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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한국사상 스크랩 가시마 노보루의 일역 「환단고기」 서문 전문공개 2
내생애 추천 0 조회 90 16.06.13 17: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세 번째 글



< 단군세기(檀君世紀)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니기하야히)과 산와(山窩) >


「환단고기」<단군세기>에 등장하는 언파불합(彦波弗哈)이 우가야 왕조의 시조인것과,
또 한 사람, <단군세기>와 <마한세가>에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이라는 왕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서술했다.

이 협야후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도 쓰여있다.
또한 <북부여기>에는, 협야후(陝野侯) 의 자손인 듯한 협보(陜父)라는 왕(또는 왕족)이,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덕우(德友)가 되고,
후에 남하하여 웅본(熊本)에서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우고,
이것이 「고사기(古事記)」의 니기하야히에 상당한다고 생각된다.

<북부여기>는 상하 2권으로 나뉘어,
상권은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해모수(解慕漱) 왕조로,
후에 동부여의 해부루(解夫婁) 왕조가 된다.

하권은 동명왕(東明王) 왕조로, 고구려의 주몽(朱蒙)에 이어져 있다.

그리고 하권의 말기에 "협보(陜父)가 등장하는데,
「왜인흥망사」의 기록과 병행하면,
이 왕조는 "배폐명(裵幣命)"  또는 "완의서(宛의 徐)"씨를 시조로 하는
예국(濊國) 즉 서가은(徐珂殷) 왕조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폐명(裵幣命)이 우리들의 니기하야히의 시조라는게 되는데,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실마리로써 산와(山窩:움집,굴)를 들어보자.

산와의 뿌리는 극히 흥미로운 문제이다.

그것은 곤란하지만, 전혀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산와중에 석천청(石川淸)이라든가, 우전천일랑(隅田川一郞) 등, 내 천(川)의 이름을 성씨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수서(隋書)」<실위전(室韋傳)>에,
'심말달실위(深末 室韋)는 천(川)의 이름에 이어 부족명을 붙인다'고 되어있고,
또한 보루네오의 다와야크족 중에서도 내 천의 이름을 부족의 성(姓)으로 하는 게 있다.

더욱이,
데칸고원 북동부의 쵸타나구풀 고원의 문다족 가운데, 보도어(語)족은
내 천(川)을 "테" 또는 "데"라 하여,
천(川)의 이름을 데블, 데크,데힌, 데혼, 데본, 데샤,데판, 데무라, 테·라오, 테스타 등으로 말하고,
이것을 부족명으로 한 것 같다.

산와(山窩) 중의 오랜 유예부족(遊藝部族)에 "테코나"라는 여예인(女藝人)이 있지만,
이것은 "천(川)의 여자(女)"의 뜻이 아닐까.

또 고구려에
"수척(水尺), 재인(才人), 백정(白丁)"이라는 비 농경부족이 있어,
각각 우리나라의 산와(山窩), 유예(遊藝), 백정준인(白丁 人)(에타)에 상당한다.

재인(才人)은 「일본서기」에도 쓰여져 있지만 천(川)의 사람의 의미이다.
"상카"라는 말도 힌두어의 "상가"로, 원래는 이해를 같이하는 동료의 의미로,
후에 불교도, 공화제(共和制)라는 말로 변했다.

쵸타·나구풀 고원의 문다 족은 도루멘을 선조숭배의 장(場)으로 하여
와까모노야토(若者宿:동네 젊은이들이 밤에 모여 일도 하고 이야기하는 숙소, 사랑방)를 갖는 것도 있고,
"신·봉가"라는 최고신을 갖는다.

또한 세습에 의한 제사적 추장과 세속적 추장을 갖고, 후자를 "문다"라고 한다.
"신·봉가"는 화명신(火明神:홍아신)이고,
"문다"는 산와(山窩)의 아문다 무리(衆)이다.
이와같이 생각하면, 산와(山窩)의 뿌리는 문다족으로 봐도 좋다.
문다어(語)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하나로, 몬 크멜어, 카시어,니코발어, 등과 같은 계통이다.

현재 문다족은
쵸타·나구풀 고원을 중심으로, 웃탈·부라데슈 주(州)의 일부의  마하데오 구릉, 히말라야 산지, 벵갈 등에 약 70만인 정도 있는데,
예전에는 인도 전역을 덮고 있었다.

밀림과 죽수(竹藪:대나무 덤불 늪) 가운데서 생활하고,
현재도 수렵과 야생식물에 의해 생활하고 있다.

이 곳도 산와(山窩)와 매우 닮아 있다.
문다족 중의 콜 족이라는 이름은 돈(豚) 족이라는 의미로,
아리아인이 붙인 경멸스런 명칭이지만,
부여(扶余) 6축(畜)의 저가(猪家:돼지 저)나, 우리나라의 저감부(猪甘部)(安曇海人)와 관계가 있는 듯 하다.

또한 원시불교에는
"크샤트리아, 바라몬, 바이샤, 바이샤, 슈드라, 챤다라, 부츠쿠사"라는 6개의 카스트(계급)가 있는데, 이 중 챤다라는 도살, 부츠쿠사는 오물 청소자였다.
챤다라는 앗삼족이 있던 쵸타·나구풀의 주민을 의미하고, 고오베(神戶) 시 등의 미해방부락의 장전족(長田族)의 뿌리는 아닐까.
장전족은 산이현(山梨縣)을 거쳐 회진(會津) 지방으로 이동했는데,
이것은 졸저 「왜(倭)와 진국(辰國)」에서 서술했다.

그런데,
산와(山窩)에는 제철에 관한 전승이 있지만, 문다족은 원래 철의 문화를 이루고, 인도에 철을 들여 온 것은 아리아인이었다.

전(前) 13세기 이후, 철제 무기를 갖고, 기마전(騎馬戰)을 특기로 하는 아리아인이 몇 갠가의 그룹이 되어 인도에 침입했다.
아리아 어 최고의 문헌 「리그베다」에 의하면, 아리아인은 우선, 오하(五河) 지대의 펀잡에 침입하여, 선주민을 정복했는데, 이 선주민의 언어는 드라비다어 혹은 문다 어였다.

처음에 있던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을 지중해 방면에서 침입한 드라비다 어족이 쫓아내(驅逐)  인더스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문다족과 같은 오스트로·아시아어 계 제 족은 히말라야 산계(山系)에서 갠지스하(河) 유역에 분산되고, 더욱이 그 후 침입한 아리아 어족 때문에 양(兩) 언어(語)가 동방과 서방 인도로 쫓겨나게(驅逐) 되었다.

「고사기(古事記)」의 와니 조작 신화에서도,
이 아리아 족의 침입과  드라비다 수군(水軍)의 관계를 전하고 있다.

(참고 :와니(窩泥:움집와, 진흙니)는
漢족에게 동화된 양자강 유역의 동이 9족 계열인 묘(苗)와
요( )계의 분파인 라라면전(羅羅緬甸)계에서 다시 분파된 라라(羅羅)족이
본 줄기를 제외하고 곁가지 분파로 율속(栗粟), 라무(羅 :별이름 무), 와니(窩泥:움집와, 진흙니) 등의 부족으로 나뉜 3부족 중 하나다. : 안원전)

4국의 "금비라(金毘羅)" 신은,
실은 갠지스 하(河)의 와니의 "콘피라"로, 염포수군(鹽飽水軍) 등의 신앙였지만,
앞으로도 알 수 있듯이,

와니는 사신(蛇神) 신앙
(동이족 복희씨의 인두사신과 확실한 연계를 상징.
임 혜상은 양자강 유역의 사천성, 절강성 등의 동이 묘요계, 형오계, 백월계가 인도, 인도챠이나로 내려갔음을 고고학적, 문화인류학적으로 밝히고 있음을 참고하라 : 안원전)

을 갖는 드라비다족의 수군이었다. 와

니 조작 설화의 원형은, 말레 반도에 있어 '사슴이 솔로몬 왕의 명에 의해 와니를 일렬로 줄을 세워 정렬시켰다'로 되는데,
「리그베다」에서는 사슴을 아리아인의 왕권으로, 와니(드라비다 수군)를 속인 사슴이란 아리아인을 가리킨다.

정확히 말하면, 혼혈 아리아인의 수군 에브스인 또는 페니키아인이다.

전(前) 18세기-17세기에,
우가릿드, 알와드, 비브로스, 베이루트, 시돈, 틸스, 아츠코 등에 아리아·후츠리 계 제족과 크레타·미케네 족이 침입하여, 선주족 야페테 제 족과 혼혈했다.

그래서 이 자손인 에브스인이나 페니키아 인은 혼혈 아리아인였다.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비데가·마타바는 입 안에 성화(聖火)를 갖고 있다.
성화(聖火)가 입에서 나와 동방으로 향하고, 대지를 태우면서 나아가 결국 사다니라 하(河)에 다다랐다.
그리고 불(火)은 아타바로, "너의 주소는 더욱 더 동방이라"고 했다.
이 하(河)는 지금도 아타바의 자손인 코사라인과 비데하인의 경계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코사라와 비데하는 인도 16왕조의 국가로,
앞에 서술했듯이, 코사라란 문다어(語)이고, 코사라의 수도 아요디아(아우도)는, 페니키아인의 정(町:밭) 알와드여서,
이 신화는 펀잡 아리아인과 페니키아계 알와드인이 문다족이 사는 코사라에 침입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산와(山窩)는 성화(聖火) 신앙을 전하고, 그 조상은 천화명신(天火明神)이다.  

앞서 문다족의 "신·봉가"가 화명신(火明神)이라 했지만,
문다족은 수우(水牛:신농 도등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을 갖고,

한편 거란족은 "키키타에"라는 우신(牛神)신앙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소민장래(蘇民將來) 신앙과 동일한데,
그 뿌리는 카난의 지나간 축제이다.
천화명신(天火明神)이라는 신명(神名)에서도 성화(聖火)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천화명신(天火明神)은 "니기하야히"라고도 하고,
「기기(記紀):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이계(異系)의 신화지만,
「구사기( 事紀)」에서는 중심적인 신이었다.

「구사기( 事紀)」는 천황가 이전에 니기하야히의 일족이 야마다이국(邪馬臺國)을 세운 때의 사서였지만,
후에 백제인의 환무(桓武)가 만든 「서기(書紀):일본서기」에 맞춰 개찬되었다.

그 원형은 개찬 후의 10권본이 아니라, 「30권본 구사기」에 남아있고, 삼중정량(三重貞亮)이 뛰어난 연구를 남기고 있다.

그 천신본기(天神本紀)는,
니기하야히의 선단(船團)에 대하여, '읍취(揖取)·하도조(河刀造)의 조천마량신(祖天麻良神), 선자(船子)·단야씨(鍛冶氏:쇠불릴 단, 야금할 야)의 조천진진신(祖天津眞神), 천진마량신(天津麻良神), 천진적마량신(天津赤麻良神)'이라고 쓰고 있지만,

"단야씨(鍛冶氏)의 아마츠마라"란 제철부족인 마라족을 나타내고 있다.

단야 인이란 아리아인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단야씨의 선조를 이끈 "니기하야히"는 아리아인이어야만 하지만,
메르츠하 인(人)은 카르데아 또는 페니키아 계의 혼혈 아리아였다.

한편,
산와(山窩) 문자는 브라흐미·카로시티 문자의 계통였지만,
전자는 페니키아인의 문자이고,
후자는 아케메네스·페르시아가 마가다에게 전한 문자였다.

문다족의 땅 코사라에 페니키아인이 침입했다고 가정하면, 그때 문다족은 페니키아 문자를 배웠을 것이다.


< 가시마 노보루의 일역 「환단고기」 서문 전문공개(4) >

<「단군세기」-왜한(倭韓) 양족과 솔로몬의 선단 >
  

일본에 일본판 「환단고기」를 번역소개한 가시마 노보루는
일본사의 혁명적인 대륙사와 문명서래설을 보여준다.

다음의 「환단고기」 서문 내용 중

- "북왜, 남왜설"에 대한 내용과
- "<단군세기(檀君世紀)>-단군조선의 실크로드, 인도지배" 내용 및
- "단군세기(檀君世紀)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니기하야히)과 산와(山窩)"에 대한 내용,
-  "「단군세기」-왜한(倭韓) 양족과 솔로몬의 선단",
- "<북부여기(北夫餘紀)>-단군조선과 시황제(始皇帝)"에 대한

대륙사관적 견해를 들어본다.

중요한 것은 이 학설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 전에
가시마는 일본인 학자로서 「환단고기」를 100% 인정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사를 북왜설과 서래설의 대륙사로 끌어올리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사관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국내 **지 ** 사학자들에게 좋은 경종을 울려 줄 것이다.

참고로
그간 강단 **사학자군과 재야 민족사학계 사이에 「환단고기」의 진위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어왔음에도 막상 일역판 환단고기의 역자 가시마가 쓴 다음의 내용은 필자(안원전 선생님-운영자 주)가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것이다.

네 번째 이야기


<「단군세기」-왜한(倭韓) 양족과 솔로몬의 선단 >


한국의 원리운동(통일교를 말하는 듯. 이는 결코 올바른 민족정사가 아님을 알고 이해하기 바란다:안원전)은 한민족의 뿌리를 유대인으로 생각한다.

일본에서도 진광교(眞光敎)는 진(秦)의 시황제를 유대인으로 생각한다.
이것을 인정하면, 일본의 진(秦) 씨는 진(秦)의 망명자이기 때문에, 일본인의 뿌리도 유대인이라는 것이 된다.

이들의 주장은 모두 옳지만, 정확히는 앞에 서술했듯이, 진(秦) 왕조는 박트리아의 유대인이다.

그 외, 전(前) 7세기 경부터 규슈(九州)의 우좌(宇佐)에 동표국(東表國)이라는 에비스 인의 국가가 있었지만,
이 에비스 인은 카난의 에브스 인으로,
솔로몬 왕의 타루시시 선(船)을 움직인 사람들이다.

또한, 와니 조작신화의 록(鹿:兎)이 솔로몬의 명을 받았다면, 대물주명(大物主命) 즉, 요동의 공손도(公孫度)와 그 왕녀 비미호(卑彌呼)는, 원래 솔로몬 왕의 수군였다는 것이 되는데, 잠시 이것을 생각해 보자.

「환단고기」는
'전(前) 2천 년경의 우수주(牛首州)의 예읍(濊邑)의 추장 소시모리의 자손을,
전(前) 8세기 경 협야후(陝野侯) 배폐명(裵幣命)이라는 왕이 나와,
삼도(三島:의 왜인)을 평정했다고 쓰고 있지만,

이 "협야후 배폐명"은 "니기하야히"의 선조이다.

2 개의 왕명(王名)은 페니키아 왕으로 읽을 수 있는데 어떨까.
또한 슈메르 어로 소를 우르라고 읽기 때문에,
우수주(牛首州)는 우르국(國)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시모리"는 어쩐지 우르 왕 슈르기인 것 같다.

우르의 해인(海人)은 카르데아 인으로, 페니키아인의 조상으로 불리니까, 니기하야히의 조상 선조가 우르 왕이라도 이상하지 않다.    

한편,
전(前) 2000년의 우르의 카르데아인의 자손이,
전(前) 1000년 이후의 페니키아인이 되고,
코사라에 침입하여 문다족을 추종하여,
일파는 말레이 반도에서 북상했지만,
다음에 그들이 나타난 것은 하남성(河南省)이다.

「사기」<진(秦)본기> 소양왕(昭襄王)의 조(條)에
'33년, 진(秦)의 객향(客鄕)의 호상(胡傷)이 위(魏)의 권(券), 채양(蔡陽), 표두(表杜)(모두 하남성)를 공격하여 이를 뺏었다.

또한, 위(魏)의 장(將)·망묘(芒卯)를 화양(華陽)에서 쳐부수고 목을 참수한 것이 15만이었다.

위(魏)는 진(秦)에 남양(南陽)을 바치고 화목했다.
34년, 진(秦)은 위(魏)에 한(韓)의 상용(上庸)의 땅을 주어 일군(一郡)으로 하고,
남양에서 관(官)을 빼앗긴 신(臣)을 이주시켰다.
35년에, 한(韓), 위(魏), 초(楚)를 구하여 연(燕)을 정벌하고,
처음으로 남양군(南陽郡)을 두었다.'

「사기」의 기년은 정확치는 않으나
전(前) 4 세기의 말에서 전(前) 3세기 초두(初頭)이다.

그런데,
만주에 있었던 북왜인의 자손의 거란민족의 사서인 「왜인흥망사」 제 31장에는,
'완(宛)의 서(徐), 바다를 건너, 박진(舶臻)하고,
은(殷:箕氏朝鮮)에 의해, 완난(宛難)에 거(居)해, 땅을 열기를 수천리,
현모달(弦牟達)에 세우고, 곤막성(昆莫城)이라 칭하고, 나라를 서가은(徐珂殷)이라 하다' 했다.

여기서 "완(宛)"이라는 것은 남양(南陽)의 제철기지여서,
「사기」와 합치면 완(宛)의 서(徐)는 위(魏)의 제철부족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가은(徐珂殷)이란, 서(徐)씨의 예국(濊國)인데,
「왜인흥망사」는 예국(濊國)은 후에 부여(夫餘)가 되었다고 쓰여있다.

따라서,
부여(夫餘)가 북방 기마민족이란 것은 새빨간 조작이고,
소련의 모략적인 반설( 說) 이다.

「환단고기」<삼신오제본기>에는
'옛부터 부여(夫餘)에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라 되어있고,
「위지(魏志)」에는, '마한(馬韓)은 말 타지 않고'
또한 '왜는 소, 말이…없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부여를 시작으로 마한도 왜도, 결코 기마민족이 아니다.
말을 타기때문에 기마민족이라 한다면, 아메리카 인디안도 기마민족이 되겠지.

여기서, 마지막에 서(徐)의 의미지만, 카르데아인의 "지아"는 아닐까.
그렇다면, 역시 니기하야히는  카르데아인의 자손인 페니키아왕으로,
이 일족은 말레이 반도에서 하남성(河南省)에 들어가고,  
진(秦)에 져서 후에 만주로 이주하고,
거기서 예국(濊國)-북부여를 세운 후, 남하하여 왜왕이 선 것이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북부여의 왕족 협보(陜父)가 남하하여 웅본(熊本:구마모토)에 웅습성(熊襲城)을 만들고,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워 일향(日向)의 안라국(安羅國)과 연합하여,
야마다이(邪馬臺)국이 되었다.

이의 협보가 신무(神武:부여왕 尉仇台)를 구한 "니기하야히"이다.
「구약성서」는 누누이 우르의 카르데아(갈대아) 인을 유대인의 선조라 말한다.
또한 카르데아인은 페니키아인의 선조였다.  
따라서 우리들의 니기하야히가 페니키아인이라면,
그것은 유대인의 수군(水軍)였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세(伊勢) 지방에서는 오늘날도 소민장래(蘇民將來)의 예의범절을 믿고 있지만,
일본각지에 전해지는 소민장래(蘇民將來)의 신앙은 원래는, 유대인의 축제가 그 뿌리였다.


「왜인흥망사」 제 15장에 의하면,
거란의 샤만은, 소민장래의 신앙을 갖고, 우두신(牛頭神)으로 분장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두(牛頭)의 바알 신이지만,
동시에 우두천황(牛頭天皇) 스사노오노 존(尊)이었다.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천조라도, 바알의 처(妻)의 아나토우랄토 왕 아라메의 복합신였다.
또한 기이(紀伊) 반도를 "귀국(鬼國)"이라 쓴 것은, 우두(牛頭)신앙의 우각(牛角)때문으로, 이 땅은 원래 페니키아인의 기지였다.

단군환인이
다곤, 환웅이 바알인 것도 이미 서술했지만,
「왜인흥망사」에서는 환웅을 "시우스사카" 즉,"스사노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세(伊勢)음두(音頭)가 유대어이고,
신궁에 "다비데의 성(星)-다윗의 별"이 있던 것도 결코 이상하지는 않다.

비밀리에 속삭여지고,
게다가 모든 대중들이 아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메이지(明治) 천황이 외궁의 신체(神體)를 조사했더니 유대의 유품이 있었다고 하고,
또한 삼유예(森有 )가 내궁(內宮)을 조사하니까, 유대문자가 있었다.  

전(前) 1천년경의 멕시코에 유대문자와 타루시시 선(船)의 유물이 있는 정도여서,
일본열도에 그것이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헤로도투스는 전(前) 6세기에 페니키아의 수부(水夫)가 파라오·네코의 명(命)에 의해 항해한 것을 서술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홍해에서 나와 인도양에 들어가,
2년 후에 라큐레스의 주(柱) 즉, 지브랄탈 해협에서 지중해로 돌아왔다.

그래서 항해 중 태양을 우측으로 봤다고 하고 또한 대륙을 환항(環航)한 것이다.
이것은 동방으로 나아가 태평양을 건너, 미 대륙을 환항(環航)하고, 대서양을 건너, 지중해로 돌아온 것을 표시하고 있다.

고대 오리엔트와 인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앗시리아 여왕 세미라미스,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 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더욱이 옛적, 기원전 2500년 이후,
라가슈나 앗카도의 상인은 회전인장(回轉印章)을 갖고 인더스나 반첸에 진출하고 있다.

중국의 은(殷)도 이들 문화와 민족의 이동에 의한 토코로덴 현상(우무(토코로덴)가 틀에서 줄줄줄 자연스럽게 힘안들이고 뽑여져 나오는 현상)이지만,

이것은 졸저 「반첸·왜인의 뿌리」에서 상세히 서술했다.


< 가시마 노보루의 일역 「환단고기」 서문 전문공개(4) >

< <북부여기(北夫餘紀)> - 단군조선과 시황제(始皇帝) >
  

일본에 일본판 「환단고기」를 번역소개한 가시마 노보루는
일본사의 혁명적인 대륙사와 문명서래설을 보여준다.

다음의 「환단고기」 서문 내용 중

- "북왜, 남왜설"에 대한 내용과
- "<단군세기(檀君世紀)>-단군조선의 실크로드, 인도지배" 내용 및
- "단군세기(檀君世紀)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니기하야히)과 산와(山窩)"에 대한 내용,
-  "「단군세기」-왜한(倭韓) 양족과 솔로몬의 선단",
- "<북부여기(北夫餘紀)>-단군조선과 시황제(始皇帝)"에 대한

대륙사관적 견해를 들어본다.

중요한 것은 이 학설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 전에
가시마는 일본인 학자로서 「환단고기」를 100% 인정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사를 북왜설과 서래설의 대륙사로 끌어올리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사관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국내 **지 ** 사학자들에게 좋은 경종을 울려 줄 것이다.

참고로
그간 강단 **사학자군과 재야 민족사학계 사이에 「환단고기」의 진위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어왔음에도 막상 일역판 환단고기의 역자 가시마가 쓴 다음의 내용은 필자(안원전 선생님-운영자 주)가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


< <북부여기(北夫餘紀)> - 단군조선과 시황제(始皇帝) >


앞에 서술했듯이,

<북부여기>는,
단군조선의 말기에 '5가(加)의 백성이 (秦王) 정(政:진시황 이름)에 따랐다'고 서술하고 있다.

진(秦)의 지배는 일관되게 장성(만리장성) 밖에 못미처,
단군조선의 5가(加)가 진(秦)에 흡수되었다면,
그것은 장성의 내측에 있던 것이다.

이 부분의 중국사는 전혀 엉터리로 신용할 수 없다.

<삼성기전(三聖紀全)>은
한인(韓人)이 정(政)을 저격했다고 쓰고 있지만,
이것은 「사기(史記)」의 연(燕)의 암살자 형가(荊軻)의 모델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주(周) 전국(戰國)의 시대에 조(趙), 위(魏), 한(韓)이라는 세 국가가 있어,
이것을 3진(晋)이라 하는데,
이 중 한(韓)은 낙양을 중심으로 하고,
위는 남양(南陽) 완(宛)의 제철부족의 서(徐)씨를 지배하고,
조(趙)는 중산국(中山國)의 제철부족의 탁씨(卓氏)를 지배하고 있다가
후에 3진(晋)은 모두 진(秦)의 공격에 굴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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