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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소통광장 스크랩 천강에 비친 달(정찬주)
무한의주인공 추천 0 조회 139 14.10.26 08:15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천강에 비친 달-정찬주 장편소설 : 세종과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 비밀 이야기ㅣ정찬주 지음ㅣ작가정신

 

 

한글은 절에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 곁에 무학 대사가 있었다면, 세종대왕 곁에는 신미 대사가 있었다.
한글 창제의 공을 숨긴 신미 대사와 부처님 마음으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던 세종대왕 이야기

“『대장경』을 무지렁이 백성들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우리 글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바로 세종과 신미가 꿈꾸는 조선의 글자였다.”

천 개의 강에 달빛이 비치듯 부처의 가르침이 온 백성에게 드리우길 바랐던 세종과 신미 대사가 이룬 한글 창제의 진실!


조선 왕조 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왕으로 평가받는 세종. 그리고 그가 이룩한 찬란한 업적, 한글 창제. 하지만 한글 창제에 세종 외에 공을 세운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지울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고승’ 신미 대사다. 이번 한글날에 맞춰 출간 예정인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 창제에 얽힌 비밀을 밝힌 작품으로, 조선 초 최고의 범어(산스크리트 어) 전문가이자 학승(學僧)이었던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이었음을 조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글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창제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실제로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은 『세종왕조실록』어디에도 없다. 이 소설에 따르면 집현전이 사실은 한글 창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며,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조차 “집현전 학사들 중에 어느 누구도 훈민정음의 오묘한 원리를 알지 못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는 세종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것일까?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8년 전에 이미 훈민정음 언해본 『원각선종석보』가 발간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세종은 왜 문종에게 ‘우국이세(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란 존호를 신미 대사에게 내리도록 유언했을까?
정찬주 작가는 이 모든 의문들이 “신미 대사의 훈민정음 창제라는 공을 빼버리면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범어를 통달한 신미 대사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탄생시켰음을 보여준다. 소설은 수수께끼로 가득 찬 한글 창제의 진실을 야사가 아닌 정사, 즉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낱낱이 풀어나간다. 이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한 팩션의 재미를 넘어, 역사적 진실에 새롭게 눈뜨게 하는 놀라운 지적 감동을 선사해준다. 소설가 조정래는 “『천강에 비친 달』은 소설적 허구가 아닌 역사적 진실의 올곧은 복원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정찬주 작가가 “소설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확대시키는 동시에 지적 감동에 취하는 큰일을 해냈다.”고 평하고 있다.
『천강에 비친 달』은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유불(儒彿) 갈등과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결을 비롯해 한글 창제를 둘러싼 갈등 양상과 시대상을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특히 한글 창제에 영향을 끼친 불교 사상은 특정 종교의 한 분파가 아닌 민족정신의 중심 사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한국 불교가 훈민정음에 나타난 자주정신과 평등사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과 신미가 배불숭유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의기투합해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백성이 인간다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이룩하고자 한 뜻이 통했던 까닭이었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겼던 두 사람은 우리 글자를 만들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달빛과 같이 만백성의 고통을 어루만져 낫게 해주고 싶었고, 백성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그들이 품었던 민본 애민 사상의 대의(大意)는 오늘날 우리들이 한마음으로 바라는 서원(誓願)이기도 하다. 600년 전에 품었던 세종과 신미의 염원이 이토록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 국가의 정통성과 위신을 바로세우는 한글을 다시금 환하게 비춰줄 횃불 하나가 밝았다. 『천강에 비친 달』이 밝혀주는 한글 창제의 진실을 통해 혼탁한 시대에 역사의 주체로서 다시금 삶을 밀고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 서평

“세종이 신미를 살리는 일은 신미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었다.”
연못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지 않는 달빛처럼 시비와 집착을 초월해 우리 글자를 만드는 데 매진한 신미 대사


훈민정음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창제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은 『세종왕조실록』어디에도 없다. 조선 왕조는 건국이념으로서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정책적으로 표방했는데, 따라서 세종은 유학을 숭상하여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는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훈민정음을 드러내놓고 창제할 수 없었다. 유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은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의 도움을 받아 끝끝내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때 세종을 도운,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신미 대사였다.
정찬주의 장편소설『천강에 비친 달』은 당대 최고의 범어(梵語, 산스크리트 어) 전문가이자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임을 밝힌 작품이다. 기존에 훈민정음 창제의 비화를 다룬 장편소설들이 몇몇 출간되어 있지만, 한글 창제의 주역으로 ‘신미 대사’라는 새로운 인물을 내세운 소설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가는 정설로 굳어진 ‘세종과 집현전의 한글 창제설’이 지닌 의문점을 제기하고,『조선왕조실록』,『사리영응기』 등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그동안 학계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신미 대사라는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천강에 비친 달』은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역사의식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 만들어낸 탄탄하고 웅장한 서사와 역사적 현장에 직접 들어온 듯이 생생한 묘사, 인간사에 대한 밀도 높은 통찰력을 지닌 작품이다. 이를 바탕으로 문학적 ‘허구’를 넘어 역사적 진실의 올곧은 ‘복원’으로 자리 매김하면서 소설이라는 장르의 지평을 새롭게 확대시키고 있다.

“한글 창제(創制)에 있어서 창(創)은 세종, 제(制)는 신미의 몫이었다.”
유불(儒佛) 싸움의 진흙탕 속에서 불(佛)이 살아남아 남긴 우리 글자, 세종이 창안하고 신미 대사가 만든 28자의 훈민정음 이야기


『천강에 비친 달』은 세종 즉위 2년인 1420년부터 세종이 승하한 1450년까지 30년에 걸쳐 우리 글자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펼쳐내면서, 한글 창제를 둘러싼 갈등 양상과 시대상을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다. 전(前) 왕조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지배 질서의 창출을 위해 숭유억불을 정책적 이념으로 내세우던 조정 대신들과 세종의 팽팽한 대립, 왕명에 따라 작업을 수행했지만 반대 세력들의 계략 속에 생명의 위협을 당했던 신미 대사, 한글 창제를 통해 명으로부터 자주성을 수립하고 백성을 고통 속에서 구제하고자 했던 세종의 민본사상, 또한 세종에게 자비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애민사상을 설파했던 신미의 모습 등이 일필휘지로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더불어 우리 글자를 향한 도정의 질곡 마디마디에 새겨진 불교적 사유는 마치 운수납자의 행보를 따라하듯 구름같이 떠돌고 물같이 흐르며 작가 특유의 담백하고도 유연한 필치로 펼쳐진다.
이 소설에서 신미는 세종이 일러준 상형(象形)의 바탕, 즉 자음은 혀 모양, 입술 모양, 이 모양을 바탕으로, 모음은 천지인을 바탕으로 하여 글자꼴을 만들고, 이 자모에 범자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과 합용, 교합을 통해 우리 글자인 정음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신미 대사뿐 아니라 우리 글자를 만들려는 일념 하나로, 신미 대사,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일부 사헌부 대신들과 집현전 학사들이 협력하고 조력하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처럼 소설은 무지렁이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성, 국가의 정통성과 위신을 바로세우는 우리 글자를 만들고자 했던 세종대왕과 신미 대사를 비롯한 역사적 군상들을 생동감 있게 재현해내고, 그들이 지닌 인간적 고뇌와 방황을 시대적 대의(大意)와 종교적 성찰로 승화하여 묵직한 울림과 감동을 던져준다.

“중생을 위해 정진하는 길, 그것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천 개의 강에 비친 달빛 너울 그 자체인 한글, 그 안에 담긴 자유와 문명을 희구하는 찬란한 진실


유교 국가였던 당시의 조선에서 세종은 계속되는 왜국 사신의 요구를 물리치고 오직 1질밖에 없는 해인사 『대장경판』을 끝끝내 지켜냈으며, 태조가 발원했던 흥국사 사리전을 중수하고 궁중의 내불당을 인왕산 산자락에 대규모로 신축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우리 글자로 손수 작곡하기도 했다. 『월인천강지곡』은 글자 그대로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듯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가 온 백성에게 드리우는 노래라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두루 미쳐 백성들마다 불교에 귀의하는 마음이 솟구치기를 바랐던 세종의 애민사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속리산 복천사로 내려가 평생을 은둔하며 지냈던 혜각존자 신미 대사. 그림자나 연못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려 하지 않는 달빛처럼, 시비와 집착을 초월하여 오로지 우리 글자에만 매진했던 신미 대사가 세종과 한마음으로 바랐던 한 가지는 중생을 위해 정진하는 길, 그것뿐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분열과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다 각별하게 와 닿는다. 소설가 한승원은 이 소설에 대해 “한문 문화에 억눌려 있던 우매한 민초들의 삶을 해방시키고 자유와 문명의 찬란한 꽃을 피우게 한 위대한 자산인 우리 한글이 불교 사상의 한 유산이라는 해석은 우리 삶의 미래에 찬란한 이정표를 제시해준다.”고 평했다. 세종과 신미가 함께 이룬 한글 창제에는 자유와 문명의 꽃을 피워 새 시대를 열어나가려는 열망과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한글 창제에 담긴 한국 불교의 자주정신과 평등사상을 통해 그동안 잊고 지냈던 민족적 자긍심과 긍지를 확인하고, 우리 삶의 근간을 보듬고 살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 주요 내용

세종 2년(1420) 8월 6일. 원경왕후의 4재를 기리는 천도재에서 세종과 신미가 만난다. 그날 신미는 스승 함허의 지시에 따라 염불을 외우게 되는데, 맑고 청아한 염불 소리는 당시 어머니 원경왕후를 떠올리며 슬픔에 잠겨 있던 세종을 위로해준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세종은 이른바 ‘대장경 외교’에 있어서 지혜를 구하기 위해 함허와 신미를 은밀히 궁으로 불러들이는데, 이때 신미는 모든 백성이 『대장경』이나 유가의 경전을 볼 수 있도록 한자가 아닌 우리 글자를 만들어달라고 세종에게 제안한다. 이후 세종과 신미는 비밀리에 우리 글자를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세종이 즉위한 지 19년(1437)이 되는 초가을, 신미는 세종이 알려준 글자 원리를 가지고 범자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加劃)을 해가며 글자를 연구한다. 세종 20년(1438) 신미의 나이 36세가 되던 해, 세종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도록 신미를 집현전 학사로 제수하지만 유신들의 질시와 끈질긴 모함으로 신미는 집현전을 떠나 정음청(正音廳)이라는 임시 관청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신미는 사간원의 음모로 자객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하는 등 시련을 겪게 되는데……. 마침내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모아놓고 훈민정음 창제를 공개한다. 세종의 초인적인 인내와 단호한 결단, 신미의 목숨을 노리는 위협 속에서 창제된 훈민정음이었다.

★ 추천의 말

우리들 사는 세상을 늘 연꽃 색깔로 칠해온 구도의 작가 정찬주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하나의 큰 놀라움이다. 천강에 비친 달빛 너울 그 자체인 한글, 한문 문화에 억눌려 있던 우매한 민초들의 삶을 해방시키고 자유와 문명의 찬란한 꽃을 피우게 한 위대한 자산인 우리 한글이 불교 사상의 한 유산이라는 해석은 우리 삶의 미래에 찬란한 이정표를 제시해준다. -한승원(소설가)

정찬주 작가는 『천강에 비친 달』을 통해 범어를 통달한 수암 신미 대사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탄생시켰음을 보여준다. 이는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 『세종실록』에 근거한 역사적 진실의 올곧은 복원이다. 작가는 소설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확대시키는 동시에 지적 감동에 취하게 하는 큰일을 해냈다. -조정래(소설가)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 창제의 정설을 역사적 근거에 의해 뒤집는 놀라는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이 허구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등불이라면 이 소설이야말로 한글 창제의 진실을 밝히는 영원한 횃불이다. 분열과 고통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국민을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어떻게 국민을 사랑해야 하는지 불교적 영성의 큰 가르침을 준다. -정호승(시인)

 

 

 

 

 

"범어 전문가 신미대사가 한글창제 숨은 주역" [연합뉴스] 2014.09.24

정찬주씨, 신작소설 '천강에 비친 달' 통해 주장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훈민정음 서문에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뜻이 잘 담겨 있다.

한글은 일찌감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을 만큼 세계가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을 당시만 해도 사대부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

사대부들의 거센 반발 때문이었을까. 한글 창제 과정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세종대왕이 혼자 만들었는지, 집현전 학자들의 '협찬'이 있었는지…

소설가 정찬주(61) 씨는 '한글이 절에서 태어났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제기한다.

정 씨는 신작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작가정신 펴냄)에서 조선 시대 범어(산스크리트어) 전문가였던 신미(信眉)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이 한결같이 숭유억불 정책을 취했지만, 세종대왕이 신미대사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만들어 불교의 자주사상과 평등사상을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천강에 비친 달'은 사실(역사 기록)과 허구가 어우러진 '팩션 소설'이다. 불교 소설과 산문을 주로 써온 작가는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 속에서 신미대사의 흔적을 추적했다.

24일 책 출간에 맞춰 기자들과 만난 작가는 "세종부터 문종, 세조, 성종에 이르기까지 실록에 신미대사의 이름이 수십 번이나 나온다"면서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증거로 실록 등 문헌 기록을 제시했다.

그는 "신미대사가 언급된 실록 기록을 뽑아보니 20~30쪽이 됐다"면서 "관심을 안 가져서 그 존재를 몰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세종대왕이 신미대사에게 궁궐까지 역마를 타고 다니게 했고 아들 문종에게는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존호를 신미대사에게 내리도록 유언하는 등 왕사(王師)에 준하는 대우를 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국왕을 도와서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우국이세'라는 존호는 아무에게나 내릴 수 없다"면서 "태조 이성계의 곁에 무학대사가 있었다면 세종의 곁에는 신미대사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실록은 유생들의 기록이어서 고승의 이야기는 폄하되거나 축소, 왜곡됐는데 실록을 보니 모래밭에 바늘 줍듯이 그런 편린이 언뜻 언뜻 보였다"면서 "그런 것을 모아 모자이크하듯 쓴 것이 이번 소설"이라고 말했다.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한 것은 세종 25년인 1443년 12월 31일이다.

작가는 "그때까지 집현전 학자 어느 누구도 한글 창제에 대해 몰랐다"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을 쓴 정인지 글을 보면 '그 연원과 정밀한 뜻이 묘연해서 신 등은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창제를 돕지 않았다면 과연 누가 세종을 도왔느냐는 문제가 남는데 제가 추적을 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범어에 달통한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공로자라고 주장했다.

작가는 "범어의 음운체계는 한글과 유사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면서 "범어는 50자모, 한글은 28자모인데 한글은 범어에서 창안했지만 범어보다 더 과학적이고 독창적"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신미대사와 동시대 인물인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도 한글을 범어에 의지해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온다"면서 "동시대 인물이 그런 말을 한 것은 당대 선비들 입에 회자됐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한글 창제에 신미대사가 관여했다는 언급이 실록에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세종대왕이 신미대사를 보호하기 위해 이름을 지운 것 같다"면서 "이름이 올라갔으면 목숨이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작가가 신미대사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18년 전이다. 일간지에 글을 연재 중이던 작가는 속리산 복천(福泉)암에 취재차 갔다가 한 스님으로부터 신미대사의 이야기를 난생처음 들었다고 한다. 신미대사는 복천암(당시 복천사)에서 출가하고 입적했다. 세종대왕은 신미대사를 위해 복천사에 불상을 시주하기도 했다.

작가는 "우리가 날마다 쓰는 한글 속에 세종대왕은 물론이고 신미대사, (세종대왕의 아들인)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의 노고가 깃들어져 있다"면서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것이 아직 정설은 아닌데 이 소설을 계기로 학계에 연구의 불을 지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범어 전문가 신미대사가 한글창제 숨은 주역” [문화일보] 2014.09.25

 

 

한글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창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소설가 정찬주(61·사진)는 한글이 절에서 태어났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던진다. 그의 장편 ‘천강에 비친 달’(작가정신)은 조선 초 최고의 범어(산스크리트어) 전문가이자 학승(學僧)이었던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이었다는 역사적 비밀을 풀어낸다. 비록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조선왕조실록’, ‘사리영응기’등 사료에 대한 고증을 바탕으로 되살린 가능성 높은 일설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세종실록’에는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유학자 정인지는 “집현전 학사들 중에 어느 누구도 훈민정음의 오묘한 원리를 알지 못한다”는 글을 남겼다. 작가는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8년 전인 1438년 신미대사로 추정되는 이가 이미 훈민정음 언해본인 ‘원각선종석보’를 발간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원각선종석보’의 진위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제대로 이뤄져야겠지만, 이는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수년 전 비밀리에 만들어져 신미대사에 의해 실험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결정적 단서라는 것이다.

저자는 한글 창제와 관련된 유력설인 ‘범자 모방설’도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설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조선 초 유학자 성현의 ‘용재총화’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언문이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구절이 있고, ‘영산김씨세보’에도 “신미대사를 학사로 임명해 집현전 학사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 체계를 설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작가는 “범어의 음운체계는 한글과 유사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며 “다만 범어는 50자모, 한글은 28자모로 한글은 범어에서 창안했지만 더 과학적이고 독창적이다”고 했다.


소설에는 한글 창제를 둘러싼 유불 갈등, 왕권과 신권의 대결이 잘 드러나 있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세종은 훈민정음을 드러내놓고 창제할 수 없었고, 이런 연유로 신미대사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다는 정황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후 세종은 유언을 통해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란 존호를 내려 그를 치하한다.

저자는 “국왕을 도와서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우국이세’라는 존호는 아무에게나 내릴 수 없다”며 “신미대사의 훈민정음 창제라는 공을 빼버리면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한 작가는 그동안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추어라’ 등 불교적 사유가 배어 있는 작품에 주로 천착해왔다. 이번 소설 또한 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은 세종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찬불가 ‘월인천강지곡’처럼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달빛같이 만백성의 고통을 어루만지겠다는 세종과 신미대사의 뜻에 따라 훈민정음이 창제됐다는 것을 뜻한다.

소설가 조정래는 추천사에서 “세계 언어학자들이 제일로 꼽는 문자 한글을 창제한 것이 위대한 업적인 만큼 그 과정은 풀 길 없는 수수께끼가 많다”며 “‘천강에 비친 달’은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 ‘세종실록’에 근거한 역사적 진실의 올곧은 복원”이라고 평했다.

 

 

 

 

한글창제, 세종과 집현전 학자가 했다고? [국민일보] 2014.09.26

 

 

“그 깊은 연원과 정밀한 뜻이 묘연하여 신 등은 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중)

조선 세종 당시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소설가 정찬주(61)는 24일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작가정신) 출판간담회에서 “이 소설은 이 문장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작가는 정인지의 글을 이렇게 해석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이 어떤 문자를 근거로 하고 있는지 그 깊은 연원과, 또한 한글의 글자마다 정밀한 뜻이 미묘하므로 창제에 간여할 능력이 없었다. 세종에게 한글창제의 공을 돌리기 위한 겸사일 수도 있지만, 집현전 학자들의 양심선언 또는 고백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학자들 말고 누가 한글창제를 도왔는가. 이 소설은 한글창제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야사가 아닌 정사, 즉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낱낱이 풀어나간다.

작가는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이었다. 따라서 세종은 유학을 숭상해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는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 훈민정음을 드러내놓고 만들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유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하지만 세종은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의 도움을 받아 끝끝내 훈민정음 스물 여덟자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이 책에는 이때 세종을 도운,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중요한 사람으로 신미대사가 나온다. 한글과 유사한 범어(산스크리트어)에 통달한 신미대사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정설로 굳어진 ‘세종과 집현전의 한글 창제설’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셈이다.

작가는 “지난해 범어를 쓰는 남인도에 가보니 범어와 한글 어휘가 유사한 게 1000개가 넘었다. 예를 들어 범어에선 엉덩이를 ‘궁디’로, 거시기를 ‘거세기’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신미대사와 동시대 인물인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도 한글을 범어에 의지해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온다고 부연했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한 명(희우)을 빼곤 전부 실록에 나오는 실존 인물. 뼈대는 실제 기록이고, 그 위에 입혀진 살은 허구인 셈이다. 낙향해 전남 화순에서 13년째 지내고 있는 작가는 지난해 10월 집필을 시작해 1년 만에 작품을 완성했다. 조선왕조실록, 사리영웅기 등을 샅샅이 뒤져 역사적 고증을 했다.

추천사를 쓴 소설가 조정래는 “이 책은 소설적 허구가 아닌 진실의 올곧은 복원”이라며 “정찬주가 소설의 존재이유를 확대시키는 동시에 지적 감동에 취하게 하는 큰일을 해냈다”고 평했다.

작가는 “우리가 날마다 쓰는 한글 속에 세종대왕은 물론 많은 이들의 노고가 깃들어져 있다. 한글처럼 과학적인 문자를 쓰는 나라도 드물다. 한글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만하다”면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를 도왔다는 것이 정설은 아닌데 이 소설을 계기로 학계에 연구의 불을 지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천강에 비친 달 [한겨레] 2014.09.28

 

 

조선 초 최고의 범어(산스크리트어) 전문가이자 학승이었던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이었음을 조명한 소설.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유불(儒佛) 갈등과 왕권과 신권의 대결을 비롯해 한글 창제를 둘러싼 갈등 양상과 시대상을 생생하게 구현해 낸다. 정찬주 지음/작가정신·1만5000원.

 

 

세종과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 뒷이야기 [법보신문] 2014.09.29

‘천강에 비친 달’ /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1만5000원.

 

 

“어젯밤 임금님 앞에서 ‘전하, 우리 글자를 만드시옵소서’ 하는 너의 말에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허나 임금님께서 잠시 상념에 잠기시는 것을 보고 임금님과 너의 뜻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이 은선은 임금님께서 너를 격려하여 내린 특별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너는 우리 글자를 만들어야 하는 숙명을 떠안은 셈이다.”

어느 날 밤, 세종과 마주 앉은 신미가 우리 글자 만들기를 청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함허 스님은 그 광경을 보고 제자 신미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세종이라면 한글을 창제한 임금이고, 한글은 세종의 명을 받아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제안자가 스님이라니 어찌된 영문일까?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뿐, 사실 한글은 절에서 태어났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창제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알려졌지만,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은 ‘세종실록’ 어디에도 없다. 조선왕조는 숭유억불을 표방했고, 따라서 세종 역시 유학을 숭상해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는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상황에서 훈민정음을 드러내놓고 창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종은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의 도움을 받아 끝내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때 세종을 도운,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바로 신미 대사였다.

불교적 사유가 배어 있는 글쓰기로 오랜 기간 소설과 명상적 산문을 발표해온 작가 정찬주가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에서 당대 최고의 범어 전문가이자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임을 밝혔다.

작가는 정설로 굳어진 세종과 집현전의 한글 창제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조선왕조실록’ ‘사리영웅기’ 등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신미 대사를 새롭게 조명했다. 소설은 또 최근 발견된 ‘원각선종석보’가 신미 대사가 한글을 창제했다는 결정적 단서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미 대사가 만든 훈민정음 언해본 ‘원각선종석보’의 발간 시기는 1438년으로, 세종이 한글창제를 반포한 1446년보다 8년이나 앞서고 있다. 훈민정음이 이미 8년 전에 비밀리에 만들어져 신미 대사와 수양, 안평 등에 의해서 실험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한글 창제와 관련된 유력한 설인 ‘범자 모방설’ 역시 신미의 한글 창제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여기에 조선 초 유학자 성현의 ‘용재총화’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언문이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밝히고 있고, ‘영산김씨세보’는 신미 대사를 학사로 임명해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 체계를 설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후 문자 보급을 위해 유교 경전이 아닌 불경을 언해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 대사의 요청 때문이었으며, 이를 통해 불교와 한글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고증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통해 범어를 통달한 신미 대사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탄생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설은 수수께끼로 가득 찬 한글 창제의 진실을 야사가 아닌 정사, 즉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낱낱이 풀어냈다. 따라서 책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한 픽션의 재미를 넘어, 역사적 진실에 새롭게 눈뜨게 하는 놀라운 지적 감동을 선사해준다. 소설가 조정래가 “‘천강에 비친 달’은 소설적 허구가 아닌 역사적 진실의 올곧은 복원”이라고 극찬한 이유다.

‘천강에 비친 달’은 이처럼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역사의식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 역사적 현장에 직접 들어온 듯 생생하게 한글 창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덕분에 천 개의 강에 비친 달빛 너울 그 자체인 한글이 자유와 평등을 품은 불교 사상의 한 유산이라는 점까지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한글, 절에서 나온 겁니다” [동아일보] 2014.10.01

훈민정음 창제 과정 그린 소설 ‘천강에 비친 달’ 펴낸 정찬주 작가

 

 

최근 발간된 소설 ‘천강에 비친 달’(작가정신)은 훈민정음을 만든 주역이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에 머물던 신미 대사라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정찬주 작가는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이 작품은 세종과 신미 대사를 중심으로 한글 창제 과정을 그린 ‘팩션’(사실을 기반으로 한 허구)이지만 기본 줄거리는 여러 고문헌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했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조선시대 유교 문화에서 한자가 아닌 별도의 문자 창제가 커다란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어 집현전 같은 국가기관에서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하기는 힘들었다고 주장했다. 집현전 학사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학사들 중 누구도 훈민정음의 오묘한 원리를 알지 못한다”고 썼다. 정 작가는 “언뜻 겸양의 표현처럼 보이지만 집현전 학사들도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창제 작업이 비밀리에 추진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모델로 삼은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에 관해 신미 대사가 당대 최고 전문가였으며, 그가 세종의 부름을 받고 수시로 궁궐을 출입한 점도 유력한 증거로 꼽았다. 정 작가는 지난해 범어 연구를 위해 남인도로 여행을 떠난 얘기를 꺼냈다. “남인도에서 쓰이는 타밀어는 범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타밀어와 우리말을 비교하면 유사어가 1000개가 넘어요. 엉덩이를 타밀어로는 ‘궁디’라고 하더군요.”

그는 세종이 신미 대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존호를 내리라고 세자에게 유언한 사실도 들었다. 정 작가는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의 ‘우국이세’ 존호는 아무나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의 공을 기린 것”이라고 했다.

 

 

 

 

"한글은 절에서 스님이 만들었습니다" [불교신문] 2014.10.01

정찬주 작가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 ... 억불시대 세종과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비화

지난 9월25일 흥천사 주지 정념스님은 세종과 신미대사의 한글창제의 역사를 복원한 소설가 정찬주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정 작가 역시 마음써준 스님에게 감사해했다.

 

 

1996년 5월. 마을은 신록 완연한 봄날이지만 설악산 봉정암의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시 봉정암에 기도 스님으로 머물렀던 정념스님은 “법당서도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봉정암의 긴 겨울끝에 생명의 화신, 봄의 전령사처럼 찾아온 사람이 정찬주 작가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념스님은 “백담사에서 봉정까지 봄기운이 올라오려면 50일이 족히 걸린다”며 “겨울암자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봄을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과 사람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알 것”이라고 했다. 생전 처음 만난 스님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은 정 작가는 그 시절 <중앙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된 ‘암자로 가는 길’로 불교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암자’라는 매혹적인 부처님도량을 제대로 알린 장본인.

 

정 작가가 기억하는 그 날 스님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처음 본 스님께서 나를 알아보더니 봉정암 까마귀들이 헌식한 보은으로 귀한 손님 오는 날엔 예고를 해주는데 그렇잖아도 아침부터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울어대길래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셨다.”

 

정념스님은 정 작가가 집필한 만해 한용운스님의 일대기 <유마경>을 읽고서 20질을 구입해 도반들에게 선물했을 정도로 정 작가의 작품세계에 이미 인연을 맺어놓고 있었다.

 

같은해 정 작가는 속리산 복천암에도 취재차 올라갔었다. 그는 복천암에서 만난 선승, 월성스님으로부터 한글창제의 공이 많은 신미대사의 이야기를 난생 처음 들었다. 이후 8년여가 흐른 뒤 또다시 복천암에 갔을 적에도 월성스님은 신미대사의 자료들을 보여주면서 줄곧 그 얘기만 반복했다.

 

세종의 명을 받은 신미대사가 비밀리에 복천사와 흥천사, 대자암 등에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이야기는 어느새 작가에게 ‘화두’가 됐다. 지난해 8월 정 작가는 마침내 ‘세종과 신미대사의 한글창제 비밀이야기’를 역사소설로 풀어냈다.

 

기막힌 연(緣)은 계속된다. 세종이 신미대사와 첫 인연을 맺은 사찰이자 한글창제의 산실이었던 서울 흥천사의 현 주지가 바로 18년 전 봉정암에서 만났던 정념스님. 태조 이성계가 세운 원찰 흥천사는 우여곡절 끝에 최근 존폐위기까지 맞았지만 3년 전 정념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확 달라졌다.

 

흥천사의 ‘잃어버린 600년’을 복원하는 불사가 경내 곳곳 사찰 안팎에서 진행되고 있다. 정념스님은 “사찰에 깃든 역사와 사상을 문헌상 근거를 토대로 복원해 현대에 알리는 것 역시 불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며 “우리같은 스님들은 행정한다고 화두도 잘 못챙기는데 평생 불교를 화두로 훌륭한 작품을 쓰는 정찬주 작가야말로 정말로 고마운 포교사”라고 말했다.

 

소설은 조선 세종2년(1420) 태종비(妃) 원경왕후의 천도재가 열린 흥천사에 세종이 직접 참석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세종과 신미대사가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훈민정음 창제의 비화가 전개된다. 조선왕조 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왕으로 평가받는 세종. 그가 이룩한 찬란한 업적, 한글창제에 공을 세운 또 한사람이 있었으니 조선 초 범어(산스크리트어) 전문가이자 학승 신미대사다.

 

儒佛 싸움의 진흙탕에서佛이 살아 남긴 ‘우리 글자’

“세종이 창안, 신미대사가 만든 스물여덟자 훈민정음 이야기”

 

지금까지 한글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창제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실제로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은 <세종실록> 어디에도 없다. 소설에 따르면 집현전이 한글창제에 대해 전혀 가담하지 못했다.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조차 “집현전 학사들 중에 어느 누구도 훈민정음의 오묘한 원리를 알지 못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찬주 작가는 신미대사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탄생시켰음을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낱낱이 풀어나간다.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유불(儒佛) 갈등과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결을 비롯해 한글창제를 둘러싼 갈등 양상과 시대상까지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특히 한글창제에 영향을 끼친 불교사상은 특정종교의 한 분파가 아닌 민족정신의 중심사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한국불교가 훈민정음에 나타난 자주정신과 평등사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 작가는 말한다.

 

“세종과 신미대사가 배불숭유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의기투합해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백성이 인간다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이룩하고자 한 뜻이 통했던 까닭이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겼던 두 사람은 우리 글자를 만들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달빛과 같이 만백성의 고통을 어루만져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소설에서 눈에 띄는 또하나의 ‘비밀’은 한글창제 배경에 ‘대장경’이 있었다는 사실. 대마도 정벌 후 조선과 일본은 매년 사신을 왕래시키며 화친외교를 폈고, 숭불로 돌아선 왜국은 조선 절에 있는 ‘대장경’을 달라고 요구했다.

 

유교국가였던 당시 조선에서 세종은 계속되는 왜국 사신의 요구를 물리치고 오직 한 질밖에 없는 해인사 대장경판을 끝끝내 지켜낸 반면, “부처의 가르침이 아무리 빼어난 진리라 한들 한자를 모르는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면서 백성의 눈을 뜨게 해줄 글자의 필요성을 다시한번 깨우쳤던 것.

 

세종의 애민사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우리 글자로 손수 만들어 두루 알린 대목에서도 엿보인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한 신미대사의 노고에 대한 보답도 잊지 않았다.

 

금동 아미타삼존불을 조성해서 신미대사의 주석처였던 속리산 복천사에 시주했으며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라는 존호를 내리라는 유언도 남겼다. 세종이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의미로 지은 ‘우국이세(佑國利世)’는 훈민정음 창제를 염두한 말이다. 실록에 따르면 이러한 승직은 우리나라 시조 이래로 처음 내려진 것이다.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역사의식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 만들어낸 탄탄하고 웅장한 서사와 역사적 현장에 직접 들어온 듯이 생생한 묘사, 인간사에 대한 밀도높은 통창력을 지닌 작품이다.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극찬이 쏟아진 이유다.

 

소설가 조정래는 “작가는 소설의 존재이유를 새롭게 확대시키는 동시에 지적 감동에 취하게 하는 큰일을 해냈다”라고 평했고, 한승원 작가는 “우매한 민초들의 삶을 해방시키고 자유와 문명의 찬란한 꽃을 피우게 한 위대한 자산인 우리 한글이 불교사상의 한 유산이라는 해석은 우리 삶의 미래에 찬란한 이정표를 제시해준다”라고 말했다.

 

정호승 시인도 “분열과 고통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국민을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어떻게 국민을 사랑해야 하는지 불교적 영성의 큰 가르침을 준다”라고 밝혔다.

 

농부의 노고를 글농사로 보답하려고 전남 화순의 이불재 서재에 호미를 걸어둔다는 정 작가는 소설 하나 탈고하면 뭔가 토해낸듯 목이 쉰다고 한다. 지난 9월25일 만난 정 작가는 다 쉬어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다음 작품은 왜란에서 희생된 이름없는 승병들에 관한 이야깁니다.”

 

 

 

 

“범어 전문가 신미대사 훈민정음 프로젝트 숨은 설계사 ”  [주간동아] 2014.09.29

인터뷰 l “한글 탄생의 주역은 신미(信眉)대사” 주장하는 작가 정찬주

 

 

“훈민정음은 절에서 태어났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은 조선 전기 승려 신미(信眉)대사다.”

중견작가 정찬주(52·사진)의 신간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이런 도발적 주장을 담고 있다. 유교국가 조선의 군주 세종이 성리학 경전을 백성에게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집현전 학사들과 더불어 문자를 창제했다는, 한글에 대한 기존 상식을 뿌리부터 흔드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팩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정 작가는 “이 두 가지 내용만큼은 사실(史實)이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믿는 구석’은 ‘조선왕조실록’(실록) 등 각종 사료다.

유난히 세종의 역할 강조

정 작가는 오래전부터 훈민정음 탄생 과정에 관심을 둬왔다고 했다. ‘보슬보슬’ 내리는 봄비와 ‘주룩주룩’ 쏟아지는 소나기, ‘추적추적’ 낙엽을 적시는 가을비를 구분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 모든 소리와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위대함에 탄복해온 것이 첫째 이유다. 그는 “한글은 세계문자올림픽에서 우승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문자다. 이처럼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글을 모국어로 갖고 있는 건 작가로서 크나큰 영광이자 자랑”이라고 했다.

“세종대왕은 어떻게 이런 글자를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줄곧 마음에 품고 있었어요. 그런데 불가(佛家)에서 한글의 원형이 고대 인도어인 범어이며, 세종이 당대 범어 전문가였던 신미대사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창제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죠.”

정 작가의 말이다.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이는 충북 속리산 복천암의 한 선승이었다. 신미대사(1403~1480)가 오랜 시간 주석한 이 절에는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 작가는 이로부터 출발해 실록과 신미대사 속가(俗家)의 족보, 성현의 ‘용재총화’ 등 당대 인물의 문집까지 뒤져가며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를 되짚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게 실록 어디에도 한글 창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집현전 학사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었어요. 왕권국가였다고는 하지만 세종의 다른 업적을 기술하는 부분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 분야에 기여한 신하의 이름이 분명히 남아 있어요. 그러나 한글만큼은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고 할 만큼 세종의 역할이 강조돼 있더군요.”

그렇다면 왕 혼자 이 일을 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성종조의 예조판서 성현이 남긴 문집 ‘용재총화’에서 찾았다. 훈민정음에 대해 ‘범어로 만들어졌다’고 소개한 부분이다. 범어 전문가였던 신미대사의 속가 영산김씨 족보에는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였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정 작가는 “복천암에 내려오는 구전담과 이 둘을 연결 지으니 큰 그림이 그려졌다. ‘신미대사가 범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글 창제에 기여했다. 집현전 학사로 등용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숭유억불’ 정책이 확고하던 조선 초기 사회 분위기상 모든 공을 세종에게 돌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실록을 읽으니 새로운 장면들이 보였다”고 했다.

훈민정음 창제 후 세종이 직접 지은 가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달이 천개의 강에 비치듯 석가모니의 교화가 온 백성에게 드리우는 노래’라는 뜻을 담은 찬불가라는 점, 이후에도 정부가 ‘석보상절(釋譜詳節)’ 등 불교경전 번역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점, 집현전 학사를 위시한 대신들은 훈민정음 사용에 반대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린 점 등이 그것이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대 집현전 학사 대부분은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세종의 구상 자체를 알지 못했다. 이 글자가 세상에 공개된 뒤에는 사용을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정 작가는 이 사실을 확인하며 몇 번이나 무릎을 쳤다.

“훈민정음 창제는 사대주의를 신봉하던 당대 유학자들의 뜻에 맞서는 극비 프로젝트였던 거죠. ‘비밀 결사’ 멤버는 세종과 신미대사, 당시 세자였던 문종과 수양대군, 안평대군, 그리고 정의공주 정도였어요. 이들이 남몰래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있게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지난해 가을부터 이를 줄기 삼아 ‘천강에 비친 달’ 집필에 들어갔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빚어진 유불 갈등과 왕권 대 신권의 대립은 소설에 재미를 더하는 양념으로 삼았다.

임금이 승려에게 최고의 칭호 부여

정 작가는 여러 어려움에도 세종이 끝내 한글을 완성한 것은 백성에 대한 큰 사랑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쉬운 글자를 만들어낸 뒤 불교경전을 번역해 출판한 것도 그 안에 담긴 평등과 애민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정 작가는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아름다운 발명품’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신미대사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실록에는 승려 신미에 대한 기록이 적잖이 남아 있다. 그가 왕실과 밀접한 인연을 맺고 큰 존경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세종실록’에는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신미를 ‘심히 믿고 좋아하여,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무릎 꿇어 앞에서 절하여 예절을 다하여 공양’했다는 내용이 있다. 세조는 신미대사가 충북 복천암으로 낙향하자 그를 만나러 현지에 행차하기까지 했다.

정 작가는 “‘문종실록’에는 세종이 유언으로 신미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 역사에서 임금이 승려에게 준 최고의 칭호다. 유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사회에서 세종이 왜 신미대사를 이렇게까지 사랑했는지, 그가 어떤 부분에서 ‘임금을 보좌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줬다’는 것인지 학자들이 추적하면 분명 한글 창제를 둘러싼 드러나지 않은 역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조선세종태학원 강상원 박사 등이 훈민정음 창제에서 신미대사의 역할을 연구 중이다. 더 많은 이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정 작가의 바람이다.

작가로서 그 물꼬를 튼 데 만족한다는 그는, 이제 오랜 세월 동안 궁구했던 세종대왕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또 한 명의 위인 이순신을 중심인물 삼아 임진왜란을 새롭게 조명하는 대하소설을 쓰는 것이다. ‘천강에 비친 달’을 준비할 때와 마찬가지로 각종 사료를 종횡무진하며 역사의 비밀을 추적 중인 그는 “한평생 작가로 살며 쌓아온 역량을 이 책에 다 쏟아부을 생각이다. 우리 역사에 바치는 당산나무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유교(儒敎) 권력 뒤흔든 건 佛性일까, 性일까 [조선일보] 2014.10.06

[조선시대 재조명 역사소설]


조선시대의 성속(聖俗)을 각각 그린 역사소설이 나란히 나왔다. 불교 작가 정찬주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신미(信眉) 대사를 처음으로 형상화한 소설 '천강에 비친 달'(작가정신)을 냈고, 역사 속의 여성을 다뤄온 작가 김별아는 '성종 실록'의 최대 스캔들을 재조명한 소설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해냄)를 펴냈다. 두 소설의 공통점은 조선의 유교(儒敎) 권력을 비판했다는 것.

정찬주 '천강에 비친 달' - "불교가 한글 창제 기여했다"

정찬주의 소설은 "한글은 절에서 태어났다"는 이색 주장을 내세웠다. 세종 시대의 학승(學僧) 신미 대사가 불교 경전을 기록한 범어(梵語)에서 한글의 제자 원리를 따와 훈민정음 창제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학계에서 제기된 "범어가 한글의 음운체계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에 바탕을 두고 신미 대사의 행적에 허구의 상상력을 가미한 역사추리소설이다.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에 직접 관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세종이 재위 기간 내내 신미 대사를 가까이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문종이 세종의 유언에 따라 신미 대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란 존호를 내렸다고 전한다. '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다.

정찬주는 "세종이 불교의 평등사상에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며 "세종은 유학을 숭상하는 지배층이 한자(漢字) 해독력을 독점해 백성 위에 군림한다고 보고, 백성이 읽을 수 있는 문자를 만들려고 했다"고 풀이했다.

정찬주의 소설은 세종이 신미 대사에게 "자음은 혀와 입술과 이 모양으로, 모음은 천지인(天地人)을 기본으로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상상했다. 신미 대사가 범어를 모방해 획을 더하면서 한글이 완성됐다는 것이다. 작가는 '용재총화'와 '지봉유설'에서 "언문의 글자체는 범자에 의지했다"는 기록을 찾아내 근거를 대기도 했다.

정찬주 소설은 '한글에 불성(佛性)이 담겼다'고 주장한다. 이 소설에서 수양과 안평대군이 한글 창제에 적극 가담하면서 "우리 글자야말로 진흙탕 속에 핀 연꽃"이라고 한 대목도 나온다. '천강에 비친 달'이란 소설 제목은 세종이 지은 찬불가 '월인천강지곡'에서 따왔다.

김별아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 - "性 해방을 즐긴 평등주의자"

김별아의 소설은 이미 여러 차례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진 '어우동' 스캔들을 여성의 시각에서 재조명했다. 어우동은 '종친(宗親)의 처이며, 사족(士族)의 딸로서 음욕을 자행한 것이 창기(娼妓)와 같다'고 실록에 전하는 여인. 김별아는 "어우동은 인간의 욕망에 담긴 비밀을 캐려고 한 탐험가였다"며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어우동이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상대를 가리지 않은 '평등주의자'였고, 시와 음악을 즐긴 '탐미주의자'이기도 했다는 것. "어우동은 특권층에 속했지만 스스로 특권을 버리려고 했다"는 소설이다.

김별아 소설은 어우동의 성장 과정에 주목했다. 어우동의 내면엔 '상처받은 아이'가 늘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갈등이 심한 부모 밑에서 자라 진정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유년기의 기억이 그녀의 삶에서 자유분방한 사랑을 찾도록 했다"는 해석이다. 김별아는 "성종이 신하들과 함께 어우동의 죄를 논하는 자리에서 신하들이 대부분 극형을 주장하진 않았다"면서 "성종이 스스로를 유교적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한 이상(理想) 군주가 되려고 했기에 어우동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했다"고 말했다.

 

 

 

소설 ‘천강에 비친 달’  [불교닷컴] 2014.10.06

세종과 신미 대사의 한글창제 비밀 이야기

천강에 비친 달┃정찬주 지음┃작가정신┃1만5000원

 

 

천 개의 강에 달빛이 비치듯 부처의 가르침이 온 백성에게 드리우길 바랐던 세종과 신미 대사가 이룬 한글 창제의 진실을 푼 책이 출간됐다.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 창제에 얽힌 비밀을 밝힌 작품이다. 조선 초 최고의 범어(산스크리트 어) 전문가이자 학승(學僧)이었던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이었음을 조명하고 있다. 

책은 한글 창제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진 집현전이 사실은 한글 창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조차 “집현전 학사들 중에 어느 누구도 훈민정음의 오묘한 원리를 알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책은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유불 갈등과 왕권과 신권의 대결을 비롯해 한글 창제를 둘러싼 갈등 양상과 시대상을 생생하게 구현해 냈다. 한글 창제에 영향을 끼친 불교 사상은 특정 종교의 한 분파가 아닌 민족정신의 중심 사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한국 불교가 훈민정음에 나타난 자주정신과 평등사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책은 확인시켜 준다.

저자는 “세종과 신미가 배불숭유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의기투합해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백성이 인간다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이룩하고자 한 뜻이 통했던 까닭이었다”고 말한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겼던 두 사람은 우리 글자를 만들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달빛과 같이 만백성의 고통을 어루만져 낫게 해주고 싶었고, 백성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바랐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책은 저자가 미디어붓다에 연재한 것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세종대왕 옆엔 신미대사가 있었다? [씨네21] 2014.10.06



한글이 집현전이 아닌 절에서 태어났다면? 정찬주 작가의 신작 <천강에 비친 달>(작가정신 펴냄)은 승려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중심에 두고 전개된다. 소설은 신미대사의 출가에서부터 그가 세종을 만나 한글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조선왕조실록>과 <지봉유설> 등을 바탕으로 한 꼼꼼한 고증은 내용에 깊이를 더한다. 승려가 한글 창제에 참여하게 된 과정과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석이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펼쳐보자.

 

 

 

 

천강에 비친 달(정찬주 저/작가정신 간) [경기일보] 2014.10.07

 

 

조선왕조,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세종대왕. 그의 업적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꼽는다면 백중의 백은 단연 ‘한글창제’를 꼽는다. 당대는 물론이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민의 역사와 전통, 정서와 의식이 한글이라는 정신 유산을 통해 발현됐다. 하지만 세종 이외, 한글창제의 주역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한사람이 있다. 바로, ‘신미 대사’다.

당대 최고의 범어(梵語) 전문가이자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미 대사는, 그러나 창제에 있어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여길 수 있으나 이는 실록과 원각선종석보, 용재총화 등 다양한 사료에 기록된 ‘팩트’다. 이 소설은 사실에 근거해 기존 우리가 알고 있던 한글 창제에 대한 상식을 붕괴한다.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역사의식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탄탄하고 웅장한 역사적 서사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값 1만5천원.

 

 

 

 

한글 의례화, 이제 보급에 힘쓸 때-제568돌 한글날을 돌아보며 [불교신문] 2014.10.08

 

 

9일은 제568돌 한글날이었다. 특히 이번 한글날은 22년 만에 다시 법정공휴일이 된 첫 해라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한글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대표한다.

 

전 세계 수많은 국가와 민족이 있지만 자기만의 문자를 갖고 있는 민족은 드물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정부의 판단 아래 20여년이나 단순 기념일로 묻혀왔던 한글날이 국경일로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참으로 반갑다.

 

올해 한글날이 더욱 의미가 깊은 이유는 한글 창제에 당시 불교계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됐기 때문이다. 정찬주 소설가가 최근 펴낸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신미대사의 도움으로 한글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떠한 내용도 없지만 그만큼 억불숭유사상이 지배했던 시대에 스님의 활약상이 철저히 숨겨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이야기라 설득력이 있다. 더불어 종단 차원에서 전개하고 있는 한글 의례화 사업과 맞물려 이번 한글날은 기념비적인 날로 기억할만하다.

 

“대장경을 무지렁이 백성들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우리 글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원력에서 한글 창제가 시작됐음에도 최근까지 한국불교계는 한자로 써진 의례대로 거행해왔다. 많은 불자들은 한자로 된 의례를 하면서 외기에만 여념이 없었지 실제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던 차에 ‘반야심경’으로 태동된 한글 의례화가 늦었지만 계속 진행되고 있어 다행이라고 하겠다.

 

종단 차원에서 한글 의례화를 지속하며 보급에 노력하고 있어 종단 행사에서 한글 반야심경 등이 봉독되는 것은 이제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아직도 예전 의례대로 거행되는 경우가 많다. 재가불자 단체에서조차 한문 반야심경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시작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이 법을 설하라”고 말씀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듯이 한글 의례화는 분명한 당위성을 갖고 있으므로 만들기에만 만족하지 말고 제대로 보급하는데도 힘을 쏟아야 할 때다.

 

불자가 가장 많이 접하는 의례를 한글화하는 일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 사회 곳곳에 전파하고 울릴 수 있는 좋은 방편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신미대사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룩하고자 한 불국토 세상을 위해 제시한 우리글에 대한 원력을 후학들은 제대로 알고 선양해야 할 사명이 있다.

 

 

 

 

천강에 비친 달(정찬주 지음) [대전일보] 2014.10.10

 

 

조선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대왕. 한글 창제는 그의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단연코 으뜸으로 여겨지며 세계가 인정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 했다. 책은 조선 초 최고의 범어(산스크리트어) 전문가이자 학승(學僧)인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임을 그린 작품이다. 저자는 정설로 굳어진 '세종과 집현전의 한글 창제설'에 의문을 제시함과 동시에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유교와 불교, 왕권과 신권의 대립 등 한글 창제를 둘러싼 갈등과 시대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작가정신·328쪽·1만5000

 

 

 

 

훈민정음은 세종과 신미 대사의 합작품이다? [세계일보] 2014.10.13

‘천강에 비친 달-세종과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 비밀 이야기’/정찬주 장편소설/작가정신/1만5000원

 

 

‘한글(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창제했다’가 그동안의 정설이다. 여기에 정의공주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집현전 학사들은 도움은커녕 되레 반대만 일삼았다는 것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한글창제와 관련한 학설이 하나 더 추가하게 됐다. 한글은 조선 초 최고의 범어(梵語·산스크리트 어) 전문가이자 학승이었던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80)가 핵심적으로 관여하였다는 주장이다.

‘한글=세종’으로 등식화된 정보만 갖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겐 생뚱맞을 수 있다. 하지만 근거를 하나하나 들여다 보면 일리가 있다. 아니,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주장이 되레 맞는 말 같다.

데뷔 이후 줄기차게 불교문학을 개척해온 중견작가 정찬주(61)가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이라고 주장하는 장편 ‘천강에 비친 달-세종과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 비밀 이야기’(작가정신)을 펴냈다. 충북 속리산에 똬리를 튼 고찰 복천암(福泉庵)에 전해오는 ‘신미 대사 한글 창제설’을 소설적 허구를 곁들여 재구성한 것이다.

복천암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미는 속성(俗姓)이 영산김씨(永山金氏)인데, 영산김씨 족보를 추적해보면 ‘집현원학사(集賢院學士)’로 ‘득총어세종(得寵於世宗)’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미가 집현전 학사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다.

책은 세종 즉위 2년인 1420년부터 세종이 승하한 1450년까지 30년에 걸쳐 우리 글자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펼쳐내면서, 한글 창제를 둘러싼 갈등 양상과 시대상을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다.

“세종 2년 8월 6일. 원경왕후의 4재를 기리는 천도재에서 세종과 신미가 만난다. 그날 신미는 스승 함허의 지시에 따라 염불을 외우게 되는데, 맑고 청아한 염불 소리는 당시 어머니 원경왕후를 떠올리며 슬픔에 잠겨 있던 세종을 위로해준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세종은 이른바 ‘대장경 외교’에 있어서 지혜를 구하기 위해 함허와 신미를 은밀히 궁으로 불러들이는데, 이때 신미는 모든 백성이 ‘대장경’이나 유가의 경전을 볼 수 있도록 한자가 아닌 우리 글자를 만들어달라고 세종에게 제안한다. 이후 세종과 신미는 비밀리에 우리 글자를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책은 이처럼 전(前) 왕조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지배 질서의 창출을 위해 숭유억불을 정책적 이념으로 내세우던 조정 대신들과 세종의 팽팽한 대립, 왕명에 따라 작업을 수행했지만 반대 세력들의 계략 속에 생명의 위협을 당했던 신미 대사, 한글 창제를 통해 명으로부터 자주성을 수립하고 백성을 고통 속에서 구제하고자 했던 세종의 민본사상, 또한 세종에게 자비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애민사상을 설파했던 신미의 모습 등이 일필휘지로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더불어 우리 글자를 향한 도정의 질곡 마디마디에 새겨진 불교적 사유는 마치 운수납자의 행보를 따라하듯 구름같이 떠돌고 물같이 흐르며 작가 특유의 담백하고도 유연한 필치로 펼쳐진다.

한글은 절에서 태어났다!

“‘대장경’을 무지렁이 백성들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우리 글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바로 세종과 신미가 꿈꾸는 조선의 글자였다.”

조선 왕조 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왕으로 평가받는 세종. 그리고 그가 이룩한 찬란한 업적, 한글 창제. 하지만 한글 창제에 세종 외에 공을 세운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지울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고승’ 신미 대사다.

올해 한글날에 맞춰 출간한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 창제에 얽힌 비밀을 밝힌 작품으로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이었음을 조명하고 있다.

“세종이 즉위한 지 19년(1437)이 되는 초가을, 신미는 세종이 알려준 글자 원리를 가지고 범자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加劃)을 해가며 글자를 연구한다. 세종 20년(1438) 신미의 나이 36세가 되던 해, 세종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도록 신미를 집현전 학사로 제수하지만 유신들의 질시와 끈질긴 모함으로 신미는 집현전을 떠나 정음청(正音廳)이라는 임시 관청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신미는 사간원의 음모로 자객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 하는 등 시련을 겪게 된다. 마침내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모아놓고 훈민정음 창제를 공개한다. 세종의 초인적인 인내와 단호한 결단, 신미의 목숨을 노리는 위협 속에서 창제된 훈민정음이었다.”

지금까지 한글은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창제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실제로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기록은 ‘세종왕조실록’ 어디에도 없다. 소설에 따르면 집현전이 사실은 한글 창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며, 훈민정음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조차 “집현전 학사들 중에 어느 누구도 훈민정음의 오묘한 원리를 알지 못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는 세종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것일까?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8년 전에 이미 훈민정음 언해본 ‘원각선종석보’가 발간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세종은 왜 문종에게 ‘우국이세(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란 존호를 신미 대사에게 내리도록 유언했을까?

정찬주 작가는 이 모든 의문들이 “신미 대사의 훈민정음 창제라는 공을 빼버리면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는 소설을 통해 범어를 통달한 신미 대사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탄생시켰음을 보여준다. 소설은 수수께끼로 가득 찬 한글 창제의 진실을 야사가 아닌 정사, 즉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낱낱이 풀어나간다. 이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한 팩션의 재미를 넘어, 역사적 진실에 새롭게 눈뜨게 하는 놀라운 지적 감동을 선사해준다.

소설가 조정래는 “‘천강에 비친 달’은 소설적 허구가 아닌 역사적 진실의 올곧은 복원이다”라고 추천사에서 밝혔다. 그는 정찬주 작가가 “소설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확대시키는 동시에 지적 감동에 취하는 큰일을 해냈다”고 평하고 있다.

‘천강에 비친 달’은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유불(儒彿) 갈등과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결을 비롯해 한글 창제를 둘러싼 갈등 양상과 시대상을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특히 한글 창제에 영향을 끼친 불교 사상은 특정 종교의 한 분파가 아닌 민족정신의 중심 사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한국 불교가 훈민정음에 나타난 자주정신과 평등사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과 신미가 배불숭유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의기투합해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백성이 인간다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이룩하고자 한 뜻이 통했던 까닭이었다.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가엾이 여겼던 두 사람은 우리 글자를 만들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달빛과 같이 만백성의 고통을 어루만져 낫게 해주고 싶었고, 백성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그들이 품었던 민본 애민사상의 대의(大意)는 오늘날 우리들이 한마음으로 바라는 서원(誓願)이기도 하다. 600년 전에 품었던 세종과 신미의 염원이 이토록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 국가의 정통성과 위신을 바로 세우는 한글을 다시금 환하게 비춰줄 횃불 하나가 밝았다. ‘천강에 비친 달’이 밝혀주는 한글 창제의 진실을 통해 혼탁한 시대에 역사의 주체로서 다시금 삶을 밀고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신미 대사의 이름은 왜 감췄나

궁금해지는 게 있다. 정사는 왜 신미를 기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세종이 신미를 살리는 일은 신미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었다.”

조선 왕조는 건국이념으로서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정책적으로 표방했는데, 따라서 세종은 유학을 숭상하여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는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훈민정음을 드러내놓고 창제할 수 없었다. 유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은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의 도움을 받아 끝끝내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때 세종을 도운,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신미 대사였다.

‘천강에 비친 달’은 당대 최고의 범어 전문가이자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임을 밝힌 작품이다. 기존에 훈민정음 창제의 비화를 다룬 소설이 몇몇 출간되어 있지만, 한글 창제의 주역으로 ‘신미 대사’라는 새로운 인물을 내세운 소설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가는 정설로 굳어진 ‘세종과 집현전의 한글 창제설’이 지닌 의문점을 제기하고, ‘조선왕조실록’ ‘사리영응기’ 등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그동안 학계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신미 대사라는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천강에 비친 달’은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역사의식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 만들어낸 탄탄하고 웅장한 서사와 역사적 현장에 직접 들어온 듯이 생생한 묘사, 인간사에 대한 밀도 높은 통찰력을 지닌 작품이다. 이를 바탕으로 문학적 ‘허구’를 넘어 역사적 진실의 올곧은 ‘복원’으로 자리 매김하면서 소설이라는 장르의 지평을 새롭게 확대시키고 있다.

소설에서 신미는 세종이 일러준 상형(象形)의 바탕, 즉 자음은 혀 모양, 입술 모양, 이 모양을 바탕으로, 모음은 천지인을 바탕으로 하여 글자꼴을 만들고, 이 자모에 범자의 자음과 모음처럼 가획과 합용, 교합을 통해 우리 글자인 정음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신미 대사뿐 아니라 우리 글자를 만들려는 일념 하나로 신미 대사,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일부 사헌부 대신들과 집현전 학사들이 협력하고 조력하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처럼 소설은 무지렁이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성, 국가의 정통성과 위신을 바로 세우는 우리 글자를 만들고자 했던 세종과 신미 대사를 비롯한 역사적 군상들을 생동감 있게 재현해내고, 그들이 지닌 인간적 고뇌와 방황을 시대적 대의(大意)와 종교적 성찰로 승화하여 묵직한 울림과 감동을 던져준다.

◆“중생을 위해 정진하는 길, 그것밖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유교 국가였던 당시의 조선에서 세종은 계속되는 왜국 사신의 요구를 물리치고 오직 한 질밖에 없는 해인사 ‘대장경판’을 끝끝내 지켜냈으며, 태조가 발원했던 흥국사 사리전을 중수하고 궁중의 내불당을 인왕산 산자락에 대규모로 신축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우리 글자로 손수 작곡하기도 했다. ‘월인천강지곡’은 글자 그대로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듯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가 온 백성에게 드리우는 노래라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두루 미쳐 온백성이 불교에 귀의하는 마음이 솟구치기를 바랐던 세종의 애민사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복천사로 내려가 평생을 은둔하며 지냈던 혜각존자 신미 대사. 그림자나 연못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려 하지 않는 달빛처럼, 시비와 집착을 초월하여 오로지 우리 글자에만 매진했던 신미 대사가 세종과 한마음으로 바랐던 한 가지는 중생을 위해 정진하는 길, 그것뿐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분열과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욱 각별하게 와 닿는다.

소설가 한승원은 이 소설에 대해 “한문 문화에 억눌려 있던 우매한 민초들의 삶을 해방시키고 자유와 문명의 찬란한 꽃을 피우게 한 위대한 자산인 우리 한글이 불교 사상의 한 유산이라는 해석은 우리 삶의 미래에 찬란한 이정표를 제시해준다”고 평했다.

세종과 신미가 함께 이룬 한글 창제에는 자유와 문명의 꽃을 피워 새 시대를 열어나가려는 열망과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한글 창제에 담긴 한국 불교의 자주정신과 평등사상을 통해 그동안 잊고 지냈던 민족적 자긍심과 긍지를 확인하고, 우리 삶의 근간을 보듬고 살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정호승 시인도 추천사에서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 창제의 정설을 역사적 근거에 의해 뒤집는 놀라는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이 허구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등불이라면 이 소설이야말로 한글 창제의 진실을 밝히는 영원한 횃불이다. 분열과 고통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국민을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어떻게 국민을 사랑해야 하는지 불교적 영성의 큰 가르침을 준다”고 상찬했다.

 

 

 

천강에 비친 달 [아시아경제] 2014.10.14

 

 

지난 9일 한글날에 맞춰 출간된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정설로 굳어진 '세종과 집현전의 한글 창제설'이 지닌 의문점을 제기하고, '조선왕조실록', '사리영응기' 등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그동안 학계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신미 대사'라는 인물을 새롭게 내세우고 있다. 이 소설은 조선 초 최고의 범어(산스크리트 어) 전문가이자 학승(學僧)이었던 신미 대사를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으로 조명하고 있다. 우리 글자를 만들려는 일념 하나로, 신미 대사와 함께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일부 사헌부 대신들과 집현전 학사들이 협력하고 조력하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정찬주 지음/작가정신/1만5000원

 

 

 

한글 창제의 주역은 스님? [북데일리/CACTUS] 2014.10.21

정찬주의 <천강에 비친 달>

 

 

‘세종은 신미에게 자음은 혀의 모양과 입술의 모양과 이 모양으로, 모음은 천지인(天地人)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보라고 상형(象形)의 바탕을 일렀던 것이다. 이를테면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소리는 그때의 혀 모양을 본떠 ‘ㄱ’으로, 혀가 윗니 잇몸에 닿아서 나는 소리는 그때의 혀 모양을 본떠 ‘ㄴ’으로, 입에서 나는 소리는 입 모양을 본떠 ‘ㅁ’으로, 이에서 나는 소리는 이 모양을 본떠 ‘ㅅ’으로,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는 목구멍 모양을 본떠 ‘ㅇ’으로 만들라고 했으며 모음 글자 모양은 삼재 중에 하늘은 둥그니까 ‘·’ 이고 땅은 평평하니까 ‘_’이고, 사람은 서 있으니까 ‘ㅣ’로 해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218쪽)

 

 세종대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알고 있는 한글은 세계가 인증한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글자다. 만약, 한글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어떤 글자로 이 글을 쓰고 있을까? 상상하기 조차 싫다. 그럼에도 한글에 대한 특별한 애정은 없었다. 세종대왕, 집현전, 훈민정음 정도로만 기억할 뿐이다. 정찬주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을 통해 다시금 한글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글의 시작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다. 그러나 진짜 한글을 만든 주역은 따로 있었다. 당시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정책 때문에 지워져야만 했던 이름, 바로 신미 대사였다. 일부 사찰의 문란한 행태로 인해 세종은 드러내놓고 불심을 표현하지 못했다. 소설은 1420년부터 1450년까지 30년에 이어 한글을 만든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신미와 세종의 만남부터, 우리 글자의 필요성과 창제 과정과 반포 과정에 따른 반대 세력의 모함까지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전하, 모든 백성이 『대장경』이나 유가의 경전을 볼 수 있도록 한자가 아닌 우리 글자를 만드시옵소서.”

 신미의 제안에 세종은 잠시 침묵했다. 신미는 숨을 죽이며 세종의 기색을 살폈다. 세종의 입가에는 잠깐 미소가 어렸다.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찬성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여러 의견들을 들어가면서 심사숙고한 뒤 결정하겠다는 신중함이 묻어 있는 얼굴이었다. (80쪽)

 

 세종은 신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신미가 한글을 만드는 일을 비공개로 진행해야 했다. 세자, 수양, 안평, 정의공주의 힘을 빌렸고 사헌부 대신들이 보안을 지켰다. 내 나라 글자를 만드는 일이 이처럼 위험한 일이었다. 곳곳에 신미를 노리는 자객이 있었다. 훈민정음을 세상에 알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유학을 고집하는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설은 픽션이지만 「세종실록」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함께 들려준다.

 

 난무하는 은어, 비어, 속어로 한글이 파괴되는 요즘 한글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소설이다. 백성의 무지에서 깨어나길 바랐던 세종의 마음을 생각한다. 한글의 고유성과 우수성은 말할 것도 없이 말이다. 한글의 소중함과 더불어 역사를 함께 배울 수 있으니 청소년에게도 좋겠다.

 

 

 

 

"한글은 절에서 태어났다!" [부산일보] 2014.10.25

천강에 비친 달/ 정찬주 지음/작가정신/328쪽/1만 5천 원.  

 

'그 깊은 연원과 정밀한 뜻이 묘연하여 신 등은 (정음을 창제함에 있어서) 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속 구절을 찾아낸 소설가 정찬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정인지가 왜 이렇게 썼을까? 주군인 세종에게 모든 공을 돌리기 위해서? 겸양의 표현으로?' 정찬주의 머리에는 18년 전 속리산 복천암에서 월성 스님에게 듣고 내내 품고 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세종의 명을 받은 신미 대사가 비밀리에 복천사와 흥천사, 대자암 등에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바로 그 이야기다. 
 
정찬주의 신작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에는 '한글이 절에서 태어났다'는 도발적 내용이 담겼다. 세종을 도와 집현적 학사들이 창제했다는 한글에 대한 지식을 뒤흔드는 주장이다. 정찬주는 실록과 신미 대사와 동시대를 살았던 성현의 저서 '용재총화', 신미 대사 속가의 족보인 '영산 김씨 세보' 등 사료들을 바탕으로 한글 창제 당시의 시대상을 면밀히 알아야 했다.

세종의 창제 과정 추적한 팩션  - 신미 대사 큰 역할 가능성에 주목 

그는 "조사할수록 범어(산스크리트어)에 능통한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에 큰 역할을 했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졌다. 다만 그를 보호하기 위해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전남 화순 쌍봉사 옆 그의 거처인 '이불재'에서 집필에 들어가 1년여 만에 나온 소설이 바로 '천강에 비친 달'이다. 

소설은 세종과 신미 대사를 중심으로 한글이 창제되는 과정을 면밀히 추적한 팩션이다. 세종 즉위 2년인 1420년부터 세종이 승하한 1450년까지 30년에 걸쳐 한글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펼쳐내면서 유·불 갈등과 시대상까지 생생히 구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당대 최고의 범어 전문가이자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역 임을 밝혀낸다. 

오히려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이 창제될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그렸다. 신미 대사뿐 아니라 세종, 세자(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일부 사헌부 대신, 집현전 학자들이 서로 협력하고 조력하며 한글을 만들어낸 과정을 감동적으로 엮어낸다. 작가는 한글 창제를 유불 갈등, 왕권과 신권 대립의 결과물이라고 봤기 때문. 작가는 "이 부분은 학술적으로 더 연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글 창제 배경에 대장경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소설에서는 세종 당시 대장경을 달라고 한 왜국의 요청을 거부하고,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까지 대장경을 볼 수 있도록 한글을 만든 것으로 묘사된다.  

세종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나라의 왕이었다. 억불 군주였을 것 같지만 작가는 세종의 진면목은 다르다고 본다. 사실은 해인사 대장경판을 끝끝내 지키고, 최초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한글로 손수 작곡하기도 하는 등 오히려 불교를 높이 숭상한 왕이라는 것이다. 한승원 소설가는 추천사에서 "한글이 불교 사상의 한 유산이라는 해석은 우리 삶의 미래에 찬란한 이정표를 제시해 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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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10.26 14:17

    첫댓글 "한글 절에서 나왔다."
    정찬주작가가 신미대사를 세상에 알린 공은 있으나 가림토의 존재를 말하지않은 것이 정말 안타깝네요.
    가림토가 없이 훈민정음이 있을 수 있을까요? 기왕에 소설을 쓸거라면 가림토를 언급했으면 더 큰 파급력이 있었을 것인데 싶네요.
    혹시 '환빠'의 낙인이 두려웠던걸까요? 아쉽습니다.

  • 14.10.27 07:33

    그러네요! 당시의(세종) 식자는 불교인 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불교인은 오히려 한문에 능했지요! 그러나 소리글 이라고 비웃은 사람들도 불교인들 이였기에 절에서 태어났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제의 한글은 세종(왕)이 주도 했기에 가능 했던 것이지요! 물론 가림토나 식자들이 한자를 뜻글자 라고 우긴 사람들도 불교인 이였고요! 어떠하거나 세종이 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주도 한것은 사실이지요! 이두체의 한자는 신라 향가에서도 볼수 있으니 ....! 옜 가림토의 현대화는 아무래도 세종이 한 것이지요! 도움을 준사람들이 당시의 학자들은 승려 였다는 것이지요! 역사는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지만 계기

  • 14.10.27 07:49

    @미리내은하 는 한사람일 수 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글의 순서도 한문과는 다른체제 이지요! 이두공부는 고등학교때 배운 것인데....! 또한 내또래의 사람들은 한글로만 배우다 중학교 다닐때 한자도 배우고 그러다 국민학교에서도 한자와 혼용하여 배우기도 하고 .....한글전용은 그리 먼것도 아니지요! 하긴 중 고등학교땐 한자 3000자는 누구든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100)가 나오지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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