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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우월순禹越淳, Rovert Manton Wilson)
1. 의사로서의 우월순
우월순은 일을 좋아하고 또 여가를 이용하여 여행과 사냥을 즐겼고 미국의 많은 친구들을 순천의 집으로 오게 하여 같이 사냥을 하였고 그를 통하여 그들로부터 병원에 소요되는 경비를 지원받았다. 여러 선교사들이 일본정부에 비판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어느 정도 협력하여 일본정부로부터 두 번의 훈장을 받았다. 한센병 환자들과 그의 병원의 운영을 위하여서는 누구의 도움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어제의 일과는 나의 보통 하루하루의 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 8시에 간호사들과 기도회를 가졌고 8시 30분에 병실 직원들과 기도회를 가졌다. 몇 몇 도우미들에게 환자들과 개별 기도시간을 갖게 하였다. 아침 회진 시에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고 격려하였다. 그 후 부엌과 전기 설비를 점검하였다. 그리고 건축 중인 건물에 들러 일꾼들에게 잘못 붙인 타일을 교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무의 전지와 담장을 고치는 일을 시켰다. 그 후에 진료를 시작하였는데 보통 조수들이 환자의 병력과 기초 검진의 자료를 가지고 진찰한 뒤에 어려운 환자를 내게 보낸다. 점심 식사를 위하여 집으로 갔고 식사 후에 수술을 시작하였다. 첫 수술은 갑상선에 한의사가 불결한 침으로 시술하여 염증이 발생하여 그 갑상선을 제거하였으며 아주 힘이 들었다. 두 번째는 혀에 종양이 생긴 환자로 역시 침을 삽입한 상태였다. 세 번째 수술은 아마도 악성종양으로 의심되는 목에 생긴 종양제거수술이었다. 그 후 두례의 안검 내반등의 안과수술과 1례의 포경수술이었다. 저녁 6시에 출산을 도왔고 식사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저녁 식사 후에 병원에서 급한 호출이 있어서 병원으로 향하였는데 조수가 급히 말하기를 빨리 좀 와보세요. 갓난 아이가 말을 하지 않아요. 라고 해서 급히 가보았더니 이제 출생한 신생아가 별일은 없는데 울지 않아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병실의 기도회에 참석한 뒤에 귀가하였다.”
- 우월순의 기록 중 일에 대한 열성을 보여주는 부분
2. 우월순의 한센환자 사랑(병자의 아버지)
“그 건물은 E자형 이었다. E자의 한쪽 끝은 남자용, 다른 한쪽은 여자용 가운데는 진료소와 교회였다. 그곳은 마을에서 1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남쪽으로 적절히 떨어진 아름다운 남쪽 언덕 위에 서있는 남향건물이었다. 이 건물 이외에 두 개의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고 하나는 관리인의 집이었다. 우리는 운 좋게도 최씨를 관리인으로 두었다. 그는 우리교회의 장로이고 지난 4년 동안 정규 병원에서 내 첫 번째 조수로 일해왔던 사람으로서 그 일에 적격이었다. -----나는 한 진실한 기독교인을 목포에 있는 신발가게에 보내 두 달 동안 신발을 만드는 법을 배우게 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의 가죽신을 만드는 숙련공이었기 때문에 그 만큼 빨리 배울 수 있었다. 그다음 그는 세 소년들에게 외국 신을, 여덟명의 소년들에게 한국 가죽신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그 다음 나는 일본인과 함께 일해오던 한 훌룡한 양철공을 만나 그 일을 배우게 했다.----바느질 솜씨가 있는 한국인에게 작업실을 내주어 세명의 소년들에게 바느질과 한복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위 부서들에서 일하기 너무 어린, 모든 다른 아이들은 짚신, 새끼, 멍석 등등 짚을 다루는 일을 했다. 학교에 들어간 모든 학생들은 어떤 부서에서든지 일을 해야 했다.”
- 우월순의 기록 중에서
3. 우월순의 아동 사랑(고아의 아버지)
우월순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인격의 소유자로서 부드러운 대화, 평온한 성격, 동정적이며 심오한 영성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실천적이며 도구를 잘 다루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또한 어린아이들을 좋아하여 1908년 자신이 집에서 장애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해 광주지역 최초의 장애인 고아원을 열었다. 그것이 광주 최초의 장애 고아 구제 선교의 시작이었다. 오갈데 없는 장애 고아들을 치료해 주었으며 외다리 소년에겐 다리를 만들어 주었으며 능력이 있는 고아들에겐 의료관련 기술을 가르쳐 직원으로 선발해 병원에서 살게 하였다. 그 가운데 몇 명은 의사로 길러 내었다. 그는 서로득(M. L. Swinehart) 선교사 부부와 함께 광주지역 주일학교 책임자를 맡아 크게 부흥시켰다.
우월순의 사택은 2층 벽돌 건물로 양림산 기슭에 동쪽 방향으로 서 있다. 그의 사택 서쪽 뜰에서는 여성들의 자활 실업교육장으로 서서평, 서로득 선교사 부인들이 여성들에게 수공업으로 직접 자수를 가르쳤고 생산 제품을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에 수출하기까지 하였다. 주일학교가 열리던 공간이었던 이 사택은 광주 어린이 주일학교의 태동이었으며 보이스카웃, 소년놀이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1921년 무렵 화재로 재건축되었고 한동안 제중원장 사택으로 사용되었으며, 1949년 여기서 전쟁고아 보육이 시작되었다.
1949년 40명의 아이들을 돌보던 것이 1952년 전쟁고아의 쉼터인 충현원이 설립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의 귀국 후에 그가 살았던 사택은 고(故) 박순이씨가 40여명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전쟁고아의 쉼터인 충현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충현원은 현존 보육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으로 1952년 ‘충현영아원’을 설립,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공원부지로 묶이면서 복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가 최근 복원이 이루어져 해외 입양인의 뿌릴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강강수월래하는충현원가족
4. 강제 귀국 및 국민훈장 추서
우월순은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 조치 되었다. 1946년 미 군정청 자문관으로 내한하여 나병퇴치사업에 전담했으며 1948년 6월 민정이양과 동시에 뒤마무리를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한 채 미국에 돌아간 우월순은 선교사직을 은퇴한 다음 공중보건의, 방역담당관, 검시관 등을 지냈다. 1948년에서 1963년까지 월드미션 책임자로 봉사하다 1963년 3월 소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5년 3월 24일 그분의 훌륭한 업적을 기려 국민훈장을 추서했다.
우일선(禹一善) 또는 우월손(禹越遜)이라 불리기도 한다.
5. 후 기
우월순선교사는 서서평, 최흥종 등과 함께 우리 사회복지계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물이시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분들에 대한 정확한 업적이 수록된 자료를 찾아보기가 힘들고 이분들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회복지인의 한사람으로서 이 분들의 박애적이고 인도적인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구촌의 소외 받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항상 생각하고 그 일을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회복지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그 첫걸음으로 나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려 한다. 나와 나의 가족 우선이 아닌,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으로 변화를 시작으로 진정한 사회복지인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 하여야겠다.
우월순(禹越淳, Rovert Manton Wilson)선교사 약력
1880.미국 아칸사스주 콜럼버스 시에서 출생
1901.아칸사스 교단 대학 학사과정 졸업(Arkansas Synodical College)
1905.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05-1907St. Louis 시립여성병원에서 인턴 수료
뉴욕에서 이비인후과 전문과정 수료
뉴욕성서신학교(New York Biblisal Seminary) 수학
1908.2 ,미국남장로교선교회 광주선교부 의료선 교사로 부임
광주 지역교회 교인 중 유능한 젊은이들을 조수로 발탁하여 의학을 가르침
1908-1926광주제중병원 2대원장
1909.2.광주의 고아들을 돌보면서 기술을 가르침
1909.4.나환자 진료 시작(6명)
1909.10.베스녹스(Miss Bessie Knox)와 광주에서 결혼 슬하에 7남매 둠1911.Ellen-Lavine Graham Hospital 건축
(설계사: Arthur Thompson)
1911.11.조선총독부로부터 광주나병원 인가
1912.나환자 요양소 건축(봉선동)
광주 주일학교 책임자를 맡아서 크게 부흥
제중병원에 결핵병동을 증축
선교회에 전문간호사를 청원하여 서서평(Elizabath J.Shepping)이 도착함.
1913.1China Medical Association에 참석
1913.11.15나환자 집단 거주지 신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림
1914.안식년을 맞아 독일 베를린에서 외과 전문 과정 수학
1915.안식년을 마치고 광주에 돌아와서 의료사역 재개
1919나환자 집단 거주지에 초등학교 건립
1926-1927광주 나병 집단 거주지를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로 이전.
이 사업에는 엉거(J.K.Unger; 원가리) 목사가 협력함.
1929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하여 미국 Oachita 노회에서
목사(Evangelost)임직
1930.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오는 길에 토끼를 반입하여
환우들의 영양 증진에 힘씀
1934.정부의 협조를 얻어 애양원 갯벌을 개간하여 농지로 전환
1935.일본 천황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음
1938.환우들 가운데 자립할 수 있는 사람들을 결혼시키고
논 2마지기 무상증여와 주택자금 25달러 지급
1941.11.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
1946.1미국정청 자문관으로 내한하여 한국의 나병퇴치사업 전담
1946.9장남 요한 윌슨(John K. Wilson; 당시 해국 군의관)이
내한하여 협력하면서 소록도와 애양원에서 환자 치료에 전념.
환우들에게 의술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소록도에서 35명,
애양원에서 30명이 수업과 실습을 병행하여 원내 의사로 활동
1948.6.귀국하여 선교사 직을 은퇴하고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시 긴터 파크 장로교 회의 장로로 봉사
1948-1950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시 헨리스 구(區)의 공중보건의, 방역담당관, 검시관 을 지냄.
1948-1963Board of World Mission 책임자로 봉사
1962.3.13Mrs. Wilson 별세
1963.3.20Dr. R.M.Wilson 별세
다음은 우월순선교사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 본 것이다.
차 종 순(호남신학대학교 교수)
윌슨 의사/목사의 삶과 헌신
Ⅰ. 한국에 오기까지
윌슨은 1880년 미국 아칸사스(Arkansas) 주 콜럼버스(Columbus) 시에서 아버지 James Stepheson Wilson과 어머니 Mary Stuart 사이에서 태어났다. 윌슨은 스코트랜드와 아일랜드 부모의 신앙적 유산을 받고 자라다가 1901년에 아칸사스주가 포함되 대교구에서 운연하는 교구대학(Arkansas Synodisl Colleg)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1905년에는 당시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세인트 루이스(St. Louis)에 있는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과 함께 윌슨은 1907년까지 세인트 루이스 시립 여성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수료하고, 이어서 뉴욕에서 이비인후과 전문 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이 기간에 뉴용 성서신학교(New York Biblical Seminary)를 동시에 졸업하였다.
윌슨이 어떠한 동기에서 한국선교사를 지망하였는지는 현재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당시 광주 선교부와 목포 선교부에서 크게 활동하였던 프레스톤(John F.Preston: 변요한) 선교사와의 만남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즉 프레스톤 선교사는 1903년 10원에 목포 선교부에서 선교를 시작하여 목포에 정이 깊이 들었으나, 미국 남장로교회 한국선교회가 1905년 11월부터 목포선교부 잠정적으로 폐쇄시키고 소속 선교사들을 광주로 병합시킨데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리하여 프레스톤은 목포 선교부를 다시 개설하기 위한 선교사들을 모집하기 위하여 1907년 5월 14일부터 4개월동안 선교사를 모집하였는데, 그렇게 모집된 선교사가 목사 녹스(Rev. and Mrs. Rovert Knox)와 맥컬리(Rev. H. D. McCallie), 그리고 여성과 아동 선교사 녹스 양(Miss Bessie Knox)과 그라함(Miss Ella I.Graham)양, 의사 버드만(Dr. F. S. Birdmann)과 윌슨(Rovert M. Wilson) 이었다. 윌슨의 도착에 대하여 ⌜The Missionary⌟는 이렇게 말한다.
해외 선교 실행위원회가 9월 3일 회집하여 Dr. R. M. Wilson, of Arkansas 와 Miss Ella Gragam, of Mt. Ulla, N.C.를 한국 선교사로 지명하였으며 일이 풀리는 대로 보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윌슨은 1908년 2월에 광주에 도착하여 진료소를 손질하여 의료선교 활동에 곧바로 착수하였다. 그의 도착과 활동에 대하여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한국에서 온 한 편지는 Dr. R. M. Wilson의 도착과 Dr. F. H. Birdmann의 사역에 관하여 말하였다. “우리는 여러분이 금년에 보내 준 2명의 의사에 대하여 무어라 감사할지 모른다. 이들은 기독교인이며 아주 훌룡한 의사들 이다.”
윌슨은 도착과 함께 맡은 일에 대한 기쁨과 또한 이렇게 유용하게 쓰임 받는 특권에 대한 감사를 하면서 “본국의 젊은이들은 이곳 현지에 오기 전에는 이곳의 필요와 기회에 대항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Ⅱ. 윌슨의 삶과 활동
윌슨이 한국에 도착하여 시작한 사역은 크게 삼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1908년에서 1927까지 광주 기독병원과 봉선동 한센병 집단 치료소 그리고 양림교회에서 보낸 시간, 두 번째 단계는 1927년에서 1941년까지 신풍 애양원과 애양교회 그리고 순천 중앙교회에서 보낸 시간,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1946년에서 1948년까지 해방 후 미군정청의 자문관으로 내한하여 한센병 퇴치사업에 전념하였던 기간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의료 선교사로서 윌슨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은 간단하고 쉬운 문제는 아니다. 윌슨은 신앙적으로는 조상으로부터 스코트랜드 장로교 전통을 물려받아서 철저한 보수신앙을 지녔으며, 해외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의학과 신학을 동시에 공부하는 학구파였다. 그의 학구열은 철저하여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그리고 외과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었으며, 선교현장에서 그는 정형외과, 성형외과, 피부과 그리고 안과까지 더욱 더 그의 폭을 넓혔다. 또한 윌슨은 개인적 특기로서 손재주가 좋았다. 그리하여 무엇이든지 만들고 고치는 등 수공업적인 재주가 있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고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게 했고, 봉선동과 애양원에서 한센 환우들에게 각종 수공업 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의료 선교사로서 윌슨은 미국에서 철저하게 준비한 다음에 한국이라는 현장에서 한센 환우들에게 적합한 약품을 개발하고 적용하는데 앞장섰다. 그리하여 윌슨은 콜무그라 유를 경구투여에서 주사로 대체시켰다. 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정형외과 수술과 성형수술은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정형외과 병원으로서의 명성을 지니게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목사로 윌슨과 한센 환우들에게 “믿음”이 가장 중요한 치료제라고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광주 봉선동과 순천 애양원에서 다같이 교회생활과 성경공부를 강조하였다. 성경학교와 성경구락부 그리고 성경암송에 이르기까지 환우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인 치료약 제공하였다.
선교사로서 윌슨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에서 제시하는 선교원칙, 네비우스 방법론을 철저하여 따름으로써 자신이 운영하던 광주 기독병원과 애양원에서 자립-자조(self-support), 자립-행정(self-government), 자립-전도(self-propagation)를 실천한 사람이였다.
이 선교원칙에 충실하기 위하여 윌슨은 완벽한 경영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최소한의 직원선발과 고도의 전문적 훈련을 시켰으며, 병원 건물을 위하여 철저하게 외부의 자금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세웠으며, 한국인 조수들을 양성하여 스스로 병원의 제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더 나아가서 한센 환자들 가운데에서도 인재를 양성하여 의사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러한 면에서 경영자로서의 윌슨은 교육자의 역할까지 맡았다.
윌슨은 경영자로서 첫 번째 자금관리에 철저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오는 달러 지원금의 당신 엔화 비율을 높이기 위하여 오늘날 말하는 환치기 수법을 사용하였다. 즉 달러를 가지고 중국으로 가서 위엔화로 바꾼 다음에 그것을 한국으로 rwu와서 다시 엔화로 바꿈으로써 달러-엔화로 할 때보다도 2배의 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경영자로서 윌슨은 두 번째 철저하게 내핍생활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빈 깡통을 수집하여 씨앗 저장에 사용하고, 전구를 양말 기우는데 사용하게 하였다.
경영자로서 윌슨은 세 번째 자급자족을 위항 환자들 스스로 어부가 되어 고기를 잡게 하고, 6마력 발동기로 방앗간을 운영하고, 목공, 철공, 석공, 연와공, 기와공등 다양한 기술을 가르쳐서 스스로 경제력을 지니고 자립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자급자족 원칙은 환우들에게 사회인으로서 자긍심을 갖도록 이끌어 주었다.
경영자로서 윌슨은 네 번째 자급-자치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순천에 이르기까지 애양원에 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원내의 제반 업무를 민주적인 절차에 의하여 원생들 상호간에 타협을 통하여 해결하도록 하였다.
교육자로서 윌슨은 광주 기독병원/봉선동 집단 치료소 그리고 순천 애양원에 이르기까지 의사 후보생을 교육시킴으로써 한국의 의료기술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 가운데 최흥종, 최영욱, 최경동, 황상호, 박집사, 마태, 그리고 목포에서 길머 의사가 양육한 최섭 등은 광주와 전남 지방에서 의료계 뿐만 아니라 정치계에서도 크게 활동하였던 지도자였다.
인도주의자로서 윌슨은 주위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결코 무심코 지나치지 않았다. 광주천과 양림동 선교부 주변의 가난한 고아들과 빈민층, 포싸이트가 데리고 온 여자 한센환자와 그녀를 위한 치료, 봉선동과 애양원에 찾아오는 불쌍한 한센 환우들을 위한 쉼터의 건축과 제공...윌슨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이웃사랑을 몸으로 실처하였다.
윌슨은 왕성한 기록자(prolific writer: 記錄者)이며 동시에 역사적 기록자였다.그는 자신의 선교활동을 보고할 때에 언제, 누가, 어디서, 어떻게 하였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후대의 역사학도로서 그의 기록은 가장 정확한 자료와 사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accurate writer) 뿐만 아니라 윌슨은 선교에 관계된 각종 잡지 등에 기고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윌슨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각 선교 기관의 활동상황을 한 눈에 보는 것처럼 알게 해 주었다.
윌슨은 일과 쉼의 조화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바쁜 일과와 더불어 적당한 쉼을 병행함으로써 일에 따른 스트레스를 해소하여 장수의 비결을 터득하였다. 그가 장수함으로써 애양원의 사역은 항상 제자리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 그가 즐긴 레저는 사냥과 낚시였다.
특히 윌슨은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귀여워하였다. 그리하여 윌슨은 광주와 순천 그리고 애양원에서는 유년주일학교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은퇴 후에도 손자 손녀들과 더불어 가깝게 지냈다.
그렇지만 윌슨은 이상의 다양한 활동에서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고 일상적인 일과처럼 항상 병행시켰다. 그리하여 윌슨은 카딩톤의 명성과 헌신 그리고 인간애를 소유하고, 디트릭의 의료기술과 행정능력을 소유하고, 브란드처럼 건강을 잃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윌슨은 선교사로서 가장 적합한 제반 요소를 두루 갖춘 종합적이며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오웬 그리고 윌슨과 포싸이트로 시작한 호남지역의 의료선교사의 활동은 타 지역보다도 인간적인 정과 사랑에 호소하면서 선교함으로써 호남인들의 정서에 어울렸다. 그리하여 호남인들은 기독교를 이해할 때에 사회정의, 학문적 완성, 정치적 특성 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웃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헌신적인 삶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호남인들은 교회와 교계의 계층구조에 의지한 선교사보다는 병원과 각종 사회봉사 시설에서 자신의 건강과 가족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선교사를 전형적인 선교사(typical missionary)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기독교 이해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구조화되고 제도화되어져 가는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으로 본다.
진용철 검사실장/ 여수애양재활병원(1996. 10월호)
구라사업의 공로자 윌슨
윌슨은 1908년 미국 남장로교 의료 선교사로서 우리나라에 와 여수애양원을 설립했고 해방 후 미군정 2년 반 동안 우리 국민의 보건위생 및 한센병 책임자로서 윌슨 중위와 함께 일제가 폐쇄시켰던 부산 용호병원을 1,300평 규모로 다시 세웠으며, 소록도에도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어려웠던 우리나라 나관리 사업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1900년대, 당시 한센병은 가장 무서운 병으로 인식되어 사회와 가정에서 유리 당한 채 다리 밑이나 음침한 곳에 “잠자리”를 만들어 적게는 4-5명 많게는 15-16명씩 시장과 마을을 돌면서 구걸 행각을 했다.
이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했지만 국가적 차원의 대책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포싸이트 의사와 중증 한센환자와의 만남은 기독교 휴머니즘의 명작(The Leper and The Good Samandan)을 낳게 했고 이 드라마틱한 사건은 윌슨을 감동시켜 그를 한평생 구라사업에 종사케 했다.
포싸이트가 데리고 온 환자가 최선을 다한 구료에도 불구하고 5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슬픔을 남긴 채 죽음을 맞게 되자 윌슨은 그 한센환자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한 나머지 1909년 가을 한센환자의 집(Leper House)을 따로 마련하여 5-6명의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고, 1911년 11월 1일 조선 총독부로부터 광주 나병원 인가를 받게 되었다.
윌슨은 지금의 광주 기독병원과 나병원을 같이 운영하면서 차츰 나병원에 대한 애착을 더 갖게 되어 한국 한센병에 대한 실상을 미국 언론과 선교 잡지에 소개하는 한편 영국 구라단체와 미국의 구라선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1912년에는 영구의 에딘버러에 본부를 둔 인도 및 극동 한센환자 구제회로부터 2,000불을 기탁 받아 인자형의 병동을 건축하여 한센환자 24명을 입원시켜 치료했다. 1913년에는 구라선교회 책임자였던 베일리 부부가 광주에 찾아와 한국 한센환자들의 사정을 돌아보고 병원 확장과 도움을 약속하고 돌아갔으며, 1914년에는 100명의 환자를 수용 치료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고, 전에 있던 양림리에는 여자환자를, 봉선리에는 남자환자를 격리 수용했다.
1914년 병원에서 치료하던 환자가 집으로 돌아감으로써 한센병은 불치병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한센병도 고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도 했다. 윌슨은 환자 치료하는 일 외에 교육에도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
1919년에는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를 세워 문맹환자를 일깨워 주었고 전체환자를 29개반으로 편성해서 성경 공부도 시켰다. 또한 논과 밭을 각각 50두락씩 구입하여 노동력 있는 사람에게는 그와 맞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각자의 적성에 따라 양동이 만드는 일이나 목수, 토수, 석수 등의 일을 할 수 있게 하였고, 여자들에게는 길쌈, 옷 만드는 일과 심지어는 양말 깁는 일 까지도 신경을 썼다.
양토, 양돈, 양계 등 양축하는 일을 장려하여 좋은 종자를 친히 구해다 주기도 했으며 일주에 한두번 정도는 꼭 풀을 베어다 손수 나누어주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은 이 병원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립병원 취체령에 위배되었다는 이유로 일제는 1921년 5월 30일 10년 넘게 운영해 오던 병원을 하루아침에 폐쇄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윌슨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병원을 재정비하여 3년 뒤인 1923년 12월 2일 조선 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다음해인 1924년에는 광주시로부터 시민위생과 도시계획에 문제가 있다하여 윌슨에게 나병원의 이전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윌슨은 막대한 이주비를 내세워 병원이전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병원 문제는 1925년 다시 거론되어 조선 총독부 정무국장이 광주에 내려와서 시민 대표와 관계자 그리고 윌슨 등이 합석하여 이주에 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광주시에는 6개항을 들어 이전 문제의 당위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1. 나병원의 정원은 132명인데 600명이나 수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광주시에 찾아 와 입원시켜 달라 애걸하니 행정상의 어려움이 있고, 전국에서 한센환자들이 광주로 모 여들어 병원 주변에 음악을 짓고 기거하면서 시내를 배회 구걸하므로써 시민위생은 물로 전염의 위험이 크다.
2. 수용되어 있는 환자 역시 소금을 비롯한 일용품 구입을 목적으로 시장을 드나드니 한센 병 확산의 위험이 있다.
3. 나병원이 광주천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광주천 상류에서 환자들이 사용하는 옷세탁이나 채소 세척 및 기타 오물이 하류로 흘러 광주천의 오염이 날로 심하다.
4. 병원 주변에서 채소재배를 하는 중국인들이 환자들의 분변을 사용하여 문제가 있다.
5. 환자들이 재배하는 채소를 시장에 몰래 파는 예가 있다.
6. 정원은 132명인데 비해 600명 이상의 환자가 수용되어 있어 주택이나 식량 부족은 물론 예산이 부족하여 병원 경비에 허점이 있어 많은 환자들이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 시내를 배회하는 일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이상과 같은 6개항을 들어 강력하게 병원이전을 요구하고, 윌슨이 요청한 이주비 40,000원에 대하여는 병원부지 매각대금 10,000원을 제외한 30,000원은 국고에 요청키로 하여 도지사는 1925년 7월 23일 정무총감에게 요구하였으나 반액인 15,000원 만을 보조받게 되어 나머지는 도비 보조금 7,000원, 교회보조금 5,000원 기타 기부금 3,000원 등으로 결정되자 윌슨이 일년이내 이주할 것을 약속하고 병원후보지 물색에 나서 무안의 해안 지방을 물색하던 중 당시 매산학교 교장으로 있던 원가리 목사와 교회대표 및 지방유지 등의 협조 하에 전남 여천군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대지 4,000여평을 확보하여 1926년 11월 9일 이주허가를 받아 제1차 선발대 100명을 차출하여 ‘눈물의 이주’라 불렸던 병원 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동년 12월 2일에는 14만평으로 병원부지를 확장했다.
선발대는 100명 중에는 힘 좋은 장정들과 목수, 토수, 석수 등과 같은 기술자 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현재 애양반도의 중간지점에다 ⌜목수간 교회⌟라 불렸던 창고 모양의 건물을 먼저 지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목수일 하는 곳으로도 사용했다.
1928년까지 대체적인 이주는 하였으나 후속 마무리를 짓기위해 가정을 갖고있던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옮긴 것이 1932년이었다. 선발대가 출발할 때부터 마지막 이전이 완료될 때까지는 무려 6년이 걸렸다. 눈물 겨웁고 힘든 일이었다. 그것도 밝은 낮에는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산기슭이나 사람 눈에 띄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 가 밤에만 움직였던 것이다.
광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화순 너릿재를 넘어오다 한 여자가 환자가 사망한 일이 있었는데 동고동락하던 환자들도 시신을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자고 하였으나 윌슨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아서 이 여자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병원에 가서 병고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다같이 가서 그곳에 묻어줍시다”하면서 그 시신을 곱게 싸서 자기의 트렐라에 싣고 와 애양원에 묻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져 윌슨 원장의 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1921년 윌슨을 보좌하기 위하여 한국에 나왔던 웅거는 그 당시 어려웠던 일을 광주에 있으면서 처리했고, 윌슨은 순천에서 일을 진행시켰다. 선교 본부에서 두 군데에 병원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총독부의 반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비용의 일부는 ‘비더 울프’선교단의 모금에 의하여 충당되었으며 병원이름 역시 “비더 울프 레퍼 콜로니”라 하였다. 지금도 애양원에는 피독촌, 은성동(Flora Macdonald Village),다윗촌 등의 이름이 적힌 6척 크기의 돌기둥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1941년 선교사 추방령에 의해 미국에 돌아가 윌슨은 미국에 머물면서도 한국의 나환자들에 대한 애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과도 친분을 가졌으며 특히 카빌 요양소에서 사용하여 좋은 성과를 거둔 DDS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종전이 되자 맥아더 장군의 주선으로 1946년 1월 군용 수송기 C47편으로 한국에 온 것이다. 윌슨은 군정 한국 나병문제 책임자로 부임했다. 한국에 오자 마자 소록도를 찾았으며 그는 소록도와 애양원을 번갈아 출근하면서 업무를 처리했다. 또한 일제가 환자들을 쫓아내고 군사기지로 사용하던 부산 용호병원을 윌슨 부자는 이를 반환 받아 1,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병원으로 다시 세웠다.
이때 시민들과 대단한 충돌이 있었다. 그곳 환자들의 치료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소록도에서 환자들을 교육시켜 부산 용호병원에 보낸 일을 처리했다. 윌슨은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환자 치료에 임한 분이다.
전인 치료에 목표를 두고
1. 한센병 치료는 약물 만으로서는 완전한 치료를 할 수 없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 라 사회적 환경이나 여건등에 크게 좌우된다 생각하고 약물치료에 25% 역점을 두었다.
2. 정신적 치료에는 신앙교육을 통해 내세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갖게 했고, 기술교육(양동 이, 목수, 토수, 돌 깨는 일, 양토) 등을 통해 생활에 대한 자신감과 비전을 제시해 주 었다.
3. 사회교육과 계몽 등을 통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계몽지를 만들어 나누어 주기도 했으며 서신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한센병은 낫는다는 산 교육을 주기위해 1914년에는 처음으 로 한센병 치유자를 외원시켜 사회에 복귀하였다.
4. 다양한 종류의 운동을 장려하여 타병원과의 교류도 많이 가졌으며, 또한 연극이나 음악 콩쿠르 등을 통해 정신적 순화교육에도 힘썼다.
5, 환자들을 교육시켜 병원 일에 열중토록 하여 사회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6. 환자자녀 교육을 위해 초등학교를 봉선리에 세우기도 했으며 환자들을 교육하고 지도하 기 위해 환자들 가운데 30명을 선발하여 7명의 선교자와 목사님을 초빙하여 교육시키기 도 했다.
윌슨은 1880년 아칸소 주에서 태어나 1905년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대학 의대를 졸업하고 임상경험을 쌓은 다음 의료선교사로서 1908년 1월 우리나라와 광주에서 일을 시작했다. 1905년 놀란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진료소는 때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윌슨은 간이 진료소를 병원 급으로 발전시켜 1910년에는 엘렌그래함 병원이라 이름하고 원장으로 18년간 재직하면서 병원을 훌륭하게 발전시켜 나갔다.(지금의 광주기독병원)
윌슨은 1909년 엘리자베스 녹스와 광주에서 결혼했으며 윌슨 부인이 된 녹스는 윌슨보다 1년 먼저 한국에 나와 선교사로서 목포에서 일을 했다. 녹스 부인과의 사이에서 7남매의 자녀를 두었고 이들 다섯 중의 넷은 의사였다.
1948년 민정이양과 동시에 뒷마무리를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한 채 미국에 돌아간 윌슨은 월드 미션(Board of World Mission)책임자로 일하다 1963년 3월 14일 아침 83세를 향유하시고 주님 계신 곳으로 가셨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55년 3월 24일 늦게나마 그분의 훌륭한 업적을 가려 국민훈장을 추서했다.
추모사
목사 로버트 맨톤 윌슨, 의사
John Fairman Preston
위에 언급한 제목은 사랑하는 선교사 의사의 모습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묘사이다. 그는 출생, 양육 그리고 교육에 이르기까지 이 사역을 위하여 훌륭한 자격을 갖추었다.
아칸사스주 콜럼버스시(Columbus, Ark.)에서 스크틀랜드-아일랜드 혈통을 이어받아 1880년에 태어난 그는 대 가족의 장남으로서 기독교 가정의 가장 훌륭한 전통에서 성장하였다.
대학을 마치고(아칸사스 주) 그는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세인트 루이스(St. Louis) 시립 여성병원에서 인턴과정을 수료하였으며, 뉴욕에서 이비인후과 석사과정을 이수한 다음에 이어서 뉴욕 성경학교(Biblical Seminary of New York)를 마쳤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독일의 베를린과 뉴욕에서 외과의사 과정을 밟았다.
그는 1908년 2월에 한국에 도착하여 광주에서 의료사역을 시작하였으며, 진료소를 세우고, 1910년에는 제중원(Ellen Graham Hospital)을 세웠다. 솜씨 좋은 외과 의사이며 또한 행정가로서 그는 18년 동안 이 사역을 이끌었다.
그는 일찍이 곤궁에 처한 한센 환우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헌 누더기를 걸치고, 처량하게 버림받은 자들로서, 배고픔과 앞날이 안 보이는 절망과 친구도 없는 고독함을 겪으면서 시골 지역에 무리를 지어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1910년에 시(광주) 외광에 이들을 위한 집단 거주지를 세웠음 - 이 사역에서는 최초였다. 그로부터 15년 이내에 600명의 원우들이 함께 거주하였다. 광주로 모여들어 입원을 청원하는 숫자가 엄청난 비율로 많아짐에 따라 정부는 마침내 이들에게 바닷가로 이전하도록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길을 준비하고 계셨다. 엉거 목사(Rev. J. K. Unger:원거리)는 광주에서 교육 선교자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 사역에 예리한 관심을 보임ㄴ서 집단 거주지의 영적 사역을 전담해 주었다. 그는 고국으로 특별한 목적을 띠고 여행하여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였으며, 1925년에 순천선교부의 교육 선교사로 옮긴 다음에도 공로(公路)에 인접한 아름다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정부의 협력을 받아서 광주의 집단 거주지를 옮길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윌슨 의사는 기념비적인 결단을 내리고서 한센병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엉거 목사를 영적인 책임자로 삼고서 그는 새로운 사역에 뛰어 들었으며, 건축과 행정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졌다. 16년 동안, 전쟁으로 인하여 강제로 귀국할 때까지, 그는 이 사역을 발전시켰으며, 이 집단 거주지를 한국 내에서 모범적인 장소로 성장시켰다. 한센 환우들을 위한 그의 32년간의 사역이 끼친 영향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한 예로 그는 자신이 세운 집단 거주지의 900명보다도 몇배가 더 큰 정부 주도의 집단 거주지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 방면에서 그가 이룩한 특출한 사역으로 인하여 일본의 황제로부터 훈장을 서훈 받았으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근년에는 두 번이나 “남부를 위한 올해의 인물”로 지명되기도 하였다. 1929년에 그는 오치타(Oachita) 노회에서 목사(Evangelist)로 임직 받았다.
전쟁기간(태평양전쟁)중 그는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 시(Richmond, Va.)에 기거하면서 공중보건의, 시 전염병 예방의사와 검시관을 지냈으며, 가장 최근에는 의과대학응급실 책임자로 지냈다.
1946년 1월에 그는 한센 환자 사역에 대한 그의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아 미 군정청의 자문관으로 한국으로 되돌아갔다. 이 사역을 마치고서 그는 리치몬드로 돌아와 헨리스 구(Henrice country)의 공중보건의로 2년간 근무하였으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직책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40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1948년에 세계 선교회 주관으로 영예로운 은퇴 행사를 가졌다.
1909년에 광주에서 녹스(Miss Bess Knox)양과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면서 7자녀(5남 2녀)를 키웠으며 이들은 모두 훌륭한 기독교인으로서 결혼하여 행복하고 뛰어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다섯 아들 가운데 넷은 의사이다.
윌슨 의사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인격의 소유자이다. 그는 부드러운 대화, 평온한 성격, 동정적이며, 심오한 영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실천적이며, 도구를 잘 다루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곤 하였다. 야외 활동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사냥과 낚시를 즐겼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였으며 또한 아이들도 그를 따랐다.
1963년 3월 14일 아침에, 아들 요한(John)의 집에 머물던 사이에, 그는 손자들을 위하여 장난감과 집짓기 블록들을 수리하는데 바빴다. 오후 1시에 아들 요한의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심각한 뇌졸중 증세를 보였다. 그로부터 6일 후 그는 주님과 그리고 꼭 일년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와 함께 하기 위하여 떠났다.
긴터 파크 장로교회에서는 담임 목사인 한국에서 같이 선교활동에 전념하였던 커밍목사(Dr. Bruce A. Cumming: 김아열)의 도움을 받으면서 엄중한 장례 예배를 드렸다. 동료 장로들이 그의 운구행렬에 참여하였다.
그의 지상에서의 추억은 한국에 있는 윌슨 한센 거주지(R. M. Wilson Leprosarium)이다. 이들이 어려울 때 그가 도와주었던 수많은 환우들이 하늘나라 고향 집에서 무리를 지어 그를 맞이하였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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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감사합니다. 20MB가 넘지 않는데 이상하게 안되네요. 계속 편집에 편집만 ㅎ ㅎ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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