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성전시위(홈피에 올린글 전재)
닉 페이지의 ‘가장 길었던 한 주’를 읽었습니다. 예수님 생애 마지막 일주일을 새롭게 분석한 책입니다. 공관복음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은혜가 되었지요,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 식민치하에서도 매우 부유한 조직이었다고 합니다. 매년 유대 전역의 거주민에게 성전세를 거둬들였고, 수많은 순례객들에게 희생제물을 팔아 높은 이윤을 남겼으며, 농산물의 십일조도 거둬들였지요. 놀라운 것은 성전이 부유한 사람들의 유동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해 주고, 그 대가로 수수료를 받았답니다. 그리고 여리고 주변의 농장을 소유하여 곡물의 십일조도 차곡차곡 챙겼습니다. 그 당시 성전은 예배하는 곳이어야 하건만 돈 놀이하는 장소로 변질되었나 봅니다.
이 잘못된 관행을 성전 관리자인 제사장들은 고치고 변화 시키기는 커녕, 돈을 탐하고, 명예를 탐하며 권위를 즐기고, 동족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지요.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의 중앙은행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하자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이 못된 광경을 목도하며 분노에 떠셨습니다.
마침내 성전 관리자들의 우두머리인 제사장 가야바를 향한 돌격적인 시위를 벌이셨습니다. 장사꾼의 좌판을 뒤집어 던지시고, 채찍으로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쫒으신 것입니다. 이는 기존 유대교 성직자들과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을 향한 체제 변혁을 위한 시위였으며, 유대인을 수탈하는 로마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저항이었습니다. 빌라도 총독 아래 수 많은 유대의 지도층과 고위층은 로마황제가 던져주는 권력과 돈과 명예에 중독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만세토록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같은 젊은 지도자가 나타나 혹시나 로마황제로부터 미운털이 박힐까봐 전전 긍긍했습니다. 이미 갈릴리에서부터 많은 군중들로부터 환호를 받아온 젊은 예수, 유대의 독립투사, 유대의 왕이 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던 터이지요.
그러나 대제사장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그는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사람, 혹은 그의 말대로 하나님의 아들일 지도 모르기에 예수의 출현은 유대와 민족의 안녕에 매우 위험한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란 불길함이 팽배해졌지요, 그래서 예수란 젊은이 한 사람을 죽임으로 로마로부터 유대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잡아 죽일 공모를 이미 진행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일을 모를 리가 있을 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당당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일요일에 입성하여 다시 베다니로 나오셨다가 월요일에 다시 입성하여 성전시위를 벌이셨지요. 이것으로 대제사장과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며칠 내에 처형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예수님의 현실인식은 옳았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지요, 제사장들에게 핍박 받고 십자가 상에서 죽게 될 것도 이미 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본인이 하나님이시기에 구차한 변명이나 도피를 않으셨습니다.
거대한 유대인의 중앙은행이 된 예루살렘성전,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이사야 선지의 말을 인용하시며, 성전의 추상같은 권위의식에 이방인도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당시로서 상상할 수없는 선전포고를 하셨지요, 마침내 예루살렘 그 화려한 성전이 돌 위에 돌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며 화요일을 보냈습니다. 수요일에 베다니로 내려가 향유사건을 치르시게 되지요, 이미 유다는 가야바를 만나러 빠져나갔습니다.
목요일 오후에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에 올라 기도하시다가 제자들 앞에서 체포당하시고 금요일 새벽부터 심문과 재판을 받습니다. 가야바의 집과 헤롯 궁으로 끌려 다니시며 심문을 받고 한 시간 사이로 빌라도의 재판을 두 번 받게 되는데, 이곳에 모여든 무리들은 동원된 바리새파 지지세력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 또한 용병이거나 사마리아인 병사였습니다. 철저히 유대민족이 떠오르는 슈퍼스타, 예수를 순식간에 약식 재판으로 몽둥이와 채찍으로 반사 상태에 이르게 하여 십자가를 질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요, 유대인 최고의 명절인 유월절이 오기 전에 죽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명절 바로 전날 처형해 버립니다. 잘 짜여진 각본대로였습니다.
빌라도는 교활하고 악이 가득찬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그도 한때 예수의 참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제사장들은 빌라도의 총독직에 흠결이 될 비장의 카드를 사용하게 됩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심판하지 않으면 로마황제에게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한 자를 처벌하지 않았으니, 총독으로서 직무유기였지요, 그들은 로마황제에게 투서를 넣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빌라도는 황제에게 받을 모멸과 징벌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리보전을 위해 유대의 상류층을 대표하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뜻을 교묘하게 따라간 것입니다.
금요일의 사건을 끝으로 예루살렘에서의 가장 길었던 한 주가 끝났습니다. 물론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일요일 새벽 무덤에서 살아나셨지요. 그분의 영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성도와 소통하고 교감하며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성전시위를 하신 것일까요? 가난한 민중의 편에서 호의호식하는 기득권 세력의 타락과 무질서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려 하신 것 아닐까요? 예루살렘 하류인생들의 거주지에는 상류사회에서 떠내려 온 오물과 짐승 죽인 핏물, 온갖 더러움 속에 딩구는 비천한 사람들이었지요, 상류에는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로마 권력에 아부하는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마냥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겠지요, 예수님의 뒤에는 무수한 민중이 호산나를 부르며 따라왔습니다. 대제사장은 민중의 동요가 가장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제지하거나 막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에게 네 가지 토론을 청합니다. 예수님의 논법은 제사장들이 당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늘 율법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저들은 과부가 된 여인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려했지만 천국에서의 인격은 혼인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으므로 구약시대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이란 뜻조차 모르고 있다며, 그들의 우매함을 꼬집으셨습니다. 제사장들은 헌금에 대해 물었지요, 로마정부에 세금을 내야 하는가, 예수님은 동전을 가져오라고 했지요, 바로 바리새인은 동전을 가져왔습니다. 동전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해답은 나온 것이지요, 씨이저의 얼굴이 들어간 동전은 씨이저의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임 것을 구별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지요. 하나님의 것은 진실로 뜻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값어치 있는 헌신입니다. 로마정부의 세금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부자들과 서기관들이 드리는 거액의 헌금보다 과부의 동전 한 닢에 큰 의미를 두고 ‘참된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과부는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렸지요, 그것이 참되고 단순한 경건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떤가요? 거액을 헌금하는 사람만 목사로부터 융성한 대접과 사랑 받는 시대가 아닌가요? 돈입니다. 돈이 문제입니다. 돈이 넘치는 교회의 목사들은 예수님은 안중에도 없고 무소불위의 권위와 고도의 품위유지를 위해 비열한 방법을 쓰게 되지요, 그래서 노회를 손아귀에 넣고, 총회에서 힘 꽤나 쓰려고 하지요, 과부가 헌신한 동전 한 닢까지 다 털어 돈바람 선거를 치룹니다. 늘 식탁에선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며, 어디라도 갈라치면 호위병을 거느리듯 성도들을 몰고 다니지요. 노회나 총회에서 자신을 홀대하면 탈퇴를 하지요, 교단을 만들어 만년교주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이 사라진 교회입니다. 어둠의 교회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요,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바 없는 오늘 한국교회의 현재모습이 아니던가요, 이제 예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성전 시위를 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와 사랑이 참된 빛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교회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새 빛을 되살려 내야 합니다.
첫댓글 로이님께서 왜 목동제자들이 길거리예배를 드리는지에 대해 관련된 글을 게재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