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학교 안내도
숭실대학교(崇實大學敎)
설립 : 1897년
유형 : 사립 종합대학교
설립자 : 배위량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
요약 :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 1897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이 설립한 학당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1912년 한국 최초의 대학인 숭실대학으로 정식 인가를 얻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폐교했으나 1955년 숭실대학으로 재개교했다. 이후 숭전대학교를 거쳐 1987년 숭실대학교로 환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교훈은 '진리·봉사'이다.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에 소재한다.
개요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으며, 학교법인 숭실재단에 속한 사립 종합대학. 1897년 미국 선교사 배위량 박사가 설립한 학당이 모태가 되었다. 1971년 숭전대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87년 숭실대학교로 환원되었다. 기독교정신에 바탕을 두고 설립된 한국 최초의 대학인 숭실대학교는 민족역사의 영광과 고난을 함께 겪어온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교명인 숭실에서의 ‘숭(崇)’은 숭상한다는 의미이며 ‘실(實)’은 진실과 성실의 ‘실’이다.
설립 이념
숭실대학교는 기독교정신에 바탕을 둔 진리와 봉사를 교육이념으로, 기독교정신과 민주교육의 근본 이념에 입각하여 심오한 학술적 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가르쳐 인류의 번영과 국가·사회 및 교회에 봉사할 지도자적 인재양성을 교육목적으로 한다.
연혁 및 변천
1897년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裵緯良: 본명은 W. M. Baird)이 설립했으며, 1901년 평양으로 교사를 이전하여 숭실학당으로 교명을 정했다. 1912년 숭실대학으로 정식인가를 얻어 한국 최초의 대학이 되었다. 1925년 일제의 '전문학교규칙'에 의해 문과만으로 편성된 숭실전문학교로 개편되었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던 중 1938년 자진 폐교했다.
1953년 숭실대학재건기성회가 결성되고 숭실대학재단이사회가 조직되었으며, 1954년 설립인가를 받아 1955년 5월 숭실대학으로 재개교했다. 1971년 숭실대학과 대전대학을 통합하여 종합대학인 숭전대학교로 개편되었고, 1983년 대전 캠퍼스가 다시 분리·운영되었다. 1987년 교명을 숭실대학교로 환원했고 재단을 학교법인 숭실재단으로 개명했다.
1996년 국내 최초로 정보과학대학을 설립했고, 2006년에는 경영대학원을, 2010년에는 숭실융합기술원과 금융학부를 신설하는 등 실용학풍의 전통을 높여왔다. 2015년에는 캐나다 콘코디아대학(Concordia University). 미국 앨라배마주립대학(Alabama State University), 프랑스 부르고뉴대학(University of Burgundy), 중국 지난대학(Jinan University) 등 19개 해외 대학과 교류협정을 체결했다. 2019년 통상산업학과를 신설했다. 2021년 9월 안전융합대학원에 소방방재안전학과를 신설했다.
대학 조직
2022년 기준 인문대학·자연과학대학·법과대학·사회과학대학·경제통상대학·경영대학·공과대학·IT대학·베어드학부대학 등이 있다. 대학원으로는 일반대학원 외에 중소기업대학원·정보과학대학원·사회복지대학원·교육대학원·기독교학대학원·경영대학원 등이 있다.
부속기관으로는 한국기독교박물관·신문방송국·생활관·경력개발센터·평양숭실재건추진단·사이버교육사업단·AI융합연구원·숭실평화통일연구원 등이 있다. 부설연구소로는 인문과학연구소·법학연구소·사회과학연구소·경영연구소 등이 있다. 부설교육기관으로는 글로벌미래교육원·생활체육지도자연수원·숭실통일리더십연수원이 있다.
숭실대학교 중앙도서관
숭실대학교
한경직 기념관
한경직기념관
규모 : 지상 2층
시설 : 예배실, 전시실
스토리 : 한경직목사의 공로를 기념하고 그의 사업을 계승,발전시켜 나가고 학생들을 교육하는 채플을 마련하기 위해 건립
소개 : 한경직기념관은 평양 숭실 동문이자 본교 재건의 주역으로 제1대 학장, 제5대 이사장으로서 숭실의 재건과 중흥을 위해 진력해 온 한경직 목사의 공로를 기념하고 또 그가 한국 교계 지도자로서 일평생 힘써온 사업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그리고 초교파적 선교정책을 모색하고 실천에 옮기는 선교센터 및 미래 우리나라의 주인공들을 교육하는 채플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에서 건립되었다.
한경직 목사 동상
한경직(韓景職) 목사
출생 – 사망 : 1902년 12월 29일 ~ 2000년 4월 19일
출신지 :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저서(작품) : 건국과 기독교, 신자의 사회적 사명, 팔복, 민주국가의 정신적 기초,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 병상에서의 묵상
대표관직(경력) : 홀트양자회 이사장, 세계선명회 이사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한국기독공보사 사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영락학원 이사장, 숭실대학 이사장
정의 : 대한예수교 장로회(장로교) 목사(1902.12.29∼2000.4.19).
생애
1902년 12월 29일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에서 아버지 한도풍(韓道豊)과 어머니 청주 이(李)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1914년 김찬빈(金燦嬪)과 결혼했다. 진광소학교(1912∼1916), 오산학교(1916∼1919), 평양숭실대학(1922∼1925)에서 수학했다. 미국 엠포리아(Emporia College) 대학 1년을 수료(1926)한 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다. 1948년엠포리아 대학 명예신학박사, 1955년연세대학교 명예신학박사, 1977년숭실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활동사항
1932년 귀국 후 평양숭인상업학교 교목 겸 교사, 숭실대학 강사로 활동했다.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고, 1934년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9년보린원을 설립하여,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그 운영을 담당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윤하영 목사와 함께 신의주자치회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1945년 10월 월남 후, 같은 해 12월 2일 일본 천리교 경성교구본부를 접수하여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였다. 1946년 11월 12일 베다니전도교회를 영락교회로 개명하였다. 1947년 3월 27일영락보린원을 창설했고, 11월 5일대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7월 3일, 대전에서 기독교구국회를 출범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51년 8월 성경구락부를 개설하고, 11월 부산다비다모자원을 설립하였다. 1953년 1월영락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 및 세계선명회(현 월드비전)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1954년 영락모자원을 설립하고, 숭실대학 재건 초대 학장이 되었다.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장과 한국기독공보사 사장, 1956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을 역임했다. 1958년에는 학교법인 영락학원 초대 이사장, 1967년 숭실대학 이사장직을 맡았다. 1969년 영락여자신학교를 설립했다. 1983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총재, 1984년 남강문화재단 이사장, 1988년 군복음화운동후원회 회장, 1990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 명예회장 등의 직을 역임하며, 한국 기독교·문화·교육 등의 분야에 평생을 헌신했다.
한경직의 주요 저서로는 『건국과 기독교』, 『신자의 사회적 사명』, 『팔복』, 『민주국가의 정신적 기초』,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 『병상에서의 묵상』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1985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모교를 빛낸 영예의 동문상’ 수상하였다. 1992년 템플턴상을 수상하였으며, 199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장’을 수훈하였다.
국내 최대 개신교 교단 중 하나인 ‘대한예수교 장로회(장로교)’ 통합교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대표인물이고, 해방 후 서북 기독교 세력이 남한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개신교의 양적 성장에 크게 기여한 종교인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한경직의 생애와 사상 연구」(이혜정,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83, 2008)
「한경직의 기독교적 건국론과 복음화운동」(이혜정,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6)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김수진, 홍성사, 2000)
『한경직의 생애와 설교 연구』(홍성범, 장로회신학대학대학원, 1999)
『한경직의 생애와 사상』(한승홍,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93)
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기독교박물관
규모 : 지하 2층, 지상 3층
시설 : 전시실, 학예과 연구실
스토리 : 1967년 김양선 교수(사학과)의 기증유물로 구채플에서 개관. 1976년 단독 목적 건물로 운영. 2004년 초현대식 박물관으로 개관
소개 : 1967년 김양선 교수(사학과)의 기증유물로 구채플에서 개관하였고, 1976년 국내 대학 최초로 단독 목적 건물로 이전하여 운영되어 오다가 2004년 4월 최고의 보존환경과 설비를 갖춘 초현대식 박물관으로 이전 개관하였다. 지상3층에 4개의 전시실, 지하2층에 학예과, 연구실 등이 자리잡고 있다.
(좌로부터) 진리관, 조만식 기념관, 웨스트민스터홀
조만식기념관
시설 : 인문-사회계열 강의실, 교수연구실
특징 : 우측 건물 3층이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는 매우 독특하고 편리한 구조. 2008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
스토리 : 숭실대 동문인 민족의 지도자 조만식 선생님을 기념하며 세워진 건물
소개 : 숭실대 동문인 민족의 지도자 조만식 선생님을 기념하며 세워진 건물로, 인문-사회계열 강의실과 연구실이 있다.
우측 건물 3층이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는 매우 독특하고 편리한 구조로 2008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하였다.
(좌로부터) 조만식 기념관, 웨스트민스터홀, 중앙도서관
웨스트민스터홀
시설 : 일반대학원 및 특수대학원
스토리 : 웨스트민스터채플'이라 불리었던 구채플관 이름을 따서 웨스트민스터홀로 명명
소개 : 웨스트민스터홀 자리에 있던 구채플관(웨스트민스터채플)이 건축 당시 미국 디트로이트 소재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기금으로 건축되어 ‘웨스트민스터채플’이라 불리었고, 이를 따서 웨스트민스터홀로 명명하게 되었다. 일반대학원 및 특수대학원이 위치해 있다.
진리관
조만식 기념관(좌)과 웨스트민스터홀(우)
조만식(曺晩植)
출생 – 사망 : 1883.2.1. ~ 1950.10.18.
선생은 민족의 사표(師表)였다. 오산학교 교사로 출발한 그의 활동은, 열렬한 애국심과 독립정신 속에서 독립만세운동, 국산품애용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선생은 좌우파가 하나가 되는 신간회가 결성되도록 애썼으며, 광복 후 반탁운동과 민족자주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만학도
조만식(曺晩植, 1883. 2. 1~ 1950.10.18) 선생은 1883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엄친 창녕 조씨(昌寧曺氏) 경학(景學)과 자친 경주 김씨 경건(敬虔)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선생은 7세 때에 한문 공부를 시작해 10년에 걸쳐 사서삼경 등 기초과정을 배웠다. 15세 때부터 평양에서 포목상과 지물상을 경영하며 가계를 꾸려온 선생은 5척 단구의 이름난 술꾼이었다. 그러다가 서당에서 알게 된 한정교(韓鼎敎)의 인도를 받아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했다.
이후 선생은 신학문에 대한 동경이 불 같이 일어나서 23세의 만학으로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했다. 1906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먼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고 1910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부(明治大學 專門部 法學部)에 입학했다.
평남 사천에서 독립만세 시위 주도하고 1년간 옥고
선생은 1913년 명치대학을 졸업한 후 남강 이승훈(南崗 李昇薰) 선생의 초청으로 민족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동경에서 견문을 넓히고, 또한 세계 속의 조선을 바라보며 교육의 방향과 포부를 가졌다는 점 등을 인정받아 2년 후에는 교장으로 승진했다. 사감까지 겸하여 주야 24시간을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했다. 선생의 풍모는 매우 독특해서 5척 단구에 머리를 빡빡 깎아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국산품을 애용하여 허영을 배척하는 모범된 삶을 보여주어 항일의 표징으로 손 꾭혔으며, 민족적인 긍지를 가지고 국산품 애용을 실천했다. 선생의 교장생활은 스스로 학생과 똑같은 규율을 지키고 민주적 자치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지도하면서 장차 이 나라의 큰 일꾼을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교장직을 사퇴하고 평안남도 강서군 사천(江西郡 沙川)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그 후 특별한 사명을 띠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려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게 되어 교육계를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조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선생은 항상 조선 사람의 약점과 결점을 뚜렷이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데 앞장섰다. “우리는 먼저 조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는 철저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언제나 애국애족하는 정신을 고취하고 무엇보다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지름길이며 민족자립 경제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정신보급에 힘썼다.
1920년 평양에서 조선 물산장려운동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운동이 시작되자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가서 각 지방에서는 물산장려회 또는 토산품장려회 등으로 단체조직이 속출하고 금주․금연동맹과 같은 도덕적인 성격의 운동으로까지 파급되었다. 1923년에는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주축으로 벌어진 조선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2년에는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 언론창달에 힘쓰고 민족계몽에 앞장섰으며 그 후 1937년에 수양동우회 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1921년부터 11년 간에 걸쳐 평양 YMCA 총무로서 기독교정신과 민족부흥의 정신을 일체화 함으로써 항일의 선봉에 서서 일제 말기에 소위 신사참배, 궁성요배 등 강요에 결연히 반대했다.
민족유일당인 신간회의 중앙위원 및 평양지회장으로 활동
1927년 민족의 좌우합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가 서울에서 조직되자 선생은 신간회 중앙위원과 평양시 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민족단일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항일투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려는 대전제와 민족과 사회가 한 덩어리가 되어 항일 공동전선을 펴나가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선생은 이 무렵 육신의 곤고함을 잊어버리면서 청년회 조직과 강연회 토론회 등에서 활동하였는데 이때의 별명이 ‘무주랑 빗자루’였다. 키는 작았으나 담대했고, 얼굴 빛과 흰 머리카락은 청초한 모습이었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열띤 웅변을 할 때는 듣는 사람마다 공명을 얻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광복 후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 평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평남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동년 8월 18일 평남 도청에서 있었던 일본군 항복조인식에 입회하는 형식으로 참석하였다. 8월 26일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당을 평양 호텔로 초청하고 연립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선생이 위원장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 측에서도 여러 명이 조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립정권의 수립은 이때까지는 선생의 지도력을 배제할 수 없어 이뤄진 부득이한 방편이었다. 이러는 한편 공산당의 위상은 날로 떠오르고 소련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인민위원회는 날치기 행정으로 제 세력을 키워갔다.
조선민주당 창당한 후에 소련군정, 김일성 일파와 담판 벌였으나 결렬
1945년 11월 3일 선생은 평양에서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5년 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1946년 1월 2일 소련군정에 신탁통치 불찬성의 뜻을 통고하고 한편으로는 반탁 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소위 인민위원회 위원장 직도 사퇴했다. 1946년 1월 6일 마침내 소련군정 및 김일성 일파와의 최후 담판은 결렬되고 선생이 인민위원회 건물 현관을 나서자 이미 소련군에 의해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실려 고려호텔로 연행되어 갔다.
그 후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생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월남을 권하는 인사들에게 “나의 일신을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북한의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이미 굳게 결심하였고”라며 오직 애국애족과 민주주의를 위하는 굳센 신념으로 끝내 권유를 거부했다. 북한동포의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분, 공산당원도 그 인격 앞에 겸손하게 절을 하였던 분, 월남 동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선생, 오늘도 우리 민족의 가슴마다에 살아 계신 분이다. 선생의 높은 유덕을 기리는 소리는 지금도 끊임이 없다.
베어드홀
베어드홀
규모 : 지하 1층, 지상 5층
시설 : 대학본부, 자연과학대학의 각종 실험실, 교수 연구실
특징 : 한국건축작가협회상 수상 [유리거울로 된 창과 신체장애자 이용을 최대한 배려한 구조로 지어짐]
스토리 : 신축 과학관을 베어드 박사의 이름을 따서 베어드홀로 변경
소개 : 1988년 지상 5층 지하1층으로 지어진 신축 과학관은 유리거울로 된 창과 신체장애자 이용을 최대한 배려한 구조로 지어졌으며, 한국 건축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건축작가협회상을 수상하였다. 평양 숭실캠퍼스 당시 최고의 실습기자재와 전문 교육시설을 완비한 ‘과학관(Science Hall)’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숭실대학교 설립자인 베어드 박사의 이름을 따 베어드홀이라 부른다. 최신 설비를 갖춘 자연과학대학의 각종 실험실과 교수연구실이 입주하고 일부는 대학본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학생회관
베어드홀(좌)과 형남공학관(우)
William Martyn Baird
윌리엄 M. 베어드
출생 : 1862년 6월 16일
사망 : 1931년 11월 29일
성별 : 남성
국적 : 미국
학력 : 하노버대학교 철학·신학 박사
직업 : 숭실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학장, 목사
윌리엄 마틴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1862년 6월 16일 - 1931년 11월 29일)는 숭실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 학장이다.
베어드의 한국식 이름은 '배위량(裵偉良)'이다.
베어드는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로, 1891년에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897년에 평양에 이주한 그는 숭실학당을 개설하고, 이를 1906년에 한국 최초의 근대 대학(대한제국으로부터 인가)으로 발전시켰다. 1931년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개교식에 참여한 지 한달 후에 장티푸스에 걸려 별세했다.
숭덕경상관
안익태 기념관
안익태기념관
시설 : 강의실
특징 : 건물 외관에 애국가 악보와 애국가 한 소절이 있음
스토리 :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님을 기념하며 지음
소개 : 건물 외관에 애국가 악보와 애국가 한 소절이 있으며, 숭실대 출신으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님을 기념하며 지어진 건물이다.
안익태 기념관
안익태(安益泰)
요약 : 애국가를 작곡한 음악가, 지휘자. 주요 작품으로 〈강천 성악〉 〈한국 환상곡〉 〈애국 선열 추도곡〉 등이 있음.
출생 – 사망 : 1906년 ~ 1965년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교회에서 들려 오는 찬송가에 끌려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그 뒤 바이올린과 트럼펫, 첼로를 배우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안익태는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1921년에 동경 세이소쿠 중학교에 특기자로 입학해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안익태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신시내티 교향 악단에 입단하여 최초의 동양인 첼로 연주자가 되었다. 1935년에 다시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 슈트라우스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낯선 외국 땅에서 안익태는 외국인들이 자기 나라의 국가를 부르는 것을 몹시 부러워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에 애국가 가사를 붙여 불렀기 때문이다.
“민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국가를 작곡하자.”
안익태는 그렇게 다짐하고 애국가 작곡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를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2년 뒤 안익태는 드디어 〈한국 환상곡〉을 만들었다. 안익태는 이 악보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 국민회와 상하이에 있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도 보냈다. 하지만 정작 우리 나라에는 일본의 감시가 심해 보낼 수 없었다.
어느 날, 안익태는 스승 슈트라우스 대신 지휘를 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한국 환상곡〉을 연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당시 독일에는 일본인들이 많아 걱정이 되었지만, 슈트라우스는 안익태의 애국심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이를 허락했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지휘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일본 군사들이 연주회장으로 찾아와 안익태를 협박했다. 하지만 안익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한국 환상곡〉을 지휘했다.
그의 음악을 들은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찬사를 보냈고 안익태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애국가를 작곡한 그 해,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안익태는 악보를 들고 베를린으로 달려갔다. 당시 나라를 잃은 우리 나라 선수들은 일본 국기를 달고 참가해야 했다. 안익태는 선수들에게 애국가 악보를 나누어 주었고, 선수들과 안익태는 애국가를 목놓아 부르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기도 했다.
안익태는 1957년에 귀국해 국립 교향 악단과 KBS 교향 악단을 지휘하였고, 서울에서 국제 음악제를 열기도 했다.
형남공학관
2022년12월14일(수요일) 서울 동작구 [사육신 역사공원&용양봉 저정공원&효사정&국립서울현충원&서달산&달마사&숭실대학교] 탐방기
산 : 서울 동작구 [사육신 역사공원&용양봉 저정공원&효사정&국립서울현충원&서달산&달마사&숭실대학교]
산행코스: [ 9호선 노량진역 8번 출구 ~ 사육신 역사공원 ~ 노들 나루공원 ~ 용양봉 저정공원 ~ 흑석동 효사정 ~ 국립서울현충원 ~ 서달산 ~ 달마사 ~ 숭실대학교 ~ 7호선 숭실대입구역 3번 출구 ]
일시 : 2022년 12월 14일(수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흑석동 최저기온 영하 10도C, 최고기온 영하 3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4시간17분 소요)
07:31~08:16 6호선 구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발하여 공덕역으로 가서 5호선으로 환승해서 여의도역으로 이동한 후 9호선으로 재환승하여 서울 동작구 노량진로 지하 130 번지에 있는 노량진역으로 이동 [45분 소요]
* 08:16~08:27 노량진역에서 탐방출발하여 9호선 노량진역 8번 출구로 나와서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152-3 번지에 있는 사육신 역사공원으로 이동
* 08:27~08:40 사육신 역사공원 탐방
[사육신 역사공원은 조선 제6대 왕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 반대하던 일곱 충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문기를 모신 곳이다.]
* 08:40~08:57 노들 나루공원을 거쳐서 동작구 본동에 있는 용양봉 저정공원으로 이동
* 08:57~09:14 용양봉 저정공원 탐방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수원화성 행차 때 쉬던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한 곳으로 한강 및 서울 시내의 아름다운 경관을 주야간 조망 할 수 있는 명소이다. 주요시설은 하늘전망대, 자연놀이터, 연못, 탐방로(데크로드), 전망포토존 등이 있고, 어린이를 위한 자연놀이터는 가족단위의 이용에도 적합하다. 2022년말 준공예정인 옥상전망대에는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매점, 카페 등이 운영될 예정이다. 또한, 주변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호인 용양봉저정, 효사정, 노들섬, 노들나루공원 등이 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 09:14~09:21 서울 동작구 현충로 55 번지에 있는 흑석동 효사정으로 이동 (560m)
[효사정(孝思亭)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세종 대에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냈던 노한(盧閈, 1376 ~ 1443)의 별서(別墅)이며, 시묘살이 이후에는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개성에 묘가 있는 아버지를 추모하는 공간이었다고 전해진다. ‘효사정’이라는 명칭은 강석덕(姜碩德, 1395~1459)이 지었으며, 아들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지은 기문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의 정자 자리에는 현재 서울 원불교회관이 세워졌으며, 현존하는 정자는 1993년에 복원한 것으로 원래 자리보다 서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 09:21~09:26 사진촬영
* 09:26~09:45 국립서울현충원 정문으로 이동 (1.6km)
* 09:45~11:46 [충성 분수대~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현충문~현충탑~육탄 10용사 현충비~경찰 충혼탑~국가 유공자 제2묘역~임시정부 요인 묘역~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장군 제2 묘역~장군 제3 묘역~김영삼 대통령 묘소~충혼당~박정희 대통령 묘소~장군 제1 묘역~김대중 대통령 묘소~창빈 안씨 묘역~이승만 대통령 묘소~호국지장사~상도 통문]의 코스로 국립서울현충원을 답사
* 11:46~11:52 서달산(179m) 정상으로 이동
* 11:52~11:56 사진촬영
* 11:56~12:00 서울 동작구 서달로 50-26 번지에 있는 달마사로 이동
[2004년 4월 1일 달마사는 고려대장경연구소가 10년 간 전산화한 524종의 경전, 16만 2,516매의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전산화본의 출판본을 봉안하였다. 국내 유일의 고려대장경 출판본을 보유함으로써 장경도량이 된 달마사는 사찰 본래의 수행·기도 기능과 부처님의 말씀인 대장경의 학술·연구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게 되었다. 대장경을 연구하는 학술행사와 불자들과 함께 대장경의 가르침을 나누는 문화행사 등도 진행한다.]
* 12:00~12:07 달마사 탐방
* 12:07~12:21 서울 동작구 상도로 369 번지에 있는 숭실대학교 후문으로 이동 (1.0km)
* 12:21~12:32 [숭실대학교 후문~중앙도서관~한경직 기념관~한국기독교박물관~진리관~조만식기념관~웨스트민스터홀~베어드홀~학생회관~숭덕경상관~안익태 기념관~형남공학관~숭실대학교 정문]의 코스로 기독교정신에 바탕을 두고 설립된 한국 최초의 대학인 숭실대학교를 탐방
[숭실대학교는 1897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본명: William Martyn Baird)이 설립한 학당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1912년 한국 최초의 대학인 숭실대학으로 정식 인가를 얻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폐교했으나, 1955년 숭실대학으로 재개교했다. 이후 숭전대학교를 거쳐 1987년 숭실대학교로 환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교훈은 '진리·봉사'이다.]
* 12:32~12:33 숭실대학교 정문에서 7호선 숭실대입구역 3번 출구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2:33~12:36 서울 동작구 상도로 지하 378 번지에 있는 7호선 숭실대입구역에서 대림역으로 가는 지하철 승차 대기
12:36~13:23 7호선 숭실대입구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대림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환승하여 합정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재환승하여 서울 은평구 서오릉로 지하 63 번지에 있는 역촌역으로 이동 [47분 소요]
[사육신공원&효사정&국립서울현충원&서달산&달마사&숭실대학교]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