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충무공 이순신 2 (탄신일을 맞아)
지난 목요일,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생일이다.
장군의 탄생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는지 알 수 없다.
장군은 1545년에 태어나셨다.
충무대교를 놓을때 길이를 1545m로 하였던 것도 무관치 않다.
나는 1945년생이니 꼭 400년의 차이가 난다.
조선 인종임금 원년으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매일 보는 달력에는 세분의 탄생일이 적혀있다.
충무공 이순신, 석가모니, 예수이다.
나는 달력을 볼 때마다 이 부분을 예사로이 보지 않는다.
성인(聖人) 반열에 올려놓으셨다.
이렇게 3분을 적게 된 것이 언제부터 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고종황제때 아닐까?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있다.
석가모니와 예수의 생애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생애는 잊고 있다.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을 바쳤다.
이순신 장군은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 벼슬을 받았다.
오늘날의 육군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때는 해군으로 보직이 바뀌었다.
23년간(31세-54세)을 군인생활을 하는 중에 3 차례 파직, 2 차례 백의종군이다.
함경도 최북단 경원고을로 좌천을 당하여도 누구를 비난하지 않았다.
부당한 파면을 당해도 복직운동은 하지 않았다.
승진운동은 물론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았다.
강직한 성품이었다.
결백증이라고 할 만큼 청렴하였다.
장군의 나이 39세때, 함경도 가장 북쪽 고을의 군관으로 나갔다.
장군이 부임하면서 여진족은 얼씬도 못했다.
무려 7년을 가족을 떠나 45세가 되어서 함경도를 벗어났다.
그리고 정읍현감이 되었다.
47세에는 해군으로 전환되어 전라좌수사로 승진발령이 났다.
영의정 유성룡의 추천으로 이뤄졌다.
전라좌수사 영지는 여수(麗水)에 있었다.
여수에 도착한 장군은 큰 재난을 예상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의 일이다.
거북선, 조총, 수군모병, 군량미 확보 등을 챙겼다.
선조는 현명하지 않은 군주이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을 통신사로 보냈다.
일본을 정탐하라고 보낸 것이다.
황윤길은 일본 출병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고 김성일은 반대로 보고했다.
선조는 김성일의 말을 믿었다.
이날이 임진왜란 발발 3년전이다.
1592년은 임진년이다.
선조 25년이며 조선 건국은 200주년이다.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일본은 30만 병력을 모았다.
대병력(육군, 수군)은 대마도를 거쳐 부산 앞바다로 침략하였다.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승리하였다.
공적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하기만 하다.
마지막 전투상황만 적었다.
1598년 무술년이 밝았다.
전쟁발발은 벌써 7년이 흘렀다.
11월 17일 이순신에게는 23회째 전투가 벌어졌다.
노량해전이며 이곳에서 승리하였으니 23전 23승이다.
3개월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8월 18일 병사(病死)하였다.
자연히 전쟁은 허지부지되었고 철군령이 내려졌다.
고니시(소서행장 小西行長)는 남해 창선도 부근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고니시도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썼지만 이순신 장군이 돌려보내지 않았다.
고니시는 연락병을 보내 남해바다에 포진한 왜군을 모두 집결시켰다.
11월 18일 22시에 조선수군과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노량바다로 진격했다.
깜깜한 밤, 이순신 장군은 갑자기 갑판으로 나가 기도를 드렸다.
“왜구를 무찌르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11월 19일 새벽, 왜군은 5백척의 배를 이끌고 노량을 돌아 남해군 관음포로 향했다.
명나라 수군은 진린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어영부영 시간만 끌었다.
이순신 장군은 호준포(소형포)를 쏘고 불붙은 나무를 던져 왜선을 불태웠다.
날이 새면서 왜군은 바다 끝자락인 관음포 안으로 도망갔다.
막다른 곳이라 도망가다 회선하여 대항하여 왔다.
이순신 장군은 진두지휘하였다.
결국 왜군은 이순신 장군의 배를 겹겹이 에워싸며 발악하였다.
이때 명나라 진린 제독이 배를 몰고 와 이순신 장군을 구원했다.
이순신은 조선백성의 목숨을 앗은 앙갚픔에 맹렬히 추격전을 펼쳤다.
날이 밝을 무렵 조총탄환이 이순신 장군의 왼편 가슴에 와서 박혔다.
치명상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신체 피해가 그간 두 번이나 당했다.
이번의 상처는 목숨을 앗을 만큼 상처가 컸었다.
이순신 장군은 급히 명령하여 방패로 자기 앞을 가리게 했다.
부축을 받아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참모 송희립이 대신 갑옷을 입고 독전을 하였다.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숨을 거두셨다.
54세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이날의 전쟁상황을 살펴보면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같은 전함에 타고 있던 큰 아들 회(薈)와 이완(이순신 맏형의 4째 아들)은 울지 않았다.
전투는 정오무렵 끝나고 소서행장과 도진의홍은 도망갔다.
450척이 대파되고 50여척 남은 병선을 이끌고 일본으로 달아났다.
명나라 진린 제독은 전투가 끝나고 대장선으로 갔다.
이순신 장군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이완은 울면서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고 답했다.
그제야 모두가 통곡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무덤은 남해군 노량 충렬사에 모셨다가
이듬해 2월 11일 아산 금성산으로 반장하셨다가
16년후, 1615년 아산 어라산에 지금의 위치로 모셨다.
숙종은 현충사 제문에서 "절개에 죽는단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리는 것,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정조가 신하의 묘소에 비문을 지어 세웠으니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정조는 어제신도비에서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이순신 한 분의 힘이다.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이순신에게 특별한
비명을 지시지 않고 누가 비명을 쓴다 하랴.”라고 썼다.
선조는 의정부 우의정을 증직하였고 6년 뒤에
1621년, 좌의정과 덕풍부원군에 봉하였다.
10월 29일에는 신하들이 장군의 공과를 상신하여 선무 1등공신에 책정했다.
인조21년(1643년, 사후 45년)에 충무(忠武) 시호를 내렸다.
영의정 추증은 정조 17년(1793년)이다.
조선시대 충무 시호를 받은 분은 모두 9명이니 구국하신 분들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趙英茂(조영무)-태종, 南怡(남이)-세조, 李俊(이준)-세조, 李舜臣(이순신)-선조,
金時敏(김시민)-선조, 金應河(김응하)-광해군, 李守一(이수일)-인조, 鄭忠信(정충신)-인조,
具仁垕(구인후)-효종대
어느 누구도 이순신 장군과 견주기는 어렵다고 본다.
일본 최고 명장인 도고(동향평팔랑 東鄕平八郞) 제독도 노일전에서 승리하여
승전 축하연때 자기를 영국의 넬슨과 조선의 이순신에게 비겨서 칭찬하자
“나는 넬슨에게 비기는 것은 맞으나 이순신에게는 한 수 아래다.”라고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동서양 누구도 비교 안되는 절세 영웅이다.
사소한 접전을 합치면 수 백회가 넘을 것이다.
나는 한때 관음포 동네의 학교에 근무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생일날이면 가두행진을 하였다.
밴드부를 앞세우고 학생과 교직원이 이락사(李落寺)에 참배하였다.
요즈음도 계속 되는지 모르겠다.
이락사(李落寺)란 이순신 장군의 목숨이 떨어 졌다는 뜻의 사당이다.
이렇게 몸을 바쳐 나라를 구했으니 달력에 올려진 것은 아닐까?
나는 이순신 장군의 삶을 한시도 잊지 못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나라 위해 바치신 숭고정신을 배우고 싶어한다.
더불어 역사를 재조명하여 이정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반갑습니다. 황사가 기승을 부립니다.
몽골, 고비사막에서 우리나라로 불어옵니다.
해운대 바다에는 벌써 사람들이 한낮을 즐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2011년 5월 1일 이태종 올림
첫댓글 위와 같은 교훈적인 글을 읽고 많은 이들이 느끼고 깨우쳤으면 좋겠습니다. 읽고 깊이 감명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