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석 스테파노(서울대교구 행당동본당)
“천주교 신자이신가요?” “네, 그런데요?”
“새로 부임한 강윤석 스테파노입니다. 여기에 천주교 신자 모임이 있습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한OO입니다. 공소가 있고 뒤편 건물에 방을 하나 마련해 두고 개신교 신자들과 같이 쓰고 있는데 주일이면 그곳에서 공소 예절도 드립니다.”
“제가 신자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오늘 다들 뵐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현장으로 발령을 받고 현지에 도착하며 시작한 막막한 오지 생활에서 심한 외로움을 느끼며 지내던 중, 마침 사무실 앞에서 마주친 분이 묵주반지를 끼고 계신 걸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천주교 신자인지를 확인하던 순간의 대화 내용이다. 이렇게 동료 신자 공동체와 연결됐고, 그로 인해 2년 6개월의 해외 근무를 무사히 잘 마치게 됐다. 아니 더욱 더 성숙한 신앙을 접하게 된 계기였다.
지금부터 25년 전 일이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에 필요한 파이프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근무했다. 공장은 지중해 연안에서 500㎞ 떨어진 사막 안쪽에 위치한 사리르(아랍어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란 뜻)에 있었다. 워낙 오지인지라 한국에 국제 전화를 하려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회사에서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을 달려 오아시스 마을로 가야 했다. 너무 오랜만에 집으로 전화하는 거라 전화통을 잡으면 울컥하는 감정이 앞서 대화는 별로 하지 못하고 “그래, 잘 있다.” “별일 없지? 잘 지내라”는 말만 하고 눈가가 벌게져 전화부스를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슬람 국가들은 금요일이 공휴일인지라 금요일에 공소에 모여 공소 예절을 드렸다. 열 명 남짓한 신자들이 모여 공소 회장의 인도에 따라 기도도 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 날의 말씀도 나눴다. 하지만 영성체를 못 해 무척이나 서글퍼졌고, 서울에서 생활할 때는 ‘원하면 언제든 성체를 받을 수 있었는데’ 하며 그때 얼마나 큰 축복 속에 있었는지를 깨닫게 됐다.
6개월에 한 번 정도 한국인 신부님이 다녀가시는데, 그동안 교리 공부를 한 새 영세자가 있으면 신부님은 즐거워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또 리비아에 계시는 주교님이 여행 중 비행기로 이곳 사리르 쪽을 지나게 되면 항상 축복을 빌고 계신다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사리르 공장 신자들은 한국의 자생적 천주교 신앙을 그대로 닮았다고 감탄하신다는 격려에 장기 해외 근무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곤 했다.
8개월 만에 받은 휴가길에 벵가지 시내에 있는 성당에 들렀다. 이탈리아 출신 신부님들이 거주하면서 한인 미사도 별도로 봉헌하는 제법 규모가 있는 유서 깊은 성당인데 성당 문을 열고 어두운 실내로 들어서서 불이 밝혀진 감실을 보는 순간, 무릎에 맥이 풀려 꿇어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산가족이 상봉할 때의 기분만큼이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반가웠고 기뻤다. 기분대로라면 그 자리에 앉아서 엉엉 울고 싶었다. 지금도 그 감회는 새롭게 느껴져 온다.
사막의 돌을 주워 바닥에 놓으며 묵주기도를 드리던 최아무개 형제, 벵가지 본부에서 주보를 제작, 복사해서 매주 현장 각지로 보내던 안OO 형제, 지금은 고인이 된 김 야고보 단장까지…. 그 열정들이 지금도 이어져 척박한 사막의 모랫바닥을 따뜻한 신앙의 보금자리로 만들어 가고 있기를 기도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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