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를 보며 필이 팍 꽂힐 때는 “아싸, 감 잡았어!”, 말짱 도루묵일 때는 ‘감감무소식’이다. 도대체 ‘감’이 없는 사람들에게 개그맨 전유성 선생은 이미 오래전에 재치 있게 “청도군에 오시면 ‘감’ 사드려요”라고 일갈했다. 이 감이든 저 감이든, 땡감이든 영감이든 영감靈感이든 다 좋다. 감 잡았으니 시枾를 찍고 카메라로 한 편의 시詩를 쓴다.
늦가을이면 감나무에 필이 꽂혀 전국의 오지마을을 돌아다녔다. 4년 전 이맘때 새벽마다 달려가 찍은 ‘감나무 안개’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수몰지역의 ‘마지막 감나무’.
감나무는 물속에서 살 수 없으니 지구상의 처음이자 마지막 감나무인 셈이다. 이미 두 그루는 죽고 나머지 한 그루가 온힘을 다해 마지막 감들을 매달았다. 새봄이 올 때까지 지켜보았지만 끝끝내 연초록 잎 하나 내밀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별나무’를 찍기 시작했다. 지난해 늦가을에 ‘별 감나무’ 사진의 방점을 찍고 나름대로 감나무를 졸업했다고 생각했지만, 이 무슨 다정도 병이란 말인가. 달이 차오르기 전에 ‘밤손님’이 되어 이 마을 저 마을 어슬렁거렸다. 아직 성에 안 차는데 어쩌자고 자꾸 달이 밝아온다. 한 달 뒤에 다시 별이 밝아오면 홍시마저 얼다가 다 떨어지게 생겼다. 내년을 기약하며 인증 샷을 남겼다. 그리하여 낮에도 감 잡고 밤에도 감 잡았다.
살다 보면 때로는 누군가의 배경이 되고 싶고, 또 어떤 때는 배후가 되고 싶다. 감나무를 감싸는 안개나 별빛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미와 추, 선과 악의 그 경계를 사이에 두고 배경과 배후가 저울질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저 배경으로 존재하는 일이 더 위선적이거나 오만함일 수도 있고, 배후가 되고픈 것이 더 진솔한 심사일 수도 있다. 등 뒤의 사람이 비수를 꽂을 수도 있듯이, 뒤에서 가만히 껴안는 ‘백허그’처럼 무장해제의 따스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안개는 늦가을의 배경인가 배후인가, 별빛은 감나무의 배경인가 배후인가. 서로 배경이 되어도 좋고 배후가 되어도 좋은 그런 사람도 있고 그런 날들도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지리산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깊은 산중에도 웬만하면 인터넷이 됩니다. 세상 만물이 하나의 그물로 짜여 있다는 연기론의 인드라망網이 현실화한 셈이지요. 핸드폰과 더불어 인터넷은 이제 서로의 존재를 비춰보는 거울 같은 것. 하지만 유선 무선의 정보망이 제아무리 좋아도 자연의 인터넷만큼이야 하겠습니까. 때가 되면 야생화들은 스팸 메일 없이도 일제히 피어납니다.
안부 메일을 못 받아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입니다. 이따금 덕유산 소쩍새가 ‘번개’를 치면 지리산 소쩍이 그 소리를 받아 ‘야, 우리도 한번 뭉치자’ 백운산 소쩍이에게 전하고요. 자연의 인터넷은 자살 사이트가 없는 정보화 사회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지난밤에는 피아골의 단풍나무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나, 절정이야, 혁명도 없이 희망도 없이 내 몸은 곧 절정이야’. 답장을 보내려고 자판을 칠 때마다 잎잎이 푸르던 날들이 붉게 물들고, 엔터키를 칠 때마다 성질 급한 낙엽들이 뛰어내립니다. 밤새 단풍나무 벗 삼아 게임 고스톱을 치다 보면 ‘야, 낙장불입이야 낙장불입!’ 다투기도 하지요. 때 이른 단풍잎 하나 주우려다 생각해 보니, 인생이야말로 정말 낙장불입입니다.”
하동 옥종 딸기하우스에서 미리 본 봄
그렇다. 인생은 가지 않은 길을 돌아보며 한탄하기보다는 일수불퇴, 낙장불입의 자세로 일로매진하는 것이다. 살다가 겨울이 오면 겨울을 제대로 맞이하고, 봄이 오면 또 봄을 정면으로 맞아야 한다. 피하고 외면하다 보면 어느새 남은 생은 안타깝게도 날마다 비껴가기 마련이다.
딸기로 유명한 하동군 옥종면에서 한겨울에 미리 봄을 사는 사람들을 보았다. 미리 봄을 맞이하니 날마다 봄날이 아닌가. 옥종면 법대마을을 다녀와서 이런 메모를 남겼다.
‘하동군 옥종면 딸기 하우스에서 보았다. 늦가을에 미리 봄꽃을 피우는 마을, 딸기꽃이 피니 한겨울에도 벌이 날고, 눈밭에 붉은 딸기가 익어가는 무릉도원을. 사람들아, 만화방창 봄날의 꽃이 피어도 마음은 꽁꽁 찬바람 부는 사람들아. 만산홍엽 단풍이 물들기도 전에 온몸 벌벌 떨며 겨울 나목이 되는 사람들아. 보아라, 미리 봄을 살아 날마다 봄날인 옥종사람들을 보아라. 더불어 꽃밭을 가꾸며 저마다 사철 봄꽃으로 피어나는 법대마을 사람들을.’
비상하는 흰 빛의 자작나무숲
![[연재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山房閑談<63>]](http://san.chosun.com/site/data/img_dir/2017/12/05/2017120501965_1.jpg)
그나저나 이번 가을과 겨울은 너무나 바쁜 날들의 연속이다. 가히 살인적(?)인 일정이다. 지리산-강원도-경남 산청-전남 광양-목포-비금도-전남 구례-경남 고성-경북 상주를 다녀왔다. 강원도 태백산국립공원으로 달려가 시민대학 저녁 강연을 마치자마자 다시 밤을 도와 지리산으로 돌아와 국립공원 50주년 토크콘서트, 지리산행복학교 1박2일, 다시 목포 북항에서 배를 타고 비금도 2박3일, 전남 구례고와 경남 고성의 소가야 강연 등 9박10일 동안의 강행군에 이어 광주-경남 남해-전남 해남 등 6박7일 일정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5박6일 동안 서산대사의 옛길을 따라 해남 땅 곳곳을 둘러봐야한다.
고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도 만날 것이다. 미황사 자락에서 착한 눈망울만 껌벅이며 바보처럼, 성자처럼 헤벌쭉 웃기만 하던 고 김태정 시인을 오래 오래 생각할 것이다. 그 이후는 접어두고 일단 여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모터사이클 시동을 걸었다. 거침없이 달리자 흑마야, 한달음에 천리 길을!
머나먼 길 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늦가을의 자작나무숲이었다. 지정 1주년 된 태백산국립공원 다녀오는 길에 한강 발원지 인근의 자작나무숲에 잠시 들렀다. 지난여름에 자작나무숲을 찾아 헤매다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1주일 동안 야영하면서 ‘별나무 - 자작나무숲’을 찍었다. 지난봄에도 연푸른 잎사귀가 나올 때 가봤다.
왕복 2천리 길, 마침내 자작나무숲도 늦가을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동안 밤의 자작나무숲만 찍다가 ‘틸팅 샷’으로 가을의 숲을 찍으니 느낌이 좋았다. 비상하는 흰빛의 나무들 속으로 키 낮은 단풍잎들이 환하게 배후를 자처했다. 늦가을 숲을 보며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자작나무숲으로 가야 할 날을 꿈꾸었다. 바이칼 알혼섬에서 보았던 자작나무와 황금소나무들, 민족시원의 북방정서, 그 영적 기운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연재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山房閑談<63>]](http://san.chosun.com/site/data/img_dir/2017/12/05/2017120501965_2.jpg)
강원도에서 돌아와 전남 신안군 비금도를 다녀왔다. 풍랑주의보가 내려 목포 북항에서 잠시 발길이 묶였다가 어렵게 다녀왔다. 그런데 마음이 무겁다. 비금도에서 소설가이자 아동문학가인 김이구 형의 부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착하고 배려심 많은 이들이 먼저 간다. 김이구 형은 언제나 앞보다는 뒤에서 더 환한 이 세상의 소금이었다. 결국 장례식장을 찾아가 큰 절 두 번 못 올리고 늘 수줍은 듯 환하게 웃던 얼굴을 떠올렸다. 먹먹하고 막막하니 산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해 불가해 날들의 연속이다. 먼 곳에서나마 삼가 고인의 병복을 빌고 또 빌었다.
목포 북항에서 바이크를 타고 밤길을 달려 겨우 집에 돌아오니 소금 한 포대가 택배로 먼저 도착해 있다. 비금도의 장미희씨, 페이스북 친구인 서울동부구치소 장선숙 교도관의 언니가 비금도 방문 선물로 보내온 천일염이었다. KTV ‘마을의 귀환’ 방송촬영은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있는 우산마을에서 했는데, 면소재지에 사는 장 교도관의 언니가 섬사람들의 인심이라며 기어이 ‘소금별’ 두 포대를 선물한 것이다.
지난해 성동구치소 강연의 인연이 비금도까지 이어진 것이다. 장 교도관의 언니 부부 장미희-윤종선씨 부부는 천일염의 본고장인 비금도에서 염전을 일구고 함초를 재배하고 있다. 20kg 한 포대에 겨우 2만 원이니 한여름 뙤약볕의 염전에서 쏟은 땀방울에 비하면 천일염이 너무나 싸다. 우리 김장에는 역시 우리 소금이 최고일 수밖에 없다.
![[연재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山房閑談<63>]](http://san.chosun.com/site/data/img_dir/2017/12/05/2017120501965_3.jpg)
우리나라 곳곳에 명사십리가 있다. 전북 고창 장호리, 군산 선유도, 전남 완도 신지도 등에도 있는데 이곳들의 명사십리는 ‘우는 모래’, 즉 명사鳴砂다. 이에 비해 북한 천연기념물 제193호인 강원도 원산시 용천리와 비금도의 명사십리는 밝을 명明자 명사明砂를 쓴다. 하지만 ‘고운 모래가 우는 것’이니 명사鳴砂나 명사明砂가 혼재되어도 무방한 듯하다.
명사십리 너른 백사장의 모래알이 아주 잘디잘아 바닷물이 스미면 더 단단해진다. 발자국이 잘 찍히지 않을 정도로 다져지니 백령도처럼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하다. 마을주민들은 좁은 콘크리트 해안선 도로를 피해 비금도 명사십리 백사장을 질주한다. 일반인들 차량도 통제하지는 않는다. 다시 파도가 밀려오면 바퀴자국들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쓰레기 등 오염물질만 버리지 않는다면 승차감 최고인 드라이빙의 맛을 제대로 속 시원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물론 너무 많은 차량들이 드나든다면 큰 문제가 되겠지만.
노을 지는 명사십리 백사장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유니 소금사막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달이 지고 소금별들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너른 백사장,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때로는 무한긍정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그렇지만 방송 멘트는 당혹스럽다. 노래 가사와 시가 다르듯이 시와 방송 멘트 또한 결이 다르다. ‘마을의 귀환’ 촬영 마지막에 즉흥적으로 방송 멘트를 남겨야 하니 그때마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그래도 마무리 멘트를 이렇게 남겼다.
‘예고도 없이 풍랑주의보가 내리면 섬은 비로소 섬다워진다. 그리운 사람은 더 그리워지고 명사십리 백사장의 노을이 더 붉다. 천일염 목마른 염전마다 지수화풍의 하얀 꽃이 피더니 알알이 빛나는 소금별들이 떠오른다. 스스로 갇힌 아파트 속의 섬사람들, 날마다 탈수 탈진되는 도시인을 찾아간다. 가가호호 우체국 택배로 비금도 천일염이 방문하면 김장김치 시금치된장국에 소금별들이 빛난다.’
그렇다. 별은 하늘 위에서만 빛나는 게 아니다. 땅 위에서는 온갖 야생화로 피어나고, 염전에서는 태양과 바람과 물이 만나 소금꽃, 소금별로 떠오른다. 먼저 죽은 이들도 저마다 별빛으로 빛나고, 살아남은 이 땅의 사람들도 걸어다니는 별들이 아닌가.
광주 발산마을에서 난생 처음 들어본 ‘가마솥데이’
![[연재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山房閑談<63>]](http://san.chosun.com/site/data/img_dir/2017/12/05/2017120501965_4.jpg)
비금도에서 나와 며칠 뒤 남해군 삼동면 갈현마을에서 만난 할머니 또한 오래된 별이었다. 올해 아흔다섯 살 이덕순 할머니, 2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과 비슷한 나이였다. 치매도 없이 잘 보고, 잘 듣고, 잘 드시며 덥석 내 두 손을 잡으며 허허 웃었다.
저승꽃마저 이토록 환하다니! 살아 그대로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저녁상 물리시고 옛노래도 몇 곡을 불러주시는 환하디 환한 별이었다.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아들 내외가 모시는데 증손자녀를 둔 4대의 대가족이었다. 이장부부도 결혼 50주년, 행복한 금혼식을 맞았으니 며느님 또한 이 할머님을 모신 지 어언 50년.
이미 32년 전에 할머님께서 ‘장한 어머니’ 대통령상을 받았다는데 차마 말 못할 사정이야 있겠지만, 이 며느님 또한 지극한 효부가 아닐 수 없다. 아마 이 세상 마지막 고부지간일 것이다.
나이 들면서 노할머니처럼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개는 늙어가면서 속은 좁아지고 시샘과 의심은 많아져서 눈초리는 자꾸 침침해지니 나는 그저 부럽고 부러울 뿐이다. 머지않아 백수를 맞는 날, 노할머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다시금 되새기노니 잘 늙자, 노추 보이지 말고 제발 잘 늙어가자.
도시에 살든 시골 농어촌에 살든 사람이 사람답게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은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광주 도심에서도 시골인심의 정수를 느꼈다. 서구의 양3동 발산마을에서 ‘가마솥 부뚜막 공동체마을’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이 마을은 전남방직 공장이 잘 돌아가던 시절이 지나고 한동안 ‘달동네’ 같은 변두리 마을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마을이 확 달라지기 시작했다. 골목마다 벽화가 그려지고, 젊은 예술가들이 들어왔다. 마을 주민들은 이른 아침마다 마을청소를 하고, 마을경로당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빼빼로 데이’는 들어봤지만 발산마을에서 난생처음 ‘가마솥 데이’라는 말을 배웠다.
농촌도 아닌 광주 도심에서 장작불 가마솥 밥을 먹었다. 할머니가 끓여 주는 시래기된장국을 먹으며 아주 오래 전의 전남방직 여공들을 생각했다. 산비탈 옹기종기 자취방에 살던 조국 근대화의 서러운 누나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갈수록 팍팍해지는 사막의 도시에서 “바로 여기가 오아시스야”라며 다시 ‘청춘 발산마을’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가마솥 데이를 아시나요? 샘몰경로당에 둘러앉아 한 달에 꼭 한 번은 더불어 밥을 먹는 가마솥 부뚜막 공동체마을, 광주 발산마을의 가마솥 데이를 아시나요? 날마다 감이 좋다, 예감이 좋다.
이팝나무 졸업식
이원규
하도 배가 고파서
하동군 적량면 우계저수지 아래
이팝나무학교에 들어갔다
삼년 전 입학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따금 서당골의 물까치떼가 날아들고
봄밤이면 서어나무 소쩍새가 찾아와
한참을 울다가 저수지 물배만 채웠다
차라리 함박눈이 오길 기다렸다
남도의 겨울 청보리는 더디 자라고
모내기를 하려면 아직 멀었다
적량면 우계저수지 아래 이팝나무 어르신
삼백 년째 고봉밥
보릿고개 환한 밥상을 차렸지만
여전히 몸도 마음도 허기진 나 홀로 제자였다
이른 새벽안개 속의 졸업식
우등생은 아니지만
이팝나무학교 개근상을 받았으니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는 구치소로 가고
착한 머슴 하나 그 자리에 모시던 날이었다
한 나무의 제자가 되었다가
아직 어린 이팝나무가 되어 하산하는 일
한 여인에게 입학하고
한 사람을 졸업하는 일 또한 서로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