외척인 청풍김씨 김석주(金錫?)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청풍김씨 김석주는 숙종의 어머니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사촌오라비로 숙종 초반을 대표하는 외척세력이었다.

 

그런 그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이는 서인의 수장인 송시열이었다.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송시열의 예론이 잘못이라고 단정하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을 축출할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를 곧 실천하였다.

 

 비대해진 서인세력을 대신하여 남인세력을 발탁하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외숙 김석주를 정권의 한 축으로 둔 구도였다.

 

그러한 구도도 오래 가지 않았다. 6년후 1680년에는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고 조정의 요직은 서인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른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집권 남인 세력을 대표하던 허적(許積)이 집안잔치에 허락도 없이 왕실의 장막과 차일을 가져다 쓴 일을 빌미로 숙종은 남인들을 대거 물갈이 한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가 그러했을 뿐 남인의 물갈이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집권 남인들에게 염증을 느낀 숙종의 태도 변화는 이미 지난해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경신환국을 배후에서 주도면밀하게 계획했던 이 역시 김석주였다. 그는 권력을 더욱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집권 6년차 남인세력을 실각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남인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종친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역모사건을 일으켜 대규모 옥사(獄事)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를 통해 실각한 남인들이 더욱 철저하게 제거되었음은 물론이다.

 

숙종조 정국에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것은 갑인 예송 직후인 1674년에서 경신환국이 일어나던 1680년까지 6년, 기사환국이 일어나던 1689년에서 갑술환국으로 축출되던 1694년까지 5년이다.

 

남인과 서인의 밀고 당기는 대립양상이 시작되는 것은 희빈 인동장씨가 훗날의 경종이 되는 왕자를 낳은 1688년 이후가 되어서이다.

 

 

三宗의 혈맥 숙종⑤ 서인의 분열 계속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지 2년 6개월 후인 숙종 8년(1682) 10월 21일.

 

전 병사(兵使) 김환(金煥)과 출신(出身: 무과에 급제했으나 아직 벼슬에 나가지 못한 사람) 이회, 기패관(旗牌官: 군영의 장교) 한수만 등이 대궐에 나와서 상변(上變)했다.

 

남인 허새(許璽)·허영(許瑛) 등이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대왕대비에게 수렴청정을 시키려 했다는 고변이었다. 즉각 국청이 설치되어 수사에 들어간 와중에 출신(出身) 김중하(金重夏)가 전 대사헌 민암(閔<9EEF>) 등이 사생계(死生契)를 조직했다면서 다시 역모를 고변했다.

 

같은 달 27일에는 어영대장 광산김씨 김익훈(金益勳 => 청풍김씨 김석주의 외삼촌)이 아방(兒房: 궐내 장신들의 휴게소 겸 숙소)에서 숙종에게 역모를 밀계했다. 이것이 숙종 8년(1682:임술년) 발생한 임술고변인데 그 내막은 대단히 복잡하지만 목적은 단 하나 남인들을 도륙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건의 배후는 숙종의 외척이자 우의정인 김석주(金錫胄)였다.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의 『한수재집(寒水齋集)』『황강문답(黃江問答)』에는 “김환(金煥)은 본래

서인으로서 무예를 닦다가 오인(午人: 남인)의 손에 등과(登科)한 사람”이라면서 “김석주가 ‘명을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면서 허새·허영을 역모로 모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김석주가 김환에게 말하기를) 지금 허새와 허영이 용산(龍山)에 살고 있으니, 네가 피접(避接: 요양)을 핑계로 그 이웃집으로 이사 가 깊이 사귄 후에 장기를 두도록 하라. 네가 이겼을 때 넌지시 ‘나라를 취하는 것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기색을 엿보라. 저들이 괴이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거든 함께 동침하면서 모반에 대해 은밀히 의논하라. 그렇게 살피면 진위(眞僞)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황강문답』『한수재집』)”

박세채 초상 윤증과 함께 소론 영수였다.

김환이 “그들이 도리어 나를 고변하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거절하자 김석주는 “그것은 모두 내 손에 달린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은전(銀錢)을 주었다. 그런데 공작이 마무리되기 전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석주는 심복 김익훈(金益勳)에게 임무를 맡겼다. 그사이 김환이 역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자 김환이 먼저 고변한 것이다. 허새는 압슬형(壓膝刑)을 비롯해 혹독한 형신(刑訊)을 견디며 부인하다가 끝내 시인했고, 서종제(庶從弟) 허영 역시도 고문에 못 이겨 혐의를 시인했다.

그러나 “허새가 죄를 승복한 뒤에도 모주(謀主)에 대한 한 항목만은 끝내 하나로 귀일되지 않아 연달아 일곱 차례의 형신을 받았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처럼 복평군을 끌어들이는 것은 끝내 거부했다. 한 차례의 형신은 30대를 뜻했고 곤장도 보통 범죄보다 크고 두꺼웠다. 허새가 물고(物故: 죽음)될 위험이 있자 서둘러 사형시키고 허영도 지정률(知情律: 불고지죄)로 처형했다.

 

이 사건은 많은 의혹을 낳았다. 광산김씨 김익훈은 남인 유명견(柳命堅)도 역모로 몰려다 여의치 않자 국청의 위관 안동김씨 김수항(金壽恒)에게 수사를 요청했다.

 

김수항은 “국청의 일은 어명으로 나온 것이나 죄인의 초사에 나온 것이 아니면 감히 거론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등 같은 서인들끼리도 혼선이 생겼다.

김환·이회·한수만은 공신이 되었으나 남인 유명견을 물고 들어갔던 전익대는 유배형에 처해지자
의혹이 증폭되었다. 정치공작이란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이때 사류(士類)들이 다투어 ‘김익훈이 남을 유인해 역모로 만들었으니 그 마음은 자신이 역적이 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풍양조씨 조익(趙翼)의 손자 승지 조지겸(趙持謙)과 집의 한태동(韓泰東) 등 젊은 서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재수사 요구가 거세자 귀양 간 전익대를 불러 다시 심문했는데 김환이 사주했다고 고백했다.

 

김환을 국문할 경우 김석주와 김익훈의 사주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국문 없이 귀양 보냈고 전익대는 사형시켰다. 주범은 귀양 가고 종범만 사형 당하자 조지겸은 “협박을 당한 전익대는 죽었는데, 유혹하고 협박한 자(김환) 홀로 죄를 면하겠습니까?(『숙종실록』 9년 4월 16일)”라고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당의통략』은 “김석주와 김익훈이 사주한 것인데, 전익대만 후원자가 없었으므로 혼자 죽었다고 사람들이 일렀다”는 말처럼 물의가 들끓었다. 사헌부 집의 한태동(韓泰東)이 김익훈을 공격한 말이 젊은 서인들의 여론을 말해주고 있다.

김익훈은 문벌(門閥)을 의지해 백도(白徒: 과거 미급제자)로서 떨쳐 일어나 기록할 만한 단편적인 선행(善行)은 없지만 악(惡)은 한 가지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역적 집안 양천허씨의 재산에 침을 흘려 그 아내(婦: 허견의 부인)까지 차지했고…갑인년(현종 15년) 이후…유현(儒賢: 김장생)의 손자로서…욕된 짓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역적 남인 탁남 허적(許積)에게 붙어 노복보다 심하게 아첨했습니다.(『숙종실록』 8년 12월 22일)”

김익훈은 송시열의 스승 김장생의 손자였다. 그러나 남인정권 때는 허적에게 붙었다가 경신환국 후 허적의 재산과 그 며느리까지 빼앗았다는 것이다.

 

물의가 커져가자 숙종은 여흥민씨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를 받아 송시열(노론)·윤증(尹拯 소론)·박세채(朴世采 소론) 같은 유현(儒賢)을 출사시켜 조정 분위기를 일신하려 했다. 여러 차례 벼슬을 사양하던 이들은 송시열을 필두로 상경하게 되는데 숙종 8년(1682) 11월 22일 송시열이 여강(驪江: 여주)에 도착하자 숙종은 승지를 보내 예우했다. 그 승지가 풍양조씨 조지겸이었는데 권상하는 『황강문답』에서 이때의 정경을 전하고 있다.

“승지 조지겸이 여러 날 동안 (송시열을) 모시고 묵으면서 광남(光南: 김익훈)이 반역으로 유도한 나쁜 마음씨를 자세히 말하니 우암이 듣고는 역시 무상(無狀)한 짓이라면서 비록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젊은 무리(少輩)들이 ‘장자(長者)의 소견도 우리들과 같다’고 크게 기뻐했다.(권상하, 『황강문답』 『한수재선생문집』)”

그러나 송시열이 입경(入京)한 후 상황이 달라졌다.


“우암이 서울에 들어오자 문곡(文谷: 안동김씨 김수항)·노봉(老峯: 여흥민씨 민정중)·청성(淸城: 청풍김씨김석주)이 사건의 본말을 다 알렸으며, 또 광성(光城: 광산김씨 김익훈)의 가족이 찾아와 그 곡절을 호소했다. 우암이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고 ‘일이 과연 이렇다면 김익훈은 죄가 없다’고 말했는데

 

젊은 무리들이 크게 분개하면서, ‘장자(長者=송시열)도 사사로이 편애하여 처음의 견해를 바꾸는가’라고 말했다. 이렇게 조지겸·한태동이 비로소 각립(角立)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따르는 무리(=소론)가 무수히 많았다.(『황강문답』)”

선조 8년(1575) 을해당론으로 사림이 동서로 분당된 후 일찍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된 동인과는 달리 100년 이상 단일 정체성을 유지하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것이었다.

 

송시열 연보는 그가 숙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적고 있다.

신이 젊어서 김장생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 손자 익훈이 시론(時論)에 죄를 얻어 장차 죽게 되었습니다. 신은 조목(趙穆: 이황의 제자)이 이황의 자손을 규계(規戒)한 것처럼 하지 못한 것으로서 신은 조목에 대한 죄인입니다.(『송자대전』연보, 숭정(崇禎) 56년, 계해.)”

송시열이 김익훈을 변호하고 나서자 젊은 서인들은 분개했다. 젊은 서인들이 반대 당에 대한 정치공작에 반대하고 나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여야 사이에 공존(共存)의 정치를 복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김석주를 비롯한 서인 노장파의 견해를 듣고 김익훈을 변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치공작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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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칠정(四端七情)

 

맹자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사단(四端)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는데, 각각 인·의·예·지의 실마리가 된다.

 

칠정(七情)은 〈예기 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사람이 가진 7가지 감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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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경궁리 [居敬窮理]

 
〈대학〉격물치지에 관한 주희의 이론.
 
주희의 격물치지론은 전체적으로 볼 때 거경궁리로 요약된다.
주희는 〈대학장구〉의 격물치지 보망장에서
 
격물치지를 즉물궁리(卽物窮理)로 해석하여
객관적 사물의 이()를 탐구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현실적 인간은 사물의 ()를 탐구하여
이를 자신에게 보태야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물의 ()를 탐구함에 앞서
경건함이 요청된다.
 
수기치인을 그 목표로 하는 유학에서는
객관적 사물의 ()를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지식축적은
마음을 밝히고 인격을 연마하는 데로 전환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경이 요구된다.
거경과 궁리는 다같이 중요하다.
 
거경과 궁리는 주희의 격물치지론에서는 상보적(相補的) 관계에 있다.
"배우는 사람이 할 공부는 거경과 궁리를 서로 발용하는 데 있다.
 
궁리할 수 있으면 거경공부는 날로 진보하고
거경할 수 있으면 궁리공부는 날로 세밀해진다.
 
비유하면 사람의 다리와 같아서 왼쪽 발이 나가면 오른쪽 발이 멈추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실재는 한 가지 일이다"(〈주자어류〉).
 
그리고 또한 "경은 본심을 보유하는 공부인 것이다.
마음이 존재한 후에 치지할 수 있고
 
치지는 격물궁리로써 성품을 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주자문집〉)라고 했다.
 
또한 거경과 궁리를 내외 측면에서 말하면
거경은 내적 수양이요 궁리는 외적 탐구방법이다.
 
경은 주일무적(主一無適) 즉 정신을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물욕이 정신을 착란치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역〉에서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바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주희의 거경궁리설은
그의 성즉리체계(性卽理體系)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즉리설에 따르면 만물 속에는 태극으로서의 ()가 내재하는데
인간 안에서의 ()(性)이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신체를 가진 인간은
 ()와 함께 기(氣)의 요소를 갖고 있다.
 
즉 현실적 인간의 性은 理로서의 性인 본연지성(本然之性)
氣의 요소를 구유한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이해된다.
 
본연지성은 그대로 완전하여 천리(天理)이지만
기질지성은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본연지성은 선하지만
기질지성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기질지성을 회복하여 본연지성과 일치시키는 방법으로써
주희는 거경과 궁리를 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객관적 理를 탐구하여야 하며
외물과 접촉에 의해서도 情이나 욕심이 발동되지 않도록 경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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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의 해석방법 차이 : 주리론(主理論) 이황 / 주기론 [主氣 論] 이율곡

 

조선시대 이이(李珥)의 성리학설 또는 그의 성리학설을 계승·지지하는 학자들의 사상을 가리키는 개념.

16세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유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본격화될 때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심성론(心性論)이다.

 

특히 오상(五常)사단칠정(四端七情)으로 포괄되는 인간의 성정(性情)을 이기론적으로 해명하려는 노력이 활발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학자가 이황(李滉)이다.

 

그는 사단칠정이라는 인간의 감정 현상을 설명함에 있

사단과 칠정에 '이(理)'와 '기(氣)'가 모두 관여하지만 그 발하는 바의 '소종래'(所從來)와 '소주이언'(所主而言)의 차이에 따라 사단은 이발(理發)로, 칠정은 기발(氣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이황의 이러한 사단칠정론에 대해서는 이미 당시에 기대승(奇大升)이 의문을 제기했으며, 그후 이이는 기대승의 견해를 계승하여 이황과는 다른 이론체계를 확립했다(→ 색인 : 사단칠정논쟁).

 

그 특징은 사단칠정을 설명함에 있어 이발(理發)을 부정하고 기발(氣發)만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이에 따르면 오직 기(氣)만이 능동성을 가지고 발할 수 있으며,

이때 이(理)기(氣)가 발하는 바의 소이연(所以然)·소당연(所當然)의 원리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황이 사단을 '이발기수'(理發氣隨)로, 칠정을 '기발이승'(氣發理乘)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이이는 사단과 칠정을 모두 '기발이승(氣發理乘)'으로 설명하며

사단은 칠정 가운데서 선한 측면만을 가리키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러한 사단칠정론의 차이는 이기론·심성론·수양론을 포함하는 성리학 전체의 이론적 체계를 달리하는 것이었으며, 그후 이황과 이이의 제자·문인들에 의해 두 사람의 성리학이 계승·발전하면서 우리나라 성리학을 대표하는 두 계열의 학파를 수립하게 된다.

 

그 가운데 이황의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을 주리파(主理派), 그들의 이론을 주리론이라 하며,

이이의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을 주기파(主氣派), 그들의 이론을 주기론이라 한다.

 

이기론에 있어 주리론과 주기론은 모두 이(理)와 기(氣)를 세계의 근원적 존재로 인정하며, 이와 기의 상호관계에 의해 만물이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점은 같다.

그리고 이기에 관한 가치론적 설명에서 기보다 이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이기의 분개(分開)와 혼륜(混淪)에 대한 강조의 차이에서 보듯이,

주리론이 '이기결시이물'(理氣決是二物)이라는 분개의 측면을 강조하는 데 반해,

주기론은 '이기원불상리'(理氣元不相離)라는 혼륜의 측면을 강조한다.

 

따라서 주리론에서 이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성격이 명백하게 드러나며, 또 이와 기의 차별성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주기론에서 이(理) 기(氣)와 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객관적 실재라기보다는

오히려 기(氣)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기의 법칙성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사단칠정론에서 보듯이,

이(理)에 대해 주리론에서는 형태는 없으나 운동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는 데 반해,

주기론에서는 운동능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주기론에서는 이발을 부정하고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만을 인정하는데,

그것은 이(理)는 정의(情意)·운용(運用)·조작(造作)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발하는 것은 기(氣)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기론은 기(氣)의 운동을 자기 원인에 의한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사상과 동일한 내용을 갖지만,

기(氣)운동을 내면에서 규제하는 원리로서의 이(理), 즉 '소이연'으로서의 이(理)를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기일원론과도 차이가 있다.

 

심성론에서도 주리론과 주기론이 모두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이(理)와 기(氣)분개를 강조하는 주리론이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별개의 존재로 파악하는 데 반해,

이(理)와 기(氣)혼륜을 강조하는 주기론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다만 기질지성 가운데 이(理)의 측면을 가리켜 본연지성이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理)운동능력을 인정하는 주리론에서는 '성발위정'(性發爲情)의 논리에 따라

사단은 본연지성이 발한 정으로, 칠정은 기질지성이 발한 정으로 설명하며,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갖춘 심(心)은 이(理)와 기(氣)의 합(合)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理)운동능력을 부정하는 주기론에서는

情을 '심지동'(心之動)으로 파악하여 '심발'(心發)·'성불발'(性不發)을 주장하게 되며,

심(心)과 성(性)의 관계는 '동하는 것은 심이고, 능히 동하게 하는 소이는 성'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心發) 심을 발하는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이(理) 이론에서는 심(心)의 허령(虛靈)한 지각작용의 본질을 기(氣)로 단정하고

성(性)은 심(心)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소이연·소당연의 원리로 이해하여 '심시기'(心是氣) 혹은 '심즉기'(心卽氣)를 주장하게 된다.

이것은 주리론에서 심을 이기합으로 파악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성리학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통일적인 세계관을 확립함으로써 유교적인 도덕적 실천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학문이다.

 

따라서 주리론과 주기론의 이기·심성론의 차이는 결국 수양론의 차이로 귀결된다.

주리론의 경우 심 내부에 존재하는 천부적인 선한 본성(본연지성), 곧 이의 존재와 그것이 발한 사단을 강조하기 때문에 수양론에서도 본연지성을 제대로 지키고 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선한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본연지성을 제대로 지키고 발현하기 위한 수양 방법을 가리켜 '거경'(居敬)이라고 했으며, 주리론의 수양론은 이 '거경'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그러나 주기론에서는 심 내부에서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은 서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모든 의식과 감정은 외계 사물의 감응에 의하여 심 내부의 기가 동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는 반드시 기를 타고서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도덕적 실천을 위해 가장 근본적인 것은 사물에 감응하는 심 내부의 기질을 선한 것으로 변화시키면 자연히 인간의 선한 본성, 즉 본연지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내용을 가진 주기론은 이이에 의해 확립되었으며, 그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 송익필(宋翼弼) 역시 주기론의 입장에서 성리학을 이해했다.

 

그후 주기론은 양인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과 정엽(鄭曄)을 거쳐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에게 계승되었다(→ 색인 : 기호학파).

 

송시열은 주리론이 근거하고 있는 〈주자어류 朱子語類〉의 '사단시이지발, 칠정시기지발'(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이라는 말이 주희의 정론(定論)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주자어류〉와 〈주자대전 朱子大全〉의 말을 비교·대조하여 주희의 정론을 확정하려 했다.

 

그러나 그 작업은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이어지고, 다시 권상하의 제자인 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져 〈주자언론동이고 朱子言論同異攷〉로 완성되었다.

<주자언론동이고〉는 주기론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 책은 성리학의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주희의 언론에 차이가 있는 것을 서로 모순된 것, 서로 모순되는 것 같으나 관점이 다른 것, 실제 내용은 동일한 것 등으로 일일이 나누어 논의했다. 그 가운데 理의 동정에 대해서는 주희가 말한 "理에 동정이 있다. 그러므로 氣에 동정이 있는 것이다. 理에 동정이 없다면 氣가 어찌 스스로 동정하겠는가"라고 한 '이유동정'(理有動靜)을 '유동정지리'(有動靜之理)라고 풀이함으로써 氣는 유위(有爲)로서 발동(發動)하는 것이고, 理는 무위(無爲)로서 무발동(無發動)이라 단정하여 理發을 부인하고 있다.

 

그리고 사단을 '이지발'이라 한 것은 주희의 정론이 아니므로 〈주자어류〉 기록자의 오기라 했다. 또 사단이나 칠정이 다 성지용(性之用)으로서 정이므로 사단과 칠정을 이기에 각각 분속시키는 것은 주희에게 있어 평일의 아언(雅言)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주기론은 한원진 단계에 오면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 불려지는 성리학의 이론적 논쟁을 통해 그 내부에서 분화가 일어났다. 권상하의 제자인 한원진과 이간(李柬)을 각각 대표로 하는 호론과 낙론은 모두 주기론의 기발이승일도설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인성(人性)·물성(人物性)의 동이(同異)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가운데 '이통'의 측면을 '기국'의 측면보다 중시할 경우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낙론이 되고, '기국'을 '이통'보다 중시할 경우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호론이 된다. 이 호락 양론 가운데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별개의 성이 아니라는 주기론의 전통적인 사상을 보다 충실히 계승한 것은 호론이라고 할 수 있다.

 

낙론의 경우에는 성을 이해함에 있어 기질지성과는 구별되는 본연지성을 설정하고, 그 본연지성에 근거하여 인성과 물성이 같음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후 주기론은 임성주(任聖周)의 '성즉기'(性卽氣)의 명제로까지 발전하게 되는데, 임성주의 사상은 기일원론, 곧 유기론(唯氣論)이라는 점에서 주기론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기호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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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학의 태두 광산김씨 김장생  1548(명종 3)~ 1631(인조 9). : 계구신독(戒懼愼獨)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예학(禮學)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론적 배경은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이다.

 

그의 예학론은 양란(兩亂) 이후 혼란해진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正統]에 중점이 두어졌다.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관직생활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대사헌 계휘(繼輝)의 아들이며, 집(集)의 아버지이다.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장성하여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에게 사사했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창릉참봉에 천거되었다.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명나라 사행(使行)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한 뒤,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이어 순릉참봉·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동몽교관·통례원인의를 거쳐 1591년 정산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다. 그뒤 남양부사·안성군수를 거쳐 1600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1602년에 청백리에 뽑히고 이듬해 익산군수로 나갔으나, 북인(北人)이 득세하게 되자 1605년 벼슬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잠시 회양·철원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장령에 오르고, 이어 성균사업(成均司業)·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면서 원자(元子)를 가르치는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이 가운데 성균사업은 그를 위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천거로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이어 부호군을 거쳐 1625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다음해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워 이이·성혼을 제향했으며,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龍?衛副司直)으로 옮겼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는 한편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청나라와의 강화에 반대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했다. 그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물러난 뒤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했다.

 

그뒤 1630년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줄곧 머물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연산에서 83세의 나이로 죽어, 진잠(鎭岑)에 장사지냈다.

국가재조의 예학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당쟁으로 동서(東西)와 남북(南北)이 분당·대립하고, 한편으로는 이괄(李适)의 난과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국가체제가 위기에 빠져 토지제도·수취제도 등 여러 방면에서 누적된 폐단을 개혁해서 민생을 회복해야 할 때였다.

 

국가재조는 여러 측면에서 진행되었으며, 특히 사상계에서는 기존의 주자학적 정통주의가 훨씬 강력하게 대두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국가의 위기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체계로서 예(禮)에 주목했다.

 

예 실천의 방법으로서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계구신독(戒懼愼獨)을 중요시했다. 즉 일상생활에서 항상 계구신독을 염두에 두고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그 마음이 발(發)함에 모두 예에 맞게 행하여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로써 예 실천의 주체인 인간 내면의 심(心)을 개발하고, 천리(天理)의 법칙을 깨닫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의 강조는 〈가례 家禮〉를 통한 유교적인 가족질서 확립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는 〈근사록〉을 오랫 동안 연구하고 고금선유(古今先儒)의 여러 가지 설을 참조하여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토속과 인정에 맞추어 〈가례〉를 고치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예와 효의 관계를 "예가 아닌 것은 효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라고 설명하면서 효를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여겼다. 또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시하여 "관혼상제는 가정에서의 일용(日用)의 체(體)이며 길흉(吉凶)의 수(需)에 통한다. 하나라도 폐(廢)하여 강습하지 않은 바 없다"고 하여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시행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학의 결론은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정통(正統)에 있었다.

 

가정·사회·국가에서 그 나름의 기강과 질서가 서야 하는 것이며 그 근간이 되는 것이 통(統)이며 통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였다. 이러한 예학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주의 사상은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서 기능했다.

예학의 이론적 배경

그가 예론에서 이론적 배경으로 삼았던 것은 율곡의 이기설(理氣說)이었다. 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반대하면서 율곡의 이기관(理氣觀)을 포괄적으로 계승하여, 이(理)와 기(氣)는 본래 스스로 섞여 있다고 하는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을 주장했다.

 

그는 이기의 관계를 불상잡(不相雜)·불상리(不相離)로 파악하고, 기(氣)의 유위유형(有爲有形)한 부제성(不齊性)이(理)의 무위무형(無爲無形)한 제일성(齊一性)의 관계에서 율곡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設)과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이해했다.

 

또한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견지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일원적으로 해석하여, 사단과 칠정이 이정(二情)이 아니며 인심과 도심이 이심(二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심(心)이 발(發)한 때와 발하기 전의 존양성찰(存養省察)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칠정이 사단으로, 인심이 도심으로 보존되고 발양되기 위해서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절실히 요구하게 된다. 여기서 계구신독(戒懼愼獨)에 대한 강조가 나오는 것이다.

 

 

한편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서도 퇴계의 이자도설(理自到說)을 부정하고 율곡의 설을 충실히 계승했다. 격물(格物)이란 물리(物理)가 극처(極處)에 이르는 것이며 물리는 내 마음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물리가 내 마음에 도래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사물의 이(理)는 인간의 지(知)와 관계없이 언제나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지를 통하여 인식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문제는 다만 나의 지(知) 여하에 따라 인식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물아일리(物我一理), 주객합일(主客合一)인 내 마음의 인식 능력으로 물리를 체득하는 이론을 추구했다.

 

따라서 격물이라는 것도 사물의 이(理)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활연관통(豁然貫通)의 체득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어서 그는 격물과 치지는 비록 구별하여 표현되지만, 물리가 일리(一理)이며 격물(格物)과 치지(致知)가 모두 활연관통(豁然貫通)의 양면이기 때문에 그 실질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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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물치지 [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규명해 자기의 지식을 명확히 한다는 뜻

  중국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으로 된 내용 중,

 

처음 두 조목을 가리키는데, 이 말은 본래의 뜻이 밝혀지지 않아 후세에 그 해석을 놓고 여러 학파(學派)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주자학파(朱子學派: 程伊川 ·朱熹)와 양명학파(陽明學派: 陸象山 ·王陽明)이다.

 

주자는 격(格)을 이른다[至]는 뜻으로 해석하여 모든 사물의 이치(理致)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앎에 이른다[致知]고 하는, 이른바 성즉리설(性卽理說)을 확립하였고,

 

왕양명은 사람의 참다운 양지(良知)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물욕(物欲)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여, 격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풀이한 심즉리설(心卽理說)을 확립하였다.

 

 즉, 주자의 격물치지가 지식 위주인 것에 반해 왕양명은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고 있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이라 하고,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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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은 이이에게서 주자학을 전수받아 그 학통을 계승했다. 특히 그의 성사상(誠思想)을 이어받아 학문의 요체로 삼았으며, 이기심학관(理氣心學觀)을 계승하여 일원적(一元的) 이기심학관을 견지했다. 격물치지설에서도 율곡의 설에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율곡은 박문(博文)의 공이 많지만 약례(約禮)에서는 오히려 지극하지 못하다"고 했듯이 예학에 더욱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예학의 계승

송익필에게서 배운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당시 나라의 전례(典禮)나 모든 행상에 의문이 있으면 그에게 자문할 정도로 예학에 정통했다.

 

또한 학문을 아들 에게 이어받게 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하게 했.

 

그의 문인으로는 아들 집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이시직(李時稷)·최명길(崔鳴吉)·이덕수(李德洙)·최명룡(崔命龍) 등이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가 크게 성하여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루었다.

 

연산 돈암서원(豚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 도기서원(道基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상례비요 喪禮備要〉·〈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답 疑禮問答〉 등 예에 관한 것과,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 沙溪先生全書〉가 남아 있다.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사계 김장생 묘역

 

 

 

김장생의 묘역에는 김장생의 묘가 가장 윗자리에 있고, 그 아래는 광김의 중흥을 이룬 양천허씨묘, 선생묘의 바로 오른편 능선에는 김선생(金善生), 그 아래는 김철산(金鐵山)과 부인, 그 아래는 김겸광(金謙光), 그 아래는 김공휘(金公輝) 등의 묘소가 있다. 또한 김겸광과 김장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양천허씨 부인의 재실(齋室)인 영모재(永慕齋), 김국광(金國光)의 종가 및 김장생 사당(祠堂)과 재실인 염수재(念修齋)가 있다.

 

이곳 묘역의 사계선생 묘에서 주위를 살펴보면 동남쪽인 손방위(巽方位)에는 대둔산(大屯山), 북쪽인 임방위(壬方位)에는 계룡산(鷄龍山), 북서쪽인 건방위(乾方位)에는 칠갑산(七甲山)이 장엄하게 시립하여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선생의 묘소는 충남기념물 제47호로 충남 논산군 연산면(連山面) 고정리(高井里) 산7-4에 위치하고 있다.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4번 국도를 타고 논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1번 국도와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1번 국도를 갈아타고 계속 논산 쪽으로 가면 도로가에 "사계 선생 유적지 입구"라는 푯말이 나온다.

 

그 아래쪽으로 난 농로 길을 따라 곧장 들어가면 고정리가 나오고, 마을 끝 고정산 자락의 광산김씨 선영에 사계 선생묘가 자리하고 있다.

 

김장생 선생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인 광산김씨(光山金氏)다. 광산김씨를 흔히 광김(光金)이라고도 하는데 달성서씨(達成徐氏), 연안이씨(延安李氏)와 함께 조선 3대 명문에 속한다.

 

이들 문중 중에서도 광김은 사계 김장생, 달성서씨는 약봉(藥峰) 서성(徐省), 연안 이씨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가문을 가장 명문으로 꼽는다.

이들 가문을 명문으로 꼽는 것은 정승판서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대로 석학(碩學), 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특히 광김은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이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영예를 안았다.

더구나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 한 가문에서 2명이 배향되기는 송시열과 송준길을 배출한 은진송씨(恩津宋氏)광김뿐인데 부자가 나란히 배향되기는 김장생, 김집이 유일하다 

 

김장생 가문이 조선의 3대 명문을 이루기까지는 김장생의 7대조 할머니인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역할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녀는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양천허씨 허응(許應)의 딸로 한림원의 벼슬을 하던 광김20世 김문(金問)과 혼인을 하였지만 그가 일찍 사망하여 17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딸의 신세를 가엾게 여긴 친정 부모(양천허씨 허응)는 몰래 다른 곳으로 개가(改嫁)를 시키려고 혼처를 알아보고 다녔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 길로 개성을 떠나 유복자인 아들 광김21世  철산(鐵山)을 데리고 김문의 아버지 광김19世 김약채(金若采)가 광김으로는 처음으로 터를 잡아 살고 있는 연산(논산) 고정리의 시가(媤家)까지 걸어서 내려 왔다고 한다.

 

 

그 뒤 그녀는 시부모를 모시며 아들 철산을 사헌부 감찰로 훌륭히 키웠고, 광김21世 철산은 좌의정을 지낸 광김22世  국광(國光), 겸광(謙光) 등 아들 4형제를 낳았다.

<광김22世 김국광 좌의정김공묘역>

 

 

                         <재실 [齋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

 

 


 

철산의 아들 중 광김22世 김국광은 좌의정(세조 때) 시절 8개월간 혼자 의정부(議政府)를 맡았는데 이 점을 부끄럽게 여겨 그의 맏아들 이름을 극히 부끄럽다는 뜻으로 광김23世극뉴(克杻)라 지었다고 한다.

   전북 순창군 인계면  광김23世 김극뉴(金克?,1436-1496)의 묘 :  조선 8대명당)

 

바로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조선8대 명당이라 불리는 곳에 묻힌 주인공으로 이 명당의 발복으로 인해  많은 풍수가들은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조선조에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이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한 가문에서 2명이나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정승 5명, 대제학(大提學) 7명, 왕비 1명(숙종비 인경왕후)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신현관을 배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광김23世극뉴는 종윤(宗胤)을, 광김24世 종윤은 호(鎬)를, 광김25世호는 계휘(繼輝)를, 광김26世계휘의 아들이 바로 광김27世 사계 김장생이다.

그러므로 광김이 명문을 이룬 것은 양천허씨의 정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사계로 인해 명문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굳건히 다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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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라고까지 연상하게 만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가문과 일생

송시열은 은진(恩津) 송씨로 그의 가문은 역대로 충남 회덕이 세거지였다.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선산 곽씨이다. 그의 집안이 회덕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9대조인 송명의(宋明誼)가 회덕으로 장가들면서부터다.

 

그 후손들은 이후 회덕 백달촌에 송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그로 인해 이 지역을 송촌(宋村, 현재 대전시 동구 중리동)이라 불렀다. 백달촌은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흙이 비옥하여 농사에 적합한 땅이었다. 

 

은진 송씨가 회송(懷宋)이라고 불릴 만큼 지역사회에 깊은 연고를 가지게 된 것은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8-1446)부터이다.

 

1432년(세종 14년)에 송유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백달촌에 쌍청당을 짓고 살았는데, 뜻을 받든 후손들이 쌍청당을 정성껏 지켜내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은진 송씨 집안은 송유 이후 크게 현달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벼슬길이 완전히 끊긴 것도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와 은진 송씨 가문은 송규연, 송규렴, 송상기, 송준길, 송구수, 송시열 등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송시열은 외가가 있는 옥천 적등강가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선산 곽씨 집안은 옥천에 세거지가 있었으며, 외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조헌과 함께 목숨을 바친 의병장 곽자방이다.

우암을 낳을 때 어머니 곽씨는 명월주를 삼키는 태몽을 꾸었고 부친은 공자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인 성뢰(聖賚)는 부친이 꾼 태몽에 따른 것이다.

 

송시열이 친가가 있는 회덕으로 간 것은 여덟 살 되는 1614년이다. 이 때 친족인 송이창 집에서 송이창의 아들이자 쌍청당의 7대손인 송준길(宋浚吉,1606~1672)과 함께 수학하였다.

 

11세가 되던 해인 1617년(광해군 9년)부터는 아버지 송갑조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은 송시열의 성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친 송갑조는 광해군 시절, 사마시에 함께 합격한 이들이 인목대비가 있는 서궁에 인사하지 않겠다는 것에 반발하여 홀로 서궁에 찾아가 절을 할 정도로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이 일로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어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그 뒤로 두문불출하며 학문과 아들 교육에만 전념했다.

 

송시열의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자율곡이었다. 그렇게 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송갑조는 송시열이 열두 살 때 “주자는 훗날의 공자다. 율곡은 훗날의 주자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며 주자와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쳤다.


1625년(인조 3년) 송시열은 19세의 나이로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와 혼인하였는데, 이씨는 문정공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1627년 이후 송시열은 연이은 큰 슬픔을 당하게 된다.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그만 맏형인 송시희가 운산에서 전사했고, 22세인 1628년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마친 뒤인 1630년에 송시열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이듬해 김장생이 죽자 그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 들어갔다.

 

1633년(인조 11년) 송시열은 27세의 나이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시제(試製)로 논술하여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송준길과 영남을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635년 11월에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1년간에 걸친 사부생활은 효종과의 깊은 유대와 함께 북벌계획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에게 북벌을 당부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은 송시열의 전 생애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절친한 동문인 윤선거(尹宣擧)와도 갈등을 빚었고, 윤선거의 아들이면서도

그가 총애한 제자 윤증과도 결별함으로써 노론과 소론의 분쟁도 일어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자 송시열은 관직 생활의 뜻을 접고 충북 황간으로 낙향하여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북벌계획을 구상하며 강학에 힘을 기울였다. 낙향한 그를 인조가 여러 차례 불렀지만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송시열이 인조의 계속적인 부름에 응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모양새로는 그가 벼슬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경세(經世)에 뜻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송시열의 나이 43세인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은 대군으로 있을 때 사부였다는 인연으로 송시열을 불러 곁에 두고 싶어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병자호란으로 중국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몸소 겪은 왕이었다.

 

효종은 즉위하면서 재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산림(山林)들을 대거 중앙 정계에 등용하고자 했고, 대표적인 인물이 스승인 송시열이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국가 원로들을 궁궐로 초빙했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와신상담할 것을 밝혔다. 화답이라도 하듯이 송시열은 1649년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북벌론의 합당(친명배청)함을 제시하고 북벌이야 말로 국가대의라는 것을 표방하였다.

 

[기축봉사]는 밀봉한 채로 효종에게 바쳐졌다. 모두 13개조로 되어 있는 이 봉사에서 송시열은 ‘대일통(大一通)’의 큰 뜻을 밝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조목은 ‘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호할 것(節哀以保身)부터 정사를 바르게 하여 오랑캐를 맞설 것(修政事以禦外侮)’에 이르기까지 군왕으로서 지켜야할 내용들이었다.

 

물론 여기서 오랑캐란 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친명배청) 송시열에게 중국의 주인은 여전히 청이 아닌 명이었다. 청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송시열에게는 패륜이자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은 현실로 굳어진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유교적인 가르침대로 명을 위해 복수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했다.

 

송시열에 대한 효종의 대우는 지극했다. 왕이 청에 대한 북벌을 계획할 때면 사관이나 승지마저 멀리한 채, 독대로 의논할 정도였다. 효종의 총애를 받은 송시열이지만, 인조에게 그랬던 것처럼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70이 넘은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예의와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조정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효종은 거듭해서 송시열에게 관직을 내렸고 송시열은 그때마다 사양했다. 효종의 끊임없는 구애는 계속되었다.

 

효종 9년(1658년) 2월에 송시열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효종은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올라오라고 했는데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가”라며 걱정했다.

 

결국 그해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초구(담비로 만든 털옷)를 직접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은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급서(急逝)했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다.

 

 

화양동 생활과 제자 윤증과의 불화

송시열은 주자(朱子)를 신앙으로 삼을 정도로 ‘주자제일주의자’였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입버릇처럼 되내이자, 효종이 “경은 말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십니다”라고 답변할 정도였다고 한다. 송시열은 주자의 남송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믿은 인물이었다. 내우외환이라는 주자가 당면했던 문제가 조선의 당면 문제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고, 그로 인해 주자가 제시했던 대책은 지금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조선이 건국된 상황은 송(宋)과 똑같기 때문에 그 말류(末流)의 폐단 또한 서로 비슷합니다. 국력의 강하고 약함도 비슷하고 지방 관리들의 부패도 비슷하며, 호강(豪强)한 자가 제맘대로 난폭하게 구는 것도 비슷합니다. 주자는 당시에 눈으로 이런 것들을 보았으므로, 말한 바가 매우 절실하고 정성스러워 그 병에 꼭 들어맞는 처방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이 약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숙종실록] 권 14, 숙종 9년 6월 경자일)

 

송시열은 유학의 정맥이 윤휴 등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생각했고,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반감은 훗날 그가 총애하던 제자 윤증과 불화하는 이른바 회니시비라는 노소분당으로까지 비화되었다.

 

회덕에 살던 송시열과 니산(尼山)에 살던 윤증은 사제지간이었고,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는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생전에 율곡의 연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윤선거가 윤휴의 논지를 인정하는 뜻을 비춘 적이 있었는데, 윤선거는 송시열과 윤증 사이를 원만하게 이끌려는 것이었지만,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가족을 이끌고 강화도에 피난해 있었는데, 강화가 함락되려 하자 부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순절하였다. 이때 윤선거는 부친 윤황을 만나기 위해 강화도를 탈출하였고, 부득불 혼자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 일을 부끄럽게 여긴 윤선거는 폐인을 자처하며 벼슬길을 사양하고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은둔생활을 했다.

 

윤선거가 1669년 66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그의 아들 윤증은 박세채가 써준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부친의 묘갈명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윤증의 부탁을 받은 송시열은 마지못해 박세채가 윤선거를 칭송하는데 나는 박세채를 믿으니 그의 말을 술이부작(述而不作)한다’고 했다. 박세채의 말을 인용하되(述而), 윤선거를 칭송하는 글을 쓰지 않겠다(不作)는 말이었다. 송시열은 묘갈명을 지어 윤선거를 칭송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몇 차례에 걸친 윤증의 간곡한 부탁에도 송시열은 글자 몇 자만 고칠 뿐이었다. 윤선거의 묘갈명을 계기로 스승인 송시열과 제자 윤증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

 

 

영욕의 삶

효종의 스승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던 송시열이지만, 효종의 죽음과 함께 영욕의 삶도 저물어갔다.

 

1660년 송시열은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았고,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감으로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으로 은거했다.

 

1666년 8월에 화양동으로 거주지를 옮긴 송시열은 이후 1688년까지 화양동을 출입하며 산수를 즐겼고, 강학을 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화양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에도 1668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하였고, 1674년 2월 효종비 인선왕후의 복제문제로 실각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듬해 송시열은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지 석방되었다.

 

송시열의 나이 76세 되던 1682년에 청푼김씨 김석주 등 훈척들이 남인들을 일망타진하려 하려는 작업을 했다. 이 때 송시열이 주동자 중의 한명인 광산김씨 김익훈을 두둔했는데, 김익훈은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였다. 실망한 젊은 선비들은 송시열을 비난했고, 제자인 윤증과도 반목이 더욱 심해졌다. 이 일로 송시열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으로 다시 은거하였다.

 

송시열의 나이 83세인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월 3일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붓으로 세상을 움직인 노론의 영수, 신화가 되다

송시열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개개인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송시열과 관련한 대표적인 지역을 꼽으라면 ‘화양동’일 것이다.

 

1803년 가을 음성현감이 된 성해응이 부친 성대중과 화양동을 답사하고 지은 [화양도기]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 송시열과 관련한 일화가 전한다.

 

우암 송시열은 태어날 때 산천의 정기를 타고 나 하루는 세자가 그의 안광을 보고 기절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우암이 기거하던 초당에 매년 봄이 되면 활짝 만개하던 홍매(紅梅) 한그루가 있었는데 1689년 사약을 받은 해에 갑자기 말라 죽었다. 그러다가 갑술년(1694)에 경술환국으로 송시열의 관직이 회복되자 죽었던 매화가 다시 살아나 꽃을 활짝 피웠다고 전한다.

 

그는 『조선왕족실록』에 3천 번 이상이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기에, ‘정계의 대로(大老)’, ‘동방의 주자’ 등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당쟁의 화신’, ‘사대주의 신봉자’ 등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송시열은 학계와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우암의 학맥을 기록해 놓은 『화양연원록(華陽淵源錄)』에 의하면 그의 제자는 총 827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우암이 평생 존경해 마지 않은 주자(朱子)의 제자도 442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과연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대에 우암이 누렸던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알게 하는 일면이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계녀서(戒女書)』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1717년에 간행된 『우암집(尤庵集)』 167권과 1787년에 출간한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이 있다.

 

송시열 유적과 만동묘

 

 

 

 송시열 유적 안내도와 안내문

 

 

 

* 만동묘 소개

 

  1703년(숙종 29)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華陽里)에 세운 사당.

 

만동이란 물이 만 구비를 꺾어 흘러 마지막에는 동해로 들어간다는 말로서 존명의식(尊明意識)을 표현한 것이다.

 

만주족인 청(淸)은 명(明)을 정복하기 이전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을 일으켰는데, 이 사당은 명을 정벌하고 조선까지 침략한 이민족 청을 사상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숙종대 문인인 민정중(閔鼎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최후의 황제인 의종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의 글자를 얻어 송시열에게 주었는데, 송시열은 1674년(현종 15) 이것을 화양리의 석벽에 새긴 뒤 그 원본은 환장암(煥章庵)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기 전에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서면으로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부탁했다. 만동이란 이름은 권상하가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취한 것이다.

 

만동묘의 위치는 동천구곡(洞天九曲) 중 제3곡인 읍궁암(泣弓巖) 위쪽에 낙양산(洛陽山)을 배후로 북향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명에 대한 보은의 의리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만동묘를 보호해주었다.

 

즉 묘우(廟宇)의 수호와 제향(祭享)에 관심을 표명했고, 수직사(守直使)를 임명하거나 전결(田結)을 급여해주기도 했다. 봄과 가을의 제향에는 큰 성황을 이루어 유생을 비롯한 촌민·수령 등 각계 각층이 참여했다.

 

그러나 반면에 만동묘의 위세가 날로 증대해 그 폐해가 막심했다. 제사 지낼 때 자성지폐(?盛之弊)는 물론이고 면세전이 확대되어 국가의 경제적 손실이 컸고, 면역이 인정되는 수직사를 자원하는 자가 늘어 군역의 기피현상이 나타났다. 이후 대원군 집정기에 철폐되었으나 얼마 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일제시대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하지만 근래 만동묘의 묘정비가 출토되어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했으며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밖에서 본 풍천재 뒤 모습.

 

만동묘 입구에 들어선다.

 

입구에 들어서니 자기자리를 찾지 못한 옛 부조물들이 널려 잇다.

 

풍천재 모습

 

존사청이라고 안내문에 소개되어 있다.

 

중반청

 

숭삼문 모습 

 

안내문에는 사당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화양서원

 

안내문에는 외삼문으로 기재되어 잇는데 현판에는 양화문이라고 되어 있다.

 

돌에 음각되어 있는 알수 없는 돌

 

성공문 저 뒤로 만동묘 사당이 있다.

 

만동묘의 흙돌담

 

만동묘정비 전각 모습

 

안내판과 만동묘정비 전각

 

 

만동묘정비 모습

 

천장처마와 흙돌담 모습 

 

성공문이라고 만동묘로 들어가는 문인데 굳게 잠겨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3,000회나 올랐다고 하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

선생을 선양하기 위해 대전광역시에서 조성한 우암사적공원에는 문화재로 송자대전판과 남간정사 등이 있으며, 시설로는 남간사 및 주요 건물들과  유물전시관, 장판각 등이 있습니다.
 

 

유물전시관 내에 있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초상화입니다.
노구의 모습인데도 안광에 힘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유물전시관 내에는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볼 수 있는 연표 및 전시품들이 잘 정리되어 있으며,
점심 시간을 피한다면 문화유산해설사의 친절하고 자세한 안내도 받을 수가 있답니다.

 

 

송시열 선생이 유림과 제자들을 모아 학문을 익히던 곳인 남간정사의 모습입니다.
비가 막 그친 때라 연못의 물은 탁했지만 초록으로 우거진 주변 풍광들을 오롯이 담아내기엔 충분하였네요. 연못 가운데의 둥근 섬은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남간'이란 양지바른 곳(남쪽)에 졸졸 흐르는 산골물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선생이 평생 흠모하던 주자의 시'운곡남간'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해요.
대청 밑으로 개울물이 흘러 내려 눈앞의 자연 연못으로 이어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는 곳입니다. 흐르는 물 위에 건물을 짓는다는 발상 자체도 열정적인 선생의 모습을 잘 말해주는 듯 합니다. 

남간정사는 송시열 선생의 사후에 유림들이 목판을 새겨 송자대전을 펴냈던 장소이기도 하지요.

'송자'라는 칭호는 그의 학문적 업적이 얼마나 대단했는 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송자대전판은 선생의 문집과 연보 등을 집대성한 판목으로 현재 사적공원 내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주차장 쪽에서 본 장판각의 모습입니다.

 


기국정은 우암 선생께서 손님맞이를 위해 세운 정자로  소제호 주변의 소제동에 세워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소제호가 매몰되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연당'이라 불렸으나 주변에 구기자와 국화가 무성하여 기국정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지요.

 


기국정 누마루 난간의 문양이 참 단순하면서도 멋스럽네요.
위쪽의 문양은 박쥐 모양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박쥐를 다산이나 복을 주는 행운의 동물이라 여겼다고 합니다.  궁궐에서도 박쥐 문양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유물전시관 내에 있는 많은 전시물 가운데에서 '치,부끄러울'라는 한자가 눈에 뜨입니다.

송시열 선생은 주자학의 대가로 이이의 학통을 계승,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예론에 밝으셨던 분입니다. 송시열 선생이 추구하셨던 예학의 실천, 그것을 이 뜨거운 한 글자가 대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별당 동춘당의 주인이셨던 송준길 선생의 성정이 봄과 같고 仁을 추구하셨던 분이라고 말한다면

남간정사의 주인이신 우암 송시열 선생의 성정은 여름과 같고 여름(남방)의 덕성인 禮를 추구하셨던 분이라고 개인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던 삶의 주인공인 송시열 선생의 자취를 따라 둘러본 우암사적공원에서의 여름 한낮은 왠지 모르게 뜨겁고도 시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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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 1606(선조 39)~ 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송준길

송준길의 서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18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서인 노론을 이끌었다. 본관은 은진.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아버지는 영천군수를 지낸 이창(爾昌)이다.

어려서부터 친척인 송시열과 함께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면서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각별한 교분을 맺어나갔으며,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내시교관·동몽교관·시직·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1633년 잠시 동몽교관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20여 년 간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서인세력)에 속했으며,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을 이조판서에 기용하는 등 척화파와 재야학자들을 대거 등용할 때 송시열 등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진선·장령 등을 거쳐 집의에 임명되었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집의로 있으면서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하는 한편,

인조말 이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의 핵심인물인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가 효종의 북벌정책을 청(淸)에 밀고하여 그와 송시열 등 산당(山黨)은 청의 압력으로 모두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뒤 집의, 이조참의 겸 찬선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다.

 

1658년(효종 9) 대사헌,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쳐 이듬해 병조판서·지중추원사·우참찬에 임명되어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필했다.

 

1659년 효종이 죽은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그는 송시열의 기년복(朞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 주장을 지지하여 논란을 거듭한 끝에 남인의 윤휴(尹?)·윤선도(尹善道)·허목(許穆) 등의 3년설(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어 이조판서·우참찬·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기년제를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공격으로 1665년 원자(元子)의 보양을 건의하여 보양관(輔養官)으로 잠시 봉직한 것을 제외하고는 관직에 발을 끊고 회덕에 머물러 살면서 여생을 마쳤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서 예학에 밝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던 분이지요.
우암 송시열 선생과 함께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두 분은 학문적 경향이 같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성정은 서로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먼저 송준길 선생의 별당인 동춘당과 고택을 둘러보며 선생의 인품이 어떠했을 지를 엿보자구요~ 

동춘당이라는 이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직접 써서 걸어둔 것이라고 해요. 同春이라 하면 '봄과 같다'는 것이지요.

동양의 오행사상에서 봄의 덕성은 인(어질 仁)으로 분류합니다.

겨울을 지나온 봄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롭게 설레임으로 다가오는 계절이지요.
만물을 생하고 생하는 계절인 봄의 덕성처럼 송준길 선생은 늘 仁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동춘당이라는 '호'를 통해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처마선이 참 아름다운 건물이지요?
동춘당은 보물 제209호로 지정된 우리 고장(대전)의 대표적 문화재입니다.

그것은 유사한 별당 건축 중에서도 가장 대표될 만한 정갈함과 균제감을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춘당은 동춘당의 아버지인 송이창이 세웠으며, 당의 일부가 허물어지자 송준길 선생이 38세 되던 해(1643년)에 중건한 건물입니다.

건물 경내에는 어떠한 조경없이 담장 주변으로 몇 그루의 나무만 심어져 있는 간결한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꾸미지 않은 모습이면서도 단아한 멋이 풍겨나는 이 별당 건물은 송준길 선생의 인품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지요.

 

동춘당은 온돌과 마루가 함께 구성되어 있는 건물입니다.
온돌이 있는 이 작은 공간에서 추운 겨울에도 주자나 이이의 학문을 연구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듯 합니다.

 

온돌방 아래 뚫어진 이 구멍은 뭘까요? 아궁이처럼 보이지만 굴뚝이랍니다.
굴뚝이 건물 뒤쪽에 있지 않고 측면 방 아래 낮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지요.

이것은 은폐를 통해 '따뜻한 온돌방'이라는 본능적 행위를 억제하고자 하는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굴뚝으로도 본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는 기술적인 이해가 뒷받침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동춘 선생의 고택은 사랑채, 안채, 그리고 두 채의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안채 마당에서 바라본 사랑채와 내외담의 모습입니다.  이곳 고택의 사랑채는 송준길 선생의 명성에 비해 매우 협소한 편이라고 합니다.

 


사랑채 굴뚝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지요? 자세히 살펴보니  팔괘와 태극 문양이네요.
굴뚝에 그려진 팔괘태극도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언제 누군가에 의해 어떠한 의미로 조각된 것인지 참 궁금한 마음입니다.
 

 

 

송씨가묘의 모습입니다. 송씨가문 4대조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지요.

 

이곳은 별묘로서 동춘당 선생의 신위를 모신 곳입니다.

 

동춘당과 고택은 마치 고고한 선비의 자태와 같이 단아하며 품위가 있는 것이 자랑할 만한 부분입니다.
화려하지 않은 검소함과 자연과 동화하려는 공간의 심성이 잘 드러나는 건축물이라고 평하는데요,
송준길 선생의 소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품 또한 건축물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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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宗의 혈맥 숙종⑤ 서인의 분열 계속

 

이런 상황에서 과천까지 올라온 윤증(尹拯)은 정세를 관망하며 입경(入京)하지 않았다. 박세채가 과천까지 내려가 윤증을 만났는데,

 

『숙종실록(9년 5월 5일)』과 『당의통략』은 이때 윤증세 가지 출사 조건을 내걸었다고 밝히고 있다.

서인과 남인의 원한을 풀 수가 없고, 삼척[三戚: 광산김씨 김만기·청품 김씨 김우명(김석주)·예흥 민씨 민유중의 세 외척 가문]의 문호를 막을 수 없고, 지금의 세태는 자신의 뜻과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같이합니다. 이런 풍조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터인데, 공이 할 수 있겠소?(『당의통략』)”

박세채는 한참 침묵하다가 “모두 불가능합니다”라고 답했고, 윤증은 “세 가지를 고칠 수 없다면 나는 출사하지 않겠소”라면서 귀향했다.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은 윤증을 새 영수로 삼았다. 세 가지 조건은 정치공작 기획자 처벌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서인과 남인 사이의 원한도 풀리고 외척(김석주)의 세력도 퇴조하면서 공존의 정치가 회복될 수 있었다. 숙종이 이 길을 걸었으면 분열의 정치는 통합의 정치로 전환되고, 증오는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지만 그는 정치권을 분열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패도(覇道) 정객에 불과했다.



윤증 초상과 고택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다.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에 의해 소론 영수로 추대됐다.

 

파평윤씨 윤증 1629(인조 7)~ 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학자. 소론의 영수

개요

 

노론과 소론의 분립과정에서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활동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했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출신 및 학통

할아버지는 유황(煌)이고, 아버지는 유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장백(長白)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외손이다.

 

아버지와 유계(兪棨)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權?)와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29세 때에는 광산김씨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배웠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1663년(현종 4)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숙종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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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의 분열

1680년(숙종 6) 안동김씨 김수항(金壽恒)· 여흥민씨 민정중(閔鼎重) 등이 경연에 나오도록 청하고, 박세채(朴世采)·조지겸(趙持謙) 등이 거듭 출사를 권했으나 사양했다.

 

그는  <숙종 초반 3대 외척 : 청풍김씨/ 광산김씨/ 여흥민씨>인

 청풍김씨 김석주(金錫胄)·광산김씨 김만기(金萬基)· 여흥민씨 민정중의 세도가 바뀌어야 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풀어져야만 출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일로 최신(崔愼)이 "송시열의 죄없음을 변명한다"는 윤증의 사서(私書)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했으며, 또 김수항·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했다.

 

한편 윤증이 아버지가 죽었을 때 윤휴(尹?)의 조문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안 송시열은 불쾌하게 여겼으며, 또한 아버지의 묘갈명(墓碣名)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내용중에 야유하는 뜻을 적자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반목(反目)을 '회니(懷泥)의 반목'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송시열은 회덕(懷德)에, 윤증은 이산(泥山)에 산 연유로 그렇게 불렸다.

 

숙종초에 송시열 일파가 남인에게 화를 입었을 윤증이 남인과의 인연관계로 화를 면한 일로 해서 더욱 송시열의 의심을 받았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송시열을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義利雙行王覇竝用)고 비난했으며,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의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젊어서 불문에 들었던 일을 끌어서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가 전부 자신에게 있다고 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윤증을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사림과 간관(諫官) 사이에 비난과 변명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노론·소론 간의 당쟁은 계속되었고,

 

그가 죽은 뒤 1715년 유계가 지은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발문에 정호(鄭澔)가 그를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이 격화, 소론 일파가 거세되고 아버지와 함께 관작이 추탈되었다( 가례원류시말).

1722년(경종 2) 소론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관되었다.

 

윤증의 배사(背師)문제는 의리·명분의 껍데기를 쓰고 노론·소론 간의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양자의 사상적 견해,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놓여 있었다.

 

양자 모두 주자도통주의(朱子道統主義)에 입각한 철저한 유교적 도덕정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훈척인 광산김씨 김익훈(金益勳) 등과 결탁하게 됨으로써 명분을 잃게 되고, 나아가 그 사회경제적 지향도 굴절되게 마련이었다. 말하자면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의미를 두었던 것이고,

윤증을 내세운 소론측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려 했던 것이다.

 

저서로 〈명재유고〉·〈명재의례문답 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 등이 있다. 홍주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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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 박세채1631(인조 9)~ 1695(숙종 21). 소론의 영수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소론의 영수로 당쟁의 근절을 위해 노력했고,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본관은 반남.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박의(?)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1649년(인조2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0년(효종 1)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했을 때, 영남의 유생 유직(柳稷)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여러 유생들과 함께 유직의 상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효종이 비답(批答)에서 박세채를 꾸짖자, 이것을 계기로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은거하여 경학에만 전념할 뜻을 세웠다.

 

 1651년 안동김씨 김상헌(金尙憲)· 광산김씨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주로 성리학을 연구했고 송시열과도 교류했다.

 

1659년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해 5월 효종이 죽고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자의대비가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남인에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 등과 함께 1년간만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예경기년설(禮經朞年說)을 지지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들이 축출당할 때 삭탈관직당하고 양근·지평·원주·금곡 등지에서 6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다시 기용되어 집의·이조참의·대사헌·이조판서·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무렵 서인들 가운데에는 훈척파(勳戚派)와 청의파(淸議派)라는 두 갈래의 흐름이 생겨 서로 반목했다.

이른바 노론·소론의 분쟁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 훈척파는 김수항·민정중·김석주·민유중 등 남인을 내쫓는 데 공이 많고 나이가 많은 고관들이었고, 청의파는 조지겸·오도일·박태보·박태유·한태동 등 연소한 관료들로 남인들의 완전 제거와 훈척파의 전권(專權)을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1682년 김익훈·김석주가 남인을 밀고하여 옥사가 발생하자, 청의파에서는 이를 무고라 하여 탄핵했다. 이때 송시열이 훈척파를 옹호하여 청의파와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는 입장에 있었으나, 1683년 송시열이 태조의 위화도회군을 존주대의(尊周大義)라 하여 시호를 높일 것을 주청한 것을 계기로 송시열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이때 송시열·김석주·김익훈 등을 추종하는 사람은 노론으로, 박세채·조지겸·한태동 등을 따르는 사람은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그는 윤증 등 소론계 학자들과 함께 학문교류 및 정치활동을 했다.

 

1689년 소의 인동장씨(昭儀張氏)의 희빈 책봉문제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했으나,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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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후계’ 암투가 임금의 가정을 파탄내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28호 | 20090823 입력
 
정당정치는 여야의 공존이 전제조건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피력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공존의 요체다. 그러나 대립이 격화되는 정치 현실은 상대를 제거하고 싶은 독존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공존의 정치가 파괴되면 패자만 화를 입는 것이 아니다.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정권이 바뀌면 과거 상대를 찔렀던 창은 나를 겨누게 된다.
 
三宗의 혈맥 숙종⑥ 미인계 정국

숙종 14년(1688) 11월 21일. 8명의 노비가 메는 옥교(屋轎:지붕 있는 가마)가 궐 안에 들어섰다. 옥교에 탄 여인을 알아본 지평 이익수(李益壽)는 사헌부 금리(禁吏)와 조례(<7681>隷:관아 노비)를 시켜 여인을 끌어내리게 한 다음 노비들을 처벌하고 상소를 올렸다.

“신(臣)이 들으니 ‘장소의(張昭儀:장옥정)의 어미가 8인이 메는 옥교를 타고 대궐에 왕래한다’고 합니다. 소의의 어미는 한 천인(賤人)인데 어찌 감히 옥교를 이렇게 무엄(無嚴)하게 드나들 수 있습니까?”(『숙종실록』 14년 11월 21일)

숙종은 화가 났다. 그는 환관에게 ‘여인을 끌어내린 사헌부 금리와 조례를 잡아다 누가 사주했는지 엄한 형벌을 써서 알아내라’고 명했다. 숙종은 “연전(年前)에 귀인(貴人:김씨)의 어미가 출입할 때 사헌부에서 이렇게 모욕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 궁중의 시녀들도 일개 천인에 불과하지만 품계가 상궁에 오르면 법에 의거해 가마를 탄다. … 하물며 왕자 외가에서 전교(傳敎)로 출입하는데…”라고 화를 냈다. 혹독한 형신을 받은 금리와 조례 두 사람은 귀양을 가기 위해 옥문을 나섰다가 곧 죽고 말았다. 옥교에 탄 여인은 10월 27일 숙종이 바라던 왕자를 낳은 후궁 장씨의 모친 윤씨였다.

 

이 사건의 본질은 차기 왕위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권 다툼이었다.

장희빈이 묻힌 대빈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의 외진 자리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훗날 장희빈이라 불리게 되는 소의 장씨는 중인 역관(譯官) 집안의 서녀(庶女)였다.

 

숙부 장현(張炫)은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자인 데다 수역(首譯:역관의 우두머리)으로서 숙종 3년(1677)에는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다.

 

그만큼 남인 정권과 가까웠는데 이 때문에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종친 복창군(福昌君)과 함께 유배당했다.

서인들은 소의 장씨(장옥정)를 남인들의 여인계로 보았고 실제로 그런 성격이 있었다. 장옥정은 남인들과 가까웠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전의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왔는데, 『숙종실록』은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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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 양주조씨) 1624(인조 2)~ 1688(숙종 14) 숙종의 증조할머니

 

1638년(인조 16) 인조 43세일때 14살짜리 왕비 책봉 =>세자 효종의 나이 19세

 

조선 제16대 왕 인조(1595-재위1623~49).

  =>효종(재위: 1649 ~ 1659/ 현종(재위 1659∼1674)/숙종(1674~1720 재위). 

 

 

 

양주조씨(楊州趙氏)로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조창원(昌遠)이며, 어머니는 대사간 최철견(鐵堅)의 딸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다. 1638년(인조 16)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대비(大妃)가 되었고, 1651년(효종 2) 자의(慈懿)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 효종이 죽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었는데 그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당시 집권파인 서인(西人)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과, 남인(南人)이 주장한 3년설이 서로 대립하여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고, 결국 송시열(宋時烈) 등의 주장에 따라 기년복이 채택되어 서인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그뒤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 장씨(仁宣大妃張氏, 숙종의 할머니)가 죽자,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그의 복상문제가 또다시 일어나, 서인은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고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여 당쟁이 일어났으나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정권이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능은 양주에 있는 휘릉(徽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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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 양주조씨, 숙종의 증조할머니)
의 후원을 업은 장옥정은 막 인경왕후 광산김씨(서인 김만기의 딸)를 잃은 청년 임금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제동이 걸렸다.

 

숙종의 모친 명성왕후 청풍김씨가 장씨를 강제로 출궁시킨 것이다
. 서인 청풍김씨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는 국왕의 승은을 입은 여인은 민간에 거주할 수 없다는 관례마저 깨고 궁에서 쫓아냈다.

 

명성왕후는 1681년(숙종 7년) 숙종을 서인 명가인 예흥민씨 민유중(閔維重)의 딸과 재혼시켰으니 그가 바로 인현왕후 민씨였다.

그러나 숙종의 모친 서인 명성왕후 김씨가 숙종 9년(1683)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변했다. 복상기간이 끝나자 남인 자의대비(숙종의 증조할머니)의 권고를 받은 숙종은 다시 장옥정을 입궐시켰다.

 

서인들은 당황했다.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가 왕자는커녕 공주도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옥정이 왕자라도 생산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숙종 12년(1686) 7월 홍문관 부교리 이징명(李徵明)은 지진이 발생하자 『사기(史記)』에 ‘외척(外戚)이나 여알(女謁:궐내에서 정사를 어지럽히는 여자)이 극성하면 지진이 온다’고 써 있다면서 이렇게 상소했다.

“외간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중의 한 사람이 역관 장현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합니다. 만일 외간의 말이 다 거짓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약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은 종묘사직의 존망이 여기에 매어 있지 않으리라고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장녀(張女:장옥정)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숙종실록』12년 7월 6일)

장옥정 때문에 재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처음은 아니었다. 숙종 6년(1680) 11월 혜성이 나타나자 『숙종실록』은 ‘장녀(張女)’가 ‘임금의 총애를 받기 시작할 무렵이 이때’였다며 ‘이로써 하늘이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숙종실록』은 곳곳에서 숙종비 서인 인현왕후 청풍민씨 의 부덕(婦德)과 남인 장옥정의 패덕(悖德)을 비교하고 있지만 “어느 날 내전(內殿:인현왕후)이 명하여 (장씨의)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는 『숙종실록』(12년 12월 10일)의 기록처럼 민씨 역시 질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숙종실록』이 “내전(인현왕후)이 (장씨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서인 영빈 안동김씨(寧嬪 金氏, 1669년-1735년 음력 1월 12일)는 조선 숙종의 후궁으로  김상헌의 현손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녀로 김창국(金昌國)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다”라고 기록하는 것처럼 인현왕후는 질투보다 당익(黨益)을 앞세울 줄 아는 냉혹한 정객이기도 했다.

 

인현왕후의 권유로 입궐한 여인은 숙종이 “연전에 귀인(貴人:귀인 김씨)의 어미가 출입할 때…”라고 예를 들은 김 귀인이다.

그러나 김 귀인이란 미인계는 장옥정의 상대가 되지 못해 숙종은 재위 12년 12월 장씨를 숙원(淑媛:내명부 종4품)으로 책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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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 희빈장씨 ?~ 1701(숙종 27) : 인동장씨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빈.

본관은 인동(仁同). 아버지는 장형(張炯)이며,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어려서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1688년 소의(昭儀)로 있을 때 왕자 윤(? : 뒤의 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1월 숙종이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으로 승격되었다. 그해 2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권하고 남인이 집권했으며, 7월에는 인현왕후 여흥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었다. 1690년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립되었다.

 

1694년 서인 광산김씨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의 민비복위운동을 계기로 남인이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킨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그해 4월 민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고,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함께 복위를 도모했으나 무산되었다. 1701년 민비가 병으로 죽자, 궁인·무녀 등과 함께 민비를 무고(巫蠱)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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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희빈장씨 및 남인에게 동정적이었던 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 등 소론도 몰락하게 되고 노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을 비로 승격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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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명부(內命婦)는 정5품 상궁까지는 궁녀, 종4품 숙원부터 정1품 빈(嬪)까지는 후궁이었다.

 

장씨가 숙원에 책봉되자 사간원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는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美色)으로 인함이며 전하가 장씨를 책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니 오늘날 신민(臣民)들의 근심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숙종실록』12년 12월 14일)라고 비난할 정도로 서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장옥정은 서인들의 이런 반발을 비웃듯 버젓이 왕자를 생산했다. 숙종은 재위 14년 만에 처음으로 왕자를 낳았으나 집권 서인이 하례하지 않고 왕자의 외할머니까지 끌어내자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숙종은 왕자 탄생 3개월이 채 안 된 재위 15년(1689) 1월 10일 전·현직 대신과 6경(六卿:판서), 판윤(判尹:서울시장), 삼사(三司) 장관을 명소했다. 신년 초의 느닷없는 명소였으므로 많은 대신이 모이지 못했다. 숙종은 “국본(國本:세자)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매인 곳이 없으니 오늘의 계책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만약 지체시키고 어정거리고 관망(觀望)하면서 감히 이의(異議)가 있는 자는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고 강하게 말했다. 국본(國本) 운운한 것은 갓 낳은 왕자를 후사로 결정할 속셈을 표명한 것이었다.

『숙종실록』은 “여러 신하가 대답할 바를 알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이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으니 물러가기는 하겠습니다만 또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한 것을 필두로 대부분이 반대했다.

 

반대 논리는 단 하나였다. ‘중궁(中宮:인현왕후)께서 춘추가 한창이시니 후사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남용익이 여러 대신과 2품 이상에게 널리 의논해 처리하자고 요청했으나 숙종은 “대계(大計)는 이미 정해졌다”고 거절하고 갓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했다. 닷새 후인 1월 15일에는 이 사실을 종묘·사직에 고묘(告廟)했다. 왕조 국가에서 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 고하면 번복할 수 없으므로 장희빈이 낳은 아이가 숙종의 뒤를 이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묘 15일 후인 2월 1일 서인 영수 송시열이 재논의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파란이 일었다. 송시열은 ‘송나라 철종(哲宗:재위 1085~1100)이 10세가 되도록 번왕(藩王)으로 있다가 신종(神宗:재위 1067~1085)이 병이 난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봉해졌다’는 예를 들면서 원자 정호가 성급한 조처였다고 비판했다. 주장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라도 종묘에 고묘(告廟)한 사안에 이의를 제기한 자체가 왕권 도전이란 혐의를 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나 숙종은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홍문관원들을 불러 노기 띤 목소리로 “일이 결정되기 전에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지만 이미 결정된 후에도 말하는 것은 그 뜻의 소재가 반드시 있다”고 비판했다.

숙종은 또 ‘명나라 황제도 황자 탄생 넉 달 만에 봉호(封號)한 일이 있다’고 말해 송시열이 든 송나라 철종의 예가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고 반박했다.

 

숙종은 정권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서인 영의정 안동김씨 김수흥을 파직하고 소론 여성제(呂聖齊)로 대신했으며 남인 목내선(睦來善)을 좌의정, 남인 김덕원(金德遠)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숙종 15년(1689)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2월 4일 송시열은 제주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들은 10년 전 경신환국 때 당한 정치보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애욕에 눈먼 임금 정치보복을 許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29호 | 20090830 입력

 

노나라 대부 계강자(季康子)가 ‘무도한 사람을 죽여 도(道)가 있는 데로 나가게 하면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정치를 하면서 어찌 죽임(殺)을 수단으로 쓰겠는가?”라고 반대했다. 모두 공자의 제자를 자처했으나 상대방을 포용하기보다 배척하기를 좋아했던 군주와 당파들이 서로 만나 살(殺)이 난무했던 증오의 시대로부터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충청남도 강경의 죽림서원 옛날에는 황산서원이었다. 효종 때 송시열과 윤선거가 윤휴 문제를 두고 크게 다퉜던 서원인데, 훗날 송준길·송시열 등이 향사되면서 노론의 주요 서원이 되었다.
三宗의 혈맥 숙종⑦ 기사환국

숙종 15년(1689) 후궁 남인 장씨가 왕자를 낳음으로써 9년 만에 재집권한 남인들은 과거사 청산에 나섰다.

 

남인 허새·허영 등을 역모로 고변해 죽게 만든 임술고변의 기획자 서인 청풍김씨 김석주는 숙종 10년(1684) 이미 사망했으므로 광산김씨 김익훈(김석주의 매형)이 주요 대상이었다.

 

남인들은 의금부에 국청을 설치하고 숙종 15년 2월 25일 김익훈 등 6인을 체포해 투옥했다. 이 날짜 『숙종실록』은 “한수만(韓壽萬)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한수만은 김익훈의 사주로 전 병사(兵使) 김환 등과 함께 허새 등을 고변한 기패관(旗牌官:군영의 장교)이었다.

 

고변자 이회는 허새가 화약과 화전(火箭:불화살)을 주었다고 진술하다가 다섯 차례의 혹독한 형신(刑訊:형장을 치며 묻는 것) 끝에 “김익훈이 은 100냥을 주어 화약과 화전을 샀다”고 실토했다.

 

김환다섯 차례의 형신 끝에 ‘김익훈이 강상(江上)에다 집을 사서 주면서 사람들을 기찰(譏察)하게 했다”고 자백했다.

송시열 초상 남인들은 숙종 15년의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후 영의정 김수항과 영부사 송시열을 사사시키는 정치보복을 단행했다.
김익훈은 죽은 김석주에게 정치공작의 책임을 떠넘겼으나 끝내 장하(杖下)에서 물고(物故)당했다. 김환·김중하 등의 고변자들은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집은 적몰되었다.

 

1707( 33) 광산김씨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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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고변은 정치공작 차원에서 조작한 사건이므로 그 재조사는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보복으로 확대되는 흐름이었다.

 

남인 정권은 전 영의정 안동김씨 김수항과 송시열을 사형시키려 했다.

 

숙종 15년(1689) 윤 3월 28일 예조판서 민암(閔<9EEF>)을 비롯한 6판서 전원과 성균관 대사성 유명현 등이 합동상소를 올려 김수항과 송시열을 죽일 것을 청했다.

숙종은 김수항의 사사는 허용했으나 송시열에 대해선 일단 거부했다

 

노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은 어떤 사람이 우의정 김덕원에게 “김수항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따지자 김덕원이 “우리 덕이(德而)는 어찌하겠는가?”라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숙종실록』은 “덕이는 오시수(吳始壽)의 자(字)인데 오시수의 죽음에 대한 당연한 보복(報復)이라는 뜻이다(15년 윤 3월 28일)”라고 덧붙이고 있다.

 

숙종 원년(1675) 청 사신 원접사((遠接使)였던 오시수는 청나라 황제가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다’고 했다는 군약신강(君弱臣强) 등의 발언을 전했다가 경신환국 이후 서인에 의해 사형당했다. 김수항의 죽음이 오시수의 죽음에 대한 보복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오시수의 사형이 억울하다면 김수항도 마찬가지였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낳는 악순환이었다.

장형 신도비와 묘 역관 장형은 서녀 장옥정이 왕자를 낳은 후 영의정에 증직되고, 옥정이 왕비가 된 후 옥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석물을 세우는 데 1500명이 동원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송시열이 숙종 15년(1689) 2월 1일 원자 정호가 시급했다는 비판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날 정권을 남인으로 갈아치웠다.

 

정권까지 갈아치운 목적은 왕비 서인 여흥민씨(인현왕후)를 내쫓고 후궁 장씨를 왕비로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날 숙종은 장옥정의 선조 3대에게 정승을 추증(追贈)했다. 추증은 위로 올라갈수록 한 등급씩 감하는 것이 관례여서 장씨의 부친 장형(張炯)에게 영의정을 증직하면, 조부에게는 종1품 찬성(贊成)을 증직해야 했다. 그러나 숙종은 “사체(事體)가 다름이 있으니, 모두 의정(議政)을 증직하라”고 명해 장형은 영의정, 장수(張壽)는 좌의정,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3대가 모두 정승에 증직된 드문 경우였다.

장형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에, 본부인 고씨는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에 추증되었고, 궁중에 옥교를 타고 들어왔다 모욕을 당했던 장씨의 생모 윤씨는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에 봉해졌다. 장형의 묘갈(墓碣)을 다시 세우는 데 1500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남인 정권이라고 해서 뚜렷하게 드러난 잘못이 없는 왕비 폐출에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숙종은 왕비 폐출과 남인이 원하는 송시열의 죽음을 맞바꾸기로 결심했다.

 

4월 21일 대사헌 목창명(睦昌明) 등이 제주도에 유배 간 송시열을 잡아다 국문(鞠問)하자고 청하자 숙종은 느닷없이 왕비 민씨를 비판하고 나섰다.

 


“세상 풍속이 말세로 떨어질수록 인심이 점점 악해지지만 어찌 내가 당한 것 같은 일이 있겠는가? 중궁은 관저의 덕풍(關雎德風:주 문왕의 아내 같은 덕풍)은 없고 투기의 습관이 있다. 병인년(丙寅年:숙종 12) 희빈(禧嬪:장씨)이 처음 숙원이 될 때부터 귀인(후궁 김씨)과 당(黨)을 이루어 성내고 투기를 일삼은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숙종실록』 15년 4월 21일)”

신하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들 앞에서 어머니를 욕하는 격이기 때문이었다.

 

숙종은 왕비 민씨가 ‘꿈에 선왕(先王:현종) 부부가

 

자신과 귀인 김씨는 자손이 많겠지만 숙원 장씨는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궐내에 있으면 경신년(庚申年:숙종 6)에 실각한 사람들(남인)에게 당부(當付)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선왕까지 투기에 끌어들였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숙원에게 아들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원자는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그 거짓된 작태가 여기에서 더욱 증험되었다(『숙종실록』 15년 4월 21일)”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4월 23일은 왕비 민씨의 생일이었는데 숙종은 영의정 권대운 등의 하례를 막으면서 민씨를 후궁 척 부인(戚夫人)을 인체(人<5F58>:돼지우리에 넣은 사람)로 만들고 소제(少帝)를 살해했다는 한 고조(漢高祖)의 황후 여후(呂后) 등과 비교하면서 “하루인들 이런 사람이 일국의 국모로 군림할 수 있겠는가?”라고 힐난했다.

 

노골적인 왕비 폐출 선언이었다.

 

드디어 4월 25일 전 사직(司直) 오두인(吳斗寅)을 소두(疏頭:상소의 우두머리)로 86인이 왕비 폐출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 글은 전 목사 박태보(朴泰輔)가 쓴 것이었다. 날이 이미 어두웠고 승지 등이 ‘역옥(逆獄)이 아니니 친국(親鞫)할 필요가 없다’고 권했으나

 

숙종은 “이는 모반대역(謀反大逆)보다 더 심하다”면서

 

“내가 이들 무리를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 수가 있겠는가”라면서 심야 친국을 강행했다. 『숙종실록』이 상소가 찢어진 부분이 있었는데 “임금의 분노가 극심해서 손으로 쳤기 때문”이라고 전할 정도였다. 숙종은 박태보에게 “이러한 독물(毒物)은 곧바로 머리를 베어야 된다”고 극언하면서 “만약 저(왕비)가 옳다면 나는 이광한(李光漢:김익훈의 심복)이 무고(誣告)한 것과 같은 것이니 나를 폐출시켜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하늘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이 아니라 애욕에 눈이 먼 필부에 불과했다.

숙종이 “군부(君父)를 배반하고 부인(婦人:왕비)을 위하여 절의를 세우려 한다”고 힐난하자 박태보는 “이미 전하를 배반했다면 중전을 위하여 절의를 세운다 한들 어떻게 절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숙종은 “네가 더욱 독기를 부리는구나”라면서 “매우 쳐라, 매우 쳐라”를 반복했다. 진도(珍島)로 귀양에 처해졌던 박태보는 5월 4일 과천까지 갔다가 장독(杖毒)으로 죽고 말았다.

 

박태보가 죽은 당일 숙종은 드디어 왕비 민씨를 폐출해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사흘 후에는 도승지를 역임한 오두인도 파주에서 죽었는데 박태보는 39세, 오두인은 66세의 노구였다. 박태보는 이미 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쓰는 것을 반대하고 노소 분당 때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했던 소론이었으나 왕비 폐출은 원칙의 문제라고 생각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숙종실록』은 ‘송시열이 제주에서 나치(拿致)되어 (서울에서 국문 받기 위해) 돌아오는데 바다를 건너와서 중궁(中宮)이 이미 폐출된 것을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송시열은 그러나 서울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국문 받기 위해 상경하던 6월 3일 정읍에서 만난 금부도사가 사약(賜藥)을 내민 것이었다.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이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다’면서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라’고 권하자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사사하라고 명한 것이다. 숱한 논란의 중심에 있던 83세의 노구(老軀)는 결국 사형으로 끝났다.

 

9년 전 허적과 윤휴의 사형을 남인들이 정치보복으로 여긴 것처럼 김수항과 송시열의 사형 역시 서인들은 정치보복으로 여겼다.

 

송시열은 임종 때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손을 잡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후궁 장씨가 사실상 왕비였으나 숙종 14년에 사망한 자의대비 조씨(숙종의 증조할머니)의 복상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왕비책봉식만 거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숙종은 재위 16년(1690) 6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그해 10월 22일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정권을 노린 남인과 왕비 자리를 노린 장옥정의 결합이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실록』은 “송시열의 상(喪) 때 서울 남문 밖 우수대(禹壽臺)에 모여 곡한 사람이 수천 명을 넘었는데, ‘각자 그 종 5, 6인씩만 내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20년 4월 1일)”고 전한다. 노론가(家)의 노비들을 동원해 군사로 쓸 수 있다는 뜻이리라.

 

노론의 이런 분노는 남인 정권과 장희빈을 향한 것이었지만 여차하면 숙종을 직접 겨냥할 수도 있었다

 

미인계로 흥한 남인 미인계로 망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0호 | 20090906 입력

 

신성한 왕권의 전제는 국왕이 하늘을 대신해 정치를 한다는 사실에 온 나라가 동의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국왕은 초월적인 위치에 서서 정치를 해야 했다. 그러나 숙종은 개인의 애욕(愛慾)을 정쟁의 수단으로 사용해 잦은 정권교체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왕권은 강화됐지만 국왕은 더 이상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왕위에 앉은 필부(匹夫)로 전락했다.
숙종과 인현왕후 여흥 민씨의 명릉(明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도동에 있다. 서인을 대표했던 인현왕후 민씨남인을 대표했던 인동장씨의 다툼은 결국 민씨의 승리로 끝났음을 보여주는 무덤이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숙종⑧ 갑술환국

후궁 장씨가 인현왕후 여흥민씨를 쫓아내고 왕비에 오른 4년 후인 숙종 19년(1693). 장희빈에 싫증난 숙종은 다른 여인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숙종실록』 19년(1693) 4월조는 “최씨를 숙원(淑媛)으로 삼도록 명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숙원은 내명부 종4품 후궁의 품계였다. 같은 해 10월 『숙종실록』은 “왕자가 탄생했는데 소의(昭儀:정2품)가 낳았다”고 전한다. 숙원 최씨가 훗날 영조의 생모가 되는데 흔히 궁녀에게 세숫물을 날라주는 무수리 출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문정(李聞政)은 『수문록(隨聞錄)』에서 인현왕후의 시녀 출신인 궁녀라고 달리 전하고 있다. 『수문록』은 최씨가 쫓겨난 인현왕후를 위해 한밤중 남몰래 기도하다가 숙종에게 발견됐으며, ‘옛 주인을 섬기는 최씨의 정성이 가상해 가까이한 결과 태기가 있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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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최씨 1670년(현종 11)∼1718년(숙종 44).: 해주최씨

조선 숙종(肅宗)의 후궁으로 영조(英祖)의 어머니이다.

증조부(曾祖父)는 통정대부 최말정(崔末貞)이고, 조부는 학생 최태일(崔泰逸),아버지는 행충무위부사과 최효원(崔孝元)이며 어머니는 홍계남(洪季男)의 딸이다.

숙빈최씨는 7세에 궁중에서 주로 청소, 설거지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종인 무수리로 입궁하였다.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자 최씨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드리는 중에 숙종의 은총을 받아 1693년 아들 영수군(永壽君)을 낳았다. 그러나 영수군은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고,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에 그 해 9월 13일에 연잉군(延?君) 이금(李昑)을 낳았으니 후에 영조(英祖)이다. 이어 1698년(1698)년 아들 하나를 더 낳았으나 태어난지 사흘만에 죽었다.

숙빈최씨의 인품은 온화하고 신중하였으며, 겸손하였으며, 예의와 배려가 깊었다고 한다.

최씨숙종 19년 4월에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1694년(숙종 20) 6월에 숙의(淑儀)가 되고, 1695년(숙종 21)에 귀인이 되었다. 1699년(숙종 25)에는 단종의 복위를 축하하면서 정1품 숙빈(淑嬪)으로 봉해졌다.

1716년(숙종 42) 경 갑작스럽게 숙빈최씨에게 병색이 있었으며, 병세는 점점 깊어 갔다. 숙종의 권유로 사저에 나가 요양을 하기도 하였으나 1718년(숙종 44) 3월에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716년 5월 12일 양주(楊州) 고령동(高嶺洞) 옹장리(瓮場里)에 장례를 지냈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한 후에 휘덕(徽德)이라는 호를 올린다. 존호는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이다.

능원은 소령원(昭寧園)이고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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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김춘택 초상. 광성부원군 광산김씨 김만기의 손자 김춘택은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노론의 환국 모의를 주도했다.

 

결국 환국에는 성공했으나 그 방법이 옳지 못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귀양까지 가야 했다.

이 무렵 서인들은 노론·소론 할 것 없이 정권 탈환에 부심했다.

 

노론에서는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광산김씨 김만기(金萬基)의 손자 김춘택(金春澤)이 환국(換局) 모의를 주도했고,

 

소론에서는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爀)이 주도했다.

 

서인들은 ‘장다리(장씨)는 한철이고 미나리(민씨)는 사철이다’ 같은 동요를 만들어 퍼뜨렸다.

 

소론 광산김씨 김만중(金萬重)은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어 왕비 장씨를 비난하고 폐비 민씨를 옹호했다.

 

『사씨남정기』는 명나라의 유현(劉炫)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喬氏)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정실로 맞이하고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사씨가 폐비 민씨, 교씨가 왕비 장씨를 뜻하는 것인데 훗날 실제로 이 소설의 내용대로 전개된다.

 

『사씨남정기』를 광산김씨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은 이 소설 내용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서인들의 염원이었다.

그러나 남인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신년에 정권을 빼앗겼을 때 허적·윤휴를 비롯한 많은 당인이 사형당한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기사년 정권을 되찾았을 때 김수항·송시열 등 많은 서인을 사형시킨 일도 잊지 않고 있었다. 다시 정권을 빼앗기면 대대적인 정치보복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공존의 틀이 붕괴된 붕당정치는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사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됐다.

 

남인들은 서인들의 환국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가 선제 공세를 펼쳤다. 숙종 20년 3월 23일 남인 우의정 여흥민씨 민암(閔<9EEF>)이 숙종에게 서인들이 불령한 무리들과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환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음모에 가담했던 함이완(咸以完)이란 인물을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위협해 폭로하게 한 것이었다.

『숙종실록』은 “여염(閭閻)에서 떠도는 말로는 은화(銀貨)를 모아 환국을 도모하는 자가 있는데, 폐비와 귀인(貴人)도 은화를 냈다고 한다(20년 윤5월 22일)”고 전한다. 쫓겨난 폐비 민씨와 귀인 안동김씨 김씨(김수항의 손녀)가 서인들의 환국을 위한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말이었다.

 

또한 광산김씨 김춘택은 숙종의 고모이자 효종의 차녀인 숙안공주(淑安公主)와도 연결돼 환국을 도모했다. 공주의 아들 홍치상(洪致祥)은 숙종 13년(1687) 조사석(趙師錫)이 우의정에 제수되자 ‘후궁 장씨의 모친이 조사석의 여종 출신이기 때문에 이 연줄로 정승이 되었다’는 말을 했다가 숙종 15년 사형당했던 것이다. 이 원한으로 숙안공주도 서인들의 환국 모의에 적극 가담했다.

환국 기도에 대한 의금부 수사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는 서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중인이나 상인들이 대거 등장한다. 역관(譯官) 김천민의 아들인 동래 상인 김도명과 역관 김기문의 아들 김보명, 역관 변이보의 아들 변학령은 500냥씩의 정치자금을 냈고, 지전(紙廛) 상인 이기정과 동래상인 박세건도 200냥씩을 냈는데, 40냥을 낸 중인 강만태는 “일이 성사된 후에 좋은 벼슬을 준다고 해서 은화를 내고 동참했다”고 자백했다. 양인(良人)들이 더 이상 정치를 사대부만의 전유물로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의식이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남인 정승 여흥민씨 민암의 고변으로 광산김씨 김춘택·한중혁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숙종 20년 3월 29일에는 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幼學) 김인(金寅)등이 맞고변했다. 우의정 민암과 병조판서 목창명, 신천군수 윤희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김인의 고변 중에 왕비의 오빠 장희재가 김해성(金海成)에게 돈을 주어 김해성의 장모로 하여금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김해성의 장모는 숙원 최씨의 숙모였다. 하지만 남인 정권 아래에서 남인들을 역모로 고변한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 김인의 고변은 무고로 정리돼 가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 20년 4월 1일 밤 2고(二鼓:밤 9~11시)에 승정원으로 갑자기 내려진 숙종의 비망기(備忘記)가 전세를 뒤집었다.

“군부(君父)를 우롱하고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직을 삭탈해 문외출송(門外黜送)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국청에 참여한 대신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명으로서 정권을 다시 서인으로 갈아치우겠다는 뜻이었다. 남인들이 장악한 승정원에서는 급히 복역(覆逆) 장계(狀啓)를 작성했다. 임금의 잘못된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이 복역(覆逆)이었다. 그러나 막 작성한 초안을 올리려고 할 때 다시 숙종의 비망기가 내려왔다.

“비망기가 승정원에 내려진 지 이미 오래돼 경고(更鼓)가 반이나 지났는데 전지(傳旨)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그 머리를 모아 서로 상의하며 (대신들을) 반드시 구제하려는 정상이 극히 분통스럽고 놀랍다.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옥당(玉堂:홍문관)을 모두 파직하라. 이번 복역(覆逆) 의논을 집에 있는 승지와 삼사(三司)라고 모를 리 없으니 마찬가지로 모두 파직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승지 전원과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킨 것이다. 간쟁 자체를 막겠다는 뜻이었다. 숙종은 입직한 오위장(五衛將) 황재명(黃再命)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아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을 쫓아내고 소론 의령남씨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병권 장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각각 서인 서문중(徐文重)과 신여철로 갈아치웠다. 이조판서 이현일도 유상운으로 갈아치워 문관 인사권도 서인에게 주었다.

숙종 20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다. 은진성씨 송시열·안동김씨 김수항·여흥민씨 민정중 등 사사당했거나 유배지에서 죽은 서인 인사들이 복권되었고, 성균관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제사 대상에서 쫓겨남)당한 서인의 종주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다시 제향되었다.

 

숙종의 느닷없는 변심에 남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5년 전 남인들이 후궁 장씨를 이용한 미인계로 정권을 잡은 것처럼 후궁 최씨를 이용한 서인들의 미인계였다.

 

인현왕후의 동생 여흥민씨 민진원(閔鎭遠)은 『단암만록(丹巖漫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숙빈(淑嬪:최씨)은 기사년 이후 임금의 굄을 받자 장씨에게 시샘과 고통을 크게 당해 거의 목숨을 보존할 수 없었다. 숙종의 유모 봉보부인(奉保夫人)이 인경왕후 광산김씨의 본가와 친밀했는데, 갑술환국 때에도 세상에서는 ‘광산김씨 김진귀의 아들 김춘택이 봉보부인을 통해 숙빈에게 계책을 주어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들려주어 대처분(大處分)이 있었다’고 하였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서인들을 역모 혐의로 고변했던 함이완은 물론 우의정 여흥민씨 민암과 아들 민종도, 이의징·조사기·노이익과 왕비 장씨의 친신(親信) 궁녀 정숙 등이 사형당했다. 갑술환국 후 1년 동안 남인들은 14명이 사형당하고 67명이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다.

왕비 장씨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폐비 민씨가 다시 복위됐다. 그러나 서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던 양인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거꾸로 강만태는 난언(亂言) 혐의로 참형(斬刑)당하고 가산은 적몰(籍沒)됐으며, 김도명·변학령 등은 석방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숙종 때의 잦은 환국과 왕비 교체는 정당정치의 말기적 현상에 국왕까지 가담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잦은 정권교체를 통해 왕권은 강화됐지만 원칙을 상실한 잦은 환국은 국왕과 왕비마저도 파당적 지위로 격하시켰다.

 

왕권 강화, 임금에겐 달고 백성에겐 쓴 열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제131호 | 20090913 입력

 

정치가는 권력을 강화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권력 강화가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조선은 국왕의 권력이 강하면 사대부의 세력이 억제되면서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으나 숙종은 그렇지 못했다. 숙종은 조선 후기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던 군주지만 권력을 백성들과 나눌 줄 몰랐던 실패한 군주이자 외로운 군주였다.
 
숙빈 해주최씨의 사당 ‘육상궁’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데 숙빈 최씨는 왕비 여흥민씨와 결탁해 희빈 인동장씨를 압박했다. 훗날 그의 아들이 임금(영조)으로 즉위한다. 사진가 권태균
三宗의 혈맥 숙종⑨ 후계 경쟁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정권을 탈환한 서인들이 남인들에 대한 정치보복에 몰두하는 동안 조선은 다시 대기근에 접어들고 있었다. 숙종 20년 9월 28일 비변사에서 “올해는 서리와 우박으로 곡식의 손상이 특히 심한데, 연변(沿邊)은 가뭄이 들기도 하고 벌레가 생기기도 하여 피해가 한 가지만이 아니다”면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듬해부터 3년간 흉년이 거듭되는 상란(喪亂)의 전주곡이었다.

『숙종실록』 21년 4월 1일조는 “이해 큰 가뭄이 들었다. 거센 바람이 연이어 불고 서리가 거듭 내려 양맥(兩麥:보리와 밀)이 여물지 않았으며 파종 시기도 놓쳐 드디어 큰 흉년이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가뭄으로 파종을 못하게 되자 숙종은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숙종 21년 4월 21일 첫 기우제를 지낸 후 25일, 30일 거듭 기우제를 지냈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자 5월에는 무려 7차례나 기우제를 지냈다. 5월 10일 남교(南郊)의 기우제 때 숙종은 제문을 작성하는 신하에게 “임금 자신을 책망하고 죄가 있다는 뜻을 상세하게 기술하도록 시켰다”고 실록은 전한다. 그러나 사후 보복이 특기인 숙종의 잘못을 신하가 적시할 수는 없었다.

소론 영수 파평윤씨 윤지완 간찰과 이이명 초상 윤지완은 숙종과 노론 영수 이이명의 독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간찰은 자신이 병들었음과 조카들이 죽었음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왼쪽 사진).

이이명은 노론 영수로서 숙종과 세자 문제를 논의한 ‘정유독대’를 했으나 소론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고, 경종 때 사형으로 생을 마친다(오른쪽 사진). 사진가 권태균

기근으로 어린아이들을 버리는 백성들이 속출하자 숙종 21년 12월에는 유기아(遺棄兒) 수양법(修養法)까지 만들었다. 유기아를 거둔 사람에게 양식을 지급하거나 자녀나 노비로 삼을 수 있게 하는 법이었다.

 

숙종은 재위 21년 10월 7일 “밥을 대하면 목이 메인다”면서 자신의 잘못을 직언하라고 구언(求言)했고, 부호군 조형기(趙亨期)가 응지(應旨) 상소해 왕실에 바치는 공물(貢物)의 숫자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숙종은 “공물 1관(款)을 또 감삭(減削)하는 것은 결코 불가하다”면서 거부했다. 사관은 조형기가 한 여러 건의 중 “마침내 시행한 것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숙종 때도 진휼소를 설치해 기민(饑民)들을 먹이고, 신역(身役)을 감해주는 등 외형적으로는 기근 극복에 나섰지만 백성들은 현종 때의 경신대기근(1670~1671)처럼 국가총력체제는 아니라고 느꼈다.

흉년 3년째인 숙종 23년(1697) 4월 숙종은 비망기에서 “길에는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서로 잡아 먹는다. 관창(官倉)의 곡식도 다 떨어지고 개인의 비축도 거덜났으니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고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자신이 솔선수범할 생각은 없었다. 감선(減膳: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나 철악(撤樂:음악을 철폐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구황방 흉년에 먹을 수 있는 대체 식품들과 요리법을 기록한 책이다. 소나무와 느릅나무 껍질을 죽으로 쑤어 먹는 방법이 한글로도 쓰여 있는 것이 이채롭다.
“오명준(吳命峻)이 팔도에 구언(求言)하는 하유를 내리게 청했으나 상은 불허했고, 또 2품 이상과 삼사 관원을 불러 재이(災異) 극복책을 묻기를 청했으나 이것도 불허했다.(『숙종실록』 23년 9월 28일 )”

숙종은 부자들이 재산을 털어 가난 구휼에 나서는 권분(勸分)을 강조했으나 국왕이 희생하지 않는데 부자들이 적극 나설 리 만무했다. 굶주린 백성들은 집단행동에 나섰다.

 

숙종 23년(1697) 4월 광주(廣州) 백성 수백 명이 서울로 몰려와 출퇴근하는 대신들을 붙잡고 곡식을 달라고 호소하고 광주 수어사(守禦使) 이세화(李世華)의 집에 쳐들어가 욕하면서 군관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에 곡식이 없으면 임진왜란 때 유성룡이 압록강 중강진에 국제 무역시장인 중강개시(中江開市)를 열어 명(明)의 곡물을 들여온 것처럼 청(淸)의 곡식을 들여와 기민을 구제해야 했다.

 

숙종 23년(1697) 5월 12일 대사간 박태순(朴泰淳)이 개시(開市)를 열어 청나라의 곡식을 수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4개월 후인 9월 21일에야 이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찬반 양론이 갈려 갑론을박하다가 본격적인 교역은 나라가 ‘소식(蘇息:숨통이 트임)되기를 기다려 하자’고 유보하면서도 일단 재자관(사신의 일종)을 파견해 곡식만 먼저 교역하자고 청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서 숙종 24년(1698) 1월 청나라에서 좁쌀 4만 석이 들어와 서울·경기·충청·서로(西路:평안도·황해도)에 1만 석씩을 나누어주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숙종 27년(1701) 전국적인 재해가 또 발생한 가운데 병세가 위중해진 인현왕후 여흥민씨는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 희빈 장씨가 아직 살아 있었으므로 민씨의 죽음은 정쟁의 불씨가 되었다. 남인 행부사직 이봉징(李鳳徵)은 장희빈은 한때 왕비였으므로 다른 후궁들과는 복제가 달라야 한다고 상소했다. 다른 후궁들보다 높은 자리에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왕비로 복위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봉징을 전라도 지도(智島)에 위리안치시켰다. 남인들의 의도와는 달리 왕비 민씨의 죽음은 오히려 장씨를 사지로 몰았다. 왕비의 죽음을 장씨의 저주 때문이라고 몰았던 것이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여흥민씨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장씨의 오빠 인동장씨 장희재와 장씨의 친신 궁녀 영숙(英淑)을 처형시킴으로써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드디어 9월 25일에는 ‘비망기’를 내려 희빈 장씨의 자진(自盡:자살)을 명했다
.

 

숙종은 ‘비망기’에서 “옛날 한(漢) 무제(武帝)가 구익(鉤<5F0B>) 부인을 죽인 것은 결단이었다”면서 장씨를 죽이는 것이 “국가를 위하고 세자를 위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제의 후궁 구익 부인은 소제(昭帝)의 생모인데, 『사기(史記)』 ‘외척세가(外戚世家)’는 무제가 “임금이 어린데 모친이 장성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에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숙종은 재위 16년(1690) 10월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교명문(敎命文)’에서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귀하여지는 것이 『춘추(春秋)』의 의리”라고 반포했었다.

장씨가 죽던 날 열네 살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자 소론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은 “신이 감히 죽기로 저하(低下)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라고 답했으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기록은 장씨 사사가 세자를 위한 것이란 명분이 근거 없음을 말해준다.

 

장희빈의 사사는 곧바로 세자를 정쟁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론은 세자가 즉위할 경우 연산군처럼 모친의 복수에 나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인은 완전히 몰락한 가운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세자 대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영조)을 지지했다. 누가 승리하느냐의 관건은 그간 각 당파를 분열시켜 서로 살육하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킨 숙종이 쥐고 있었다.

재위 39년(1713)이 밝아오자 집권 노론은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존호(尊號)를 올리겠다고 주청하고 숙종은 사양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영의정 이유(李濡)는 백관을 거느리고 연일 대궐 뜰에 모여 정청(庭請:백관이 중요한 국사에 계를 올리고 국왕의 전교를 바라는 것)을 열었다. 이 문제로 국정이 거의 마비된 후 숙종은 못 이기는 척 수락했고, 그해 3월 장엄한 의식을 거쳐 ‘현의·광륜·예성·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이란 존호를 받았다. 집권 노론이 숙종에게 이런 정성을 쏟는 속내는 장희빈 소생의 세자를 최씨 소생의 연잉군으로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숙종 43년(1717) 숙종은 사관·승지를 배제한 채 노론 영수인 좌의정 전주이씨 이이명(이이명)과 ‘정유독대(丁酉獨對)’를 실시했다. 독대 직후 숙종은 느닷없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는데, 『당의통략』은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와병 중이었던 소론 영중추부사 파평윤씨 윤지완(尹趾完)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 독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정승)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숙종실록』43년 7월 28일)”

노론의 세자 교체 의도는 실패했다.
소론이 격렬하게 반발한 데다 세자의 결정적 흠도 드러나지 않았고 숙종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세자 대리청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숙종은 재위 46년(1720) 6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뒷자리는 자신이 제거하려던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차지했다. 잇따른 배신과 살육으로 왕권은 강화시켰으나 백성들의 처지는 전혀 나아지지 않은 숙종 혼자만의 왕권강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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