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탄하고 아름다운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일부러 험로를 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세상 인생길은 천차만별이다. 이상훈의 길은 험로에 속한다.
이 남자, 이상훈(42)은 국제기아대책기구(Food for The Hungry International)라는 국제NGO의 우간다 국가지부장(country director)이다. 2004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가 책임자에 임명돼 일하다가 이달 초 귀국했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직해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을 40대 사내가 편한 길 대신에 험로를 택했다. 1990년대 중반 르완다를 시작으로 케냐, 캄보디아, 아프가니스탄, 우간다를 살면서 지역 개발을 위해 살았다. 관광하기도 힘든 열악한 아프리카에서 아내를 만나고 아이들을 기르고 더 많은 아프리카 아이들의 인권을 위해 일했다. 이상훈, 이 남자가 사는 법 이야기.
1994년 르완다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와 아프가니스탄, 캄보디아 등 제3세계를 돌며 지역개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상훈. 2004년부터 4년 동안 국제 NGO인 기아대책의 우간다 지부장으로 일했다.
혁명을 꿈꾸다
이상훈은 연세대 정외과 86학번이다. 1987년 그의 곁에서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기껏 데모해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더니 또 다시 군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다. 세상이 바뀐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혁명을 꿈꿨다고 했다. 그런데 구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삐걱대는 모습을 보고 관뒀다. “구조를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지식이 세상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역시 포기. 한동안 술과 담배로 고민을 풀었다.
노자(老子)와 공자(孔子)와 성경을 읽었다. 거기에 답이 있었다. “사람 하나하나의 본성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게 된다.” 그가 말했다. “그래, 구조가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 참 세상은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아, 그러면 신문기자가 되어야겠다, 그래서 사회를 밝히는 날카로운 펜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아프리카로
1994년 한 신문사 서류전형을 합격하고 필기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국제기아대책기구 한국지부에서 ‘기아봉사단’이라는 기구 요원 훈련 공고가 났다. 이상훈은 홀린 듯, 기아대책에 응시를 했고 합격했다. 기자 시험을 포기하고 훈련을 마치고 기아대책 직원이 되었다. 첫 월급은 36만원. ROTC였던 그의 군대 월급은 50만원이었다.
한 달 뒤 기아대책에서 말했다. “내일 자이레로 가라.” 당시 내전이 한창인 르완다 옆 나라 자이레에는 각국 의료봉사단들이 활동 중이었다. 이상훈은 한국 봉사단 행정요원으로 차출됐다. 의사와 간호사들 뒷바라지는 도저히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한국 본부에 SOS를 날렸다. 본부는 케냐에서 외삼촌을 따라 선교활동 중이던 이송희(37)를 소개해줬다. 그녀가 날아왔다.
同行을 만나다
2주일 후 프러포즈를 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는 길이 비슷한 거 같은데, 동행하자고.” 그녀가 빤히 보더니 반문했다. 지금 프러포즈 하는 거냐고. 그래서 그런 셈이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상훈이 말했다. “한 시간 주겠다.”
한 시간 뒤 여자가 물었다. “어릴 때부터 마음 먹은 이상형이 있다. 기독교인일 것, 평생 이렇게 봉사해야 할 것, 그리고 키가 클 것. 당신은?” 남자가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나 기독교다. 그리고 봉사? 보면 모르냐, 그거 하려고 아프리카에 있다. 그리고 키야, 노력해서 이뤄질 것만 얘기하자.”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 세상을 바꾸겠다는 선남선녀가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3월 24일 둘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케냐로 떠났다. 나이로비에 있는 기아대책 지원사무소. 르완다와 케냐 아동 복지활동 및 지역개발이 임무였다. 케냐 체류 4년 동안 딸 둘이 태어났다.
지역개발학을 배우다
2001년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전공은 지역개발학. 학비는 “기아대책이 아니라 본인 대책부터 세우라”며 대학 동창이랑 친척들, 대학 시절 하숙방 동기들이 십시일반했다. 공부하는 사이에 막내 아들이 태어났다. 2004년 기아대책 세계본부에서 그를 우간다 국가지부장으로 임명했다. 한국인 최초다. “내 배짱대로 일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어차피 돈 보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 야전사령관처럼 전쟁 한번 제대로 해보자 했어요.”
염소 길러 성공한 제리의 추억
우간다도 내전 상태였다 (관련기사 보기) . 반군들은 소년들을 납치해 소년병으로 써먹고, 소녀들을 노동과 성 노예로 농락했다. “할 일이 많았어요. 즉, 변화시킬 수 있는 게 많았다는 거죠. 이들에게 돈 몇푼이 아니라 자립의지를 줄 수 있으면 우간다 사회가 변하는 겁니다.” 그는 제리라는 40대 사내 이야기를 했다. “어릴 때 외국 후원자로부터 염소 두 마리를 받았습니다. 그걸 제리가 키워서 네 마리, 열 마리를 만들고 그걸 팔아 소를 만들어 대학까지 졸업한 사람입니다.”
이상훈은 제리와 함께 염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염소 2500마리를 사서 청소년들에게 나눠주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재산이다. 두 마리가 세 마리 되고 결국은 너희들의 미래가 된다.” 부모에게는 “팔거나 잡아먹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았다. “자기 소유를 처음 가져본 아이들이죠. 정말 소중하게 키워 자기 미래를 가꾸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추억
반군에 의해 강제로 임신을 한 ‘차일드 마더(Child Mother)’들을 위해 재활센터(New Life Center)를 만든 것도 성과다. “사람들이 소년병은 신경을 쓰고 여자아이들에겐 무관심했어요. 그래서 유니세프 지원을 받아서 이들의 심리치료 및 직업교육 센터를 만들었어요. 4주 교육을 받으며 어린 엄마들이 변화하는 속도가 무척 빠릅니다.”
아프리카의 추억, 또 많다. 심장병 걸린 소녀 쳅쿠루이 베나를 한국으로 보내 수술을 시켜주고 그 결과 아이의 병이 마귀 때문인 줄 알았던 온 마을에 미신이 사라지고 자립의지로 가득 차게 된 이야기 (관련기사 보기), 서양식 이름 대신에 자기 부족 이름으로 불러줘서 고맙다던 사람들 이야기며, “한번도 이처럼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다”며 울던 한 차일드 마더 이야기며….
다시 아프리카로
이상훈이 말했다. “그들에게 자립의지를 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끌어안는 것이 어찌 보면 더 큰 나라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훈은 조만간 지역개발학을 더 배우러 다시 유학길을 떠날 예정이다. 공부가 끝나면?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게 희망사항입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더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죠.” 슈바이처까지는 아니지만 일부러 험로를 택한 사내, 이상훈의 모범답안이었다. / 출처 : 조선일보
<여호수아서 21장 44절>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 땅에서 평화롭게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오래 전에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적들 중 누구도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에 모든 적을 넘겨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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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용기있고 뜻있고 보람있고 자랑스러운 삶을 사시는 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