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르트헨 토트 신트 얀스(Geertgen tot Sint Jans, 1465~1495), 밤의 예수 탄생(Birth of Christ), 1490년경, 나무판에 유채, 34×25.3㎝,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양말과 석유화학의 상관관계
외출을 위해 샤워를 하고 옷을 차려입고 보통 마지막으로 양말을 신습니다. 일반적으로 양말은 단순히 발을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요. 최근에는 패션 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또한 석유화학의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특별한 기능을 갖춘 양말도 등장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기능성 양말 속 석유화학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 양말의 역사
출처=www.londonsockcompany.com
과연 원시시대에도 양말을 신었을까요? 고대 벽화에 보면 인류의 발에 무언가 묶여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많은 학자는 이것이 발을 보호하기 위해 동물의 가죽을 이용해 만든 신발이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물론 원시시대에는 양말과 신발을 따로 구분해서 제작하지 않았죠. 그렇기에 신발이 양말 기능까지 같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양말이 도입될 당시만 해도 지금과 달리 아무나 신을 수 있는 제품이 아니었는데요. 방직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귀족들이 부를 과시하려고 고급 소재를 활용해 수작업으로 양말을 만들어 신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말 면직물이 대중화되면서 일반인도 신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처=youngzine.org
그러던 것이 나일론이 등장하면서 큰 변화를 일어나게 되었는데요. 나일론은 합성섬유 중 가장 강한 강도를 가진 것은 물론, 신축성까지 갖추고 있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나일론 양말은 공기가 잘 통하지 않고 땀이 흡수되지 않는다는 단점으로 점점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다양한 합성섬유의 등장과 기술력의 발전으로 품질 좋은 기능성 양말이 개발됐습니다. 이에 합성섬유로 만든 양말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 신발 같은 양말
출처=www.getfyf.com
일반적으로 양말은 신발 전에 신는 제품입니다. 얇고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발에 밀착되어, 신어도 안 신은 듯 착화감이 좋은데요. 신발에 비해 외부 충격에 약하죠. 그렇기에 외출할 때는 양말 위에 신발을 착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양말만 신고 외출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스위스 회사가 신발을 대체할 수 있는 외출용 양말을 만들었습니다. 신발 대신 신고 나갈 수 있는 양말인데요. 인도를 가볍게 걷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양말만 신고 뛰어다닐 수도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심지어 등산이나 암벽 등반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쓸 수 있다는 것인데요.
출처=www.getfyf.com
이 양말의 비밀은 소재에 있습니다. 바로 ‘다이니마’(Dyneema)라는 폴리에틸렌 계열의 섬유입니다. 다이니마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가벼운 섬유로 방탄조끼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외부 충격에 강하다는 뜻인데요. 강철보다 15배가 강한 다이니마를 이용하여 신발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양말이 제공하는 뛰어난 착화감으로 맨발로 걷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 흘러내리지 않는 양말
출처=sebastiengrey.com
양복을 입는 남성은 일반적으로 짧은 것보다 목이 긴 양말을 착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목이 긴 양말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흘러내려 종종 발목에 뭉쳐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이런 현상은 발목으로 갈수록 점점 얇아지는 신체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매번 발목에 뭉쳐있는 양말을 당겨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독특한 디자인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한 양말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일반 양말 끝에 손잡이 같은 올가미가 추가된 모습인데요. 이 올가미가 흘러내리지 않는 양말의 핵심입니다. 원리는 간단한데요. 올가미를 불룩하게 튀어나온 종아리 근육에 걸어 양말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합니다. 신는 방법은 일반적인 양말과 같고 올가미만 종아리 근육 위로 올려 주기만 하면 됩니다.
◆ 화려한 양말 속 한화케미칼
출처=sebastiengrey.com
흘러내리지 않는 양말의 또 다른 특징은 22가지의 디자인입니다. 다양한 색상과 패턴으로 고객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데요. 이런 디자인에 한화케미칼의 기술이 숨어있습니다. 섬유는 방직과 제직, 염색, 후가공, 봉제의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필요한 제품으로 탄생하게 되는데요. 양말의 다양한 색상은 염색 과정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바로 이 염색과정에서 한화케미칼의 제품인 가성소다가 쓰입니다. 가성소다는 원하는 색상을 섬유에 잘 표현하기 위해 표백과 정련 작업에 사용되는데요. 사전에 불순물을 제거하여 섬유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물론, 매염재(섬유와 염료를 결합시키는 역할)로서 염색의 질을 높여줍니다.
우리가 날마다 습관처럼 신고 다니는 양말에도 석유화학 기술이 숨어있었습니다. 석유화학의 기술 발달과 함께 질 좋은 합성섬유가 지속적으로 개발되면서 다양한 기능성 양말이 출시되고 있는데요. 앞으로 어떤 양말이 우리를 놀라게 할지 여러분도 함께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고는 한화케미칼과 세계일보의 제휴로 작성되었습니다.
[펌] / 출처; 세계일보 / 한화케미칼 블로거 / 황계식 입력 2017.12.24. 10:02
2017년 12월 18일 / 경복궁
잘 나가던 한반도 국가들, 왜 갑자기 흔들렸을까?
[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
지금까지 이 연재를 통해 온난기에는 바다를 주(主) 무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한랭기는 육지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득세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중⋅일 3국 중에 온난기가 특히 큰 기회가 되어주는 편은 한반도에서 서해 바다를 낀 쪽에 살았던 인간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서기 원년 무렵부터 500년까지 지속되었던 ‘로마시대 기후최적’이라는 이름이 붙은 온난기 동안, 한반도에서는 사국시대라고 불리는 기간에는 바로 그런 양상이 전개됐다.
일본은 바닷길 왕래라 해도 어차피 태평양 쪽으로 멀리 진출하지는 못하며 주로 한반도나 중국 동남해안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쪽은 이미 백제나 가야가 꽉 잡고 있었을 테니 이들과 경쟁하기보다는 연합하거나 그 수하로 들어갔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주류로 알려져 왔던 한족(漢族)이 바다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이들의 본거지인 중원은 큰 강인 황하를 끼고 있지만, 하구 쪽 위도가 높은데다가 연안에 한류가 흐르고 항구로 이용할 만한 지형이 잘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해상활동의 베이스가 되기에 그리 적합하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황하에서 이어지는 바다는 오래 전부터 한반도와 깊은 관련 있는 요하지역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을 터였다.
서해안으로 흘러들어가는 중국의 주요 강들. © 지도구성= 이진아
예를 들어 ‘만천과해(瞞天過海)’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넜다는 말인데, 일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야 실패가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 말이 이런 뜻으로 쓰이게 된 배경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의 사건이다. 바다를 지극히 무서워했던 태종이 배를 타기를 거부하자, 장군 장사귀가 배에 흙을 덮어 육지인 것처럼 속여 오르게 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이 시기까지만 해도 중국의 배가 허접하고 중국 수군이 약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는 많이 있다.
요하인의 후손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인들과 남중국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인 등 한반도 해양족들이 승승장구하던 로마기후최적 온난기 동안 중국은, 아니 중국의 황허 유역을 중심으로 한 한족의 본고장은 지역별, 세력별로 쪼개져서 서로 싸우는 혼란을 연출하고 있었다. 전한을 쓰러뜨린 왕망이 세운 신나라에서 삼국시대,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서로가 기진할 때까지 싸우는 형국이었다.
온난기여서 농업생산성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게 되면, 그런데도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할 기회가 차단돼 있으면 생기게 되는 현상이다. 황허에서 남쪽인 양쯔강 쪽으로는 이미 (아마 가야연맹 종주국으로서) 안정된 사회가 자리 잡고 있었고, 서해 쪽으로는 백제와 가야가 꽉 잡고 있었으며, 동북쪽으로는 별로 생산성이 높지 않은 산지 및 거기 터줏대감인 만만찮은 이민족들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서기 500년 대 초반에 접어들자 세계 여러 곳에서 화산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 화산재의 햇볕 차단 효과로 인해 갑자기 기온이 급강하하는 한랭기로 들어간다. 앞서 보았듯이 유럽에서는 이 시기가 지중해역에서 아랍인이 주도권을 잡는 중세암흑기였다.
동아시아 정세도 빠르게 변해갔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활동 범위를 과시했던 가야가 일단 한반도에서 급격히 몰락해서 신라에 통합됐다. 규슈지방의 가야연맹 역시 끈 떨어진 연처럼 빠르게 원주민에 의해 퇴치됐을 것이다. 가랏파가 일본 원주민에게 붙잡혀 복종하게 된 얘기, 가라쿠니다케 바로 앞 에비노 고원 전투에서 가야군이 패망한 얘기를 설화 속 그림자처럼 남기고.
중국 대륙에서도 북부 내륙 쪽을 기반으로 한 육지 사람들의 활약으로 온난기동안의 혼란이 빠르게 수습되어 갔다. 이 한랭기에 권력을 주도한 이들은 중국 북쪽의 소수민족 선비족과 관련이 깊었다. 581년 수나라를 세운 문제는 선비에서 벼슬을 했던 한족 가문 출신이었고, 수를 이어 618년 건국된 당나라의 개국시조 이연은 선비족 출신으로 수나라 양제의 측근 중 하나였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의 선비족 관련성을 내세우지 않고 한족(漢族)의 정통성을 잇고 있음을 강조했다.
앞에서 나왔듯이 당나라는 약 600년 만에 양쯔강 유역을 다시 장악한 북방계 한족이었다. 앞 장에서 추정했던 대로 양쯔강 유역을 본거지로 한 해양족의 국호가 가야였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었든, 갑자기 한랭해지는 기후와 함께 어쩔 수 없이 빠르게 쇠락해갔을 것이다. 한반도와 규슈의 가야연맹은 그보다 먼저 와해됐고, 배를 만들 목재가 귀해 바다를 통해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기도 어려웠을 터이다. 이들은 결국 한족으로 흡수되면서 일부는 그리 높지 않은 벼슬을 부여받아 중앙으로 진출하기도 했을 테고, 대부분은 지방의 해상(海商)으로 남았을 것이다.
최전성기 발해 영역 추정. © KBS 화면 캡쳐
중원의 북서부 이민족, 선비족 출신인 당은 북동부 장악력이 약했다. 고구려는 퇴치했지만, 그 자리에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나라 발해가 등장했다. 발해는 동아시아 판세에서 곧 두각을 나타내서 요하유역을 대부분 회복하고 연해주까지 이르는 크고 강건한 국가로 성장했다. 그렇게 해서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는 발해, 신라와 함께 세 나라가 필요에 따라 서로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고 적당한 우호관계를 갖기도 하는 것으로 굴러갔다.
그러면서 중원을 중심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국가가 들어서게 해주었던 한랭기는 또 지나가서 900년 무렵부터 온난기에 접어든다. 한랭기동안 육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세워놓았던 질서는 당연히 다시 뒤집히기 시작한다.
당이 중국을 장악했다 해도 그 통치력이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니었다. 지방 토호 세력의 통치권을 사실상 그대로 인정하면서 중앙에서 ‘절도사’라는 관직명을 주어 적당히 엮어서 관리하는 형태였고, 세력이 큰 지방토호의 자제들을 환관으로 만들어 궁중에 인질처럼 묶어두는 관행도 비일비재했다. 온난기가 되어 다시 이런 지방 세력들, 특히 해양족들의 활동 규모가 커지자 이들의 반란이 없을 수 없었다. 결국 907년 절도사 주전충에 의해 당나라가 붕괴되자, 중국 대륙은 5대10국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기후변화와 중국⋅한국의 왕조 교체 아웃라인. 클리프 해리스&랜디 맨, ‘Global Temperature’ 게재 그래프로부터 재구성. © 이진아 제공
한반도에서는 어땠을까? 900년대부터 1300년대까지의 온난기인 ‘중세 온난기’동안 유럽에서는 인구 폭발을 가져왔을 정도로 식량생산성이 높았고, 유럽인들이 주도하는 지중해 교역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번창했었다. 그 이전 온난기인 ‘로마시대 기후최적’ 동안 유럽 못지않은, 아니 여러 모로 유럽을 훨씬 능가하는 번영을 구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반도 해양족들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주었을까?
이 시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서기 원년부터 500년 정도에 걸쳤던 로마시대 기후최적기 당시보다는 훨씬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아무리 중국에 의해 역사왜곡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정도 번영을 구가했다면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구석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기록은 정반대의 상황을 전해준다. 한동안 잘 나가던 발해는 900년대 들어서면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해서 926년 거란족의 요나라에 의해 붕괴되고 만다. 당나라까지 동원, 국권을 튼튼히 하려했던 신라는 약 200년 후인 800년대 말에 위기를 맞고, 후삼국시대로 분열됐다가, 936년 이 모두를 통합한 왕건의 고려가 세워지면서 종말을 맞는다.
고려는 하대 신라에 비해서는 해상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전 시대의 가야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띠는 것은 이때쯤부터는 한반도 국가의 국격이 중국에 비해 많이 낮아졌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들이 적잖이 있다는 점이다. 이어지는 한랭기에 세워졌던 조선보다는 나았을지 몰라도, 한반도 국가는 고려 때부터 중국에 밀리는 모습을 확실히 보여준다.
서기 900년 무렵, 중세 온난기로 불리는 온난기가 다시 지구상을 덮었다. 빙하기 이후 1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에 그렇게도 풍성한 혜택을 베풀어주었던 온난기가 온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국가들은 예전의 위용을 되찾기는커녕, 오랜 세월동안 비교적 열세에 있었던 중국에 오히려 눌려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무엇 때문일까?
[펌] / 출처; 시사저널 / 이진아(환경․생명 저술가) / 2017.12.24. 15:31
2017년 12월 18일 / 여의도 국회 화단
‘돈은 안 쓰는 것’‘ 아내 말 잘 듣자’, 젊은 층은 유행어⋅유머 코드 선호
가훈이 돌아왔다
아날로그 감성 찾는 이 늘어 / 한 해 5만 명 무료 가훈 의뢰
구체적이고 짧은 문구가 좋아 계속 보게 돼 머릿속에 입력
'집안의 가장이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 백과사전에 나오는 가훈(家訓)의 정의다. 수십 년 전만 해도 가훈을 액자에 표구해 걸어두는 집이 많았다. 유서 깊은 가문에는 대대손손 내려오는 전통적인 가훈도 있었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가훈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주된 가족의 형태가 십여 명이 함께 모여 살던 대가족에서 많아야 4~5명인 핵가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구태의연한 가부장제의 유산으로 취급되면서 가훈은 우리 시야에서 점점 사라졌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가훈 써오기 숙제라도 받아 오면 없던 가훈을 급조하는 일이 빈번했다.
무료로 가훈을 써주는 재능기부 활동을 20여 년간 해온 서예가 전병문씨는 새해 가문으로 ‘가화만사성’(왼쪽)과 ‘자비무적(慈悲無敵ㆍ자비로우면 적이 없다)’을 추천했다. 박민제 기자
하지만 근래 들어 사라졌던 가훈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역설적으로 아날로그적 감성을 찾는 이들이 늘면서다. 여기에 수년 전부터 인기를 끌어온 캘리그래피(손글씨) 열풍까지 겹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간 가훈에 다시 관심을 갖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예술문화원이 주관하는 무료 가훈 써주기 행사에 올해만 5만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한국예술문화원 관계자는 “체감상 가훈을 원하는 사람들이 지난해보다 많이 늘었다. 행사에 나가 보면 통상 대기줄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선 20~30분씩 줄 서서 받아 가는 게 보통이다. 서예가들이 쉴 시간도 없이 계속 서서 쓰는데도 그 정도”라고 설명했다.
왜 사람들이 가훈을 다시 찾기 시작할까. 사회학자들은 가훈의 의미가 핵가족 시대에 맞게 새로 정립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해석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가훈은 개인주의적이고 평등한 가치를 중시하는 지금의 문화와는 맞지 않아 사라졌었다. 하지만 젊은 층을 중심으로 현대적 가치를 부여하면서 다시 관심을 끄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이 자녀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교훈이 아닌 가족 구성원이 함께 만들고 지키고자 하는 중요한 가치로 의미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현장에선 통통 튀는 가훈을 의뢰하는 이들이 많다. 20여 년간 가훈 써주기 행사에 재능기부를 해온 서예가 전병문(60)씨는 시민들이 요구하는 가훈이 과거와 비교해 많이 달라졌다고 전한다. 그는 “예전엔 명심보감에 나오는 한자성어를 선호했었다. 하지만 최근엔 한글로 된 유행어나 생활밀착형 문구를 택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한번은 ‘개X 마이웨이’란 글귀를 가훈으로 적어 가는 사람도 봤다. 황당해서 뭔 뜻이냐고 물었더니 ‘누가 뭐라 해도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얘기해서 써 줬다”고 말했다.
캘리그래피 작가 조철희씨가 고객 의뢰를 받고 쓴 명언ㆍ유행어형 가훈. 박민제 기자
유행어도 가훈으로 많이 활용된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쓰이는 문구를 자신의 상황에 맞게 활용하는 방식이다. 조철희 홍익캘리그라피 서예교육원 원장은 “최근에 가장 많이 의뢰를 받은 가훈은 ‘돈은 안 쓰는 것이다’다. 개그맨 김생민씨가 영수증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유행시킨 말인데 공감한 사람들이 많아서 덩달아 가훈으로도 인기를 끄는 것 같다. 젊은 부부들은 ‘여자의 말은 다 옳다’ ‘아내 말을 잘 듣자’ 같은 유머가 섞인 글귀를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연령대별로 선호하는 가훈도 차이가 난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신혼부부들은 ‘최선을 다하자’ ‘정직하게 살자’ 등 다짐류의 가훈을 많이 찾는다. 40~50대 중년층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 등 한자성어 의뢰가 많다. 60대 이상 노년층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 ‘안빈낙도(安貧樂道⋅가난하게 살아도 편안한 마음)’ 등 가정과 마음의 평화를 기원하는 문구를 선호한다. 전병문씨는 “가훈을 써줄 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상생낙생(相生樂生⋅서로 아끼고 사랑하면 즐거운 날이 찾아온다)’ ‘유지경성(有志竟成⋅하고자 하는 뜻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등 추천 가훈 20여 개를 보여주지만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정해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가훈은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을까. 전문가들은 집에서 활용하는 문구인 만큼 가족 구성원들이 충분히 소통해 모두 공감하는 글귀로 정하는 게 좋다고 추천한다. 한국가훈써주기운동본부 이상문(69)씨는 “현실적인 가훈이 좋다. 추상적인 내용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지향점, 가족의 지향점을 정한 문구가 좋다. 또 장황한 것보단 간단명료한 게 더 낫다. 최근에 쓴 가훈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건강이 제일’ ‘보증을 서지 말자’ ‘각방을 쓰지 말자’ 등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전통 있는 가문들의 가훈도 참조해 볼 만하다. 김해 김씨는 ‘근신(勤愼⋅항상 부지런하고 매사에 신중하라)’, 밀양 박씨는 ‘불인불행(不仁不行⋅어진 일이 아니면 행하지를 말자)’, 전주 이씨는 ‘관홍장중(寬弘將重⋅너그럽고 도량이 넓으며 위엄을 갖춘 사람이 돼라)’, 안동 권씨는 ‘무신불립(無信不立⋅신용이 없으면 설 자리가 없다)’ 등의 가훈을 갖고 있다.
가훈을 써서 걸어 놓으면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효과도 있다. 정신과 전문의인 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장은 “가훈을 써서 걸어 놓으면 집안을 오가면서 계속 보게 돼 머릿속에 입력이 된다. 무의식적으로 가훈의 태도를 체화시키게 된다. 또 가족 구성원이 공유하는 하나의 틀이 생기면서 주는 편안함⋅안정감도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펌] / 출처; 중앙선데이 / 박민제(중앙일보 기자) / 2017.12.31 01:51
2017.12.21 / 강원 평창군 알펜시아리조트 내 스키점프대 상공 위의 대한민국 공군 블랙이글스 훈련 비행
패러다임
[이덕환의 과학세상]
혁명적 패러다임 전환은 과학자의 임무 / 끊임없는 연구통해 역사적 발전 계속돼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수감으로 어수선한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기적 우선주의를 고집하는 미국, 선택적 보복을 전제하는 짝퉁 자유⋅개방무역을 외치는 중국, 브렉시트로 상처를 입은 유럽연합의 혼란도 심각하다. 냉전 이후 무섭게 확산되던 세계화의 '패러다임'은 짧은 수명을 다해버린 형국이다. 그렇다고 지구촌의 평화와 공존을 보장해줄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있다는 조짐도 없다.
본래 패러다임(paradigm)은 과학 발전의 역사를 분석하던 과학사학자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1962년)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과학이 새로운 가설의 반증을 통해 점진적⋅누적적으로 발전한다는 칼 포퍼의 고전적인 인식과 달리 동시대 과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에 의해 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쿤의 해석이다.
실제로 과학의 역사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세상의 물체는 정지 상태가 본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패러다임은 관성을 핵심으로 하는 뉴턴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었고, 다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패러다임으로 갱신되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패러다임도 코페루니쿠스적 패러다임의 등장으로 완전히 힘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오감으로는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미시 세계에 적용되는 양자 패러다임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세상이 6종(u, d, c, s, t, b)의 '쿼크', 6종(전자, 뮤온, 타우, 전자중성미자, 뮤온중성미자, 타우중성미자)의 '렙톤'(경입자), 5종(광자, W, Z, 글루온, 힉스)의 '보존'으로 구성된 표준모형도 나름대로 완성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잡았다.
과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막을 내렸다고 볼 수도 없다. 실제로 현대의 과학에서는 우주의 가속 팽창을 이해하기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한 형편이다. 우주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설명해줄 획기적으로 새로운 생각의 틀이 절실하다는 뜻이다. 생명의 정체에 대한 이해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생물의 진화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생물의 유전자를 편집하는 '유전자 가위'(CRISPR-Cas9) 기술로 만족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한 과학자들의 노력은 절대 멈출 수 없는 법이다.
과학자에게 새로운 패러다임과 기존의 낡은 패러다임 사이에는 합리적 소통을 불가능한 공약 불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 언제나 상호배타적인 것도 아니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이 반드시 기존 패러다임의 폐지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고전역학 패러다임처럼 양자론이나 상대성 패러다임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독자적 영역에서 여전히 유효하게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패러다임의 갱신과 전환은 갑작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패러다임을 기반으로 하는 정상과학에 익숙한 과학자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이름 없는 천재와 함께 아무 예고도 없이 느닷없이 등장한 낯선 사고방식과 방법론을 익혀야 하고, 새로운 목표도 설정해야 한다. 과거의 전통과 관행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트랜드를 받아들이는 일이 쉬울 수는 없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밝혀지는 인간과 자연의 더욱 심오한 이해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먹고사는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언제까지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외면할 수는 없다.
사회⋅정치⋅경제⋅국제관계가 과학과 똑같은 방법으로 발전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특정 지역과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가치관⋅세계관⋅신념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으로 역사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 패러다임이 과학적 패러다임과 같은 정도의 강력한 설득력과 문제 해결력을 가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반드시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하는지도 불확실하다.
[펌] / 디지털타임스 / 이덕환(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탄소문화원장) / 2017-04-04 18:00
앙리 에밀브누아 마티스(Henri Émile-Benoit Matisse, 1869-1954) / 벽무늬 속의 장식적인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