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요즈음은 만나는 사람마다 제 표정이 행복해 보인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과 함께하는 일상도의 삶(오늘을 사는 것)을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7년 전 까지만 해도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고백하신 것처럼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에 쫓기듯
매일매일의 삶을 여유 없이 살았고 얼굴은 늘 근심 걱정에 찡그린 모습이었습니다.
(찔레꽃과 허수아비)
저는 1980년 제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처가집에 인사하러 갔는데
장모님께서 사위감으로 별로 탐착하지 않았는지 떼어버릴 생각으로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영세를 받으면 나에 대해 모든 것을 믿고 딸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곧 바로 성당에 알아보고 교리반에 입교했고 6개월 동안 개근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신앙생활은 겨우 주일만 지키는 신앙생활을 18년 동안 했습니다.
단체활동도 하지 않았고 기도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정생활도 원만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을 먹고 살기 위해 그런다는 이유로 합리화시켰습니다.
그런대로 직장생활은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회사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인정받음이 모든 어려움을 보상해 주었고 그것이 행복인줄 알았습니다.
<짱구(갈색)와 친구(검정색)>
그런데 1997년 IMF이후 외국회사와 조인트 벤쳐가 된 후 경영권을 외국회사에서 갖게 되었고
많은 마케팅 직원을 퇴직시켰는데 그 와중에 나는 다른 업무를 할 것을 권유받아 영업교육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각광받던 마케팅팀에서 한직으로 밀려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던 시절...
내가 그토록 추구해 왔던 남에게 지지 못하는 일류병,칭찬,인정,인기,자존심 등이 한꺼번에 무너진 듯한 절망감에
스스로 깊은 구렁으로 빠져들어갔던 시절...
다른 사람이 나를 조소하는 듯한 느낌 때문에 동료들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숨고만 싶었던 시절...
거의 3개월 이상 잠 못 이루는 불면증과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시달리고
한편으론 아내의 수술, 전세금 반환 문제와 아파트 입주 문제 등으로 죽고만 싶던 때...
내 스스로 해결하려고 친한 친구도 찾아보고 정신과에도 가보고 한의원도 찾아가고
수녀님이 추천해주신 책과 테이프도 들어보고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실망감과 공허함 뿐.
2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님도 안타까우셨는지 꿈결에 하얀 소복차림에 시골에 있는 선산에서부터 매일 조금씩
제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로 오시더니 나중에는 집 앞 버스 정류장 맞은편까지 오셨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안타까운 표정으로...어머니 품으로 오라는 듯
심지어는 우리집 개가 부럽고 세상을 하직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지요.
(매일 미사드리는 수녀원 성당 )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내의 한 마디.
"당신 그렇게도 정신을 못 차리면 주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깨우쳐 주실거야.
예를 들면 내가 수술받다가 잘못 되든지...아니면 하나 밖에 없는 딸 유나가 무슨 사고를 당하든지..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에는 섬광 같은 느낌이 오면서 '그래 정신을 차리자. 주님께 매달리자'는 생각이 들어
매일미사 참례, 성서쓰기, 묵주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남 성모병원에서 만났던 수녀님의 기도와 한 마디 말씀도 나에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묵주기도는 주님의 일생을 묵상하면서 성모님과 함께 드리는 좋은 기도이니 자주 바치라고
하시면서 시작 전에 '성모님, 제가 지금 몹시 힘듭니다. 한 발짝만 저와 함께 떼어 주십
시오' 하라는 말씀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출퇴근 전철에서, 점심 후 회의실에서 시간만 나면 묵주를 손에 들고 기도를 했지요.
그러자 서서히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가슴을 찌르는 고통도 줄어들어가는 것을 느꼈고
여러가지 걱정거리들도 하나 하나 해결이 되는 것을 보면서 주님의 은총을 느꼈습니다.
(형, 누나, 그리고 사촌 형제 가족 방문)
신앙 생활을 20여 년 하면서도 그 동안 느끼지 못하고 무덤덤하게 살아 왔던 무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들어오면서 내 마음도 서서히 부드럽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서야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이제 나도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기도 중에 결심하곤 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회복된 후 생각해 보니 아프기 전과 후가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이 이렇게 평화스러운 것은 왜일까?
원효대사가 했다는 말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동안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부귀, 명예, 존경, 건강, 자존심 등에 대한 것이 뭐가 그토록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내 구원의 문제요. 구원에 이르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하지...하는 생각으로
내 인생관, 가치관이 바뀌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제부터는 인생을 주위를 둘러보면서 서로 나누고 즐기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지요.
그 이후에는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내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불평없이 지고 가면서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다보니 내 마음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부터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고 매일미사에도 참례하고 기도 생활도 하면서 하느님의 사업에
더욱 비중을 두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내 마음은 점점 평화로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육팀에서 일하게 된 것도 다 주님의 배려였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더욱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주셨고 나는 이에 응했던 것입니다.
<우리마을의 자랑 52년 된 예쁜 공소>
2천년을 1주일 앞두고는 가족 모두가 장기기증을 했고 우리 부부는 시신기증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하고 나니까 정말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앙 생활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점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을 즐기게 되면서는 기도중에
'주님, 시간을 주십시오. 저는 승진도 필요 없고 해외출장도 필요 없습니다.' 하는 기도가
거침없이 흘러 나왔습니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변화였습니다.
정말 성령으로 가득찬 은혜로운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교육팀에서 일하면서 시간의 여유를 누릴 수 있었고 성경공부, 선교활동, 카페에 글 올리기,
교회의 봉사활동 등을 할 수 있었고 나 자신도 조금씩 성화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하기 싫었던 교육팀이 지나고 보니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 잘되도록 돌보아 주시는데 이를 싫다고 외면하는 것은 우리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이후로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퇴직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을 때도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순리대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활동했던 레지오마리애 단원들의 방문)
이곳 도전리 생활도 4년이 되었습니다.
서울을 떠나기 전 환경의 변화에 따라 걱정과 두려움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오늘을 열심히 살다보니 이제는 이곳 시골생활에 익숙해 지는 것 같습니다.
노인분들이 대부분인 이곳 도전리에서 상대적으로 젊은 우리 부부를 마을 분들이 아주 좋아하십니다.
우선 힘차게 사는 모습이 보기에 좋고 적극적으로 마을 일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매일미사를 봉헌하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일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자연과 벗하며 순리대로 살며 농사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족할 줄 알면 기쁘다(知足可樂)는 말처럼 욕심내지 않고 하루 하루 오늘만을 생각하며 살려고 하다보니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아무 것이 없어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좋고(0 +God = Good),
아무리 좋은 것도 주님이 안계시면 아무것도 아니라(Good - God = 0)는 말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서울과 같은 큰 곳에서 주님의 사업에 동참을 하지 왜 촌에서 달란트를 묵히느냐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공간과 시간에 구애 없이 도구로 써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요즈음 입니다.
우리가 매일 실존을 완성해 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은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께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응답하도록 부름을 받는 곳입니다.
<사랑하올 어머니 레지오 단원들이 방문하여 김장하는 모습:매년 방문>
지금은 성모성월입니다.
2년 전 성모의 밤에 어머니께 드린 편지를 다시 읽어봅니다.
당신의 미소를 닮은 이 밤
촛불 켜고 앉아 당신을 불러봅니다.
어머니, 그냥 불러봅니다.
그리움으로 내 어머니를 부르듯 몇 번이고 불러봅니다.
맑은 아기 눈에 엄마가 온 세상이듯
바라만 봐도 빈 마음 채워주시는 어머니.
부르면 부를수록 정겹고, 더욱 더 그리워지는 사랑하올 어머니!
흔들리지 않는 촛불처럼 언제나 따스한 힘을 주시는 어머니!
우리가 약해져 기진할 때, 길을 잃고 헤매일 때,
그분의 길을 따라 살도록 이끌어 주시던 손길.
그 손길에 의지해 살아온 나날이 은총이었습니다.
어려운 처지를 먼저 아시고 우리와 함께 해 주신 그 고단한 삶은 희생이었습니다.
어머니, 8년 전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영혼과 육신이 몹시 지쳐 일어날 수 없을 때,
하다 하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고 인생을 포기하고자 할 때
어머니께서는 조용히 저를 부르셨습니다.
얘야, “묵주를 잡고 나와 함께 기도드리자.”
저는 묵주를 잡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어머니, 제가 몹시 힘듭니다. 한 발짝만 저와 함께 떼어주십시오” 하고
어느 수녀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어머니께 기도했습니다.
말씀이 없으셨지만 저를 포근히 품에 안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느꼈습니다.
어두움의 터널을 빠져 나온 후 레지오에 입단을 했습니다.
여주로 이사를 온 후 2년 가까이 쉬다가
금년 3월부터 다시 성모님의 군단으로 복음을 전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뜻을 따라 하면 모든 것을 도와주시고 이루어 주시는 어머니.
감사드립니다.
레지오의 ‘겸손’과 ‘순명’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제 신앙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어디에 계시든지 사랑으로 흘러 우리에겐 고향의 강이 되는 푸른 어머니.
신축기금을 마련하기위해 많은 신자가 하나되어 일하던 고구마 밭,
도판 판매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늘 저희와 함께 하셨습니다.
때로는 지쳐 스러질 때에도 따뜻한 손으로
잡아 일으켜 세워 주셨고
불협화음에 흔들릴 때에도 인자한 미소로 안아 주셨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괴로울 때, 눈물 속에서 불러보는 가장 따뜻한 이름, 어머니.
저희의 눈물, 고통, 기쁨, 행복을 함께 나누시는 어머니여!
오늘 이 아름다운 밤에 저희 북여주 성당 공동체가
예수 성심 안에서 항상 어머니를 공경하며
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성전건축을 위해 노력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참 사랑이 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어머니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2007년 5월 31일
5년 전 부터 이곳 도전리에서 레지오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창단하여 280차 주회를 했습니다.
이러한 산 골짜기에서 함께 매주 모여 기도를 한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요즈음 저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8,21)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십계명을 지키고 열심히 기도하고 선한 일을 한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하면서 내 안에 함께 생활하고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는 일이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많은 재물은 외형적인 재산 뿐만 아니라, 내가 행한 선한 일들, 기도, 봉사 등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느님께서도 그에 대한 보상을 해 주시리라는 생각
자체가 또한 버려야 할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글은 저의 신앙고백입니다.
어제 아침 해뜨기 전 서쪽하늘에는 무지개가 떴습니다.
너무나 반가워 집에들어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은 태풍 카눈과 함께 비가내려 책상에 앉아 도전리 생활을 돌아보았습니다.
지난 번 올렸던 내용에 그동안 찍어 두었던 사진으로 교체하여 다시 올립니다.
어려울 때마다 처음 서울을 떠날 때 가졌던 마음을 다지며 용기를 얻습니다.
2012년 7월 19일
(카페에서 만난 Mary Han 부부: 미국에 살고 있는데 한국방문시 우리집 방문>
(신.구약 성서 완필한 후 수원교구청 성경대잔치에 교구장님 축복장을 받으러 감)
이곳에서 농사를 지은지도 8년이 됩니다.
처음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고, 묻고 하며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지금은 인터넷 등에서 농사정보를 얻어 나름대로 농약을 덜 치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농사일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일인것 같습니다.
금년도 사진 몇 장 올립니다.
수원교구는 순교자들의 땅 입니다.
최덕기 바오로 주교님께서 교구장 퇴임시에 “수원교구의 정체성을 잊지 말자”고 하시며
수원교구는 한국교회사에 순교자들의 순교와 신심이 면면히 스며있는 교구라 하셨습니다.
수원교구는 많은 성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1784년 이승훈 성조의 세례와 함께 천진암, 주어사에서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전 등의 성조들이
강학회를 열면서 서학인 천주학을 받아들임으로서 선교사 파견없이 한국의 천주교가 태동하게 됩니다. (천진암)
최초의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님의 영입(1794년) 이전에 양근 출신의 권철신. 권일신 형제
마재 출신의 정약전, 이승훈 등이 많은 선교를 하고 지도자로서 활동합니다.(양근)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선조들이 순교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된 성지로는 어농, 요당리, 구산, 단내, 수리산, 은이, 미리내, 수원, 남양성모, 죽산, 손골,
골배마실 등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도 순교의 정신이 배어있는 곳으로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배출된 곳으로 소개하려합니다.
(마을 안쪽에서 바라본 원심동 마을)
원심동 이야기
여주읍에서 원주방면으로 15Km에 위치한 경기도와 강원도 도계마을이며 천혜의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전국 10대 장수촌의 하나(보건복지부발표)로 길지이며 경기도 3대 오지마을인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도전3리
원심동 마을은 특히 조선말 천주교 박해시 교인들이 은신하면서 마을의 터전을 잡은 두메산골 청정마을이기도 합니다.
마을 터전을 잡은 조상들이 사람은 모름지기 원심대로 살아야 하느니라 하여 원심동이라 불리며
주산인 당산 중턱 치마바위 주변에 천년 묵은 산삼 꽃이 여주고을 여강나루 한강 물 속에 간간히 비추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도전리의 지명은 도성촌.탑전동.원심이.전거론리로 불리는 4개의 자연부락 중
도성촌과 전거론리의 앞 글자를 따온 것 입니다.
(스승예수상에서 내려다 본 도전2리 방향)
옛날 천주교 박해시대 때부터 무명순교자들에 의해 형성된 작은 마을이 오늘날까지 신앙이 이어져 유서 깊은
200년 공소로 남아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마을을 한국의 스위스라고 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골골마다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수녀회 피정의 집, 스승예수의 제자수녀회 피정의 집,
성 바오로딸 사도모후의 집, 장애인들의 쉼터인 라파엘의 집 등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영혼의 피난처, 구원의 기도처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습니다.
(스승예수상)
1801년 이른바 신유박해가 한창이던 때, 조정의 관리로 있던 정도마가
동생과 처 그리고 두 아들 등의 식솔을 거느리고 양평 양동을 거쳐 원주 구제(지정면 판대리)에 정착했습니다.
화전을 일구며 생활하던 정도마 형제는 어느 날 장에 다녀오던 길에
천주교도를 밀고하는 밀정을 만나 부득이 형제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에 나졸들이 정도마를 잡으러 나타나자 정도마는 급히 산으로 피신하였으나
집에 남아있던 그의 처 임가타리나는 “내가 천주학을 하니 나를 잡아가라”며 남편대신 붙잡혀 순교했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정도마는 작은 아들만을 데리고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원심이로 숨어들었습니다.
원심이에서의 첫날, 정도마는 바위 위에서 기도를 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둥글게 이어진 줄처럼 생긴 묵주를 쥐고 기도했다고 하여 그 바위를 ‘줄바위’라고 불렀고
지금껏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도마의 작은 아들은 성장해 3형제를 두었으며 관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외가의 성을 따라 전주 이씨로 변성명을 하고 살았습니다.
이들 3형제 중 재영(아오스딩)이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체인 원심이 공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성품이 너그러웠고 겸손했던 그는 항상 마을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농토 개간과 농사짓는 법을 보급하여 추앙을 받았습니다.
(공소)
이재영 회장이 죽자 강천면에서는 원심이 개발공로자인 그에게 장례지를 제공하고 9일장을 치르게 했습니다.
이 회장 임종 당시 허리에 새끼를 두른 것이 발견되었는데
예수의 생애를 상징하듯 33마디로 매듭지어진 새끼줄이었습니다.
이 새끼줄을 평생토록 맨 허리에 두르고 지낸 탓에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길이 들어있었으므로
보는 이마다 그의 놀라운 신심에 깊이 감격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원심이.중평동.도성촌 주민의 90% 이상이 천주교 신자인 까닭도 이런 힘에서 유래했을 것입니다.
   ![](http://www.fsp.or.kr/user/user_icon.php/9021)
|
첫댓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형제님 가족의 소소한 일상 하나하나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 느껴지는것 같아요.
소식 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