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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6월8일 목요일 [(녹)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수도회] 하느님을 만나러가는 사랑의 징검다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토빗 6,10-11; 7,1.9-17; 8,4-9ㄱ
† 복음 마르 12,28ㄱㄷ-34
◈ 오늘의 묵상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요즈음처럼
천문학이 발달하고 이를 통해 우주의 많은 별들의 존재를 밝혀낸다고
해도, 하늘은 절대자 하느님의 자리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러한 절대자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셔서 우리 곁에,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함께
생활하셨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고, 절대자요 초월자이신 분께서
우리 유한한 인간들 속으로 들어오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요 은총이지만, 또한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고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말씀을 들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첫째가는 계명으로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계명은 명령이 아니라 차라리 은총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 곁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주변의 형제 한
사람 안에도 하느님의 영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절대자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시어,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영을 발견하고, 서로
경외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이요, 우리
신앙생활의 첫걸음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사랑의 힘은 큽니다.
2017년 가해 6월8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제1독서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토빗기의 말씀입니다. 6,10-11; 7,1.9-17; 8,4-9ㄱ
복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이며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작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딸에 대한 사랑이 아주
각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열 살 된 딸이 큰 소리로 울면서
집에 들어왔습니다. 톨스토이는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지요. 딸은 울먹이며 말합니다.
“아빠, 저 심술꾸러기 아이가 막대기로 나를 때렸어요. 저 아이를
혼내주세요.”
이러한 상황에서 톨스토이는 어떻게 했을까요? 딸의 바람대로 때린
아이를 찾아가서 혼내주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속상했지만 웃으면서
딸을 꼭 껴안고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아빠가 그 아이를 혼내면 오히려 그 아이가 너를 더 미워할 거야. 그
아이를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네
사랑이 전해지면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도 않고, 오히려 더 친해질
거야.”
극성스러운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맞고 들어오면 바로 때린 아이를
찾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가정교육까지 들먹이면서 크게
혼을 내는 데만 집중하지요. 그러나 톨스토이의 말처럼 그렇게 혼을
냈다고 해서 문제가 잘 해결될까요? 오히려 친구 한 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요? 따라서 톨스토이가 딸에게 보여주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미움 대신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미움은
순간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 뿐이지만, 사랑은 진정한
승리를 우리에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힘은 이렇게 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사랑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해주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 사랑의 실천이 하느님께 드리는 어떤 봉헌보다도 훨씬 더 낫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을까요?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온 힘을 다해서 하고
있을까요? 혹시 내게 잘못한 이를 사랑으로 대하기보다는, 내게
굴복하고 고개를 숙일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의 힘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서 계속 우리의 삶 안에서 커다란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은 지금 내 안에서도 큰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요?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사랑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더욱 더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어느 날 닥쳐온 사건의 선물이지만, 우정은 함께한 시간의
선물이다(이진경).
성모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긍정은 위대하다(최천호)
어느 마을 다리 밑에는 걸인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다리 입구
쪽에는 기념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리를 세우기 위해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 걸인은 그 기념 비석에 침을 뱉으며 언제나 욕을 해댔습니다.
“에이 양심도 없는 놈들 돈 많은 것들이 생색내기는...”
그러나 한 걸인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참 고마운 사람들 아닌가. 우리에게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해주고 많은 사람을 건너가게 해주니 말일세. 나도 언젠가 이
사람들처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그 다리 옆에 새로 큰 다리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기념 비석에 새겨진 이름 중엔 늘 고마운 마음을 가졌던 그
걸인의 이름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넝마주의를 시작하여 열심히
일하여 마침내는 건재상을 경영하는 부자가 되어 기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침을 뱉으며 항상 욕을 했던 다른 걸인은 여전히 그 다리 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긍정의 힘은 위대합니다. 내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분명 행복해질 것입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겠어요? 긍정의 마음입니까? 부정의
마음입니까? 행복의 길을 선택하는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어제는 의정부교구 후곡성당을 다녀왔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을 만나러가는 사랑의 징검다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6월8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마르 12,28ㄱㄷ-34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0-31)
하느님을 만나러가는 사랑의 징검다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12,30-31) 이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계명임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마음이요 얼굴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뜻이며
생명이지요. 하느님 사랑은 인간 창조의 이유요 목적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발걸음이요 열정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인간의
양식입니다. 사랑은 정의의 열매이며, 평화로 이어지는 징검다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랑으로 창조되었고, 사랑을 위해
사랑 때문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관계가 단절될 때, 참 생명의 호흡은 끊기게
될 것이 뻔합니다. 하여 참 생명 안에 머물려면 사랑하는 도리 밖에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거저 주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은 영원토록 거저
주어집니다. 그것은 나의 조건이나 뜻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주어집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변함없이 내 삶에 개입하시어,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초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 살아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아끼고 배려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기준과 방식으로 서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율법을 철저히 지키듯이 온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여기에
적당주의나 대충주의는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먼저 전 존재를 걸고 자신을 던져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겠습니다. 우리 목숨은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사랑의 출발점도 그 힘도,
향하는 방향과 목적도 사랑이신 하느님임을 기억해야겠지요. 그 길목에
반드시 거쳐야 할 데가 이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증표요 주님을 만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징검다리입니다. 형식적이고 일시적인 이웃
사랑이나 자선행위 자선행위로는 그 다리를 건널 수 없을 것입니다.
혼신을 다해 "나 자신처럼”(12,31) 사랑해야 이를 수 있는 곳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남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무조건, 언제나,
아낌없이,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사랑해야겠지요.
이웃이 행복하고, 희망을 되찾으며, 인간의 존엄성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갈망하며 자신을 내어주는 타자중심의 사랑에 몰입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랑 가운데 얼굴을 드러내시며,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와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사랑을 회상하며, 그 사랑의 열정으로 서로를
사랑해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31)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6월8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31)
너무나 많은 것들을 사랑하려 애쓰는 우리들에게 계명의
우선적인 핵심을 다시 한번 간추려주십니다.
사랑이 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해야 할 하느님이 계시고
우리가 진정 사랑해야 할 이웃이 있습니다.
계명안에 담긴 하느님 마음을 다시 만나게됩니다.
사랑의 계명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해야 알게되는 사랑의 본질적인 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분명 여기에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사랑의 참된 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우리를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합니다.
사랑의 계명과 함께 걸어가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무엇이 우리를
살게하는지를 깨닫게됩니다.
사랑의 계명이 우리를 회개로 이끕니다.
우리의 삶과 끝까지 함께 해야 할 것이
사랑의 일차적인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할 힘이 분명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그럴수록 더 주님 옆에
2017년 가해 6월8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 12,28ㄱㄷ-34
그럴수록 더 주님 옆에
성경 속 많은 인물들 가운데 사라처럼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여인이
또 다시 있을까 싶습니다. 혼인 적령기가 되어 결혼식을 치른 사라는
결혼 첫날밤 세상에 다시없는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첫 날 밤에 신랑이
비명횡사한 것입니다.
어린나이에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런데 사라는 그런 변고를 한
두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이나 겪게 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동네
사람들의 뒷담화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멀쩡한 새신랑 잡는
귀신 처녀’로 널리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집안의 여종들조차 그녀를 두고 뒤에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녀가 겪었던
공포와 상실감, 슬픔과 트라우마가 얼마 컸으면 목을 매고 죽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부모가 눈에 밟혀 죽기 일보직전에 물러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 아드나의 심정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주님께서 벌을 주시려면 차라리 내게 주셨으면...내가 대신해서
죽었으면...’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계속되는 불상사 앞에 어머니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딸을 위해 매일 매순간을
간절한 기도로 보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기도를 마침내 주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라파엘 천사과 함께 토비아를 희망의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던 그녀가 딸을 향해 외칩니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 하늘의 주님께서 너의 그 슬픔 대신에 이제는
기쁨을 주실 것이다. 애야, 용기를 내어라.”(토빗기 7장 17절)
라파엘 천사의 손에 이끌려 ‘멀쩡한 청년들의 무덤’ 사라의 집에 들어선
토비야 역시 일생일대의 도전이자 모험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소문을 통해 사라라는 처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토비야는
갑자기 나타난 라파엘 천사, 그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사라의 집, 그리고
아버지 라구엘의 ‘무시무시한 간청’ 앞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주님께 충실했고 그분의 전지전능하심과 능력을 굳게
믿었던 토비야였기에, 두려움을 뿌리치고 용감히 그 유명한 ‘사라와의
신방’에로 들어갑니다. 사라의 부모가 신방을 나가자 토비야는 사라에게
말합니다.
“여보, 일어나구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토빗기 8장 4절)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아멘, 아멘.”
갑자기 들이닥친 청천벽력 같은 불운, 죽었다 깨어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신앙의 인물들은
(토빗, 사라, 토비야, 라구엘, 아드나) 마침내 주님으로부터의 큰 축복을
선물로 받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인생도 그들 인생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어렵사리 산 하나 넘으면 또 다른 높은 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힘겹게 시련의 파도를 이겨내면 또 다른 태풍이 우리에게 닥쳐옵니다.
방법은 단 한 가지...그럴수록 더 주님 옆에 딱 붙어있는 일입니다. 더욱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일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부활 제9주간 목요일
2017년 가해 6월8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 12,28ㄱㄷ-34
명동에는 계성 여고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교구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숙소에서 사무실을 갈 때 계성 여고 자리를 지나면 조금
빠르기 때문에 그 길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점심 먹고 사무실로
가려는데 외국인이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찾은 것 같아서
누굴 찾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외국인은 선물가게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선물가게는 가톨릭 회관에 있다고 알려드렸습니다. 작은
친절이지만 외국인에게 좋은 기억을 선물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가끔 교우들과 차를 타고 이동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주로 앞자리에 탑승을 하였습니다. 타고 내릴 때, 뒷자리의 문을
열어주고, 닫아 드렸습니다. 교우들은 미안해 하시면서도 저의 작은
친절을 기뻐하셨습니다. 차량을 이용하면 출발하면서 ‘주모경’을 함께
하였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가 될 수 있고, 차비를 대신하기도 하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아침 일찍 먼저 식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주방 봉사자들이 아직
출근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아침을 먹고 나서 깔끔하게 설거지를 해
놓고 가는 편입니다. 굳이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깨끗하게
설거지가 된 부엌을 보면 주방 봉사자들의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작은 시간이지만 즐거운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혼배 주례를 하면서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가
생명이 넘치는 이유는 끊임없이 아래로 물을 내려 보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나누면 더 많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 해 줍니다.
사해가 생명이 살 수 없는 바다가 되는 이유는 끊임없이 받기만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해 줍니다. 부부는 받기만 하려고 해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내어 줄 때,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이야기 해줍니다. 또 하나 물 이야기를 해
줍니다. 두물머리입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서로 다른 곳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두 강은 두물머리에서 만나고 하나의 강을 이룹니다.
그리고 넓은 바다로 나가게 됩니다. 혼인은 배우자가 서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는 이제 함께 더 넓은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서로만 바라보면 기대하게 되고,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 서로 도울 수 있고, 힘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오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에 대한 해답이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자존심이다.
깃대에 깃발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깃발에 바람이 없으면 더
무의미하다. 방황은 사랑의 깃발에 부는 바람이다.
진정한 사랑은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이고
가치 있는 사랑은 오직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며
헌신적인 사랑은 되돌려 받을 생각 없이 하는 사랑이다.
아름다운 사랑은 두 영혼이 하나가 되는 사랑이며
용기 있는 사랑은 사랑하고픈 사람과 나누는 사랑이며
순간의 사랑은 마음이 배제된 사랑이고
영원한 사랑은 마음이 합치된 사랑이며
끝없는 사랑은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나누는 사랑이다.
애절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비굴한 사랑은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사랑이고
외로운 사랑은 짝사랑이며
아쉬운 사랑은 미련이 남는 사랑이다.
고독한 사랑은 혼자서 나누는 사랑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 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온 몸으로 사랑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6월8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마르12,28-34)
온 몸으로 사랑하라.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20년 (폴란드의 철도 기술원 그르제프스키(65))만에,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12,30.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을 위해 손해 볼 작정을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고
변명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것,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하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더 나은 이유는 번제물보다 더 큰 자기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생각할 수 있는 소나
양, 염소를 통째로 하느님께 바쳤던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정신을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 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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